• 문서
  • 토론
  • 읽기
  • 원본 보기
  • 역사 보기
한홍구
최근 수정 : 2019년 7월 28일 (일) 09:08

한홍구(韓洪九, 1959년 7월 16일 ~ )는 김일성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이다.

가계와 약력

한홍구는 출판사 일조각(一潮閣)의 창업주 한만년(韓萬年, 1925~2004)의 네 아들중 막내이며, 조부 한기악(韓基岳, 1898~1941)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고, 후에 동아일보(東亞日報) 창립에 참여하였으며[1], 조선일보(朝鮮日報)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모친 유효숙(兪孝淑)은 제헌헌법을 기초하고 야당 당수를 지낸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1906~1987)의 딸이다.

서울대 국사학과(1978~1984년)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1984~1988년)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89 ~ 1999년간에 미국 워싱턴대학교 대학원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투쟁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2][3]

  • 박사학위논문 : Hong-koo Han, 《Wounded Nationalism: The Minseangdan Incident and Kim Il-Sung in Eastern Manchuria》 (PhD diss., University of Washington, 1999)
한홍구, 《상처받은 민족주의 : 동만주의 민생단사건(民生團事件)과 김일성》

지도교수는 제임스 팔레(James B. Palais, 1934-2006)였다.

현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이다.

창간 당시의 동아일보에서 활동했던 조부 한기악이 일찍 작고한 관계로 한만년(한홍구의 부친) 등 그 아들들은 동아일보 사주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의 학비 지원을 받아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1]. 그러나 김일성에 빠진 한홍구가 자주 한민당(韓國民主黨)과 동아일보를 극우라며 비난하는 것은 배은망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홍구가 동아일보를 찬양하는 경우는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사건 당시 호외를 간행하며 김일성(金一成) 이름을 보도한 것에 대해서 뿐이다. 한홍구는 이 호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며, 이 김일성이 바로 북한 김일성이 맞으므로 그가 진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넌센스이다. 보천보사건은 별로 중요한 사건도 못 되어 곧 잊혀졌고 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도 아니다.[4] 더구나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가짜가 맞다. 보천보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고 나서 자신의 항일공적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한 때문이다.

논란

그는 김일성을 미화하거나 좌파적인 관점의 한국사 관련 글과 논문, 책을 많이 써서 논란이 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오늘날 한홍구가 한국에서 누리는 자유와 경제적 풍요는 그가 극도로 비방하는 이승만, 박정희 때문에 얻어진 것이지, 그가 찬양해 마지 않는 김일성 때문이 아니다. 한홍구는 자기 소신대로라면 마땅히 참으로 많은 것을 성취한 김일성 일족 치하의 북한 주민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누려야 할 것인데, 너무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을 비방하고 이승만, 박정희를 찬양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태극기는 외세에 의해 태어난 것”...."김일성은 '20세기형 민족영웅'"
"애비가 새삼 발견한 아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슬프게도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미련한 인간 그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혹시라도 자식이 제 미련함을 끝끝내 깨닫지를 못한 채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제 인생을 낭비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악몽과도 같은 시나리오다"
서울대 사학과 총동창회는 신년하례회에서 자랑스러운 사학인상 국사부문 수상자로 성공회대 교수 한홍구(56)를 뽑았다.

한홍구의 춘추필법

똑같은 사료로도 정반대의 해석도 나올 수 있으므로, 역사적 맥락을 여러모로 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지만, 한홍구는 자신만의 선악기준으로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을 춘추필법이라 부르는 것 같다. 불리한 사료를 제외하는 방식으로 사실만을 말하면서도 얼마든지 역사조작이 가능하다. 요즘 언론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뉴스는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기사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중을 호도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이다. 거짓 보도는 하지 않았지만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김일성에 대한 한홍구의 춘추필법

김일성은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 영웅(?)[5]
스탈린 앞잡이잖아!!![6]

한홍구는 가짜 김일성을 오늘날 학계에서 진짜로 둔갑시켜 놓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사료를 좀 찾아보기는 한 것 같지만, 불리한 자료는 찾아보지 않았거나, 외면하고, 인용하는 경우에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김일성이 어떻게 해서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만, 한홍구는 그의 이런 치부는 철저히 외면하고, 소련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그가 마치 항일투쟁의 영웅이라서 북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지도자로 선택한 듯이 말한다. 소련과 김일성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해방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체제와 지도자 선택의 권리를 가져보지 못한 채 70년 이상 김일성 일족의 노예로 살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김씨 일족 때문에 억압받는 북한 주민들의 참상에 대해서는 눈감고 주야장천 노예주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이 한홍구식 춘추필법이다.

그는 2004년 한 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김일성은 우리 민족이 가장 암울한 상태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많은 것을 성취한 지도자' '김일성은 귀족 영웅이 아닌 자수성가형 민족 영웅' '혁명의 창건자이며 부국강병에 기초한 근대화를 추구한 20세기형 민족주의자이자 철저한 실용주의자' 등 김일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 정치학자는 "일제 강점기 때 유행한 '낭만적 영웅주의' 관점에서 김일성을 평가하는 듯하다"고 했다.
10주기에 되돌아보는 세기의 인간…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김일성은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 영웅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에 대한 한홍구의 춘추필법

한홍구는 박헌영이 1946년 1월 5일 외신 기자회견에서 "소련 단독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한 발언 때문에 벌어진 논란에 대해 황당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박헌영의 문제의 외신 인터뷰 발언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46년 1월 15일 아침 7시 5분부터 국내에서 청취된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서였다. 한홍구는 당연히 영어 방송인 줄 알고 국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니 미군정청이 이에대한 보도자료를 만들어 배포하고 신문들이 이를 보도를 하여 문제가 발생했고,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뉴욕 타임즈에 실리지도 않은 기사를 실린 것처럼 방송했으므로, 여기에는 기사를 쓴 존스턴 기자와 미군정청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한 음모가 개입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의 기사는 1월 10일자 뉴욕타임즈에 분명히 실렸지만[7] 한홍구 본인이나 국내 연구자들이 이 기사를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므로, 샌프란 시스코 방송이 없는 기사의 내용을 조작해서 방송했다는 주장은 어이없다. 또 문제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영어 방송이 아니라 단파로 송출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이며, 이를 서울중앙방송이 중계하여 국내 사람들이 듣게 된 것이므로, 미군정청이 한국인들이 한국어도 못 알아들었을까보아 보도자료를 만들어 배포해서 국내에 알려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더 황당하다. 당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서울중앙방송이 매일 아침 30분간씩 국내에 중계방송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이 편성되어 있었다.

사료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남들이 떠드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근래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연구 결과와는 달리 그들이 찾아내지 못한 자료들까지 찾아 확인해 보면 박헌영이 그러한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며, 발언의 파장이 커지자 이를 무마하려 거짓으로 자신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며, 기사를 쓴 존스턴 기자와 미군정에 책임을 돌리려고 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박헌영이 이런 발언을 한 배경은 김일성과의 지도자 경쟁 때문에 소련에 잘 보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신에만 보도되어 소련에 알려지기를 바라며 한 인터뷰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는 바람에 박헌영은 치명타를 입고, 궁지에 몰리게 된다. 1946년 이른 봄에는 이미 남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박헌영보다 김일성 대한 지지가 더 높아졌다고 한다.[8][9] 물론 박헌영 아닌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운 소련의 의중을 맹목적으로 좇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특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각주

최근 바뀜
자유 게시판
+
-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