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광(李紅光, 1910~1935)은 경기도 용인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935년 2월 13일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소속 2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동흥읍(東興邑)을 습격하여 일본측에 상당한 피해와 충격을 주었다.

생애

이홍광(李紅光, 1910~35)[1][2]의 본명은 홍해(弘海) 또는 홍규(弘奎)이며, 의산(義山)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3][4][5] 근래의 연구에서 그의 출생지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 400번지인 것이 밝혀졌다. 또 용인 이씨 족보와 제적등본에서 그의 가계가 밝혀지고, 그의 딸과 친척들이 국내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용인시 포곡읍사무소 발행 제적부와 용인이씨 족보에는 이름이 홍규(鴻圭)로 나와 있다.[6][7]

어릴 때 만주로 이주하였다. 남만(南滿)의 반석현(磐石縣)[8]에서 중국공산당 남만특위 아래에 제일 먼저 결성되었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군장 중국인 양정우(楊靖宇, 1905~1940))의 제1사(師) 사장(師長)이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가 1935년 2월 13일 2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조선 국경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厚昌郡 東興邑)을 습격한 동흥습격사건은 일본 측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 당시 국내에는 그가 18세의 미소녀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홍광 측에서 심리전 차원으로 퍼뜨린 헛소문이라 한다.[9][10][11]

1935년 5월 일만군(日滿軍)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전사했다.

이홍광의 동흥습격사건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한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사건보다 규모도 크고, 2년 먼저 일어났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져 있다. 보천보사건도 역시 잊혀져 있었지만 해방 후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여 자신의 혁혁한 항일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유명해졌고, 그보다 더 큰 동흥습격사건은 고의적으로 은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이 단행한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시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이 지금은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로 되어있는 것도 이러한 동흥사건 은폐작업의 일환일 것이다. 보천보 일대에는 대대적인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으나, 동흥읍에는 동흥사건에 대한 기념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김일성 미화에 열심인 남한의 학자들도 북한 주장에 보조를 맞추어 보천보사건이 독립군 최조의 국내 진공이며, 일시적으로나마 보천보 지역이 해방되었다는 의미가 있다면서 사실과 맞지도 않게 부풀려 대단한 사건으로 취급하며 교과서에까지 싣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동흥사건과 이홍광에 대해서는 김일성 미화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고의적으로 외면한다. 더구나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며, 북한이 김일성의 전공으로 날조한 것이 확실한데도 이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 길림성 반석시(磐石市) 조선족중학교는 이홍광을 기념하여 1988년 11월 25일 반석시홍광중학교로 개칭하였다.[12]

몰년에 대한 논란

대다수 문헌들에는 그가 1935년 5월 12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원명은 2014년 발표한 논문에서 용인이씨 족보와 호적 등에서 이홍광의 가계를 확인하였고, 1938년 출생한 이홍광의 둘째딸이 생존해 있으며, 이홍광 본인이 1943년 출생신고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7] 이홍광이 1935년 전사했다는 최초 기록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1937년 중국측 신문 기사로는 1935년 전사가 확인이 되고,[1][2] 그의 전사 후 동지들이 조성했다는 묘소까지 확인되며, 이후 알려진 그의 활동 기록도 없으므로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그의 정확한 전사 연도에 대해서는 좀더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이홍광 열사전

이홍광을 여자로 오인한 연구 사례

서대숙(徐大肅, 1931~2022)

  • Suh, Dae-Sook,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7)
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화다출판사 1985) pp.259~260
아마 동북항일연합군 중에서 가장 유명하였던 한국인은 이홍광(李紅光)이라는 여장군이었을 것이다.62) 그녀는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 직속의 제1군 제1사단장이었다. 이홍광은 불운하게도 일찍 죽고 말았고, 후임으로는 한활(韓活)이, 그 후에는 정무(程武 혹은 程斌)가 계승하였는데, 모두 한국인이었다.

62) 李는 중국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 사이에서도 상당히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었던 1919년에 만주로 들어와서 공산 게릴라에 가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1935년 3월에 죽었다. 그녀의 활동에 대해서는, 특히 『救國時報』 1937년 7월 10일자와 1937년 9월 18일자를 참조.

雷丁, 《東北義勇軍發展的の動行》, 『中國資料月報』, 3권 제3호 (1936년 7월) pp.120~123. 『中國週報』 1935년 2월 3일호, 波多野乾一編, 앞의 책 (《中國共産黨 1937年史》) VI, 743~755에 수록되어 있다.
閔子澤, 《東北義勇軍抗日運動の現勢》

劉白羽, 《環行東北》, (上海, 方生出版社, 1946) pp.1~55.

서대숙은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보다 더 컸던 이홍광이 주도한 1935년 2월의 동흥사건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홍광(李紅光)은 동흥사건 당시 여자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는 이홍광 측이 심리전 차원에서 퍼뜨린 헛소문이며, 실제로는 남자이다. 그를 여자라 한 것은 서대숙의 착오이다. 이홍광의 후임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1사장이 된 정빈(程斌)은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며,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의 최측근 심복이었으나 1938년 6월말 일본군에 투항하면서 거꾸로 양정우 토벌에 가담한다. 그의 협력으로 양정우는 1940년 2월 23일 일본군에 사살된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 1943~ )

  • Bruce Cum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vol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
브루스 커밍스 저, 김주환 역, 《한국전쟁의 기원: 해방과 단정의 수립 1945-1947. 上, 下》 (서울 : 靑史, 1986) pp.85~86
[번역본 pp.85~86] 한국 내에서 김일성의 공훈에 대한 보도는 1938년 11월호 '삼천리'라는 잡지에 나타났는데 스칼라피노와 이정식 교수의 책에는 '김일성은 게릴라 전투의 경험을 갖고 있는 27세의 건장한 청년'이라고 씌어 있다.128) 서대숙 교수는 1941년 이전에 김일성은 소련인들에게 알려진 바 없었다고 주장했다.129) 그러나 소련 잡지 '태평양' (Takhii Okean)에는 김일성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논문에서 라파폿(V. Rappaport)은 김일성을 아주 호의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온 일본담당국의 죠지 맥큔(George McCune)[13]의 요청에 따라,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중반에 미국무성 내에서 이 논문이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번역된 논문에서 김일성은 영어로 'Kim-Ni-Chen'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김일성의 일본식 발음이 Kim-Nichi-Sei인데 이것을 러시아말로 옮겨 적은 것을 다시 영어로 옮기면 'Kim-Ni-Chen'이다)[14]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에서도 김일성 (Kim-Ni-Chen) 부대는 특히 뛰어났다. 김일성부대 사람들은 모두 매우 용감했다. 이 부대가 거의 모든 위험한 작전들을 수행하였다. 이 부대의 행동은 항상 계획적이고 재빨랐으며 정확했다. 이 부대는 두대의 중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과의 격렬한 전투에도 버틸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김일성부대를 잡기 위해 1년이나 쫓아다녔지만 허사였다.

이 논문은 또한 1935년 전투에서 사망한 '이홍광' (李紅光)이라는 한국인 여성게릴라 지도자의 훌륭한 업적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131) 이리하여 김일성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항일투사였다.

128) Scalapino and Lee, Communism in Korea, p.220n [n은 각주(note)를 의미],
129) Suh, Korean Communist Movement, p.292.
130) V. Rappaport, "Guerrilla Movement in the Northern Korean Regions," Tikhii Okean [Pacific Ocean] (April-June 1937), translation in RG 353, Records of 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and the State-Army-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 101," 1945, box no, 21, Suh, Korean Communist Movement에는 이 논문이 각주에는 언급되어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밝혀져 있지 않다. 나는 종전 바로 직전의 미국무성 외교문서에서 김일성에 관한 내용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조지 맥큔(George McCune)은 항복접수계획에 관여했으며 국무성 일본국 직원 중에서 유일한 한국문제 전문가였다. 1945~1950년까지의 미국무성 문서 및 CIA 문서는 연구자들이 이용할 수 없다. 그 문서를 볼 수 있다면 김일성이 북한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 김일성에 대한 정보가 당국에 의해 이용되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Tikhii Okean (태평양)이란 잡지는 1934년에서 1938년까지 모스크바에 있는 '세계정치경제연구소 태평양분과'에서 발행되었다. Thomas T. Hammond에 따르면 “그 잡지는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극동에 관한 마지막 소련잡지"였다 (Hammond, ed, Soviet Foreign Relations and World Communis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5] p.751).

131) Suh, Korean Communist Movement, p.284n를 보시오.[15]

이홍광(李紅光)을 여자라고 한 서대숙의 착오를 그대로 따랐으며, 태평양 잡지 필자도 착오를 범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실확인을 거치지 않은 브루스 커밍스도 잘못이 있다.

참고 자료

각주

  1. 1.0 1.1 李紅光열사 약전 『구망일보(救亡日報)』 1937-09-18 (상해에서 간행되던 신문)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이홍광으로 검색)
  2. 2.0 2.1 李紅光열사전 중국 『구국시보(救國時報)』1937년 7월 10일자 기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3. 장세윤(張世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4.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26) 이홍광과 동흥사건」 중앙일보 1974.06.05 종합 3면
  5. 이홍광(李紅光, 1910~193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용인출신으로 새롭게 밝혀진 항일영웅 이홍광 용인시민신문 2011.01.26
  7. 7.0 7.1 이원명, 1930년대 ‘在滿 항일운동가 李紅光(본명 李鴻圭)’의 戰死年度와 家系에 대한 일고찰 동북아 문화연구 제38집, 2014.3, pp.131-159 (29 pages)
  8. 길림성 반석시(吉林省 磐石市) 구글맵
  9. 李紅光은 十九歲美人 男便李某가 首領 이들 일단은 전부 조선인 청년 東興襲擊紅軍正體 매일신보 1935-02-19 02면 08단
    "동흥사건 餘聞(여문). 共軍(공군) 두목 李紅光은 18세 남장 미인. 조선 소녀로 부하가 6백여명. 습격 당시도 진두에서 직접 지휘" 조선일보 1935.02.23 / 석간2 : 2 면
    李紅光(이홍광) 戰死說(전사설) 1935.11.01 동아일보 2면
  10. 平安北道, 東興を襲擊した東北人民革命軍第一司令官李紅光とは全く妙齡の女性, 丹下部長歸任談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5년 02월 27일 4면 1단
  11. 北鮮紀行, 女頭目(8), 石森生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07월 08일 1면 6단
  12. 승리의 군기 비춰준 불멸영령 - 리홍광 길림신문 2013-05-06
  13. 죠지 맥큔(George McCune, 1908~1948)
  14. 130)
  15. 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화다출판사 1985) p.259 본문 및 주석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