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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흥사건
최근 수정 : 2019년 3월 29일 (금) 11:50

동흥사건(東興事件) 또는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은 1935년 2월 13일 새벽 0시 30분에 만주의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장(師長)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이 이끄는 200 여명의 부대가 조선 국경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厚昌郡 東興邑)을 습격하여 일본 측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퇴각한 사건을 말한다.[1][2][3]

동흥사건은 보천보사건 보다 2년 먼저 일어난 더 큰 규모의 사건임에도 오늘날 학계에서조차 거론하는 사람이 드물고,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져 있다. 이것은 남한 학계에서 중요한 항일 전투라며 교과서에까지 실은 보천보사건도 실제로는 김일성이 집권하여 자신의 엄청난 항일공적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았더라면 잊혀졌을 국경지방에 흔히 있던 일과성 사건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생생한 증거이다.

사건의 경과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厚昌郡 東興邑)은 약 500여호에 주민 2500 여명이 살던 경찰서와 학교, 우체국 등이 있는 평북 최북단의 국경도시이다. 1935년 2월 13일 새벽 0시 30분 이홍광은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의 전신) 대원 약 200여명을 이끌고 동흥읍을 습격하여 일본측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2시간여 후에 퇴각하였다. 동흥 경찰서는 47명의 경관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홍광 부대의 집중적인 기관총 사격을 받고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동흥을 습격한 부대는 남만(南滿)의 반석현(磐石縣)에서 중공당 남만특위 아래에 제일 먼저 결성되었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군장 중국인 양정우(楊靖宇, 1905~1940))의 제1사(師)로 이홍광이 사장(師長)이었다.

장세윤(張世胤)은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에서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4]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을 보도한 동아일보 (東亞日報) 1935年 2月 14日 석간(夕刊) 2面 기사
1937년 6월의 보천보 습격을 제2동흥사건이라고 보도한 1937년 6월 6일자 매일신보 기사. 동흥은 소도시로 산골마을 보천보보다 경찰도 훨씬 더 많고 공격하기도 어려운 곳이었지만 일본측 피해규모는 더 컸고, 따라서 파장도 더 컸다. 하지만 김일성 집권 후로 동흥 사건은 은폐되고 보천보 사건만 김일성의 가장 중요한 항일공적으로 엄청나게 부풀려져 선전되고 있다.[5]
이홍광은 2월 13일 새벽 1시경 2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결빙(結氷)된 압록강을 건넜다. 동·서·남 세방면으로 분산된 1사(師)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동흥 시가로 진입했다. 이 때 대원들은 장총과 권총, 기관총 등으로 무장되었다. 이홍광은 47명의 경찰이 방어하고 있는 경찰서를 향해 기관총 2정을 휴대한 부대로 하여금 집중사격을 가하게 하는 한편 다른 두 방면의 대원들에게는 미리 지목한 대상에 따라 동흥 제일의 재산가이며 재목상(材木商)인 장영록(張永綠)의 집을 습격케 하고 기타 친일 주구배로 알려진 한인, 일본인 등을 습격케 했다.

약 세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이 때 1사(師)는 만주국측의 전신전화 기관은 파괴했지만, 동흥읍에 있는 일제측 전신전화 기관을 파괴하지 못한 까닭에 적의 응원대가 올 것을 우려해서 조기에 철수했던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이홍광 부대는 경관 2명과 그 가족 1명을 부상시키고 일본인 6명을 살상했으며, 친일 주구배 집 한채를 불살라 버렸고, 재산가 또는 친일파로 지목한 16호(戶)의 집을 습격하여 상당량의 금품을 빼앗았다. 그리고 일인(日人) 2명과 친일분자 및 부자로 지목된 한인(韓人) 10명을 납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때 이홍광 부대도 전사자 3명, 중상자 7명, 부상자 10여명을 냈고 대원 양상오(梁尙五)(27세)와 진농화(陳農華)(38세)가 경찰에 체포되는 피해를 입었다. 또 교전 와중에 무고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하는 뜻하지 않은 결과도 있었다.

이홍광 부대의 동흥 습격전투는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와 조선일보(朝鮮日報)에 며칠간 대서특필되었고, 중국동북에서 발간되는『대동보(大同報)』 등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일제 당국은 물론 대중에게도 이 전투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6][7], 매일신보[8][9], 경성일보[10], 조선중앙일보[11], 조선신문(朝鮮新聞)[12] 및 조선일보 등이 며칠간 연속으로 크게 보도하였다.

당시 신문들은 이홍광이 18세의 미소녀라는 소문을 싣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13][14] 이런 소문은 이홍광 측이 심리전 차원에서 퍼뜨린 것이라 한다. 이 사건 보다 2년여 후인 1937년 6월 보천보사건이 일어났을 때 당시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이를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칭하였을 정도로 동흥 사건의 여파가 컸다[5]. 이홍광은 사건 3개월여 후인 5월 일만군(日滿軍)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전사하였다.[15].

동흥 사건은 경찰관 5명이 상주하는 주재소 밖에 없는 국경의 면단위 마을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보다 규모도 더 컸고, 2년 먼저 일어났는데도 일반에는 보천보사건만 알려져 있을 뿐 거의 잊혀져 있다.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보천보 사건만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자신과 관계없는 이 사건은 고의적으로 은폐한 탓이다. 심지어는 남한 학계에서도 보천보사건이 독립군 최초의 국내진공 사건이라며 근거없는 주장까지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학계도 북한을 닮아가서 김일성 관련 여부가 사안의 중요성에 대한 판단기준이 되는 것같다. 북한에서는 이홍광김일성의 지도를 받았다고 허위선전을 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널리 알려져 보천보 사건을 가릴 우려 때문에 동흥(東興)이란 지명까지 없애버렸다. 당시의 지명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厚昌郡 東興邑)은 오늘날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金亨稷郡 古邑勞動者區)가 되어 있다.[16][17] 원래 후창읍(厚昌邑)이었던 김형직군 김형직읍(金亨稷邑)의 압록강 맞은 편이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이 무면허 한의사를 하며 살았던 장백현 8도구(長白縣 八道溝)이다.[18]

당시 신문 기사

관련 링크

함께 보기

각주

  1. 장세윤(張世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26) 이홍광과 동흥사건」 중앙일보 1974.06.05 종합 3면
  3. 軍歴史関係事項調査の件報告 朝平憲秘庶第140号/昭和10年度 1939/11/09 일자로 평양헌병대장(平壌憲兵隊長) 祖父江義一이 작성한 보고서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20872700、歴史資料 昭和9~12年(防衛省防衛研究所)」
  4. 장세윤(張世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pp.362~363.
  5. 5.0 5.1 함남국경(咸南國境)에 제2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6월 06일 02면 01단
    장백밀림(長白密林)을 근거(根據)로 국경선(國境線)에 출몰(出沒) 동아일보 1937-06-08 조간 2면 3단
    東興事件同樣に殘虐ならん /思ひ出の一 昨年の襲擊 경성일보 1937년 06월 06일
  6. 平北(평북)에 人民革命軍(인민혁명군) 侵入(침입) 民家(민가)에 衝火(충화)코 掠奪(약탈) 1935.02.14 동아일보 석간 2면 (13일 석간)
    死者七名(사자칠명) 負傷者八名(부상자팔명) 拉去者(납거자)는 十一名(십일명) 1935.02.14 동아일보 조간 2면
    喇叭(나팔)불며 越境(월경) 長白縣(장백현)으로 向(향)해 1935.02.14 동아일보 조간 2면
    警察門前(경찰문전)서市街戰(시가전) 機關銃(기관총)으로 頑强抵抗(완강저항) 1935.02.14 동아일보 석간 2면
    被襲東興邑(피습동흥읍) 民家(민가) 六十戶(육십호)에서 掠奪(약탈) 1935.02.15 동아일보 2면
    點點(점점)의 血痕(혈흔)따라 討伐隊(토벌대) 越境追擊(월경추격) 人民革命軍事件(인민혁명군사건) 續報(속보) 1935.02.15 동아일보 2면
    被襲(피습)된 東興邑(동흥읍)의 被害(피해) 死傷十三(사상십삼), 拉去十名(납거십명) 1935.02.16 동아일보 2면
    五百紅軍(오백홍군) 二隊(이대)로 갈려 東興厚昌(동흥후창) 再襲擊 劃策(재습격 획책) 1935.02.16 동아일보 2면
  7. 紅軍再襲計劃(홍군재습계획)에 軍警聯合(군경연합) 大討伐(대토벌) 1935.02.17 동아일보 2면
    拉去(납거)된 東興住民(동흥주민) 生還者 十名(생환자 십명) 1935.02.19 동아일보 2면
    東興襲擊紅軍(동흥습격홍군) 死者判明十名(사자판명십명) 集結總數(집결총수)는 約六百名(약육백명) 討伐開始(토벌개시)로 退却開始(퇴각개시) 1935.02.20 동아일보 2면
    追擊中(추격중)의 討伐隊(토벌대) 紅軍(홍군)과 三次交戰(삼차교전) 東興事件人質 三名(동흥사건인질 삼명)은 奪還(탈환) 1935.02.27 동아일보 2면
    東興事件人質(동흥사건인질) 一名(일명)은 歸還(귀환) 1935.03.07 동아일보 2면
    수수겨끼의 인민군사령(人民軍司令) 이홍광(李紅光)은 26세(廿六歲) 청년(靑年) ? 1935.07.18 동아일보 2면
    東興被襲時(동흥피습시)의 最後人質脫出(최후인질탈출) 1935.07.22 동아일보 2면
    東興襲擊犯(동흥습격범) 檢事(검사)가 控訴(공소) 1935.10.06 동아일보 2면
    李紅光(이홍광) 戰死說(전사설) 1935.11.01 동아일보 2면
  8. 今曉頭厚昌에 賊禍 東興邑襲來市街戰 放火, 掠奪警官隊應戰擊退 住民側死傷者不少 매일신보 1935-02-14 02면 01단
    東興邑襲來賊團은 人民革命軍一派 극히 조직적으로 사면포위 總司令은 李江光 매일신보 1935-02-14 05면 02단
  9. 國境警備有史以來 初有의 戰慄할 賊禍 喇叭吹奏하며 對岸에 退却 三千住民罔知所措 / 賊團을 越境追擊하야 徹底的 殲滅企圖 出發後消息姑未着 매일신보 1935-02-15 02면 01단
    重輕傷者治療 爲해 醫療班員도 急行 상상 이상으로 피해가 심한 東興襲擊事件續報 매일신보 1935-02-15 05면 01단
    輕視치 못할 對岸賊勢 積極的防備에 注力 수효도 만코 활동도 광범위 험준한 산곡을 근거로함이 이은 곤난 長白, 臨江, 寬甸 各縣 매일신보 1935-02-17 02면 09단
    李紅光은 十九歲美人 男便李某가 首領 이들 일단은 전부 조선인 청년 東興襲擊紅軍正體 매일신보 1935-02-19 02면 08단
    虎視耽耽의 對岸紅軍 東興襲擊再次企圖 매일신보 1935-02-26 02면 01단
    東興襲擊한 賊徒는 食糧 처 窮莫甚 무송현 대성창 방면으로 도주 茂山署員이 嚴戒中 매일신보 1935-02-27 05면 05단
    東興襲擊賊은 精銳한 分子 질서가 정연하야 실력 상당 平北 警務課長歸來談 매일신보 1935-03-03 02면 01단
  10. 約二百名の匪賊團平北東興を襲擊す/ 直ちに警官隊奮戰し遂に擊退被害相當に上る見込み 경성일보 1935년 02월 14일
  11. 동흥시 습격부대는 인민혁명군으로 판명, 70여 경관대 목하 맹추격, 총사령은 이강광 조선중앙일보 1935년 02월 14일
    卽死·重輕傷·拉去等 被害者二十三名 死者八, 重輕傷五, 拉去十名 東興襲擊事件後報 朝鮮中央日報 1935년 02월 16일 2면 3단
  12. 紅匪三百東興に襲來猛烈なる市街戰展開, 交戰二時間半之を擊退す死傷者各方面にある見込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2월 14일 2면 1단
    强盜を働きながら死傷者收容,退却, 奧地新房子に向ったこと判明, 東興襲擊匪(後報)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2월 15일 2면 1단
    民間負傷者五名卽死者は五名, 東興襲擊匪事件の跡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2월 15일 7면 5단
    賊團の損害莫大, 歸還者の口から判る, 負傷者輸送中に續續死亡, 東興事件その後の彼ら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2월 20일 2면 5단
    平安北道, 警戒に遺憾なし, 東興事件の眞相につき安田高等課長語る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02월 23일 4면 1단
  13. 李紅光은 十九歲美人 男便李某가 首領 이들 일단은 전부 조선인 청년 東興襲擊紅軍正體 매일신보 1935-02-19 02면 08단
    "동흥사건 餘聞(여문). 共軍(공군) 두목 李紅光은 18세 남장 미인. 조선 소녀로 부하가 6백여명. 습격 당시도 진두에서 직접 지휘" 조선일보 1935.02.23 / 석간2 : 2 면
    李紅光(이홍광) 戰死說(전사설) 1935.11.01 동아일보 2면
  14. 平安北道, 東興を襲擊した東北人民革命軍第一司令官李紅光とは全く妙齡の女性, 丹下部長歸任談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5년 02월 27일 4면 1단
  15. 장세윤(張世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pp.365~366.
  16.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金亨稷郡 古邑勞動者區) : 북한지역정보넷
  17.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동흥면 고읍동이 동흥읍이다.
    양강도 김형직군(金亨稷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양강도 김형직군(金亨稷郡) : 북한지역정보넷
    양강도 김형직군 옛이름 동흥면 조선향토대백과 행정구역정보관 : 양강도
  18. 장백현 8도구(長白縣 八道溝) 구글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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