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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론
최근 수정 : 2019년 8월 19일 (월) 10:28

일러두기

함께 보기: 이승만 TV, “친일청산이란 사기극(詐欺劇)” 강연.


작성 기초 자료들

(1) 이 문서는 주익종, “친일청산이란 사기극”,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213~224쪽을 기반으로 작성하되,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2) 또한 이 글에서 언급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위의 기본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연관 검색어

다음의 표제어들과 내용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상호 참조할 필요가 있다.

청구권 협정, 역사왜곡, 노무동원, 한일 회담 반대 운동, 민족문제연구소, 일제 징용사 왜곡, 대일 8개항 요구, 김태규 판사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관련 소신 발언

‘친일파 청산론’의 탄생과 성장

2019년 7월 22일자 《한겨레》기사를 그대로 올린 민족문제연구소의 게시판.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 진영 스스로 자신들이 '친일파 청산론'의 역사를 만들고 이어가고 있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논쟁을 현재까지도 이어가, 조국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전 청와대 민정수석)를 자신들이 내세우는 '친일파 청산론'의 역사의 현장에 세우고 있다. 이런 인식이 2019년 7월 이후에도 이어지는 《반일 종족주의》저자 테러 사건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친일파 청산론은 1964~65년, 한일 청구권 협상의 주체가 바뀌면서 싹이 텄다

이 논쟁은 해방 직후부터 전 국민적 공감대와 지지를 얻어 자연스럽게 형성되거나 제기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정략적 · 정치적 계산 아래 인위적으로 탄생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청구권 협정한일 회담 반대 운동, 대일 8개항 요구 등의 내용을 참고해 보도록 한다. 지금부터 그 궤적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장면(張勉) 정부의 인사들이 야당으로 밀려나면서 들고 나온 논의

일본에 대한 청구권 교섭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등을 통해 국제적으로 확인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의 국제법적 지위였다. 이승만 정부 역시 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교섭의 큰 틀을 마련한 것이다.

한일 협정에 반대(6. 3. 항쟁)하는 윤보선과 장택상. 이들 역시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이승만 정부 때부터 마련된 대일 청구권 협상의 기본틀을 유지했으며, 오히려 이를 강조하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 사이에 발생한 일본의 역청구권 제기와 미국의 중재 등을 거쳐 고심 끝에 마련한 <대일 8개항 요구안>의 본질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식민지배 기간 입은 피해 배상이 아닌 본래 한국 측 재산의 반환 청구’이다.

한일회담 청구권위원회 첫 회의에서, 한국 대표 임송본(林松本) 역시 그 본질이 ‘재산 반환 청구’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6. 25 전쟁과 휴전 뒤의 국내의 복잡한 사정으로 인하여, 대일(對日) 청구권 교섭이 실질적 토의에 들어간 것은 1960년 10월 제5차 한일회담의 청구권위원회의 33회의 회의였다. 이 때 일본은 미군정으로부터 이미 취득한 재한 일본인 재산을 고려하여 청구권을 조정해 달라고 하였다.

당시는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뒤 장면(張勉)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가 회담의 주체였다. 장면 정권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한국은 식민지에서의 한국인의 고통과 손해에 대한 배상까지 요구하려고 했지만, 재한 일본인의 재산을 취득한 사실을 고려하여 8개항만 요구한다.”

이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타협한 청구권 특별 조정의 대상이 <대일 8개항 요구>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물론 8개항 요구를 사수하려는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이미 식민지배의 고통에 대한 손해를 배상 받았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 것이다.

장면 정권에서 이루어진 한일회담은 이후 7개월 만에 5.16 쿠데타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박정희 정부 역시 전 정부에서 마련한 안을 토대로 협상을 이어갔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쿠데타로 인하여 정권을 잃고 야당이 된 장면(張勉) 정부의 인사들이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을 펼치면서 갑자기 돌변한 것이다.

이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던 청구권 협정의 기본 틀 자체를 아예 부정해 버렸다. 박정희 정권에 타격을 주기 위하여 반일 감정을 적극 조장하였고, 이 때 바로 ‘친일 청산론’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정신문화의 토대 분야에서 친일 청산론을 성장시키다

문학 평론가 임종국의 말년 모습. 최남선과 이광수, 유진오, 노천명, 모윤숙 등 27인을 '친일 문학가'로 규정한 《친일문학론》은 후일 《친일인명사전》이 만들어지는 토대가 된다. 그는 친일파 명단을 1만 2천 여 장의 연구 카드에 정리하였다.


청구권 협상이 타결되어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1965년, 일본 조총련계 조선 대학의 교원인 박경식(朴慶植)의 책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이 일본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부터 ‘강제징용’과 ‘강제연행’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쓰게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자료 자체로는 사실일 수 있으나, 박경식은 그 자료의 일부만을 부풀리거나, 학술 연구상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요인들을 배제함으로써 ‘강제 연행’이라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담긴 용어를 만들어 냈다.

박경식의 소속과 이 책이 출간된 해라는 맥락을 보면, 그의 연구 자체가 지닌 정치적 계산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국교가 정상화되면 북한은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포위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선전 선동의 목적으로 이런 주장을 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선동은 지금까지도 성공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시작된 이 주장은 학계에서 관련 연구를 진행할 때 토대가 되어, 한국의 정부 기관, 학교, 언론계, 문화계 등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내의 (재야) 연구자들 역시 ‘친일’이라는 개념을 이론화시려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써 임종국(林鐘國, 1929-1989)이라는 인물을 들 수가 있다.

그는 1966년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 작가 등 지식인들이 어떠한 친일 행위를 하였는가를 다룬 《친일문학론》(《親日文學論: 日帝暗黑期의 作家와 作品》, 서울; 평화출판사)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이후로도 《친일논설선집》, 《한국문학의 민중사》등과 같은 책을 내면서 일제의 침략이나 소위 ‘친일의 역사’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특히 1979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실린,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라는 글은 지식층과 대학생들에게 널리 읽혔다.

그는 생전에 1만 2천 장이 넘는 ‘친일인명 카드’를 만들어 놓았다. 과거의 연구자들은 연구를 위하여 작은 카드에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 내용을 정리해 놓는데, 그가 해 놓은 이 작업이 1989년 그가 죽은 뒤에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꽃 피우는 ‘친일파 명단 작성’

1991년 창립된 반민족문제연구소(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임종국이 남긴 자료를 토대로 《친일파 99인: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전 3권, 서울: 돌베개, 1993)와 《청산하지 못한 역사: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인》(전 4권, 서울: 청년사, 1994)을 발간했고, 이 책을 시작으로 친일 청산론에 불이 붙게 된다.

또 다시 공교롭게도, 1993년은 김영삼 정부가 구 총독부 청사 해체쇠말뚝 제거 등의 사업을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명목 아래 밀어붙이던 때였다.

이 책으로부터 시작된 이들의 친일파 고발 작업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으로 이어져 꽃을 피운다. 이 연구소는 2001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사전 편찬을 추진하여 2009년 부록이 포함된 전집을 완성했다. 3권까지가 인명사전 본문이며, ‘금단의 역사를 쓰다, 18년간의 대장정’이라는 부제의 부록에는 편찬 과정을 삽화나 도록 등과 함께 정리했다. 그 이전인 2004년에는 《친일협력단체사전》을 발간했다. 이 때 친일파로 낙인 찍힌 이들의 수가 4,389명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업이 추진되던 과정에서 국가예산 지원이 더 이상 어렵게 되자 국민 모금을 통하여 발간비를 조달하여 편찬 작업을 이어갔던 것이다. 2019년 현재 《친일인명사전》은 1만 원의 비용으로 앱을 설치하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제헌국회의 당연한 처사 - ‘친일파’와 ‘반민족행위자 처벌’ 구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의 배경과 근거

친일 청산론이 고도의 정치문화적 계산 아래 만들어진 개념이며, 동시에 대한민국의 역사적 현실을 도외시한 허구임을, 대한민국의 역사적 경험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친일파’ 또는 ‘친일파 청산’의 문제는 민족문제연구소나 《한겨레》에서도 분명히 인식하듯, 자신들이 ‘새로 세운’ 흐름 위에 있는 개념이다.

1948년 건국 후 제헌국회가 추진한 것은 반민족행위자 처벌이었다. 제헌헌법의 제10장 부칙(附則) 101조 조항은 이러하다.

제101조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이에 의거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고, 1948년 1월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가 발족하여 조사와 처벌 작업에 들어갔다.

대한민국의 필부필부(匹夫匹婦) 각자의 삶을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장치

2009년 <친일인명사전>이 발표되자, <조선일보> 2010년 1월 초에 다음과 같은 시민 기고문이 실렸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일본의 2등 국민으로서 그저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었는데 2010년 어느날 자신이 '반민족행위자'의 개념 안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나 괴로워하는 심정을 담았다. 한 시대의 당사자로서, 나중에 태어났다는 특권만으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심정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일독을 권한다.


여기서 말하는 ‘반민족행위처벌’는 분명히 ‘친일’과는 다르다. 직관적으로도 파악할 수 있듯 ‘친일’은 단지 일제에 협력하거나 일제와 친하게 지낸 자이다. 이에 비하여 반민족행위자는 매우 적극적이고 악랄하고 명확하게 민족에 해를 끼친 자를 말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 행위의 세세한 범위와 행동 유형까지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친일파’는 ‘반민족행위자’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거꾸로 말하면 ‘반민족행위자’는 ‘친일파’의 부분 집합일 뿐이다.

반민특위가 이렇게 하여 조사한 인원은 688명이었다. 이 중 기소된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79명이 판결을 받았고, 10명만 실형을 선고 받았다.


경성방직의 설립자 김연수에 대한, 역사의식이 살아 있는 명판결문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1949년 8월 6일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재판소 제3부(재판장 서순영)는 경성방직 전 사장 김연수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 판결문은 우선 국가가 없던 일제시대 조선인의 행위를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단죄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데서 출발한다.

재판장은

반민족행위라는 것은 반국가행위와는 다소 이념을 달리하는 윤리적 관념으로서 19세기 이래 발전된 민족주의를 그 사상적 배경으로 한 것인 만큼 이것을 법률적 규범으로 파악하기는 자못 곤란한 점이 없지 아니하나(...중략...) 적의 세력을 필요 이상으로 이용하여 동족을 박해하였거나 자신의 영예를 위하여 직권을 남용하고 동족을 희생케 하였거나 민족적 비극이 목첩에 있는 무자비한 정책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적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진 아부한 자

로서 ‘반민족행위자’의 개념을 명확히 한다. 물론 여기에는 법적 고려뿐 아니라, 그 법이 적용되는 이제 막 건국한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역사의 당사자’들이 숨쉬는 대한민국의 사정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

바로 그런 현실 인식 아래 재판장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경방이야말로 민족적 자본과 민족적 정열을 근저로 한 근대적 경공업이 조선에 수립되던 맹아(萌芽)인 만큼 (...중략...) 본 방직 회사들의 대공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경방을 능가할 정도의 남만방적을 봉천에 설립한 것 등 그 공적은 적다고 볼 수 없다.

(피고인의) 도쿄 출장은 당시 총독의 명령으로서 자의(自意)가 아닐 뿐더러 강연 당시에도 저성(低聲)으로 밑만 바라보고 학생출정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역설한 것이 아니요 오직 소위 유세단이 도쿄까지 오게 된 경위를 말한 정도이었으며 강연을 마친 후에는 즉시 순천향 병원에 입원하였다. (...중략...)

요컨대 본건 공소사실은 모두가 피고인의 자유의사에서 결과된 사실이 아니요, 당시의 정치적 탄압(전쟁 말기의 정치 성격은 公知의 사실)과 사회적 협박으로 말미암아 항거키 어려운 주위 사정에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 점이 인정된다.

이에 더불어 판결문은, 피고인 김연수가 일제 때에 민족 교육 및 사회사업을 위하여 기여한 긴 목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피고인의 선친인 김경중이

조선문화와 민족사상의 발양에 이바지하고자 단기 4269년부터 전후 18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비밀리에 조선사 17권 1질을 편찬, 이것을 사립학교, 향교 등에 무상 배부한 사실, (...중략...) 자녀와 질(姪, 조카) 십수 인에 대하여는 한 사람도 왜정의 관공리로 취직케 한 사실이 없음

도 분명히 기록하였다. 이 기록만으로도 김연수에게 씌워진 ‘반민족행위자’라는 이름이 그의 삶의 전 부분을 왜곡하는 데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입증한 셈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성수' 항목. 마지막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 놓았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간 인물에 대하여, 가장 학술적으로 엄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국가 연구기관의 사전에서 이런 정의를 내리고 있다. 김활란, 방응모, 노기남 등에 대해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반민족행위자 처벌보다,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이 급선무

이와 같이 ‘반민족행위자’는 법률적 해석에 있어서도 상당히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판단되었다. 이는 곧 ‘개인’과 ‘진실’에 대한 존중이 살아 있었다는 증거이며, 한 시대의 역사적 체험을 제대로 공유하는 일이 지식인과 사회 지도층에게 요구되는 필수 덕목임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반민족행위자’의 범위를 매우 좁게 설정한데다 그 중에서도 실형을 받은 이는 1/70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는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남로당의 무장 봉기가 끊이지 않았고, 여수 · 순천 반란사건도 발생하는 등 국내 사정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아니 혼돈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는 시기였다.

이제 막 탄생한 대한민국이 공산세력들에 의하여 전복될 위기 상황에서, 바로 이 반공투쟁의 최전선에 있는 경찰 핵심 요원들을 반민족행위자라며 처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반공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은 대부분, 일제 말기의 청년 시기를 거치면서 매우 복잡한 내면 세계를 형성한 경찰과 군인 출신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막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사회 상황 역시 이 문제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모든 국민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당사자’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무현 집권기에 국가 차원의 ‘친일파 청산’ 사업이 착착 진행

정치공학적 계산 아래 새로 생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개념

노무현 탄핵 사건 이후 모종의 교훈을 얻은 여당이 야당인 당시 한나라당의 정신 나간 동의 아래 제정한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이 법에서 명시하는 '반민족행위'의 범위에 걸리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될 지, 그리고 법제정의 맥락에서 무엇을 왜 겨냥하고 있는지 고민해 볼 만하다.

비록 중간에 국가 예산이 끊기는 등 자신들로서는 ‘억울한’ 과정을 거쳤지만,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파들의 인명사전을 만들어 발간하는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또(!!) 공교롭게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2004년 3월 12일 탄핵소추, 5월 14일 탄핵소추 각하 선고)이 작용한다.

2004년 3월,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표되었다. 이 법은 원래 2003년 8월 14일 국회의원 155명이 발의해 11월 국회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회부되었지만, 2004년 2월에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반려되었다. 그러다가 탄핵소추 직전인 3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어서 3월 22일 공표하고 6개월 후인 같은 해 9월에 시행했다.(법률 제07203호)

그 뒤인 2005년 1월 27일 법률명에서 '친일'이라는 용어를 삭제한 다음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으로 전면 개정되어 공표, 시행되었다. (법률 제7361호, 약칭 '반민족규명법')

이 시기가 바로 노무현이 탄핵 위기에서 살아 돌아와 국민적인 지지와 호응을 얻어 당시 여당이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한 때였다. 탄핵 사태가 이들에게 준 교훈은 상당했다. 탄핵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노무현 정부와 집권 여당의 첫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정치권과 역사에 대한 ‘청산’ 작업이었다.

그리고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역시 이 법안 제정에 손을 들어주었다. 노무현 탄핵 사건에 대한 일종의 쓸데없는 부채 의식과 당시 언론의 난동 때문에 생긴 울렁증이 작용한 것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처사였다.

결국 이 법에 따라 대통령 소속의 위원회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2005년 5월 조직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2009년 11월에 활동을 마치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1,005명을 선정했다. 이는 1949년 반민특위가 선정한 688명보다 300여 명 더 많은 숫자다.

사실 이는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이들이 쓰고 있는 용어 자체가 ‘반민족행위’가 아닌 ‘친일반민족행위’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 ‘친일’은 ‘반민족’보다는 당연히 더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이에 맞물려, 정부 지원이 떨어지자 민간 차원에 호소한 국민 모금을 통해 목숨을 연명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수년간에 걸친 작업이 빛을 보게 된다. 2009년 11월 이들이 낸 《친일인명사전》에는 친일인물 4, 389명이 선정되었다.

이들이 만든 사전에는 ‘반민족’이라는 이름도 아예 삭제된, ‘친일’이라는 개념만 남아 있다.

세상은 보기 나름? 개념과 용어를 바꾸어 더 촘촘해진 ‘친일’이라는 그물

‘반민족행위’에서 ‘친일반민족행위’로, 여기서 ‘친일’로 나아가면서 당연히 더 많은 개인들이 그물에 걸리게 된다.

  • 반민특위 ‘반민족행위자’

- 정의: (반민특위법 제4조 6, 9항)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관공리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 노무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대상

- 정의: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2조 16항)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또는 군경의 헌병분대장 이상 또는 경찰간부로서 주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의 감금, 고문, 학대 등 탄압에 앞장 선 행위

  • 민족문제 연구소의 ‘친일인물’

- 정의: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서 식민지배의 하수인이 된 행위

위의 인용표를 보면 드러나듯, 노무현 정부 때에 만들어진 약칭 ‘반민족규명법’은 조사 대상을 적시하고 그 범위를 구체적으로 넓혀나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정 직급 이상으로서 탄압에 앞장선 사람들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물’은 처음부터 ‘친일’의 개념 범위가 그러하듯 상당히 넓다. 즉 ‘하수인’이면 된다. ‘식민통치기구’가 정식 명칭의 실체가 아닌 이상 그 기구의 범위도 연구소에서 지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연구소의 《친일협력단체사전》이 발간된 이유도 이해된다.

조사 및 선정 범위가 넓어지면서, 제헌국회 당시에는 무죄 판결을 받았거나 처음부터 선정 대상에 들어가지도 않았던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각 범주별로 추가 포함된 인물의 예
  • 노무현 정부 위원회 선정 인물(1,005명 중)

제2대 부통령 김성수, 창군 원로 이응준, 제헌헌법 기초위원 유진오,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천주교 한국교구 (최초) 주교 노기남, 서울 종교교회 담임목사 양주삼,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시인 서정주, 시인 모윤숙, 소설가 김동인 등

위의 인물에 더하여

박정희 대통령, 독립운동가 김홍량,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백선엽 장군 등

‘친일파’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가 된다

<친일인명사전앱> 출시를 알리는 민족문화연구소 홈페이지의 안내. 1만원의 비용으로 4천 명이 넘는 '친일파'를 검색하고 정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수익은 '시민역사관'을 건립하는 데 쓰인다고 안내되어 있다. 민족문화연구소는 이런 식으로 시민 모금을 거쳐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바 있다.

앞서 설명했듯, 제헌국회가 ‘반민족행위자’라는 개념만 내세우고 그나마 그 인원도 지극히 한정적으로 선정한 데에는 대한민국의 특수한 역사가 있다. 무엇보다도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불과 2~3년밖에 안 되는 시점에서, 자유 대한민국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일상적이며 직접적으로 일어난 친일 행위들, 예를 들어 조선어를 쓰는 학생들을 때리고 학생들에게 집단 체조와 작물 재배를 강요하며, 지원병에 응모하라고 압박한 일들은 모두 ‘평범한’ 이 땅의 우리 이웃과 가족들이 한 일들이었다. 배운 사람이건 아니건, 돈이 있건 없건 위아래 할 것 없이 전시(戰時)에는 협력행위가 만연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그 누구도 역사적 책임을 비껴갈 수 없었기에, 제헌국회는 고위급과 거물급 그 중에서도 명백하고 악랄한 중한 책임이 입증된 경우에만 처벌하려고 하였다. 단지 일본군 장교였거나,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몇 번 헌납했거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는 시를 썼다고 해서는 처벌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도 많은 증언들이 나오듯, 그 당시 청장년층은 일제 시대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의 ‘2등 국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제에 협력하며 자기 삶을 꾸린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문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특히 공산세력과의 생사를 건 싸움이 연일 이어졌기에 내려진 판단이었다.

한편, 노무현 정부의 집권연당이나 민족문제 연구소가 만들어낸 친일파의 범주에는 상당한 정치공학적 계산이 깔려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들이 선정한 인물의 면면을 보면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元勳)들이다. 이들이 친일파가 되는 순간, 대한민국은 흠결로 가득찬 나라가 되는 논리가 이 안에 숨어 있다.

박정희, 백선엽, 김성수, 노기남, 김활란, 서정주... 이분들이 친일파라면, 대한민국은 친일행위자가 세운 나라, 영원히 일본의 한 지역으로서만 존재하는 나라요, 태어나서는 안 되는 나라가 되고 만다.

또한 노무현정부나 민족문제연구소는 현실 권력을 잡은 이들만을 ‘친일파’, ‘친일인물’로 규정하였다.

앞서 말했듯 친일 행위는 일상적으로 매우 가깝게 일어나는 폭력과 강압에서부터 확인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는 모두 이런 일상적 친일 행위 또는 그 주체인 평범한 중하층의 행위는 눈감았다.

무엇보다도 일제에 대한 협력은 이제 과거의 문제, 더구나 당대인들이 미래를 위하여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먼 옛날의 일이 되었다. 그에 비하여 자유 대한민국의 지향과 관련한 문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다.

이렇게 보면 일제에 대한 협력과 북한 정권에 대한 추종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하고 중대하며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가는 자명하다.

참고 자료

  • 주익종, “친일청산이란 사기극”, 이영훈 외 공저, 《반일 종족주의》, 미래앤, 2019, 213~~224쪽
  • 제헌헌법 [1]
  •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2]

  •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3]
  •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서울: 돌베개, 2003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부록 포함 전 4권),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2009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보유편)》, 행정안전부 소속 과거사관련지원단, 2017
  • 박경식,《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박경옥 역, 파주: 고즈윈, 2008
  • 송건호, 박현채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서울: 한길사, 1979
  • 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 삼인, 2019

(이 책은 2009년부터 친일파가 되어버린 작곡가 안익태의 '드러나지 않은 행각'을 연구하겠다며 현재의 <애국가>가 과연 국가로서 합당한지를 묻는다.)

  • 임종국,《친일문학론(親日文學論: 日帝暗黑期의 作家와 作品)》, 서울; 평화출판사, 1966
  • _______, 《친일논설선집》, 서울: 실천문학사, 1987
  • _______,《한국문학의 민중사: 일제하 문학의 민중의식》, 서울: 실천문학사, 1986
  • 정운현, 《임종국 평전》, 시대의창, 2014
  • 김용삼, "민족공조를 다지기 위해 반일감정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 《펜앤드마이크》2019년 8월 9일 [4]
  • “‘친일파’, 염치없는 자들을 향한 낙인”, 《한겨레》2019년 7월 22일

[5]

  • 조갑제, “판, 검사들에게 권하는 68년 전의 한 선고문”, 조갑제닷컴 2017년 4월 3일 [6]
  • 우수용, “저도 반민족행위자였습니다”, 《조선일보》2010년 1월 6일 [7]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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