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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최근 수정 : 2019년 9월 23일 (월) 22:02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주요 업적으로는 잘 알려진 새마을 운동,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산림녹화등 이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 추진한 중화학공업화 등의 경제 개발정책은 후에 대한민국의 중공업, 제철업의 발달에 큰 도움을 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기에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의 이륙을 달성하였고,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는 등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pp. 89~118 : 박정희 대통령 연보 ("파일보기"에서 pdf 파일 원문 보기 가능)
박정희 전 대통령

대통령이 되기 전

생애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은 과거에 동학농민봉기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경북 문경에서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복무하였다. 평소 군인이 되고 싶었던 박정희는 형인 박상희의 조언을 받아 1940년 만주국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42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다. 1944년에 만주국 만주군 장교로 부임하였으나, 곧 해방이 되어 귀국하게 된다. 2000년대 이후 급성장한 진보세력들이 만주국 군관학교 입학부터 만주군 장교 부임 시절 때 박정희가 친일 행위를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니 궁금한 사람들은 박정희/친일파 논란 문서를 참고하자.

광복 직후

귀국한 후, 박정희는 국군 창설에 참가하여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하지만 곧 대구에서 일어난 10.1폭동 때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우익 경찰의 총에 맞아 죽자, 형 박상희를 존경하며 따랐던 박정희는 분노하게 된다. 이를 노린 당시 목사이자 남로당 군사총책이였던 이재복(李在福)은 박정희를 포섭하여 박정희에게 남로당 가입을 권유하였고, 곧 박정희는 남로당의 군 조직에 가입하였다.[1][2] 하지만 곧 남로당의 수 많은 폭동제주 4.3 사건, 여순반란사건 등으로 인해 안보위기가 심해지자 이승만 정부는 남로당 간부를 숙청하기 위해 숙군 작업을 시행한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를 포섭한 이재복이 체포되는데, 이재복이 소지한 남로당 명단에 박정희의 이름이 적혀있어 박정희가 체포되게 된다.

재판 과정에서 구형으로 사형을, 선고로 무기징역, 2심에서는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어 감형된 징역을 집행정지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다음해인 1949년에 강제 예편되어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진보세력들이 최근에 박정희를 남로당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가장 큰 이유이다. 박정희가 남로당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사실이나 진보세력이 말하는 것 처럼 박정희가 남로당의 총책이라거나 빨갱이라는 의견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자세한 건 박정희/남로당 논란 문서를 참고하자.

6.25 전쟁 이후

대통령 시절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도로에 막걸리를 뿌리는 박정희 대통령

유신 체제

피살

주요 업적

박정희에 대한 비판

시간 관계상 이 정도만 적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내용은 사실상 국부 이승만 전 대통령과 더불어 이 위키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므로 부족한 부분은 꼭 추가, 수정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정희에 대한 오해와 논란

친일파 논란

박정희/친일파 논란문서 참고

노무현 정권이 만든 친일진상규명위원회의 주목적은 박정희를 친일파로 낙인찍는 것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단독] 민족문제연구소와 대통령직속위원회의 상반된 평가
친일진상규명위의 핵심관계자는 6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20일경 발간되는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핵심관계자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며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서 심의를 보류한 것이지, '박 전 대통령은 영원히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못 박은 건 아니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번에 공개한 자료를 우리는 그동안 입수하지 못했다"며 "새로운 자료가 나왔으니 후대의 역사가들이 다시 평가해주길 바란다"고 판단을 유보했다.

좌파들은 박정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악질 친일파에 지나지 않으며, 대한민국에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잘못된 것은 모두 그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박정희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남북한의 격차가 벌어지게 된 것에 대한 한풀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월간조선 1991년 5월호에 실린 미국 南일리노이주 대학 김상기(金相基) 교수의 박정희 논란에 대한 평가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3][4]

“박정희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청년시절의 행적, 즉 일본육군의 장교로서의 과거를 거론하여 비판하는 입장이 있다. 日帝치하에서 그와 같은 길을 걸었던 한국청년의 수가 적지 않았으나, 이런 사람은 국가원수가 될 수 없는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고 박정희는 친일분자일 수밖에 없고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망친 자라고 극언하는 사람도 있다. 對日굴욕 외교, 일본 경제의 종속이 모두 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에 대한 한국의 위상은 굴욕 종속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전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실용주의 노선은 결국 어떤 명분론보다도 민족自尊의 길임이 입증된 것이다. 젊을 때 만군의 장교였던 사람이 만주벌판에서 武力항쟁한 사람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민족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젊었을 때의 행적으로 한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평가하는 것이 무모한 일임을 알 수 있다. 크게 될 사람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은 거짓말이다.


이 시점에서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글은 누구를 위하게 되는가? 아직도 군사문화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구를 도우려고 박정희를 칭찬하는가? 이 글에 대하여 분개하고 필자를 욕할 독자가 많이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정직하기 위하여 내가 보는 대로 진실을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3공, 4공 세력에 이 글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지도 않으며, 설사 약간의 도움이 된들 나쁠 것이 무엇인가? 과거에 우리는 黑과 白, 善과 惡을 명확히 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黑과 白을 포괄하여 파악하는 정치적 성숙성이 요구되는 더 높은 단계로 왔다.


지난날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던 양심인사들이 민주화가 시작된 이래 보여 온 치졸무쌍한 작태도 볼 만큼 봤고, 독재자들의 큰 업적들이 새삼 돋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이 독재로의 회귀를 원하는 마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박정희에 대한 올바른 평가 없이는 우리는 자기기만 속을 한동안 헤매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싶은 것뿐이다.


활자로 된 글은 영원히 남는다. 나는 이 글로 두고두고 욕을 먹겠다.”

남로당 논란

박정희/남로당 논란문서 참고

김지태와 정수장학회 논란

김지태(金智泰, 1908~1982)는 5.16이후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부정축재자로 몰려 1차 고초를 당하고, 곧이어 농지개혁법 위반, 탈세, 외환관리법 위반 등 개인비리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한홍구 著 『장물 바구니』(2012)에 따르면, 이 같은 죄목들은 군사정부에 협력하지 않은 죄(거사자금 모금 거절 등)로 중앙정보부가 뒤집어씌운 날조로 기술되어 있다.

.

그러나 김지태는 군사정부가 들어서기 이전 1958년부터 부정축재 혐의로 여러차례 사정당국의 조사를 받은 바 있고, 벌금을 납부한 바 있다는 사실을 한홍구는 무시하고 있다. .

그가 정수장학회에 강탈당한 것으로 알려진 땅 10만여평은 사실 경작 농민들에게 쌀 2말씩 주고 헐값에 사들여 여럿의 명의로 허위 자작농지증명서를 발급받아 소유한 불법토지인데다,이미 두달전에 국방부에 자진 헌납한 것이라, 국방부 소유로 넘어간 것이고, 부산일보는 자본잠식이 무려 980%나 되는 깡통기업이었다. 사실상 김지태가 강탈당했다고 주장하는 재산은 실체가 없는 셈이다. .

한홍구는 앞의 저서에서 당시 김지태가 강탈당한 재산이 수백억대, 지금으로 치자면 10조원에 달하는 재산이었다고 주장하나, 현재 MBC(서울) 자산이 2조원대에 불과한데, 무슨 개솔이를 하는지 모르겠다. .

박근혜가 실각하고, 박정희 신드롬이 다시 재현될 가능성이 상당기간 희박한 와중에, 정수장학회 떡밥이 다시 세간에 논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늘 그렇듯이 그들에게 역사는 선동의 수단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

정수장학회가 박정희 사후에 전두환이 박정희의 正과 육영수의 修를 따와 개칭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당시 1974년 이후 7년간 민정비서관을 역임한 이기창에 따르면, 정수(正修)는 중국 고전인 대학(大學)의 7장에 나오는 정심수기(正心修己)편의 약칭이다. 정수장학회를 박정희 개인재산이나 사적 소유의 측면을 의도적으로 부풀리기 위한 소설을 쓴 셈이다.
노 전 대통령과 문재인 비서실장 재직 시절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된 김지태씨를 명단에서 빼줘
“문재인-노무현, 1987년 친일파 변론 맡아 승소했다" 뉴데일리 2019.03.15
곽상도 의원, 동양척식회사 관련 소송 공개 "서류위조까지 드러나… 누가 친일파인가?”

세계 석학, 지도자들의 평가

키신저: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어렵다. 러시아가 동시에 하려다 붕괴되지 않았나. 박정희의 판단이 옳았다. 19-20세기에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나라를 구한 혁명이 5개다. 일본의 명치유신, 터키의 게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한국의 박정희다. 이중 경제기적을 이룩한 혁명은 오직 5.16이다.

엘빈 토플러(제3의 물결): 민주화는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다, 자유는 그 나라 수준에 맞게 제한돼야 한다. 이를 놓고 독재라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정희 모델은 세계가 본받고 싶어 하는 모델이다.

폴 케네디(강대국의 흥망): 박정희는 세계 최빈국의 나라를 불과 20년만에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키웠다.

푸틴: 박정희에 관한 책은 다 구해 달라. 그는 나의 롤 모델이다.

아이젠하워: 박정희가 있었기에 한국은 공산주의 의 마지노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리콴유: 박대통령이 눈앞의 이익만 좇았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말레지아의 마하티르 전 총리와 캄보디아 훈센총리도 박대통령 추종자로 유명하다.

덩샤오핑: 박정희는 나의 멘토다.

후진타오: 나는 새마을 운동을 공부한 사람이다.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박정희를 존경한다.

김정일: 옛날에는 유신이다 해서 비판이 많았지만 새마을운동 덕에 경제가 성장한 건 사실 아니냐. 서울은 도쿄보다 더 훌륭한 도시로 조선의 세계적인 자랑거리다.

저서

박정희 시대 자료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연구 논문 및 저서

“중화학공업 육성과 유신은 양날의 칼(double-edged sword)” 조선일보 2005. 10. 28

전기 및 관련 서적

선우연(鮮于煉) 역, 『박정희의 시대: 한국 위로부터의 혁명 18년』 서울 : 월드콤푸그래픽, 1995.

참고 자료

이른바 '친일문제'를 둘러싼 쟁점과 분석
만주국과 이승만-박정희-김일성
그가 이룩한 대한민국을 누가 저주하는가?

외부 링크

영남대학교 새마을국제개발학과


각주

  1. 참고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2992#dvOpinion 물론 이 링크도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참고만 하자.
  2. 단,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이유는 이데올로기 때문보다는 형 박상희의 죽음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김점곤 평화연구원장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는 남로당에서 지명한 요인물이였으나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닌 것 같으며, 또한 남로당에서의 활동도 미약했다고 한다.
  3. <金相基의 美國통신>나는 왜 朴正熙를 존경하게 되었는가? (월간조선, 1991.05.01) pp. 98-103.
  4. 류석춘, “만주 경험과 남·북한의 발전 경로” : 자유경제포럼 주최 토론회 발제문 리버티 코리아 포스트 20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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