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 분단이 구체화되는 과정은 소련 붕괴 후 발굴된 자료들에 의해 스탈린이 주도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음에도, 대다수 역사학자들이 소설가로 전락한 한국에서는 소련과 김일성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책임을 이승만과 미국에 돌리고 있다. 교과서에도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분단의 원인으로 나온다고 한다.[1][2]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남한마저 공산화되어 김일성 일족의 노예가 되었어도 좋으니 통일정부를 수립했어야 하며, 국민주권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에는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통일지상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한국이 공산화와 김일성 일족의 지배를 수용한다면 통일은 지금이라도 당장 가능하다. 그러나 왜 무턱대고 통일만 주장하고 소련과 김일성이 한 일들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38도선의 설정

소련군이 1945년 8월 9일 일본 지배하의 한반도를 웅기로부터 침공하기 시작하여 빠른 속도로 남진하자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군사분계선 설치를 강구한다.

삼팔선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1945년 8월 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이후 주한미군사령관 역임) 대령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이후 케네디와 존슨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별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1945년 8월 23일 개성시까지 내려갔던 소련군은 9월 초에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소련의 북한 단독정부 수립 계획과 실행

스탈린은 1945년 9월에 이미 소련군 점령지인 한반도 북부를 분할하여 별도 정부를 세운다는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평양의 소련 군정은 이 계획을 현지에서 실행하고 있었다. 소련이 유엔 감시하의 남북 동시 총선거를 통해 단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유엔 결의안을 거부한 것도 자신들의 영향력이 사라지는 조선인들의 자율적 통일정부 수립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1945년 9월 초 스탈린이 하바로프스크 88여단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하고 북한 지도자로 결정함.[3][4]
    - 북한에 김일성을 지도자로 하는 단독 정부를 만들겠다는 의도의 표출이다.

  •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만들라"는 비밀 지령을 내림.[5][6][1][7]
    지령문서는 스탈린(소련군 최고사령관)과 안토노프 軍(군)참모총장이 바실레프스키 극동전선 총사령관과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제25군 군사평의회에 보냈던 1945년 9월 20일자 암호 전보이다.[8][9]

  • 1945년 12월 25일 쉬킨 보고서[6][1][10] : 이오시프 쉬킨 (Iosif Shikin, 1906-1973)
    스탈린의 지령이 잘 이행되고 있지 않다고 평가하고, ‘북한의 반동(反動) 지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토지개혁과 북조선 내 정권을 중앙집권화할 것을 스탈린에게 건의’하였다.

  • 1946년 1월 5일 소련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협력을 거부한 민족 지도자 조만식(曺晩植, 1883 ~ 1950) 선생을 고려호텔에 연금하여 정치적으로 제거함.
    민족진영 인사들은 배제하고 북한에 공산정권을 세우겠다는 소련의 의지가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소련이 북한에 허용한 정당은 북조선공산당, 신민당(연안파), 천도교 청우당 등 3개이며 모두 소련에 순종하던 정당들임. 공산당과 신민당은 합당하여 노동당으로 되었다.

  • 소련군정은 1946년 2월 9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11] 사진의 현수막에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에 政府(정부)이다."라고 씌어 있다. 북한은 이미 단독의 임시정부를 만들어 토지개혁까지 실행했어도 소련은 남한을 직접 통치한 미국과 달리 조선인(김일성)을 내세워 간접통치를 했다고 찬양받는다. 하지만, 이승만은 남한 단독의 임시정부가 필요하다고 한 그의 발언이 실현되지도 않았는데도 분단의 원흉으로 몰린다. 이것이 한국 학계의 수준이다.
  • 1946년 2월 8일 사실상 북한 단독의 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12][13][14][15]
    이는 북한에 단독의 부르조아 민주정권을 수립하라는 스탈린 지령을 이행한 것이다. 김일성이 이때 이미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는 것도 중요한 분단 원인이다.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자신이 최고 지도자가 아닌 통일정부 수립은 바라지 않게 된다. 권력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을 잃지 않고 통일을 하려다 보니 남한 적화를 위해 6.25와 같은 남침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인사들은 소련은 미국과 달리 조선인을 전면에 내세워 간접통치를 했다며 오히려 찬양한다.

    김일성의 임시인민위원회 출범 당일의 연설문 《목전 조선 정치형세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조직문제에 관한 보고(目前朝鮮政治形勢와 北朝鮮人民委員會의 組織問題에 關한 報告)》에도 북한 단독의 중앙주권기관(사실상 정부)의 출범을 강조하며, 소련의 양해도 얻었다고 주장한다.[16][17]

  • 1946년 3월 5일 북한에서 쉬킨 보고서의 제안대로 토지개혁을 단행.
    "무상몰수·무상분배"라고 하나 농민은 토지의 소유권 아닌 경작권만 받았고, 지주에게 내던 소작료 대신 국가에 현물세를 내야 해서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6.25 이후에는 농민은 경작권마저 박탈당하고 협동농장 체제의 고용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18])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공산주의 개혁을 진행하여, 남북한은 이질적인 사회로 되어 통일정부 수립은 남한이 공산화를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게 된다.

  • 1946년 10월 1일 김일성 대학 설립[19]
    해방 후 평양에 북한 최초의 대학을 설립하면서 학교명을 "김일성 대학"이라 한 것은 이미 김일성을 북한만의 최고지도자로 상정하고, 그를 우상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남한의 미군정과 협의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할 뜻이 있었다면 이런 일까지 벌일 리는 없다.

  •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통해 단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1947년 11월 14일의 유엔 결의안을 소련이 거부.[20]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유엔은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통한 단일 정부 수립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지만, 소련이 수용을 거부하여 북한 지역에는 선거를 할 수 없게 된다. 조선인들의 자율적 의사에 의한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자신들이 내세운 대리인 김일성이 집권할 가능성도 사라지고, 한반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지극히 제한되므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공내전이 한반도 분단에 미친 영향

1946년 5월 스탈린 “북한을 중공군 후방기지로” 지령

이정식 (李庭植, Chong-Sik Lee, 1931 ~ ) 전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의 견해[21]

“국제사적 시야에서 한국현대사를 재조명해야 합니다. 해방정국은 우리 교과서에는 잘 보이지 않는 손이 뒤흔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몰랐던 진실이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수수께끼는 소련의 세계정책의 변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 키를 쥔 인물이 스탈린입니다. 해방 직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열린 런던 외무장관회담과 스탈린의 대북한 비밀지령, 그리고 북한의 중국 팔로군 후방기지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북한이 중국 공산화의 후방지역, 내지는 연장지역으로 변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과 북이 합해 통일을 이룬다는 꿈은 춘몽(春夢)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스탈린은 만주를, 그리고 나아가서 중국을 국민당과 미국에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내전에서 모택동의 중공군이 승리한 배경
일제가 지은 산업시설들이 몰려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만주를 두고 벌어진 국부군과의 쟁패전에서 패퇴하던 중공군이 북한을 후방 기지로하여 피난도 하고, 부상자 치료, 훈련, 보급품과 무기 조달 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세가 역전시킬 수 있었다. 중공군은 만주에서의 역전 승리 후 불과 1년이 못되어 중국 본토 전체를 석권했다.[22][23] 이러한 배경 때문에 소련이 북한을 포기하고 남북 통일정부를 세우도록 할 수가 없었다.

북한도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중공측을 도운 내역을 기록한 책을 낸 적이 있다.

“림표 부대에 포병지원·수풍의 전기를 중국으로 보냈다”

이처럼 국공내전에서 중공군이 승리하는 데는 북한의 지원이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 때문에 6.25 때 모택동이 김일성의 참전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중공군을 투입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런던 외무장관 회담 : 1945년 9월

포츠담 선언 후 2차대전 전승국 외무장관들의 전후문제 처리 협의체 (Council of Foreign Ministers)를 만들고 여러 차례 외무장관 회담이 열렸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1945년 9월의 제1차 런던 회의와,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한 12월의 제2차 모스크바 회의 (소위 모스크바 3상 회의)이다.
9월의 런던 회담에서는 한국문제는 논의되지 않았으나, 소련의 일본 홋카이도 분할요구나 리비아의 트리폴리 지역 할양 요구 등이 거부되자 미소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소련은 중국 국공내전에서 장개석 지지를 철회하고 모택동 지지로 선회하였다. 북한을 중공군 지원 후방기지로 삼게 되며, 이것 또한 한반도 분단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이 교수는 한국 학자들이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1945년 9월의 '런던 회의'를 주목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 외무장관들이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회의였습니다. 한반도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소련의 스탈린은 이 회의에서 전후 일본 통치 참여와 지중해 진출을 위한 북아프리카 트리폴리타니아 할양을 요구했지만 미국과 영국이 일축해 버렸다.

런던 회의는 9월 15일쯤 결렬됐고, 이로써 약간 온기가 남아 있던 미·소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닷새 뒤인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중요한 지령을 내린다. '북조선의 광범위한 반일(反日) 민주주의 정당 연합을 토대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권을 설립하라'는 것이었다. "이 지령에는 미군과 교섭하거나 협조하라는 말은 전혀 없었습니다. 소련 점령 지역에 단독정부를 세우라는 지시였던 것이죠."

1945년 9월 '북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소련 지령에 따라 1946년 2월에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1948년 북한 정권 수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분단 고착화의 이유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1946년 6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나 그해 미·소 공동위원회의 실패 등에서 찾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이 교수는 "스탈린의 지령은 이승만이 아직 귀국하기도 전에 내린 것"이라고 했다.


전승국 외무장관 협의체 자료

미군정의 중공군 북한 유입에 대한 정보 기록

1946년말 미군정의 정보 기록에 국민당군에 패한 중공군 8로군 수만 ~ 10만명 가량이 북한으로 들어와 있다고 나온다.

p.3 : 4항 - 패한 8로군이 북한으로 들어옴. 강계와 평안북도 주둔. 1946년 9월 3만6천명., 10월 6만명.
p.11 : 북한에 8로군이 대규모로 들어옴. 30만 군대 창설
p.66 : 8로군 10만명 북한에 옴. 10~12개 역에서 각 역마다 1000명씩의 중국인 봄.

국공 내전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

아래와 같은 국공 내전에 대한 당시 국내 언론의 보도를 보면 소련과 북한이 중공군과 일심동체가 되어 도와주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공식적인 중공 정부 수립 이전 내전 단계에서 중공군과 북한은 군사적인 동맹 수준의 유대를 맺고 있었다. 한반도 분단은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문제와도 깊숙히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련이 미국과 전쟁을 벌여 남한까지 적화할 능력이 없었던 이상 남북통일 정부를 세운 뒤 북한을 포기한 채 물러날 수 있는 상황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파들이 분단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안들

아래의 주장들은 소련과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고, 분단의 책임을 미국과 남한에 뒤집어 씌우기 위해 고안해낸 억지에 가깝다.


남한 우파들의 반탁운동이 분단을 불렀다는 주장

소련은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 지령문과 12월 25일자 "쉬킨 보고서"에 따라 북한에 단독 정부를 세우는 일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다. 특히 쉬킨 보고서는 남북한에 단일의 임시정부를 세우고 4개국이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하는 모스크바 3상회의가 진행 중일 때 스탈린에게 보고된 것으로, 소련의 본심을 담은 계획서이며 대체로 그대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 임하는 소련의 태도는 본심과는 다른 기만적인 것으로 거기서 결정된 신탁통치를 두고 국내에서 찬반 투쟁이 벌어진 것이나, 이후의 미소공동위원회 등은 별 의미가 없고, 이를 빌미로 남한과 미군정을 흔들려는 소련의 의도에 놀아난 것이다. 미국과 남한은 소련의 본심을 파악하지 못해 소련의 기만적 협상 전술에 말려들었다고 할 수 있다.[24][25][26]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분단의 원인이라는 주장

이승만이 1946년 정읍의 강연회에서 6월 3일 남한 단독의 임시정부 수립 필요성이 있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것이 남북분단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승만은 당시 실권자가 아닌 유력 정치인 중의 한 명으로 개인적 견해를 표명한 것일 뿐이다. 미군정도 그 견해에 반대를 표명했고, 그 견해를 따라 일을 추진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후의 미소공동위원회에서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남북이 분단 정권을 세우게 된 것이 이승만의 발언 때문이라는 것은 넌센스이다. 실권자도 아닌 이승만의 개인적 발언과 그 후 분단의 구체화 과정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분단의 책임을 남한과 미국에 덮어씌우고, 소련과 김일성에게는 면죄부를 줄 구실만 찾다보니 당시 실권자도 아닌 이승만의 개인적 발언 때문에 분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권자도 아닌 이승만이 미국과 소련 군정을 능가하는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당시 김일성이승만과 달리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분단에 대한 책임이 있다.


남한 단독의 5.10 총선거가 분단의 원인이라는 주장

1948년의 5.10 총선거가 남한에서만 실시된 것은 소련이 유엔 결의안의 수용을 거부하고 북한 지역에서는 선거를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7][20]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동시 총선은 강대국의 영향을 배제하고 조선인들이 자주적으로 통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신탁통치안보다 더 합리적인 방안이다. 이것을 거부한 소련은 분단의 원흉이 아니고, 유엔 결의안에 따라 총선을 실시한 남한만 잘못이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것이 분단의 원인이라면 남한은 계속 미군정 체제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북한에 흡수 통일되든지 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당시 북한은 공식적으로 선포만 하지 않았을 뿐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단독정부가 가동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지도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런 것은 분단의 원인이 아니고, 5.10 총선거만 원인이라 하는 것은 남한이 소련과 김일성 아래로 들어가서 공산국가가 되었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북조선인민위원장 김일성은 소련이 대리인으로 내세운 지도자지만 비록 형식적이더라도 선거를 거쳤다. 북한이 이미 행했던 이런 각종 선거는 분단의 원인이 아니고, 남한의 5.10 총선거만 분단의 원인이라는 것인가?

분단 70년 후의 남북한 모습

2023년 12월 31일자 Elon Musk의 트윗 "Night and day difference".

일론 머스크는 사진 설명글에 "미친 아이디어: 한 나라를 반으로 나눠서 한쪽은 자본주의, 한쪽은 공산주의로 두자. 그리고 70년 후 그 결과를 들여다보자(“Crazy idea: Let’s divide a country into half capitalist and half communist and check on it 70 years later.”)"라고 썼다.

2023-12-31 Elon Musk.jpg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사설> 한국정치학회의 解放前後史 새로 쓰기 조선일보 2006.04.22 A31 면
  2. <사설> 한국정치학회의 ‘해방전후사 제대로 쓰기’ 조선일보 2006.12.11 A39 면
  3.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
  4. 평양 소련군정 요원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Konovich Mekler, 1909~2006)도 김일성이 귀국전 스탈린의 면접심사를 받은 것을 증언했다 : 김일성정권 내가 만들었다; 소련군 정치장교 G .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92.5) pp.48-58. 極東問題硏究所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Moscow Times 07/22/2004
  5. 신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金聖甫)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 (3) 스탈린 비밀전문과 서북5도행정국 (국사편찬위원회, 2002-12-30)
  6. 6.0 6.1 <제40회 이승만 포럼> 원문으로 본 그 비밀의 정체 : 스탈린 지령문 "북한에 소련체제 이식은 이렇게 하라" New Daily 2014.06.24 : 스탈린 지령문 원문 이미지
    소련이 만든 북한, 아직도 붕괴 안 된 이유는…"돌연변이 공산주의 북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New Daily 2014.06.21
  7. 7.0 7.1 분단·스탈린지령문 놓고 ‘불꽃토론’ 조선일보 2006.04.21 종합 A4 면
  8. "北韓(북한)에 부르주아 民主政權(민주정권) 수립"스탈린,占領(점령) 蘇聯軍(소련군)에 비밀지령 문서 50년만에 공개 1993.02.26. 동아일보 6면
  9. 극동의 소련군 : 우남위키
  10. 구소 북 장악음모 “결정적 자료”/ 쉬킨중장 비밀보고서 내용·의미 한국일보 1995.08.14
  11.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12.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원 : 북한연표 해설목록 국사편찬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13.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조직, 인민정부 진용 자유신문 1946년 02월 20일
  14. 북선위원회진용(鮮委員會陣容) 공업신문 1946.02.21 1면
  15. 北朝鮮 臨時人民委員會 樹立, 委員長 委員二十五人等 部署決定 중앙신문, 1946.02.20
  16. Item #166 민주조선 자주독립의 길, 김일성 장군 중요 논문집 북조선로동당중앙본부 선전선동부 (1947.03.10) : p.5 부터 나옴.
  17. 김일성, 1945년 말부터 북한 단독 정권 준비했다 최영재 기자, 아시아 투데이 2015. 04. 20 : 1963년판 김일성 선집에도 위 연설문이 실려 있었는데 상당히 수정되어 있다.
  18. 북한 협동농장 북한 지식사전 (통일부 북한정보 포털)
  19. 김일성종합대학 위키백과
  20. 20.0 20.1 한국문제의 UN상정 및 총선거 결의 - 국가기록원
  21.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의 인생 유전 중앙일보 2011.11.09 종합 4면
  22. 송재윤, <문혁춘추>3회. "1948 장춘 홀로코스트"(I) pennmike 2018-01-14
    송재윤, <문혁춘추>4회. "1948 장춘 홀로코스트"(II) pennmike 2018-01-19
  23. 송재윤, <문혁춘추 :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5회. "해방, 인민을 삼켜버린" pennmike 2018.01.30
    송재윤, <문혁춘추 :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6회. "인민해방군과 인해전술" pennmike 2018.03.30
  24.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1부> (16) 신탁통치가 분단 막았을까? 동아일보 2004-12-05
  25.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1부> (18·끝) 에릭 반 리 (Erik van Ree) 인터뷰 동아일보 2004-12-19 : dr. Erik van Ree Univ. of Amsterdam
  26. 이철순 부산대 정치외교학 교수, 북한의 기만적 협상 전술 한국일보 2013.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