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 10.19 반란사건 또는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또는 여순반란사건(麗順叛亂事件) 또는 여순사건(麗順事件)은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국군 제14연대 소속이자 남조선로동당 소속의 좌익 군인인 김지회·지창수가 주동하여 일어난 군사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이 가담한 사건이다.

1. 개요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 순천에서 발생한 남로당 소속 군인들의 반란 사건이다.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1개 대대를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하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 반란은 군이 일으켰다는 점에서 신생국가였던 대한민국 정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국군 내 존재하던 좌익 세력을 제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숙군 작업 6.25 이전에 이것을 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여기에 가담한 육사 4기는 초토화된 기수로

이 기수에서 국방부장관이나 육참총장 같은 고위직은 나올 수 없었다. )


오랫동안 반란사건이라고 불렸는데, 이것도 518 4.3처럼 좌익들은 반란사건이라는 말을 빼라고 반발을 하며,

4.3과 세트로 국군이 학살을 저지른 사건(진압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이 있었다.)으로 미화하고 역사를 뒤집어 민주화 운동처럼 만들려고 하고 있다.

대통령 호소인인 이재명은 이 반란사건을 무슨 부당한 국가명령을 거부한 사건이라는 왜곡된 좌익사관을 드러냈다.

그러나 대다수 민간인 피살자는 진압군 아닌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건 518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이 계엄군이 가진 m16이 아니라 시민군이 가진 카빈 소총 그리고 교통사고 등으로 죽었다.

(중학생한테도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나눠주고 마이카 붐 전에 군용차나 장갑차를 몰게 했으니 시민군 내에서 총기오발 교통사고가 많았다.)

그렇게 죽은 것도 계엄군이 죽였다고 당시에도 뒤집어 씌웠고,

(아예 죽지도 않은 사람이 도망을 갔는데, 그 사람은 누나도 없는데 자칭 누나라는 사람이 자기 동생이 계엄군에 의해 죽었다고,

차를 타고 방송을 하고 다녔다. 이것도 좌익 왜곡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계엄군에 의해 남동생이 죽은 간호사로 완전히 왜곡 미화를 하는 식으로 나온다.


전남도청 앞 앉아쏴 총기발사도 사실이 아니다.

화려한 휴가 등 좌익 518 왜곡미화물에서는 계엄군이 그냥 무고한 시민(단체로 애국가를 부르는데 앉아쏴를 한다든지)을 먼저 발포한 것처럼 묘사하는데 하나같이

(계엄군은 처음 투입 되었을 때 아예 실탄조차 없었으며, 도리어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어 총기를 소위 시민군들에게 뺏긴 적도 있다. 실탄이 배분된 건 훨씬 이후에 일이다. 발포명령이라는 것도 없었고 대부분 자위권 차원에서 총을 쏜 경우가 많았다.

무슨 전두환이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식으로 역사거꾸로 세우기 부터 518조사단까지 계속 조사를 해도 그런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사실이 없기에

(전두환은 광주진압 작전과 무관하다. 그리고 전두환이 아니더라도 발포명령을 내린 사람 조차 없다.)

해제된 미군의 기밀문서에서도 계엄군은 놀라울 만큼 자제력을 발휘해서 시민들의 희생을 최소화했다 칭찬한다.)

실제로는 예를 들어 버스가 계엄군을 먼저 깔아 뭉개고, 계엄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버스에 대고 발포한 경우를 전후상황을 반대로 묘사한 경우가 많다. )


4.3도 남로당 반란세력이 먼저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군경과 그 가족을 매우 잔인하게 죽였다. 좌익들은 남로당의 만행은 일체 이야기를 안한다.

원래 좌파들은 그런 식이다. 역사전 진실보다는 선동 선전이 먼저다.


문제는 우파들은 역사공부도 안하고 게으르고 이런 좌파사관에 투항적이다. 좌익들은 역사의 중요성을 알아서 죽기살기로 왜곡 선전을 하는데 반해.

이래서 역사전쟁의 헤게모니도 좌파들이 쥐고 있다. 자기네들도 왜곡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인지를 하는지

518 왜곡처벌법 같은 전체주의 법을 만든다던지 리박스쿨이나 역사전쟁2 같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미약할 지라도 철저하게 탄압하는 식으로 가고 있다. )



대한민국에 대항한 사건은 죄다 민주화 항쟁이라는 식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2. 전개

2.1. 진압

국무총리국방부 장관이범석이 10월 22일

1. 제군은 동지와 상의하여 단체로든지 또는 개인 단독으로든지 제군의 양심이 허용치 않는 현재 반란의 지휘자를 즉시 총살하고 부대에 백기를 달아 귀순의 意(의)를 표하라.


2. 전기가 부득이한 시에는 반군의 폭행이 이용되는 총기, 화약탄 및 기타 군용품을 즉시 파괴한 후, 탈주하여 토벌 국군에 투항하라.

와 같은 내용의 포고문을 반란군에 살포[1]하였다. 또한 이날 채병덕 참모총장이 반란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2]하였다. 이어 김백일 중령이 지휘하는 육군 제5여단이 27일 여수를 점령[3]함으로써 반란은 막을 내렸다. 진압에 있어서 어려웠던 점은 반란군과 양민의 구분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여수 진압 시 검문소에서 여학생이 권총으로 검문하던 초병을 사살하고 도주[4]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처럼 겉보기에 순진해 보이는 여중생, 여고생이 반란군으로 돌변하는 일이 적잖이 있었기에 국군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3. 김구여순반란사건에 간여했다는 의혹들

김구는 1947년 11월말까지도 이승만과 협력하여 UN 감시하의 남북동시총선을 반대하는 북한을 제외한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에 동조했다. 하지만 12월 2일 장덕수가 암살되고, 자신이 암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미군정의 조사를 받게되면서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돌연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총선에도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한다. 김구가 총선 직전인 1948년 4월 평양을 다녀온 후 한독당은 총선도 보이콧하고 대한민국 건국 반대운동을 벌인다.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은 남로당, 북로당 세력과 김구한독당 세력이 합작하여 일으킨 것으로 볼만한 증거들이 많다. 김구는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타도하겠다는 점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 목표가 같았기 때문에 그들과 협력하여 이승만한민당에 맞서는 투쟁을 벌였다.

4. 참고 자료

  • 여순반란사건 당시의 사진 : 『LIFE』 Magazine (Time사에서 주간으로 간행하던 사진화보집)[5] 1948년 11월호에 실렸던 사진들이다.
[Time & Life Pictures] Korea: Yosu/ Sunchon / Date taken: November 1948 / Photographer: Carl Mydans (1907-2004) Google Images
오른쪽의 섬네일을 클릭하면 여러 이미지들을 볼 수 있음. 끔찍하고 잔혹한 사진들이 많음.
남한총선 결정에 남로당서 폭동 / 김구·김규식, 단정 수립안 계속 반대 / 동맹휴교 60교·306명 검거… 하루만에 폭동진압
2·7투쟁전후 제주에 무장행동 지령 / 중앙당선 당 군사부 책임자까지 파견 / 경비대 소속 남로당원들 경찰서·14개지서 등 습격 / 토벌대장도 피살, 폭동 1년 계속… 여·순 사건으로 비화
폭동진압 출동에 항거, 14연대가 반란 / 남로당 세포위, 찬반 싸고 심각한 내분 / 군 내부 「푸락치」침투에만 주력했던 박도 예측 못한 우발사고

5. 함께 보기

6.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