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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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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야영 시절의 김일성과 김정숙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8권 (계승본)에 나오는 사진이다. 김일성 자필로 1941년 3월 1일 B 야영(남야영)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써 놓았다. 1941년 2월 16일 김정일 출생 13일 뒤의 사진이다. 조작된 사진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김일성 자필로 당시 그가 남야영에 있었다고 적어놓았으니 김정일이 1941년 2월 16일 남야영(하마탄, 라즈돌노예) 출생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김경희(1946.05.30~ )의 백일 기념 가족 사진. 김일성과 김정숙(金正淑, 1917~1949) 및 3자녀가 모두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으로 보인다. 왼쪽부터 김정숙, 김정일, 김경희, 김일성, 김정일의 남동생 김슈라. 맨 오른쪽 여자는 유모인 것 같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집에서 가정부로 있었던 일본인 여성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일 가능성이 있다.[1]

김정숙(金正淑, 金貞淑, 1917년 12월 24일 ~ 1949년 9월 22일)은 김일성의 처이고,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은의 할머니이다. 김일성이 만주서 소련으로 도주하기 직전인 1940년 가을에 결혼하였다. 장남 김정일(유라), 차남 김슈라, 장녀 김경희의 생모이다. 김일성은 김정숙 생전에 나중에 후처가 된 김성애(金聖愛)와 바람을 피워 가정 불화가 심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계모 김성애를 극도로 증오하여 김일성 사망 후 연금하다시피 하고, 감시하게 했다고 한다.[2][3][4]

김정숙 이름의 한자는 원래 金貞淑 이었으나, 아들 김정일(金正一)이 1980년 김정일(金正日)로 개명하면서 모친 이름의 한자를 金正淑으로 바꾸었다는 주장이 있다.[5]

생애


김정숙은 아마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한글도 못 읽는 문맹이었다고 한다.[6]

김일성과 김정숙이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불법 월경해 들어간 직후인 1941년 1월 김일성이 작성한 이력서에는 김정숙이 재봉일을 했다고 적혀 있다.[7]

북한은 그녀가 백발백중의 명사수라고 주장하는데[6], 그런 증언도 다수 있다[8].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집에 두 번 초대받아 가서 김정숙을 본 적이 있는 한재덕(韓載德, 1911~1970)[9]은 당시에도 김정숙이 총을 잘 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하였다.[10]

金貞淑(김정숙)은 金日成(김일성)이 「소련」으로 들어가던 당시의 아내로, 그 때 그의 「부대」 내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또 총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는 정평이었다.

김정숙은 88여단의 정식 대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군 계급을 부여받은 일도 없다. 다만 부대 관련 일을 돕는 역할은 좀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간행한 김정숙 전기에 '첫 여성 낙하산兵'이라고 했는데[6] 이는 거짓말이다. 만주에서 그런 일을 했을 가능성은 전무하고 소련에서도 88여단 정식 대원이 아니었으므로 낙하산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도 없다.

소련에 있을 때 김정숙의 소련식 이름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5]

제88 여단의 정치위원이었던 이조린(李兆麟)의 부인인 김정순(金貞順, 옛이름·김백문[金伯文])은 김정숙의 상사이자 전우였다. 그녀는 김찬정과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11] 소련 체재 중 중국인 및 조선인 대원은 러시아 이름으로 불렸고, 김정숙은 ‘와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조선진주군 정치위원이었던 레베셰프 소장의 부인은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뱌츠코에라는 곳에서 김일성 부부를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취재했을 때는 ‘가랴’라고 불렸다고 들었다. 또 ‘베라’였다는 정보도 있으며, 어느 것이 옳은가는 불명확하다. 마을사람들은 김일성에게도 러시아 이름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정숙의 소련식 이름은 "니나(Нина)"로 확인된 것으로 보인다.[12]

김정숙은 해방 후 두 아들 유라슈라 및 다른 88여단 대원들 가족과 함께 1945년 11월 25일 함경북도 웅기항으로 들어왔다.[13]

김일성과 결혼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불법 월경하여 들어가기 직전에 김정숙과 결혼하였다. 김일성과 소련 월경을 동행하였던 서순옥(徐順玉)은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14]

“1940년 8월에 김일성, 강위룡 등 우리 16명은 소련으로 향하여 떠났다. 소련 땅에 들어서기 전에 훈춘의 어느 산곡대기에 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혼례를 하였는데 혁명가를 부르며 오락을 진행하였다. 김일성, 강위룡 등 우리 16명 유격대 전사들은 소련땅에 들어선 다음 김일성 동지가 강위룡과 다른 한 동무를 파견하여 소련 변방 전사들에게 체포당하라고 지시하였다. 체포된 다음에 정황을 소련 당조직에 알리자는 계획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체포되어 땅굴 감옥에 감금되었다.”[15]

김일성과의 결혼 배경

만주 유격대 시절 김일성에게는 김혜순(金惠順)이라는 처가 있었고, 김정숙은 김일성의 부하 지갑룡(池甲龍)의 처였다. 그런데 1940년 4월 김혜순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지게 된다[16][17][18]. 또 지갑룡은 모종의 임무를 띄고 부대에서 파견나갔다가 기한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죽은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짝을 잃은 김일성과 김정숙이 결혼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소련으로 넘어간 뒤 지갑룡이 돌아와보니 김정숙은 이미 김일성과 결혼해 있어, 그꼴을 보면서 같은 부대에 있을 수가 없어 1941년 4월 김일성과 함께 만주로 일시 파견나왔다가[19] 부대로 돌아가지 않고 잠적하였다고 한다.[17][20]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던 김일성의 전처 김혜순은 이후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가 해방 후 북한으로 왔으며, 1994년 김일성 사망 때까지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21][22]

김일성과의 부부 관계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직속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하다 1959년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9]은 1962년 《동아일보》에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는 글을 연재했는데[23], 5월 30일 자에 김일성과 김정숙의 부부 사이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김일성은 밖에서는 여성을 배려하는 페미니스트처럼 언행을 하고 다녔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아내 김정숙에게는 더 없는 폭군처럼 대했다고 한다.

〈김정숙은 김일성이 소련으로 들어가던 당시의 아내로 그때 그의 부대 내에서는 가장 똑똑하고 또 총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는 정평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기이한 현상 한 가지가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김일성이 그 아내를 어떤 회합이나 ‘파티’나 극장에나 동반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그를 사람 앞에 내놓지 않는 사실이었다. 여성해방을 운운하고 남녀평등권법령을 서두른 김일성이 어찌하여 자기 아내만은 집안 구석에 가둬두고 내놓지 않는가? 하물며 그 여자는 과거 유격대 시대의 동지라고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련군 측 최고간부들과 어울리는 대대적인 파티가 있어 소련 장군들은 물론 북한 측 고급간부들까지 되도록 모두 부인을 동반하고 나오는 자리에도 어찌된 까닭인지 김일성은 아내를 동반하지 않았다. 그러니 북한의 최고간부 가운데도 김일성의 아내를 본 사람은 극히 적었다.〉

〈나는 전후 두 번 김일성의 가정에 초대받아 그 아내와 애들까지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아내는 삼십 전후의 키가 조그마한 아주 평범한 가정부인으로 보였는데 그 촌뜨기 같은 소련식 옷차림이 그를 더욱 소박하게 보이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모로 보나 이전에 빨치산 투쟁을 하였다는 여성으로는, 더욱이나 소문 같은 명사수의 여장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김일성이 예상외로 우락부락 큰소리를 내며 가정폭군 노릇을 하였는데 그 아내는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꼴이었다. 대개 밖에서 여성을 위하는 체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정에서는 폭군이라고 했다. 김일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일성이 외부에서는 열렬한 페미니스트처럼 행동하며 남녀평등을 외치고 다녔다는 것은 6.25 전쟁 중인 1951년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도 증언한 바 있다.[24][25]

사망 원인

김정숙의 사인은 병사(病死)라는 설[26], 아기를 낳다 난산으로 죽었다는 설[25][27], 김성애와의 관계에 대해 항의하다 임신 중에 김일성에게 배를 차여 죽게 되었다는 설[28], 김성애로 인한 가정불화로 자살했다는 설[8][29][6] 등 여러 주장이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김일성의 친척인 강명도 경민대 교수는 “실제 김정숙의 산파를 했던 친척의 증언으로는 김정숙이 출산 도중 하혈을 한 상태에서 처리하지 않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죽었다”고 했다. 김정숙이 자살했을 때 김정일과 그의 여동생 김경희의 나이는 각각 일곱 살과 세 살이었다.[6]

심지어 김일성이 김정숙을 죽이고 싶어했고, 그로 인해 죽었을 것리라는 주장도 있다.

  • 6.25 때 포로가 된 인민군 소좌 출신 주영복(朱榮福)의 증언[30]
어느날 밤, 요양소식당에서 설탕을 넣은 한국식 팥죽을 먹으며 中央警備聯隊(중앙경비연대)의 하사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 연대는 金日成(김일성)의 관저를 경비하는 일종의 親衛隊(친위대)로서 戰士(전사)마저 당원이 아니면 입대하지 못하는 부대이다. 그 하사관은 여러번 金日成(김일성) 관저의 경비를 선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 金日成(김일성)은 어떻게 출근하고 퇴근합디까"
"출근때는 金日成(김일성)이 먼저 나가고 늦은 퇴근시는 부인과 함께 돌아 오는 수도 있지요"
"............"
"글쎄, 어느날 밤 金日成(김일성)이 마구 뛰어 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마구 正門(정문)에 다가오며 「步哨(보초)! 내 뒤에 반동분자가 막 따라와」라고 큰 소리로 외치지 않겠소, 그래서 나는 자동소총을 그쪽으로 겨냥했지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발사하려고 했는데 타박타박 귀에 익은 발짝 소리와 함께 그의 부인이 뛰어옵디다 그려. 그리고 10여보 앞에서 달음박질을 하는 金(김) 에게 「아이구 여보!」 하며 숨찬소리로 부릅디다."
"그때 만약 동무가 쐈더라면 어쨌으리"
"그게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그가 쏘라면 무엇이든지 씁니다. 그것이 비록 사람이든 고양이든 간에 "

나는 그이야기를 듣고 金日成(김일성)은 자기의 처를 없애버릴 생각이 아니었던가라고 추측했다. 그후 얼마 안가서 그의 부인 金貞淑(김정숙)은 죽었다. 발표는 병사였다. 나는 그것이 「病死(병사)가 아니라 謀死(모사)가 아닌가」라고 지금도 의심을 품고있다.

어쨌든 그는 副首相(부수상) 洪命熹(홍명희)의 딸 洪愛姸(홍애연)을 후처로 맞아들였다. 그 하사관은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金(김)의 아들도 본일이 있소?"
"있지요. 가정교육이 엄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말을 안들으면 그는 「營倉(영창)」이라고 외치고 반침에 가뒀습니다. 누구든 그의 명령이 없이는 꺼내 주지 않았습니다"

김정숙이 사망했을 당시 남한 신문들은 평양방송을 인용하여 단순히 병사라고 보도했다.

金日成(김일성) 妻(처) 病死(병사) 부산일보 194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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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처(金日成妻) 병사(病死)
<서울 二十三日發 로이타 合同> 23일(二十三日) 밤 평양방송(平壤放送)에 의(依)하면 북한 괴뢰집단 수상(北韓傀儡集團首相) 김일성(金日成)의 처(妻)가 병사(病死)하였다 한다. 그런데 북한공산당(北韓共産黨) 지도자(指導者) 김일성(金日成)은 한국(韓國)이 일본(日本)에 점령(占領) 당(當)하엿을 때 항일전(抗日戰)을 전개(展開)한 위대(偉大)한 한국(韓國)의 애국자(愛國者)의 성명(姓名)을 사칭(詐稱)한 것이다.

신동아 2000년 8월호에는 김정숙의 죽음과 관련한 몇 가지 증언들을 소개하고 있다. 어느 증언이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1949년 9월22일 김정일이 7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가 급사했다. “북한의 고위간부들 사이에 잘 알려진 소문은 김정숙이 6번째 아기를 출산하던 중 난산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한국에 망명한 고영환은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6번째 아이’는 분명 잘못이며 ‘5번째 아이’가 맞다. 그러나 김정숙이 병사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 이유는 나중에 김일성의 후처가 되는 김성애의 존재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성애의 관계에 대해서 고영환은 김일성 부자와 친했던 여자 빨치산이었던 황순희(현재 북한 혁명박물관 관장)로부터 1970년대 초에 들었다고 하는 귀중한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6·25전쟁이 시작한 해인) 1950년 늦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무척 추웠고, 제일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최고사령부의 퇴각 행렬에 섞여 자강도의 강계, 만포까지 후퇴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었고 목욕도 못했기 때문에 이가 몸 속을 돌아다녔습니다. 최고사령관 동지(김일성)도 이 때문에 가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기 때문에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그(김일성)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던 것이 김성애라는 여자였습니다.

김성애는 당시 최고사령부 기술서기, 즉 최고사령관의 기술서기였지만, 김일성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온 우리들보다 김일성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김일성의 식사 준비와 의복에도 신경을 써서 김일성이 가려워하는 것을 보면 깨끗한 손수건을 김일성의 옷 속에 넣어드리곤 했습니다. 이가 손수건에 모이면 꺼내서 불에 태운 뒤 다시 손수건을 넣어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고영환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이미 전쟁 전부터 시작된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고 쓰고 있다. 김일성 곁에 있었던 홍순관[31]은 다음과 같이 김정숙의 죽음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나처럼 숙청을 피해 중국에 망명한 전 북한간부 일부는 김정숙이 세번째 아기를 출산하는 도중에 난산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의 의료수준은 그렇게 형편없지 않았으며, 중앙간부를 진찰하는 평양중앙병원 전문의들은 절대로 김일성의 처를 난산으로 죽게 할 만큼 무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25 때 인민군 포로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하면 김정숙은 남침전쟁에 반대하다 특경부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32]

미군 정보문서에는 김정숙이 살해 당한 것으로 나와

북한에서도 김정숙의 사인에 대해 병사했다는 공식 발표와 달리 여러 가지 소문들이 떠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25 때 인민군 포로를 신문하여 얻은 미군 정보에는 김정숙이 남침 전쟁을 반대하다 COMINFORM (Communist International Information Bureau)의 감시기관인 특경부(特警部, Special Police Section)에 의해 살해 당했다는 소문이 있다고 나온다. 1949년 말 ~ 1950년 3월 기간에 있었던 일이라고 했지만 김정숙은 실제로는 1949년 9월에 죽었으므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녀가 생전에 남침전쟁 계획을 알고 반대했을 가능성은 있는 것같다. 김일성은 일찍부터 남침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김정숙이 사망할 때까지는 스탈린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김정숙이 전쟁을 반대한다고 특경부가 그녀를 살해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다른 여자(김성애) 때문에 김일성이 살해했다는 소문도 있다고 했다. 또한 김정숙은 소총이나 권총의 명사수라는 평판도 있다고 하였다.


김일성 본인도 특경부의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고 하므로 소련은 6.25 전쟁 시기에도 북한에서 감시기구를 운영하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미군이 포로 신문 과정에서 얻은 김정숙의 사망과 관련해 북한 내부에 나도는 소문에 대한 정보 기록이다.[32]

NKA : North Korean Army
PW : Prisoner of War
GHQ : General Headquarters
CCP : Chinese Communist Party (중국공산당)
NKLP : North Korean Labor Party (북조선노동당)
NKG : North Korean Government
CONFIDENTIAL Security Information

INTERROGATION REPORT NO KG 1122 (Cont'd)

* * * * *

Murder of the Wife of KIM, Il Song
Major, NKA (Signal)

N KOREA
D/O Late 1949 to Mar 50.

(IN: The following account summarizes general talk and rumors in the NKA concerning this case. The alleged conversation between KIM, Il Song and an agent or agents of the Special Police Section was described to PW by Lt LEE, In No (李仁露), a GHQ Signal Officer who in turn heard it from a telephone operator in KIM, Il Song's office. While this account must necessarily be viewed with considerable reserve, it nevertheless appears to be of some intelligence value.)

Mme KIM, Chong Suk (金貞淑), aged 35, the wife of KIM, Il Song, married him in about 1935. She was a member of the same guerrilla force in MANCHURIA in which KIM served. She was a member of the CCP and later of the NKLP. She returned to KOREA in 1945 and became politically active as a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General Federation of Women (女性總同盟中央委員會). Mme KIM was a well-built woman, apparently in excellent health and reputed to be a crack rifle and pistol shot.

During late 1949 and early 1950, she expressed to her husband on several occasions her opposition to the war for which the NKA was obviously preparing. According to several NKA officers who claimed to be quoting directly what members of the KIM's household had overheard, Mme KIM told the Premier on one occasion: "The policy of preparation for war which you are pursuing will result in war between people of the same face. To resort to war would kill any hope of union. There is no support among the people for such a war. And supposing you fail - - - - what then?"

Word of Mme KIM's feelings reached the COMINFORM's Special Police Section and an agent or agents of this section went to see KIM and allegedly told him: "Your wife has lost the true spirit of the international Communist. She has disclosed important secrets and will continue to be a source of danger to us. For these reasons, should she not be removed?" KIM agreed.

In Mar 50, it was publicly announced that Mme KIM had died suddenly of an illness, the nature of which was not disclosed.

It was the general belief in the NKA that agents of the Special Police Section had murdered the woman. KIM himself was not believed to have had a direct hand in his wife's death. Another rumor was that KIM had killed his wife because of another woman, a belief held by many, especially after he remarried in May 50 - - - this time the daughter of LEE, Kuk No (李克魯), Minister without Portfolio in the NKG Cabinet.

This rumor died out after the war started and the general belief now is that Mme KIM had been liquidated for political rea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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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IAL Security Information

김정숙 사후에 김일성은 1950년 1월 이극로(李克魯)가 아니라 홍명희(洪命憙)의 딸과 결혼했으나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이고, 그후 김성애와 다시 결혼했다.[33]

김정숙의 정확한 사인은 출산 중 전치태반으로 인한 과다 출혈

김정숙의 정확한 사인은 당시 사정을 직접 아는 월남한 의료인들의 증언에 의해 출산 중 전치태반(前置胎盤)[34][35]으로 인한 과다 출혈인 것으로 밝혀진다.

▣ 전치태반(前置胎盤, Placenta previa)
태반은 혈관이 풍부하게 분포한 장기로서 탯줄을 통해 태아와 모체를 연결하고 태아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정상적인 태반은 자궁 윗부분에 있으나 전치태반은 아랫쪽으로 자궁경부 근처에 위치한 것을 말한다. 임신 말기 3개월 동안 태반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자궁경부를 당기게 되는데, 이때 비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전치태반이 찢겨진다. 심한 하혈과 함께 태아와 모체 모두에게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증상
① 심한 하혈
② 쇼크(식은땀, 끈적끈적한 피부, 가쁜 호흡, 급속한 심장박동, 졸림, 의식불명)
③ 조산(복통, 자궁수축)

이와 관련된 증언은 아래 두 경우가 있는데, 내용이 일치하므로 사실로 볼 수 있다.

김정숙(金靜淑)은 一九四九年에 임신했다가 출산 때 전치태반(前置胎盤)으로 죽었다. 당시 평양(平壤)에서 유명(有名)한 의사였던 조진석(趙震錫) 박사와 장기려(張起呂) 박사(釜山福音病院長)의 증언(證言)에 의하면 북한(北韓)의 고급간부(高級幹部)들만 출입하는 특별 병원의 산부인과장(産婦人科長) 황명곤(黃明坤) 박사 밑에 있던 허신(許信) 박사가 김정숙(金靜淑)을 봤는데, 전치태반(前置胎盤)이란 것은 조금만 때를 놓치면 죽는 병이어서 살리지 못했다고 한다.

조진석(趙震錫, 1901~1990)[36][37][38][39] 박사와 장기려(張起呂, 1911 ~ 1995) 박사는 1949년 9월 김정숙이 사망할 당시 평양에 있다 6.25 때 월남하여 당시 사정을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 만일 당시 평양 특별병원에 산부인과 과장 황명곤 박사와 허신 박사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월남한 조, 장 두 박사의 증언은 믿을만하며, 김정숙은 출산중 전치 태반으로 인한 과다 출혈로 사망한 것이 맞을 것이다.

김정숙의 사인에 대한 위 두 사람의 증언이 맞다는 것은 6.25 때 남파되었다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부 조옥희(趙玉姬)의 증언에서도 밝혀진다.[40]

金日成의 非人道的 私生活
數많은 女性을 弄絡
心臟病, 性病에 혼겁
金日成專屬看護婦의 談

本籍을 平北 義州郡 廣坪面 淸水洞에 둔 趙玉姬(二五)는 新義州高等看護學院을 修了하고 中央病院에 就職한 後 金日成專屬看護婦로 있다가 國聯軍의 平壤 後退時 越南, 馬山에 滯留한 後 今般 釜山에 와서 某機關에 勤務中이라는 바 昨合同搜査本部部長 金昌龍[41] 大領室에서 出入記者團에 金日成의 非人道的인 私生活의 內容을 暴露하였다.
그의 말하는 바에 依하면 北韓에는 中央病院이 있어 그 病院에서는 北韓傀儡들의 部長(大韓民國의 局長級) 以上의 人物이 治療를 받는 곳이라 하며 特히 金日成이 治療를 받을 때는 數十名의 護衛병이 警戒를 한다고 한다. 또한 金日成의 健康狀態는 不良하며 現在 心臟病에 걸려있다 한다. 特히 男女平等權을 부르짓는 金日成은 많은 女性을 弄絡하여 甚至於는 多種의 性病에 걸려서 現在 (사루바루산)[42] (페니시링) 等의 注射를 맞는다 한다.
金日成은 一九四八年 봄에 打字秘書 金성팔(女)[43]과 不義의 關係를 매저 妊娠한 結果 婦人科 醫師 黃병건[44]에게 內密히 手術 落胎시켰다 한다. 前記 趙는 金日成의 妻가 순産時 直接 看護하였는데 (?)置태盤[45]으로 出血이 甚하여 手術台 위에서 絶命하였다. 이로 因하여 中央病院의 院長以下 各所屬長과 前趙는 責任追究를 當하고 罷免되었다 한다. 金日成의 子息으로서 金유라(十一)와 金경子(五)[46]의 女兒가 있다 한다.

이들 生活面을 綜合하여보건데 金日成은 男女平等權의 허울조흔 "탈"을 쓰고 모든 女性을 유린하며 甚지어는 맹장념(盲腸炎)을 手術 할 때는 自己部下를 믿을 수 없다하여 "쏘련"까지 갓다 한다.

조옥희는 당시 김정숙을 간호했던 간호원으로 그녀가 사망하자 책임 추궁을 받아 파면 당했다고 말하는데, 김정숙 사인에 대한 증언 내용이 조진석, 장기려 두 박사의 증언과 정확히 일치하므로 사실로 보인다.

전치태반은 요즘은 사전 진단으로 알 수 있고, 출산에 임박하여 제왕절개 등으로 위험을 피할 수 있지만, 당시 의술로는 사전 진단이 어려워 출산시 산모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것을 막기 어려웠다.

김창룡(金昌龍) 회고록의 조옥희 진술은 상당히 다른 내용

당시 조옥희를 조사한 김창룡(金昌龍, 1916~1956)[41] 대령의 口述 회고록에는 조옥희의 진술 내용이 더 자세히 나오지만, 위 신문 기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Ⅳ. 김일성의 전속 간호원 조옥희
1. 김일성의 전속 간호원이 되기까지 … 371
2. 김성주와 김일성 … 380
3. 장군 부인의 질투 … 388
4. 관저 내의 죄악상 … 392
5. 한국동란 발발의 진상 … 397
6. 자유로운 질서의 위력 … 400
김일성과 홍명희 딸의 부적절한 관계

홍명희(洪命喜)는 임꺽정(林巨正)의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월북하였다. 홍명희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딸들은 쌍둥이로 모두 숙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전(이화여자대학교 전신)을 나왔다.

 김창룡의 원고에는 해방 이후부터 김일성의 전속(專屬) 간호원을 지낸 조옥희(趙玉姬)가 6·25전쟁 이후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김창룡의 특무부대에 의해 체포되어 진술한 내용이 있다. 그 내용 중 홍명희의 딸과 김일성의 관계가 구술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조옥희는 홍명희 딸 중 한 명과 김일성은 깊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부수상이 된 홍명희는 미모의 딸을 데리고 김일성이 있는 수상관저를 자주 방문하였다. 그 당시 홍명희 딸은 처녀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관저 내의 고용인들은 그녀를 ‘미스 홍’으로 김일성은 ‘홍 동무’로 호칭했다고 한다. 홍명희의 딸은 빨간 튤립처럼 요염하게 생겼으며 김일성 앞에서는 갖은 아양을 떨었고, 김일성의 부인인 김정숙이 관저에 없을 때에는 혼자 찾아와 김일성과 단둘이 방 안에서 교성(嬌聲)을 지르며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김정숙에게 들키게 되자 그 후 홍명희 딸의 수상관저 출입이 금지되었다.

김일성 아내 김정숙의 死因은?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김일성의 주변에서 예기치 않은 두 가지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1949년 봄에 김일성의 일곱 살 난 어린 아들이 수상관저의 연못에서 놀다가 익사(溺死)한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이 임신 5~6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출산 도중 갑자기 사망한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은 아들의 익사사고와 김정숙의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는데 이 두 사건에 홍명희 딸의 보이지 않은 음모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조옥희의 증언은 시사하고 있다. 특히 김정숙의 갑작스런 사망 사건에 대해 조옥희는 죽기 전날 김정숙은 권총사격을 하고 자기와 같이 쾌활하게 정원에 앉아서 잡담까지 나누었는데 잠자다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북한의 공식 발표내용이 출산 중 사망이라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간호원인 조옥희가 볼 때 당시 김정숙은 임신 5~6개월로 낙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산사망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김정숙의 장례식 날 김일성은 상여 앞에 섰고 그 뒤에 각료들과 각계 대표들이 뒤따랐는데, 부인의 장례임에도 김일성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장례식이 끝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홍명희의 딸이 수상관저로 들어왔고, 그때부터 홍명희 딸에 대한 주변 사람의 호칭이 ‘수상 부인’ 또는 ‘장군 부인’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조옥희는 해방 이후 김일성에 관한 비화들을 진술하고 있다.

북한의 김정숙 우상화(偶像化)

김정숙의 장남 김정일은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로도 계모 김성애와 권력투쟁을 벌이는 한편으로 생모(生母) 김정숙을 우상화(偶像化)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生母偶像化(생모우상화) 작전은 自己美化(자기미화) 속셈
郡(군)·學校(학교) 명칭도 金貞淑(김정숙) 이름 따 개칭 성역화(聖域化)
각종 「회상기(回想記)」 발간 주민(住民)들에 학습(學習) 강요

김정숙의 손자 김정은도 조모 김정숙의 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생모 고용희가 북한에서 천대받는 재일교포 출신이라 우상화에 한계가 있고, 김정은 자신이 "후지산 줄기"라는 비아냥을 당할 우려도 크기 때문이다. 또 조부 김일성과 부친 김정일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자신이 백두혈통이라는 것을 강조는 하고 싶기 때문에 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조모 김정숙이라서 우상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다고 한다.

갤러리

김일성의 고종 동생 김정숙

북한은 일반인들이 김일성의 처이자 김정일의 모친 김정숙과 같은 이름을 가질 수 없도록 했으나, 유일하게 김일성의 고종 동생(고모의 딸) 김정숙(金貞淑, 1930 ~ ?)만 같은 이름을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허담(許錟, 1929년 ~ 1991년 5월)이다.

세 번째로는 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인 김성애가 소개되고, 다음은 김일성의 사촌 김정숙이 소개된다. 사촌 김정숙은 김일성의 첫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과 동명이인이다. 북한에서 일반인들은 김일성의 친족과 같은 이름을 쓸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은 친족이라 예외적으로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KGB는 “그녀(김정숙)의 남편은 허담이다. 허담은 1960년부터 외무성 부상으로 근무하다가 최근에 외무성 제1부상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김일성의 사촌인 김신숙과 그 남편 양형섭, 외삼촌인 강량욱, 친족이라고 적시된 김옥순과 그 남편 최광 등의 이름도 문건에 등장한다. “최광은 조선전쟁(6·25전쟁) 당시 사단장을 맡았는데, 김일성이 그의 지휘능력을 혹평했다”는 보고도 들어있다.

강량욱(康良煜, 1903~1983)은 김일성의 외삼촌이 아니라 외삼종조부이다(외조부 강돈욱의 6촌 동생).

참고 자료

p.10 《北朝鮮暗黑王 金日成夫人 金靜淑自殺未遂事件》

함께 보기

각주

  1. 小林和子(旧姓:萩尾) 著,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 奥村芳太郎編,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에 수록되어 있다.
  2. 北노동당 '금고지기'에 한광상…김일성 부인 김성애 2014년 사망(종합) 연합뉴스 2018-12-27 16:47 : 1928년생이라는 설도 있다고 함.
  3. 통일부 “김정일 의붓 어머니, 김성애 2014년 사망” 중앙일보 2018.12.27
  4. [김씨 일가의 실체] 김일성의 부인 김성애 실성하다 RFA 2012-09-18
  5. 5.0 5.1 완전해부 인간 김정일 미스터리 :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신동아 2000년 8월호
  6. 6.0 6.1 6.2 6.3 6.4 최근 발간한 《김정숙 전기》: 백발백중 명사수, 광복 후 다양한 활동 등 김정숙 우상화에 혈안 월간조선 2015년 3월호
  7. [단독]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 중국공산당 입당 보증인 ‘이청산’은 누구…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단독]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8. 8.0 8.1 [장성민의 시사탱크] 충격 공개! 北 '노획문서'…김씨왕조 속살 드러나 TV조선 2013.06.06
  9. 9.0 9.1 한재덕(韓載德, 1911~1970) 위키백과
  10.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6) 〈金日成直屬(김일성직속)〉 〈記者(기자)의手記(수기)〉 1962.05.30 동아일보 2면
  11. 김찬정(金贊汀) 지음, 동아일보출판부 옮김; 《비극의 항일(抗日) 빨치산》, (서울 : 東亞日報社, 1992) p.26
  12. "소련, 김일성을 임시 지도자로 임명했을 수도" 연합뉴스 2018-11-06
  13. 김정일의 청소년 시절 KBS 북한백과 2006-03-20
  14.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pp.206~207
  15. 박창욱 교수 및 권립 교수 인터뷰; 신주백, 《김일성의 만주항일유격운동에 대한 연구》 p. 183.
  16.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 김혜순이 체포되어 전향했다는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 기사.
  17. 17.0 17.1 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 : Archived 2018.11.06
  18. [생생토크 평양수다] 北,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나? TV조선 2013. 12. 25 : 김일성 전처 김혜순에 대한 장해성의 이야기가 나옴.
  19. 제88독립보병여단#김일성 인솔 소부대의 만주 파견
  20. 유순호, 《김일성 평전 하권》, 출간 예정
  21. 김일성 가짜설#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의 후일담
  22. 문명자(1930 ~ 2008),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월간 말 1994년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
  23. 단행본 :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 조선노동당치하의 북한회고록』, 서울, 내외문화사(內外文化社), 1965
  24. 1951년 3월 1일자 부산 국제신보의 조옥희 인터뷰 기사
  25. 25.0 25.1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26. 6.25北(북)에서 본 證言(증언) <16> 제4부 開戰準備(개전준비) 진행 (1949년) 1980.07.03. 경향신문 3면
  27.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 : 金聖愛(김성애)는 시종비서 女軍(여군) 출신 戰爭(전쟁) 와중 姙娠(임신)┉소문나자 극비 결혼 동아일보 1990년 5월 13일 5면
  28. 김일성에게 배를 걷어차여 숨진 본처 김정숙 premium.chosun 2014.09.24
  29. "「金正日(김정일) 백두산出生(출생)」은 거짓말" : 蘇(소)「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紙(지) 보도 1991.12.26 동아일보 15면
  30. 6.25 北(북)에서 본 證言(증언) <16> 제4부 開戰準備(개전준비) 진행 (1949년) 1980.07.03 경향신문 3면
  31. 무정… 비운의 혁명가:하(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4) 중앙일보 1991.10.10 종합 11면
  32. 32.0 32.1 RG 319,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Intelligence Document File Publication 1947-62, Entry # 1004H (UD), ID 950054 : ATIS-FEC Interrogation Report, Box No. 334, 950054 KG 1121, etc. (NARA 문서 :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pp.25~26
  33. 김일성#김일성의 처와 자녀
  34. 전치태반(前置胎盤) : 삼성병원
  35. 전치태반(前置胎盤) : 고려대 안암병원
  36. 장우성(張遇聖, 1912~2005) : 화단풍상 70년 제4장 화단의 형성 : 마지막 평양여행 (30회)
    장우성(張遇聖, 1912~2005),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312) 제76화 ?맥인맥(31)|평양 구경 중앙일보 1982.01.14 종합 7면
  37.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장을 역임하신 조명준(1924~2014) 박사 조명준 박사의 부친이 조진석 박사이다.
  38. 김태호, “독학 의학박사”의 자수성가기: 안과의사 공병우(1907-1995)를 통해 살펴 본 일제강점기 의료계의 단면 의사학 제22권 제3호(통권 제45호) 2013년 12월
  39. 조진석 박사는 평양에 있을 때 김일성의 맹장염을 진단한 적이 있고, 소련군 의사가 맹장염 수술을 할 때 입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 p.344
  40.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41. 41.0 41.1 김창룡(金昌龍, 1916~195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2. Salvarsan 또는 화합물 606호 (compound 606) : Arsphenamine
  43. 나중에 김일성의 후처가 된 김성애의 초명이다.
  44. 위에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이 언급한 산부인과장(産婦人科長) 황명곤(黃明坤) 박사가 와전된 것으로 보임.
  45. 전치태반(前置胎盤)으로 "전" 자가 누락되었다.
  46. 김경자는 김경희의 처음 이름으로 보인다.
  47. 47.0 47.1 푸틴, 2차대전 전승절 맞아 북한 '항일 빨치산'에 축전 연합뉴스 2021-05-08
    푸틴, 北항일빨치산 원로 이영숙에 '2차대전 승전' 축전 뉴스1 2021-05-08
  48. 48.0 48.1 김정은·푸틴이 예우한 마지막 北빨치산 1세대 사망 뉴시스 2021-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