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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삼봉 전투의 일본군 주력 부대였던 보병 74연대 혜산진 수비대(惠山鎭 守備隊)의 1936년 6월 30일 현재 편성표.

간삼봉 전투(間三峰 戰鬪)는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사건 직후인 6월 30일 함경남도 삼수군 신갈파진(三水郡 新乫坡鎭)[1]의 대안(對岸) 장백현 13도구 부응동(長白縣 十三道溝 富應洞) 근처에서 동북항일연군 1로군 2사(師), 4사, 6사 연합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지휘하여 일본군 1,500여명을 죽이고, 엄청난 대승을 거둔 것처럼 주장하나[2], 당시 신문에는 일본군 전사자 5명, 항일연군 전사자 50~60여명으로 일본군이 크게 승리한 전투로 보도되었다.[3][4][5]

개요

1937년 6월 30일의 전투에 참여한 양측의 병력과 지휘관은 아래와 같다.[6][7]

구분 동북항일연군 일본군
병력 1로군 2사, 4사, 6사 연합군 500여명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와 혜산진 수비대 230명; 만주군, 일본 경찰 지원 받음.
지휘관 2사장 조국안, 4사 1단장 최현, 6사장 김일성 함흥연대 김인욱(金仁旭) 소좌, 혜산진 수비대 쿠리타(栗田) 대위
장소 함경남도 삼수군 신갈파진(新乫坡鎭)[1]의 압록강 맞은 편 장백현 13도구 부응동(長白縣 十三道溝 富應洞) 근처
13도구 서쪽에 보이는 간산봉(間山峰, 间山峰)이 북한이 말하는 간삼봉인 것같다. (1)번 표시된 곳의 압록강 맞은 편이 신갈파진(新乫坡鎭)으로, 오늘날 북한의 김정숙군 김정숙읍이다.[8]


이 전투의 동북항일연군 측 지휘관 중 1명인 6사장 김일성(金日成)은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기도 한데, 1937년 11월 13일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북한의 주장과 달리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또 북한 측은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 김인욱 아닌 그와 일본육사 동기인 김석원(金錫源, 1893~1978)으로 잘못 알고, 주장하고 있다. 김일성 회고록에도 김석원으로 나오는데 스스로 조작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전투 결과에 대한 기록과 주장들

당시 신문 보도와 일본측 기록

당시 신문 보도와 일본측 기록에는 전투에서 쌍방 피해로 일본군 측은 전사자 5명, 중상자 5명, 경상자 7명, 동북항일연군 측은 전사자 50 ~ 60 여명이라 하였다.[3][4][5][9] 이를 따르면 일본군 측의 대승이라 할 수 있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항일연군 측 전사자 수는 전투 현장에 남겨진 사체(死體)의 수로 확인한 것이다.

여기는 6사장 김일성을 金龍水(金日成)라고 적었는데, 김용수(金龍水)는 본명이거나 또다른 가명일 수 있지만, 북한 김일성과는 무관한 이름이다.

매일신보 7월 4일자는 전사자 5명의 명단과 사진까지 실었고[10], 동아일보 7월 11일자는 전사자 5명에 대한 장례식을 보도하고 있으므로[11] 전사자 수를 축소 조작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항일연군 측과는 달리 일본군은 정규 군대로 전사자에 대한 장례나 예우 문제, 유족에 대한 보상 문제 등이 뒤따르므로 인명 피해를 함부로 조작해서 보고하기는 어렵다. 당시 일본군이 수십명이 전사한 것을 5명 전사로 축소해서 보고해도 문제되지 않을 정도로 보고체계가 허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의 주장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에는 간삼봉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오는데, 대부분 지어낸 소설이고, 사실과 거리가 멀다.[2]

어떤 자료를 보면 그때 함흥 제74련대를 인솔해가지고 《토벌》에 동원된 일본군측 지휘관이 김인욱이라는 조선인이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국내와 장백의 지하조직들에서 우리에게 보내온 통보자료들은 한결같이 《토벌대》를 이끌고 함흥을 떠난 적장의 이름을 김석원이라고 밝히고있었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김석원은 일제가 소문을 크게 내려고 함흥역에서 조직한 요란한 장행식에서 혈서로 《무운장구》라고 쓴 기발을 들고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김일성부대를 몰살시키겠다고 매우 격해서 떠들어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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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조직들에서 보내온 자료를 종합해보면 《토벌》에 동원된 적의 무력은 약 2,000명 정도로 추정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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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사, 2사의 지휘관들과 함께 전투방안을 짜놓은 다음 새벽녘에 권영벽, 김재수,정동철을 비롯하여 우리의 부름을 받고 간삼봉으로 찾아온 국내와 장백지방의 정치공작원들과 함께 혁명조직들의 사업방향과 임무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적들이 간삼봉으로 공격해온것이 바로 이날아침이였다. 새벽부터 가랑비가 내리고 안개가 뿌옇게 끼였는데 최현부대가 차지한 산봉우리에 있는 보초소에서 먼저 신호총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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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저녁때가 되도록 폭우속에서 공격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런 때 우리는 팔반도쪽에 정찰임무를 받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박성철소부대와 식량공작조에 련락하여 적의 뒤통수를 때리게 하였다. 김석원은 앞뒤에서 얻어맞을 위험이 생기고 날까지 어두워지자 200명가량밖에 안되는 패잔병들을 모아가지고 싸움터에서 도망치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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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삼봉전투가 있은 얼마후 우리 동무들은 전장근처의 마을들에 갔다가 적들의 패전상을 상세히 알아가지고 왔다.

전투가 있은 다음날부터 적들은 혜산, 신파와 간삼봉부근에 있는 마을들에서 담가와 우마차, 자동차들을 징발하여 시체운반을 하였다. 그고장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전투직후 간삼봉과 그 일대의 부락들에는 일본군의 시체가 한벌 깔려있었다고 한다. 적들은 시체마다에 흰광목천을 덮어놓고 사민들이 얼씬 못하게 단속하였다. 적들이 제일 두려워한것은 저들의 패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는것이였다. 그들은 신문에 간삼봉전투실황을 소개할 때에도 사상자수가 얼마 안되는것처럼 허위보도를 하였다.

김석원이 우리를 치겠다고 신파에서 압록강을 건너올 때는 하루종일 걸렸는데 다시 건너갈 때는 반시간 남짓하게 걸렸다고 한다.

사상자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시체에서 머리만 잘라서 마대나 나무상자에 넣어 우마차에 실어 자동차가 있는데까지 날랐다. 그러면 시꺼먼 풍을 친 자동차들이 그 마대와 나무상자들을 싣고 압록강을 건너갔다. 시체들을 화장하는 연기와 냄새때문에 간삼봉지구 농민들은 며칠동안 숨도 제대로 쉴수 없었다고 한다.

시체운반에 동원된 일본병사에게 어떤 농민이 시치미를 떼고 《나리, 달구지에 싣고가는게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일본병사는 능청스럽게 《가보쨔》라고 대답하였다. 호박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농민도 싱글벙글하면서 《가보쨔농사가 대풍이군요. 좋은 국거리니 많이들 자시우.》하고 야유하였다. 그때부터 항간에는 《호박대가리》라는 말이 생겨났다. 인민들은 일본군시체만 보면 《호박대가리》라고 풍자하였다.

김석원과 그의 패잔병들은 번화한 혜산을 거치지 않고 조심스레 신파와 풍산으로 빠져 함흥으로 돌아갔다. 출동할 때는 장행식까지 하면서 떠들썩했던 함흥역이 돌아올 때는 초상난 집같은 광경이였다. 역두에 나온것은 병영에 남아있던 병졸들뿐이였다. 그 병사들이 부상자투성인 출정군인들을 복판에 세우고 거리를 가까스로 지나갔다. 시민들의 눈을 속이고 패망상을 감추자니 그런 궁상스러운짓도 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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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싸움을 통하여 《무적황군》의 신화를 완전히 깨뜨려버리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을 만천하에 다시한번 과시하였다. 간삼봉전투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에 진출한후 항일혁명의 전성기를 마련하는데서 하나의 뚜렷한 몫을 차지하고있는 중요한 싸움이였다.

운명의 조화라고 할가. 우리의 숙적이였던 김석원은 해방후 또다시 38선을 사이에 두고 최현과 대결하였다. 최현은 거기서 경비려단을 지휘하였다. 리승만김석원을 38선가까이에 밀어보낸것을 보면 간삼봉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할 기회를 마련해주느라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김일성 회고록 주장대로면 일본군 2,000 여명 중 살아서 돌아간 패잔병은 200 여명 뿐이라 했으므로 1,800여명이 전사했다는 말이 된다.

또 김일성과 맞서 싸운 일본군 지휘관이 당시 서울의 용산연대 (78연대) 소속이었던 김석원(金錫源, 1893~1978) 소좌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김석원의 일본 육사 동기로 함흥 74연대 소속이었던 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 함경남도의 국경지방 전투에 함흥연대에서 나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서울의 용산연대가 거기까지 갈 이유는 없다.

북한도 해방 직후에는 일본측 피해 기록을 인정했다.

작가들이 쓴 김일성 회고록과 달리,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이 북한에 있을 때인 1947년에 쓴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의 부록에는 혜산사건 판결서를 번역하여 싣고 있는데, 간삼봉 전투와 관련하여 나오는 일본 측 피해 내용은[12] 위의 당시 신문보도나 일본측 기록과 같다. 북한도 처음에는 간삼봉 전투에 관한 일본측 기록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12] p.240 (부록 p.40) - 혜산사건 판결서 번역문 중 간삼봉 전투 관련 부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부대원(部隊員)인 피고인(被告人) 김주현(金周顯)은 소화 12년(昭和 十二年, 1937년) 6월 하순경(六月 下旬頃) 장백현 13도구 오지(長白縣 十三道溝 奧地)에서 김일성 사장(金日成 師長) 이하 약 300명(以下 約三百名)의 대원(隊員)과 가치 이동중(移動中) 함흥 제 74연대( 咸興第七十四聯隊) 육군소좌(陸軍少佐) 김인욱 부대(金仁旭 部隊) 110명(百十名)과 조우(遭遇)하자 이를 전멸(全滅)시킬 목적(目的)으로서 일제사격(一齊射擊)을 하여 상등병 중택 등(上等兵 中澤 等) 5명(五名)을 사살(射殺)하고 하사 이하 7명(下士 以下 七名)에게 총창(銃創)을 입히었다.

김일성 회고록에 일본군 지휘관이 김석원이라고 한 것과는 달리 혜산사건 판결서에는 김인욱으로 바로 되어 있다.

연변(延邊) 학계의 주장

1941년 초 작성된 동북항일연군 문건에 나오는 보천보 사건과 간삼봉 전투(장백 13도구)의 쌍방 피해.[13] 간삼봉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80명인데 비해, 항일연군 측은 전사자 5명, 부상자 3명으로 미미하다. 보천보 사건 때는 일본군 전사자가 40명, 부상자 20명인데 비해 항일연군 측 피해는 부상 1명에 불과하다. 대부분 전투에서 일본군 피해는 막대하고, 항일연군 피해는 미미한 것으로 보아 전혀 믿을 수 없는 기록이다. 일본군과 전투할 때마다 항일연군 측이 압승했는데 왜 1941년 초까지 죄다 소련으로 도주했는가?

중국 연변(延邊)의 학자들은 차마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못하지만, 항일연군 측이 크게 승리한 전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명확한 문헌적 근거는 없는 것 같고, 항일연군에 참여한 사람들의 후일 증언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항일연군 측은 늘 일본군을 피해 다니다 간간이 전투를 벌이는 입장이라 부대도 자주 이동해야 했고, 1로군은 1941년 초에 완전히 궤멸되었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기 어렵다. 애초에 기록을 제대로 작성할 여유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간삼봉 전투와 관련한 만주국의 기록이나 만주 신문의 기사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있다면 일본 측 기록과 비슷할 것이다.

정세도 크게 변하고,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 항일연군 참여자들의 후일 증언들이 정확하다고 믿기도 어렵고, 자신들의 전과를 부풀려 말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다. 연변 학계에서는 간삼봉 전투를 지휘한 1로군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 ~ 1937)이 1936년 말 전사했다고 하면서, 후임 2사장 조아범(曹亞範, 1911 ~ 1940)이 전투를 지휘했다고 주장하는데[14], 이는 고증이 잘못된 것이다. 조국안은 1936년말 아닌 1937년말 전사했다. 이처럼 중국측 주장은 고증이 부실하여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경우가 자주 보이고, 항일연군의 전과를 부풀려 미화하려는 경향도 있다.

말 나온 김에 간삼봉 전투의 진실도 말씀드리면, 북한은 이를 일본군 74연대 2천명 중 1천5백명을 죽여 ‘호박대가리’ 전설이 나오게 된 전투라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론 일본군이 150명 정도에 동북항일연군 3개사 500명 정도가 붙은 전투로 실제 일본군 전사자는 50~6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의 위 방송 내용은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의 주장을 소개한 것이다.

한국 학계의 입장

한국 학계에서는 간삼봉 전투에 대해 종합적으로 연구한 경우는 없는 것 같고, 당시 신문기사나 일본측 기록을 모두 찾아내어 검토한 사람도 아직 없는 것 같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에 올라있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1권에는 간삼봉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온다.[15]

...이를 탐지한 동북항일연군 연합부대 500여 명은 간삼봉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주요 진지에 매복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은 2개 부대로 나누어 세방면에서 간삼봉 일대에 진입하였다. 6월 30일 8시 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에야 끝날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은 만주국 군경 50여 명, 일본군 수십명을 섬멸하였다. 특히 일본군은 부응동(富應洞) 근처에서 동북항일연군의 기습을 받고 대장인 김인욱 소좌가 부상을 입는 등 큰 타격을 받고 패주하고 말았다 [일부 일본 자료에는 일본군 전사 5명, 중상 5명, 경상 7명의 피해로 축소됨]. 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이 국경을 넘어 추격해온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 연합부대를 치밀한 매복작전으로 섬멸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는 그후에도 남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여 일제에 큰 손실을 입혔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60권 한국독립운동사 연표》 / 1931~1940년 / 1937년[16]
6.30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김일성)·4사(최현)·2사(조아범) 400여 명, 간삼봉(間三峰)에서 일본군 19사단 74연대와 전투 끝에 승리.

간삼봉 전투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가 없는 한국 학계는 차마 북한 주장을 수용하지는 못하고, 고증이 부실한 중국 연변 학계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1980년대 말 연변에서 간행된 책들을 근거로[17] 항일연군 측이 만주국 군경 50여 명, 일본군 수십명을 섬멸했다고 주장한다. 항일연군 2사장도 조국안(曹國安, 1900 ~ 1937) 아닌 조아범(曹亞範, 1911 ~ 1940)이라며 중국측의 잘못된 주장을 따르고 있다. 또 당시 신문보도나 일본측 기록이 일본군의 피해를 축소했다고 주장하지만, 연변에서 뒤늦게 간행된 책들이 당시 기록보다 더 믿을만하다는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김일성이 관련된 일은 제대로 문헌조사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미화하여 서술하는 병폐가 만연해 있다.

김일성 미화에 열심인 후배학자들로부터 북한 김일성을 가짜로 몬 장본인이라며 집중 비난을 받고있는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新文化社, 1974)에서 간삼봉 전투와 관련하여 1937년 당시 신문기사와 일본측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18][19][9]

장백현(長白縣) 오지 산악지대로 철수해 갔던 제六師는 함북 무산(咸北茂山) 방면에 출동했다가 철수해온 최현(崔賢) 소속의 제四師 부대와 합류, 三백명 가량의 병력으로 六월 하순 장백현 13도구(長白縣 一三道溝)(신갈파[新乫坡] 대안)로부터 또 다시 국경지대를 습격코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인욱 소좌(金仁旭 少佐)의 혜산진(惠山鎭) 수비대는 六월 二九일에 행동을 개시, 2대(二隊)로 나누어 신갈파 대안(新乫坡 對岸)으로 진출했는데 三○일 새벽에 부응동(富應洞) 근처에서 쌍방 조우, 맹렬한 교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항일연군(抗日聯軍) 측은 시체 五○여구를 남긴채 후퇴했으며 김소좌(金少佐) 부대에는 전사 五명, 중상 五명, 경상 七명이란 사상자가 생겼다.

그는 북한 간행 김일성 전기의 관련 내용[20]이 조작인 것도 비판하고 있다.[18] 당시는 김일성 회고록이 간행되기 전이고, 연변 학계도 아무 의견을 내기 전이다.

기록과 주장에 대한 검토

중국측 2차 문헌에는 항일연군 1로군 2사장 조국안(曹國安)이 1936년 12월 21일 전사했다고 나오나[21], 1936년 12월 24일자 매일신보는 조국안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이 폭설에 막혀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였다. 이듬해 1937년에도 조국안 부대가 6사장 김일성 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는 것이 자주 신문에 보도되므로[22][23], 조국안의 전사 시점은 1936년말이 아닌 1937년 가을 무렵이 확실하다. 김일성 회고록에 조국안이 1936년 11월 전사했다고했는데[24], 이는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고 자백하는 것이다.

간삼봉 전투와 관련하여 북한의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연변 또는 한국 학계의 주장들도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무리한 내용이 많다.

  • 당시 신문 기사 등에 실린 일본측의 피해 발표는 축소된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를 입증하는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게릴라 부대인 동북항일연군 측과는 달리 정규 군대인 일본군은 전사자에 대한 장례와 유족에 대한 보상문제, 부상자 치료 문제 등이 수반되기 때문에 함부로 숫자를 조작해서 발표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신문의 일본측 피해 보도가 사실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를 부인하려면 입증할 수 없는 추측성 주장만 남발할 것이 아니라 더 믿을만한 다른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
  • 전투에 참여한 항일연군 2사의 사장은 조국안(曹國安, 1900~1937)인데도, 북한이나 중국 측 모두 조국안이 1936년말 전사했다고 하면서[24], 2사장은 조국안의 후임 조아범(曹亞範, 1911~1940)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2사장 조국안은 1936년 후반부터 1937년 가을까지 지속적으로 6사장 김일성 부대와 연합해서 활동한 것이 국내 신문에 자주 보도되었고, 일본측 기록에도 그렇게 나온다[22][23]. 조국안이 1936년 말이 아니라 1937년 가을 무렵 전사했다는 것은 일본측 기록에 보인다.[25][26] 또한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이 1940년 4월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조국안은 1937년에 죽고, 그의 후임사장은 조아범이 아니라 양준형(楊俊衡, 1910-1938)인데, 그도 1938년 전사했다고 하였다.[27]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다면 자신과 늘 같이 활동했던 조국안의 전사 시점을 잘못 알 수가 없으므로 이는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아닌 가짜라고 자백하는 것이다.
참고 : 김일성 가짜설#김일성 회고록 속의 가짜 증거
  • 북한은 일본군측 지휘관이 김석원(金錫源, 1893~1978) 소좌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김석원의 일본 육사 동기로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 소속인 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인 것은 당시 신문에도 나온다.[28] 김인욱은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인 평안남도 용강에 살았으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소련으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어졌다. 북한은 엉뚱한 김석원에 대해 입에 담지도 못할 비방을 하고 있으나, 김석원은 1937년 6월 보천보사건 당시 서울의 용산연대(20사단 78연대)에 근무했고,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전선으로 갔기 때문에 해방 전에는 김일성이나 항일연군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해방 후 6.25 때 남침한 김일성의 군대에 맞서 싸운 일 밖에 없다.
    미국의 친북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도 북한의 주장을 따라 김석원이 해방전 김일성과 맞서 싸웠다면서 해방 후 국군에 참여했던 김석원을 집요하게 비방한다. 심지어 김일성이 만주에서 맞서 싸웠던 김석원의 응징을 원한 것이 6.25 남침의 한 원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근거없는 주장을 자주 하고 있다. 해방 전 김석원은 북한 김일성과는 맞서 싸운 일도 전혀 없으며, 아무 관계도 없었다.
  • 북한은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날조된 부대의 총사령관으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 작전을 한 것으로 주장하며, 그가 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이었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행적은 모두 북한 김일성이 한 것으로 만들었다. 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말 전사했고,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은 김일성이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것을 감추고 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한 것으로 꾸미려고 조작해낸 가공의 군대이다.
  • 북한측이나 남한측의 한국독립운동사에도 당시 일본군측 지휘관 김인욱이 부상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김인욱은 전투 직후인 7월 6일에 기자회견도 가지고 있으므로 부상당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29] 그가 부상을 당했다면 신문에도 보도되었을 것이나 일체 그런 말이 없고, 매일신보 1937년 7월 2일자 기사에 의하면 부상자 중 최상급자는 요시무라 코마키치(吉村駒吉) 보병 소위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역사 왜곡

브루스 커밍스는 간삼봉 전투에서 김일성과 맞섰던 일본군 지휘관 김석원(金錫源, 1893~1978)이 해방 후 38선에서 다시 김일성과 맞서게 된 것이 한국전쟁의 원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러 곳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학자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다.

간삼봉에서 실제로 맞선 사람은 일본군 지휘관 김인욱(金仁旭, 1892~ ?)6사장 김일성인데, 김석원과 북한 김일성이 맞서 싸웠다고 우기는 북한 측 주장을 아무 검증없이 받아들여 이를 한국전쟁의 원인이라고 견강부회하는 것을 보면 그의 한국전에 관한 학설은 하나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커밍스는 북한군은 김일성과 같은 항일 빨치산들이 주축이고 국군은 김석원과 같은 일본군 출신들이 주축이므로 북한이 더 정통성이 있고, 김일성이 일본군 출신들을 응징하기 위해 남침한 것이므로 마치 당위성이 있는 것처럼 궤변으로 시종일관한다. 김일성 패당은 일본군에 쫓겨 1940년 소련으로 도망가서 해방 때까지 5년간 편하게 지내다 해방 후 소련군 앞잡이가 되어 들어와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으로 북한 주민들의 주권을 강탈한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기본적으로 한국현대사나 일제시대 당시 사정에 대해 무지하면서 제맘대로 생각해낸 것을 6.25의 원인이라 한 것에 지나지 않음에도 한국의 얼치기 학자들이 이런 자를 추종하여 학계를 망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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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1.0 1.1 현재 북한 행정구역으로 양강도 김정숙군 김정숙읍이다. 신갈파진(新乫坡鎭)[신파] - 북한지역정보넷
  2. 2.0 2.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제17장 "5. 간삼봉전투"
  3. 3.0 3.1 전투 쌍방 피해 보도 1937-07-02 동아일보
  4. 4.0 4.1 쌍방(雙方)의 사상자(死傷者) 칠십여명 다수(七十餘名 多數) 산채 사처 소각(山寨 四處 燒却)코 귀대(歸隊) 조선일보 1937.07.03 석간2면
  5. 5.0 5.1 전투 쌍방 피해 보도 1937-07-02 매일신보
  6.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帝國議會 說明資料) 1937 (소화12년)
  7. 간삼봉 전투와 관련한 당시 신문 보도
  8. 백두산에서 동남동(ESE)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三長面)에도 간삼봉(間三峰)이 있으나 다른 곳이다. (좌표 [128.3666, 41.8980], 해발 1433 m)
  9. 9.0 9.1 咸南警察部, 《中國共産黨の 朝鮮內 抗日人民戰線結成及び 日支事變 後方攪亂事件》 (一九三八年 初) : 고려대 도서관 소장 /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東京 みすず書房, 1976) p.306
  10. 일본 측 전사자 명단과 사진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7월 04일 04면 06단
  11. 戰死者五名(전사자오명)의 告別式執行(고별식집행) 惠山鎭守備隊(혜산진수비대)서 1937.07.11 동아일보 (조간) 5면 6단
  12. 12.0 12.1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 民主朝鮮出版社, 1947. 11. 20) p.240
  13. 中共延边州委党史研究所编, 《东满地区革命历史文献汇编》 上冊 (中共延边州委会党史研究室, 2000年) : 抗联第一路军 一九三二年至一九四○年 主要战斗统计表(节选) (一九四一年初) pp.796~813. ; 一九三七年 (抗联二军) pp.808~809.
  14. 中共抗战英烈:曹亚范 中国共产党新闻>>党史频道 2014年 03月 25日 : 同年,调任第一军第二师师长。他率部配合第四、第六师在长白县十三道沟,重创日军第十九师团第七十四联队。- 조아범이 2사장으로 일본군 19사단 74연대에 심한 타격을 입혔다고 했으나 사실이 아니다.
  15. 제5장 중국공산당 만주조직과 한인들의 민족운동 / 3. 동북항일연군 제1군 6사의 활약 -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1권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p.278
  16.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60권 한국독립운동사 연표 / 1931~1940년 / 1937년 p.441
  17. 김창국, 《남만인민항일투쟁사》 (연변:연변인민출판사,1986. 246 p), 김동화; 김철수; 리창역;오기송 편저,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 (연변 :연변인민출판사,1988. 534 p)
  18. 18.0 18.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261~264
  19.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36)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 6사장 김일성에 관한 소문들 중앙일보 1974.07.03 종합 3면
  20. 白峯著, 民族의 太陽 金日成將軍 (平壤, 1968) pp.300~351
  21. 中共抗戰英烈:曹國安 2014年03月25日:人民網-中國共產黨新聞網
  22. 22.0 22.1 조국안 부대의 활동을 보도한 1936년의 신문 기사와 기록들 Wikimedia Commons
  23. 23.0 23.1 조국안 부대의 활동을 보도한 1937년의 신문 기사와 기록들 Wikimedia Commons
  24. 24.0 24.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4장 장백 사람들 (1936년 9월 ~ 1936년 12월) "4. 남만의 전우들과 함께"
  25. 東亜局第二課関係/第七章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昭和 12年 (1937년) 12月 1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130117600、執務報告 昭和十二年度東亜局第二課及第三課(東亜-3)(外務省外交史料館)」p.48 : 제3사장 왕인재(王仁齊) 사살(射殺), 제2사장(第二師長) 조국안(曹國安)ノ 진몰(陣沒, 전사)
  26. 國境方面에 있어서의 治安狀況 : 治安狀況(昭和 13年) 제44報∼ 제47報 1938년 06월 10일
  27. 在滿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の現況に關する文獻 『思想彙報』第25號 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1940.12.01) p.4 (65) 하단 좌: (3) 간부문제 - 총사령 양정우 생사불명
    思想彙報 第25號(1940년 12월) p.65 일부 번역문 - 滿洲 抗日聯軍 硏究(金昌順)
  28. 『金仁旭 少佐 驍勇은 聯隊의 ◈誇이다』新乫坡對岸의 討匪壯烈戰과 咸興聯隊當局者談 매일신보 1937년 7월 3일
  29. 1937-07-09 동아일보 김인욱의 전투 후 기자회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