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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6사장) 보천보사건 간삼봉 전투
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국경경비진 주파기(國境警備陣 走破記)는 1939년 6월 조선일보에 5회에 걸쳐 연재된 기사로, 당시 함경북도 국경 경비를 담당하던 경찰대와 두만강 대안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 부대와의 대치 상황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당시 김일성 부대는 국경을 넘나들며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를 자행하며 국경를 경비하는 일본 경찰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아래는 각 회별 기사 내용이다.

김일성이 승리했다고 자랑하며 북한이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는 1939년 5월 22~23일에 있었던 소위 "무산지구전투"라는 것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939년 6월 조선일보에 5회에 걸쳐 연재된 국경경비진 주파기.

해설

기사를 쓴 조선일보 함북특파원(咸北特派員) 오쾌일(吳快一) 기자가 방문했던 지역은 함경북도 무산(茂山)과 백두산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무산에서 두만강을 따라 백두산 쪽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간 곳이다. 오늘날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량강도 대홍단군에 속한다. 당시는 소홍단(小紅湍)으로 불리던 지역인데, 왜 대홍단으로 바꾸었는지 모르겠다.

백두산 바로 동편이 함경북도 무산군(茂山郡) 삼장면(三長面)이며, 삼장면의 동편 끝 두만강에 접한 지점인 삼상동(三上洞)에 삼장면사무소와 경찰서가 있다. 이곳에서 두만강을 동에서 서로 거슬러 올라가며 홍기하(紅旗河, 중국쪽)[1], 소홍단수(小紅湍水, 북한쪽), 농사동(農事洞)[2], 홍암동(紅岩洞)[3] 등이 나온다. 두만강의 북한 쪽 지류 소홍단수(小紅湍水)를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 소홍단(小紅湍)을 지나 신개척(新開拓)이 나오고, 좀 더 상류에 구암(篝岩)이 있다. 구암 북편에 소로은산(小蘆隱山), 서편에 대로은산(大蘆隱山)[4]이 나온다.(지도의 芦는 蘆의 일본식 약자임). 대로은산 서북방향에 증산(甑山)이 있다. 중국쪽으로는 홍기하(紅旗河)의 두만강과 합수 지점 북쪽에 노전동(蘆田洞)이 있고, 그 동북동(ENE) 방향으로 약간 떨어져 소옥석동(小玉石洞)이 보이는데, 김일성 부대에 약탈당한 마을들이다.
  • "국경경비진 주파기(國境警備陣 走破記)"에 나오는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 부대 관련 정보는 두만강 일대 국경을 경비하는 일본 경찰들에게 들은 것이고, 당시 국경경비대가 가진 정보일 것이다.
  • 당시 김일성의 직책을 항일연군 제6사장(師長)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일만군(日滿軍)의 지속적 토벌로 많은 병력과 지휘관의 손실을 입은 항일연군 1로군은 종전의 1, 2 군(軍)과 6개 사(師) 체제를 1938년 7월에 3개 방면군(方面軍) 체제로 축소 개편하므로, 여기에 나오는 김일성은 6사장 아닌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며, 바로 북한 김일성이다.
  •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이 당시 활동하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과 이름이 같으므로 동일인으로 오판하고 있으며,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 김일성의 신원 : 연재 4회에 나옴.
김일성이란 대개 어떠한 인물인가?
그는 본적을 함남 갑산군(甲山郡)에 두엇다 하는 말도 잇스나 평남 출생이란 말이 더 근사하다고 한다. 금년 서른 한 살 전후의 청년으로 일찌기 소연(蘇聯)에 가 『막사과(莫斯科)』[5] 공산대학에 배운 일이 잇다하나 그 진부는 가려낼 방도가 아즉 업다. 그리고 그 성과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는 말도 미들만한 자료가 업다. 다만 그가 오늘과가치 비단의 수령으로 투신하게 된 동기가 그 아버지가 일찌기 기미년(1919년)에 간도에서 총알에 마저 너머진데 잇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보고 잇다.
이것은 당시 활동하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가깝다. 다만 평남 출생이란 말에 더 비중을 둔 것은 실제로 맞닥뜨리고 있는 북한 김일성의 신원 정보가 약간 가미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국경경비대가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은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여기서는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의 신원을 써야할 곳에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잘못 적고 있는 반면에 몇달 후 작성된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에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써야할 곳에 당시 활동하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의 신원을 잘못 적어놓고 있다. 두 경우 모두 6사장 김일성과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같기 때문에 동일인으로 혼동해서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 항일연군 조선인들의 상용어는 만주어(중국어) : 연재 5회에 나옴.
그들 사이에서는 비밀을 외부에 탈로(탄로)시키지 안흐려는 술책인지는 모르나 조선인이 육할 이상이면서도 상용어를 전부 만주어로 하고 잇서 외양으로는 조선인과 만주인의 구별을 하기 어렵게 되엇다 한다.
항일연군 사람들은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거기서 성장한 사람들이 대다수이며, 중국에 반쯤 동화된 그들에게는 조선어보다는 만주어(중국어)가 더 익숙했다.

반절구전투 : 1939년 5월 3일

김일성 부대는 무산군 삼장면 대안으로 이동해오기 직전 1939년 5월 초까지도 함경남도 맞은 편인 장백현(長白縣)에 머물며 5월 3일 밤에는 반절구(半截溝)를 습격하여 식량 등을 약탈하고 주민 40여명을 살상, 20명을 납치하였다. 북한은 이를 반절구전투라 부르며 대단한 것처럼 선전한다. 반절구는 오늘날 장백 조선족 자치현(長白朝鲜族自治縣)의 금화향(金華鄕)인데[6] 1987년 7월에 이름이 바뀌었다.[7]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 1939년 6월 20일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1939.06.20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❶ :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사진 : 삼엄한 경비광경)
만주국의 치안이 점점 확립하여지는 반면에 여기서 몰려나게되는 비적들이 궁지에 빠진 남어지 차츰 백두산을 중심삼은 함경남북도 대안에 집결하여 조선 안을 호시탐탐하고 때로는 만용을 부려 월경침범까지 감행한다는 사실은 제일선의 치안유지에 적지안흔 두통꺼리가 되고잇다. 특히 지난 오월 하순 이래로 한 달 가까이 끄러나오는 김일성(金日成) 일파의 준동은 다만 치안유지에 지장이 될 뿐외라 나아가서는 북조선의 산업개발에도 크다란 지장이 생길 우려가 잇서 제일선 경비진은 갑짜기 긴장하여 이 화근을 근본적으로 절멸시키겠다고 철통가튼 경비진에 한 거름을 더 나아가 토벌대를 파견하여 일만양군(日滿兩軍) 호응아래 섬멸전을 게획하고 연안 수백리의 포위진을 베풀고 그물을 치고 조이드시 사방에서 차츰 조이고 잇다. 이 작전게획을 현지에 나아가 독려하고 또 제일선에서 분투하는 특별경찰대를 위문하게된 통정(筒井) 함북경찰부장[8] 일행을 따라 기자는 삼엄하고 치떨리는 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을 빼지안코 답사할 기회를 어덧다. 이제 김일성 일당이 조선 안을 침범한 당시의 상황과 여기저기서 어든 정보를 종합하여 그들에 대한 약간의 시식(소식?)을 전달하고저 한다.
지난 오월 이십이일 나제(낮에) 삼장(三長) 경찰서 관내인 개척동(開拓洞)에 비단의 주력부대가 침입하여 그곳에 잇는 북선제지회사 벌목장의 벌부(伐夫) 합숙소를 습격하여 남자만 열여덟 명을 붓드러가지고 그길로 가면서 구암(篝岩)에서 열아홉 명을 또 심포골(深浦谷)[9]에서 두명 - 도합 서른아홉 명을 납치하여 약탈한 양식과 기물흘 질머지우고 대로은산(大蘆隱山) 등을 타고가고 또 한 부대는 원사동(元四洞) 골목에서 때를 가치하여 약탈하려 하엿스나 이때는 벌써 토벌대가 급보를 밧고 농사동(農事洞)에서 달려드는 순간이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세를 관망하던 차에 오후 여덟시쯤 되어 토벌대의 추격이 점점 급박해젓스나 벌써 날이 저물어 행방을 모색하다가 이튼날 새벽에 이르러 증산(甑山) 근방에서 비단을 발견하여 격렬한 조우전(遭遇戰)이 전개되엇다.[10][11][12][13][14]
격전 두시간 반 후에 비단은 마침내 이십삼일 석양에 장산령(長山嶺)[15]으로 도망하니 조선 안에 침범한지 이틀만에 적은 완전히 퇴치하게 되엇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국경은 넘엇스나 다시 그 길을 취하여 침범하려는 견제수단으로 이십오일 오후 아홉시 사십분 경에는 장산령 하류인 상삼수(上三水)에 나타나 월경을 꾀하엿스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장산령에 주력이 모여 동북방으로 이동하여 이십칠일 오후 여덟시 반쯤해서 칠십 여명의 비단이 상사동(上四洞)[16] 대안인 상대동(上大同)에 들어와 이십구 명을 또 이와 동시각에 상일동(上一同)[17] 대안의 동경평(東京坪)에서 아홉 명을 납치하고 식량 다수를 약탈하고 이십구일 오후 아홉시에는 삼장 대안 이수평(二水坪)에서 열아홉 명을 또 그와 가튼 시각에 소옥석동 상촌(小玉石洞 上村)[18]에서 주민 오십명을 제각금 붓드러 부락에 잇는 식량품을 약탈하여 가드니 --
삼십일 그 시각이 되자 다시 소옥석동 하촌에서 삼십삼 명을 노전동(蘆田洞)에서 아홉 명을 또 중촌(中村)에서 이십삼 명을 납치하고 그 다음날인 삼십일일 오후 일곱시에는 삼장 대안(對岸)의 홍기하(紅旗河) 경찰분주소(警察分駐所)에서 대마록구(大馬鹿溝)에 잇는 삼림경찰대(森林警察隊)에 보내는 식량품 수송대를 도중에서 기다리다가 말까지 아울러 약탈해가지고 다라낫다. 유월일일 오후 아홉시 반에는 사십여명의 비단이 삼장 대안에서 이십리쯤 되는 시만동(詩滿洞)에 침입하여 식료품과 주민 열네 명을 또 그날밤 열한시 지나서 이수평에 나타낫다가 경비대에 격퇴되고 그 다음날 새벽에는 대마록구에 나아가려다가 그곳 삼림경찰대에 격퇴 당하고 그뒤로는 두만강 대안부락에 즉접 나타나지는 못하고 근방에서 잠복하고 잇는 모양인데 그 동안 대안의 만주측 부락에서 납치한 주민만 일백 팔십구 명의 다수에 달하고 식량, 소, 말, 도야지 닭 등등의 피해는 자세히 조사할 방법조차 업스나 막대한 수효에 달할 것이라 한다.
조선에서 붓들려 간 자 중에는 오직 한 사람인 내지인으로서 굴본철차(堀本鐵次)군이 탈주해 오다가 발목에 총알을 밧고 경상을 당하고 개척동에서 붓들려간 전치원(全致元, 三〇)이 도망하다가 권총에 마저 즉사한 외에 나머지 삼십칠 명을 붓들린 뒤 일주일쯤되어 전부 무사히 석방되어 다시 못볼 줄만 알엇던 제집에로 돌아왔다.
나지면(낮이면) 밀림과 산속에 업디렷다가 석양부터 밤중까지 맹렬한 활동이 전개되면 여기저기어 거이(거의) 가튼 시각에 이처럼 막대한 피해를 보게되니 전전긍긍하는 주민의 불안은 더 말할 것도 업지만 종적을 몰라 추궁하지 못하거나 혹은 만나서 추궁하여도 번개가치 다라나버리는 그들을 토벌하는 경찰대의 고심이란 상상외에 큰 것이다. (게속)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 1939년 6월 21일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여름 업는 제일선(第一線) / 난로(暖爐) 불은 경비대(警備隊)의 유일(唯一)한 벗 1939.06.21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②❷ :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여름 업는 제일선(第一線)
난로(暖爐) 불은 경비대(警備隊)의 유일(唯一)한 벗

무산을 떠난 일행 일곱명(통정 경찰부장(筒井 警察部長)[8], 편산 경부(片山 警部)[19], 빈전 경일(濱田 京日)[20], 김 매신(金 每新)[21], 고교 북일(高橋 北日)[22][23], 사지 북일일(士至 北日日)[24][23] 급 오기자(及 吳記者)[25])은 토비사령부(討匪司令部)가 잇는 삼장(三長)[26]에 향하엿다.
도중에 요소요소 빈틈업시 째워진 경비진을 뚤코 두만강을 여페(옆에) 끼고 구비구비 양의 창자가튼 산비탈길을 달려 세 시간만에 목적지인 삼장에 도달하엿다. 삼륜(三輪) 고등과장, 편강 서장(片岡 署長) 이하 다수의 영접을 바더 토벌대 본부인 삼장서에서 잠시 쉬인 뒤에 두만강을 건너 그 대안에 잇는 만주국의 부락 홍기하(紅旗河)에 건너가 역시 만주측의 토벌대 사령부에 경의를 표하엿다.
조선 안의 경비도 무던하지만 대안인 홍기하 시가는 완연 큰 전쟁이나 당하듯이 몹시도 긴장되어 잇섯다 길까에 지나는 사람 얼굴이라던가 점방[상점]에 안즌 사람 얼굴 할 것업시 아직도 불안과 초조한 가운데 잇다는 표정을 여실히 나타내이고 잇섯다.
〇〇부대에 경의를 표한 우리 일행은 누구나 호기심에 끌려서 만주담배를 사려고 점방[상점]에 들어갓는데 눈치빠른 장사치들은 우리가 뭇기도 전에 담배를 사자는줄 알고서 『톤톤데 메유라—』하며 손을 내둘으는데 놀라지 안흘 수 업섯다.
세상이 소란하니 담밴들 제마음껏 배급이 될 리 잇스랴만 갑짜기 『토벌경기』 때문에 담배 재고품이 업서진 탓이겟지—〇〇부대장 역시 조선담배의 "마코—"[27]로 견대는(견디는) 것이 도리켜 생각킨 바 잇섯다.
대안에 이처럼 소란 정경을 보면서도 태연스런게 자리잡은 삼장 시가가 얼마나 우리에게 위안을 주엇는지는 새삼스럽게 국경이 가로노혀 잇는 것을 늣끼게 한다.
×
다음날 삼장을 떠난 일행은 농사동을 거처 그곳에서 다시 멀리 백두산의 기슭에 잇는 조선에서는 제일 끗다는 부락인 삼수펑(三水坪)과 상삼수(上三水) 두 부락을 향하여 고원지대를 올으고 또 올라 전후 여섯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두고 자동차를 억지로 모라 보앗다.
여기쯤 와서는 두만강도 한줄기의 개울로 변하여 아므런 각도로 보아도 강물이라는 명칭을 부처 부르기는 힘드럿다. 차라리 강물이라기 보다는 욱어진 숩(숲) 사이에 흐르는 잔잔한 시내물이라고나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너무도 떠러저 보이는 격에는 놀라지 안흘 수 업섯다.
아프로(앞으로) 한업시(한없이) 터저 보이는 개마고원(蓋馬高原)의 웅대하고 찬연한 광경에 부닥치자 일행은 이땅을 밟고 달고 잇는 순간에 『비적』이니 『토벌』이니 하는 술어를 모조리 이저버리고(잊어버리고) 다만 대자연에 혼연히 일치된 늣김박께는(느낌밖에는) 아무 것도 늣길 수 업섯다. 적은 시내물을 곳곳에 막어서 언(堰)을 만들어 떼(벌(筏))를 흘려 나리기에 편리하도록 해노흔(해놓은) 정경을 나려다보면서 또는 툭터진 고원에 제멋대로 자라난 고산식물(高山植物)의 가지가지 —— 들쭉, 은로매(銀露梅), 금로매(金露梅), 천년죽(千年竹) — 등을 비롯하여 여름도 모를 여러 가지의 초목이 무성하여 완연히 천연의 식물원(植物園)을 이루고 잇는 광경을 또는 길좌우에 욱어진 원시림(原始林)의 장관을 보면서 천왕당(天王堂)[28][29][30] 홍암동(紅岩洞)[3]를 거처 삼수령에 도달하엿다.
해는 벌써 서산에 기우러지고 이야기는 김일성 일당의 랑자한 횡포를 응징하자던 토벌대의 무용담으로 걸직하여젓섯다.
그러나 여기가 국경이요 또 백두산의 막다른 골목이라는 늣김을 주는데는 누구나 감격에 자자진 순간을 안가질 수 업섯는
어느 철을 구별할 것 업시 사시장동(四時長冬)인 이곳인지라 경비대가 들어잇는 곳곳마다 난로(暖爐)불이 피워저 잇고 게다가 요사이 온도를 무르니(물으니) 농사동에서 벌써 최저 령하 십이도요 최고 십이도라 하므로 그보담 상류인 삼상수나 상수평은 더 무러볼 것도 업시 조선에서는 제일 기후가 고르지 못한 걸로 자랑을 삼는 지방이니 인적은 끈허진 곳에 경비대만 강물을 바라보고 난로불을 벗삼아 물그럼이 서잇는 것이 한갓 기이한 늣김을 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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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은 다시 삼장을 출발하여 산골짝이를 더듬어서 이번에 비적의 습격을 바든 부락인 개척동(開拓洞) 구암(篝岩)과 또 신개척동(新開拓洞) 등지를 돌아서 흡사 고전장을 탐사하는 늣낌으로 답사를 게속하엿다. 가는 곳마다 『감회기픈 것은 청진이나 나남에서 일상 맛나는(만나는) 경관들을 그곳 현지에서 맛나는 늣김이다.
우선 원일동(元一洞)과 개척동에서 맛난 경비원들에 청진서원과 경찰부원들이 석겻는데(섞였는데) 한치나 자라난 수염 틈으로 이를 내노코 우스면서 반겨하는 광경에는 그들의 고초는 물론이어니와 국경경비의 어려운 직무임에 다시금 그들의 노력이 커 보엿섯다. 두만강의 본류 기를(길을) 막다른데 때까지 다다르고 또는 그 지류인 홍단수(紅湍水)를 또한 제일 상류까지 다달러서 두만강의 상류지방을 삿삿치 뒤지는 이번 행보의 우연이 아님을 늣기면서 일행은 악가도(아까도) 말한 바와 가치 국경이라던가 비적과 토벌이라던가 하는 늣김에서 해방되어 대자연에 도취하고 대자연의 방대한 규모에 또는 멀리 바라보이는 백두령봉(白頭靈峰)의 운표에 나타난 자태에 머리를 숙이고 뒷거름질을 하여 다시 삼장에으로 향하엿다.
(사진은 개척 피비적해가에 도착한 일행)
"개척동의 비적 피해가(被害家)에 도착한 일행"의 오식인 듯.
소홍단수와 두만강이 합류하는 지점 서편에 있었던 천왕당(天王堂).[28] 백두산신령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었다.[29][30] 1935년 8월 23일자 안동신보(安東新報)의 사진.[31] 무산 삼장면에서 함경남도 갑산 보천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허항령(虛項嶺)에도 같은 이름의 천왕당(天王堂)이 세워져 있었다.[32][33]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③➌ : 1939년 6월 22일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③➌ 일화(逸話)도 가지가지 / 항복권고(降服勸告)에 분반(噴飯)할 비단(匪團)의 진답(珍答) 1939.06.22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③➌ :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일화(逸話)도 가지가지
항복권고(降服勸告)에 분반(噴飯)할 비단(匪團)의 진답(珍答)

이처럼 대담무쌍하게도 조선 안의 경비진을 틈타서 침범한 그들과 토벌대인 조선경찰부대와의 조우전(遭遇戰)은 얼마만한 정도로 전개되엇던가—또는 그들 비단의 전투력은 어느 정도의 것인지가 시험되엇는가? 하는 점이 흥미를 끌게한다. 이제 이르러서는 〇〇〇과 합류제휴하여 일만(日滿) 군경으로 된 토벌단에 포위되어 오직 독안에든 쥐처럼 되어 잇지만 그들은 궁경에 빠질사록 더욱 본래의 표한하고 횡폭한 행동을 감행하여 문자그대로 신출귀몰하는 바 잇스니 이점은 절대로 소홀히 취급하고 말 것이 아니라고 토벌대 사령부측에서 말하는 걸 보아 당분간 이 토벌대의 역할이 커야할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래 조선경찰대와 부닥처 싸워본 일은 전후 합해 열한 번 그중 여섯 번은 조선 안에서 싸운 것이라 한다 당시 토벌대와 사이에는 상당한 전투가 일어낫던 모양인데
그중 몃 가지를 드러보면 다음과 가치 "유—모러스"한 전투담이 숨어 잇다.
(가) 오월 이십오일 밤 열시 좀 못되어서 상삼수평(上三水坪)의 강안을 경비중이던 모리부대(毛利部隊)는 약 열 명쯤 되어 보이는 비적가튼 부류들이 떼(벌(筏))를 타고 강을 건너 들어오는 걸 보고 즉시 비적이라 단정하고 연속사격을 삼십여 발이나 한 결과 그들은 무난이 배후의 밀림지대로 피신하는 체 하더니 근거지를 잡고나서는 경기관총을 내두르며 맹렬한 포탄을 보내고 잇더니 승산이 업섯던지 백색지대(白色地帶)로 들어가고 말앗다. 상당한 격전이메도 불구하고 쌍방에 손해개무(損害皆無).
(나) 가튼 모리부대가 유월 초하로날 저녁 여덟시 반쯤 적을 찻느라고 강을너머 삼수평 대안에서 들어가는 기동령(箕洞嶺)에로 향하는 도중 강가에서 이십여 명의 적부대를 만낫스므로 교전하기 이십분 동안에 상당한 타격을 주엇다는데 그 다음날 다시 현장에 가본 결과
그곳에는 비단이 사용하던 물건으로 유기품(遺棄品)이 다음과 가치 흐터저 잇섯다 한다.
(一) 륙삭크(배낭(背囊)) 다섯개가 잇고 그 가운데는 암염(岩鹽)——다섯되, 엽연초(葉煙草)——오백 "몬메"[34], 좁쌀(속(粟))——넉되, 고추가루——스홉, 면경(거울)—— 하나, 화장품——약간
(二) 밥짓는데 스는 세수대야 일곱개
(三) 만주경관의 정모 한 개, 외투 두벌, 담요 한 벌, 노루가죽 한장, 등등이 던더저잇는 걸로 보아 모리부대의 추격은 상당히 맹렬햇던 것이 알려진다.
조선과는 상관업는 이야기나 만주경찰대가 근거지인 홍기하(红旗河, 삼장 대안(三長 對岸))에서 석인구(石人溝)에 잇는 삼림경찰대에 식량품을 수송하는데 열 마리의 말을 련대하여 네 사람의 마부를 시켜 끌리고 오월 삼십일일 오후 네시 홍기하를 출발시켯든바 석인구에 못미처 오리 지점에 이르자마자 수십 명의 비단이 복병해 잇다가 쪼차나와 말과 식량품과 마부까지 모조리 채가지고 다라낫다. 그중에는 백미 여섯 섬과 밀가루 세 포대, 통조림 마흔여덟 개, 게다가 석유(石油) 스무 관 등이 끼어 잇섯다 한다.
지금까지의 토벌대 가운데는 만주 경관대에 한하여 이와가튼 장면이 간간히 번복되고 잇서 만경(滿警)의 질적 향상이 식자간에 부르지저지는(부르짖어지는) 소치라 한다 여기에 진기한 일화(逸話) 한 구절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우리 일행이 차저가기 얼마 전에 만경토벌대장 〇〇씨가 김일성 비단에 대하여 항복권고서(降服勸告書)를 써서 보내어 김일성 일파의 인식 부족함을 지적하여 깨우친 바 잇섯는데 거즛말가튼 참말로 그 회답이 〇〇씨에게 돌아왓다. 회답에 말하기를 『……네가 권고한데 대하여 답장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로서 이 기회에 우리의 하고저하는 바를 선명히 알려주자는데서 회답을 쓴다……너이들이 우리를 비적이라고 부르고……또 우리를 토벌한다고 하지만은 결국은 너이들은 우리에게는 우수한 무기 운반대에 불과한 역할박게(밖에) 아무 것도 못 할 것이다……』 그리고 피봉에는 『〇〇〇〇견(見)』이라 쓰고 발신자 명의는 역시 김일성의 부하인 오백룡(吳白龍)으로 되어 잇섯다 한다.
이말은 만경(滿警)을 모욕한 것이지만 적적한 국경경비진에서는 그 불순하기 짝이업는 호언이 한 화제꺼리가 되어 웃기고 잇다. 이것도 역시 권고문의 하나로 유명해진 것인데 만경(滿警) 내부의 요직에 잇는 조선인 부대장 〇〇〇씨가 오백룡에게
『……나는 귀하을 존경하고 잇스나 환경의 구속을 바다 본의에 어긋진 토벌행동까지를 귀하에게 감히 하게되니 민망하기 짝이 업소……빨리 귀하도 귀순(歸順)하여서 가치 일하는 것이 어떳소……나 역시 토벌대가 아니엇더면 귀하에 가담할 사람이엿소……』 운운의 가장 편지를 햇더니 경각에 회답을 보내 말하기를
『〇〇〇선생! 선생이 가정 사정으로 또는 주위 사정으로 우리와 가치 행동을 못 취한다는 데는 참으로 동정 안흘 수 업소……선생이 진실한 말로 사실이 그럿타면
우리와 언제나 손잡는 날이 잇겟지요………아프다 토벌대를 큼직하게 데리고 우리를 차저오시요. 일정한 장소에서 우리가 상봉하게 되어 손을 맛잡게 된다면 피차의 소원은 달할 수 잇서요…』라는 엉터리 답서를 보냇다 하는데 그 글 속에는 상당한 정도까지 세게 정세나 동양 정세를 알고 잇다는 것을 엿볼 수 잇섯다 한다. 이로서 산에서 산으로 약탈행각에 골몰하면서도 정신적으로 여유를 가젓다는 것은 주목할 현상이다.
——(계속)——
(사진은 농사동 망루와 보초병)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 1939년 6월 23일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후방교란(後方攪亂)을 몽상(夢想) / 수수께끼가튼 김일성(金日成)의 정체(正體) 1939.06.23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후방교란(後方攪亂)을 몽상(夢想)
수수께끼가튼 김일성(金日成)의 정체(正體)

비적이라 하면 누구나 마적(馬賊)을 연상하게 되지만 오늘의 만주국 특히 조선 대안에서 줄몰하고 잇는 비적이란 시간적으로 보아 매우 내용이 달러저 오늘의 비적은 공산군 즉 공비(共匪)를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잇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공비가 잇고 또는 종래로 뿌리박혀 잇던 민족주의 단체의 영향을 바든 분자가 끼어서 조선출생의 멤버를 구성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적으로 나려오던 분자가 개화(?)하여 시대의 탈을 쓰고 나타난 지나인 혹은 종래의 만주인으로 된 소위 청인부대(淸人部隊)의 두 가지 게통으로 나누어 잇스나 편성방법이나 훈련방식이 통일되어 공비로 나타난 오늘에 일으러서는 중공(中共)의 한 지대(支隊)라고도 볼 수 잇고 또는 소연(蘇聯)과 일맥상통한는 존재나 아닌가도 보이고 잇서 이러한 각도로 보는한 비적의 치안공작에 미치는 영향이란 경솔하게 보아치울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비적들 자신에 그 이름을 뭇는다면 그들은 말하기를 동북항일인민××군(東北抗日人民××軍)이요 그중 김일성 일파는 제육사에 소속되고 김일성 자신이 제육사장(第六師長)이란 직함을 가지고 잇다.
『그러면』 김일성이란 대개 어떠한 인물인가?
그는 본적을 함남 갑산군(甲山郡)에 두엇다 하는 말도 잇스나 평남 출생이란 말이 더 근사하다고 한다. 금년 서른 한 살 전후의 청년으로 일찌기 소연(蘇聯)에 가 『막사과(莫斯科)』[5] 공산대학에 배운 일이 잇다하나 그 진부는 가려낼 방도가 아즉 업다. 그리고 그 성과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는 말도 미들만한 자료가 업다. 다만 그가 오늘과가치 비단의 수령으로 투신하게 된 동기가 그 아버지가 일찌기 기미년(1919년)에 간도에서 총알에 마저 너머진데 잇다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보고 잇다.
제육사장이라는 요직에 잇는 김일성은 누구의 명령에 움지기며 그가 호령하는 부대는 얼마나 되는가?
일설에 의하면 그는 양정우(楊靖宇)란 중국인의 지휘를 밧고 잇다하니 양정우란 동북총지휘(東北總指揮)나 아닌가 추측하고 잇다. 이래 김일성의 부하와 우군(友軍) 관게를 살펴보면 최현(崔賢) 일파와 오백용(吳白龍) 일파가 확실한 그의 부하임을 알 수 잇는 외에 나서지 안흔 부대와의 관게를 명백하게 알 방법은 업스나 지금에 간도성(間島省)을 중심으로한 동만일대에 출몰하는 비단으로 알려진 자를 드러보면 다음과 가튼데 적어도 김일성 부대와 즉접간접으로 연락이 잇지나 안흔가 보이는 정도로 그 이상은 상세치 못하다.
『전만주』를 통하여 토질이 제일 비옥하다는 평을 밧는 경백호(鏡泊湖) 가까히 잇는 비단으로 구점부대(九占部隊)와 안상길 비단(安尙吉 匪團), 주보중 비단(周保中 匪團), 진한장 비단(陳翰章 匪團) 등이 준동하고 잇는데 이들의 총세력은 약 육백명 내지 팔백명으로 취찰되고 잇다. 또 돈화현(敦化縣)과 연길현(延吉縣)의 경게선 근방을 근거로하는 양정우 별동부대(楊靖宇 別動部隊)와 왕련장 부대(汪連長 部隊)가 잇서 그 병력은 약 이백 내지 삼백명이 잇고 안도현(安圖縣)과 무송현(撫松縣) 사이에 끼인 일대에는 양정우 부대와 마덕전 부대(馬德全 部隊), 이사령 비단(李司令 匪團), 만순 비단((萬順 匪團), 안악정(安岳亭) 비단, 서장승 비단(徐長勝 匪團) 등이 약 팔백명 내지 천명이 잇고 화전현(樺甸縣)과 안도현 사이에 끼워 준동하는 최현 비단(崔賢匪團) 약 사오백 명이 잇는 외에 왕청현(汪淸縣)에서 작난을 잘 부리고 잇는 오개기 비단(吳開起 匪團)이 잇고
『그박게』도 소속불명의 비단이 다수히 잇는데 이들을 제외하고 나타난 것만을 합처도 이천 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산재한 비적들은 공비, 토비, 마적의 후예 등으로 간단히 중국공산당의 지령이나 "소련"의 후원과 지지아래 움지긴다고만 단정하기에는 어려운 점도 업지 안흐니 이리되면 일종 기괴한 존재라할 수박게(수밖에) 업다. 다만 그들은 만주국의 후방교란을 책동하는 항일반만 운동에 이용되고 잇는 것만은 숨길 수 업는 사실이라 하겟다.
—(계속)—
(사진은 원사동에 도착한 일행과 경비대)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 1939년 6월 24일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비단(匪團)의 전술변천(戰術變遷) : 잔인(殘忍)"에서 "선전(宣傳)"에로 1939.06.25 조선일보 7면 (텍스트)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⑤❺

비단(匪團)의 전술변천(戰術變遷) : 잔인(殘忍)"에서 "선전(宣傳)"에로
국경선(國境線)에 남은 유일(唯ㅡ)한 치안(治安)의 암(癌)

토벌를 가르켜 무기수송대(武器輸送隊)라고 호어하는 김일성 비단의 장비(裝備)는 어느 정도로 되어 잇는가?
김일성과 오백룡에게 즉속한 부대는 이백륙십 명이라는 설과 육백 명이라는 설의 두 개가 잇는데 그 부대에 잇는 무기는 경기관총(輕機關銃)이 열일곱 개 중기관총(重機關銃) 한 개 소총은 한 사람 아페(앞에) 한 자루, 권총(拳銃)은 세 사람에 두 자루의 비례는 되어 우선 무기가 양적으로 매우 늘엇스며 탄약(彈藥) 쓰는 품이 몹시 풍족해진 것뿐외라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경기관총이 유명한 『췌코』 제품인 것 탄약이 소련 제품인 것 등으로 보아 무기공급의 후방관게 여부가 한층 더 궁금해진다.
복색은 지휘자와 하사졸의 구별이 업시 전부가 다 국방색의 제복으로 통일되엇고 여자에 한해서는 국방색의 상의(上衣)에 검정색의 치마를 두르고 활동에 편리하도록 되어 잇다 한다.
그들은 모두가 젊은 청년층으로서 열칠팔 세로 부터 삼십 세 전후이고 끼여잇는 여자들도 이십 세 전후의 독신들이라는데 부대 내부에서의 남녀관게는 상당히 엄격하게 구별되고 잇다하므로 대체로 군사훈련이 종래보다는 매우 진보된 것만 사실이다
x x
일상생활은 어떠케 하는가?—여기에 대답할만한 자료는 구비하지 안헛스나 요사이 대안에 붓잡혀 갓다가 돌아온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식사는 일정한 양식이 업기 때문에 좁쌀이 생기면 좁쌀만으로 보리가 생기면 보리만으로 혹은 석거서(섞어서) 닥치는대로 밥을 지어먹는데 보통 때는 안날 밤에 밥을 지엇다가 그 다음날 아침 다섯시나 여섯시까지에는 조반을 마치고 밀림속의 행군을 시작한다. 그리고 점심은 반드시 먹도록은 되어잇지 안흐나 요지음은 약탈한 식량품이 풍성풍성한 탓인지 도야지도잡고 닭도 죽여 군색한 일이 적다한다.
일당은 어떠한 장마라도 견딜수 잇도록 광목(廣木)에 초를 먹인 우장을 제가끔 가지고 잇고 잠자리는 천막(天幕)인데 한 개는 사오십 명을 수용할만한 큰 것을 가초아(갖추어) 잇다.
저녁이 되면 천막의 출입처에 보초(步哨)를 세워 감시를 엄중히 하고 잇다는데 밤에 불비츨(불빛을) 보여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금단이 잇는데 오직 한 가지 이 부대와 저 부대가 서로 연락을 취할 때는 소위 광통신(光通信)이라 하여 불ㅅ길로 신호를 하는데 한하여 사용되고 잇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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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트로 김일성 비단의 전략전술(戰略戰術)은 어떠한가?——
궁지에 빠저잇는 관게로 종래에 비기면 몹시 공세(攻勢)가 적극적인 점이 잇고 전투는 역시 『게리라』전법 외에 쓰는게 업다 한다.
금년에 출몰하는 비단에 또 한 가지 특색을 찻는다면 선전(宣傳)이 몹시 늘엇다는 것인데 붓드러간 자에게 대해서는 젊은 사람에게는 공산주의 선전하고 중년 이상되는 사람에게는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세계정세를 역리용하여 말하기를
일독이 방공협정(日獨伊 防共協定)으로부터 영미불소 동맹(英米佛蘇 同盟)에 이르기까지 산중에서 현대사회와 절연된 그들로서는 분외의 지식을 역용하는데는 놀라지 안흘 수 업다.
한편 등사판에 벡힌 선전삐라도 여러 종류가 산포되엇다는데 특히 그들 사이에서는 비밀을 외부에 탈로(탄로)시키지 안흐려는 술책인지는 모르나 조선인이 육할 이상이면서도 상용어를 전부 만주어로 하고 잇서 외양으로는 조선인과 만주인의 구별을 하기 어렵게 되엇다 한다. 그리고 전투에는 산악전(山岳戰)이 장기라 하여 요사이에 와서는 특히 조선측 부락에 대하여서는 주민들의 환심을 사기에 몹시 노력을 하고 잇다는데 종래처럼 남자에 대한 잔인한 행동이 적어젓고 또 습격부락에 들어가 약탈을 하되 부녀자에 해를 끼치지 안는다는 점 또 빈민에게는 후하고 부유게급에 탄압을 가한다는 점 등은 현저히 색채가 달러진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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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령봉의 뜰아페(뜰앞에) 벌려진 원시림의 수해(樹海) 그 속에서 기거하면서 천연적으로 된 약초원(藥草園)이요 고산식물원(高山植物園)인 대자연을 당돌하게도 짓밟고 잇는 그들은 선만일여가 착착 구현(具現)해가고 잇는 오늘 더욱 압록강과 두만강(豆滿江)에서 국경은 흑룡강(黑龍江)으로 이동한 오늘에 남아잇는 유일한 치안의 암(癌)으로서 통정 함북경찰부장(筒井 咸北警察部長)[8]의 말과가치
대소제일선도(對蘇第一線道)로서의 함경북도의 중요성에 비취어 치안유의 확보가 긴요할 뿐외라 무한정하고 건설되고 발전되이야 할 산업도(產業道)로서의 특색을 유지시키기 위하여선 우선 이 비단에 대한 최후의 손을 대지 안흐면 안된다
는 느낌을 엇는 동시에 아직도 두만강에 국경경비대가 필요한 소치를 재인식하게 된다
일행은 누구나 다 국경경비대의 건투를 빌엇고 겸하여 우리에게 만흔 편의를 보아준 통정 부장[8] 이하 다수 경찰관의 호의에 기피(깊이) 감격하면서 여행목적을 다 마치엇다.
——끗 ——
(사진은 백두산록의 밀림지대)
함북특파원 오쾌일(咸北特派員 吳快一)

경성일보의 토비전선종주(討匪戰線縱走)

아래는 당시 조선일보 오쾌일 기자와 동행했던 경성일보 기자가 쓴 연재기사이다.

80년 후 정반대로 된 국경 경비 초소의 용도

압록강, 두만강 일대 북한 국경의 경비 초소는 1930년대에는 동북항일연군김일성 부대 등 만주 지역 각종 무장단들의 조선 국경 침입을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한 용도였다.

1930년대말 항일투쟁을 빙자해 국경 근처로 침입하여 양민들을 상대로 노략질이나 일삼던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말 소련으로 도주한다. 해방 후 소련군 등에 업혀 평양에 온 김일성은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 무력의 일방적 도움으로 일약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80년이 지난 오늘날 국경에는 훨씬 더 많은 초소가 세워졌고, 감시도 훨씬 더 삼엄해졌지만, 용도는 북한 주민들을 인질로 잡아 노예로 부리는 바로 그 김일성 일족이 주민들의 탈북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다.

만주로부터 침입해온 김일성 일당의 노략질을 막아주던 일본 군경이 물러가자, 그 패거리들이 소련군의 도움으로 북한 전역을 장악해 전인민을 인질로 잡아 가두어 놓고 80년 가까이 노예로 부리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사이비 학자들이 영웅적(?)이라 찬양해 마지않는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무산지구전투 승리 기념탑

김일성이 자랑하는 무산지구전투라는 게 어떤 것인지는 위에서 본대로이다. 이들의 침입 목적은 일본 군경과 전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산악지역에 사는 가난한 양민들을 약탈, 납치하는 것이며, 때로는 죽이기도 하는데, 일본 경찰들이 오히려 이들과 전투를 벌이며 양민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짓들이 도대체 조선독립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북한은 김일성의 엄청난 항일투쟁 성과라며 미화 포장하여 북한 주민들을 세뇌교육하는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 '무산지구전투 승리' 80주년 기념우표 발행 연합뉴스 2019.5.24
량강도 대홍단군 혁명전적지에 2002년 5월 23일 세운 '무산지구전투 승리 기념탑'[42][43] 무산지구전투는 1939년 5월 22~23일 당시 함경북도 무산군지역에서 김일성(金日成)의 지휘아래 '조선인민혁명군(?)'이 벌였다는 항일전투이다.

참고 자료

아래는 위와 같은 지역의 국경경비 경찰대 위문반을 수행한 기자가 쓴 1940년 1 ~ 2월과 6월 매일신보에 연재된 기사이다. 당시도 김일성 부대는 무산군 삼장면 일대와 만주 쪽 화룡현(和龍縣) 일대에서 양민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항일투쟁이 아닌 양민 약탈이 본업이고, 그 과정에서 출동한 경찰이나 자위단과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는 1940년 2월 23일 전사하고, 제1방면군장 조아범(曹亞範)은 4월 8일 부대내의 내분으로 피살당한다. 당시 북한 김일성은 제2방면군장이다.

국경경찰관 위문반(國境警察官 慰問班) 수행기(隨行記) : 1940년 1 ~ 2월

국경경비대 위문행(國境警備隊 慰問行) 1940년 6월

남은건 沒落一路 國境警備에서 쫓겨 東西로 分散 最後蠢動의 匪賊들 매일신보[每日新報] 1940년 06월 15일

『白雪皚々の國境慰問行』 : 1939년 3월

『白雪皚々の國境慰問行』은 1939년 3월 조선신문(朝鮮新聞)에 9회에 걸쳐 연재된 국경경비진 위문 기사이다. 이때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대가 장백현에 있을 때로, 1938년말부터 1939년 초까지 김일성 부대의 활동에 대해 2회, 3회, 6회에 약간 언급이 있고, 9회에 다수의 약탈 및 교전 기록이 있다. 아쉽게도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지만, 당시의 김일성은 6사장 아닌 제2방면군장이며, 북한 김일성이 맞다.

무산군 삼장면 주변지역 지도

조선 말에 있던 무산군의 3개면 삼상면(三上面), 삼하면(三下面), 장파면(長坡面)을 1914년 통합하여 삼장면(三長面)으로 하였다. 장파면(長坡面)이 가장 서쪽 백두산에 접해 있던 지역이다.
장파지도(長坡地圖) : 정조 9년(1785년) 奎12160 (규장각 소장)
백두산 천지는 대택(大澤)으로 적혀있고, 농사동(農事洞)도 나옴.
대홍단(大紅湍)에서 내려오는 지류가 홍단수, 소홍단(小紅湍)을 지나는 지류가 장파수(長坡水)로 나옴.
노은동산(蘆隱東山)이 대로은산(大蘆隱山), 남증산(南甑山)이 증산(甑山)으로 변한 것 같음.
박선영, 이기봉, 디지털 연구환경 변화에 따른 고문헌 재해제 필요성에 관한 연구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북관장파지도」와 「화도진도」를 사례로 -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28 February 2021. 81-94
조선왕조실록 > 정조 9년 을사(1785) 7월 14일(신유) 양력 1785-08-18 : 09-07-14[03] 비변사가 장진에 읍을 설치하는 일 등에 대해 장계하다
북도 병마절도사 민의혁(閔義爀)이 장계와 함께 올려보낸 지도임.
백두산 천지는 대택(大澤). 노은산(蘆隱山), 증산(甑山)이 보이고, 홍단수 하구에 나오는 국사당(國師堂)이 천왕당으로 바뀐 것으로 보임.
和龙(吉林省县级市) 百度百科

함께 보기

각주

  1. Hongqi River (红旗河) : 延边朝鲜族自治州和龙市 구글지도
  2. 2.0 2.1 농사동(農事洞) - 북한지역정보넷
  3. 3.0 3.1 농사동에서 두만강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 지점. 좌표 [128.7552, 42.0439]
  4. 대로은산(大老隱山) 북한지역정보넷
  5. 5.0 5.1 막사과(莫斯科) : 모스크바
  6. 金华乡(吉林省 白山市 长白朝鲜族自治县) 구글지도
  7. 金华乡 (吉林省白山市长白朝鲜族自治县下辖乡) baidu
  8. 8.0 8.1 8.2 8.3 1939년 당시 咸鏡北道 警察部 部長 쓰쓰이 다케오(筒井竹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筒井 竹雄(つつい たけお、1902-1968) フリー百科事典
  9. 좌표 [128.8181, 41.9063], 삼장면(三長面) 아닌 삼사면(三社面)에 속함.
  10. 金日成一派(김일성일파) 三長面(삼장면)에 侵入(침입) 食糧(식량)을 强奪(강탈)코 逃走(도주) 1940.05.18 동아일보 2면
  11. 白頭山麓密林地帶(백두산록밀림지대)서 金日成匪團主力(김일성비단주력)과 討伐隊激戰演出(토벌대격전연출) 1939.05.20 조선일보 2면
  12. 白頭山麓對岸(백두산록대안)에서 二百餘匪賊(이백여비적)과激戰(격전) 1939.05.22 동아일보 2면
  13. 三百餘金日成匪團(삼백여김일성비단)과 咸北警官隊(함북경관대)와激戰(격전) 應援隊急派包圍陣(응원대급파포위진) 1939.05.24 동아일보 2면
  14. 金日成派繼續襲來(김일성파계속습래) 住民十數名拉致(주민십수명납치) 1939.05.30 동아일보 2면
  15. 농사동에서 두만강 상류쪽으로 홍암동을 지나 상당히 더 거슬러 올라가 중국 쪽에 있다. 좌표 [128.5606, 42.0232]
  16. 두만강이 홍기하와 만나는 지점에서 두만강 상류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하사동(下四洞), 상사동(上四洞)이 있음.
  17. 두만강이 소홍단수와 만나는 지점에서 두만강을 따라 약간 서편에 하일동(下一同), 상일동(上一同)이 있음.
  18. 두만강이 홍기하와 만나는 지점에서 하류쪽으로 삼장면 사무소가 있는 삼상동(三上洞)이 있고, 좀 더 하류 쪽으로 가면 중국 쪽에 소옥석동 (小玉石洞)이 있다.
  19. 1939년 당시 咸鏡北道 警察部 警務課 警部 카타야마 이노시로(片山猪四郞)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 경성일보(京城日報) 빈전(濱田) 기자 : 京日 함북지국장 濱田正雄
  21. 매일신보(每日新報) 김(金)기자
  22. 북선일보(北鮮日報, 함북 청진에서 간행되던 일본어 신문) 고교(高橋) 기자
  23. 23.0 23.1 식민지 시기 일본인 발행 신문 해제 (일부 한국인 발행 신문 포함)
  24.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 함북 나남에서 간행되던 일본어 신문) 사지(士至) 기자
  25. 오기자(吳記者)는 오쾌일(吳快一) 기자 본인임.
  26. 무산군 삼장면(三長面) 사무소와 경찰서가 있는 삼상동(三上洞)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두만강이 홍기하와 만나는 지점에서 조금 하류쪽에 있다. 두만강이 서두수(西頭水)와 만나는 지점.
  27. 마코(Macaw)는 일제시대에 팔리던 싸구려 담배. 담배- 마코, 피죤, 해태표, 단풍, 장수연 - (블로그) 34년 경성에서
  28. 28.0 28.1 소홍단수가 두만강과 합수하는 지점에서 도로를 따라 서편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나온다. 좌표 [128.8866, 42.0203]
  29. 29.0 29.1 天王堂(천왕당) 暫間(잠간)들러 一路無事(일로무사)를 祈願(기원) ➑ 1936.08.30 조선일보 1면
  30. 30.0 30.1 聖山白頭(성산백두)를 찾어 (9) 1935.08.21 동아일보 2면
  31. 白頭山を征く(10) 再び農事洞へ 安東新報 1935년 08월 23일
  32. 白頭山登陟記(백두산등척기) ——(27)—— 白頭正幹(백두정간)의 虛項嶺(허항령) 1930.09.08 조선일보 3면
  33. 白頭山寫眞畵報(백두산사진화보) 【其二(기이)】 虛項嶺天王堂(허항령천왕당) 1926.09.22 동아일보 4면
  34. '몬메'(匁)'는 일본 고유의 중량 단위로 한국어로 1돈(匁)=3.75g 에 해당한다. : 돈(단위) (r25 판) 나무위키
  35.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① 경비진 고심천만(警備陣苦心千萬) / 밀림지대(密林地帶)에 비적출몰(匪賊出沒)이 두통(頭痛) 1939.06.20 조선일보 7면
  36. 國境警察官 慰問班隨行記④ - 千里無邊의 大樹海에 ˝總角警備隊˝는 活躍 - 有名한 國境洪吉童의 武勇談 매일신보[每日新報] 1940년 02월 03일
  37. 國境警備隊慰問行②-獨身部隊意氣軒昻 祖國守護에 鬪志滿滿 매일신보[每日新報] 1940년 06월 16일
  38. “북, 국경 일대 철조망에 전기 투입 지시” 자유아시아방송 (RFA) 2021.12.31
  39. 日언론 "북중 국경에 고압 전류…탈북·밀수 거의 불가능" 연합뉴스 2021.07.12
  40. 북, ‘국경 경비 초소’ 확장…탈북자 가족 감시 강화 KBS 2014.08.09
  41. 6차 핵실험 이후...북한 국경 경비초소는 지금 국민일보 2017-09-04
  42. 北, 무산전투기념탑 새로 건립 nk.chosun 2002.05.23
  43. 무산지구전투 승리 기념탑 통일부 북한정보 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