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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최근 수정 : 2023년 1월 8일 (일) 15:34
동북항일연군기(東北抗日聯軍旗)[1]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NEAJUA, Northeast Anti-Japanese United Army)은 1932년 3월 만주국(滿洲國)이 수립되자 만주 각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소규모의 항일 유격대를 만들면서, 이들이 마적출신 군벌 장작림(張作霖, 1875~1928), 장학량(張學良, 1898~2001) 부자의 잔존 세력 등 여러 무장 단체들과 연합하여 만든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항일 무장 조직으로, 처음에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으로 불렀으며, 김일성 등 다수의 조선인들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여러 차례 일본군이나 만주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으나, 보급품과 인력 조달을 위해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방화, 살인 등을 무수히 자행하기도 했다. 실제로는 모택동중국공산당 중앙이 아닌 소련 코민테른의 감독과 지시를 받았으며,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말 소련으로 도피하여 소련군 88여단에 편입되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때까지 이들은 소련의 목적에 맞는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 아무런 항일투쟁도 한 적이 없고, 소련의 대일본전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김일성 등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생존자들은 해방 당시 그들의 존재가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국내에 아무 지지세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으로 북한의 핵심권력을 장악하였고, 종국에는 김일성 일족 세습전제왕조를 만들었다. 이들의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은 북한 주민들을 탄압하고 노예화한, 일제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폭압적인 김일성 왕조를 정당화하고, 75년 이상 유지하는 핵심적 명분으로 이용되고 있다.

목차

개요

1936년 2월 20일 발표한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 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 建制宣言)」. 중공당 본부가 1935년 8월 1일자로 발표한 이른바 「8·1선언」을 따라[2][3] 중공당 만주성위는 하부 당에 동북항일연군 조직에 관한 지령을 내리고, 이에따라 발표된 선언이다.

1920년대 만주를 지배하던 군벌 장작림(張作霖, 1873~1928)이 1928년 폭사하였는데, 배후는 일본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3월 만주국을 수립했다. 이후 만주 각지에는 장작림 세력의 군대, 마적단, 공산 유격대 등 잡다한 성격의 각종 항일 무장단체들이 생겨나는데, 이들이 합종연횡하여 1군(軍) ~ 11군(軍)까지 만들어졌다.[4] 이들이 다시 연합하여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되었다가 좀더 많은 세력들을 모으기 위해 공산주의 색채가 배어 있는 이름을 무색무취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바꾸지만, 내용적으로는 중공당 만주성위의 지배 구조가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중공당 본부가 1935년 8월 1일자로 발표한 이른바 「8·1선언」을 따라[2][3] 중공당 만주성위는 하부 당에 동북항일연군 조직에 관한 지령을 내리고, 이에따라 1936년 2월 20일 여러 무장단 대표 명의로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 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 建制宣言)」을 발표한다.[5] 이어 지휘 편제를 3개 로군(路軍)으로 조직하는데, 11개군 중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제1, 2군이 1로군, 동만주의 제4, 5, 7, 8, 10군이 2로군, 북만주의 3, 6, 9, 11군이 3로군으로 편성된다.[3] 각 로군의 총사령(總司令)은 1로군이 양정우(楊靖宇, 1905~1940), 2로군이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이었으며, 3로군은 조상지(趙尙志,1908~1942)였으나 나중에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 1910~1946)으로 교체되었다. 북한 김일성은 양정우 휘하의 1로군 소속이었다.

항일연군은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군대이지만 연안(延安)의 중공당 중앙과는 연락이 두절되어 소련의 코민테른(국제당, 國際黨) 극동지부의 지휘를 받았다.[3][6][7] 아래와 같은 당시 신문기사도 항일연군이 소련의 지령과 지원을 받았던 사실을 보여준다.

満洲攪乱の魔手 / 「鉄の指令」をうけて入満 / 密行中の巨魁捕る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1936.8.3 (昭和11)


항일연군은 1930년대 중반에 각지에서 맹렬한 항일전을 벌였으나, 일제와 만주군의 집중적인 토벌로 다수의 전사자, 도망자, 귀순자들이 발생하면서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1941~2년 무렵 완전히 소멸한다. 그 잔존 세력이 소련으로 도피하자 소련은 제88독립보병여단(第88獨立步兵旅團, '약칭 88여단')을 만들어 이들을 수용한다.

항일연군과 소련의 이러한 표면적 협력관계와는 달리 항일연군은 반만항일(反滿抗日)을 목표로 한데 비해 소련은 정반대로 만주국(滿洲國, Manchukuo)을 승인한 몇 안 되는 나라들 중 하나이고[8][9], 1941년 4월에는 일본과의 충돌을 방지하려고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을 맺기도 했다[10][11]. 소련은 항일연군을 견제해가면서 필요에 따라 적절히 이용하는 방안을 구사했던 것이다. 반만항일을 내세웠던 항일연군 잔존세력이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은 소련으로 피난처를 찾은 것은 이들의 애초목적이 반만항일 자체보다 공산혁명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항일연군에는 김일성, 최용건, 김책, 최현 등 해방 후 북한 요인이 된 사람들을 위시한 다수의 만주 조선인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으나, 중국공산당원이었던 이들의 투쟁을 과연 조선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는 항일연군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12][3][13][14]

동북인민혁명군은 1935년 11월 코민테른에서 채택한 “인민전선·전술”과 이에 따른 중공당의 “8·1지시”에 의거하여[2][3] 다른 계열의 항일 무력과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민혁명군의 강령이나 항일연군의 조직 조례에는 “항일반만(抗日反滿), 동북실지의 회복(東北失地의 回復), 중화조국의 옹호(中華祖國의 擁護)”가 기본 목표로 제시되어 있을 뿐 한국독립이나 한민족 해방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가 없었다.

《만주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에 나오는 동북항일연군의 구체적 조직조례는 아래와 같다.[15][16]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조례에는
제1조(第1條)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의용군(義勇軍), 자위대(自衛隊), 구국군(救國軍), 항일산림대(抗日山林隊) 등의 공동조직(共同組織)으로서 각군의 명칭을 취소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군(第○軍) 제○사(第○師) 제○단(第○團)이라 한다.
제2조(第2條)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참가한 부대는 다음 3개조를 준수해야 한다.
(1) 항일반만(抗日反滿), 동북(東北)의 실지회수(失地回收), 중화조국(中華祖國)의 옹호,
(2) 일적주구(日賊走狗)의 재산몰수,
(3) 민중(民衆)과 연합하여 항일구중국(抗日救中國).
제3조(第3條)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동북항일구국인민혁명정부(東北抗日救國人民革命政府)(내용(內容)은 중앙당만주성위(中央黨滿洲省委))의 지도를 받고 혁명정부(革命政府)에 의해 항일연군위원(抗日聯軍委員), 총사령(總司令), 군장(軍長), 각군(各軍) 정치위원(政治委員)을 임명한다.
라고 되어 있어, 한국의 독립도 한국의 실지회복(失地回復)도 이 조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북한 김일성이 소련군 88여단에 있을 때인 1942년에 여단장 주보중의 지시로 지은 것으로 알려진 항일연군 1로군의 역사를 간단히 기록한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에도 조선독립이란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17] 김일성은 당시 중공당원으로 중국을 위한 투쟁을 했을 뿐, 조선독립운동을 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이다.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대다수가 만주에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조선인의 정체성도 희박했고, 해방 후 소련군이 북한으로 데려와 최고 권력을 쥐어준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 조선인 여자대원들도 대부분 중국인과 결혼하였다. 이런 사실을 보아도 항일연군 조선인들의 투쟁사는 중국인인 조선족의 역사이지 한국인들의 역사로 보기는 힘들다.

항일연군 시절 김일성의 수하였던 여영준(呂英俊)은 당시 김일성이 해방이 되면 중국 공산당이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를 시켜주길 원했다고 증언하였다.[18] (여영준 본인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 또한 해방 당시 김일성은 중국어엔 능하나 조선말은 더듬거리며 잘 하지도 못했다.[19][20][21] 이런 사례로 보면 해방 전의 김일성은 조선인 아닌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해방 후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88여단에 소속됐던 조선인들이 국내에 아무 기반도 없고 지지세력이 전무했음에도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된 것은 순전히 스탈린과 소련군의 덕분이다. 소련은 자신들이 교육시킨 이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권력을 잡도록 만들어 한동안 북한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조직

동북인민혁명군의 제2군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滿洲省委) 산하 동만특위(東滿特委)의 소재지인 만주의 간도 지역을 근거지로 형성되었다. 간도의 인구는 80% 가 조선인이었던 관계로 대원들도 절대 다수가 조선인이었다. 제2군에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었던 6사장 김일성과 북한 김일성등 2명의 김일성이 있었으므로 제2군의 역사가 특히 더 중요하다.

제2군의 제1독립사(제1사)는 출범 당시 조선인 주진(朱鎭)이 사장이었는데, 1935년 초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탈주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항하고 만다.[22][23][24] 그후 중국인 왕덕태(王德泰)가 후임 1사장이 된다. 소위 민생단 사건은 조선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 중공당 동만특위와 2군에서 조선인 간부들을 숙청하고 중국인들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제2군의 제2독립사(제2사)는 그 편성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근래에 1935년 9월의 제2군 조직표가 발굴되면서 제2독립사(제2사)의 사장(師長)도 조선인 박춘산(朴春山)이고, 정치위원도 조선인 김일성(金一成)이었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제2독립사(제2사) 제1단의 참모로 나와 있는 사람이 북한 김일성이다. 2군의 2사 1, 2단은 1사의 1, 2 단과 구분하기 쉽게 편의상 2군 3, 4단으로 부르기도 했다. 독립사(獨立師)라는 명칭은 상부의 군사조직이 없이 동만특위의 직속으로 되어 있을 때의 명칭이고, 2개 독립사를 통괄 지휘하는 제2군의 군부(軍部)가 조직되면서 독립은 떼고, 제1, 2사(師)로 된다.

하위직급의 북한 김일성이 아닌 2사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이 1936년 4월 2군 제3사장(제6사장)이 된다. 하지만 제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후부터 북한 김일성이 그의 경력을 도용하기 시작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참고하라.

지금 학계에서는 절대다수가 수많은 전사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다시 나타났으니 6사장 김일성은 전사하지 않았고,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로 발굴된 이 조직표가 그러한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6사장 김일성은 출생지도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麟面)으로 기록된 것이 많아 평양 인근 출신인 북한 김일성과 다른 인물인 것이 여러가지로 입증된다.

1935년 9월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조직표

1935년 5월 30일 제1 및 제2 독립사를 총괄 지휘하는 제2군의 군부(軍部)가 출범하면서 두 독립사는 각각 제1사(師) 및 제2사(師)로 된다. 제2군의 군장(軍長)은 왕덕태(王德泰)가 되어 제1사장을 겸임한다. 1935년 9월의 제2군 조직표는 아래와 같다. 여기는 단(團)까지만 표시하였고, 그 아래 연(連) 단위는 pdf 파일에 나와 있다.

東北抗日救國軍 第二軍

昭和十年(1935年) 五月 三十日 汪淸 腰營溝 成立
管轄地区[區] 間島省 各縣及敦化縣地方
根據地 汪淸 羅子溝

軍長 王德泰 四二 滿人

政治委 魏極[拯]民 三六 〃
參謀處 刘[劉]漢興 三○ 〃

作战科 朴春深 三○ 鮮人
牒報科 吳某 〃
交通科 金善九
管理科 王中山 四○ 滿人

經理處 李某 三五 鮮人

軍需股 李五福 二七 〃
第二軍 第一師

師長 王德泰 滿人
政治委 李同志 三○ 鮮人
參謀處 趙某 三二 滿人

第一師 第一団

団長 安鳳斈[學] 二五 鮮人[26]
政治委 朱寿[壽]東 二四 滿人 - 周樹東(周树东)
參謀處 林昇奎 鮮人
經理處 石德竜[龍]

第一師 第二團

団長 張春泰 三○ 滿人
政治委 楚哥
參謀處 李哥

作战[戰]科 劉蘭漢 (柳兰[蘭]煥)[26]
第一師 第三團

團長 李xx 三二才 鮮人
政治委 金光浩 鮮人
參謀處 李靑山 鮮人[27]

第二軍 第二師

師長 朴春山 鮮人
政治委 金一成 鮮人
參謀處 王大腦袋 滿人 (= 王潤成)[28][29]

第二師 第一團

団長 方振声[聲] 四○ 滿人
政治委 石奎 三○ 鮮人
參謀處 金日成 三二 鮮人

作戰科 金一
第二師 第二団

団長 候國忠 滿人
政治委 金鉉 鮮人

제2사의 정치위원(政治委員)이 김일성(金一成)인데, 그 산하 제3단의 참모장에 김일성(金日成)이 또 나온다. 2군 2사에 두 사람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명명백백한 첫 증거이다. 북한 김일성의 1941년 1월 이력서에 3단(2사 1단)의 참모장 경력이 적혀 있으므로[30][27] 그 보다 훨씬 높은 직급의 2사 정치위원 김일성(金一成)은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위의 간도 영사관 기록에 나오는 부하가 100명인 김일성(金一星)으로 보이며, 그의 실제 직책은 2사 1단(3단)의 제3연장(連長)이 아니라 훨씬 높은 2사 정치위원(政治委員)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볼만한 것이 하나 더 있다.

1934년 12월 만주국군(滿洲國軍) 제2군관구월보(第2軍管區月報)의 제2군관구내 비적조사표(第二軍管區內 匪賊調査表).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085300、昭和10年 「満受大日記 別冊 第2号」(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滿洲國軍) 第1軍管区月報 昭和9年12月分
p.68 (滿洲國軍) 第2軍管區月報 강덕원년(康德元年) 12월분 (1934년 12월분)
[p.113] 第二軍管區內匪賊調査表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독립사장 박춘산(朴春山) / 匪數 100 / 근거지 延吉縣界沙河掌 / 횡행지역 大荒崴 奧地 能家地方 一帶 / 備考 : 政治部長 金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조직표에 제2사 정치위원이 金一成인 것으로 보아 여기의 정치부장(政治部長) 金一(?)은 金一成(또는 金一星)일 가능성이 크다.

직급이 높은 이 김일성이 1936년 봄 제3사 사장(師長)이 된 사람이며 (후에 6사장), 제3단(=제2사 제1단)의 단장 방진성(方振聲) 아래 참모장 또는 제3연장(連長)인 북한 김일성은 아직 사장으로 승진할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다.

위의 표에 제1사 제1단의 단장으로 나오는 안봉학(安鳳學)은 1936년 3월 김일성이 3사장이 될 때 같이 1사장으로 승진했다. 안봉학이 1936년 9월 30일 돌연 일본군에 투항해버리자 1사의 정치위원 주수동(周樹東, 1918~1937)이 후임 사장이 된다.[31]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사장(師長)이 되려면 최소한 단장(團長)이나, 사(師)의 정치위원 또는 참모의 경력을 필요로 하며, 연장(連長)이나 단(團)의 참모가 곧바로 사장으로 승진할 수는 없다. 북한 김일성이 사장 승진에 필요한 단장(團長)이나 사(師)의 참모를 지냈다면 이력서나 항련 제1로군 약사에 그보다 낮은 직급은 쓰면서 이를 적지 않았을 리도 없다.

2군의 1사 1단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이 1사장으로 승진할 때에 북한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3단장(2사 1단장이라고도 함) 방진성(方振聲, 중국인)은 사장으로 승진하지도 못했다. 북한 김일성이 직속 상관 방진성을 제치고 3사장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당시 3사장이 된 김일성은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어느 군대든 소대장이나 중대 참모 정도가 중대장과 대대참모들을 제치고 곧바로 대대장으로 승진할 수 없다. 수많은 부하의 생명을 책임진 지휘관을 경력이 미비한 자로 임명하는 것은 금기이다. 당시로서는 아직 단(團)의 참모 또는 연장(連長, 소대장급) 지위에 머물러 있던 북한 김일성이 승진한다면 사장(師長, 대대장급)이 아니라 그 아래 단장(團長, 중대장급) 정도나 되는 것이 최선이었다. 더구나 1935년 12월 20일자 위증민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 김일성은 아직 민생단(民生團) 혐의도 완전히 벗지 못하고 있으므로 낮은 직급에 있던 그가 갑자기 사장으로 승진했을 리는 만무하다.

제2군 제2사장 박춘산(朴春山)의 부하로 동명이인인 제2사 제3단 제2련 제1배장(第三團 第二連 第一排長) 박춘산(朴春山)이 또 보이므로,[32] 상관과 부하가 같거나 유사한 이름을 쓰는 사례는 더러 있었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편성

항일연군의 부대 단위는 최소규모의 단위 반(班)이 있고, 3개 반이 배(排), 이런 식으로 차례로 연(連), 단(團), 사(師), 군(軍)이 구성되었다. 각 단위 부대의 지휘관을 반장, 배장, 연장, 단장, 사장(師長), 군장(軍長)으로 칭했다. 연(連)은 20~40명 병력의 소대규모, 단(團)은 100명 가량의 중대규모였다. 사(師)는 대략 300 ~ 400명 정도 병력으로 구성되는 대대규모였는데, 인원 변동이 심해 100명 이하로 되는 때도 있었다. 보통 3개 사로 된 군(軍)은 연대 규모로 1,000 ~ 3,000 명 정도의 병력이었다.

1936년 4월 동북인민혁명군이 각종 무장단을 끌어들이기 위해 명칭을 이념적 색채가 덜한 동북항일연군으로 바꾸고, 같은 해 7월 제1군과 제2군을 통괄하는 제1로군(第一路軍)을 편성한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전기 및 후기 편제와 지휘관들은 아래 표와 같다. 전기 편제에서 2군의 4, 5, 6사(師)는 원래 1, 2, 3사(師)였으나 1군과 함께 1로군으로 편성되면서 개칭한 것이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6년 7월 ~ 1938년 6월)
총사령부(總司令部)군장(軍長)사장(師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부사령 왕덕태(王德泰, 1907~1936)[33]
1군 군장 양정우1사장 정빈(程斌, 1911~1951)
1938년 6월 29일 투항[34]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
1937년 가을 전사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1937년 10월 27일 전사[35]
2군 군장 왕덕태
1936년 10월 말 전사
4사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
1936.09.30 투항
5사장 사충항(史忠恒, 1906~1936)
1936년 10월 전사
6사장 김일성(金日成, 1901~1937)
1937.11.13 전사
  • 제2군 4사 사장(師長) 안봉학이 1936년 9월 30일 귀순한 후 중국인 주수동(周樹東, 1918~1937)이 후임 사장이 되었고,[36] 주수동 또한 1937년 4월 24일에 전사하고, 후임 사장에는 조선인 전주인(全住仁)이 임명된다.[37][38][39]

제1로군의 편제 개편

항일연군의 전신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장은 최초에는 조선인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이었으나 그가 전사한 후 후임이 중국인 정빈(程斌, 1911~1951)이다. 총사령 양정우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1938년 6월 29일 부하 100여명을 이끌고 일본군에 투항했다.[34] 핵심요인이었던 그의 투항으로 인한 조직비밀 유출 때문에 항일연군 제1로군은 부득이 편제를 개편하게 된다.[40]

1938년 7월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에 방진성(方振聲, 1907~1940.01)이 임명되고, 이어 8월에 제1방면군장(第一方面軍長) 조아범(曹亞範, 1911~1940),[41] 11월 25일에 제2방면군장(第二方面軍長) 김일성,[42][43] 이듬해 1939년 7월에 제3방면군장(第三方面軍長) 진한장(陳翰章, 1913~1940)이 임명되었다.[44][45]

주보중(周保中)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41년 3월 27일자에는 1로군이 제1, 2, 3방면군으로 개편된 것은 1939년 봄과 여름 사이라 하였다.[46]

一九三九年春夏决定:
四、五师编成三方面军。
六师编成二方面军。
一军一、二、三师编成一方面军③。

③ 指东北抗日联军第一路军。

즉 제1로군(第一路军)의 2군 4사(師)와 5사로 제3방면군, 6사(師)로 제2방면군을 편성하고 1군 1, 2, 3사로 제1방면군을 편성했다고 하였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8년 7월 ~ 1941년 3월)
총사령부(總司令部)방면군장(方面軍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1940.02.23 전사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
1941.03.08 전사

제1방면군장 조아범(曹亞範, 1911~1940)
1940.04.08 내분으로 피살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1912~1994.07.08)

1940.10.23 소련으로 월경 도주[47][48]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 1913~1940)
1940.12.08 전사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 방진성(方振聲, 1907~1940.01)
후임 박득범(朴得範, 1908~?) : 1940.09.30 투항[49]


노조에 마사노리(野副昌德, 1887~1981) 소장이 지휘하는 노조에 토벌대가 토벌작전을 완료한 1941년 3월에 작성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50]. 이름에 X 표시가 된 사람은 사살, 체포 또는 투항한 사람이다. 아직 토벌되지 않은 제2방면군장 김일성 이름에는 X 표시가 없다. 그는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하였다.

동북항일연군 제 3, 5, 7군의 편성

아래 편성표의 제5, 7군은 주보중(周保中)이 총사령인 제2로군에, 제3군은 조상지(趙尙志)가 총사령인 제3로군에 속한다. 표에 나오는 강덕(康德)은 만주국의 연호이며, 강덕 7년은 1940년이다.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조선인 항일운동 말살 책동

중국 공산당과 소련은 조선인들의 항일운동을 일본에 못지 않게 잔인하게 탄압했다. 김일성은 이런 집단에 빌붙어 살아남아 이들의 도움으로 북한의 집권자가 되었다.

민생단 사건(民生團事件)

초기의 만주 공산 유격대에는 조선인이 많이 참여하여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반공친일단체인 민생단원으로 몰아 무자비한 살륙을 자행하여 무고한 조선인들이 수백명이나 처형 당하고, 유격대의 주도권은 중국인들로 넘어갔다. 김일성도 한때 민생단으로 몰리기도 했다.

자유시 참변과 스탈린의 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

1921년에 발생한 자유시 참변으로 만주나 연해주에서의 민족주의 계열 무장항일 투쟁은 거의 맥이 끊기다시피 했다. 또 1937년 가을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급 인사 2000여명을 처형하고, 20여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하여 연해주에 조선인들의 씨를 말리다시피 했다. 하지만 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인들은 받아들여서 88여단에 수용하였는데 이들이 중공당 당원이고 중국인들 밑에서 활동하다 왔고, 소련의 목적에 맞는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만일 조선인들만으로 된 조선독립운동을 하는 조직이었다면 받지 않았거나, 받았더라도 강제노동이나 시키는 인력으로 이용했을 것이다.

동북항일연군의 비적(匪賊) 행위

동북인민혁명군이나 동북항일연군은 중앙 보급이 없는 군대였으므로, 식량, 의복, 무기 등 필요한 군수품을 부대 단위로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이들이 생업에 종사해서 수입이 있는 집단도 아니니 군수품이나 병력 조달은 대부분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등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사실상 다른 마적단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항일과 공산혁명을 목표로 내걸었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숭고한(?) 목적을 내세운다고 비적의 근본 성격이 달라질 수는 없다. 일제나 만주국은 이들을 공비(共匪)라 불렀다.

혹자는 일본측이 이들의 항일투쟁을 고의적으로 나쁘게 평하여 비적행위로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이 되려면 특별한 생업에 종사하지도 않은 항일연군 부대들이 다른 무슨 방법으로 식량과 군수품을 조달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내놓은 바 없다.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

많은 항일연군 부대들이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일삼았다는 기록은 엄청나게 많다.[51] 그들이 생업에 종사한 것도 아니고, 몰래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봐야 턱없이 부족한데다 보급품을 조달할 마땅한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본 군부대나 관공서를 쳐서 물자를 빼앗기에는 치러야할 희생이 너무 크고, 만만한 대상이 양민일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나올 것이 많은 돈많은 부잣집을 털고는 적당히 친일파를 응징했다고 구실을 붙여주면 되는 것이다. 납치해온 사람들 중 나이든 사람은 인질대금을 받고 풀어주고, 젊은 사람은 손실된 병력과 인력을 충당하게 했다. 납치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식량 등 약탈한 물품들을 자신들 근거지까지 강제로 운반하게 시키는 것도 있었다. 항일연군의 여자 대원들도 납치되어 왔다가 어쩔 수 없이 대원이 된 경우가 많았다. 공산주의의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도 정당하다는 그들만의 논리야 있겠지만 사실상 마적단이나 다를바가 별로 없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였던 정당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한민(韓民)』 1936년 11월 30일자는 동북항일연군 김일성 부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도하고 있다.[52]

김일성의 비적(匪賊) 행위를 보도한 1936년 11월 30일자 『한민(韓民)』 기사. 『한민(韓民)』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였던 정당 한국국민당의 기관지이다.[53]
여기의 김일성은 1937년 6월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으로 보인다.
공군(共軍)의 화해(禍害) 장백현을 근거로 하여 공산당으로 조직한 소위 동북 인민혁명군은 이주 동포의 재물을 약탈하며 사람을 붙잡아가며 인명을 살해함으로 해 지방이 거의 적지가 되어 사람이 붙어 살수가 없다는데 그중에도 김일성이 영솔한 부하가 명수도 사오백 명에 달하고 또 활동이 그중 제일 많다 한다. 그들은 촌리로 다니면서 곡식과 재물은 있는 대로 빼앗고 그래도 조금만 불만하면 집을 불사르고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기도 하는데 금년 일년 동안에 그들이 동포의 촌락을 습격한 회수가 사백이십팔회요 피해자의 수효는 이천이백사 명이며 十月 한달 동안에만 잡혀가서 인명의 손해 받은 것이 이백사 명이라 한다. 일본 군대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적극 행동을 취한다 하니 손해 받는 자는 가련한 한인뿐이다."

보천보사건의 주역 김일성 (6사장)의 부대도 둘째가면 서러워할 정도로 수많은 양민에 대한 약탈 행위를 한 것이 당시 신문에 나와 있다.[54]

중공당(中共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부대(部隊)의 일원(一員)이었던 오늘의 북한(北韓) 김일성(金日成)에 대한 당시의 국내 신문 보도는 그를 이주동포(移住同胞)의 생명재산(生命財産)을 위협한 난폭한 약탈자로 한결같이 나타내고 있다. 두 세 가지 사건(事件)만 예증(例證)하면 다음과 같다.

『[함흥(咸興)] 28일 오전 한시경 함남대안(咸南對岸) 13도구 신창동 삼포리(13道溝 新昌洞 三浦里) 이주동포(移住同胞) 촌락(村落)에 공산군(共産軍) 김일성(金日成)의 일대(一隊), 제4연대장(第4聯隊長) 김주현(金周賢)의 일대(一隊) 50여명(50餘名)이 습래하여 동 촌락민(同 村落民) 전부를 한집에 감금하고서 대맥(大麥) 10石, 축동(畜豚) 등을 모조리 빼앗은 후 동리주민(洞里住民) 김영수(金永洙)와 8명을 납치하여 그들에게 운반시켜 가지고 두메로 돌아갔다... 공산군들은 추석(秋夕)과 닥쳐올 동절(冬節)의 준비로서 배전(倍前) 맹렬히 이주동포촌락(移住同胞村落)을 윤습(輪襲)하여 이주동포(移住同胞)들의 생명재산(生命財産)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한다.』[55]

『[함흥(咸興)].... 4일 오전 16도구 신창동 동포촌(16道溝 新昌洞 同胞村)에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김일성(金日成)의 일대(一隊) 40여명이 나타나서 동리(洞里) 박흥룡(朴興龍) 등 15호에서 축우(畜牛), 대맥(大麥) 등 있는 대로 모조리 빼앗아 갔다. 이렇게 장백현내(長白縣內) 이주동포촌락(移住同胞村落)은 한낮에도 몇번씩 공산군 사병(共産軍 士兵)들에게 습격을 받아 양식, 의류 전부를 빼앗겨 금후의 생도는 극히 막연한 상태에 있다.』[56]

『[신갈파(新乫坡)] 지난 8일에 공산군 김일성 일파(共産軍 金日成 一派)에게 습격 당하여 동포가옥(同胞家屋) 40여호가 소각되었다 함은 기보(旣報)한 바와 같거니와 집 잃고 먹을 것까지 잃은 2백여 동포(2百餘 同胞)는 노동일을 하려 하나 일할 곳이 없고 들어 앉었자니 앉을 집이 없을뿐 아니라 어린 것들이 밥달리는 소리는 부모(父母)로서 차마 듣고만 있을 수 없어 아이들을 업고 노부모(老父母)를 모시고 눈물을 머금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리라 하는 바 이때에 조선인(朝鮮人) 보호기관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의 구제책이 나서기를 일반은 주시하고 있다.』[57]

오늘의 북한 김일성(北韓 金日成)이 공산군(共産軍)으로써 하필하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만주(滿洲)로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간 이주동포(移住同胞)들을 납치(拉致) 방화(放火) 약탈(掠奪) 등으로 생명과 재산을 빼앗은 신문 보도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58]

김창순(金昌順)의 위 글에 나오는 김일성보천보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으로 실제로는 1937년 7월 13일 전사한 것이 확실하며, 북한 김일성은 그 후에 나타나 제1로군 제2방면군장을 맡았으나, 1939 ~ 1940년간에 신문에 보도된 그의 비적 행위도 6사장 김일성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장백현하 이십일개 촌락(長白縣下 二十一個 村落)에서 공산군 외곽단체 박멸(共產軍 外廓團體 撲滅)
위협공갈(威脅恐喝)에 부댁겨 식량(食糧)과 아편 제공(阿片 提供) 조선일보 1937.04.28 석간2면
본의(本意)는 원조(援助)가 아니요 생존보장(生存保障) 이주동포(移住同胞)도 다수 혼재(多數 混在)
이가티 이십일개 촌락에서 공산군(共產軍)과 통모(通謀)하고 그들을 지원(支援)하게 된 경로(經路)를 보면 작년 오월경 김일성(金日成)의 일파가 이두강(二頭崗)을 중심으로 이십여 촌락에 대하야 "식량(食糧)을 공급하라 그리고 우리들을 안내(案內)하야 달라"고 강요(强要)하고서 만일 이것을 듯지 안흐면 전촌락을 방화 소각(燒却)하고 전부 죽여버리겟다고 무시무시한 협박(脅迫)을 하얏다는데 이 동리에서는 이 협박에 무서워서 구장(區長) 등이 솔선(率先)하야 작년 칠월초에 곁사 외곽단체(外廓團體)를 조직하고 금년 사월까지 동안 쌀 오석(五石), 맥(麥) 십팔석, 맥분(麥粉) 오표 십삼석 일두, 조(속(粟)) 칠석 오두, 우(牛) 십이두, 말(馬) 이두, 생아편(生阿片) 이천 륙백량어치나 지급(支給)하야 주엇다는 것으로 공산군을 원조하자는 것이 본의(本意)가 아니요 그 실상은 생활을 보장하자는 것이엇다 한다. 그리고 그 이십일개 촌락에는 조선 안에서 이주한 농민도 만히 살고 잇섯슴으로 그들도 만히 검거되엿다 한다.

러시아의 정치 주간지 '노보에 브레미야'(Новое Время, The New Times, 新時代)는 1993년 4월 구 소련 군인 시절때 金日成을 잘 알고 있던 게오르규 트마노프의 증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보도를 했다.[59]

「제 2차 대전중 소련군 대위로서 극동 군관구 저격여단 소속 조선인 대대 대대장을 역임하며 하바로프스크 교외에 주둔하고 있던 김일성은 1944년 7월에 열린 同여단 공산당 회의에서 중국인 대대(大隊) 정치위원으로부터 " 조선인 대대는 중국 길림성에서 현지 도둑과 짜고 민중에 대한 약탈행위를 반복했으며 중국 공산당원도 살해했다"고 고발당했다. 중국 정치위원은 "이 부대는 일본군과 싸우는 것보다 공산당을 죽이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회의에서" 우리가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스트"라고 변명했다.

탈북한 장해성 국제펜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이 북한에 있을 때 김정숙 이전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처였던 김혜순(金惠順)을 1980년대 중반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녀도 당시 마적질을 한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다고 한다.[60]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많은 시일이 지나서야 나는 끝내 여 투사의 입을 열수 있었다.

“임자들은 항일 무장투쟁이다 하면 그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늘 왜놈토벌대들에게 쫓겨 다니고 굶고 떨고 그런 줄만 알겠지?”
“당연한 거 아닙니까? 배운 것도 들은 것도 영화에서 본 것도 다 그런 것들뿐인데요”

“물론 그렇긴 했지,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서 늘 그렇게 굶고 배고프고 언제 죽을지도 모를 위협에 시달린다면 누가 그 짓을 하겠나. 아무리 명분이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운다고 해도 말일세. 사실대로 말하면 집단부락이나 왜놈 목재소 같은 걸 하나 제대로 치면 며칠은 정말이지 배를 두드리며 잘 먹는 때도 있었어. 그 멋이 없다면 십여 년씩 산에서 싸우기가 힘들었을 거야.”

항일연군 측이 보낸 물품 요구 협박장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1사 제1단 군수처장 최현(崔賢)이 소황구(小荒溝)의 각 가장(家長) 앞으로 보낸 협박장이 나온다.[61][62][63]

소황구 (강연부터 최십가장 집까지) 각 가장 앞 : 小荒溝 (自江沿 至崔十家長家) 各家長 앞

너희 가장(家長)들은 내일 모레 이틀간에 옥수수, 콩, 팥등 계(計) 3석 5두(三石五斗)와 소금 10 (一○)근을 한 알도 덜하지 말고 완전 징수하여 소유천(小楡川)으로 송부하라. 이틀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징벌 당할 것이다.
제2군 제1사 제1단 군수처장 (第二軍 第一師 第一團 軍需處長)

최현(崔賢) (印)

이들이 양민들을 무차별로 협박하여 식량 등을 빼앗아갔다는 점에서 그냥 마적이나 산적일 뿐이다.

  • 다른 협박장 사례
  1. 匪徒를 脅威하는 酷寒, 移民村에 被服强要 매일신보 [ 每日申報 ] 1936년 11월 24일 2면 1단
    金日成 一派의 所爲로 判明, 國境 各署 出動 待機
  2.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4247440、密大日記 第8冊 共8冊 昭和11年(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朝鮮国境守備隊の件(分割5) : 朝鮮軍参謀部 国境守備隊月報(九月) - 昭和10年9月~10月(1935/09 - 1935/10)
    p.117 : 보병 제76연대 국경수비대월보 - 1935년 9월
    pp. 132~ 135 : 汪淸-琿春 縣境 十里坪 林海山 부대 60명 穩城 對岸 凉水泉子 부근에서 빈번하게 출몰하며 금품을 약탈하거나 협박장을 보냄. 조선어로 보낸 협박장에 인근 각 마을 둔장(屯長)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어 번역문이 나옴.)

북한 김일성의 제2방면군이 보낸 협박장과 양민약탈일지

북한 김일성의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이 보낸 협박장과 양민 약탈행위 일지도 있다.

6개로 분할되어 올라있는 이 보고서의 아래 마지막 파일에는 김일성 부대가 5월말부터 7월 초까지 무산 삼장면 일대와 두만강 맞은 편 만주 안도현(安圖縣), 화룡현(和龍縣) 지역에 출몰하면서 양민을 약탈하고 납치한 상세한 내역이 일자별로 나온다. 당시 김일성이 지휘하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의 조직표, 김일성 부대가 보낸 주민들에게 물품을 요구하는 협박장도 나와 있다. 만주쪽 피해자도 대부분 이주한 조선인들이었다.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21441100、笠間史料 昭和14年度第一次警備行軍部隊行動詳報(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3 行軍地方一般の状況
p.3 :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편성표
p.4 ~ p.11: 5월 22일부터 7월 1일까지 일자별 비적 침습(侵襲) 상황 : 김일성 부대의 약탈 일지.
p.12~13 : 김일성 부대가 마을 둔장(屯長)에게 보낸 협박장
p.15 : 관민(官民) 경비상황 : 마을이 깊은 산골에 흩어져 있어 경찰이 일일이 지켜주지 못하므로 비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마을별로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하여 경찰과 협력하고 있다. 양민 약탈과 납치를 일삼는 김일성은 과연 위대한 항일영웅이고, 이에 대비해 자위수단을 강구하는 주민들은 일제의 주구(走狗)인가?

이기건의 증언

어릴 때 부터 만주의 임강(臨江), 장백(長白) 등지에서 살았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2001)은 자신이 직접 체험한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 부대원들의 노략질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당시 공비와 경찰은 서로 내통하며 상호공존하는 묵계가 성립되어 있어 공비들이 약탈을 자행해도 경찰은 나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기 상납까지 받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항일연군이 겉으로 내세운 반만항일(反滿抗日)의 구호는 허울일 뿐이고 실제로는 만주국 경찰과 내통하며 양민들을 약탈하는 비적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공비(共匪)들이 창궐(猖獗)하기 시작(始作)했을 때 나는 임강현 6도구(臨江縣 六道溝)라는 곳의 어느 중국인 부자댁(中國人 富者宅)에서 기식(寄食)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문명군(文明軍)이라는 이름을 가진 공비(共匪)들이 약(約) 300 호(戶) 되는 그 부락(部落)을 습격(襲擊)한 것을 직접(直接) 체험(體驗)하였는데 하도 그자(者)들이 용감(勇敢)하고 대담(大膽)하게 약탈 방화(掠奪 放火)를 자행(恣行)하며 횡행(橫行)하기 때문에 그 연유(緣由)를 알아본즉 그 공비(共匪)들은 그 지방경찰서장(地方警察署長)과 내통(內通)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놓고 활동(活動)하면서 그 경찰(警察)은 다치지 않는 것이었다.

공비(共匪)와 경찰(警察)은 내통(內通)하여 상호공존(相互共存)을 유지(維持)하는 묵계(默契)가 되어 있고 호상(豪商)들을 동원(動員)하여 정기 상납(定期 上納)까지 하는 것이 그 당시(當時)의 치안상황(治安狀況)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어지간한 토벌(討伐)은 성과(成果)를 거둘 수 없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 문명군(文明軍)이라는 것은 약탈 방화(掠奪 放火)할 때의 별명(別名)이고 실제(實際)는 「인민혁명군(人民革命軍)」이라고 부르는 공비(共匪)들이었다. 고(故)로 반(半)은 도적(盜賊)인 토비(土匪)이고 반(半)은 주의사상(主義思想)을 가진 공비(共匪)인 것이니 비적(匪賊)은 그들의 공통(共通)된 분모(分母)를 가진 생리형태(生理形態)이기도 하다.

조선족 작가 유순호의 증언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劉順浩, 1962~ )는 자신의 조부가 겪었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64] 동북항일연군과 만주 경찰이 내통하고 있었고, 항일연군은 아편거래를 일상적으로 했으며, 항일연군 내에 김일성이란 이름의 사람도 여럿 있었다는 증언이다.

그(유순호)의 할아버지가 1930년에 연변에서 아주 젊은 나이에 만주 경찰 총좌를 지냈다고 합니다. 총좌면 현 경찰서장급인데 1930년에 연변에서 5.30폭동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왔는데, 하루는 김일성이란 인물이 나타나서 체포된 사람 몇 명을 좀 꺼내달라고 부탁하더랍니다.

처음엔 거절했는데, 퇴근해 집에 가보니 집에다 일본산 과일 박스 몇 상자를 가져다 놓았다는 겁니다.

당시엔 뇌물을 먹고 일처리를 해주지 않으면 보복을 당하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이 김일성이 요구한 사람들을 뽑아주었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코가 꿰어서 이후부터 김일성이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리고 그 김일성은 경찰서장의 두 여동생까지 흡수해 반일투쟁에 나서게 했습니다. 여동생들까지 부탁하니 어쩔 수 없이 유순호의 할아버지는 빨치산 심부름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연변에선 아편이 돈처럼 거래될 때였는데, 하루는 아편을 빨치산에 전달해주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그래서 7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두 여동생은 일제와 싸우다 모두 장열하게 전사했습니다. 유순호 작가의 할아버지가 해방이 돼 감옥에서 나오고 보니 그만 자기가 친일파로 돼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수십 년 동안 중국 당중앙에 계속 성분 바꿔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나는 항일부대를 돕다가 7년 감옥생활을 했고, 나의 두 여동생은 항일투쟁에서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내가 왜 친일파냐” 이런 내용입니다.

1962년생인 유순호 작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대신해 계속 신소편지를 쓰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좀 크니까 의문이 생겨서 할아버지에게 물었답니다.“아니, 할아버지. 김일성 도왔다면서요. 북조선에 가서 김일성보고 증명해달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할아버지가 한숨을 푹 쉬면서 “저 북조선의 김일성은 내가 도와준 그 김일성이 아니다”고 하더랍니다.

잡지 《삼천리(三千里)》의 항일연군 비적질 관련 기사

잡지 《삼천리(三千里)》에도 아래와 같은 항일연군의 비적질 관련 기사가 3건이 실렸다.

아래 조선일보의 1939년 6월 연재기사에도 북한 김일성이 지휘하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부대의 약탈행위들이 잔뜩 나온다.

약탈 피해 주민들은 자구책으로 자위단을 조직

일제나 만주 군경이 만주 또는 조선 국경의 벽지에 산재한 마을에서 빈발하는 동북항일연군 부대의 잦은 약탈 행위를 모두 막아주지 못하므로 이에 대응해서 주민들은 자위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간도의 여러 지역에 신선대(神選隊)라는 이름의 자위단이 만들어 지고, 조선의 국경 마을에도 비슷한 조직이 생기게 된다. 이들은 약탈을 막아내기 위해 일만군경(日滿軍警)과 협력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과연 이들을 일제의 주구(走狗)라며 욕만 할 수 있겠는가?

양민에 대한 약탈을 일삼는 항일연군 부대들은 과연 조선 독립군이며, 이에 맞서 싸우던 주민들은 일제의 주구(走狗)인가?

국경경찰관 위문반수행기(國境警察官 慰問班隨行記)⑥ - 눈물겨운 자위단(自衛團) - 불면불휴(不眠不休) · 노심초사(勞心焦慮) - 굴(窟) 속에서 방첩활약(防諜活躍) 매일신보[每日新報] 1940년 02월 05일 2면 1단

항일연군의 아편(阿片) 흡입과 밀거래

당시 만주에는 아편 밀거래가 성행했고, 중독자도 많았다. 항일연군도 아편 밀거래에 간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흡입하기도 했다. 민간이 재배하여 수확한 아편을 약탈하기도 했다.

紅軍 李紅光 暗躍(홍군 이홍광 암약) 撫松 警備陣 襲擊計劃(무송 경비진 습격계획) 1936.08.08 동아일보 2면
함남도 경찰부에 도달된 정보에 의하면 한때 평북 동흥(東興)을 습격하야 세상을 놀래게하든 공산군 이홍광(李紅光) 주태평(周太平)의 연합부대 三백여명은 금춘 이래 안무현게(安撫縣界, 安圖와 撫松縣의 경계) 외두산(外頭山) 부근에서 앵속(罌粟)[65]을 밀작하는 동시 감자도 함께 경작하고 잇든 중 최근 앵속 채유기(採乳期)를 당하야 각각 백五十여명씩 二대로 나뉘여 一대는 앵속 채유작업을 하고 一대 백五十 여명은 주태평의 지휘로 무송현 벽지 일대의 경비기관을 일제히 습격하고저 지난달 25(廿五)일 경부터 무송현 이도하자 부근에 잠복하야 시기를 기다리며 목적달성에 고심하고 잇다 한다.
6사장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 6개월간 산채에 갇혀 있다 1937년 3월 구출된 김정부옹(金鼎富翁, 73세)의 증언
옹(翁)의 이야기로 들으면 마적단도 10년 전보다는 개명하였다고 한다. 위선 아편을 들[덜] 먹는 것. 규율이 엄정한 것. 훈련을 잘 받은 것 등 그들도 이지적으로 일을 전개시킨다고 한다.

노조에(野副) 토벌대의 토벌작전이 1941년 3월 종료된 후 정리한 최종 토벌성과 기록에는 항일연군 측으로부터 다량의 아편을 노획했다고 나온다.

  • 「第5 討伐成果」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20200、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防衛省防衛研究所)
p.3 : 노획물에 メリケン粉(米利堅粉, 밀가루) 1,224 부대(袋)와 아편(阿片) 3,473 등이 나온다. 몰수한 아편의 단위는 명확하지 않으나 뭉쳐진 생아편 덩어리 숫자로 보인다.[66]

후일 동북항일연군 출신자들이 핵심 요직을 차지한 북한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양귀비를 재배하여 아편 밀거래로 외화를 획득하는 주요 수단으로 삼은 것도 만주에서의 경험을 살린 것으로 우연이 아니다.

당시 북·중 국경에선 밀수가 한창 성황을 이루고 있었는데 보천군 의화리는 중국과 너무 가까웠습니다. 의화리는 보천군과 혜산시를 잇는 대목이기도 하고 또 김일성 전용의 ‘1호 도로’가 있어 자칫 외국의 정상들도 이 도로를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참작돼 북한은 결국 철도가 없고 외지인들이 잘 찾지 않는 보천군 청림리를 아편시범농장으로 지정했던 것입니다. 김일성 빨치산 출신들이 아편을 많이 사용했던 사정도 보천군 청림리가 아편농장으로 지정되는 계기로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빨치산 투쟁을 하던 시절 일제가 점령한 만주는 주민들의 주요 수입이 아편이라고 할 만큼 아편농사가 일반화돼 있었습니다. 산속에 숨어 지내던 김일성의 빨치산은 의약품을 구할 수 없어 손에 넣기 쉬운 아편을 비상약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다나니 김일성의 빨치산 출신들 가운덴 아편중독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청림리 원주민들은 돈 벌이를 위해 일제 강점기부터 몰래 아편을 키워왔는데 해방 후인 1960년대까지 소규모로 아편을 재배해 빨치산 출신들에게 보장해왔습니다.
청림리 백도라지농장 (2) 자유아시아방송 2017. 9. 5

아래는 보천군 청림리에서 주민들이 앞다투어 아편 재배를 하다 고난의 행군 때 식량부족으로 떼죽음을 한 일에 대한 증언이다.

김정일이 남긴 가슴아픈 역사 보여주고 싶어 DailyNK - 2008.04.15

일만군(日満軍)의 항일연군 토벌

일본 관동군(関東軍)은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3년간 '만주국 치안숙정 3개년 계획(満洲国治安粛正三箇年計画)'을 수립하고 이에 따른 항일연군에 대한 집중적인 토벌로[67] 위 표에서와 같이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은 총사령 양정우만 살아 남고, 부사령 왕덕태와 휘하 6개사의 사장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해버렸다. 보천보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도 1937년 11월 13일 전사하였다. 그가 전사하자 김성주가 전사한 김일성의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행세하여 보천보 전공을 가로챈 것으로 판단된다. 자세한 것은 김일성 가짜설을 참고하라.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毎日新聞) 1938년 2월 25일자는 1937년 1년간 일만군(日満軍)이 항일연군을 포함한 만주 무장단체들과 벌인 전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68]

비적 9천으로 격감(匪賊九千に激減) / 만주국 치안 완성(満洲国治安完成へ) / 来月一日・建国六周年[68]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毎日新聞) 1938.2.25 (3월 1일이 만주국 건국 6주년임)
 しかして日満軍は昨年中戦闘を交えること一千七百四十一回、匪首を仆すこと金日成以下五十九、逮捕した匪首王鳳閣以下二十八名、匪の遺棄死体一万千八百八十一、捕虜二千十六、獲得した小銃五千二百十七という著しい成果を挙げた、これに対し日満側は戦死日軍二百八十九名、満軍二百九十八名、計五百八十七名、負傷者日軍四百七十一名満軍五百二十八名、計九百九十九名の貴い犠牲を払った
일만군(日満軍)이 작년중에 벌인 전투회수가 1,741회이고, 비수(匪首)를 죽인 것이 김일성(金日成) 이하 59명, 체포한 비수가 왕봉각(王鳳閣, 1897-1937) 이하 28명, 비적들의 유기 사체(遺棄 死体)가 11,881 구, 포로 2,016명, 획득한 소총이 5,217정이다. 일만군 전사자는 일본군 289명, 만주군 298명으로 계 587명, 부상자는 일본군 471명, 만주군 528명 계 999명이다. 이러한 토벌 결과로 항일연군을 포함한 비적(항일 무장단체) 인원은 9,000 여명으로 급감하였다.

일제의 집중적 토벌로 대다수 지휘관과 수많은 병력을 잃은 1로군은 1938년 7월에 위의 후기 편제표와 같이 편제를 축소 개편한다. 이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도 일만군경이 합동작전으로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벌인 동남3성 (東南3省 = 吉林 通化 間島) 치안숙정공작 (治安肅正工作)으로[69] 간신히 살아남았던 총사령 양정우를 포함한 지휘관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하고, 제2방면군장이었던 북한 김일성만 결사 항전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몰래 소련으로 도주하여 살아남았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궤멸

1941년 3월에 노조에 토벌대가 작성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70]. 이름에 X 표시가 된 사람은 이미 전사 또는 투항(귀순)했다는 표시이다. 아직 토벌되지 않은 김일성 이름에는 X 표시가 없다. 그는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했다.

1941년 3월초까지 1로군 요인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귀순 또는 소련으로 도주하여 항일연군 1로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 1936년 11월 7일 2군 군장 왕덕태(王德泰, 1907~1936)가 무송현(撫松縣)에서 벌어진 만주군 기병 제7단(騎兵第七團)과의 전투에서 전사.[71][72][73]
  • 標題:第4 粛正の実行 : 「1939年10月より1941年3月に亘る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18200、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防衛省防衛研究所)」
  • 1941년 3월 13일 1로군 참모처장 한인화(韓仁和, 1913~1941)[87] 전사[85][86]

항일연군은 일만군(日滿軍)의 집중적인 토벌로 다수의 전사자, 도망자, 투항자들이 발생하면서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1941~2년 무렵 만주에서 완전히 소멸한다. 2로군과 3로군은 주보중(周保中, 1902-1964),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 1910~1946) 등 최고 지도부가 많이 살아남은 반면에 1로군은 위에서 본대로 최고 지도부가 거의 철저히 궤멸되어 상관의 허락도 없이 소련으로 몰래 도주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1로군의 최고위 생존자가 되었다. 도주자에 대한 처벌 권한을 가진 직속 상관들이 모두 전사한 덕택에 김일성은 처벌도 면하고 소련에서 일약 1로군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오히려 덕을 보게 된다.

소련으로 도피한 항일연군 잔존 세력은 제88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에 수용되었다가 일본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한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88여단의 조선인들을 북한으로 데려와 김일성을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워 이들을 최고 권력집단으로 만들어 준다.

항일연군 인물들의 전사와 귀순 관련 기사와 기록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는 1940년 2월 23일 전사한다. 그 직후 4월에는 김일성 부대(제2방면군)의 참모장이었던 임수산(林水山, 林守山, 林秀山)이 귀순하고, 이어 김일성의 처였던 김혜순(金惠順)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귀순한다. 임수산의 귀순은 1달 뒤 5월에, 김혜순의 체포 및 귀순은 3달 뒤 7월에 보도되었다.

「朴得範 金在範 金白山 來部記錄」(延吉野副討伐隊司令部, 1940.10.19) : (일본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
위의 항일연군 1로군 조직표에 의하면 귀순한 박득범은 경위려장(警衛旅長), 김재범은 사령부 남만성위원(南滿省委員), 김백산은 경위려(警衛旅) 제2단장이다.
[기획리포트] 변절, 투항, 배신...만주 항일군 잔혹사
다수의 항일연군 인물들과 1로군 제2방면군장이었던 북한 김일성에 대한 귀순공작을 지휘했던 김창영(金昌永, 1890~1967)에 대한 1949년 반민특위의 재판기록

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인들의 정체성

동북인민혁명군 또는 동북항일연군에는 다수의 조선인들이 참가하였으나 민생단 사건으로 수백명이 희생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중국인들의 환심을 사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이들 대다수는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조선말보다는 중국말에 더 익숙했고, 조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조선인이라기 보다는 중국에 동화된 오늘날의 조선족과 같은 의식구조를 가졌다.

같은 중국에서 활동했음에도 임시정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우리말로 발음하고 표기했다. 영문으로 작성된 외교문서에 한자 이름의 영어 표기를 우리말 발음으로 적어서 조선인 이라는 정체성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예를들면 해방전 중국에 있을 때 영문 외교문서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는 Kim Ku, Kim Koo 등으로[88],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Tjosowang, Tjo So Wang, Joe So-ang 등[88][89][90] 우리말 발음으로 적었다.

반면에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자신들 이름의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했고, 러시아어 문서에 이름이 조선발음 아닌 중국발음으로 적혀 있다. 김일성(金日成)은 소련군 문서에 이름이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나오며, 다른 조선인들도 러시아어로 표기된 이름이 중국발음이다[91]. 이들은 자신들끼리 있을 때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것이 더 익숙했다[92][93]. 88여단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을 했던 소련의 고려인 출신 유성철도 당시 조선인들끼리도 중국말로 대화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였다.[94] 1939년 6월의 조선일보 기사에도 김일성 부대의 조선인들이 상용어를 전부 만주어(중국어)로 하고있다고 했다. 따라서 조선인이라는 의식도 박약한 항일연군 조선인들이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기 보다는 중국공산당원으로 중국인들 틈에서 중국을 위해 싸웠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김일성이 1942년에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17]에도 조선독립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며, 그냥 중국인들과 같이 중국을 위해 싸운 것으로 나온다.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이 해방 후 북한 핵심 권력 장악

동북항일연군은 일제의 토벌로 거의 궤멸되며 잔존 세력은 1940년말 소련으로 도피하여 88여단에 소속된다. 대일전 승리후 북한을 장악한 소련군은 자신들이 5년간 교육과 훈련을 시킨 88여단의 조선인들을 데려와 북한의 핵심권력층으로 만들어 준다. 북한 주민들이 존재조차 몰랐고, 지지세력도 전무했던 이들이 북한의 핵심권력층이 되어야할 당위성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소련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그들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핵심권력을 장악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중등교육 수준 이상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중학 중퇴자인 대위 김일성 외에 대위 최용건,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 상조 임춘추 등의 6인 뿐이고, 그 외 54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95] 최현(崔賢, 1907 ~ 1982)은 한글도 쓸줄 모르는 무학자였다. 이런 저학력자들이 공산주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당시 만주의 분위기에 휩쓸려 산야를 숨어다니며 게릴라전을 벌인 경력 밖에 없어 성격도 거칠었기 때문에 국가를 통치할만한 자질이 애초에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꼴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인민군 소장으로 있다 숙청되어 10년간 징역형을 살고 중국으로 탈출한 강수봉(필명 呂政)은 이들 집단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96]

만주항일연군에 소속돼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았던 항일 빨치산들은 소련(蘇聯) 땅에 쫓겨갈 때까지 극좌노선의 지배를 받을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어 정치이론을 배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소학교 교본조차 보지 못했다. 소련(蘇聯) 땅에 들어가 있는 5년동안 소련(蘇聯) 공산당 역사와 레닌주의 제문제를 배우기는 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이 보고 접촉한 것은 전쟁에서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사람들 뿐이었다. 그 5년 동안에 항일 빨치산들 속에는 소련(蘇聯) 안전기관의 비밀정보원이 생겨나고 서로 감시하고 의심하는 악랄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정치(政治) 몰라 비극심화

항일빨치산들의 그런 공통적인 특징은 오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적개심만 있을뿐 정치가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실천경험이 없고 극단적 좌경노선을 그대로 갖고있는 이들에게 국가통치의 대권(大權)이 부여됨으로써 북조선의 비극은 심화됐던 것이다.

소련(蘇聯) 안전기관은 KGB (국가보안위원회, Committee for State Security)를 말하며, 당시의 명칭은 그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였다.


북한은 어떻게 문맹자의 천국이 됐나. 까막눈들이 만든 기막힌 세상 북한의 뿌리를 찾아서 주성하TV 2021. 9. 26.

소련군의 앞잡이가 되어 북한 주민의 주권을 강탈한 항일연군 조선인들

김일성 등 동북항일연군 출신 88여단의 조선인들은 항일투쟁에서는 일본군에 철저히 패퇴하여 소련으로 도주했지만, 1945년 8월 소련군의 대일전 승리에 편승하여 자신들이 승리의 주역인양 행세했다. 그들은 소련군의 등에 업혀 소련이 점령한 북한으로 들어왔고,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북한 주민의 주권을 강탈하여 김일성 일족의 세습전제왕조를 만들고 국가를 사유화하여 수천만 북한 주민들을 대를 이어 노예로 부리고 있다. 그들의 항일투쟁이란 것은 자신들의 권력과 출세를 위한 것일 뿐, 조선 인민의 해방이나 독립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 과거 신문을 조금만 검색해도 쏟아져 나오는 동북항일연군 산하 부대들이 조선 국경과 만주 도처에서 벌인 무고한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와 마약밀매 등의 행위들도 샅샅이 조사하여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범죄집단이나 다름없는 북한 정권의 행태도 항일연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김일성 등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는 우선 남침 전쟁과 수많은 대남도발을 겪은 한국인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더 큰 피해자는 수천만 북한 주민들이다. 김일성 일당에게 주권은 물론 사유재산과 생활상의 모든 자유를 강탈 당하고 일생을 수령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주권이 일본 천황에게 있을 때보다 더 못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이 했다는 그 잘난 항일투쟁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한 것인가?
  • 북한은 해방된 적이 없고, 압제자가 "일본 제국 -> 소련 군정 -> 김일성 일족"으로 바뀌어 왔을 뿐이다. 해방된 적이 있다면 8.15로부터 평양에 소련군이 진주해오기 직전까지 단 열흘 뿐이었다. 북한이 소련군이나 김일성에 의해 해방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이 그것이 진실인 줄로 착각하도록 만들어 진정한 해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마취시키는 역할을 한다. 김일성의 그 잘난 항일투쟁이란게 결국은 동족을 일제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잔인하게 탄압하는 명분으로나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6.25 전쟁의 전범

김일성 등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은 해방 후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으로 북한의 정권을 장악한 후 1950년 6.25 남침을 주도한 핵심 전범들이다. 이들이 벌인 남침 전쟁으로 한반도 전역이 초토화되고, 수백만 동족이 살상을 당해 일제통치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런 무리들이 조선인들을 위해, 조선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함석헌의 증언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은 평안북도 용천군 출신으로 해방 직후 2년간 북한에 살다 월남하였다. 그는 김일성, 최용건(崔庸健, 1900~1976) 등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만주에서 마적질하다 해방군을 자처하는 자로 보았다.

6.25(六·二五)

38선(三八線)
.......
그러나 三八선의 뜻은 거기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의 그은 금이지만 또 하나님의 그은 금이다. 하필이면 만주 제국이며 일본 관동군이요, 하필이면 장개석(蔣介石) 정권의 썩어짐이며, 하필이면 연해주(沿海州) 해삼위(海蔘威)인가? 十九세기 제국주의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점령하고 그 끝에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하고 우리 함경북도와 코를 맞대게 되어도 그것이 해방되는 날 쏘련 군대의 넘어오는 길이 될 줄은 몰랐다. 구한국(舊韓國)이 망할 때 많은 애국지사가 해삼위(海蔘威)로 망명을 하고, 일제(日帝) 압박을 못 견디는 사람들이 북간도(北間島)로, 노령(露領)으로 피란을 갈 적에 다 우리[에]게 고마운 것이었지 이 다음 그 2세(二世)들이 새로 나는 나라를 둘로 가르는 침략자(侵略者)의 앞잡이가 될 줄은 몰랐다.
만주 제국이 되고, 철없는 민중이 일본군(日本軍)의 세력을 타고 남북 만주의 방방곡곡에 가 살게 될 때, 세월이 그만인가 보다했지 후일 그것이 인연이 되어 만주의 간섭이 있고, 그때에 마적질해 먹던 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해방군이라 하며 말썽을 부리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하였다.
장개석(蔣介石) 정권이 그렇게 썩지 않았던들 중국이 공산화는 아니 됐을 것이요, 중국이 자유주의 나라가 됐던들 이렇게 어렵게는 아니됐을 것이다. 또 三八선이 생겼다 하더라도 남북한의 자연적 조건이 그렇게 서로 다르지만 않았더라도 이다지 비참하게는 아니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이 미리미리 준비되어 가지고 三八선은 생겼다. 어느 무슨 목적 때문에 마련된 듯이만 보인다.

―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뜻으로 본 한국역사(韓國歷史)』, (서울: 一宇社, 1962), p.390

함석헌은 최용건(崔庸健, 1900~1976)과 같은 용천 출신이고 오산학교에서는 같은 반에 있어서 잘 안다고 했는데, 그가 마적질을 하다 온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김성호: 최용건(崔鏞健)과도 만나셨다면서요.
함석헌: 5도 연합회의 전인지 후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오산 동창 몇이 모여 신의주에 온 최용건일 만났죠. 그는 나와 같은 용천 출신이고, 오산학교에서도 한 반에 있어서 잘 알아요. 학교에서 스트라익을 하고 나가서는 중국에 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연안군에 있었다고 하던데, 알 수가 있어야지요. 자기 말대로 독립군 노릇을 했는지, 아니면 마적질을 했는지. 하여간 신의주에 왔는데, 만나보고 아주 실망했어요. 나라를 떠나 몇 십 년만에 돌아온 사람으로서 정말 나라를 위할 생각이 있다면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할 수 없었을 거에요. 우리가 청하기 전에 제가 먼저 우리를 찾았어야 했을 거에요. 그런데 모처럼 환영한다고 만났는데, 한 마디 말이 없어요. 오산학교에 있을 때 지나간 것으로 보아 첨부터 그리 큰 기대는 안 했지만 말이 전혀 없어요. 그때 벌써 난 믿지 못할 사람으로 단정해 버렸죠.

중국공산당은 일본의 중국침략의 최대 수혜자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의 산하부대이다. 항일연군은 엄청난 항일투쟁을 한 것처럼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보급투쟁 명분의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방화, 살인을 수도없이 자행했고, 일본군의 집중토벌로 1940년 경에는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여 결국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주하게 된다. 그들이 소속되었던 중국공산당은 일본의 중국침략의 최대 수혜자였다. 모택동은 일본의 침략에 감사한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했는데, 이는 일본의 침략이 없었으면 중공군은 일찌감치 국민당군에 토벌되어 중국의 공산화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북항일연군 출신자들도 일본의 침략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 항일전을 벌인 주축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이었으며, 이들이 최종적으로 일본군의 항복까지 받아내었고, 이 과정에 중공군이 한 역할은 거의 없다. 모택동은 오히려 국민당군에 스파이를 심어 정보를 빼내어 일본측에 막대한 돈을 받고 팔아넘기기도 했다

일본 패전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회피하고 전력보존에 주력했던 중공군이 국민당군에 최종 승리하여 마치 중공군이 항일전 승리의 주역인 것처럼 역사가 조작되고 있다. 일본군에 처참하게 패퇴하여 소련으로 도주했던 항일연군도 소련군의 일본전 승리에 편승하여 마치 자신들이 항일전 승리의 주역인양 행세했다. 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승리했더라면 동북항일연군은 공산비적(共産匪賊) 수준의 집단으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중국의 적화 이후 모택동의 폭정으로 7천여만명의 중국인들이 무고하게 죽었다. 이는 일제 침략 때문에 희생당한 중국인 총수의 수백배에 달한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승리했더라면 오늘날 중국도 수많은 야만적인 인권문제, 천문학적인 부패문제 등이 없이 대만처럼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동북항일연군이 한국독립운동사의 일부가 될 수 있나?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의 활동을 한국독립운동사에 포함시킨 독립운동사 책도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이 과연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만주의 조선인들이 다수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부대 자체가 중국공산당 산하인데다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감독을 받았다. 본질적으로 중공당과 소련을 위해 활동한 부대이다. 김일성 본인이 1942년 집필했다는 「항련제1로군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나 소련 시절에 쓴 만주서의 활동에 대한 글 어디에도 조선독립이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그냥 중국공산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했을 뿐이라는 증거이다. 조선 독립에 대한 갈망(渴望)이 절절이 묻어나는 이승만, 김구의 글들과 대비된다.

또한 그는 만주에 있을 때는 일본이 물러가면 중공당이 만주의 안도현장 자리나 하나 시켜주기를 바랬고, 소련으로 넘어가서는 소련군에서 출세하기를 원했을 뿐 조선으로 돌아오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소련군에서의 이름도 진지첸(김일성의 중국어 발음)이었고, 중국말은 능하나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리며 잘 하지도 못했다. 운좋게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어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을 뿐이다.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가서 성장하여 중국에 반쯤 동화된 사람들이고, 자신들 끼리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역사나 국내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조선에 아무 기반도 없었다. 이런 사람들이 조선독립에 대한 절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냥 만주의 젊은 사람들 분위기에 휩쓸려 항일연군에 가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중국 조선족(조선 혈통의 중국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이 김일성 등 88여단의 조선인들을 북한으로 데려와 핵심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해방 후 북한이 아니라 만주로 가서 조선족이 되었을 것이다. 국내로 와도 아무 기반이 없으니 정치무대에 얼굴 내밀 형편도 아니고, 누가 알아줄 사람도 없으니 익숙한 만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북한으로 오지도 않고 만주의 조선족이 된 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도 다수 있다.

그들 중 한국으로 온 사람은 단 1명도 없으니, 그들의 투쟁사가 한국독립운동사에 들어와야 할 이유도 없다. 원래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사라기 보다는 중국 조선족들의 항일투쟁사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이나,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가 되는 바람에 항일연군에서의 그의 활동이 북한 역사책의 핵심을 차지했다. 하지만 북한에서도 항일연군이 아니라 날조한 조선인민혁명군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 등 소련군 88여단의 조선인들은 국내에 전혀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국내 사정에 어두운데다 아무 정치적 기반도 없고 지지세력도 없었기 때문에 해방 후 소련군이 이들을 북한으로 데려와 최고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동북항일연군의 본거지인 만주로 가서 조선족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김일성은 공산화 된 중국에서 중공당이 그가 원하던 대로 만주의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는 충분히 시켜줄 수 있었을 것이다.[18]

참고 자료

빨치산 시절 이름은 이명순(李明順). 전 흑룡강성 성장 진뢰(陳雷·천레이)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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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2차대전 전승절 맞아 북한 '항일 빨치산'에 축전 연합뉴스 2021-05-08
푸틴, 빨치산 생존자에 뜬금없는 축전···美보란듯 北챙긴다 중앙일보 2021.05.09
김정은·푸틴이 예우한 마지막 北빨치산 1세대 사망 뉴시스 2021-11-16
p.4 (1) : 滿洲국에 있어서의 공산당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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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 (1) : 滿洲국에 있어서의 공산당의 상황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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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61~62 에 1940년초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7군, 제5군 조직표가 나와 있음.
소련의 최고위층에서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지령도 내리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 문건이다.
김일성 측근 4인방 이력서… 北 건국 빨치산의 숨겨진 진실 조선일보 2020.01.12
[주간조선] 김일성 측근 최용건, 김책, 안길, 서철 등 4인방 수기 이력서 발견

길림성도서관 자료

항일전쟁기념망(抗日战争纪念网) 자료

함께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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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86.0 86.1 簿冊標題:匪賊情報月報-第2~4号・3月~5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 p.7 지도 참고
  87. 韓仁和(1913—1941) 百度百科
  88. 88.0 88.1 [747] The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Washington, February 7, 1942
  89. [746]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January 3, 1942
  90. [750]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Washington, March 20, 1942
  91.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년 06월 21일) p.61 / 기광서,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 『역사와 현실 28』 (한국역사연구회, 1998.06) p.282
  92.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93.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
  94.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3 한국일보 1990.11.03 : 88여단에는 중국인이 많고 만주에 침투,첩보활동을 했기 때문에 모든 교육과 훈련은 중국어로 실시됐고 조선인끼리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일이 많았다.
  95.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61~63, 제3장 제88정치여단
  96.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12> 1990.07.08 동아일보
  97.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 (星光文化社, 1950)의 개정판이다.
  98. 함석헌, 8.15 해방과 북한생활 2년 함석헌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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