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년 11월 22일 ~ 2022년 9월 13일[1])은 한국계 미국인 정치학자로, 미국 하와이대(University of Hawaii)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과 북한의 현대사 및 정치와 관련한 많은 논문과 저서가 있다.

그는 해방 직후 1945년 10월 14일 평양 대중앞에 처음 출현했던 날부터 가짜 소리를 듣기 시작한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는데도 남한 정부가 그를 가짜로 만들고 교육했다는 주장을 내놓았고,[2] 이후 한국의 신진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 잘못된 김일성 진짜론이 대세로 자리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북한의 소련 군정에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공작을 총지휘했던 니콜라이 레베데프(1901~1992) 소장과 그리고리 메클레르(1909~2006) 중좌, 레오니트 바신(1915~2006) 소좌 등이 한-소수교 (1990.9.30)[3] 직후 해방 당시에 국내 지지세력이 전무한 무명인물에 지나지 않았던 북한 김일성을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한국인들 사이에 항일영웅으로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했다는 증언까지 내놓았음에도[4] 서대숙은 자신의 잘못된 주장을 바로잡지 않았다.

약력

그의 약력은 아래와 같다.[5]

  • 1931년 만주 룽정(龍井)에서 기독교 목사였던 서창희의 아들로 태어남.
  • 1946년 가족과 함께 월남.
  • 1950년 연희대(연세대) 입학.
  • 195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남.
  • 1964년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음
  • 1967년 박사학위 논문 ‘조선공산주의운동사’에서 가짜설이 나돌던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 경력을 학문적으로 논중한 동시에, 날조·미화된 김일성의 독립운동 또한 지적했다.
  • 1964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연구소 전문연구위원,
  • 1965~1972년 휴스턴대 정치학과 교수
  • 1972~2004년 하와이대 정치학 교수
  • 1974년 유엔대표부를 통해 북한 비자를 받아 평양을 방문
  • 1989년 서울대 초빙교수,
  • 1999~2000년 연세대 용재 석좌교수
  • 2000년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장·북한대학원장
  •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자신이 연구하고 집필한 독립운동 관련 논문과 책자 등 자료 3700여점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해 ‘서대숙 문고’를 만들었다. 한신대에는 북한 관련 자료 7000여점을 기증했다. 한신대는 이를 ‘서대숙 통일역사문화자료실’에 보관했다.

참고 자료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

서대숙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에 퍼진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이 마치 한국 정부가 그를 폄훼하기 위해 만들어내고 교육시킨 것처럼 주장한다. 그의 연구는 김일성이란 이름이 주는 혼란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북한의 주장을 상당부분 검증없이 수용했다. 또 문헌상에 나오는 동북항일연군 내의 다른 김일성 이름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두 북한 김일성으로 간주하였다. 이후 한국의 신진 학자들은 그의 잘못된 주장을 맹신하여 김일성 연구를 퇴보시켰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그의 이러한 잘못된 연구는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북한 김일성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과거 한국의 지도자들을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다며 욕먹게 만드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학계에 김일성이 진짜라는 잘못된 주장이 대세가 된 배경에는 학계가 좌경화되어 그의 연구를 검증없이 받아들인 것과,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창순(金昌順, 1920~2007) 등 한국의 1세대 북한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무조건적 불신, 외국서 연구한 학자들이 더 권위있다는 잘못된 맹신 등이 한몫 했다.

  • Dae-Soo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Univ. Press, 1967.
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대구: 화다출판사, 1985) : 김일성 관련 내용은 pp.235~239.
  • Dae-Sook Suh,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NY: Columbia Univ. Press, 1988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2022)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남한에서는 현재의 북한주석과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인 혁명가가 같은 이름으로 가진 둘 또는 셋의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나 이는 부질없는 추측이다........ 1974년까지도 북한주석 김일성이 가짜라고 주장한 남한연구가가 있었으나 이는 학문적 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저작이었다. 그 저자(즉 이명영 - 인용자주)는 만주에서 김일성과 싸웠던 전일본군 장교 몇 명을 포함하여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는 등 상당한 연구를 한 것으로 보이며 이 점에서 그 연구는 불운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저자 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결론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만을 수집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 서대숙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 청계연구소, 1989) p.296
그러나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서대숙 본인의 연구보다는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고 비난하는 이명영의 연구가 더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 새로 발굴된 수많은 자료들에 의해서 확실히 밝혀지고 있다. 이명영이 아니라 서대숙 본인이 정치적 의도를 가진 연구를 한 것이다. 김일성을 직접 만나서 무슨 밀약이 있었던 것인가?[6] 김일성은 자신의 치부를 깊숙히 파헤친 이명영의 연구를 비방하며 자신이 진짜가 맞다고 옹호해준 서대숙에게 고마움을 느껴 만나준 것이 아니겠는가? 서대숙의 연구가 그의 치부를 제대로 밝힌 것이라면 만나주고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이명영의 연구는 북한 김일성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을 것이나, 서대숙의 엉터리 김일성 방어논리가 멍청한 한국 학계에 먹혀들어 결과적으로 이명영이 욕을 먹고 김일성은 위기 탈출에 성공하였다. 서대숙은 김일성에게 가짜 멍에를 벗겨주며 욕은 이승만이나 이명영이 대신 먹게 만들어주고, 잃을 뻔한 보천보의 영웅 타이틀도 계속 유지하게 해준 구세주나 다름없다.
서울大(대)에서 처음으로 북한학을 가르친 감상은?
"한국은 지금 對(대)북한인식을 둘러싸고 혼란상태에 있다. 지금까지 金日成 (김일성)은 가짜라는 등 잘못된 것을 유포시켜왔기 때문에 기성세대가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도 학생들은 신용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매우 정치화 돼있어 바른 인식을 얻기위한 공부에는 커다란 지장이 있다. 미국의 대학생과 비교해도 공부량이 적다. 매우 유감이다"
한국 학생들의 공부량도 문제일 수는 있겠으나 서대숙 본인의 공부량부터 걱정했어야 했다. 자료를 제대로 충분히 많이 찾아봤더라면 엉터리 주장을 내놓아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는 구세주 노릇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대숙: 어찌 됐던 보천보전투를 통해 김일성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보천보 전투가 군사적으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는 단순한 소동에 불과했지만 이 사건은 일본군이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고 당시 땅에 떨어졌던 조선인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한 몫을 했습니다.
또한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김일성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고 김일성은 전설적인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김일성이 승승장구하자 일본군은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철저한 탄압에 나섰습니다.
동아일보가 보천보 사건을 크게 보도해 김일성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고 전설적인 인물로 떠올랐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보천보 사건도 앞서의 동흥사건, 토성습격사건, 독산사건처럼 금방 잊혀져서 해방 당시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김일성 본인도 1945년 12월 기자회견에서 보천보 사건을 몰라 동흥사건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7] 이는 그가 보천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실토한 것이다.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이 집권한 뒤 보천보 사건을 어마어마한 자신의 항일전공으로 조작해 선전했기 때문에 다른 사건은 잊혀지고 이 사건만 나중에 유명해지게 되었을 뿐이다.
서대숙: 김일성이란 이름은 유명했다. 김일성이 공식석상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모두 “가짜다” 라고 했다. 가짜가 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유명한 그 김일성. 전설에 나오는 그런 김일성은 없다. 우리가 독립운동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란 전설적인 사람은 없다.
서대숙은 일제시대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했다는 것은 인정하는 모양이나 그에 해당하는 실존인물이 없으므로 북한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은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며 자신이 그 유명한 이름의 실제 주인공 행세를 했기 때문에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된 것이다. 유명한 이름의 실제 주인공이 누구인지 애매했기 때문에 북한 김일성이 그 사람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 누구인지 분명했다면 그러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 서대숙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이 이승만 정부가 만들어낸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8]
“모든 학문이 그렇듯 시작은 호기심이었어요. 이승만 정권의 ‘김일성 가짜설’을 비롯해 ‘북한’이란 단어조차 금기가 되는 것을 보면서 객관적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컸어요. 학문의 목적은 진실 추구이고, 학자는 목을 내놓더라도 진실과 소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북한 김일성이 평양에 나타난 직후인 1945년말부터 이미 그가 가짜라고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승만 집권 이전에 그러한 말을 기록한 문헌도 셀 수 없이 많다. 서대숙은 실증적인 연구를 하지않고 지레짐작으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온 책임을 김일성 본인 아닌 이승만 정권에 돌리고 있다.
서대숙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처음에 언제 어디서 왜 나오게 되었는지, 기록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조사해보지 않고, 일본과 중국 문헌만 좀 조사해보고는 북한 김일성동북항일연군에서 상당한 항일투쟁을 한 사람이 맞으므로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는 곧장 이승만 정부가 그를 가짜라고 교육시켰다며 근거없는 비난을 하기 시작한다. 이승만은 늘 북한 김일성이 소련이 내세운 꼭두각시 괴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이며, 그를 가짜라고 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 대학에서 활동한 그의 경력 때문에 이런 잘못된 주장이 쉽게 진실로 받아들여져 정밀한 검토없이 한국에 수입되어 신진학자들이 길을 잃고 김일성이 진짜이고 항일투쟁의 영웅이라며 김일성을 미화하고 대한민국을 폄하하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짜 김일성 장군 행세는 북한 김일성이 했는데,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며 욕은 이승만, 박정희가 얻어먹는 오늘날의 기막힌 현실은 김일성이 진짜이고 그의 항일투쟁은 칭찬받을 만하다며 면죄부를 준 서대숙의 잘못된 연구의 영향이 크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 김일성 장군일 뿐만 아니라, 소련의 꼭두각시로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지도자가 된 점을 외면하고 그의 항일투쟁 경력만 부각시킨 것은 큰 잘못일 뿐만 아니라, 항일투쟁 경력에서도 6사장 김일성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밝히지 못하고 북한의 허위 주장을 따라갔다. 서대숙의 잘못된 김일성 연구가 후대에 끼친 폐해는 브루스 커밍스의 잘못된 한국전쟁 연구가 끼친 해악에 비견할만하다.

서대숙의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의 문제점

  • 서대숙(徐大肅) 지음, 현대 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 (서울: 을유문화사, 2000) p.32.
감옥에서 나온 김일성은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무렵부터 만주 일 대에 산재해 있던 여러 항일 구국 단체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도 김성주라는 본명을 버리고 김일성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조선의 전설적인 항일 애국투사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주장을 자주 대하게 되지만, 김일성의 실체에 관한 시비에는 그의 항일 운동을 부인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고 보아도 좋다. 조선 독립운동사에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여러 명 있다. 한자로 김일성(金一成)으로 표기된 사람도 있고 김일성(金日星)으로 적힌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 그 유명하고 전설적이며 누구나 다 아는 애국투사 김일성이 어떤 김일성이냐고 물으면 조선 독립 운동을 연구하는 사학자조차도 정확하게 지적해 내지 못한다. 만약 그런 인물이 정말 실재했다면, 조선 사람뿐 아니라 독립 투사들을 잡아들였던 일본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김일성은 실제로 없다. 조선 독립 운동에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외에 그만한 항일 투쟁 경력을 지닌 사람이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조선 사 람들의 입에 전설적이라고 회자되는 김일성은 그야말로 '전설'의 인물인 모양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일성은 그 정체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다. 오늘날 북한에서 퍼뜨리는 것처럼 찬란한 혁명 가족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남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체 불명의 허위적 인물도 아니다. 이런 종류의 쓸데없는 논란은 한반도의 분단에서 오는 불행이라고 하지 않 을 수 없다.

서대숙이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의 근거는 북한 김일성 외에 그만큼 유명한 다른 인물 김일성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후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평양에 나타난 33세의 그가 1920년경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과 나이가 맞지 않아 동일인물이 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하여 나온 것이다. 하지만, 서대숙이나 1990년대 이후 한국에 좌파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여 북한 김일성이 만주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한 그 김일성이 맞으니 진짜가 맞다며 가짜를 진짜로 뒤집어 놓았다. 이들이 온갖 궤변들을 다 동원하였기에 이것들을 일일이 다 반박하자면 몹시 복잡하게 되었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소련군이 데려온 김일성이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항일투쟁을 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적이 있는지 아닌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오랜 외국생활로 조선말도 잘 하지 못하고 더듬거려 더욱 의심을 받았다. 동북항일연군이나 거기서의 김일성의 활동은 1970년대 들어 그에 대해 연구가 시작된 이후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하지만 지금도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논란이 무성하다. 이런 형편이니 해방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고, 그가 일찍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가짜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유명한 김일성 장군에 해당하는 실존 인물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가짜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북한 김일성 때문에 유명해진 이름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그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자신이 그 유명한 실제 인물인 것처럼 행세했으니 가짜인 것은 변함없다.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1930년대 후반 신문에 자주 났고, 보천보 사건으로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하여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하지만, 일제시대에는 문맹율이 80%를 상회하고 신문 구독자도 극히 제한적이라 그런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던 시절이 아니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보천보 사건도 잘 알지 못했다는 증거는 많고, 심지어는 북한 김일성 본인도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알지 못하고, 엉뚱하게 자기가 1935년 2월의 동흥습격사건을 주도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반박은 아래를 참고하라.

  • 서대숙(徐大肅) 지음, 현대 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 (서울: 을유문화사, 2000) pp.44~45.
이 밖에도 김일성이 이끌었던 항일 무장 투쟁의 사례는 많다. 보천보 습격에 앞서 1937년 2월, 김일성과 중국인 차오궈안(曹國安, Cao Guoan)이 지휘하는 유격대가 창바이(長白)현의 리밍쉐이(鯉明水)에서 일본군 중위 가와타(川田)와 그의 부하 30명을 죽이고 무라야마(村山) 중위를 포함해서 17명의 일본군을 생포했다고 한다.[1] 김일성은 이렇게 1938년과 1939년에 남만주에서 열심히 싸웠다. 1938년 1월에 류다오거우(六道溝) 전투라든가, 1940년초 일본 토벌군 마에다(前田) 부대와 허룽헌에서 맞섰던 전투는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대장 마에다 다케시(前田武市)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잡으러 온 일본 경찰을 58명이나 사살하고 그들의 무기를 탈취했다. 이와 같은 유격전으로 자연히 김일성의 이름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항일 투쟁은 때때로 조선의 국내 신문에도 소개되었다.

김일성을 체포하려는 일본 치안 관계자들과 만주국의 경찰들은 한때, 즉 1937년 11월 김일성 부대와의 격전에서 그를 사살했다고 믿고 "김사령 사망(金司令死了)"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김일성을 죽였다는 사병에게 표창까지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다음 전투에서 또 모습을 드러내고 일본 토벌군에 맞서 싸웠다. 이로부터 50년이 지난 1987년 11월, 남한에서도 김일성이 죽었다고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서 발표하는 소동이 있었으나, 그는 다음날 몽고 수상을 영접하러 공항에 나타났다. 말하자면. 김일성의 항일 운동은 악전고투였으나 신출귀몰하듯이 잘싸웠다고 할 수 있다.

[1] 서대숙(徐大肅)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34의 주석 15에 이 사안에 대한 근거문헌이 나온다.
15. 김일성은 자기가 일본군 110명을 살해하고 60명 이상을 사로잡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백봉,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제1권. pp. 252-254와 일본쪽 해석으로 蘭星會, 『滿州國軍』, pp. 354-361 참조, 김일성유격대에 대항한 일본군 부대의 배치도 도 여럿 남아 있다. 또 다른 일본쪽 해석은 『現代史資料』, 第30卷, pp.344-346에 있음.

지금은 많은 옛날 자료들이 DB로 구축되어 검색을 통해 발굴된 새로운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보면 보천보 사건간삼봉 전투를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 김일성은 서대숙의 주장과 달리 1937년 11월 13일에 전사한 것이 맞고, 북한 김일성과는 명백히 다른 인물로 밝혀진다.

1980년대 김일성 진위 논쟁

1980년대말 김일성 진짜론을 주장하는 서대숙과 가짜론을 주장하는 학자들 간에 김일성 진위논쟁이 있었다. 당시는 중국과 소련의 자료가 나오기 전이고, 일본과 국내 자료도 충분히 발굴되지 않아 논쟁은 평행선을 그렸다. 하지만 이후 등장하는 좌경화된 국내 대다수 신진학자들이 김일성 진짜론을 추종하면서 학계에는 마치 김일성이 진짜가 맞는 것처럼 잘못된 대세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후 발굴되는 새로운 자료들은 일관되게 북한 김일성은 가짜가 맞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김일성 진위 싸고 시각차 여전
조선인민해방군 부재(不在)엔 접근
위의 글은 이보다 앞서 신동아(新東亞)에 실린 서대숙 교수의 김일성에 대한 서울대학교 강의록 요약본에 대한 비판이다.
서대숙(徐大肅), 《金日成의 抗日투쟁, 사실과 과장》, 신동아(新東亞) 355(1989.04) pp.224-247,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 서대숙(徐大肅)은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한 대표적 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부음 기사

    여러 차례 방북한 그는 북한 고위층과도 친분이 있는데, 특히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 기록은 “처음 만났을 때 비공개하기로 약속했으니 지키고 싶다”며 비공개를 고수했다. 고인은 2018년 평생 모은 독립운동·공산주의 사료 수천 점을 한신대와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그의 김일성 연구 방향은 김일성을 직접 만나보고 북한 고위층과 친분을 맺은 것과 관련이 있을 법도 하다. 일본 조총련 출신이었던 허동찬(許東粲, 1932 ~ )도 방북해서 김일성을 직접 만난 적이 있지만 북한과 조총련에 환멸을 느껴 이탈했고, 서대숙과는 전혀 다른 김일성 연구 결과를 내었으며, 서대숙의 김일성 진짜론에도 비판적이었다.
    컬럼비아대 박사 과정에 다닐 때 영국에서 온 교환교수로부터 "한국에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없었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을 계기로 '조선공산주의운동사'를 연구했다. 1967년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책으로 나온 그의 박사학위 논문 '조선공산주의운동사'는 가짜설이 나돌던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무장투쟁 경력을 학문적으로 논증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70년 컬럼비아대 출판부에서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까지 나오며 일약 북한 연구 권위자로 국제 정치학계에 데뷔했다.

    그는 특히 '김일성이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고 학술적으로 논증, 북한에 대한 객관적 연구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시에 김일성의 날조되고 미화된 독립운동도 엄격히 지적했다. 그런 이유로 오랜 세월 남북한 모두에서 '의혹'과 '감시'를 당해야 했다.

    고인은 1964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연구소 전문연구위원, 1965∼1972년 휴스턴대 정치학과 교수, 1972∼2004년 하와이대 정치학 교수, 1972∼1995년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장으로 일하며 한국과 북한의 현대사·정치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74년 유엔대표부를 통해 공식으로 북한 비자를 받아서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남북한에서 모두 논란이 일었다. 훗날 재방북했을 때 황장엽 당시 김일성대 교수가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는 등 북한에서 그를 '민족적 양심이 있는 학자'로 먼저 인정했다. 고인은 황 교수와 1997년 망명 직전 도쿄에 머물 때와 서울로 온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교유했다.
그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듣게된 이유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해 김일성이 만주서 항일투쟁한 사람이 맞으므로 진짜라는 잘못된 논증을 했고, 오늘날 김일성이 진짜라는 잘못된 주장이 한국 학계의 대세가 되는데 가장 큰 원인 제공을 했다.
서대숙이 가짜 김일성론을 논파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는 해방 전후의 국내사정에 어두워 애초에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듣게되는 배경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그가 진짜가 맞다는 잘못된 주장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는 국내의 김일성 연구가 길을 잃고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만든 장본인 중 한 사람이다.

비판적 평가

서대숙은 국가를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했다는 사람들의 전리품쯤으로 취급하는 것같다. 그러니 만주서 비적질이나 하던 김일성이 스탈린의 꼭두각시로 간택을 받아 지도자가 되어 일족이 북한이란 국가를 사유화하고, 대대로 권력을 세습하며 주민을 노예로 부려도 커다란 경사이며, 친일파(?)가 득세한 한국보다 낫게 보이는 모양이다. 북한은 해방 후 소련군함 얻어타고 들어온 만주 비적 출신들에게 점령당해 주민들은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인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가?

국내 언론 “김일성 가짜論 부정했다”며 일제히 환호성
실제론 김정일 세습을 “경사”로 평가한 학문적 바보
    “김일성의 항일운동은 악전고투였으나 신출귀몰하듯 잘 싸웠다”(45쪽)는 것이고, “한마디로 평가받을 만한 것”(39쪽)이란 견해도 애써 피력했다. 그런 활동을 “허리에 일본도를 차고 독립운동을 방해했던” 사람들에 비하면 과소평가할 수 없다(52쪽)는 말까지 했는데 그게 한계다. 박정희·백선엽 등이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는 간도특설대와 연루됐다는 좌파의 말도 안 되는 공격을 서대숙도 그대로 믿었던 걸까. 결정적으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이고, 때문에 가짜가 명백한데 그걸 외면하는 학문적 실수도 범했다.

    그러니 집권 이후 현대북한 서술은 말할 것도 없다. “김일성은 북 주민들에게 정치적 안정감과 계속성을 보장해 줬다. 북 주민들의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은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조작해 낸 것이 아니다”(161쪽)는 식이다. 당혹스럽다. 정말 결정적인 것은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 세습을 한 걸 “커다란 경사”(217쪽)라고 평가한 대목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황당한 서대숙 북한학의 학문적 파산을 증명해 준다는 게 나의 움직일 수 없는 판단이다. 중립적 서술은커녕 평양 관변 역사서를 그대로 옮긴 듯한 서술은 정나미가 다 떨어진다. 서대숙 찬양을 앵무새처럼 되되는 언론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얘기다.
    ― 쪽수는 서대숙이 국내에서 펴낸 『현대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을유문화사, 2000)의 것을 가리킴.

서대숙의 역사 왜곡

  •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맞고, 그 사건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므로[9] 진짜가 맞다는 그의 김일성 진짜론은 외국에서 거주한 그가 해방 전후의 한국내 사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일제시대 문헌 조사를 충분히 하지 않은데서 나온 오류이다. 그의 잘못된 김일성 연구는 미국대학의 교수였던 그의 명성 때문에 한국내 김일성 연구가 실증적 자료를 무시한 채 북한의 주장을 대폭 수용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는 또 한국에 김일성 가짜설이 널리 퍼졌던 이유는 이승만 정부가 그를 가짜라고 교육한 때문이라는 아무 근거없는 주장을 내놓아 김일성 가짜설로 한국의 과거 정권을 비난하는 아주 고약한 선례를 만들었다. 가짜 행세는 김일성이 했는데도, 욕은 지난 한국 대통령들이 먹는 오늘날의 황당한 상황에 대한 그의 책임이 적지 않다.
  • 실재하지 않은 김석원과 김일성의 대결로 한국전쟁사를 왜곡
    서대숙의 잘못된 김일성 연구가 후대에 끼친 폐해는 브루스 커밍스의 잘못된 한국전쟁 연구가 끼친 해악에 비견할만하다. 서대숙은 국군의 김석원 장군이 일제시대에 일본군으로 북한 김일성의 부대와 맞서 싸웠다는 근거없는 주장을 내놓았는데,[10] 브루스 커밍스는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김일성이 남침한 것은 이승만이 중용한 김석원 같은 친일파를 응징하기 위해서였다며, 한국전의 원인은 이미 일제시대 김석원김일성의 대결에서 잉태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했다.
  • 브루스 커밍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II p.569
    In his radio address shortly after noon on June 25, Kim Il Sung said that forces of the Republic of Korea Army (ROKA) 17th Regiment had attacked on Ongjin to the west of Haeju; according to Koreans who heard the broadcast, he added this aside: "Kim Sok-won, I'm coming to get you, you won't escape me now!"[3]
    [3]. Appleman, Naktong/Yalu, p. 21.[11] Prof. Dae-sook Suh told me the story, which may be apocryphal, about Kim threatening Kim Sok-won.

    커밍스6.25 발발 직후 김일성이 라디오 연설에서 국군이 옹진반도를 공격했다며 "김석원아, 내가 너를 잡으러 간다. 너는 이제 도망가지 못한다."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석에서 이런 말을 서대숙(徐大肅, 1931~2022) 교수로 부터 들었다고 했는데 사실로 볼 수 없다. 김석원은 1948년 12월말 국군 장교로 편입되었으나 9개월 후인 1949년 10월 초 예편하여 6.25 개전 당시에는 민간인 신분이었고, 전선에 있지도 않았는데, 북한이 이를 몰랐을 리도 없다. 그는 1950년 남침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7월초에 다시 국군에 복귀하게 되었을 뿐이다. 결국 김일성의 남침이 김석원을 국군으로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이처럼 서대숙의 김석원 장군에 대한 잘못된 주장이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사를 왜곡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 서대숙은 이홍광을 여자로 오인
    이홍광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장으로 1935년 2월의 동흥사건을 주도한 인물이며, 조선인 남자이다.
  • 서대숙의 안봉학(安鳳學) 부대가 일본군 이시카와 시게하루(石川重治) 소장을 살해했다는 주장은 오류.
    서대숙은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4사장 안봉학(安鳳學)의 부대가 1936년 10월 10일 일본군 이시카와 시게하루(石川重治) 소장을 살해했다고 했고,[12] 몇몇 인명사전의 "안봉학" 항목에도 같은 말이 나오나[13][14]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당시 사살된 사람은 일본군 이시카와 시게하루(石川重治) 소장이 아니라 만주군 이시카와 류우키치(石川隆吉) 상교(上校)였으며, 그는 전사 후에 소장 계급을 추서받았다. 또한 1로군 제4사장 안봉학(安鳳學)은 그 열흘 전인 9월 30일에 일본군에 투항하여 그의 전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저서

  •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1989),
  •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1989),
  • <현대 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2000),
  • <한국과 러시아 관계 : 평가와 전망>(2001),
  • <북한문헌연구 : 문헌과 해제>(2004),
  • <간도 민족 독립운동의 지도자 김약연>(2008)

함께 보기

각주

  1. '가짜 김일성론' 논파해 센세이션…정치학자 서대숙 박사 별세 연합뉴스 2022-09-17
  2. Dae-Sook Suh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NY: Columbia Univ. Press, 1988/1995; [번역] 서대숙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3. 한-소수교 (1990.9.30) - 국가기록원
  4. 김일성 가짜설#김일성을 수령으로 만든 소련 군정 당사자들의 '김일성 가짜' 증언 우남위키
  5. ‘김일성 가짜설’ 논박한 서대숙 박사 별세 경향신문 2022.09.17
  6. 北 공산주의 운동 연구 1세대 서대숙 박사 별세 동아일보 2022-09-19
    여러 차례 방북한 그는 북한 고위층과도 친분이 있는데, 특히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 기록은 “처음 만났을 때 비공개하기로 약속했으니 지키고 싶다”며 비공개를 고수했다.
  7. 김일성 진짜론 반박#북한 김일성은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알지도 못해 : 우남위키
  8. 서대숙, “통일되면 북쪽 학자들도 찾아와 연구할만한 자료들이죠” 한겨레신문 2018.10.25
  9. [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보천보 전투 RFA 2010.09.21
    서대숙: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김일성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고 김일성은 전설적인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10. Suh, Dae-Sook,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7) / 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화다출판사 1985) p.261
  11.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June-November 1950) : pp.21~22 (Washingt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61) : After the North Korean attack was well under way, the P'yongyang radio broadcast at 11:00 an announcement that the North Korean Government had declared war against South Korea as a result of an invasion by South Korean puppet forces ordered by "the bandit traitor Syngman Rhee." The broadcast said the North Korea People's Army had struck back in self-defense and had begun a "righteous invasion." Syngman Rhee, it stated, would be arrested and executed. Shortly after noon, at 13:35, Premier Kim Il Sung, of North Korea, claimed in a radio broadcast that South Korea had rejected every North Korean proposal for peaceful unification, had attacked North Korea that morning in the area of Haeju above the Ongjin Peninsula, and would have to take the consequences of the North Korean counterattacks.
  12. 서대숙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p.20.
  13. 안봉학(安奉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안봉학(安奉學, ?~1937); 한국 사회주의 운동 인명 사전 (강만길, 성대경 엮음, 창작과 비평사, 1996) p.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