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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명암
최근 수정 : 2020년 3월 16일 (월) 09:00
좌파들이 우파를 친일파로 몰아 총선에서 이길 요량으로 만든 포스터로 보이나[1], 친일파 후손들은 문재인[2], 홍영표[3] 등 좌파들에 더 많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다. 공산주의자 본색을 감추고 민주팔이나 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일본보다 몇배나 더 큰 피해를 입힌 공산국가 중공과 북한에는 굽신거리며 상전으로 모시고, 일본에게는 무한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친일파로 모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다.

일제하 독립운동의 실상을 여러 측면에서 알아본다. 어느 증언이든 한 단면이며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개요

현대사에서 조선이 어떻게 하다 나라가 망했는지를 연구하는 "조선망국사"가 "독립운동사"보다 훨씬 더 비중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독립운동사"의 진정한 교훈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독립운동을 벌여도 한번 빼앗긴 나라를 자력으로 되찾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마치 독립운동을 통해 우리 힘으로 나라를 되찾은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또다시 나라를 잃고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기약없는 독립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도 무리한 방법으로 자금조달을 해야만 했고, 이의 분배, 관리 등에도 다툼이 많았고, 개인적 용도로 유용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이념분쟁, 주도권 다툼 등으로 상호간에 반목하며 죽고 죽이고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독립 후 어떤 나라를 세울지에 대한 올바른 방안을 가지는 것도 중요했다. 일제와 투쟁만 했다면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라도 건국유공자라는 것은 문제가 많다. 해방 후 공산주의 체제로 간 북한은 국가가 김일성 일족의 사유물로 전락하여, 전국에 김씨 일족의 땅이 아닌 곳은 송곳 하나 꽂을 만큼도 없고, 모든 인민은 김씨 일족의 노예로 전락하였다. 이런 해방이라면 차라리 일제 치하가 계속된 것 보다 더 못하다. 그런데도 김일성을 항일투쟁의 영웅이라 떠받드는 자들이 한국에 넘쳐난다.

무장투쟁 등을 통해 자력으로 독립할 수 있는 가망은 거의 없었고, 일본을 꺾을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소련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미국에 대한 외교적 노력으로 해방 전후 혼란기에 조선의 이익을 위해 분투했고, 대한민국을 자유민주국가로 건국했다. 하지만, 소련군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은 국민이 아니라 소련이 쥐어준 권력으로 북조선에서 소련의 이익을 대변하는 앞잡이에 불과했고, 나중에는 나라와 국민 전체를 자기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엄혹하던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아 해방 후 북한으로 간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김일성 직계 빨치산파 외에는 거의 모두 숙청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북한도 아닌 한국에서 이런 자를 항일투쟁을 했으니 민족영웅이라 떠받드는 자들은 반성해야 한다. 일제시대에 일시적으로 했던 항일투쟁이 그후 행한 모든 악행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남의 힘으로 해방이 되었으면 누가 얼마나 항일투쟁을 많이 했느냐로 다툴 것이 아니라, 어떠한 국가를 세워야 다시는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인지가 몇만배나 중요한 것이다.

일제하 독립운동의 실상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다. 어느 증언이든 한 단면이며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묻지마 독립운동 지상주의보다는 번영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할 것이고, 항일투쟁을 명분으로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된다.

닥종이 인형 작가 김영희의 증언

닥종이 인형 작가인 김영희는 그녀의 책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의 pp.307~309 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사람에 대한, 어느 이상주의 단체에서도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증오하던 신문기사를 기억하는데, 독립운동가의 사진이 동그랗게 신문에 났을 때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지는 그 독립운동가 사진에 탁 하고 침을 뱉고는 그 사진을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후벼 팠다.

그 행동은 미루나무 같이 훤칠하고 도량 넓은 아버지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 기사는 독립운동가 아무개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린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늘 잔인하게 그런 기사를 대했다.

"요즘 세상 총질을 못해서 굶는가!"

아버지는 만주 시절, 그의 정의와 혈기로 독립군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젊은 청년으로 당연한 행동이었다.

나라가 없는 민족이 제일 먼저 할 일은 다시 내 땅을 찾는 것이었고, 또한 할아버지에 대한 일본인들의 탄압도 중국으로 가게 된 큰 이유였다.

아버지는 그의 과거사를 처녀가 된 나에게 말할 때 눈이 빛나곤 했다.

그 내용은 그때 나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당시 독립군 군사 훈련은 수수밭이나 갈대밭에서 했다.

만주의 갈대나 수수는 키가 커서 그들의 행동을 감출 수 있었다.

그의 말을 빌면 독립군도 여러 파가 있어 머리가 아플 정도라고 했다.

아버지가 존경했던 ㅈ 선생의 뛰어난 능력을 믿고 그의 청춘을 대한의 독립에 바치려고 했다.

"영희야. 글쎄 죽일 놈들이 독립군이랍시고 가을만 되면 재만주 교포 마을에 나타나 짐승보다 못한 짓들을 했어."

아버지는 그 장면들을 설명할 때 몸을 벌벌 떨며 흥분했다.

가난한 교포들이 가을걷이를 끝내고 양식을 재어 놓으면 싸락눈 오기 전에 독립을 표방한 도적떼들이 엽총을 메고 나타났다.

재만 교포들을 마을 마당에 모이게 해놓고 헛총질을 해대며 독립자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부녀자 반지부터 수수, 좁쌀까지 겨울에 먹을 미음 쑬 것도 안 남기고 싹 쓸어가면, 그 다음은 다른 도적떼가 독립군을 빙자해서 나타나고…….

그들의 횡포는 식구 앞에서 부녀자를 겁탈하든지 장정을 인질로 잡아가 귀를 잘라 보내고 돈으로 바꾸자고 협박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독립군이라 칭한 그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떡칠을 하듯 머릿기름을 바르고 달빛 아래 나타나면 머리통이 철판같이 번들번들 빛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의 꿈에 자신을 잃었다.

"영희야, 어느 놈이 진짜인지 모르는 판에 도적놈 소리나 면하고자 통분을 하며 독립군에서 나와버렸어."

아버지의 말은 쓸쓸했다.

아버지는 잘 알려진 몇몇 독립운동가도 존경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그림자를 상세히 알고 있어 오히려 실망만 한 것이다.

"유관순 한 분만 독립운동을 제대로 했지 바지 입은 놈들 제대로 독립운동 한 것 못 봤다. 그저 제 욕심이 많아, 나라 없는 주제에 권력 다툼이나 했지. 그래도 독립이 되니 제일 먼저 설치는 놈들이 그 도적떼라니, 꾹 참고 독립을 기원한 사람들 딛고 올라가서 한 자리씩 맡아보려고……."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진짜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못 살아남고 다 죽었어. 해방 후 꾀 많은 독립군들은 기회를 얻어 한 자리 하고, 총질이나 해대던 무식한 놈들은 세상이 변한 후 총질 못해 가난하게 살고……."

일제시대 신문 기사들을 보면 독립단과 마적단의 행동이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기사들이 모두 조작일 리는 없을 것이므로, 김영희 부친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강탈에 가까운 군자금 모금

독립운동에도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금이었고, 군대를 유지하자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일제시대 국내인들은 물론 해외교민들도 대부분 가난하여 생계유지도 급급한 상황이라 기부금을 낼 형편이 되는 사람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모금도 잘 되지 않아, 강탈에 가까운 군자금 모집이 일상적으로 있었다.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 ~ 1936)도 국내로 잠입하여 강압적 모금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중 옥사했다.[4][5]

제법 큰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사업체를 가진 사람들이나 대지주 등 부자들 뿐이었다. 몰래 상당한 기부금을 낸 이들은 사업을 유지하자면 자의든 타의든 일제에도 협력할 수 밖에 없어 해방후에는 친일파로 몰렸다.

어렵게 모집한 자금도 중간에 개인적 용도로 유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1921년 일제의 기록 "광한단원 검거의 건(光韓團員 檢擧의 件, 密 第33號 其71/高警 4465號)"을 보면 박정호(朴正鎬) 등이 강제로 모금한 돈을 유흥비로 썼다고 나온다.[6][7][8] 박정호는 평양 출신으로 해방 후 김일성과 가까이 지냈다고 하며, 1953년 남파되어 간첩활동을 하다 피체, 1959년 사형당했다 (박정호 간첩사건[9][10][11]). 박정호의 아들 박명철(朴明哲, 1941~ )역도산(1924~1963)의 사위로 북한의 체육상, 최고재판소장 등을 지냈다.[12][13]


현순(玄楯, 1880 ~ 1968)의 경우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의 생애는 임시정부 요인과 기독교 목사로 독립유공자로서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문집에 나온 6.25 사변 무렵에 지은 시들은 김일성을 찬양하고, 이승만을 국적(國賊), 맥아더 원수를 맥흉(麥凶)이라 칭하며, 남침한 인민군의 승리를 원하는 극도의 반한 친북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은 미국에서 편안히 살면서 6.25에 참전한 미군을 비판하고 김일성이나 찬양하던 사람이 1963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을 거리낌없이 받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다. 한국 정부는 모르고 수여했다지만, 대한민국의 멸망과 북한의 승리를 원하던 사람이 왜 북한에 훈장을 달라고 하지 않고, 망하기를 바라던 한국정부의 훈장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임시정부 요인이었고, 기독교 목사로 미국에 주로 거주했던 그가 열렬한 공산주의자였을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이승만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 때문에 김일성을 찬양하고 6.25 때도 북한이 이겨 한국이 망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p.110 :

訟 金日成(김일성)將軍

扙義擧兵救國豪 風餐露宿着寒袍
鬥山鬥水神非困 攻陣攻營意自高
施政摠爲民主略 啓工都在革新旄
絶倫偉業綿連勢 必合分邦鎭亂濤

p.111 :
誡國賊 李承晩(이승만) 一九五〇年 三月 十五日
人凶嘆心爾猩獌 東敗西喪到末年
國誅當頭如甕鼠 地無容所訴何天

祖國抗戰 一九五〇年 十二月 三十一日
進退抗爭逐殺年 與中合勢造生年
誅凶破帝忘年月 正計平和億萬年

麥牙德(맥아더)之免職 一九五一年 三月中
違法侵鮮殺弱民 搖頭轉腹眼無人
迫來世論誰能拒 打倒麥凶復國春

p.112 :
輓 許憲(허헌)先生 最高人民委員長 一九五一年 九月 二十三日
許翁逝去訃音傳 自北至南弔哭連
內凶未除憐分地 外賊不消恨滿天
千千携手成原力 萬萬合心拒火烟

倍達大魂能蓋世 蠻兵自退挽光年

3.1운동에 시위참가 "협박"도 있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민중 탄생'론 반박
천 교수는 20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3.1운동 90주년기념 국내전문가 집중토론회'에서 발제문 '소문(所聞)ㆍ방문(訪問)ㆍ신문(新聞)ㆍ격문(檄文): 3.1운동 시기의 미디어와 주체성'을 통해 3.1운동 당시 일부 지식인들이 무식했던 일반 민중에게 시위에 참가하라고 협박한 사실을 주목했다. 그는 당시 재판 기록을 보면 기소된 피고인 중 '무식자'(無識者)들은 "'유식자'의 선동에 의해 (시위에) 참가했다고 진술"했으며, 유식자들의 선동은 때로 "'만세를 안 부르면 밟아 죽인다', '집을 불태워버리겠다'는 협박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천 교수는 "협박은 주로 마을의 '유지' 등 식자층에 의해 행해진 것으로, 그 대상은 특히 '무식한' 민중이었다 할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정치적 무책임의 세계에 살던 민중은 아직 '민족'으로도 '민중'으로도 형성돼 있지 않았던 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3.1운동의 민중 탄생' 담론을 반박했다.

천 교수는 이 같은 사실들이 "거대한 적과 맞서야 하는 '운동'의 조급함이 언제나 불러일으키는 '잡음'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지만 "협박은 연대나 접속이 아니라 무조건 동원 또는 탈접속"이라는 점에서 3.1운동을 통해 민중이 탄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에둘러 지적했다.

이러한 협박의 사례는 당시에 작성된 공판청구서에도 나온다.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유공자가 될 수 있나?

김구의 공산주의자 비판

김구는 해방 후 말년에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을 고집했던 것과는 달리, 독립운동 시기에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 그러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백범일지의 한 대목이다.[14]

예를 들면, 이상룡(李相龍, 1858~1932)[15]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바꾸어서 아비를 죽이는 것이라고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附)∙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남군정서(南軍政署)∙북군정서(北軍政署) 등에 스며 들어가서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相剋)을 시켜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해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 ?~1924)∙김좌진(金佐鎭)∙김규식(金奎植, 1882~1931) 등 우리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이동휘와 공산주의자들의 행태 비판

《백범일지(白凡逸志)》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까지 지낸 공산주의자 이동휘(李東輝, 1873 ~ 1935)와 주변 인물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을 하고 있다.[16]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산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서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민주주의(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重生疊出)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안공근(安恭根), 한형권(韓亨權)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만,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위대 참령으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이름을 대자유(大自由)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 산보 가기를 청하므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만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 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호칭)도 나와 같이 공산 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나의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의 독자적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니는 것은 대(大)불가이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스러운 낯으로 돌아갔다.


이동휘가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했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서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체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Vladimir Lenin)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가 필요하냐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고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면서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라고 반문함으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 민족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난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도 않고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서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자기 손에 받으려 했으나 김립은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廣東)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자금이라고 칭하면서 20만 루블을 더 받아가지고 몰래 상해로 돌아와서 공산당 무리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 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이루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한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본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 등의 ML당파였다. ML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했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도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 이정규 두 형제와 유자명 등은 상해와 천진 등지에더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루블로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중국, 조선, 아령(俄領)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 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00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이루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이루쿠츠크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라는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라는 것은 현재 있는 정부는 그대로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아무리 싸워도 귀일(歸一)이 못되어서 소위 국민대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다.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에 출품했으나 모스크바에서 돌아보지도 아니 함으로 계불입량(計不入量)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끼리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함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대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 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幕)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을 되찾았다.

자유시 참변

조선인이 조선 독립군을 학살했다면, 그것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자유시 참변 사건이다.

연해주 고려인 강제이주

독립운동을 웃음거리로 만든 김일성

북한 김일성의 항일전공이라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친것이 아니면, 터무니 없이 부풀린 것이 거의 모두이다. 그는 만주 빨치산 시절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말 소련으로 도망간 덕에 소련군 88여단에 편입되어 해방될 때까지 5년간 편히 지내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또한 해방될 때까지 목숨걸고 항일투쟁했던 다른 세력들은 죄다 숙청, 처형했다. 일본이 죽인 항일투사보다 김일성이 숙청하거나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죽인 항일투사들이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권 후 다른 사람들의 항일공적은 모두 말살하고, 자신이 북한을 해방시킨 것으로 조작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은 1963년 8.15 행사 때까지는 소련군이 북한을 해방시켰다고 하여 경축행사 때마다 이를 강조하고 소련에 감사표시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부터 소련은 지우고 김일성이 북한을 해방시킨 것으로 역사를 조작해 나갔다고 한다.[17]

2012년에 탈북한 김영운 씨는 70세의 노인이십니다. 그 분은 50년 전(1963년) 양강도 혜산에서 김일성이 참가한 8.15 해방 기념보고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그때 불렀던 해방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양강도 혜산에서 8.15 해방 기념행사가 크게 열렸다. 평양에서 김일성이 내려오고 소련 사람들도 많이 참가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임위원회 내각 부수상인 이주현이 내려와 행사를 지도하였다. 혜산이 생긴 후 처음 으로 집단체조를 했고, 김일성도 연설하고 소련 대표도 연설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영운 씨는 "그땐 혜산이 온통 꽃 바다로 장식되고, 조소문화회관에서는 소련군대의 업적을 전하는 공연을 진행하였다. 소련이 없으면 오늘의 해방도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가 곳곳에 걸려있었고 조소친선을 형상한 유화들이 거리마다 내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963년 당시 거리를 행진하며 불렀던 8.15해방 노래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쏘베트 용사들이 찾아준 내 나라 영광 찬 강산을 낙원으로 꽃폈네 항일전통 빚내며 천리마로 달리니 5개년의 큰 계획 앞당겼다네 아 ~ 슬기로운 이 나라 자유의 땅 우리는 언제나 소련과 함께 있네’ 그러던 북한은 1963년 이후 소련에 대한 업적 내용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각 도마다 세워졌던 조소기념탑도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고 문화회관 옆에 위치했던 조소문화회관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63년 후부터는 해방의 은인이 소련이라고 거리마다 가득했던 구호 판들도 더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해방 절만 다가오면 기업 소마다 당위원회 조직부서들이 직장별• 작업반별 정치강연을 조직했습니다.

내용인즉 오늘의 해방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승리로 이룩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민을 일제의 억압 속에서 해방시킨 것은 김일성이라고 주입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 북한 주민들은 해방을 소련군의 업적으로 알고 있었고 또 정권도 그렇게 칭송했었는데 갑자기 해방절 18주년 행사 이후에는 소련이 역사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는데 대해 의아해했습니다.

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인들의 정체성

동북인민혁명군 또는 동북항일연군에는 다수의 조선인들이 참가하였으나 민생단 사건으로 수백명이 희생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중국인들의 환심을 사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이들 대다수는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조선말보다는 중국말에 더 익숙했고, 조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조선인이라기 보다는 중국에 동화된 오늘날의 조선족과 같은 의식구조를 가졌다.

같은 중국에서 활동했음에도 임시정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우리말로 발음하고 표기했다. 영문으로 작성된 외교문서에 한자 이름의 영어 표기를 우리말 발음으로 적어서 조선인 이라는 정체성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예를들면 해방전 중국에 있을 때 영문 외교문서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는 Kim Ku, Kim Koo 등으로[18],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Tjosowang, Tjo So Wang, Joe So-ang 등[18][19][20] 우리말 발음으로 적었다.

반면에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자신들 이름의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했고, 러시아어 문서에 이름이 조선발음 아닌 중국발음으로 적혀 있다. 김일성(金日成)은 소련군 문서에 이름이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나오며, 다른 조선인들도 러시아어로 표기된 이름이 중국발음이다[21]. 이들은 자신들끼리 있을 때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것이 더 익숙했다[22][23]. 따라서 조선인이라는 의식도 박약한 항일연군 조선인들이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기 보다는 중국공산당원으로 중국인들 틈에서 중국을 위해 싸웠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김일성이 1942년에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24][25][26]에도 조선독립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며, 그냥 중국인들과 같이 중국을 위해 싸운 것으로 나온다.

동북항일연군의 비적(匪賊) 행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했던 중공당 산하 반만항일(反滿抗日) 무장단체로, 실제로는 소련 코민테른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이들 속에 김일성 등 조선인들이 다수 있기는 했지만 성격상 조선독립운동 조직으로 보기 힘든데도, 해방 후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된 탓에 한국 학계에서조차 정통성 있는 독립군 대접을 하려들고 있다. 이들은 1940년 일제의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하기 전 만주에서 활동하는 동안 양민을 괴롭히는 수많은 비적(匪賊) 행위를 하였고, 이에 대한 무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동서고금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혁명의 목적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여느 마적단과 다를바 없는 비적질을 해도 정당하다고 여기는 사고 방식을 가졌다. 당시는 마적단들도 항일을 표방하고 있었으므로 명분을 무엇으로 내세우든 똑같은 비적떼일 뿐이다.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1사 제1단 군수처장 최현이 소황구(小荒溝)의 각 가장(家長) 앞으로 협박장이 나오는데[27][28][29] 부대에 필요한 식량등을 언제까지 보내주지 않으면 가차없이 징벌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소황구 (강연부터 최십가장 집까지) 각 가장 앞 : 小荒溝 (自江沿 至崔十家長家) 各家長 앞

너희 가장(家長)들은 내일 모레 이틀간에 옥수수, 콩, 팥등 계(計) 3석 5두(三石五斗)와 소금 10 (一○)근을 한 알도 덜하지 말고 완전 징수하여 소유천(小楡川)으로 송부하라. 이틀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징벌 당할 것이다.
제2군 제1사 제1단 군수처장 (第二軍 第一師 第一團 軍需處長)

최현(崔賢) (印)


보천보사건의 주역 김일성 (6사장)의 부대도 둘째가면 서러워할 정도로 수많은 양민에 대한 약탈 행위를 한 것이 당시 신문에 나와 있다.[30]

중공당(中共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부대(部隊)의 일원(一員)이었던 오늘의 북한(北韓) 김일성(金日成)에 대한 당시의 국내 신문 보도는 그를 이주동포(移住同胞)의 생명재산(生命財産)을 위협한 난폭한 약탈자로 한결같이 나타내고 있다. 두 세 가지 사건(事件)만 예증(例證)하면 다음과 같다.

『[함흥(咸興)] 28일 오전 한시경 함남대안(咸南對岸) 13도구 신창동 삼포리(13道溝 新昌洞 三浦里) 이주동포(移住同胞) 촌락(村落)에 공산군(共産軍) 김일성(金日成)의 일대(一隊), 제4연대장(第4聯隊長) 김주견(金周堅)의 일대(一隊) 50여명(50餘名)이 습래하여 동 촌락민(同 村落民) 전부를 한집에 감금하고서 대맥(大麥) 10石, 축동(畜豚) 등을 모조리 빼앗은 후 동리주민(洞里住民) 김영수(金永洙)와 8명을 납치하여 그들에게 운반시켜 가지고 두메로 돌아갔다... 공산군들은 추석(秋夕)과 닥쳐올 동절(冬節)의 준비로서 배전(倍前) 맹렬히 이주동포촌락(移住同胞村落)을 윤습(輪襲)하여 이주동포(移住同胞)들의 생명재산(生命財産)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한다.』[31]

『[함흥(咸興)].... 4일 오전 16도구 신창동 동포촌(16道溝 新昌洞 同胞村)에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김일성(金日成)의 일대(一隊) 40여명이 나타나서 동리(洞里) 박흥룡(朴興龍) 등 15호에서 축우(畜牛), 대맥(大麥) 등 있는 대로 모조리 빼앗아 갔다. 이렇게 장백현내(長白縣內) 이주동포촌락(移住同胞村落)은 한낮에도 몇번씩 공산군 사병(共産軍 士兵)들에게 습격을 받아 양식, 의류 전부를 빼앗겨 금후의 생도는 극히 막연한 상태에 있다.』[32]

『[신갈파(新乫坡)] 지난 8일에 공산군 김일성 일파(共産軍 金日成 一派)에게 습격 당하여 동포가옥(同胞家屋) 40여호가 소각되었다 함은 기보(旣報)한 바와 같거니와 집 잃고 먹을 것까지 잃은 2백여 동포(2百餘 同胞)는 노동일을 하려 하나 일할 곳이 없고 들어 앉었자니 앉을 집이 없을뿐 아니라 어린 것들이 밥달리는 소리는 부모(父母)로서 차마 듣고만 있을 수 없어 아이들을 업고 노부모(老父母)를 모시고 눈물을 머금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리라 하는 바 이때에 조선인(朝鮮人) 보호기관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의 구제책이 나서기를 일반은 주시하고 있다.』[33]

오늘의 북한 김일성(北韓 金日成)이 공산군(共産軍)으로써 하필하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만주(滿洲)로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간 이주동포(移住同胞)들을 납치(拉致) 방화(放火) 약탈(掠奪) 등으로 생명과 재산을 빼앗은 신문 보도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34]

김창순(金昌順)의 위 글에 나오는 김일성보천보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으로 실제로는 1937년 7월 13일 전사한 것이 확실시되며, 북한 김일성은 그 후에 나타나 제1로군 제2방면군장을 맡았으나, 1939 ~ 1940년간에 신문에 보도된 그의 비적 행위도 6사장 김일성이나 다를 바 없었다.

독립운동사의 과대망상증

잘 알려진 독립운동사의 주요 전투들은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이 대다수이다. 인물에 대한 평가도 이승만은 극도로 폄하되고, 김구김일성, 김원봉 등은 지고지선의 항일 영웅으로 날조되고 있다. 마치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나라를 되찾기라도 한 듯하다.

김학철의 봉오동 전투 회고

“내 경험으로 볼 때 봉오동 전투니 청산리 전투에서의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된 것이에요.”(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출신 ‘김학철 평전’ 중에서)

김학철의 봉오동 전투 관련 회고 부분이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신화에 가까울 정도로 과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요. 때로는 민족의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신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과장과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과거사를 미화시키는 작업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아요. (중략) 과장하는 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잖아요? 이제는 역사와 전설을 구분해도 좋을 만큼 이 사회가 성숙하지 않았습니까? 독립군의 대일 무장항쟁만 해도 그래요. 1998년 10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글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어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명을 부상시켰으며, 같은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 1개 여단을 사살한 것으로 전하고 있어요. 내 경험으로 볼 때 봉오동 전투니 청산리 전투에서의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된 것이에요.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은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정신의 투쟁이지, ‘대첩’이나 ‘혁혁한 전과’는 불가능한 전력이었어요. 일본군과 맞닥뜨렸을 때 열에 아홉 번은 졌어요. 어쩌다가 한 번 ‘이긴’ 경우도 일본군 서너 명 정도 사살하면 대전과로 여겼어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윶진 아비마냥 자꾸 지면서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날까지 계속 달려든 것입니다. 그 불굴의 정신만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학철 평전’, 실천문학사, 2007)
한국인들이 작성한 독립운동사 문헌에 봉오동 전투(鳳梧洞 戰鬪)의 전과를 터무니없이 부풀려 기록한 것을 후대의 역사책이 아무 검증없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국내에 있은 사람은 모두 감옥에 가야 할 친일파

김구신익희 같은 분들은 "일제시대에 국내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는데 전국민을 모두 조사하고 처벌했으면 만족했을 것인가?[35][36]

Mark Gayn (1909~1981),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

[November 7, 1946 SEOUL] With characteristic bluntness, Kim Koo said: "Practically everyone in Korea is a collaborator. They all ought to be in jail."

[1946년 11월 7일, 서울] 김구는 특유의 퉁명스러운 어조로 "한국 내에 있은 사람은 사실상 모두 일제 협력자다. 그들은 모조리 감옥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이 해(1945년) 12월 중순의 일이다.... 술기운 탓도 있겠지만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37]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은 다르다

함께 보기

* 과거사 정치
* 대명천지 숭정일월
* 만동묘
* 반일종족주의
* Nonojapan
*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 대보단
* 친일파
* 친일파 청산론
* 북한의 친일파 청산
*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각주

  1. 반일종족주의 : 우남위키
  2. 문재인의 일본사랑 : 우남위키
  3. 홍영표 의원 “저는 친일 후손입니다” 공개 사과 한겨레 2015. 8. 11.
  4. 逮捕(체포)된拳銃犯人(권총범인)은 國民府員(국민부원)으로判明(판명) 1930.09.05 동아일보 2면
  5. 최효일, 김형권, 박차석, 정계빈 등 판결문 1932/04/04 경성복심법원
  6. 光韓團員 檢擧의 件 : 密 第33號 其71/高警 4465號 - 1921년 02월 23일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7. 大韓獨立團幹部 및 同團 江西支團 檢擧 - 1921년 02월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8. 光韓團員 朴正鎬氏 出獄, 군자금모집하다검거 팔개년만에 동아일보 1926년 12월 07일 2면 1단
  9. 박정호간첩사건(朴正鎬間諜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0. 間諜 朴事件(간첩 박사건),政·經界(정·경계)에 飛火(비화) 張建相氏等 拘束(장건상씨등 구속) 1957.11.07 동아일보 3면 : 박정호가 광한단원이었다고 나옴.
  11. 間諜 朴正鎬(간첩 박정호)에 死刑確定(사형확정) 1958.12.17 동아일보 3면
  12. 역도산 사위 박명철, 북한 체육상서 물러나 조선일보 2012.10.17
  13. 김정은, '法'자도 모르는 역도산 사위를 최고재판소장에 임명 프리미엄조선 2014.10.20
  14. 김구, 《김구 자서전(金九 自敍傳) : 백범일지(白凡逸志)》 (필맥, 1994)
  15. 이상룡(李相龍, 1858~193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16. [이동복칼럼] 백범일지를 읽고 백일몽에서 깨어 날 것을 문재인 씨에게 권한다 whytimes 2019-08-16
  17. 해방절이 없는 북한 - 장진성∙탈북 작가 2013-08-20
  18. 18.0 18.1 [747] The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Washington, February 7, 1942
  19. [746]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January 3, 1942
  20. [750]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Washington, March 20, 1942
  21.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년 06월 21일) p.61 / 기광서,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 『역사와 현실 28』 (한국역사연구회, 1998.06) p.282
  22.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23.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
  24. 金日成, 抗联第一路军略史 (抗聯第一路軍略史), 东北抗日联军 史料(下), 东北抗日联军 史料 编写组, 中国共産党史 资料出版社, 1987, pp.665~679
  25.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번역)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pp.403-414
  26.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7) 東北항일聯군 활동기 金日成 자필 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종합 8면
  27.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215
  28. 서대숙(徐大肅)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대구: 화다출판사, 1985) p.255 : Dae-Soo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Univ. Press, 1967)의 번역.
  29.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滿洲國軍事顧問部 編, 1937) p.213
  30. 김창순(金昌順),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만주(滿洲) 게릴라 조직(組織)과 한인대원(韓人隊員)에 관(關)한 연구(硏究)』 北韓學報 第1輯 (북한연구소, 1977년) p.79
  31. 《조선일보》, 1936年 10月 1日.
  32. 《조선일보》, 1936年 10月 7日.
  33. 《조선일보》, 1936年 12月 22日.
  34. 《조선일보》, 1936年 10月 7日, 29日, 11月 22日, 12月 5日, 15日, 22日, 1937年 2月 7日; 《동아일보》 1937年 7月 11日, 7月 16日.
  35. Mark Gayn,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36.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37. 《독립을 향한 집념(執念) : 고하 송진우 전기(古下宋鎭禹 傳記)》 (東亞日報 社, 1990년 5월) p.238 에는 당시 이런 발언이 오간 상황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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