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金元鳳 | |
기본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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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98년 9월 28일 |
출생지 |
대한제국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내이리 |
사망일 |
1958년 11월 (60세)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정당 |
조선민족혁명당 인민공화당 조선로동당 |
김원봉(金元鳳, 1898 ~ 1958)은 경남 밀양 출신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로[1], 호는 약산(若山)이다.[2] 해방 후 남한에서 정치활동을 하다 1948년 4월 남한의 5.10 총선에 반대하던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 참석차 평양으로 갔다가 귀환하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國家檢閱相)이 되었다. 이후 1958년 숙청되었는데, 처형되었다는 설,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김원봉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관련을 맺었지만 갈등관계에 있었고, 중공당과도 관련을 맺었다. 임시정부 요인으로도, 순수한 연안파로도 보기 어려운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다. 중국시절이나 해방 직후 남한에서 그의 정치적 행보는 공산주의자에 가까웠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의하자 그는 연말까지는 적극적으로 반탁을 주장하다[3] 이듬해 1월 초에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찬탁으로 태도를 표변하였다. 그후 그는 반탁운동에 대해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비기고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격퇴시킨 병인양요(1868년)와 신미양요(1871년)는 그 나름대로 민족적, 국수주의적 견지에서 통쾌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세계 정세에서 살펴보면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게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4]"고 하면서 그다지 관계도 없는 사례를 끌어와 자신의 태도 돌변을 합리화시켰다. 공산주의자들이 처음에는 모두 반탁을 주장하다 일제히 찬탁으로 돌아선데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다.
해방 후 그는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하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김구, 김규식 등이 북한을 방문할 때 백남운(白南雲)과 함께 그들보다 앞서 4월 6일 평양에 도착했으며[5][6],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 그가 평양에 갔다가 갑자기 북한 잔류를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오래전부터 북한으로 갈 생각을 하며 서울에서 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위해 활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남북협상 참여는 그에게 몰래 월북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고 명분있게 월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셈이다.
1948년 8월 25일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에서 남한지역 대표로 선출되었다.[7][8] 이어 9월 10일 북한 정권이 공식 출범할 때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國家檢閱相)이 되었다. 국가검열상은 국방상 역할도 했다는 기록이 있어[9] 그는 6.25 남침에도 깊이 간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원봉이 1950년대 말 북한의 권력층에서 밀려나 숙청 당한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히 언제 무슨 죄목으로 무슨 형을 받았는지는 불명이다. 1958년 사형 당했다는 설과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10][11] 그의 사위가 1960년 4월 18일 평양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증언이 있다.[12]
평양 주재 소련대사 푸자노프[13][14]의 일지 1958년 10월 1일자와 24일자에 김원봉의 해임과 체포에 대해 나온다.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서훈 논란이 점화된 가운데, 김원봉의 숙청 시기와 이유, 죄목 등이 나온 러시아 문서가 주목을 받고 있다. 해당 문서에는 김원봉이 체포 전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가려고 했으며, 김달현 천도교청우당 대표가 미제 '간첩' 혐의를 받으면서 그와 함께 해임된 것으로 나와있다.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이 발굴해 학계에 보고한 뒤 기자에게 제공한 <푸자노프 일지>(1958년 10월 24일자)에는 "김달현은 미국인들과 연결돼 있고 최근의 체포 직전에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한 전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현재 체포돼 있음)과 교류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김원봉이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남쪽으로 가려고 온갖 시도를 했다는 진술이 인상적이다. <푸자노프 일지>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였던 알렉산드르 푸자노프가 일기 형식으로 북한 정계 동향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평양 주재 당시 당·군·정의 고위 간부들을 자주 만나 북한 내부 사정을 청취하고 이것을 본국에 보고하는 한편, 일지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다......
<푸자노프 일지>는 김원봉의 해임과 죄목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정 소장에 따르면, 위에 언급된 최고인민회의 정기회의는 1958년 9월 중순에 열린 것이다. 그는 "함께 언급된 박무와 문태화 등이 (연안파를 숙청한) 8월 종파 사건에 직접 연계가 돼있지 않고, 그 비중으로 보아 김원봉에게 적용된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는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해임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최고인민회의 정기회의에 참석하였다. (...) 회의에서는 상들의 이동에 대한 정령과 옛 중앙통신사 사장 박무, 옛 강원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문태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원봉(옛 남조선인민공화당 위원장) 등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물어, 그들의 대의원 권한을 박탈한다는 정령을 비준하였다." ( 1958년 10월 1일자 <푸자노프 일지>, 괄호 안은 푸자노프의 기록)
푸자노프의 1958년 10월 24일자 일기에 김원봉이 현재 체포되어 있다고 했으므로, 그때까지는 생존해 있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김원봉을 임시정부 산하의 공산주의자로 기록했다.
미 군정청 홍보처가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15]지지도이다.
대통령 후보자 | 여론조사 지지도 |
---|---|
이승만 | 43.9% |
김규식 | 18.5% |
여운형 | 17.5% |
김구 | 15.2% |
허헌[*] | 1.3% |
조소앙[*] | 1.3% |
김원봉 | 0.9% |
김성수 | 0.7% |
박헌영 | 0.4% |
6.25 때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 속에는 김원봉이 번역하여 1947년 북한에서 간행한 책들이 있다. 이때는 그가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할 때인데, 서울 아닌 평양에서 책을 간행한 것으로 보아 월북 전에도 그는 평양과 깊숙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증거로 보인다.
근자에 와서 좌파 정치권은 물론이고, 문화계에서도 김원봉 띄우기가 성행하고 있다. 문제는 김원봉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가 고증없이 고의적으로 허구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그를 미화하여, 관객들이 그것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김원봉을 건국유공자로 서훈하는 것으로 보이며, 문재인도 노골적으로 그런 주장을 했다. 이들이 김원봉을 내세우는 이유는 결국 대한민국 부정으로 귀결된다.
2015년 개봉 영화 "암살"에서 배우 조승우가 의열단장 김원봉 역을 맡았으며, 1200만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에 나오는 김원봉의 대단한 항일 업적은 대부분 허구이고, 김원봉 등이 벌인 암살이나 폭파 시도는 실제로는 대부분 실패했다.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은 11일 “국가보훈처가 약산 김원봉의 서훈 근거로 영화 ‘암살’의 1200만명 관객 수를 들었다”고 밝혔다. 지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어처구니 없고 한심한 일”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영화 "밀정"은 2016년 개봉되었다.
영화 속 인물에 해당하는 실제인물과 배역은 다음과 같다.[19]
실제인물 | 영화속 인물 |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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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 정채산 | 이병헌 |
황옥 | 이정출 | 송강호 |
김시현 | 김우진 | 공유 |
영화 밀정에 나오는 김원봉 휘하의 의열단원 김시현(金始顯, 1883~1966)은 같은 의열단원 유시태(柳時泰, 1890~1965)를 사주하여 1952년 부산에서 열린 6.25 남침 2주년 행사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저격을 시도했다. 권총의 불발로 실패로 끝나고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되었다 4.19로 풀려났다.[17][18] 전쟁 중 대통령에 대해 암살을 시도한 이들의 배후에는 북으로간 김원봉이 개입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MBC TV는 2019년 5월 4일부터 김원봉의 일대기를 다룬 40부작 대하드라마 〈이몽(異夢)〉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오늘날 남한에서 김원봉은 실제와는 다르게 터무니 없이 과장, 미화되어 선전되고 있고, 이로 인한 논란도 많다. 박근혜 정부시절 국사교과서 국정화에도 그렇게 반대하던 문재인이 최고 권력자가 되어 본인이 역사를 제멋대로 재단하는 것도 북한과 닮은 꼴이다.
자유한국당은 "보수든 진보든 구분 없이 우리가 애국해야 하는 대상은 오직 대한민국뿐"이라며 "1948년 월북해 조국해방전쟁, 즉 6·25에서 세운 공훈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고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창설의 뿌리, 한미동맹 토대의 위치에 함께 오르게 됐다.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전했다.
다른 데도 아니고 현충일 식사(式辭)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6・25 당시 김일성(金日成) 내각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원봉(金元鳳)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망언(妄言)만이 아니라 망발(妄發)이었습니다.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원을 주축으로 결성된 조선의용군이 북한 인민군의 뿌리가 되었음은 잘 알려진 명명백백한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 자리에 나왔던 전몰(戰歿)장병들의 유족(遺族)은 물론 아직도 6・25의 상흔(傷痕)을 안고 사는 모든 애국시민의 항의가 거세게 일자 청와대는 김원봉에게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추서(追敍)하려던 보훈처의 계획에서 일단 발을 빼는 것으로서 재빠른 진화에 나섰습니다. ‘애국 활동을 평가하는데 보수와 진보를 가릴 필요가 없고 사회통합을 이룩하겠다는 취지에서 나온 발언이었을 뿐이니 김원봉에 대한 서훈 추서 계획을 유보하는 것으로 현충일 추념사 논란은 접고 넘어가자’는 것이 청와대와 여권(與圈)의 입장입니다.
문재인이 현충일추념사에서 언급한 김원봉의 실체를 낱낱이 밝히다.
북한정권수립에 철저히 공헌하고 김일성의 충실한 칼잡이로서 무고한 북한주민들을 수없이 살륙한 김원봉을 북한사람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잘 알려진 독립운동사의 주요 전투들은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이 대다수이다. 인물에 대한 평가도 이승만은 극도로 폄하되고, 김구나 김일성, 김원봉 등은 지고지선의 항일 영웅으로 날조되고 있다. 마치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나라를 되찾기라도 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