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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상
최근 수정 : 2019년 7월 8일 (월) 09:46

남북협상(南北協商)은 북한에서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全朝鮮諸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라 부르며, 1948년 남한의 5.10 총선거 직전인 4월 말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김구, 김규식 등 2~3백명이 북한을 방문하여 북측 인사들과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협상을 벌인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견한대로 협상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로 인해 남한에 여론 분열과 갈등만 초래했으므로 방북한 사람들은 소련과 북한에 이용당한 것이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북한은 두 사람이 이미 항복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1948년 04월 15일자 현대일보 기사

관련 링크


협상단 방북 당시의 사정

남북협상이 거론되던 시점에 제주도에서는 5.10총선을 방해할 목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4.3폭동을 일으켜 진행되고 있었고 다수의 희생자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비상시국임에도 불구하고 방북해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벌여 건설적인 합의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을 도외시한 순진한 발상으로,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하다.

더구나 김구, 김규식 등 평양에 간 남한 인사들이 김일성, 김두봉 등과 함께 남북협상을 한창 벌이던 바로 그 시점인 1948년 4월 24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스탈린 별장에서는 스탈린, 몰로토프(1890~1986), 즈다노프(1896~1948)가 참석한 가운데 북한의 헌법을 결정했으며, 이 자리에는 북한 요인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1]

같은 때 모스크바에서는 북한 단독 정권 수립을 위한 헌법을 결정하고 있었다는 것은 남북협상 자체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논의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해 남한의 5.10 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이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구 등 남한 방북단은 소련과 김일성의 계략에 이용 당하고 놀아난 것이다.

양김씨 방북 이전 북한 상황

양김씨의 방북 이전에 남한의 언론은 북한이 이미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취한 중요한 조치들을 보도하고 있었다. 이런 신문 기사를 보고도 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 수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방북을 강행한 사람들이 딱하다.

第五章 地方主權機關(二面에서 繼續) 新民日報 1948.02.29 4면
北朝鮮傀儡政府(북조선괴뢰정부)의 臨時憲法草案(임시헌법초안) (2) 1948.02.21 동아일보 2면

아래 문건들은 김구 일행이 남북협상차 방북하려던 시기에 스탈린은 북한 단독의 정부수립에 대한 지침을 이미 내려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8년 4월 12일자 문건. "김일성 동무에게 보내는 충고"
1948년 4월 24일자 문건. "조선의 헌법문제에 대하여"

방북 인사들 상당수는 북한에 잔류, 귀환 인사들 중 다수는 6.25 때 납북

레베데프 비망록에 의하면 당시 남한에서 방북했던 인사는 226명이라고 했는데, 이중 1/3 가량인 홍명희, 김원봉 등 70여명이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2] 월북자들이 당당하게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둘러리나 서 준 꼴이다. 유어만(劉馭萬) 중국 총영사의 4월 20일자 전문에 의하면 방북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다.[3] 과연 김구, 김규식은 이런 것도 모르고 방북을 강행한 것일까? 뿐만 아니라 당시 방북했다 귀환한 요인들은 피살된 김구 외에는 김규식(金奎植), 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엄항섭(嚴恒燮) 등 대부분이 6.25 때 납북되었다. 북한 측은 이들의 이용 가치가 높다고 보아 우선 납북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었다고 한다.[4]

이들의 방북은 소련과 북한이 의도한대로 남한의 여론만 분열시키고, 종내 자신들의 운명도 파국적인 결말을 맞은 것 외에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도 얻은 것이 없다.

남북협상 관련 소련측 기록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소련측 자료들에 의하면 남북협상을 막후에서 주도한 세력은 소련군정 실세 스티코프레베데프이며, 김일성, 김두봉은 그들이 내세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김구와 김규식 등 남측 인사들은 소련의 각본에 놀아난 것이다.

<평양의4김회담>1.레베데프 비망록-자료적 가치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1. 46년만에 밝혀진 南北정치협상 진상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2. 金九 올때까지 대표자회의 연기 중앙일보 1994.11.16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2. <해설>蘇군정 남한정세 손금보듯 중앙일보 1994. 11.16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3. 蘇,김일성에 신문보도 일일이 지시 중앙일보 1994.11.17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4. 白凡 "나는 김일성 만나러 왔을뿐" 중앙일보 1994.11.21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5. 蘇 朴憲永도 빠뜨려선 안된다 중앙일보 1994.11.22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6. 蘇 南대표에 총선후 정부수립 약속받아라 중앙일보 1994.11.23 종합 8면
<평양의4김회담>7. 끝 조만식 南行 白凡요구에 金日成침묵 중앙일보 1994.11.24 종합 8면
  • 전현수 역, 『레베제프일기(1947~1948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2006.
김영중(金英仲) 편, ≪레베데프 비망록 :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1947.5.14~1948.12.26 기록≫ (제주, 해동인쇄사, 2016) / (Naver 책 : ISBN 480B170805082)


전현수, ≪쉬띄꼬프일기≫ 해제 국사편찬위원회 : 스티코프의 생애가 자세히 나옴.


여운홍의 방북 귀환담

암살당한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呂運弘, 1891~1973)은 방북 후 서울로 귀환하여 4월 30일 미군정청 사람들에게 북한의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6]

Lyuh Woon Hong's comment (Situation in North Korea)

Reference Seoul's 281, Apr 29th, Lyuh Woon Hong called on Langdon this afternoon with 2 men who had been with him in North Korea and insisted on handing to Mr Langdon for delivery to Gen Hodge message from North-South conference in Pyongyang, which is in Korean language and is now being translated.
Lyuh commented briefly upon situation in North Korea saying that he would tell Langdon more later (Lyuh seemed reticent to talk too much in presence of 2 men with him). Substance of his remarks is as follows:

  1. Everything in north is very orderly with much industrial activity and factories apparently going full blast. Unquestionably organization of things in North Korea is better than in South Korea, but there is very little freedom. People are very reserved with not so much expression of joy as in South Korea. There is little sign of wealth or goods; No restaurants; and no way of having any fun.
  2. When South Korean representatives move from their hotel or quarters, they must obtain permission and are questioned as to whom they are going to see, etc. The Korean flag is still used.

In conference deliberations, question of constitution was never raised. At moment of Lyuh's departure, 4 Kims here still in secret conference. He expected that Kimm Kiu Sic would be returning in few days.

북한은 질서 정연하고 공장들도 풀로 가동되고 있으며, 일들이 잘 조직화 되어있는 점에서는 남한보다 나은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자유가 거의 없다고 했다. 또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처럼 기쁨을 표현하지도 않고 말을 아끼며, 상품이 많고 부유하다는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고 , 식당도 없으며 어떤 재미도 느낄만한 것이 없었다고 했다. 남측 인사들은 호텔에서 움질일 때도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누구를 만나는지 조사를 받아야 했다고 하니, 북한 사람들도 저 당시 이미 거의 모든 행동의 자유를 박탈 당한 상태에서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집단들과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었겠는가?


각주

  1. Andreĭ Nikolaevich Lanʹkov, 《From Stalin to Kim Il Song: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C. Hurst & Co., 2002) pp.42~44.
  2. 양동안,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정신문화연구 2010.06 통권119호 p.39
  3. 유어만(劉馭萬) 총영사의 代電 1948년 4월 20일 제119호
  4. 《(현대사실록) 압록강변의 겨울 : 납북 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 : 이태호 著; 신경완(申敬完) 증언 (다섯수레, 1991) pp.22~24
    박영실, 한국전쟁기 북한의 남한 주요인사 납북 원인 분석 6‧25 전쟁 61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통일부 주최 2011년 6월 21일) 발표 논문 pp.78~79
  5.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의 "[연구과제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6. RG 9, Radiograms, Microfilm No. 246-253, 주한미군의 남한 사정에 대한 보고서 (24) : p.295 Lyuh Woon Hong's comment (situation in North korea) 1948.04.30 / : p.273 Regarding LYUH WOON HONG 1948.04.29 (평양방송이 여운홍이 소련군정의 편지를 가져와서 미군정에 전달할 것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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