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金九
김구 1949.jpg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9·10대 국무령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홍진 (제8대)

이동녕 (제11대)
부통령
이인성
부주석
김규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8·19·20대 주석
1940년 3월 13일 ~ 1947년 3월 3일

이동녕 (제17대)

이승만 (제21대)
개인 정보
본명
자(字) 연하(蓮下), 창암(昌巖)
호(號) 백범(白凡)
가명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
초명 창암·창수·구(龜)
출생
1876년 8월 29일
사망
1949년 6월 26일 (72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주소지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현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
성별
국적
조선 (1876년 - 1897년)

대한제국 (1897년 - 1910년)
일제시대 조선 (1910년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 1948년)

대한민국 (1948년 - 1949년)
종교
상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당시 임시정부 주석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 한독당(한국독립당) 당수로, 신탁통치 반대운동, 남북협상 등 정치활동을 했으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9년 6월 26일 암살 당했다. 초명은 김창수(金昌洙)이다.

생애

출신 가계

김구의 가계는 (구) 안동김씨 익원공파(翼元公派)에 속한다.

김방경(金方慶) - 김순(金恂) - 김영후(金永煦, 1292~1361) - 김천(金蕆) - 김사형(金士衡, 1341~1407)
  • 김사형의 아들 김승(金陞)은 김종준, 김종한, 김종윤, 김종숙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장남 김종준(金宗浚) --> 18대손 김구(金九, 1876~1949)
막내 김종숙(金宗淑) - 김질(金礩, 1422∼1478) - 김성동(金誠童) - 김언(金漹) - 김억령(金億齡) - 김탁(金琢) - 김자점(金自點, 1588~1651)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방계 선조인 김자점이 역신으로 멸문을 당하게 되자 그의 11대조가 처자를 끌고 처음에는 고향인 경기도 고양(高陽)으로 피신했다가 그곳도 한양에 가까우므로 위험하다고 하여 다시 황해도 해주 서쪽 팔십리에 있는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의 팔봉산 양가봉(八峰山 楊哥峰) 밑으로 옮겨 숨어 살게 되었다한다.[1] 그러나 김구의 가계와 김자점 쪽과는 계보가 나뉘어진지 오래라서 이주 사유는 사실로 보기 어려운 것 같다. 연좌제 처벌은 심한 경우도 범위가 당사자의 부모, 형제, 처자까지이고, 드물게 백숙부까지 미치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2] 연좌제에 의한 직접적 처벌 대상은 아니더라도 친족은 사회적으로 기피 대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촌수가 가까울 때에 한한다. 김자점과 김구의 11대조는 사실상 남남 수준인 15촌간으로 벌어져 있으므로 한쪽이 역신으로 몰렸다고 해도 다른 쪽도 연좌제로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와 같은 이들의 관계는 구 안동 김씨 족보에서 확인이 가능하며[3], 인터넷에서도 확인된다.[4] 김구의 가까운 직계 선조는 관직에서 멀어진지 오래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불필요하게 김자점을 언급한 이유는 가문이 영락하게 된 원인을 그에게 돌리려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또한 치하포(䲭河浦) 사건 당시 3번째 조사 진술서에 김구는 자신이 7대 독자라 했으나[5][6], 족보에는 부친이나 조부, 증조부의 형제들도 다수 나오므로 사실이 아니다. 집안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정상을 참작해서 자신에게 중형을 선고하지 말아달라는 취지로 거짓말을 한 것 같다.

김구의 부친의 이름은 김순영(金淳永, 1849~1901)으로 알려져 있으나, 족보에는 김재하(金在夏)로 나오며, 자(字)가 순영(順永)이다.[3] 인천감리서의 기록에는 김하진(金夏鎭)으로 나온다.[7]

  • 출생지 : 해주(海州) 서쪽 팔십리에 있는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의 팔봉산 양가봉(八峰山 楊哥峰) 밑
해주군(海州郡) 백운방(白雲坊)은 조선말 백운면(白雲面)으로 되었다가 1914년 인접한 청산면(靑山面)과 통합하여 운산면(雲山面)이 된다.[8]
해주군 운산면 오담리(鰲潭里) 기동(基洞) 좌표[9] : [125.38200452232822, 38.207523702294985]
인접한 장곡면(長谷面)의 백운리(白雲里)에도 기동(基洞)[10]이 있으나, 다른 곳으로 보인다.

1890년대 행적

동학 입문 직후

김구가 치하포(鴟河浦) 사건으로 1896년 6월 체포되어 진술한 내용이 해주부 관찰사 서리 김효익(金孝益)이 법부대신 한규설(韓圭卨)에게 올린 6월 30일자 보고서 말미에 첨부되어 있다. 여기에 김창수(金昌洙)가 1893년 동학의 무리에 들어가 팔봉접주(八峯接主)라 칭하고, 도당(徒黨) 1천여명을 불러모아 도처에서 양곡과 재물을 노략질하고 다녔다는 내용이 나온다.

    해주부 참서관(海州府參書官) 김효익(金孝益)이 법부대신(法部大臣) 한규설(韓圭卨)에게 올린 1896년 06월 30일자 보고서(報告書)에 첨부된 김창수(金昌洙, 김구)의 공안(供案)

    건양 원년(1896년) 6월 27일 해주 백운면(海州 白雲面)에 사는 김창수(金昌洙, 21세) 공초(供招) 기록
    [진술] : 저는 지난 계사(癸巳, 1893)년에 동학(東學)의 무리에 들어가서 팔봉접주(八峯接主)라 칭하고[11], 도당(徒黨) 1천여명을 불러모아 도처에서 노략질을 행했습니다. 갑오(甲午, 1894)년 12월에 일본인이 쌓아둔 쌀(大米) 150석을 탈취하여 40석은 도중에 일용(日用)하고, 그 나머지 110석은 문화접주(文化接主) 이동엽(李東燁)에게 도로 빼앗겼습니다. 해주 검단방 도락지(海州 檢丹坊 道洛只)에 사는 박홍석(朴泓錫)이 쌓아둔 벼(正租) 2백석을 탈취하여 송화접주(松禾接主) 방원중(方元仲)과 나누어 먹고, 석담(石潭) 이참판(李參判) 집에서 돈 250냥을 토색(討索)한 일이 있습니다. 일찌기 단발령(斷髮令, 양력 1895년 12월 30일)이 내려져 각지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날 때 저는 의병(義兵) 좌기총(左旗摠)이 되어 전라도의 김형진(金亨振, 1861~1898)과 해주 검단방 청룡사(靑龍寺)에 있다가 음력 12월에 함께 안악(安岳) 땅에 가서 그 군(郡)의 대덕방(大德坊)에 사는 좌통령(左統領) 최창조(崔昌祚)와 같이 머물다 돌아 왔습니다. 치하포(鴟河浦)의 일과 장연(長淵) 백낙희(白樂喜) 등의 일에 이르러는 과시 전연 모르오니 이를 고려하여 처리해 주옵소서.

    [원문] 建陽元年六月二十七日 海州白雲面居 金昌洙 年二十一 供案
    供。 矣身이 去癸巳年에 入於東徒야 八峯接主라 稱고 徒黨千餘名을 嘯聚야 到處行掠이온데, 甲午十二月에 文化東山坪에 日人의 積置 大米一百五十石을 奪取야 四十石은 都中에 日用옵고, 其餘一百十石은 文化接主 李東燁에게 還爲見奪옵고, 海州檢丹坊道洛只朴泓錫에 積置 正租二百石을 奪取야 与松禾接主方元仲으로 分食옵고  石潭李參判家에셔 錢二百五十兩을 討索 事가 有옵고, 曾於斷髮時, 各處義兵이 起 境遇에 矣身이 義兵左旗摠이 도여 与全羅道金亨振으로 海州檢丹坊靑龍寺에 留다가, 陰曆十二月에 偕往安岳地야 該郡大德坊居 左統領崔昌祚로 相与逗留이다가, 還來옵고, 鴟河浦事와 長淵白樂喜等事에 至야는 果是全然不知오니, 相考處之여 쥬옵쇼셔。

김창수의 같은 진술서가 아래 문서에도 첨부되어 있으나, 맨 끝의 "장연 백낙희 등의 일(長淵白樂喜等事)" 부분만 빠져 있다.

日人錢을 빼앗았다가 붙잡힌 金昌洙의 供案을 첨부한다는 照會 제23호. (1896년 07월12일) : 『內部來去文』 0004권, 奎17794-v.1-17, 004a면,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각사등록 근대편 / 內部來去文 > 內部來去文 09 > 안악군 치하포에서 김창수(김구) 외 2인의 일본인 살해에 관한 조회 (1896년 07월12일(음))

백낙희(白樂喜)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수배

1895년에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에서 동학의 잔당 백낙희(白樂喜) 등이 산포수들을 모아 역모를 꾸미는데, 우선 황해도 해주성을 점령하면 중국에서 원군이 와서 함께 한양으로 쳐들어가 국왕을 몰아내고 섬에 있는 정씨(鄭氏)를 모셔다 새로운 왕으로 모신다는 계획이었다. 김창수(金昌守)와 김형진(金亨鎭)은 원군을 청하러 중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1896년 1월 1일 음력 설날 (양력 2월 13일)을 거사일로 잡았는데, 백낙희 등 주모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폭행을 당하고 관청으로 넘겨지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체포된 백낙희(白樂喜)와 동모(同謀)한 전양근(全良根), 백기정(白基貞), 김계조(金桂祚) 및 수종(隨從)한 김의순(金義淳), 백낙규(白樂圭) 등 6인은 처형 당하고, 도주한 공모자 유학선(柳學善), 김창수(金昌守), 김형진(金亨鎭, 1861~1898)[12], 최창조(崔昌祚), 김재희(金在喜),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가(名不知李哥) 등 6인에 대해서는 수배령이 떨어진다.

도주한 김창수(金昌守)는 김창수(金昌洙) 즉 백범 김구(金九)와 동일인이며 수(守)는 수(洙)의 오기로 보인다. 김형진(金亨鎭)은 김형진(金亨振)으로, 김계조(金桂祚)는 김계조(金啓祚)로도 표기되고 있어 같은 사례로 볼 수 있다. 수배된 김형진(金亨鎭)과 최창조(崔昌祚)는 3월 9일 치하포(䲭河浦)에서 김창수(金昌洙)와 함께 일본 상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 살해에 동참하게되므로 김창수(金昌守)는 김창수(金昌洙)와 동일인인 것이 틀림없다.

중범공초(重犯供草) 번역 :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12)』,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4년 12월
건양원년(建陽元年, 1896) 2월 30일 (양력 1896년 4월 12일) 해주부 장연군수(海州府 長淵郡守) 염중모(廉仲模, 1862~?)가 법부대신(法部大臣) 이범진(李範晉)에게 올린 역모사건 조사 보고이다. 체포된 6인 백낙희(白樂喜), 전양근(全良根), 백기정(白基貞), 김계조(金桂祚), 김의순(金義淳), 백낙규(白樂圭) 등에 대한 공초 기록이 들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사형당한다.[13]
『司法稟報(甲)』 0006권, 奎17278-v.1-128, 089a-089a면,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발신자 : 해주부 장연군수 염중모(海州府 長淵郡守 廉仲模)
발신일 : 1896년 2월 30일 (양력 1896년 4월 12일)
수신자 : 법부대신(法部大臣)

해주부 장연 군수(長淵郡守) 염중모(廉仲模) 보고 1896년 2월 30일

각각의 사람이 진술한 말은 안(案)을 만들어 보고하였거니와, 대개 이 산포(山砲)는 즉 동학도의 잔당입니다. 조정에서 특사를 베풀어 동학도들의 죄를 모두 씻어 주었으니 이에 기사회생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마땅히 이전의 악을 혁파함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야 하는데, 먼 지방의 조악한 습속이 법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해주부(海州府) 산포에 의탁하여 혹은 반수(班首)라고 칭하고 혹은 접장(接長)이라 칭하면서 마을에 횡행하여 그 병폐가 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주부에 보고하여 소위 산포를 탄압하고 전제(專制)하여 병폐가 생기는 것을 금단하였다가, 지난번 군부의 영칙(令飭)에 따라 일체 혁파하여 해산시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불궤(不軌)한 백낙희(白樂喜)가 동학당의 괴수이자 산포의 괴수가 되어, 몰래 헤아리기 힘든 흉악한 계획을 빚어내었습니다. 백가 놈을 붙잡아 여러 가지로 엄히 심문하고 여러 번 조사하였으니 얻어낼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진술한 말을 보고 만들어낸 음모를 살펴보면 곧 대역죄라, 잠시도 임금의 은덕 사이에서 살려 둘 수 없습니다. 그날 수종 전양근(全良根)・백기정(白基貞)・김계조(金桂祚)・김의순(金義淳) 등 네 놈이 비록 협박을 받고 따랐다고는 하나, 전양근의 경우는 낙희와 같이 동학도에 참여하고 또 산포에 들어가 음모와 흉계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백기정의 경우는 낙희를 따라다니며 각 동의 백성들을 지휘하다가, 낙희가 아파서 내동(內洞) 백성들에게 잡힐 때에 낙희의 동생 낙규(樂圭)를 시켜서 산포를 불러오도록 하였다 합니다. 행한 일을 생각해 보면 양근과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둘이니 역시 살려 둘 수 없습니다. 김계조의 경우는 전양근, 백낙희 두 놈과 약간 차이가 있으나 저 낙희를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간여하였으니 어찌 죽음을 피하겠습니까. 김의순의 경우는 처음에는 산포에 들어가지 않았고 위협에 겁을 먹어 잠시 낙희를 따르다가 곧 자기 집으로 돌아왔으니 비록 등급의 차이는 있으나 완전히 용서하기는 어렵습니다. 낙희의 동생 낙규의 경우는 백기정의 지시를 듣고 산포를 불러왔으며, 이어서 어두운 곳으로 다니다가 결국 발각되었습니다. 그가 비록 형제간의 다툼이 있었다고 말하나 크게 그 형을 불쌍히 여겨 급한 어려움을 구하려고 하였으니, 어찌 대역죄인을 보호하였다는 법률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김재희(金在喜)의 경우에는 저지른 범행이 낙희보다 근거가 없으나, 낙희와 약속하고 헤어진 이후에 당초 대곡방(大曲坊)에 오지 않아서 사방으로 흩어져 정탐하였으나 끝내 종적이 없어 잡을 길이 없습니다. 낙희의 진술 가운데 김형진(金亨鎭)・김창수(金昌守)・김재희(金在喜)・류학선(柳學善)・최창조(崔昌祚), 문화(文化)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李哥)의 경우는 모두 다른 군에 거주하여 우리 군으로서는 잡기 어렵습니다. 위의 죄인 백낙희・전양근・백기정・김계조・김의순・백낙규 등 여섯 놈을 각기 법률에 의거하여 빨리 처리할 뜻으로 해주부로 보고하고 이어 위로 전달하도록 하였는데, 그 사이 본부(本府) 병정들이 병폐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지령도 없어서, 부득이 격식과 규례를 넘어섬을 무릅쓰고 이에 보고합니다. 통촉하신 후 각기 법률에 의거하여 빨리 처리하시어 먼 지방의 조악한 습속을 교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건양 원년(1896) 2월 30일
해주부 장연 군수 염중모
법부대신 합하
재(再) 소위 창의사(倡義士)가 날인한 관서포고문(關西布告文)은 이미 해주부에 보내었기에 이에 베껴서 올려보냅니다.

아래는 도주한 김창수(金昌守) 등 6인을 조속히 체포하라고 1896년 3월에 법부대신(法部大臣) 이범진(李範晉)이 해주관찰사(海州府觀察使) 이명선(李鳴善)에게 내려보낸 훈령이다.

『起案』 0007권, 奎17277의1-v.1-33, 015a-015a면,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이 사건의 보다 자세한 경과는 아래 도진순의 논문에 나온다.

연중 의병활동(聯中 義兵活動)은 역모 사건을 미화한 표현으로 보인다.

1896년 치하포(鴟河浦) 사건

김창수는 백낙희(白樂喜) 역모사건으로 수배되어 도피 중이던 1896년 3월 9일 새벽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安岳郡 鴟河浦)에서 일본 상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 1866~1896.03.09)를 타살(打殺)하고, 그가 지녔던 거액의 돈 중 일부를 취하고 나머지는 여관 주인에게 맡기고 현장을 떠났다. 6월 말에 체포되어 사형 대상자가 되었으나 고종의 재가가 나지 않아 이후 미결수로 인천 감옥에 있다가 1898년 3월 탈옥한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스치다가 일본군 중위였으며, 국모(민비)를 시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아있는 당시의 많은 기록들을 조사해보면 스치다는 일본군 장교가 아닌 상인에 불과하고, 국왕을 몰아내려던 역모를 꾀하다 도피 중에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선다는 것도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수배 중에는 세간의 주목을 받을 일은 벌이지 말아야 하는데도 살인을 했고, 스치다가 소지했던 돈의 상당부분을 가져간 것 등으로 볼 때 도피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 행위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정말로 강도 행위가 아닌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이었다면 현장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그런 목적을 알려야 원수갚는다는 의거의 의미가 있을텐데, 현장을 목격한 어느 누구도 김창수가 그런 목적으로 일본인을 죽였다고 하지 않았다. 현장의 다른 사람들이 그가 단순히 일본인을 죽이고 돈을 처분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면 당시 조선 정부의 기록에 나오는대로 강도사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별도의 문서를 참고하라.

해방전 활동

그의 해방전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참고가 된다. 이 책은 춘원 이광수가 윤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두 진실이라고 믿기에는 의심스러운 점도 있다.

그의 해방전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켜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침투하여 임정을 장악하려는 것을 막아낸 것도 그의 공로로 볼 수 있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까지 지낸 공산주의자 이동휘(李東輝, 1873 ~ 1935)와 주변 인물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을 하고 있다.[14]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서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민주주의(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重生疊出)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만,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위대 참령으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 산보 가기를 청하므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만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호칭)도 나와 같이 공산 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나의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의 독자적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니는 것은 대(大)불가이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스러운 낯으로 돌아갔다.


이동휘가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했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서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체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Vladimir Lenin)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가 필요하냐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고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면서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라고 반문함으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 민족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난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도 않고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서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자기 손에 받으려 했으나 김립은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廣東)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자금이라고 칭하면서 20만 루블을 더 받아가지고 몰래 상해로 돌아와서 공산당 무리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 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이루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한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본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 등의 ML당파였다. ML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했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도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 이정규 두 형제와 유자명 등은 상해와 천진 등지에더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루블로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중국, 조선, 아령(俄領)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이루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이루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라는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 있는 정부는 그대로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아무리 싸워도 귀일(歸一)이 못되어서 소위 국민대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다.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에 출품했으나 모스크바에서 돌아보지도 아니 함으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끼리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함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대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 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幕)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을 되찾았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후

일본이 1941년 12월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김구 등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이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조선이 해방될 것이라고 예감하게 된다. 그 전에 미국과 여러 나라들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려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그러나 1943년 카이로 선언에 조선 해방 문제가 포함되면서 해방은 가시권에 들어오게 된다. 카이로 선언이 나오는데는 김구의 대중국 외교와 이승만의 대미외교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김구(Kim Koo)가 서명한 임시정부의 대독선전포고문 : 1945.02.28
The Declaration of War on Germany by Korean provisional Govt : 1945.02.28 인도 국립공문서관 소장 한국독립 및 정부수립 관련 자료

일본 아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좀 이상해 보인다.

소련의 김일성과 연대 모색 주장은 사실인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25권에는 임시정부의 김구가 해방 직전 연해주 88여단김일성과 연대하기 위해 이충모(李忠模, 1896~ ?)를 파견했다가 중도에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불발로 끝났다고 나온다.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에서 소련 연해주로 가자면 타이위안(太原) -> 베이징(北京) -> 만주 창춘(長春, 新京)을 거치는 것이 가장 무난한 경로이다. 8.15 해방 당시 이충모가 있었던 내몽고의 바오터우(包頭)는 이 코스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더구나 바오터우는 산악 고원지대에 있는데, 연해주로 가는 길이라면 굳이 평탄한 길을 두고, 다른 방향으로 벗어나 그런 험한 산악 지대로 들어설 리가 없다.

김구는 소련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들과 연계를 위해 연락원을 파견하였다. 연락원은 이충모였다. 그는 1945년 3월 이후 중경을 떠났다. 중국측에서는 이충모가 임시정부 외무부의 서북특파원으로 파견되었으며, 그 목적은 중앙아시아 한인과 연락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주54) 그러나 이충모의 목적지는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연해주의 한인부대였다. 이에 대해서는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 비서로 김구를 모셨던 안우생(安偶生)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회고가 있다.

"백범 선생은 이러한 실정에서 몇몇 측근들과 숙고한 끝에 김일성 장군님께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던 것이다. … 당시 밀사파견은 주변 분위기를 고려하여 백범·조완구·나(안우생) 이렇게 몇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백범 선생의 신임장을 휴대하고 출발한 이충모는 산서성 태원(山西省 太原)[15]까지 이르러 동북에로의 통로를 탐색하느라 지체하여 중도에서 8·15를 맞게 된 것이었다."주55)
"그는(김구) 김일성 장군님께 연락원을 띄우기로 했는데 그 책임은 이씨(이충모) 자신이 맡기로 하였다. 1945년 봄 리씨는 먼 북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때가 때였던 만큼 그 련락원은 겨우 북경에 이른 채 8·15 해방을 맞게 되었고 그후의 리씨의 소식도 알 길이 없이 되고 말았다."주56)

해방 직후 이충모의 행적으로 보면, 이러한 안우생의 회고는 사실인 것 같다. 이충모는 해방 직후 수원성(綬遠省) 포두(包頭)[16]에 나타나 활동하고 있다. 그는 1945년 8월 23일 포두재류한인의 자치기구인 포두한인회를 결성하고, 8월 25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판사처(辦事處)를 포두 시내에 설치하였다.주57)

포두에 나타난 이충모는 이곳 동포들에게 임시정부 특파원을 자임하고, 그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해방된 지 일주일만에 포두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가 포두지역 근처에서 해방을 맞았던 것임을 말해준다. 포두지역은 중경에서 향한 방향으로 보면 중앙아시아가 아닌 연해주로 가는 길이었다.

주54) 추헌수, 「한인의 최근동태」, 『자료한국독립운동』 2, 80쪽
주55) 안우생·김종항,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경륜」(정병준, 「해방 직전 임시정부의 민족통일전선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 하, 556쪽).
주56) 안우생,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관대히 포섭하시여」(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백범김구전집』 8, 927쪽).
주57) 『광복통신』 제1호, 1945년 8월 30일. 이는 포두한인회에서 발행한 것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조소앙 편 4, 2005(286~287쪽)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해방 직전 김구와 김일성이 연대를 모색했다고 주장하는 위 글의 필자 한시준은 그 근거로 1949년 월북한 안우생(安偶生, 1907~1991)이 북한에서 1990년에 쓴 글이나[17], 김일성 회고록 따위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런 자료들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정치선전물에 가까우며 내용도 매우 의심스러우므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근거자료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안우생은 해방을 맞아 김구와 함께 서울로 환국한 직후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 평양에 와 있는 32세의 청년 김일성은 어떤 사람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문(問): 김일성씨(金日成氏)와 임시정부(臨時政府)와의 관계(關係)는 어떠하며 최근(最近) 평양(平壤)에 와잇는 삼십이세(三十二歲)의 청년(靑年)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어떤 분인지?
답(答): 김일성씨(金日成氏)는 만주(滿洲)서 활동(活動)하엿슴으로 임시정부(臨時政府)와는 아무 연락(連絡)도 업섯다. 그리고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지금(至今) 상당(相當)한 고령(高齡)인데 평양(平壤)에 와 잇는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엇던 분인지 모른다.

이런 답변으로 보아 안우생은 해방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유명한 김일성은 상당한 고령으로 알고 있으며, 북한에 나타난 젊은 김일성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북한 김일성이 소련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의 88여단에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을 리가 없으며, 김구가 이충모를 특사로 보내 88여단김일성과 연대를 모색했다는 후일의 주장도 거짓일 수 밖에 없다.

1945년 7월 포두(包頭)에 온 이충모(李忠模, 1896~ ?)를 만났던 이자해(李慈海, 1894~1967)는 그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18][19][20]

1945년 7월 중경에서 이충모(李忠模)라는 손님이 찾아왔다. 자신을 한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의 개인비서라고 소개하였다. 이 사람은 자기는 김구 주석의 명령을 받고 12전구에 왔으며, 부작의(傅作義 1895~1974)[21] 장관과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총망히 중경을 떠나 왔기 때문에 김구 선생께서 미처 자해(慈海) 동지에게 편지를 쓸 시간이 없어 직접 나를 만나서 안부를 전할 것을 부탁했다고 했다.

몇 마디 말을 마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온 물건정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장관부로 달려갔다. 당일 오후 장관부에서는 간단한 연회를 베풀어 이충모 선생을 접대했다. 손님접대를 부탁한다는 장관부의 명령을 받고 내가 그 곳에 갔을 때에는 이미 20여명의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연회를 마치고 헤어져 돌아올 때 그는, “만약 소련육군이 진입하는 주요 노선을 동북 및 서북으로 하거나 신강 혹은 외몽고로 하여 중국항일군과 배합한다면 틀림없이 일거에 일본관동군을 소멸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소련군에 있는 많은 조선인들은 중국동북에서 이미 몇 년간 항일운동을 했던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충분히 조선독립운동의 중요한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그들과 잘 왕래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나의 머릿속에서는 반신반의의 정서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감히 그의 논조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그에게,“현재 수원, 포두 등지에서 일본에 끌려가 각 부대에서 공작하는 조선 남녀 청년이 약 2천여 명이 되며, 우리는 마땅히 이 방면에서 유력한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전에 고운기 등에게 몇 번이나 적구에 잠복하여 선전공작을 전개하자고 제의하였으나, 한사람도 이 일을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어 결국 경비만 낭비하고 되돌아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언젠가 내가 그에게 또 다른 방면으로의 공작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말로는 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 했으나, 실천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심한 허풍을 떨며 때론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 황당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또 매일 엄청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위들은 나로 하여금 도저히 그를 신임할 수를 없게 만들었다.

이때 미국공군이 일본의 나가사끼(長崎)와 히로시마(廣島)에 무차별적으로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주민 상당수가 사상하였다. 당시 그 정경은 아주 참혹한 지경이었다. 게다가 8월 9일 정식으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소련군이 동북방향에서 일본관동군을 공격하자, 결국 일본은 8월 15일에 정식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 보아 이충모(李忠模)는 연해주로 가던 길이 아니라 1945년 7월 전혀 다른 목적으로 포두(包頭)에 왔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은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안우생 등이 주장하는 김구가 해방 직전 88여단의 김일성과 연대를 모색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1946년 4월말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함께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이충모(李忠模)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이용상(李容相, 1924~2005)은 당시 이충모가 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22][23]

『.... 김일성은 벌써 작년에 평양에 왔다는데 도깨비가 대낮에 활개치는 격이오. 새파란 애숭이가 백발이 성성해 돌아가신 노장군의 이름을 도둑질해 달고 나서다니 말이나 됩니까. 그저 우리나라 애국자는 안중근·윤봉길 두분 뿐이고 다른 자들은 다 가짜요, 도깨비들입니다.』

이충모는 북한에 나타난 젊은 김일성이 이미 세상을 떠난 노장군의 이름을 사칭한다고 비판하고 있으니, 그가 김구의 지령으로 88여단김일성과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말도 사실일 리가 없다.

이런 근거없는 주장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독립운동사에 집어넣은 것은 역사의 정통성이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이승만 진영이 아니라, 건국을 한사코 반대한 김구, 김일성 쪽에 있다는 것을 넌지시 주장하고 싶은 때문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김구의 공산주의 운동

김구는 흔히 강력한 반공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일제시대에 조선독립과 공산주의 혁명을 병행해서 추진했다는 증언도 있고, 일제 말에는 모택동 측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력이 1948년 남한 단독의 총선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평양을 다녀온 후 끝까지 대한민국에 반대하고 북한 편을 든 것과도 관련이 있을 법하다.

김구는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혁명을 병행하여 추진(?)

백찬기(白贊基)는 1911년생으로 김구 등의 주선으로 1934년 9월 20일 남경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1기생으로 입학했다가 1935년 7월 중순 발병한 폐병 때문에 군관학교에서 퇴교했다. 1935년 10월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자수해서 조선으로 압송되었고, 1935년 10월 경기도경찰부 심문을 받았다. 백찬기의 진술 가운데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김구파는 조선의 독립을 표방하는 민족운동만으로는 여론을 움직이기 곤란했고, 그래서 조선의 독립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병행하는 혁명노선을 앞세웠다고 했다는 것이다.

백찬기(白贊基) 신문조서(제二회) : 1935-10-27

어떻게 盧泰然이 너희들을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주었는가.

그것은 뒤에 안 일이지만 노태연(盧泰然)은 불령단 金九파 아래에서 그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으로 金九파에서는 그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혁명을 병행하여 달성하기 위하여 혁명적 투사가 다수 필요로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유지비나 그 밖의 형편도 있었으므로 南京정부에 교섭하여 장개석(蔣介石)의 양해를 얻어서 蔣介石이 경영하는 남경(南京)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혁명적 조선인 청년을 관비생으로 입학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나로서도 자세한 내부의 이야기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金九는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운동을 위하여 조선 바깥에서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일본제국에 병탄되었으므로 그것을 일본으로부터 탈환하여 조국 조선국을 회복하려는 이 독립운동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상은 변천하고 벌써 오늘에 이르러서는 단순하게 조선의 독립을 표방하는 민족운동으로는 여론을 움직일 수 없고, 또 그것에는 결함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시대사조를 받아들여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운동을 병행적으로 실시하여, 이 주장 아래에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으로 변해 온 것이다. 다만 金九파의 운동이 보통의 공산주의와 다른 점은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 운동의 목표는 조선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건설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조선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건설된 이상은 소비에트의 조국인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에 가맹하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그 연방에 병탄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되고 마는데, 같은 노선인 것 같으나 金九파의 운동 목표는 조국 조선을 일본제국으로부터 탈환하여 독립하는 동시에 제국주의 자본가에게 착취되는 일이 없이 조선민중이 매우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조선국내만의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金九파의 혁명운동은 되어 있는 것인데, 한편 중화민국(中華民國)은 중국이 일본제국주의의 횡포로 마침내 만주국(滿洲國)을 독립국으로 빼앗기고, 그것 때문에 중국은 일본에게 만주(滿洲)를 잃은 것이 되므로 일본을 원망하고, 어떻게 하든 일본에 보복하려고 원수의 나라 일본타도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金九파의 혁명운동은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혁명이 목표이지만 제국주의 일본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은 중국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고국 조선을 떠나서 오랜 동안 중국에 있는 金九는 원수 일본을 타도한다는 점에서 남경(南京)정부의 수석 장개석(蔣介石)과 타협이 성립되어 공동전선을 펼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이 공동의 적 일본을 타도하는 수단으로 장개석(蔣介石)은 金九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그 직속인 남경(南京)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金九 등이 추천하는 혁명적 조선인 청년을 중국인과 같이 개방하여 입소시키고 관비생으로 교육한다. 그 대신 金九는 이들 조선인 군인을 지휘하여 혁명전선에 동원하여 중국과 조선의 공동의 원수 일본을 타도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취지에 따라서 金九는 조선인 청년을 모집하여 육군군관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중국공산당과 교류는 사실인가?

임시정부는 장개석중국 국민당 정부와만 교류하며 후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중국공산당과도 교류가 있었다는 주장이 많다. 모택동중국공산당은 전력 보존에 최대한 역점을 두고 항일투쟁은 시늉만 냈을 뿐이고, 실제로는 국민당군에 스파이를 심어 정보를 빼내에 일본에 거액을 받고 팔아넘기기도 했다. 모택동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 감사한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 일본의 침략이 아니었으면 중공당은 일찌감치 국민당군에 토벌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공당국공내전에서 승리한 후 자신들이 마치 항일전에서 승리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역사 날조이다. 중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것도 장개석의 국민당군이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13일 오전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광복 70년 및 개관 28년을 맞아 '동아시아에서의 항일투쟁의 전개와 역사적 위상'이라는 주제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발표자로 나선 조예 연구원은 "항일전쟁기, 중국 공산당은 여론상, 도의상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성원하였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한국독립운동 내부의 단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고 밝혔다.

다만, 중국 공산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사상과 의식적 차이가 존재해, '구존동이'의 원칙으로 양자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고, 중국 공산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위를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지한 계기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폭탄투척의거였다. 당시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던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상해한인지부, 상해한인반제동맹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는 점은 중국 공산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한국독립운동 인사의 국토회복, 민족독립 쟁취에 대한 주장과 활동, 한국의 독립운동과 중국의 항일투쟁을 결합해 임시정부 내부의 피압박민족의 민족주의 당파를 포함하는 항일통일전선의 공동 건립을 지지했다.

또한,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한 후 1945년 11월 환국할 때까지 중국 공산당은 3.1운동기념회와 임시정부 수립 기념회, 망국기념회 등을 거행해 한국의 항일투지를 격려했다.

구체적으로 1943년 12월 3일 '카이로 선언' 발표와 관련해 중국 공산당은 임시정부에 축하 인사를 건넸고, 1944년 6월 7일 동비우(董必武)를 대표로 하는 중공 중앙은 연회를 베풀고 임시정부 요인을 초대하기도 했다.

또한, 해방 이후 환국을 준비하던 김구 선생을 1945년 9월 3일 마오쩌둥(毛澤東)이 만났고, 중국을 떠나기 전 저우언라이(周恩来) 전 중공중앙대표가 김구 일행의 환송연회를 베풀었다. 즉, 중국 공산당은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의 지도적 지위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조예 연구원은 "이 같은 교류활동은 중국공산당이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한국독립운동 세력 가운데 임시정부의 지도적 지위를 인정했음을 명확히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1945년 11월 23일 귀국

신탁통치 반대운동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이 발표되고, 한국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에는 좌우 공히 신탁통치 반대를 표명하고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해가 바뀐 1946년 1월 초부터 좌익은 돌연 찬탁으로 선회하고, 이후 정국은 반탁과 찬탁 세력간의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반탁운동의 중심은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이었다.

남북협상

김구는 1947년 12월 1일에 소련이 UN의 남북동시총선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하고, 이를 두고 남한 단독의 정부수립이라고 부르면 안 되며, 북한 지역은 추후에 조건이 되면 선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1948년 1월 25일까지도 한독당은 같은 입장을 견지하였다.

南北을 通한 選擧아니라도, 政府는 統一政府, 金九氏·聲明發表 婦女日報 1947.12.02
韓獨黨(한독당) : 蘇側(소측)이 北朝鮮入境(북조선입경)을 拒否(거부)한다면 우리는 不得已(부득이) UN 監視下(감시하)에 樹立(수립)되는 政府(정부)가 中央政府 局限(중앙정부 국한)된 選擧(선거)이라도 中央政府(중앙정부)로 세계가 인정하는 한 이에 협력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1월 26일 김구와 김규식이 회동하여 남한만의 단독총선에 반대하기로 합의하였다.[24][25][26]

하지만 한독당 시당부는 1월말까지도 총선거에 대비하는 등 혼선을 빚고 있다.

김구가 남한만의 총선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으로 방향을 선회한데는 중국시절 그와 친분이 있던 거물 남파 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과 몰래 북한을 들락거리던 홍명희(洪命憙, 1888 ~ 1968)의 설득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27] 장덕수(張德秀, 1894 ~ 1947.12.02) 암살의 배후로 의심받아[28] 법정에 나가 증언도 해야하는 등의 일로 인해[29] 미군정과 이승만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남한 단독총선 반대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북한은 두 사람이 이미 항복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1948년 04월 15일자 현대일보 기사

당시 서울에 있었던 박갑동(朴甲東, 1919~ )의 주장에 의하면 김구는 남북협상이 성공하여 단일정부를 세우게 되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북행을 택했다고 한다[30]. 성시백이나 홍명희김일성의 뜻이라며 그런 식으로 김구를 회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구의 방북을 설득했던 홍명희는 같이 평양에 갔다가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북한에 남아 부수상이 되었다. 그가 평양에 가서 갑자기 북한 잔류를 결정했을 리는 없고, 서울에서 이미 북한에 포섭되어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31][32]


남북협상은 1948년 5.10 총선거 직전인 4월 하순 ~ 5월 초순 남한 인사 200~300명이 방북하여 평양에서 열렸다.


양김씨(김구, 김규식)가 평양으로 출발도 하기 전에 북한 방송은 그들이 이미 항복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김구는 4월 19일 청년학생들이 경교장 앞에서 그의 방북을 가로막자[33] 담을 넘어 북행을 결행하였고[34], 5월 5일에 돌아왔다.[35]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1면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5월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의 내용으로 보아 김구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노후를 보낼 과수원을 달라고 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는 것 같다.[38]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

방북한 인사들은 북측 인사들과 회합한 후 4월 30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대체로 소련과 북한 측 주장을 수용한 내용이며, 미군정도 이를 수용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2항에는

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퇴한 후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 인민의 지망에 배치하는 여하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 정당사회단체들 간에 전취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확보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라고 하였지만, 이 말이 무색하게 1949년 미군이 철수하자마자[39][40] 북한은 곧바로 남침 전쟁을 개시하였다.

레베데프 비망록에 의하면 당시 남한에서 방북했던 인사는 226명이라고 했는데, 이중 1/3 가량인 홍명희(洪命憙, 1888 ~ 1968), 김원봉 등 70여명이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41] 김구, 김규식 등은 월북자들이 당당하게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둘러리나 서 준 꼴이다.

방북한 인사들은 자신들의 헛된 망상으로 한국민들을 속인 것이다.

남북협상 당시 영상

영상 초반부가 평양 남북협상 당시 장면을 보여주는 영상이며, 김구의 연설장면도 나온다.

서울 귀환 후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에서 5월 1일 메이데이에 있은 조선인민군 열병식과 시위를 참관했다.[42][43] 국제 노동절에 이와 관계없는 군사 퍼레이드를 벌인 것은 다분히 남한 대표들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며 인민군의 강대함을 보여주어 남한 단독의 정부를 수립해봐야 자신들을 당해낼 수 없고 적화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방북했던 김구, 김규식은 5월 5일 저녁 서울에 귀환하여 다음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남조선(南朝鮮) 선거반대(選擧反對)에 합법적 투쟁 전개(合法的鬪爭展開) : 양김씨 기자단 회견(兩金氏 記者團 會見) 1948.05.08 조선일보 1면


통일책 숙의(統一策 熟議)? 양김씨(兩金氏) 동도 이경(同道 離京) 조선일보 1948년 06월 25일 1면
모종(某種)의 숙의차(熟議次) 양김씨(兩金氏) 모사찰행(某寺刹行)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48년 6월 25일 1면 9단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경교장을 방문한 주한 중국 공사 유어만(劉馭萬, Liu Yuwan)과 김구의 대화록 - 이화장 문서.

남북협상 당시 평양의 공동성명에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며, 미소 양국 군대의 철군을 주장했다. 서울로 와서도 김구는 미군 철수를 주장했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며 끝까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 귀환 2개월여 뒤 주한 중국공사 유어만(劉馭萬, Liu Yuwan, 1897~1966)[44][45]과 만나 나눈 대화에서는 북한군은 이미 강력하여 남한이 따로 정부를 세워도 그들이 남침하여 적화될 것이기 때문에 단정을 반대하는 것처럼 말했다. 아마도 평양 노동절 행사에서의 인민군 퍼레이드를 보고 그들이 너무 강해서 남한의 국군이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공동성명서의 주장과 달리 김구는 북한의 남침을 예견하고 있었으면서도 미군철수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가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며 끝까지 협조하지 않은 배경에는 남한이 정부수립을 해봐야 북한의 남침으로 곧 적화될 것이 뻔하므로 괜히 참여했다 나중에 화를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 김구(金九) - 유어만(劉馭萬, Liu Yuwan) 대화록 전문(全文) : 1948년 7월 11일. 원문은 영문임.
유어만(劉馭萬, Liu Yuwan)은 서울주재 중국(장개석 정부) 총영사
Record of Conversation between Kim Gu and Liu Yuwan : July 11, 1948 Wilson Center : 영문 원문
조갑제(趙甲濟), 金九가 유어만 중국 공사와 나눈 대화록: 金九는 북한이 남침할 것을 알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였나? 조선 pub 2014-10-27
류근일, 김구 선생이 단독정권(대한민국)수립 반대한 것은 사실 - 이인호 이사장은 역사적 사실을 말했을 뿐 조선 pub 2014-10-24

장덕수 피살 이후부터 김구는 공산화된 북한을 끝까지 편들며 남한과 미군정에 강력히 반대하는 이해하기 힘든 행보를 보였는데, 이것이 그가 1949년 6월 26일 암살 당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피살 후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그가 생전에 원하던 미군철수가 완료되었고[39][40], 정확히 1년 뒤에 유어만 공사와의 대화에서 그가 예견했던대로 북한의 남침 전쟁이 개시되었다.

남북정치협상은 소련의 각본에 놀아난 것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으로 평양 소련군정의 민정사령관을 맡기도 했던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에는 남북협상은 소련과 김일성이 세운 치밀한 공작에 방북한 남한 인사들이 놀아난 것으로 나온다. 당시 김구가 김일성에게 여생을 보낼 과수원이나 하나 달라고 했다는 북한측 주장의 사실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어왔는데[46][47][48][49], 여기에 나오는 김구와 김일성의 문답 내용으로 보아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대한 소련측의 의도와 역할, 소(蘇)군정의 북한정권 수립과정 등이 문건으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망록에는 북조선 인민위원장 김일성과 북조선 노동당 위원장 김두봉이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 대표 김규식등 이른바「4金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에게 『헌법은 채택하지만 당분간 내각은 구성하지 않고 김구. 김규식 두 선생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헌법을 통과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계획』이라고 제의, 두 정치 지도자를 회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 함께 소(蘇)군정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南北)지도자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퇴장하면 이들을 「미제(美帝)간첩」으로 폭로하는 대책을 수립해 놓았다.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 『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 5월 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 『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 『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50]

또 김두봉은 4월25일 밤 레베데프 소장에게 『김규식을 5월10일까지 평양에 체류하도록 하자』고 건의, 김규식이 미군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있음을 감안, 그를 북한에 묶어 두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 전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는데, 김구는 평양에서 미군정에 대한 비판만 열심히 할 뿐, 북한의 요인들이 모두 소련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몰랐거나, 외면하고 있다. 북한 우파 세력이 철저한 탄압을 받으며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남한의 미군정만 비판한다.

  • 전현수 역, 『레베제프일기(1947~1948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2006.
북한현대사 관련 러시아 기록사료(Russian Archives) 조사연구 - 구소련 군정문서.외교문서(1945-1960)를 중심으로 기초학문자료센터 (KRM)
첨부된 pdf 파일 중 "3. 레베제프 일기 러시아어 원문" / "11. 레베제프 일기 번역문" (온라인 열람 가능)
레베데프 비망록.pdf

김구의 북행 배경에 대한 조경한(趙擎韓)의 증언

김구가 남북협상을 결행한 배경에 대해 당시 한독당 상무위원이었던 조경한(趙擎韓, 1900~1993)[51]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조규하, 이경문, 강성재 공저, 『남북(南北)의 대화(對話)』 2판 (서울, 고려원, 1987) pp.357-358. (국회도서관 온라인 열람 가능)
한민당(韓民黨)등 170여 단체(團體) 반대(反對)
한협성명(韓協聲明) "협상(協商)은 소(蘇)에 한반도(韓半島) 넘기는 것"
이승만(李承晩)도 눈물 글썽 반의 표명(反意表明)
다음은 한독당(韓獨黨) 내의 반대견해(反對見解).

▲조경한(趙擎韓)씨(七二) 전 임정 국무원 비서장(臨政 國務院 秘書長), 당시 한독당상무위원(韓獨黨常務委員)ㆍ서울 행당洞(동) 二九○)

남북협상이 개최 되기 전에 명동 한미(韓美) 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병중(病中)이었지요. 하루는 일파(一波) (엄항섭(嚴恒燮)씨)[52]가 찾아와 하는 말이 남북협상(南北協商)을 해야겠다고 해요. 이유를 물었더니 총선거 후 남한(南韓)에 미국인(美國人) 판무관이 들어앉는다는 설(說)이 있거니와 그보다도 첫째 남한(南韓)에서 총선거(總選擧)가 실시되면 장덕수 피살사건(張德秀 被殺事件) 여파로 한독당(韓獨黨)이 불리한 입장에 서기 때문에 도저히 선거에 이길 자신이 없으니 그 정치적 출로(政治的 出路)로 남북회담(南北會談)이 요청되고 둘째 양김(兩金) 명의로 「유엔」에 절약서(節略書)를 보내고 동시에 김일성(金日成)에게 남북총선거(南北總選擧)를 제의하면 남북한(南北韓)을 통한 총선거(總選擧)가 가능하며 그렇게 되면 김구(金九)선생이 대통령(大統領)으로 선출될 수 있으니 남북협상을 열어야 한다고 말해요. 그래서 누가 그러더냐고 물었더니 임정주불연락원(臨政駐佛連絡員)으로 있었던 서영해(徐嶺海) (월북 행방불명(越北 行方不明))[53]라는 사람이 김구(金九) 선생을 찾아와서 김일성(金日成)도 협상(協商)에 찬성하며 독립운동경력(獨立運動經歷)이 짧아서 김구(金九) 선생을 대통령(大統領)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자꾸 종용하고 있다는 말까지 털어놓아요.
그래서 남한의 선거에 한독당(韓獨黨)이 참가만하면 압도할 수 있고 서영해(徐嶺海)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반박하면서 남북협상(南北協商)을 하지 말도록 강경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민족(民族)의 대외적인 명분도 있고하니 정 하려거든 일단 예비회담 개최를 제의해서 거기서 대표를 쌍방이 정하되 본회담에서는 저쪽이 감당키 어려운 안건(案件)을 내놓고는 결렬되는대로 기자회견을 열고 저쪽에 책임을 전가하자고 했어요. 공산당하고 협상할 때는 실력이 이(二)배 이상 돼야하는데 당시 남한의 정세는 그렇지 못했지요. 그후 내가 다시 병석에 눕게되자 그 의견이 채택되지 못했는데 북행(北行) 며칠 전에 백범(白凡)이 문병차 와서 같이 갔으면 하는 의사를 표시한 일이 있었으며 조소앙(趙素昻)씨도 "공산당을 잘 아는 당신이 병만 안났더라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결국 김구와 엄항섭 등은 성시백같은 김일성이 특파한 간첩이나, 김일성의 정보원으로 보이는 서영해 등의 감언이설에 속거나 귀가 솔깃해져 장덕수 피살사건 등으로 처한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결과가 뻔히 보이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들의 도움으로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김구를 지지할 것이라는 말에 속아넘어간 것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양 방문을 강행하여 대한민국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봉쇄해버렸고, 북한을 다녀와서도 실상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한국 정부만 비판하다 자멸의 길을 걸어갔다. 김구는 1949년 6월 암살되고, 김규식과 엄항섭은 6.25 때 납북 당했다.

김구의 북행 배경에 대한 유어만(劉馭萬) 중국 총영사의 대전(代電)

서울 주재 중국 총영사 유어만(劉馭萬)이 본국의 외교부장에게 보낸 전문에 당시 김구, 김규식의 북행 주변 상황이 나와 있다. 김구는 장덕수 암살 배후로 의심 받아 미군정과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고, 이것이 북행을 고집한 하나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劉馭萬 총영사의 代電

[발 신] 劉馭萬
[수 신] 外交部
[연월일] 1948년 4월 20일
[번 호] 제119호
[내 용]
特急:남경 왕부장님 보십시오.
2김(김구·김규식)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한 이후 저는 곧 이승만과 김구의 합작을 성사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김구의 세력이 雄厚하여 경시할 수 없음을 거듭 말했더니 이승만도 김구의 의견을 상당히 중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한민당 당수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적지 않습니다. 김구 본인은 비록 어떠한 처분도 받지 않았지만 암살범을 비롯하여 8인이 미군사법정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는 김구로서도 어쩔 수 없었고 이후 김 씨와 미군정당국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162·163호 전보를 받은 뒤 최후의 노력으로 王·司徒 두 부대표를 보내 알선하였지만 아무런 성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못해 더 이상 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蔣 주석께서 한국 각 당파의 통일을 위해 각 당파 영수에게 단결을 호소하는 전문을 보내시는 것은 주석님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주석님과 부장님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지난달 받은 147호 전보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전보를 받은 즉시 김구에게 주석님과 부장님의 뜻을 전하였으나 김 씨는 고집이 세 충고를 듣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할 노릇입니다.
남북영수회의는 오늘까지의 상황으로 보아 성사될 것 같습니다. 김구·조소앙·엄항섭·여운홍·홍명희 등이 어제 저녁 북상하였는데, 듣자하니 오늘 새벽 이미 평양에 도착하였다 합니다. 김규식 일행 수십 명은 내일 새벽 6시 평양을 향해 출발할 것이라 합니다. 김구는 출발 전 사저에서 기자들에게 남북회의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殉國할 것이라 성명하였습니다. 김 씨의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2김과 가까운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번 북상한 1-2백 명 가운데 대부분이 남으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나머지는 2주일 정도 뒤 漢城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김규식은 회의 성공에 회의적인데 남으로 돌아온 뒤에는 정계에서 은퇴할 것이라 합니다. 김구의 행동은 예측불허인데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아 소련은 남한의 선거를 방해하려는 음모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2김이 북상을 결정하기 전 연락원을 통해 회의 선결조건 5가지를 제안하였고, 북한은 이를 완전히 수용하기로 하여 2김의 북상이 성사되었습니다. 2김이 제안한 5가지를 아래에 보고 드립니다.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국제원조의 조건 하에 2김은 아래 5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첫째, 진정한 민주정부를 건립하며 어떠한 독재체제도 거부한다.
둘째, 사유재산제를 승인하며 독점적 자본주의를 거부한다.
셋째, 전국적인 보선을 실시하며 통일된 중앙정부를 건립한다.
넷째, 어떤 우방도 한국 영토 내에 군사근거지를 설치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미소 양국은 즉각 담판을 개시하여 점령군의 철퇴 시간과 조건을 토의해야 한다(이는 철병의 선결문제와 선후방법을 칭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철병방법을 전 세계에 공포해야 한다. 【劉馭萬】

김구의 북행 배경에 대한 박갑동의 증언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은 당시 서울에 있었고, 경교장에도 자주 출입하며 김구와 면담도 했는데, 김구의 북행 강행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 백범 종종 조만식 밀서 받아 / 남로당선 홍명희 통해 접근 시도하기도
특히 백범은 평양의 조만식으로부터 밀서를 종종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북동포가 전부 자기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백범이 측근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평양에 간 것도 이같은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중요한 배경은 평양의 김일성이 5·10선거를 파탄시켜 이승만 정권을 수립 못 하게 하기 위해 백범이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주면 남조선에서 비록 단독정부를 수립해도 이북에서는 이에 대항하는 정부를 수립하지 않겠다는 밀서를 보내온 것이었다.

남로당에서도 홍남표가 홍명희를 시켜 백범에게 공작도 했었다. 백범은 황해도 출신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굉장했었다.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김일성 당ㆍ군ㆍ정 3권 장악/분단책임 미­이승만에 전가… 공산정권 수립
백범은 남북통일선거를 하면 자기가 정권을 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만식계의 북조선 민주당계나 기타 북조선 인사들이 서울에 오면 돈암장보다 경교장을 먼저 찾아가기 때문이었다.

백범은 이북동포들에게 자기의 얼굴을 꼭한번 보일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에 갔는데 김일성은 백범이 회의대표들과 충분히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백범의 방북보고서를 보면 (이것은 당외비였는데 남로당 수중에 한 부 들어왔다) 아주 불만에 차 있었다.

북한에서의 김일성 시책을 다 부정적으로 보았고 긍정적으로 본 것은 「혁명가 유가족 학원을 지어 혁명가 유가족을 우대하고 있다」는 단 한가지뿐이었다.

백범은 평양행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이승만에게만 타격을 주었을뿐 김일성은 오히려 덕을 보았으며 백범 자신은 잃은 것만 있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백범과 심산(김창숙)이 믿고 있던 벽초(홍명희)는 평양연석회의에 가서는 김일성에 밀착하여 서울을 버리고 평양에 영주하기 위해 가족을 다 불러갔다.

9월에 김일성정권이 수립되자 벽초는 부수상에 등용되었다. 그는 감격해 쌍둥이딸 둘을 김일성집 가정부로 보냈다. 큰아들 기문은 과학원원사로 한글을 연구하고 둘째아들 기무는 38선을 왔다갔다 하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평양에서 벽초를 만난 사람들의 얘기로는 역시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가득차 서울을 그리워하고 있더란 것이었다.
단독정부 반대 위해 남·북 정당·단체 연석회의 / 김구·김규식, 남한대표로 평양회합에 양 김씨는 주석단에 안 껴주고 푸대접 / 조만식 석방요구에 김은 밀서 내밀며 "장난 그만 하시오"
남·북 연석회의, 김일성의 모략에만 이용당해 / 김구·김규식은 귀경 즉시 성명을 발표 실패나 성공 말 않고 요령부득한 내용 / 북쪽선 이미 인민공화국헌법의 초안을 채택
김일성(金日成)은 사람을 부를때 밀서(密書)만 보내지 않고 반드시 밀사(密使)를 보냅니다. 48년 김구(金九)선생이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가시기 전에도 평양에서 밀사가 왔었습니다. 당시 내가 속해 있던 남로당에서도 같은 공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밀사가 가져온 밀서의 내용은 「미제와 이승만 도당이 남쪽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단독정부를 수립하려하니 이것은 민족분열의 일대위기입니다. 이것을 막기 위하여 선생님을 정중히 평양에 초청합니다. 만일 선생님이 평양에 와주시면 남쪽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더라도 이에 대응하는 북만의 단독정부는 수립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내용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구(金九)선생이 전 국민과 측근의 결사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평양에 갔던 것입니다. 김구(金九) 선생이 북에 가기 직전에 평양거리엔 「민족반역자 김구(金九) 이승만(李承晩) 를 타도하자」는 삐라가 곳곳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걸 하루 아침에 떼어버리고 「김구(金九)가 김일성(金日成) 장군에게 항복하러 온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확인하지요?

제가 51년 평양에 있을때 직접들은 얘긴데, 김구(金九) 선생이 보낸 편지를 김일성(金日成)이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깜빡 잊고 세탁을 맡겼다는 겁니다. 세탁하는 사람이 이걸 발견하고 꺼내보지 않고 그냥 김일성(金日成)에게 바쳤는데, 김(金)은 그가 본 줄 알고 후에 그를 죽여버렸다고 해요. 그런데 최근에 나온 「김일성의 비서실장 고봉기(高鳳起)의 유서」라는 책에 이 내용이 그대로 나와 있더군요.

이뿐만이 아니라 김일성(金日成)은 여운형(呂運亨) 씨에게도 밀사를 보내 북으로 초청해갔습니다. 그런데 초청을 받아 갔던 두분이 비명에 갔다는 점을 우연의 일치로만은 볼 수 없기도 합니다.

김구는 만경대를 방문하여 김일성 조부와 재회

남북협상 당시 평양 체류 중에 김구는 과거에 머문적이 있었던 평양에서 서쪽으로 40리가량 떨어진 대보산(大寶山)의 영천암(靈泉庵)을 방문하였고, 이어 김일성의 생가라는 만경대를 방문하여 김일성의 조부 김보현(金輔鉉, 1871~1955)도 만났다. 김보현은 김구가 옛날 영천암에 머물 때 만나본 적이 있다며 반가워했다 한다.

김구는 또 이 기자회견에서 전날 교외 나들이를 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서평양 교외 20리 되는 농촌지대를 돌아보았는데 농가에 전기가 시설되고 지붕도 거의 전부 새로 인 것을 보면 마음이 괴롭거나 민생이 핍박한 환경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만경대 김일성씨 생가를 방문했는데 78세 된다는 김장군 조부를 만났다. 나를 예전 영천사(靈泉寺)에서 만난 일이 있다고 퍽 반겨하였다. 초가집 그대로 삿자리를 깔고 한 것으로 보아 김 장군 조부님의 살림살이라고 생각 못할 만큼 소박하여 김장군의 공사별을 짐작하였다.”

김일성의 조부가 말했다는 영천사란 김구가 50년쯤이나 전에 잠시 방주로 머물던 영천암을 말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전날 평양에서 서쪽으로 40리가량 떨어진 대보산(大寶山)으로 감개무량한 나들이를 했었다. 젊어서 혼인할 뻔했던 안창호(安昌浩)의 동생 안신호(安信浩)와 동행했다. 대보산에는 영천암 이외에도 안창호가 옥고를 치른 뒤에 휴양하던 송태산장(松苔山莊)도 있었다. 안신호는 목사였던 남편과 사별하고 진남포에 살고 있었는데, 북한 당국에서 김구를 위하여 일부러 수배를 한 것 같았다. 안신호는 머리가 희끗희끗하면서도 말끝마다 김일성을 추켜세우는 열성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 안신호는 김구가 떠나올 때까지 호텔에서 김구의 수발을 들었다.

영천암에 가던 날 점심때가 되자 김일성의 비서가 음식을 잔뜩 짊어진 경호원 두 사람과 함께 올라왔다. 통닭과 쇠고기를 비롯한 고기류에 각종 전과 떡 등 점심 치고는 음식이 너무 많았다. 알고 보니까 이날의 영천암 방문을 김구가 부모 제사를 모시러 가는 것으로 알고 제수를 마련해 온 것이었다. 음식은 산상 예배를 드리러 온 젊은 남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49) 그런데 사실은 4월 26일은 김구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여사의 기일이었다. 북한 당국이 김구도 잊고 있는 곽낙원 여사의 기일까지 조사하여 알고 있었다면 그 용의주도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김구에 대하여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김구 일행은 만경대의 김일성 생가도 둘러보았다.

49)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pp.148~150.
대보산 영천사.jpg

승려 원종(圓宗), 즉 김구가 1899년경 방주(房主)로 머물렀던 평양 서편 교외의 대보산(大寶山) 영천사(靈泉寺). 김일성의 조부모 김보현(金輔鉉, 1871~1955)과 이보익(李寶益, 1876~1959)이 살던 대동군 고평면 남리(大同郡 古平面 南里) 만경대(萬景臺) 마을과 그리 멀지 않다. 당시 김일성 조부모는 신도로서 절에 다니며 시주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구가 평양 인근 영천암에 일시 머문 때는 1899년으로 보인다.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옥에서 갇혔다 탈옥한 후 충남 공주(公州)의 마곡사(麻谷寺)에서 출가하여 원종(圓宗)이란 법명의 승려가 된 지 1년여 후의 일이다. 백범일지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54]

약 1년간 마곡사에서 정진하던 백범은 금강산에서 공부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때가 기해년으로 1899년 이른 봄이다. 승려들의 도성출입 금지 조치로 성밖의 여러 절을 전전하다가 새문밖 새절(지금의 신촌 봉원사)에 머물면서 경북 풍기에서 온 사형(師兄) 혜정(慧定)스님을 만나 금강산 행을 단념하고 평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해주 신광사에서 여러 날 머문 백범은 최극암(崔極庵).전효순(全孝淳)의 권유로 평양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방주(房主)를 맡았다. 전효순은 평양 서윤(庶尹,판윤과 좌우윤을 보좌하는 일을 맡아보던 종사품 벼슬) 홍순욱에게 “승원종(僧圓宗)으로 하여금 영천사 방주를 차정(差定, 사무를 맡김)함”이란 첩지를 받아 왔다고 한다. 방주는 사찰 관리 책임자로, 주지와 같은 소임이다. 영천암 방주로 있던 백범은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온 부친의 강력한 권유로 환속했다.

기자출신 탈북자 김길선은 김구가 영천암에 머물 당시에 김일성의 조모 이보익(李寶益, 1876~1959)이 절에 시주하러 다니다가 젊은 김구가 절에 숨어 있으니까 안돼보여서 밥덩어리를 전해주곤 했다고 김일성이 말했다 한다.[55] 김일성의 말을 그대로 믿을 바는 못되지만, 당시 김일성 조부모는 김구가 방주(房主)인 암자의 신도로서 절에 다니며 시주도 했던 건 사실인 것같다.

남북협상 당시 김일성이 김구 모친의 기일 제사까지 챙기고 있었다는 것은 후일 북한측이 방북한 남한 인사들의 개인적인 기념일까지 알아내어 챙겨주는 용의주도함의 시발점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여 방북 인사들의 마음을 자기들 쪽으로 기울게 유도하려는 공산당식 정치공작의 일환이다. 어쩌면 김구는 김일성 조부모와의 과거 인연도 있는데다, 모친의 기일제사까지 챙겨준 김일성에게 끌려 끝까지 북한을 옹호하고 이승만 정부에 반대를 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도 든다.

대한민국 건국 후의 행보

1948년 말 프랑스 파리에 개최된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1949년 1월 16일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는 한독당 중앙위원회 석상에서 '5.10 총선으로 남한의 정부를 수립한 것이 북한도 따로 정부를 수립하는 핑계거리가 되었다, 미소 양군의 철수를 위해 국방군과 인민군은 뭉치라, 나는 불원간(不遠間)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이 있을 것을 희망하고 또 믿고 있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56][57][58] 중대한 발언이었고,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49년 1월 18일 정부 대변인은 남북협상과 영수회담을 운운하는 김구의 발언에 대해 “항일투쟁으로 전 민족을 영도하고 나갈 때는 영수라는 말이 성립되어도 자주독립 국가가 된 이 마당에는 영수 운운은 큰 불찰이다. 따라서 3영수 합작 운운도 부당하며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성명서는 이대통령과 김구, 김규식 양씨와의 합작을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대변인은 “아직도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이북(以北) 정권을 말하는 관념유희(觀念遊戱)에 가까운 진부한 언사를 쓰고 있음은 모순당착(矛盾撞着)"이라며 남북협상 불가를 선언했다.[59][60]

1949년 1월 16일 김구의 발언은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이며, “이승만 대통령만이 유일한 최고 원수”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자, 국가 원수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이러한 발언을 한 배경에 대해 정안기는 "당시 김구는 소련 군정이 촘촘하게 설치한 정치적 그물망에 걸려든 대어(大魚)였고, 새파란 김일성의 장단에 놀아나는 정치적 노리개에 불과했다. 이후 김일성의 충실한 하수인을 자처하는 늙은 친공주의자 김구에게 대한민국은 '어차피 적화될 너절한 나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피살과 살해범 안두희의 변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과 이후의 정부에 사사건건 반대하다 1949년 6월 26일 포병 소위이자 한독당 제9호 비밀당원 안두희와 언쟁 중에 12시 46분경 권총 저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사흘 뒤인 6월 29일 그가 생전에 강력히 요구했던대로 미군의 철수가 완료되었다.[39][40]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김구가 예견했던대로 북한의 남침이 개시되었다.

안두희는 1955년 간행한 아래 수기에서 살해의 동기를 밝힌 바 있다. 안두희는 김구가 송진우, 장덕수 암살의 배후라고 확신한 듯 하고, 1949년 5월 4일 국군 대대장이었던 표무원(表武源, 1925~2006)강태무(姜太武, 1925~2007)가 휘하의 대대병력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과, 국회 프락치 사건 등에도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고 파악한 듯하다. 안두희가 한독당 비밀 당원이었다는 것은 김구가 그에게 모종의 비밀 임무를 맡길 계획이었음을 시사한다. 안두희는 몇 차례 김구와 만나서 대화해본 결과 김구가 계획하고 있던 일들에 동의할 수가 없었고, 탈당시 살해 위협도 받았다고 한다.

재출간 : 나는 왜 김구선생을 사살했나 : 안두희의 시역(弑逆)의 고민 타임라인 2020년 12월 15일
1948년 8월 15일의 건국과 정부수립을 앞두고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초대 내각은 만장일치로 백범 김구를 부통령으로 추대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서의 위상과 독립운동에 기여한 그 나름의 역할 그리고 김구에 대한 민중의 신망을 대한민국 정부는 온전히 수용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초대 내각의 결단과 신생 독립국 민중의 여망은 김구의 거절로 보기 좋게 무산되고 말았다.

부통령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김구는 외세 배격과 자주통일국가 건설이라는 반탁운동 당시의 명분을 그대로 유지하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수립을 반대했다. 그뿐 아니라 신생 독립국의 후견 역할을 하던 미국을 외세로 몰아 미군 철수와 내정 불간섭을,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추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철수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김구의 요구는 외세, 즉 미군 철수로만 그치지 않았다. 김구는 보다 본질적인 차원을 노렸다. 즉 미군 철수로 인한 군사적 공백을 1억5000만 달러 상당의 군사 원조로 상쇄하기로 합의한 이승만 정부와 미국 간의 합의를 전면 백지화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김구의 바람대로 결국 1949년 5월말 대부분의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 철수하고 6월 30일 철수를 완료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또한 미군 철수에 따른 군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1억5000만 달러 상당의 군사원조 백지화마저 수용해 버린다. 6월 29일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긴 채 미군이 모두 한국을 떠났다.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은 스스로의 자위력으로 김일성의 북한 공산집단과 그 배후인 소련과 중공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김구는 자신의 요구대로 미군이 실제로 철수를 시작하고 1억5000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군사원조마저 백지화된 상태에서 국회와 군대를 장악하기 위한 시도를 본격화한다. 소장파 13명을 제헌국회에 입성시켜 국회 장악을 시도한 ‘국회프락치사건’과 청년장교들을 대거 포섭함으로써 군대 장악을 시도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국회프락치사건은 1949년 6월 10일 38선을 넘으려다 붙잡힌 정재한(鄭載漢)이라는 여간첩이 음부에 숨기고 있던 박헌영에게 보내는 암호문서가 발각되면서 그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이 사건은 헌병대와 검경이 합동으로 내사를 해오면서 1949년 4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3차에 걸쳐 관련 의원들이 속속 검거되고 있었다. 모두 13명의 의원들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1심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은 후 이에 불복 항고, 2심에 계류중 6·25전쟁이 발발하며 서울이 북한괴뢰군에 점령되자 한 명 만 제외하고 모두 월북했다.
[정안기 박사 특별 대담] 안두희, 백범 암살의 진실 (2) - 《弑逆의 苦悶》은 과연 僞書인가? 미디어워치TV 2021. 1. 28.
[정안기 박사 특별대담] 안두희, 백범 암살의 진실 (3) 미디어워치TV 2021. 2. 25.
[정안기 박사 특별대담] 안두희, 백범 암살의 진실 (4) - 안두희의 충성과 반역 미디어워치TV 2021. 3. 11.
미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CG, Commanding General)이 1947년 12월 13일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JCS, Joint Chief of Staff)에 보낸 전문. "경찰청장 장택상(Police Chief Chang)의 정보에 의하면 장덕수 암살범의 자백이 김구를 암살을 사주한 사람으로 지목하고 있다. 만일 이 사실이 증거로 뒷받침된다면 김구를 살인죄로 미국 법정에 기소하는 것이 사령관(CG, 하지 장군)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암살 사건 연루 혐의

해방 직후 송진우(宋鎭禹, 1890~1945.12.30), 여운형(呂運亨, 1886~1947.07.19), 장덕수(張德秀, 1894~1947.12.02) 등 주요 정치인에 대한 3건의 암살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주장과 혐의가 있으나 사실로 분명히 확인되지는 않았다.

미군정 기록에 의하면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張澤相, 1893~1969)이 1945년 12월 중순 임정 요인들이 참석한 저녁 모임에서 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대화의 내용은 좌파들은 미군정 당국이 축출할 것이고, 김구에 대적할만한 사람은 송진우 뿐이므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듣고 송진우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으나 송진우는 그럴 리가 없다며 별로 조심을 하지 않아 당했다고 하였다.[61]


역시 미군정 기록에 의하면 여운형 암살범 한지근이 자기는 송진우 암살에 연루된 한현우가 이끄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실토했고 한다.[62]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의 배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장덕수 암살범은 한독당원이었기 때문에 미군정은 김구가 배후라는 혐의를 두고 있었고[28], 이 때문에 김구는 법정에 나가 증언도 해야 했다.[29][63] 김구는 이승만에게 하지 장군에게 이야기하여 법정에 나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승만이 들어주지 않아 이 때문에 이승만과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하지 사령관과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고, 장덕수나 유가족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어 김구의 청을 선뜻 들어줄 상황도 아니었던 것 같다. 장덕수 암살을 김구가 직접 지시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한독당 인물들이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64]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인해 김구와 한독당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김구가 미군정에 의해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에까지 나가 증언해야 했던 것이 남한만의 총선에 찬성하던 그가 미군정이나 이승만과 결별하고 돌파구를 찾아 총선거 반대로 선회하여 남북협상에 나서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김구 본인 또한 1949년 6월 26일 암살되자 여론이 그를 애도하는 분위기로 바뀌면서 암살 배후 의혹도 잦아들게 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김구 어록

김구나 신익희 같은 분들은 "일제시대에 국내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발언을 하였다.[65][66]

Mark Gayn (1909~1981),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

[November 7, 1946 SEOUL] With characteristic bluntness, Kim Koo said: "Practically everyone in Korea is a collaborator. They all ought to be in jail."

[1946년 11월 7일, 서울] 김구는 특유의 퉁명스러운 어조로 "한국 내에 있은 사람은 사실상 모두 일제 협력자다. 그들은 모조리 감옥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이 해(1945년) 12월 중순의 일이다.... 술기운 탓도 있겠지만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67]
  • Mark Gayn은 Chicago Sun 지의 일본 동경 지국장으로 1946년 가을 취재차 한국에 와서 김구, 이승만 등도 만났었다. 당시 일들이 나오는 《Japan Diary》는 김구 생전에 출판되었다.


해방 후 김구의 거처 경교장(京橋莊)은 금광업자 친일파 최창학(崔昌學, 1891~1959)이 자신의 별장을 제공해 준 것이다. 친일파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별장을 제공받은 것인가?

해방 후 귀국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안하무인식 언행에 불만을 토로한 사람들이 많았다.

평가

위에서 본대로 김구는 혈기는 넘치나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10대말~20대 초에 타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여러가지 일들을 하고 다녔다. 젊은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을 많이 저지르고 다녔으면, 나이든 후에는 이런 행위를 했던 것을 시인, 반성하고, 피해 당사자나 유족들에게 사과라도 하는 태도를 보였어야하나 그러지도 않았다. 그가 만년에 쓴 백범일지에는 자신에게 불리한 행적은 감추거나 오히려 미화하기 위해 새로운 거짓말도 많이 지어내는 등 더 큰 잘못을 추가하고 있다. 물론 백범일지를 쓸 당시에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서 후세에 진상이 드러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젊은 날에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공격적이었고, 몇몇 뜻맞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거리낌없이 행하는 경향을 보였다. 여러 사안에 대한 다각도의 고민과 성찰을 한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데, 이러한 성향은 후일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같다.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제거하려는 시도도 많이 했다. 해방 직후 주요 인물 암살 사건의 유력한 배후로도 거명되고 있다.

미군정과도 대립하였고, 이후 남한 국민의 민의가 반영된 총선거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도 끝내 부정하고, 이승만과는 대립하면서도 소련군이 만들어 놓은 꼭두각시 지도자 김일성이나 북한 체제와는 협상만 주장할 뿐 단 한 마디도 비판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가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기 마련인 국정을 이끌어야 할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성향의 사람으로 보인다. 하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기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사람이다.

대한민국과 이승만을 인정하지 않고, 김일성과 북한이 더 정통성이 있다고 믿는 남한의 좌익 세력들이 김일성이나 박헌영을 직접 전면에 내세워 찬양하기는 어려우니 대타로 내세워 우상화하는 인물이 남한에 적대적이고 북한에 우호적이었던 김구인 것으로 여겨진다. 김구 본인만 두고 보면 좌익들이 내세워 극구 찬양할만한 인물도 아니고, 말년의 이상한 행보를 제외하면 오히려 극우적인 인물에 더 가깝다.


이 사람을 무슨 국부라며 신성시하는데 그 나라 건국을 반대하고 방해한 사람을 국부라고 하는 나라는 아마 전세계에서 한국 밖에 없을 것이다.

미군정기 여론조사 지지율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대통령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3건의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68].
    설문지에 직접 기명하는 방식이었으며, 배포한 1957매 중 투표한 매수 978매이며, 응답률은 50.0% 였다.
    이승만 431표 (44.1%), 김구 293표 (30.0%), 여운형 78표 (8.0%), 무기록 176표 (18.0%)

  • 한국여론협회(韓國輿論協會)가 1946년 7월 시행한 초대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69]
    종로4가 등 3개소 행인 6,671인을 대상으로 조사
    이승만 1916인 (28.7%), 김구 702인 (10.5%), 김규식 694인 (10.4%), 여운형 689인 (10.3%), 박헌영 84인 (1.3%), 기타 110인 (1.6%), 모르겠다 2476인 (37.1%)

  • 미군정청 홍보처가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70]
    이승만 43.9%, 김규식 18.5%, 여운형 17.5%, 김구 15.2%, 허헌 1.3%, 조소앙 1.3%, 김원봉 0.9%, 김성수 0.7%, 박헌영 0.4%

김구 신화의 진실

아래는 유튜브 펜앤드마이크TV에서 방영된 내용이다.

여담

노무현 때 5만원권의 지폐도안을 신사임당으로 정해질 때 10만원권 최고액권의 지폐도안을 김구로 정했다.

대한민국에서 국부로 성역화 되었는데,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고 방해한 인물이다. 정작 그 나라의 건국을 반대하고 방해한 인물이 마치 국부인냥 성역화 되고 그 나라 최고액권 지폐도안으로 선정되는 코메디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지구상에 대한민국 정도 일것이다.

막판에 김일성에게 이용 당했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김구는 좌익이 아닌 우익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럼에도 이승만의 반대 급부로 성역화 되면서 우익에 가까운 인물이고 좌익 인물들에 대한 백색테러 의혹이 있음에도 좌익에서 조차 빨리고 있다.

수많은 백색테러 의혹 등이 사실이라면, 좌익들이 뻑하면 아무나 극우로 모는데 사실 좌익에게 추앙받는 김구야말로 정말 극우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폭력적인 수단 암살 등을 동원해서 좌익들을 테러 했기 때문이다.

함께 보기

참고 자료

[정밀복기] 김구와 건국 반대 운동 내막
성시백 동지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한 반동분자로 있던 김구 선생을 돌려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북한 노동신문)
김구가 건국을 앞둔 상황에서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한 이유는 임정의 주불(駐佛) 외교위원이었던 서영해(徐嶺海)[71]와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72]에게 포섭 당했기 때문이란 주장이다. 김구의 추종자였던 조경한(趙擎韓)[73]은 “서영해가 나타나 ‘남북한을 통틀어 총선거를 하면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실 텐데 무엇 하러 이승만이 주도하는 남한만의 선거에 참여하려 하십니까. 김일성도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변심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이호,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하), 도서출판 복의 근원, 2013, 210쪽).
김구의 방북을 설득한 거물 남파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 관련 특집기사임.
대의(大義)에 충실했던 독립운동의 대부
임정의 중심인물로 활약… 동학농민ㆍ의병운동 거쳐 신민회에서 활동
백범일지에 "소련 공산주의 독재 반대" 써놓고, 자유대한민국 건국을 반대
김일성 만나 '합작'추진했는데 국부라니… 통합당은 국가 위기를 구경만 할 것인가
그[김구]는 1947년11월에 출판된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의 제3장에 “나의 소원”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여기서 자신의 정치이념이 “자유”라면서 “독재”에 대한 반대를 명백하게 선언하고 “독재 가운데서도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가 가장 무서운 독재”라는 말로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했었다.

그는 특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러한 독재 가운데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 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한 그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거부로 인하여 38선 이남에서 실시된 자유민주선거의 수용을 거부하고 이를 보이콧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김구는 5.10 제헌국회 선거를 앞둔 1948년4월 주변의 열화(熱火) 같은 반대를 뿌리치고 평양 방문을 결행하여 4월19일부터 이달 말까지 소련 군정 당국의 배후 조종 하에 김일성(金日成) 중심의 공산주의자들이 차려 놓은 ‘북한 공산정권’ 수립 예행 행사였던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둘러리로 참가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행(奇行)의 주인공이 되었다.

김일성의 북한은 그 뒤 이때 평양을 방문한 김구가 김일성을 만나서 “충성을 서약”하고 “임시정부의 관인(官印)을 김일성에게 바쳤다”는 선전을 해 오고 있다.

각주

  1. [연재] 孫世一의 비교 傳記 (1) -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월간조선 2001년 8월호
  2. 김재우, [죄와 벌의 사회사] 삼족을 멸한다는 것은? : 조선의 연좌제① 한국사연구회 2010년 12월 28일
  3. 3.0 3.1 안동김씨대동보( 安東金氏大同譜), 1979, 권 8 p.48 : 김만묵 - 김재하 - 김구 - 김인, 김신
  4. 구 안동김씨 익원공파 세계도 네이버 블로그
  5. 건명 : 金昌洙 三招. : 015a : 김창수(金昌洙)와 치하포 여점(旅店) 주인 이화보(李化甫)에 대한 취조 기록 : 『報告書』 0001권, 奎26048, 010a-020a면,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6. 김창수(金昌洙) 삼초(三招) 독립운동사자료집(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7. 43. "보고서 제 16호 : 인천항 경무서 죄인 김채란, 홍문선등 4명이 월옥하려하였으나김하진의 고발로 발각되어 공판기를 첨부상송하여 현에 보고하니 재처지령하심을 바람. " : 『司法稟報(甲)』 0040권, 奎17278-v.1-128, 075a-075a면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8. 운산면(雲山面) 북한지역정보넷
  9. 한국근대지리정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0. 기동(基洞) 좌표 : [125.42906290792739, 38.16400831806625]
  11. 백범일지에 "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 접(接) 이름을 '팔봉'이라고 짓고 푸른 비단에 '팔봉도소(八峰都所)' 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었다. 표 어로는 '척양척왜(斥洋斥倭, 서양과 왜를 배척한다).'라고 넉 자를 써서 높이 매달았다."라고 나온다.
  12. 김형진(金亨鎭, 1861~1898)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13. 18. "보고 : 사형에 처한 백낙희와 동모한 3인, 수종한 2인을 사형에 처하고 도망한 김형진 등 6명을 잡기가 어렵다는 보고" 029a : 해주부 장연군수 염중모(海州府 長淵郡守 廉仲模)가 법부대신(法部大臣)에 올린 1896년 4월 6일자 보고
  14. [이동복칼럼] [[백범일지]]를 읽고 백일몽에서 깨어 날 것을 문재인 씨에게 권한다 whytimes 2019-08-16
  15. 산시성 타이위안시(山西省 太原市) 구글 지도
  16. 내몽골자치구 바오터우 시(包头市)
  17. 김종항, 안우생,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경륜》 『민족의 은혜로운 어버이품 6』 (평양:통일신보사,1990) p.140
  18. 해외의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ⅩⅡ):中國篇(7)李慈海自傳 - 31. 일본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 공훈전자사료관
  19. 해외의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ⅩⅡ):中國篇(7)李慈海自傳 - 서론 공훈전자사료관
  20.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 32, 中國篇 7 李慈海自傳 (國家報勳處, 2007.12.20) 31. 일본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 : p.336
  21. 부작의(傅作義, 1895~1974) 나무위키
  22. 나의 친구 김영주 (48) - 「국사(國士)」 이충모(李忠模) 선생 [중앙일보] 1991.06.28 종합 20면
  23. 이용상(李容相,1924∼2005), 《삼색의 군복(三色 軍服)》 (서울 : 한줄기, 1994) p.294
  24. 離合無常(이합무상)! 昨今(작금)의 政情(정정) 경향신문 1948-01-28 1면
  25. 南北要人會談(남북요인회담) 選擧對策講究必要(선거대책강구필요) 金九氏主張(김구씨주장) 조선일보 1948-01-28 1면
  26. 南北統一總選擧(남북통일총선거)못되면 小總會(소총회)서 재검토하라 경향신문 1948-01-28 1면
  27. [김효선 칼럼] 거물 간첩 성시백의 포섭작전 내막 : 해방공간의 김구, 선거도 정부수립도 반대 뉴데일리 2010-08-12 : 간첩 성시백이 김구에게.."장군님도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고자..."
  28. 28.0 28.1 유어만(류위완, 劉馭萬) 중국 총영사의 代電 제119호 : 1948년 4월 20일 - 김구가 장덕수 암살에 연루된 혐의가 적지 않다고 했다.
  29. 29.0 29.1 Kimm Koo refuses to identify Kim Suk Whang, reputed leader of the ten who conspired to assassinate Chang Dok Soo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된 10명의 용의자에 대한 군사 재판에 출석하여, 김석황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는 김구] 1948.03.15 법정 사진
  30.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좌우 거목의 세기적 대담》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pp.368~369
  31. 합당(合黨)? 행동통일(行動統一)? 김구·김규식·홍명희 삼씨 비밀회합 빈번(金九·金奎植·洪命熹 三氏 秘密會合 頻繁) 1948.03.04 경향신문 1면 / 경교장(京橋莊)에 내왕번빈(來往繁頻) 1948.03.18 경향신문 1면
  32. 會談提案 作成(회담제안 작성) 明日 發表(명일 발표)할 豫定(예정) 1948.04.18 조선일보 1면
  33.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4월 19일 > 김구, 청년 학생들의 북행만류에 비장한 결의 표명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4월 20일
  34.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4월 19일 > 김구 38선을 넘어 북행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4월 21일
  35. 자료대한민국사 제7권 > 1948년 5월 5일 > 남북협상 참석차 북행했던 김구, 김규식 입경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5월 06일, 07일
  36. 전현수 역, 『레베제프일기(1947~1948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2006.
  37. 김영중(金英仲) 편, ≪레베데프 비망록 :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1947.5.14~1948.12.26 기록≫ (제주, 해동인쇄사, 2016) / (Naver 책 : ISBN 480B170805082)
  38. 신복룡,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주간조선 2371호] 2015.08.24
  39. 39.0 39.1 39.2 미군철퇴완료(美軍撤退完了) 어제 최후(最後)로 1600名(명) 이한(離韓) : 자주독립(自主獨立)에 거보(巨步) 한위감시하(韓委監視下)에 인천출항(仁川出港) 1949.06.30 경향신문 1면
  40. 40.0 40.1 40.2 주한미군철퇴완료(駐韓美軍撤退完了)! 미육군성성명서발표(美陸軍省聲明書發表) 1949.07.02 조선일보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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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김구-김일성의 만남, 몰랐던 이야기들 New Daily 201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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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백범일지 위키문헌 : 영천암으로 검색
  55. 북한은 다 기록해 놨다 : 기록 공개 두려운 한국사람 많을 것 | 탈북 기자 김길선 증언 (생생현대사 2023. 9. 16) 14분부터 평양 절에 머물 당시 김구와 이보익의 이야기가 나옴.
  56. 韓獨中執(한독중집)서 金九氏演說(김구씨연설) 平和的 協商希望(평화적 협상희망) 1949.01.18 동아일보 1면
  57. 自主的(자주적)으로 統一成就(통일성취) 1949.01.18 조선일보 1면 : 서울에서 南北協商(남북협상) 開催(개최)하자 韓獨中執(한독중집)서 金九氏 演說(김구씨 연설)
  58. 韓獨中執委會(한독중집위회) 提案宣言等(제안선언등)을 决議(결의) 1949.01.19 조선일보 1면
  59. 政府代辯人談(정부대변인담) 三領首 云々(삼령수 운운) 不當(부당), 協商(협상) 주장은 政治遊戱(정치유희) 1949.01.19 동아일보 1면
  60. 領袖云(영수운)은 不察(불찰) 南北協商(남북협상)이란 말 삼가라 1949.01.19 경향신문 1면
  61. Interview with 2nd Lt. Leonard Bertsch, political advisor for General Hodge. : ◦ Robinson, Aug. 16, 1946 NARA 문서
  62. US-USSR Joint Commission 2nd Year, 1 of 2:p.3 G-2 Weekly Summary 98 (pp.21~23) 여운형 암살, 송진우 암살과 연결되어 있다.
  63. 장덕수 살해사건 제5회 공판 개정 : 1948년 03월 08일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8년 03월 09일
  64. 조소앙#장덕수 암살과 정계 은퇴 위키백과
  65. Mark Gayn,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66.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67. 《독립을 향한 집념(執念) : 고하 송진우 전기(古下宋鎭禹 傳記)》 (東亞日報 社, 1990년 5월) p.238 에는 당시 이런 발언이 오간 상황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68.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정치 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69. 한국여론협회 조사 발표 (韓國輿論協會調査發表) 초대 대통령(初代大統領) 예상 후보 지지율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70. 공동위원회 사업 재개 이후 남․북조선 상황에 대한 정보 1947.06.05 : 스티코프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
  71. 서영해(徐嶺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2. 성시백(成始伯)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3. 조경한(趙擎韓)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