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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만주 침공
최근 수정 : 2019년 8월 1일 (목) 07:14

1945년 5월 대독일전이 끝나고 유럽 전선이 정리되자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병력과 장비를 비밀리에 극동지역으로 이동한다. 8월 초 3명의 원수를 극동으로 투입하고, 종래의 극동군을 대폭 개편하여 하보로프스크에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두고, 그 아래에 제1, 제2 극동전선군과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을 두었다.

대일전을 위한 소련 극동군 편제

개전

소련은 1945년 8월 8일 Trans-Baikal 시간(UTC+09)으로 밤 11시에 몰로토프 외상이 Satō Naotake (佐藤 尚武) 주소 일본대사에게 일·소 중립조약의 파기와 전쟁을 통보하고, 그로부터 61분 후인 8월 9일 0시 1분에 Trans-Baikal 전선에서부터 만주침공을 단행하였다. 이 작전의 정식 명칭은 만주 전략공세작전 (Манчжур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lit. Manchzhurskaya Strategicheskaya Nastupatelnaya Operatsiya, Manchurian Strategic Offensive Operation)이었다. 일각에서는 8월의 폭풍 작전(Operation August Storm)이라고도 하나, 이런 명칭은 역사학자 David Glantz가 1983년에 쓴 논문의 제목에 처음 들어간 것으로 당시에 실제로 쓰였던 명칭은 아니다.[7][8][9]


참고 도서 : 8월의 폭풍 (1945년 8월 9-16일, 소련의 만주전역 전략 공세 ) 이하 발췌

            “소련 측의 추산에 따르면 1945년 8월에 관동군(한반도 주둔군 포함)의 전력은 3개 방면군과 1개 독립야전군, 1개 항공군, 쑹화 해군 전단 등에 소속된 31개 보병사단, 9개 보병여단, 2개 전차여단, 1개 특수목적여단이었다. 소련군은 이 부대들이 전차 1,155대, 야포 5,360문, 항공기 1,800대를 보유했다고 단언했다. 여기에 더해 8개 보병사단, 7개 기병사단, 도합 14개 보병여단과 기병여단을 보유한 만주국군도 있었다.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에는 제5방면군 소속의 3개 보병사단과 1개 보병여단이 배치되었다. 전체 전력은 120만 명이었다.” 
             “만주 전역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모든 방면에서, 모든 단위부대에 걸쳐 큰 위험을 감수하며 대담한 작전을 실시하고, 자유롭게 계획을 수행했다. 소련군이 작전 초기에 실증했던 엄청난 유연성은 작전 전구의 특정한 요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소련군 지휘관들의 전반적 지휘력 상승과도 연관되어 있다. 전쟁은 새로운 세대의 야전군, 군단, 사단, 여단, 연대지휘관을 잉태했으며, 그들의 전문성은 최대 4년에 걸친 전투의 산물이었다. 이 세대의 지휘관들은 만주 전역이 기나긴 전쟁의 마지막 단계임을 깨달았고, 따라서 전역을 단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종결지으려 했다. 평화를 되찾으려는 의지는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소련군은 외과수술처럼 정밀하게 전투를 수행했고, 11일에 걸친 싸움 끝에 치열한 전쟁을 종결지었다."
              “소련군은 전술적으로도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방법을 사용했다. 소련군은 강력한 공병 및 화력 지원을 받는, 임무지향적인 소규모 돌격집단을 사용했으며, 이는 보병의 인해전술 돌격과 같은 소련군에 대한 보편적 인상과는 거리가 먼 방식이다. 이런 돌격집단들은 인해전술보다 훨씬 방어하기 어려움을 입증했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인력 소모보다 기계화와 화력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일본군은 아마 소련이 1939, 1941, 1942년에 빈번히 사용한 인해전술에 대한 외국 자료(아마 독일과 핀란드에서 얻었을 듯하다)에 주목했을 것이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인력 의존을 감소시키고 소련군 지휘관들이 화력 운용과 전차 및 돌격포의 기동 전술을 발전시켰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일본군은 소련군이 사용하지 않게 된 전쟁 초기의 전술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소련 제25군의 북한 점령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만주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작전은 3가지의 하위 작전으로 구성됐는데, 그중 하나가 한반도를 포함한 하얼빈·지린성 공세작전이었다. 북한 해방 작전 수행을 위해 소련 육·해군 연합부대가 결성되었다. 메레츠코프 원수가 지휘하는 제1극동전선군 휘하 제25군의 남측부대와 유마셰프 제독 휘하 태평양 함대의 해병부대다.

소련군의 한반도 전투는 만주전략공세작전 개시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9일, 공군은 함경북도 웅기읍의 일본군 시설에 대한 공습을 실시하였고 육군 부대들은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 지역 주둔 일본군은 소련군 급습에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8월 9일 밤 소련군 부대들이 경흥군을 해방시켰다.

소련 공군은 일본군 시설에 대한 공습을 지속해 많은 일본 군함과 수송선을 침몰시킴으로써 해병부대의 작전을 가능케 하였다. 메레츠코프는 8월 11일 유마셰프에게 상륙부대를 결성해서 북한 해안 지역을 해방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해군대대와 정찰부대가 웅기에 상륙하여 전투 없이 해방한 후 마침 도착한 육군부대와 합류하여 나진시에 돌격했다. 청진에서는 항구 방어선을 회복하려는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소련 선봉부대는 해병여단이 도착한 15일까지 항구를 고수했다.

15일 정오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포한 ‘옥음방송’이 울렸지만 포성이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 관동군 사령부는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살벌한 청진 전투는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는 육군사단이 전투에 들어간 16일까지 지속되었다. 청진 상륙작전의 성공과 만주에서의 소련군 승리의 소식을 들은 관동군 사령부는 지속적인 저항의 무의미함을 인정하고 19일 드디어 무기를 내려놓았다.

만주전략공세작전 중에 소련군은 3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그중 약 60%가 만주남부와 한반도를 해방시킨 제1극동전선군이었다. 육군부대들도 2000여명, 해군부대들은 1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외부 링크

Soviet invasion of Manchuria Wikipedia
Soviet occupation of Manchuria Wikipedia
Manchu Operation (1945) ru.wikipedia 구글 영어번역
ソ連対日宣戦布告 ja.wikipedia

함께 보기

각주

  1. Aleksandr Vasilevsky (1895–1977) Wikipedia
  2. Kirill Meretskov (1897-1968) Wikipedia
  3. Shtykov, Terentii Fomich (1907-1964)
  4. 2nd Far Eastern Front Wikipedia
  5. Maksim Purkayev (1894-1953) Wikipedia
  6. Transbaikal Front Wikipedia
  7. Soviet invasion of Manchuria Wikipedia
  8. LTC David M. Glantz, "August Storm: The Soviet 1945 Strategic Offensive in Manchuria". Leavenworth Papers No. 7, Combat Studies Institute, February 1983, Fort Leavenworth, Kansas.
  9. David M. Glantz, August storm: The Soviet 1945 strategic offensive in Manchuria Paperback – University of Michigan Library (January 1,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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