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사건에서 넘어옴)
보천보사건(普天堡事件)은 1937년 6월 4일 밤 11시 30분 만주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김일성(金日成)과 최현(崔賢) 등이 인솔한 120여명의 부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보천보(甲山郡 普天面 堡田里 普天堡, 북한의 현 행정구역으로 량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하여 면사무소, 우체국, 보통학교, 삼림보호구 등의 시설에 방화하고, 식량 등을 약탈한 후 퇴각한 사건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2세 여아 포함 일본인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북한은 이 사건을 김일성 우상화 교육에 이용하고 있고, 남한 학계 대다수도 이 사건은 북한 김일성이 주도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사건의 주역 6사장(六師長)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
비슷하거나 더 큰 규모의 사건으로 1933년 6월 5일의 독산사건(獨山事件), 1934년 1월 22일의 토성(土城) 습격사건, 1935년 2월 13일의 동흥(東興) 습격사건이 있었고, 만주에서 각종 무장단이 침입해오는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모두 잊혀졌는데, 유독 보천보 사건만 많이 알려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집권 후 자신의 항일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또 보천보 사건 때 동아일보가 호외를 발행하여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이전의 사건 때도 다수 언론이 호외를 간행했지만 모두 잊혀졌다.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20년경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보천보 사건 때문에 비로소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당시 조선인들이 항일투쟁의 맥이 끊어진 줄 알았다가 김일성의 보천보 습격으로 독립에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식의 주장도 북한 김일성을 미화하기 위한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그 이전에 유사한 사건들이 많이 있었다.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천 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천 383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관이 주재소에 상주하고 있었다.
사전에 현지답사를 통해 지형 정찰까지했던 김일성(金日成)과 최현(崔賢) 등이 인솔한 부대 120 여명은 1937년 6월 4일 밤 밤 11시 30분경에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경찰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5명의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하고 주재소에 없어 교전상황은 발생하지도 않았다.
보천보 습격사건(普天堡襲擊事件) 피해판명(被害判明) : 동아일보 1937-06-07 석간 2면 1단[1]【함흥지국 전화(咸興支局 電話)】 四일 함남 갑산(甲山)군하 보천보(普天堡)에 김일성 一파 二백여명이 습래하엿다함은 누보하엿거니와 금六일 오정까지에 판명된 피해액은 약 五만원 가량이라는데 습격 당시에 살해된 사람은 일본내지인 두 사람으로 작보한 우근소삼랑(羽根小三郎)은 즉사하엿고 순사부장 딸 야내(野內) 에미꼬(惠美子, 二歲)는 작 十시 四十분에 절명되엇다. 우편소(郵便所)와 면사무소(面事務所) 삼림보호구사무소(森林保護區事務所)는 모두 전부 방화로 인하야 전소되엇는테 우편국 손해가 약 七천원, 면사무소 피해가 약 一만원, 삼림보호구 피해가 약 三만원에 달하고 이 방화로 인하야 다시 연소되어 소방조(消防組)와 보통학교도 전소되엇는테 그 손해는 약 二천원으로서 총피해액은 五만원을 넘는다 한다.
- 우편소(郵便所), 면사무소(面事務所)와 삼림보호구(森林保護區) 전소(全燒)
- 소방조(消防組), 보통학교(普通學校)도 연소회신(延燒灰燼) 총피해(總被害) 오만여원(五萬餘圓)
보천보사건은 전과(戰果)로 따지면 일본 경찰관(순사)의 두 살 난 딸과 일본인 음식점 주인 등 2명이 총탄에 맞아 사망했고, 방화, 약탈을 자행하다 1시간만에 퇴각한 정도의 것이다. 면사무소, 학교, 우체국 등에 방화하고 조선인 상가를 약탈한 사건을 북한은 대형 전투로 치켜세우고 김일성을 영웅으로 미화하고 있으며, 당시의 동아일보 호외 보도가 이에 이용되고 있다.[2][3]
5명의 일본 경찰관이 피해버린 보천보 현지에서는 어떠한 교전도 벌어진 적이 없고, 항일연군 측의 일방적인 방화, 약탈만 있었으므로 단순한 습격사건에 불과한데도 이것을 전투라고 부르는 것은 터무니없는 과장이다. 이 사건은 2년전인 1935년 2월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하여 47명의 경찰관이 있는 경찰서를 향해 대담하게 기관총 사격까지 가했던 이홍광(李紅光, 1910~1935) 부대의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김일성부대는 퇴각하는 과정에서 6월 5일 일본경찰추격대와 충돌해 20여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고, 일본측 경찰은 7명이 전사하고, 12명이 부상당했다.[4]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속보(續報)는 김일성 부대의 사망자가 25명이라 하였다. 북한은 이 추격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처럼 말하나, 실제로는 김일성 부대가 일본 경찰측보다 훨씬 더 큰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 부대도 없고, 경찰관도 5명 밖에 없어 대단한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도 없는데다 경비가 취약하고 조선인이 절대다수인 조그만 국경 마을을 기습적으로 습격한 것은 항일투쟁보다는 보급투쟁(식량 등 약탈)의 목적이었다.[5]
식량결핍(食糧缺乏)으로 내습(來襲) : 동아일보 1937년 6월 14일 2면[5]
함남 보천보(普天堡)의 공비(共匪) 습래 피해 실정조사와 추격 토벌진 지휘 때문에 현장에 출장중이든 경무국 보안과 이소자키(磯崎) 사무관은 지난 十一(십일)일 오후 귀임하야 공비 피해 실상과 장렬한 전투상황에 대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엿다.
- 금번의 공비단은 김일성(金日成), 최현(崔賢)의 합류비 百五十(백오십) 명이라 뵈는데 만주국의 치안공작이 진섭(진척)함에 따라 비적은 극도의 식량난에 빠저 그 때문에 조선내를 엿볼수 밖에 없는 형편으로서 식량을 엿본다는 의미에 잇어서 보천보는 아조 마침이엇다. 보전(堡田) 주재소는 완전히 파괴되고 촌락 三(삼)개소에 방화되엇엇는데 약탈된 것은 주로 양식인 점으로보아 얼마나 식량에 궁하여 잇는가를 알 수 잇다.
그들이 음력 4월 26일,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짧은 시간에 정확히 일본인들 집만 골라 약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약탈 피해자 대다수는 결국 조선인일 수 밖에 없다. 보천보사건 직후에도 김일성 부대는 여러 곳에서 식량과 금품을 약탈하고 있다.[6][7][8][9] 항일투쟁은 이들이 내건 명분일 뿐이고, 실제 행동은 양민에 대한 약탈을 일삼는 마적단이나 다름없었다.[10]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였던 정당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한민(韓民)』 1936년 11월 30일자는 동북항일연군 김일성 부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도하고 있다.[11]
공군(共軍)의 화해(禍害) 장백현을 근거로 하여 공산당으로 조직한 소위 동북 인민혁명군은 이주 동포의 재물을 약탈하며 사람을 붙잡아가며 인명을 살해함으로 해 지방이 거의 적지가 되어 사람이 붙어 살수가 없다는데 그중에도 김일성이 영솔한 부하가 명수도 사오백 명에 달하고 또 활동이 그중 제일 많다 한다. 그들은 촌리로 다니면서 곡식과 재물은 있는 대로 빼앗고 그래도 조금만 불만하면 집을 불사르고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기도 하는데 금년 일년 동안에 그들이 동포의 촌락을 습격한 회수가 사백이십팔회요 피해자의 수효는 이천이백사 명이며 十月 한달 동안에만 잡혀가서 인명의 손해 받은 것이 이백사 명이라 한다. 일본 군대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적극 행동을 취한다 하니 손해 받는 자는 가련한 한인뿐이다."
이 김일성은 보천보를 습격한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이며, 1936년 가을부터 신문에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13][14][15]
사건 직후 연루된 지하조직이 적발되어 1938년까지 일대 검거 선풍이 불어 총 739명이 체포되고, 이중 188명이 기소되었다. 이를 혜산사건(惠山事件)이라 한다. 또 이 사건을 계기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일만군(日滿軍)의 토벌이 강화되어 1로군의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 중국인)과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중국인) 및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金日成, 1901~1937)이 1937년 가을 전사하는 등 항일연군 세력은 큰 타격을 입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어, 잔존세력은 끝내 소련으로 도주하게 된다.[16]
보천보사건은 당시 국경지방에서 비일비재했던, 마적ㆍ비적까지 포함한 각종 만주 무장단의 조선내 침입 사건 중 하나이며[17][18][19],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사건으로 1934년 1월의 토성습격사건, 1935년 2월의 동흥습격사건도 있었지만,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금방 잊혀졌다. 그러나 해방 후 북한에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보천보 사건을 자신의 엄청난 항일투쟁 공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바람에 유독 이 사건만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북한이 보잘것 없는 보천보 사건을 김일성의 가장 중요한 항일업적으로 미화 선전하는 이유는 조선 땅과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을 위해 투쟁한 것을 감추고, 조선독립운동을 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고, 나아가 학생들과 주민들을 동원하여 현지답사를 시키므로서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우상화하여 세뇌ㆍ각인시키는데 이용하기 용이한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자신은 주로 만주에서 활동했지만 만주에 있는 지역은 학생들과 국민들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현지답사하게 하는 세뇌교육의 현장으로 이용하기는 불가능하다.
북한 전문가 이현웅도 이런 점을 비판한다.[20]
항일무장투쟁은 1940년에서 1945년 해방되기 전 5년 간의 활동이 매우 중요한데 김일성은 이 기간에 소련으로 도망쳐 극동군사령부 소속 ‘88여단’에서 만주 등 국경지역 침투 및 정보수집을 위한 간첩교육을 받았을 뿐 이렇다 할 업적이 없다. 이런 약점들을 덮기 위해 ‘보천보전투’를 신화적 수준으로 날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북한은 보천보 지역에 보천보혁명박물관(普天堡革命博物館)과 김일성 동상 등을 세우고 항일혁명성지로 조성하여 김일성 우상화 교육에 이용하고 있다. 파리를 독수리라고 부풀려 세뇌교육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해방 직후부터 가짜로 알려졌던 북한 김일성을 온갖 궤변을 동원해 진짜로 둔갑시켜놓은 한국의 학계나 언론계는 보천보 사건과 관련한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김일성 미화에 열심이다. 아마도 보천보 사건을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만들고싶어 안달인 것같다. 한국의 학계는 역사 연구자는 소수이고, 역사 소설가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학계 일각에서 보천보사건과 김일성을 미화하는 주장들인데, 모두 근거없는 것들이다.
사건 | 일자 | 호외 간행 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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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사건(獨山事件) | 1933년 6월 5일 | 조선일보[24], 조선중앙일보[25] |
토성습격사건(土城襲擊事件) | 1934년 1월 22일 | 동아일보, 조선일보[26], 매일신보[27] |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 | 1935년 2월 13일 | 조선일보[28] |
보천보사건(普天堡事件) | 1937년 6월 4일 | 동아일보 호외 1, 호외 2 ; 조선일보 |
이번 교과서 논쟁에서 꾸준히 거론되는 사건이 보천보 전투다.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가 조국광복회 조직원들과 함경남도 보천보에 침투해 경찰주재소 등을 습격한 사건이다. 북한은 이를 김일성 우상화에 활용한다.현행 교과서들은 보천보 전투를 비중 있게 다뤘다. 금성·동아출판·미래엔·천재교육 등이 공통적으로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했다. 유일하게 김일성을 직접 언급한 동아출판은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 이름도 국내에 알려지게 됐다” “북한은 이 사건을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하였다”고 썼다.
교육부는 당시 일본 군·경이 입은 미미한 피해를 교과서들이 과장했다고 평가한다. 김일성의 항일운동이 ‘가짜’란 주장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무비판적으로 기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계의 생각은 다르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주로 만주, 연해주를 본거지로 활동했기에 국내 투쟁으로는 보천보 전투가 특징적이라고 본다. 특히 동아출판은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되고 있음을 밝혀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35]
보천보로 향하는 동안 1970년대 초 대학원에 다닐 때 운동권 선배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김일성 장군이 독립투쟁한 것은 거짓이 아냐. 민족주의 진영이 기진맥진했던 1930년대에 김일성부대는 북만주를 휩쓸었을 뿐 아니라 국내 진공에도 성공했어.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보천보 전투지."
당시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이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남녘에서는 무장 독립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청산리 전투가 거론되지만 북녘에서는 보천보 전투를 으뜸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남녘 교과서에는 보천보 전투가 기재돼 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북녘 교과서에는 청산리 전투에 대한 기술이 없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진실은 보천보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2군 6사(師)의 사장(師長) 김일성(金日成)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군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고, 북한 김일성(金日成)과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그의 전사 후 같은 이름을 쓰며 선배 지휘관의 공을 가로챘다.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나 전사를 기록한 당시 문건은 현재 알려진 것만도 20여건이 넘는데,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인텔리라거나, 나이가 35~6세 가량이며 함경남도 출신이라고 하여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인물인데다 당시 전사한 것이 분명하다.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는 후일의 증언도 많다.
대다수가 양민 약탈에 관한 기사이기는 하지만 동북항일연군 김일성 부대의 동태가 국내 신문에 자주 보도되는 것은 6사장 김일성이 활동하던 1936년 가을 ~ 1937년 말 기간과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활동하던 1939년 초 ~ 1940년 여름 기간이다. 1938년에는 김일성 부대의 활동보도가 거의 없다. 이것도 6사장 김일성은 실제로 1937년 말에 전사하고, 나중에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다른 사람(북한 김일성)이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같은 사람이라면 유독 1938년에만 아무 활동도 하지 않고 있었을 이유가 없다.
1934년 1월 22일 밤 11시 30분 만주의 공산군 300여명이 평북 자성군 장토면 토성동(平北 慈城郡 長土面 土城洞)을 습격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규모도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크지만 완전히 잊혀져 있고, 오늘날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 이 사건도 당시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이 호외를 간행하여 크게 보도했지만 보천보 사건과 달리 김일성과 관계가 없으니 철저히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크거나 비슷한 규모였던 동흥습격사건과 토성습격사건이 완전히 잊혀져 있는 것처럼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도 잊혀져 거론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런 류의 사건들은 항일투쟁이라기보다 마적의 약탈사건에 가깝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독립운동으로 인식했을 가능성도 별로 없다.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고 나서 자신의 혁혁한 항일전공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보천보 사건만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남한에서는 좌파들이 학계를 장악한 1990년대 이후 북한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보천보 사건이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북한 김일성이 소련군에 있을 당시인 1942년에 중국인 상관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지시를 받고 자필로 쓴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는[39][40][41][42][43] 김일성 자신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간략한 역사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북한에서 간행된 각종 김일성 전기나 회고록과는 달리 자신의 엄청난 항일전공으로 내세우는 보천보 사건에 대해 단 한 마디 언급도 없다. 소련군 시절 작성한 이력서들에도 보천보 사건에 대한 말은 전혀 없다.[44][45] 해방 전에는 김일성 본인도 이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보천보사건은 국경지방에 자주 있었던 일과성 사건으로 당시에는 독산사건(獨山事件), 토성습격사건(土城襲擊事件)이나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처럼 금방 잊혀졌다. 동아일보의 경우 보천보 사건 이듬해인 1938년 1월 1일부터 1960년 12월 31일 기간에 "보천보"로 검색해 보아도 보천보 사건에 대해 언급한 기사는 단 한 건도 없다.[46] 매일신보 등 다른 신문도 마찬가지이다. 해방 당시에도 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면 김일성이라 자칭하는 자가 평양에 나타났을 때 보천보의 영웅이 돌아왔다고 떠들석했어야 하겠지만, 그가 등장한 이후로 북한에서도 1946년까지는 이 사건에 대해 별 언급이 없었다. 실례로 『신천지』 1946년 3월호에 실린 《김일성장군 부대(金日成將軍 部隊)와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의 중견간부(中堅幹部) 좌담회(座談會)》 기사[47],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1946.7.25)에 실린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의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 개선기(凱旋記)》나,[48] 해방 1주년 기념으로 간행된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49]에 실린 필자 미상의 《김일성 장군의 약력》(p.1), 한재덕의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 유격대 전사(遊擊隊 戰史)》(p.3), 한설야(韓雪野)의 《혈로(血路)》(p.40) 등에도 보천보사건은 일체 언급되지 않고 있다. 1947년에 들어서야 이 사건을 김일성의 중요한 항일 업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하는데, 1947년 4월 30일 노동신문에 실린 조기천(趙基天,1913~1951)의 서사시 《백두산》이 대표적이다.[50]
북한이 보천보사건을 본격적으로 미화 선전하기 시작하는 것은 6.25 전쟁 휴전 후부터로, 1955년 6월에 양강도 보천군을 ‘보천보혁명전적지’로 명명하고 보천보전투승리기념비와 동상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으로 보천보전투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을 전개했다. 보천보혁명전적지를 중심으로 전투진행과정을 보여주는 보천경찰관주재소, 포대, 전투지휘장소, 곤장덕 등 보천보전투관련 장소들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1962년에 보천보전투 25주년을 맞아 김일성 동상을 완공했다. 또 보천보전투 30주년인 1967년 6월 4일에 양강도 도 소재지인 혜산시의 도심 중앙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을 건립하고 중앙과 도급 간부들과 군인, 청년, 근로자 등 5만여 명의 군중들을 제막식에 참가시켰다.[51] 김일성 집권 후 벌인 이러한 대대적 선전의 결과로 잊혀졌던 보천보 사건이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남한에서는 해방 당시는 물론이고 그후로도 한동안 이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전혀 거론된 바도 없었다. 남한 신문에 1945년 11월 중순 이후 평양에 나타난 북한 김일성에 대한 기사가 더러 실리지만[52] 그를 항일영웅이라 치켜세우던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나 해방일보(解放日報) 등 좌익계열 신문들조차 보천보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사여구만 늘어놓았을 뿐 그에게 무슨 항일투쟁 공적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못했다.[53][54][55] 1930년말 만주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 시절 북한 김일성의 지인이었던 최형우(崔衡宇, 1905~1950)가[56] 1946년 서울에서 간행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이집(第二輯)》에도 그의 동북항일연군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57], 구체적 내용은 없이 찬양 일변도의 말만 늘어놓고 있는데, 물론 보천보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 언급이 없다. (최형우는 서울에서 김일성에 아부하는 내용의 책까지 내고서도 북한으로 가지는 않았는데, 6.25 때 인민군에 붙잡혀 처형 당했다. 북한에서 1990년대에 복권되었다고 하며, 김일성 회고록에는 뒤늦게 최형우(최일천)를 칭찬하고 있다.[58])
그런데 해방 직후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면서 평양민보 편집국장을 지낸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이 1959년 2월 귀순하면서 그가 처음으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였다.[59] 이후 다른 문헌에서도 북한 김일성의 경력으로 보천보사건을 더러 기록하기 시작한다.[60]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일반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일부 학자들이나 거론하는 것에 그쳤다. 일반인들에게까지 이 사건이 많이 알려지는 것은 학계가 노골적으로 종북성향을 띠면서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미화하기 시작하는 1990년 이후이다.
이런 것만 보아도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주장은 가짜로 알려진 북한 김일성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동아일보가 발행한 호외를 핑계로 아무 근거도 없이 지어낸 것이다. 1930년에 있었던 혈성결사대(血成决死隊) 김선학(金善學) 사건[29]은 동아일보가 호외를 3차례나 간행하며 보도했지만[30] 이 때문에 김선학이 전국적인 유명 인물로 부상한 적도 없다. 보천보 사건과 유사한 1934년 1월의 토성습격사건도 동아일보와 매일신보가 호외를 간행하여 보도했지만 오늘날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이 없다. 이처럼 일제시대에 호외 간행은 자주 있었지만 대중 전달력은 미약했고, 보천보 사건의 호외 간행으로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것이다.
북한에 김일성이 집권하여 자신의 항일공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보천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이며, 김일성이 집권하지 않았더라면 보천보사건도 토성습격사건이나 동흥습격사건처럼 계속 잊혀졌을 것이다. 나아가 보천보 사건의 당사자인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은 남의 공을 가로챘을 뿐, 그 사건의 당사자도 아니다.
보천보 사건 당시 북한 김일성이 대중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고 주장하는 장면으로, 1948년 정관철(鄭寬徹, 1916~1983)이 그린 유화 "보천보의 횃불"이다.[61]
1956년 '보천보 전적지'를 둘러보는 김성주 (가짜 김일성)[62]
보천보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