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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토지개혁
최근 수정 : 2019년 8월 8일 (목) 09:23

북한은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직후인 3월 5일 토지개혁을 단행한다. 이것도 남북 분단을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북한 토지개혁의 시행 과정

북한은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을 공포하면서 토지개혁을 단행한다.[1] 소위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포장되어 선전되지만 농민은 사실상 토지의 소유권 아닌 경작권만 받았다. 지주 계층은 대체로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으므로 그들의 땅을 몰수하고 친일파로 몰아 오지로 추방한 후, "토지는 밭갈이 하는 농민에게!"라는 슬로건 아래 농민들에게 토지 경작권을 준 것이다.[2] 이로 인해 국내에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김일성에 대한 지지가 급상승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권력기반이 강화되자 연간소출의 25% 라는 현물세를 부과한다.



현물세는 연간 수확량의 25% 였다.[4][5] 여기에다 애국미헌납운동(愛國米獻納運動) 등의 구실로 울며 겨자먹기로 추가로 납부해야 하는 부담까지 고려하면 지주에게 내던 소작료보다 나을게 없었다.[6]

애국미 헌납운동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통해 땅을 분여받은 황해도 재령의 농민 김제원(金濟元, 1888~1950)이 그 해 11월에 수확을 거둔 30가마니의 쌀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애국미로 국가에 헌납한 것을 계기로 황해도를 비록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애국미 헌납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는 자발적 헌납을 가장한 실질적 추가 조세 징수에 다름 아니었다.

이때의 애국미 헌납운동은 후일 국가가 유사한 방법으로 되풀이해 인민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가혹한 세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


8월에 도에서 반동분자들의 활동도 관찰되었다. 그들의 활동은 1946년 8월 15일 명절 준비기간에 특히 강화되었다.

반동행위 대부분이 남조선의 영향을 받았고, 남조선에 존재하는 다양한 도당들의 첩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례를 들겠다.
1946년 8월 14일 야간에 안악군에서 반동적인 내용을 담은 격문 40매가 부착되었다. 격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었다. “농민들의 해충인 붉은군대와 사실상 사망한 가짜 김일성”, “농촌에서 공산주의자 강도들을 제거하자”, “70%의 세금으로 농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해충 김일성을 죽여야 한다.”, “김일성, 공산주의자들, 경찰이 곡물 70%를 수탈하는 방법으로 농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 농민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이들을 죽여야 한다. 이 수매는 붉은군대를 위한 것이다.”, “우리를 약탈하고 38도선의 개방을 방해하는 붉은군대를 보다 빨리 쫓아내자. 조선인들이여! 이 일에 동참하라” 등.
격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관의 서명이 있었다.
“민주청년동맹”.
“테러분자집단”.

“청년농민”.


토지개혁은 소련이 입안

북한의 토지개혁은 김일성이 단행한 것으로 선전되었지만, 처음부터 철저히 소련이 계획한 것이었다.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직후인 1945년 9월 22일에 벌써 모스크바의 쉬킨에게 북한의 토지 소유 실태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고 있다. 11월에는 소련군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는 토지개혁을 제안하고 있고, 그해 12월 25일의 쉬킨 보고서도 같은 제안을 하고 있다. 이런 안들이 입안되고 임시인민위원화가 실행하는 형태로 진행된 것이다. 토지개혁이 김일성에 대한 지지가 급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발신자 크라스케비치 / 수신자 쉬킨(Iosif Shikin) (적군 총정치국장) : 북한의 토지 소유 실태에 대한 보고





메레츠코프는 연해주 군관구 사령관 / 스티코프 / Vyacheslav Molotov(1890~1986) / Nikolai Bulganin(1895~1975)



소련군정 인사들이 토지개혁과 관련하여 본국에 올린 보고서
이 외에도 북한 각 지역에서 토지개혁이 진행되는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자주 올리고 있다.


토지개혁의 결과

1946년 3월 경작권을 무상분배한 토지개혁의 결과 북한 주민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 사이에서 집권기반이 취약했던 김일성에 대한 지지가 급상승했다. 지지율이 오르자 자신감을 얻은 김일성은 6월에는 연간 소출의 25%에 대한 현물세를 슬그머니 부과했고, 갈수록 비공식적인 준조세가 늘어났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남북 분단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든 조치였다. 공개된 소련문서에 의해 소련은 북한에 처음 진주할 당시부터 토지개혁을 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 소련은 애초에 한반도에 통일정권을 세울 의사가 없었고, 북한지역에 자신들의 영향력하에 있는 단독정권을 세우는 것이 목표였다는 것이 확실히 밝혀진다.

경작권 몰수와 협동농장 체제로의 전환

무상분배라던 토지는 6.25 이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작권마저 몰수 당하고, 농민들은 개인 땅은 한 평도 없는 협동농장의 고용원으로 전락하였다.[7]

북한은 1953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농업협동화 방침을 채택하고 농민들을 자연부락 단위의 협동조합에 강제 편입시키기 시작하여, 1958년 8월에 이르러 사회주의적 소유 형태인 농업협동조합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자연부락 단위의 농업협동조합이 1962년에 협동농장으로 개칭되었다. 1962년 협동농장은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해 농업협동조합을 말단 행정단위인 리(里) 단위로 통합하여 그 규모를 크게 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의 농업생산체계는 토지 및 생산수단의 협동적 소유에 바탕을 둔 협동농장과, 국유에 바탕을 둔 국영 농/목장으로 이원화되었다.

탈북 작가 최진이는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 "농민들은 얼마안가 나라에 땅을 몰수당하고 ‘사회주의’의 미명하에 지주의 머슴에서 수령의 노예로 신분이동을 하였다."고 증언했다.[2]

북한을 대표하는 작가 양성기관인 김형직사범대 출신으로 1999년 월남한 탈북 작가 최진이는 북한의 친일청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해방이후 전 국민의 숙원인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 내는가 하는 문제는 정치가로서의 승패가 달린 관건적 안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떠오르던 많은 정치인사들 중 누구보다 정치 감각이 탁월했던 김일성은 이를 자기 권력기반 형성에 완벽하게 이용하였다. 그 대표적 방법이 인구 70 %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사회에서 일제시기 땅마지기나 가지고 있던 자들을 우선 처벌하는 일이었다. 3천 평 이상 소유한 자는 지주, 천오백 평부터는 부농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땅을 무상 몰수하는 것과 동시에 본인들은 전부 타고장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의 개인적 사정을 알 바 없는 낯선 고장 사람들은 국가가 ‘친일주구’ ‘역적’이란 딱지를 붙여놓은 추방자들을 심판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 심판대에 오른 사람들은 피비린내를 맡기 전에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군중 히스테리의 제물로 고스란히 바쳐졌다. 군중의 열기가 고조되면 될수록 김일성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급상승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인들을 ‘적대계급’ 증오사상으로 자극시킬 때 그것이 가져올 반사작용의 효과를 알았다. 농민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분배해 준 자신에 대한 숭배열이었다. 김일성이 무상 분배한 땅은 ‘국가’의 이름하에 곧 압수될 정치 미끼일 뿐이었다. 농민들은 얼마안가 나라에 땅을 몰수당하고 ‘사회주의’의 미명하에 지주의 머슴에서 수령의 노예로 신분이동을 하였다.”

북한의 철저한 친일청산이란 소비에트(soviet)화를 합리화시키고 나아가서 북한을 공산주의 체제로 재편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가혹한 전체주의 공산혁명에 다름 아니었다.

남한 학자들의 실상을 무시한 북한 토지개혁 미화 찬양

남한 좌파들은 소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완벽한 개혁이라며 찬양해 마지 않지만 내막은 참담하다. 무상분배라지만 토지의 매매나 소작등 소유권 행사가 금지되어 있어 사실상 경작권만 받은데다 조세부담도 커서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 주민이 매년 내는 현물세에 준하는 연간 소출의 30%씩을 5년간만 내면 토지의 소유권까지 완벽하게 가질 수 있었던 남한의 개혁과는 비할 바도 못된다.[8]

더구나 6.25 휴전 직후부터 시작된 집단농장화 정책으로 농민들은 경작권마저 몰수 당한 채 개인 땅은 한 평도 없이 협동농장의 고용원 처지로 전락했는데도 남한의 위선적 좌파들은 이런 일은 마치 없기나 한 듯이 처음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강조하며 완벽한 토지개혁을 했다고 찬양하고 있다.

남북한의 토지개혁을 비교한 김윤식의 강의를 보자[9]

▲ 토지개혁

42.10 / 45.8.15 / 48.8.15 / 48.9.9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된 것은 48년 8월 15일이며 북한이 정부로 수립된 것은 48년 9월 9일이다. 분단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42년과 45년 사이, 45년과 48년 사이는 국가가 없는 비어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6년 2월, 즉 북한에서 토지개혁을 완성한 시기가 사실상 남북분단이 확정된 시기이다. 토지개혁은 혁명적이며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물질적 근거는 토지밖에 없으므로 이것을 개혁한다는 것은 혁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남한 역시 토지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한은 북한과 달리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나가게 된다. 남한은 토지개혁을 완성하지 못하지만 북한은 완벽한 토지개혁을 이룬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토지개혁이라는 사정을 덮어 놓고 48년 8월 15일이 분단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김윤식은 남북한 토지개혁의 실질적 내용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단지 정확한 표현도 아닌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말에 현혹되어 실제와는 정반대의 잘못된 평가를 하고 있다. 국가가 국민의 사유재산을 함부로 무상몰수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공산주의 사회는 국민의 자유와 생명까지도 자동적으로 무상 몰수할 수 있다는 기초적 상식도 없는 위선적 좌파 지식인의 한계이다. 다만 북한의 토지개혁 단행이 분단의 실질적 출발점이라는 그의 말은 옳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북조선 시도군 인민위원회 대회 중요문헌집,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 1947 (RG 242 National Archives Collection of Foreign Records Seized ; Record Group)(Captured Korean Documents, Doc. No. SA 2009 II ; Series) : 北朝鮮土地改革에 關한 法令 (1946년 3월 5일) p.17 (24)
  2. 2.0 2.1 류석춘․김광동, 북한 친일(親日)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시대정신 2013년 봄호
  3. 북조선 인민위원회 사법국 편찬(北朝鮮人民委員會司法局編纂) 북조선 법령집(北朝鮮 法令集) : 1947년 (RG 242 National Archives Collection of Foreign Records Seized ; Record Group)(Captured Korean Documents, Doc No. SA 2005 ; Series)
    p.58 (62) 북조선토지개혁에 관한 법령(北朝鮮土地改革에 關한 法令) : 1946년 3월 5일
    p.93 (97)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결정(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決定) 제28호 농업현물세에 관한 결정서(農業現物稅에 關한 決定書) : 1946년 6월 27일
    p.93 (97) 북조선 인민위원회 법령(北朝鮮人民委員會 法令) 제24호 농업현물세 개정에 관한 결정서(農業現物稅 改正에 關한 決定書) : 1947년 5월 12일
  4. [農地改革硏究(金聖昊) > Ⅱ. 南北分斷과 土地改革 > 3. 農業現物稅와 小作制의 創出] 國史館論叢 第25輯, 국사편찬위원회, 1991-09-30
  5. 북조선 주민의 정치 동향과 반동세력의 투쟁 형식에 관한 참고자료 발신자 알렉산드르 이그나티예프 / 키워드 민주개혁, 토지개혁, 농업현물세 (25%), 여성평등법
  6. 소작제도(小作制度)
  7. 북한 협동농장 북한 지식사전 (통일부 북한정보 포털)
  8. 孫世一의 비교 評傳 (10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李博士 덕분에 쌀밥 먹게 되었다” 월간조선 2013년 3월호
  9. 한국 근현대문학사 제6강 남북한 분단체제에서의 글쓰기 ◆ 토지개혁과 남북한의 분단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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