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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동진공화국 조각명단(東震共和國 組閣名單)은 해방 당시 유포된 수많은 유언비어 중 하나이다. 해방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부터 동진공화국이 수립되며, 대통령 누구, 주요 각료는 누구라는 출처불명의 벽보와 비라가 전국 도처에 나돌았다. 명단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일성(金日成) 등 4인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군 88여단에 있던 진지첸 대위(북한 김일성)의 존재가 국내에 아직 알려지기도 전에 그와는 다른 김일성이 해방 정국의 유력 인물로 거론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김일성 가짜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자료이다.

전국적으로 나돈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은 미군정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으므로 미군보다 먼저 한반도에 진입한 소련군이 이를 몰랐을 리가 없다. 여기의 김일성이 어떤 사람인지 실체가 불분명한 이름인 것을 알고 소련군은 자신들이 5년간 훈련시켜 데려와 북한의 지도자로 내세우려는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김일성) 대위가 국내에서는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고 지지세력도 전무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유명한 그 이름의 주인공 행세를 하도록 했다. 이때문에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부터 가짜 김일성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개요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의 동진(東震)은 동쪽 진방(震方)[1]의 나라 즉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일성 등 4인을 포함한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은 해방 이튿날부터 벽보와 비라 형태로 전국 각지에 나돌았지만, 실물이나 사진은 현재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안은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과 6.25 남침전쟁을 겪으면서 잊혀졌는데, 일본 패전 후 1946년 3월말까지 서울에 남아 일본인들의 본국 귀환 업무를 도운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가 1964년에 간행한 『조선 종전의 기록(朝鮮終戰の記錄)』[2]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유언비어에 불과한데다 후대의 기록이라 김일성 진위 문제와 관련해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근래의 문헌 전산화 덕에 해방 직후 북한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대중앞에 처음 출현하기 이전에 이를 기록한 문헌들이 몇 건 발굴되었다. 이는 북한에 김일성을 자칭하는 인물이 등장하기 전부터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이 각료로 거론될 정도로 유명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 김일성은 이승만(1875~1965), 김구(1876~1949), 여운형(1886~1947) 정도로 일찍부터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라야 하며, 연배도 그들과 비슷한 정도는 되어야 한다. 당시 국내 사람들이 그 존재를 전혀 모르던 소련군 88여단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북한 김일성) 대위가 아니라, 바로 1920년경부터 이름이 유명했으나 실제 누구인지는 불분명한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으로 볼 수 있다.

동진공화국 각료명단에는 북한 김일성(1912~1994)보다 훨씬 더 나이도 많고 항일투쟁 경력도 길며 지명도도 높은 김규식(1881~1950), 조만식(1883~1950), 김두봉(金枓奉, 1889 ~ 1961 ?), 김원봉(1898~1958), 박헌영(1900~1956)이나 김무정(1904~1951) 같은 사람들조차 거론되지 않으므로 여기의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될 수는 없다. 북한 김일성이 해방 후 평양에 처음왔을 때 그의 인지도는 조만식과는 감히 비교 대상이 되지도 못했고, 대부분 사람들이 그가 어디서 뭘 하다온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다.[3] 해방 당시 33세에 불과한 그가 1920년경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이 자명하므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10월 14일 대중앞에 처음 나서던 그날부터 가짜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소련 군함을 얻어타고 비밀리에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김일성) 대위는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불과했고,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으로 비밀리에 민심을 살피며 다니다 사람들이 김일성 장군을 주요 각료로 거론하며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같은 이름을 사용하여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한 것이다. 어릴 때 만주로 가서 거기서 성장하고 이후 동북항일연군소련군에 있었던 북한 김일성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어린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고향마을 사람들 몇몇 외에는 국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진공화국 수립에 관한 벽보와 비라는 해방 이튿날부터 전국 각지에 나돌았고, 심지어 만주에서도 방송에 나왔다는 증언까지 있다.[4][5][6] 짧은 기간에 이런 유언비어를 전국에 배포할만한 배후조직이 당시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조선총독부가 한 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지만[7] 명백한 근거는 없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일본 항복 선언 후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하고 있었는데, 이런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조선인들을 진정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지는 미지수이다. 조선총독부는 일본항복 후에도 미군이 서울에 진주해올 때까지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동진공화국 벽보와 비라는 전국에 동시 다발적으로 뿌려졌음에도 실물이 현재 전하는 것은 없는 것같고, 그 내용을 기록한 문헌만 남아 있다. 동진공화국 각료명단을 기록한 문헌들은 북한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증거이며, 현재까지 발굴된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기록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의 동진을 東振 또는 東辰으로 쓴 기록도 있다.

북한에 김일성이라 자칭하는 자가 등장하기 전인 1945년 10월 14일 이전 기록이 특히 중요하다. 북한 김일성이 등장하기 전에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한 신문 기사도 몇 건 있는데[8][9][10], 거의 전설화된 인물이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정관해(鄭觀海)의 《관란재 일기(觀瀾齋日記)》

정관해(鄭觀海, 1873~1949)는 경기도 용인에 거주했던 유학자로 그가 쓴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11]에는 동진공화국 조각명단과 함께 김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12][13]

1945년 8월 17일 (음력 7월 10일) :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고, 국호는 동진(東振)공화국이며 연호는 영세(永世)라 한다. 대통령은 안모 (안모는 전일의 안중근의 아들)이고, 내무대신은 여운형, 외무대신은 김일성(金日成)이라고 한다. [朝鮮爲獨立國, 國號東振共和國 年號永世, 大統領 安某, 安某 卽前日安重根之子, 內大 呂運亨, 外大 金日成云]"

1945년 8월 24일 (음력 7월 17일) : "신문을 얻어서 보니 쇼와(昭和) 천황이 4개국에 항복을 청한 것이 명확하다. 국호, 연호, 대통령, 내무 외무 대신의 설은 믿기 어렵다. [得新聞見之, 則昭和, 請降於四箇國明確, 若其國號, 年號, 統領, 內大外大之說, 皆不足信也.]"

1945년 8월 26일 (음력 7월 19일) : "김일성군(金日成軍)은 말타고 하루 500리를 달릴 수 있으며, 그 정예하기가 비할데 없다고 한다. [金日成軍, 一日能驅五百里, 其精銳無比云]"

김일성 군대는 말타고 천리마에 준하는 속도인 하루 5백리를 달릴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김일성은 거의 전설화된 인물이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이나 소련군 시절 말타고 다니거나 기병부대를 거느린 적이 없다.

《최병채 일기(崔炳彩日記)》

전라북도 진산군(珍山郡, 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거주했던 최병채(崔炳彩, 1907~1974)가 쓴 《최병채 일기(崔炳彩日記)》 1945년 8월 18일(음력 7월 11일)자에도 아침 식사 후 지인들과 대전에 나갔다가 들은 바를 적고 있다.[14][15]

1945년 8월 18일 (음력 7월 11일) 토요일 : 七月十一日己未(陽八月十八日、土曜日)
대전시에 나갔다가 들은바로 조선의 독립이 확실하며 나라 명칭은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이고, 연호도 역시 동진(東辰)이라 한다. [往大田市、依見聞、則朝鮮獨立的確、而名稱乃東辰共和國、年號亦東辰也。]
.............
대통령은 김구, 총리대신은 이승만, 외무대신은 여운형, 육군대신은 김일성이다. [大統領 金九、總理大臣 李承晩、外務大臣 呂運亨、陸軍大臣 金日成。]

오윤환(吳潤煥)의 《매곡일기(梅谷日記)》

오윤환(吳潤煥, 1872~1946)의 《매곡일기(梅谷日記)》 1945년 7월 12일 [양력 8월 19일]자의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매곡일기(梅谷日記)》는 강원도 양양(襄陽), 오늘날의 속초시 도문동에 살았던 유학자 오윤환(吳潤煥, 1872.11.16~1946.7.12)이 1891년 2월부터 사망하기 바로 전날인 1946년 7월 11일까지 쓴 약 56년 간의 일기이다.

[p.1403 번역문] (1945년 7월) 12일 [양력 8월 19일] 맑음, 정자에 나갔고, 재룡(在龍)이 갔다. 서울에서 온 사람이 광고서(廣告書)를 보여주었는데,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대통령(大統領) 김구(金九) · 총리대신(總理大臣) · 이승만(李承晩) · 내무대신(內務大臣) 여운형(呂運亨) · 육군대신(陸軍大臣) 김일성(金日成) · 외무대신(外務大臣) 안재홍(安在鴻)이었다. 가아(家兒, 아들), 중원(仲元), 흥실(興實)과 함께 정자에서 잤다.

[p.1405, p.1777 원문] : 十二日 陽 出亭 在龍去。 自京來人 示以廣告書 東震共和國 大統領金玖(九) 總理大臣李承萬(晩) 內務大臣呂運亨 陸軍大臣金日成 外務大臣安在鴻。 宿亭家兒同仲元興實。
원문에는 김구와 이승만의 이름 한자를 金玖, 李承萬으로 잘못 표기했다.)

유영희(柳泳熙)의 일기 《성성록 (惺惺錄)》

유영희(柳泳熙, 1890~1960)는 경북 안동에 살았던 선비이다.[16]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일기를 썼는데 《성성록 (惺惺錄)》은 1943년~1948년간의 일기를 묶어놓은 것이다. 그중 「주일명(主一銘)」은 을유년(1945년)의 일기인데, 해방 직후의 동진공화국 풍문을 기록하고 있다.

유영희(柳泳熙 ; 1890~1960)의 일기 《성성록 (惺惺錄)》의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 탄생(誕生)을 1면 톱기사로 보도한 동진 원년(東辰 元年, 1945년) 8월 17일자 《중선일보(中鮮日報)》[17].
《성성록 (惺惺錄)》 「주일명(主一銘)」

○(七月)十二日(庚申) : 양력 1945년 08월 19일[18]

맑음. 일찍 출발해 천전(川前) 마을에 갔다.[19] 부(府)[20]에 이르니 부(府)에서 자위조(自衛組)를 만들었고 위원장 이대용(李大用)은 상경했다. 송천리(松川里)에[21] 이르니 점포의 벽에 붙여놓기를 "대망(待望)한 조선독립 만세(朝鮮獨立 萬歲)"라 하고, 새 정부의 네 고위 인물을 늘어 적었는데, "대통령 김구씨 각하, 총리대신 이승만씨 각하, 육군대장 김일성씨 각하, 외무대신 여운형씨 각하"라 했다. 해가 기울 무렵 천상(川上)에 도착했다. ...
暘。早發徃川前。至府。府成自衛組。委員長李大用上京。至松川。店壁上揭待望한朝鮮獨立萬歲。因列書新政府四位曰。大統領金玖氏閣下。緫理大臣 李承晩氏閣下。陸軍大將金日成氏閣下。外務大臣呂運亨氏閣下。昳到川上。診汕黎丈症。歇於前日云。

○(七月)十三日(辛酉) : 양력 1945년 08월 20일[22]

맑음. 더위를 먹어 설사(泄瀉) 때문에 난감하다.[23] 정부의 제위(諸位)는 아직 입성(入城)하지 않았다 한다. 국호를 이미 대동진공화국이라 했으면 대신(大臣)이라 써붙인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같다.
暘。暑泄難堪。政府諸位。尚未入城云。國號。旣云大東震共和。則向揭大臣字。似違軆貌

○(九月)二十三日(庚午) : 양력 1945년 10월 28일[24]

맑음. 이승만씨는 며칠 전 귀국하여 각파의 단합을 꾀하고 있으나, 김일성씨는 20만 군대를 거느리고 서(西)에 주둔하고 있다니 괴이쩍다.
暘。日前李承晩氏入府。將擬團合各派而金日成氏。將二十萬。屯于西云。可怪可怪。

북한 김일성이 10월 14일에 평양의 대중 앞에 나섰지만 유영희는 10월 28일에도 그 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김일성이 20만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는 말 등으로 보아 그는 벽보에 나온 동진공화국 김일성을 북한 김일성이 아닌 1920년경부터 소문으로 떠돌던 전설의 김일성 장군처럼 대단한 인물로 알고 있었던 것같다.

《중선일보(中鮮日報)》 1945년 8월 17일자

《중선일보(中鮮日報)》 1945년 8월 17일자는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 탄생(誕生)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17] 《중선일보(中鮮日報)》는 일제시대에 대전에서 일본어로 간행되던 신문이나[25] 해방 직후에는 우리말 기사와 일본어 기사를 섞어 보도했고, 간행 연도도 일본 연호 아닌 동진 원년(東辰 元年)이라 했다.

천추대망(千秋待望)의 결실(結實)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 탄생(誕生)
세기적 거보(世紀的 巨步) 반도(半島)에 진감(震撼)
........
조각 착착 진행중(組閣 着々 進行中)
금17일 조각완료 예정(今十七日 組閣完了 豫定)

........

조각 명단은 나오지 않는다.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안재홍(安在鴻)여운형(呂運亨)이 조각 작업중이며 17일에 발표 예정이라고 하였다.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이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정한 국호인 것으로 잘못 안 듯하다. 중선일보는 8월 15일 당일에도 해방이 되었다는 지면을 간행했다고 한다.[26]

《주한미군사》

미군정청 사람들도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이 든 비라 하나를 얻어 보고 《주한미군사(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원문 번역
Congratulations on the Independence of Chosen:

The Dawn of Democracy in the East
President -- Kim, Koo
Premier -- Rhee, Syng Man
Foreign Minister -- Lyuh, Woon Hyung
War Minister -- Kim, II Sawng
Chief of Staff -- Hwang, Wun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며:

동방 민주주의의 새벽
대통령 - 김구(金九)
수상 - 이승만(李承晩)
외무장관 - 여운형(呂運亨)
국방장관 - 김일성(金日成)
총참모장 - 황운(黃雲)

"동방 민주주의의 새벽(The Dawn of Democracy in the East)"이란 말은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을 번역한 말로 보인다. 辰은 보통 "진"으로 읽지만 "새벽 신"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晨(새벽 신)"과 같이 쓰이기도 한다. 황운(黃雲)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1944년 여운형 등과 함께 건국동맹(建國同盟) 설립에 참가한 사람으로 여운형계로 보인다.

미군은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을 박헌영, 여운형 등이 임의로 작성한 조선인민공화국 조각명단과 비교하며, 김구이승만을 명목상 지도자로 내세웠지만 공산당 계열이 작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인민해방보(人民解放報)

부산(釜山)에서 1945년 10월 8일 창간된 좌익지 『인민 해방보(人民解放報)』도 김구, 김일성, 여운형, 이승만 등으로 구성된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의 조각 명단(組閣名單)을 부산에서 처음 보도했다고 한다.[27] (보도 일자는 미상)

해방 이후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의 조각 명단(組閣名單)을 부산에서 처음 보도한 것도 『인민 해방보』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김구, 김일성, 여운형, 이승만 등으로 구성된 동진공화국이 들어선다는 유언비어).

만주에까지 퍼진 동진공화국 루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비라는 국내 뿐만 아니라 만주에까지 퍼졌던 모양이다. 동아일보 1947년 1월 7일자 4면에 실린 만주에서 귀환한 유수생(流水生, 필명)의 수필(隨筆) 《전재민(戰災民) : 만주잔류동포(滿洲殘留同胞)를 생각하며》에는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을 때 들려온 국내 소식으로 다음과 같이 나온다.[28]

우리 정부(政府)의 조각명부(組閣名簿)가 "삐라"에 실려 들어온다. 대통령(大統領)에 이승만박사(李承晚博士), 문교부대신(文敎部大臣)에 김성수씨(金性洙氏), 군부대신(軍部大臣)은 김일성씨 (金日成氏) 등々(等々) 그럴법하게 활자(活字)가 배열(配列)되였다. 누가 대통령(大統領)이거나 누가 무슨 대신(大臣)이거나 알배 아니다. 정부(政府)가 서고 독립(獨立)이 된다니 그저 좋앗다.

만주군 장교 출신으로 해방 직후 만주에서 동진공화국 수립 소식을 방송으로 들었다는 백선엽 장군의 증언과[5], 예비역 준장 이기건(李奇建, 1919~ ?)의 증언도 있다.[6]

『신천지(新天地)』 1948년 8월호

김찬승(金燦承) 외, 《신문기자(新聞記者)가 겪은 8·15 <좌담(座談)>》, 『신천지(新天地)』, 제3권 제7호 (서울신문사, 1948년 8월) pp.74-81

[p.79] 8.15직후의 정치정세(八.一五 直後의 情勢)
.....17일(十七日)부터는 조선인(朝鮮人)의 흥분(興奮)도 좀 꺽기고 18일(十八日)에 이범석장군(李範奭將軍)이 왓다갓다는 것도 쎈프란씨스코 방송(放送)으로 겨우 나중에야 알앗섯습니다. 그런데 그때 서울 거리에는 「박헌영(朴憲永) 동무여! 지하(地下)에서 빨리 나오너라」 하는 삐라가 종로(鐘路)에 붓고 이어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라하고 대통령(大統領)에 이승만(李承晩) 부통령(副統領)에 누구 내각(內閣)에는 누구누구를 써노흔 것이 붓기 시작햇는데 이것이 아마 벽보(壁報)의 시작일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단파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VOA)" 한국어 방송이며, 국내에서는 단파 라디오가 있어야 직접 수신이 가능하나, 1945년 8월 18일부터 국내에 중계가 되었다고 한다. 이범석 장군은 김포공항까지 왔다가 일본측의 입국거부로 중국으로 되돌아갔다.[29]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아래 전북일보 기사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8·15 해방과 더불어 한민족의 새 역사는 시작되었으며 우리의 감격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서울에는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가 조직되었고, 여성들도 ‘건국부인’ 결성준비위가 황신덕(黃信德) 박순천(朴順天) 박승호(朴承浩) 노천명(盧天命) 허하백(許河伯) 등 5명이 전형위원에 선임되었다.

그 이튿날 16일엔 출처불명의 조각 명단의 벽보가 나붙었으며 국호는 대동진(大東震)공화국이라 했고, 대통령에 이승만(李承晩), 총리대신 김구(金九), 외무 여운형(呂運亨), 국방 金一成(金日成이 아님) 문교 김성수(金性洙), 법무 김병로(金炳魯)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이해 8월18일엔 ‘미국의 소리’방송이 중계되었다. 영어 투의 억양과 잡음으로 잘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 대로 세계정세와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또한 이날 한국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국내정진(挺進)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김준엽(金俊燁, 학병 탈출·전 고려대 총장), 장준하(張俊河, 고인·학병탈출·전 국회의원·사상계 사장), 노능서(魯能瑞)[30] 등을 대동하고, 미국진주의 기초조사를 위하여 중국전구 미군사절단과 함께 미군기 편으로 여의도 공항에 착륙했으나 일본군의 입국거부로 19일 되돌아갔다.

이 같은 이범석 일행의 입국목적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정식 입국할 때까지 모든 행정·군사에 관한 기초준비를 미군과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박헌영 관련 삐라는 박헌영을 원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 공산당 측에서 연출한 것이다.

하와이 교민단체 대한인국민회에서 1942년부터 1963년까지 발행하던 주간신문 『국민보(國民報)』에도 유사한 내용이 실렸다.

서울에는 정당과 식당과 강도단과 쓰레기가 하늘의 별처럼 많다. 이러한 말이 너, 나의 입에서 터져 나왔듯이 서울 장안에는 정당의 사태가 났다. (동진공화국)이니 무어니, 무어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중이, 떠중이가 정당 간판을 내걸고 야단법석이었다. 그 중에는 중국에 가서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아편장수 하던 협잡배가 망명가로 자처하는 것들을 위시하여 별의 별 괴물들이 많았다.
광동군 스파이였던 (이종영)이 대동신문사를 만들어 극우의 민족주의자로 자처하는가 하면, 일본국에 아부하여 (군용열거)라는 영화를 만들었던 영화감독 (서광제)가 (독립신보)를 만들어 극좌의 행동을 했고, 박헌영은 서울에 나타나 부하들을 시켜서 (우리의 위대한 노동자의 영웅 박헌영 동지가 살아있거든 나서라)라는 벽보를 거리 거리에 붙였다. 실로 장관이다.

채만식(蔡萬植)의 중편소설 《소년은 자란다》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이 1949년 2월 25일 탈고한 미발표 유고(遺稿)인 중편소설 《소년은 자란다》에도 해방 당시 떠돌던 뜬소문들 중에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이야기가 나온다.[31][32]

5. 고국으로 고국으로

..........

고국에는 벌써 정부가 서 상해·중경(上海·重慶)에 가 있던 임시정부의 김구(金九)가 대통령으로, 김일성이 육군대신으로 모두들 들어앉았다더라.

국호를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라고 정하였다더라.

기차가 도문(圖們)까지는 겨우 가나, 조선 땅 남양 (南陽)에서부터는 일체로 불통이 되어 시방 수만 명이 남양에 모여 오지도 가지도 못한다더라.

경향신문 기사

종로(鍾路) 네거리 한복판에는 「동진공화국수립(東震共和國樹立) 내각명단발표(內閣名單發表)」 운운(云云)한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삐라」가 밤 사이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가하면 소련군(蘇聯軍)이 입성(入城)한다는 「데마」를 곧이고 군중(群衆)들은 서울역(驛)에 쇄도(殺到)하여 일대소동(一大騷動)을 일으키는 등(等) 가지가지 웃지 못할 이야기와 함께 광복(光復)을 맞이한 이 나라는 잠시(暫時) 무정부상태(無政府狀態)로 함입(陷入) 아니할 수 없었다.
처음엔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이 선다는 말이 있었고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같은 이름이 벽보(壁報)에 나붙기도 했다. 모든 것이 어떨떨하고 그저 까닭없이 가슴은 부풀고 기쁘기만했다.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종전(朝鮮終戰)의 기록(記錄)》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33][34]는 경성제대 사학과(京城帝大 史學科 朝鮮史 전공) 출신으로 다년간 조선에서 살았고, 일본 패전 후 1946년 3월말까지 서울에 남아 일본인들의 본국 귀환 업무를 도운 사람이다.[35] 당시 일들을 기록해 두었다가 1964년 《조선종전의 기록(朝鮮終戰の記錄)》이란 책으로 간행했다. 해방 직후의 일에 대한 중요한 참고문헌이다. 여기에 나오는 동진공화국 각료명단을 종전까지 다수의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었다.[2][36]

이즈음(8.16일경) 어디선지 모르게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의 수립이 전해지고 "대통령(大統領) 이승만(李承晩), 총리대신(總理大臣) 김구(金九), 육군대신(陸軍大臣) 김일성(金日成), 외무대신(外務大臣) 여운형(呂運亨), 기타 미정"의 각료 명단이 시내 요소에 나붙었다. 터무니없는 데마였지만 군중 속엔 그 성립을 믿는 이조차 적지 않았다.

[원문] そのころ、どこからともなく「東震共和国」の樹立がったえられ、「大統領李承晩、総理大臣金九、陸軍大臣 金日成、外務大臣呂運亨、その他未定」という顔ぶれの閣僚名が、府内各所に掲示された。これはデマであった が、一般民衆の中にはその成立を信じたものも少なくなかった。

모리타 요시오는 퇴직 후 한국의 성신여대(誠信女大)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김효숙(金孝淑)의 증언

김붕준(金朋濬, 1888~1950)의 딸 김효숙(金孝淑, 1915~2003)의 증언이다.

여운형(呂運亨)씨가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송진우(宋鎮禹)씨의 반목(反目)—. 공산당(共産黨)은 장안파(長安派)와 재건파(再建派)가 맞싸웠으며, 안재홍(安在鴻)씨의 국민당(國民黨)이며 김성수(金性洙)씨의 한민당(韓民黨)이 제각기 난립(亂立)된채 터전을 닦았다. 『박헌영(朴憲永) 동무여 지하(地下)에서 나오라』는 「비라」가 나붙는가 하면 『동진공화국 대통령(東震共和國 大統領) 이승만(李承晩)』이라는 「비라」가 나붙었다. 지방(地方)은 지방(地方)대로「건준(建準)」이다 「국민당(國民黨)」이다 하여 출옥인사(出獄人士)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헛갈린채 규합되었다. 『나도 40평생 독립운동을 했다』는 농부며, 『사상범으로 몇 년간 옥살이를 한 경력이 있다』 『나는 창(創)씨를 안하고 버틴 지사(志士)』라는 장년, 노인이 여기 저기에 나타나 감투의 의당한 분배를 강요하는 등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당시의 당파(黨派)가 근 50개를 헤아렸다니 가지가 돋고 그 가지에 다시 가지가 돋치는 후진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고질(痼疾)을 앓기 시작했던 것이다.

송남헌(宋南憲)의 『해방 30년사(解放三十年史)』

송남헌(宋南憲, 1914-2001)은 해방 직후 김규식(金奎植)의 비서였다.

송남헌 저, 제1권 《건국전야(建國前夜)》 p. 67
그리고 이 방송(放送)은 (8월) 16日 下午 3時, 6時, 9時 세 번에 걸쳐 행해졌다.

방송(放送)을 들은 일반국민은 총독정치(總督政治)는 물러가고 일본군(日本軍)은 무력(武力)을 포기하여 당장 조선독립(朝鮮獨立)이 실현되어 신정부(新政府)가 수립된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리하여 군중들은 노도와도 같이 흥분하고 독립만세(獨立萬歲)를 외쳤다.

이 무렵 어디서 나왔는지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조각명단(組閣名單)이 서울 거리에 나붙었다. 대통령 이승만(大統領 李承晩), 총리대신 김구(總理大臣 金九), 육군대신 김일성(陸軍大臣 金日成), 외무대신 여운형(外務大臣 呂運亨), 기타 미정(其他 未定). 물론 이것은 출처불명(出處不明)의 「데마」였으나 일반시민의 흥분된 머리를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송남헌의 아래 책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고하 송진우(古下宋鎭禹) 전기 《독립을 향한 집념(執念)》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의 전기(傳記) 《독립을 향한 집념(執念)》(1990) p.221에 나오는 내용이다.[37]

제7장 해방된 조국
1. 아아, 8월 15일
이즈음 거리에서는 여러가지 유언비어가 떠돌았는데 그 중에는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수립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에 의하면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김구, 육군대신 김일성, 외무대신 여운형…’ 등등 뿌리도 없는 풍설과 혼란이 뒤덮은 속에서 5일이 지나 20일이 되었다.

최영희(崔永禧)의 《격동의 해방 3년》

최영희(崔永禧, 1926-2005)의 《격동의 해방 3년》(1996)에 나오는 내용이다.[38]

1945년 8월 16일

.......

출처불명의 조각명단의 벽보가 곳곳에 나붙었다. 이 벽보에는 국호를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대통령 이승만, 총리대신 김구, 육군대신 김일성, 외무대신 여운형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이런 류의 벽보 조각이 많이 나타났다.

김형수의 《문익환(文益煥) 평전》

문익환(文益煥, 1918~1994) 목사의 부친 문재린(文在麟, 1896~1985) 목사도 8.15 해방 직후 만주에서 방송으로 동진공화국 소식을 들었다.

  • 김형수, 《문익환 평전》, (실천문학사, 2004) p. 234
문재린 목사는 그러는 와중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라디오 방송을 들 었다. 서울에서 여운형·이승만·김일성 등의 애국자들이 모여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라는 나라를 세우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기뻤다. 그 리고 반드시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봐야만 미래를 점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서울에서 기독교총회가 열렸으므로 문재린 목사는 그곳에 참석했다. 미국과 소련의 이념이 다른 만큼 서로 완전히 협동 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괜찮으리라 믿고 서울의 관철동에 있는 한 여관에 투숙하여 약 2주간 정세 동향을 파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워들은 게 온통 비관적인 내용뿐이었다. 어디에도 고구려적인 영혼이 기댈 곳이라고는 없었으니, 모든 판단은 각자가 알 아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 문재린 목사는 즉각 용정에 돌아와서 경호대장 전윤필을 찾았으 나 면회를 거절당했다.

손세일의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총리대신 김구(金九), 육군대신 김일성(金日成), 외무대신 여운형(呂運亨)…

8월 16일부터 서울은 광복의 흥분으로 들끓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우고 태극기를 만들어 행진하기 시작했다. 건준은 서둘러 시민들의 자중을 당부하는 전단을 만들어 서울시내에 뿌렸다.

때를 같이하여 “해방된 조선에 곧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된다”는 전단이 뿌려지고 요소요소에 ‘동진공화국’에 대한 벽보가 나붙었다. 미국의 이승만, 중국의 김구, 소련의 김일성(金日成)이 국내의 여운형과 손을 잡고 ‘동진공화국’을 세운다는 내용이었다. ‘동진공화국’ 소문은 서울시내는 물론 지방과 만주의 옌볜(延邊) 등지에까지 급속히 유포되었다. ‘동진공화국’의 대통령은 이승만이고, 총리대신은 김구, 육군대신은 김일성, 외무대신은 여운형, 그 밖에는 미정이라는 벽보도 있었다.
손세일은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 나오는 김일성을 당시 소련군에 있던 북한 김일성으로 오인하고 있다. 위에서 본대로 해방 직후의 실제 동진공화국 기록에는 어디에도 김일성이 소련에 있다는 말은 없다. 당시 소련군의 북한 김일성은 이승만, 김구, 여운형에 비할만한 인물은 전혀 못되었고, 국내 사람들 중에 소련군에 그런 인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사묵(金思默)의 해방 당시 회고

김사묵(金思默, 1930~ )은 함경남도 고원 출생으로 1977년 육군 중령 예편 후 기아자동차에서 근무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저는 큰 형님과 함께 집 터밭에서 가을 채소를 심기 위해 풀을 매고 있었습니다. 12시경 되어서 집 앞에 사는 친척 아저씨(7촌숙)가 단파 라디오로 12시 중대 뉴스를 듣고 나오며 “오늘 일본이 항복하였군. 일본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민초(백성들)를 위하여 무조건 항복했다”는 겁니다. 그 순간엔 실감이 나지 않았지요.

그리고 나서 점심을 먹고 큰 형님과 집에서 약 30리(7.5 마일) 떨어져 있는 미둔리라는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 길은 부래산이라는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미둔리에는 저의 작은아버지가 사셨는데 그 날은 그 동네에서 기형제를 지내는 날이어서 돼지를 잡기에 다같이 식사를 위해 떠난 것이었고, 우리 형제는 저녁 무렵에 미둔리에 도착했습니다.
................
그래서 그 날 저녁에는 우리 형제뿐만 아니라 다른 사촌 형제, 친척들이 모여서 오랫만에 돼지 국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음식을 나누면서 이야기 꽃이 피기 시작하였고, 어디에서부터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국호를 “동진 공화국”으로 한다느니, “고려공화국”으로 한다느니, 총리대신(국무총리의 일본식 직명)은 김구가 되고, 육군대신은 김일성, 농림대신은 강기덕이 된다느니 하면서 그전에는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이름들도 거론되었습니다.

물론 김일성이란 이름은 그 때 당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요. 그는 축지법을 써서 하루 밤에 몇 백 리를 갈 수 있는 독립군으로 신화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편, 저희 사촌 형 중에 말이 조금 빠른 분이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조선사람들 별 수 있겠니. 며칠만 있으면 또 서로 싸울텐데…”라고 하자 저는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나던지 그가 몹시 미웠어요.

윤갑영(尹甲英) 자서전

윤갑영(尹甲英, 1925 ~ )은 전북대와 한양대 기계공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전공은 원자력공학이다.[39]

7-3 :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의 탄생(誕生)과 멸망(滅亡)

1945년 8월 16일, 이른 새벽에 나는, 10리 길을 한달음에 뛰어 순창군청(淳昌郡廳)에 달려갔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운집(雲集)해 있었다. 군중(群衆)들의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가 사람들이 올려다보고 있는 벽(壁)을 쳐다보니, 거기에는 커다랗게 붓글씨로 다음과 같이 쓴 벽보(壁報)가 있었다.

동진공화국 내각명단(東辰共和國 內閣名單)
대통령 이승만(大統領 李承晩)
내무대신 김구(內務大臣 金 九)
외무대신 여운형(外務大臣 呂運亨)
국방대신 김일성(國防大臣 金日成)
나는, 벽보(壁報)의 여러 이름 중에서, 김일성(金日成)은, 중학교3학년 때, 축지법(縮地法)을 써서 두만강(豆滿江)을 오르내리며 일본(日本) 군경(軍警)을 괴롭히고 있는 독립군(獨立軍) 장군(將軍)이란 말을 들었고, 여운형(呂運亨)은, 최근(最近) 몇 개월(個月) 전(前)에야 국내(國內)에서 투쟁(鬪爭)하고 있는 독립(獨立)운동가(運動家)라는 것을 알았을 뿐, 다른 이름들은 처음 접(接)하는 이름들이였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사람들은 여운형(呂運亨) 씨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동진공화국과 조각명단이 나오는 기타 문헌

《동진공화국》, 『왕빠 깝빠 : 유병석 에세이집』 (서울: 한양대학교출판원, 1996) p.304
  •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 (서울, 나남, 1996) : 2권 p.227
  • 강원용(姜元龍, 1917~2006), 『역사의 언덕에서 ─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 체험(1) 엑소더스』, (한길사, 2003) p. 185
  • 《조만제(趙萬薺) 증언(證言)》, 정신문화연구원 편, 『내가 겪은 건국과 갈등』, (선인, 2004) pp. 62~63
조만제(趙萬薺, 1923~2021)[40]조소앙(趙素昻, 1887~1958)의 조카이며,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숙부의 평양행을 수행했다.
제5장. 해방 전후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진실 / ■ 첫 국명은 동진공화국, 농촌엔 새 풍속도가 생겼다

북한 김일성의 평양 출현과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비록 유언비어에 불과했지만 해방 직후 전국적으로 퍼진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은 미군정도 기록하고 있으므로,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도 당연히 이런 명단에 접했을 것이고, 비밀리에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 대위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조각명단의 "군부대신 김일성"의 유명도에 주목하여 무명에다 국내 지지세력도 전무한 진지첸 대위를 북한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 그 유명한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낸 것이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는 조만식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당시 평양은 기독교 세력이 워낙 강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북한에 진주했던 소련 25군의 정치담당관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1909~2006) 중좌는 자신이 북한에 왔을 당시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41][42][43] 이런 말은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 나오는 김일성은 조만식보다 더 지명도가 높은 사람이므로 북한 김일성이 될 수 없다는 증거도 된다.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1966년에 간행된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에도 다음과 같이 나온다.

[pp.170~171]
평양 천지에서는 八월 二十五·六일 경까지의 해방 十일간이 자유의 황금시대(黃金時代)였다. 그러나 열흘 동안을 「시대」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짧고, 허무한 기간이었다
....
그러나 평온한 거리에도 때때로 정체불명의 정치적 벽보가 나붙어서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혼란된 정치정세를 의미하는 오보(誤報)였다.
「김일성 장군이 평양에 입성한다」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내각 명단」
그런 종류의 오보가 흥분된 민심을 자극했다.

당시 평양에도 동진공화국 내각명단 벽보가 나붙었으며, 김일성 장군이 곧 평양에 입성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 대위(북한 김일성)도 이런 상황을 당연히 알았을 것이고, 자신이 사람들이 귀국을 기다리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기로 한 것이다.

평양에 온 김일성의 수행기자 한재덕(韓載德)의 증언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다, 6.25 때 일본에 공작원으로 파견된 후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의 증언에 의하면 평양에도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이 나돈 것이 분명하다. 한재덕(韓載德)의 책에 나오는 아래의 대화는 해방 후 평양에 온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대중들 앞에 처음 선보인 4일 뒤인 10월 18일 저녁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주최로 일본요정 「가센(歌扇)」에서 열린「김일성 장군 환영회 및 가족 위안회」에서 오간 것이다.[44][45] 한재덕(韓載德)과 김익진(金翼鎭), 문태영(文泰永) 등은 당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이었다.

四一. 군부대신설(軍部大臣說)에 분격(憤激)하던 김일성(金日成)

.......
이야기가 잠간 중단된 때에 공산당측 위원의 한사람인 문태영(文泰永)이가 이런 말을 하였다.

『경성(京城)에서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김(金)장군께서는 중앙정부(中央政府)의 군부대신(軍部大臣)이 되신다던데......』

이 문태영(文泰永)이란 공산측 위원하고도 「대화숙(大和塾)」 동창이며 김일진(金翼鎭)씨가 인민정치위원회 보안부장을 사임한 후에 그 대신으로 그 자리에 들어앉은 자인데 싱거운 소리를 잘하기로 평판이 있었고 이때만 해도 자기딴은 아는체 하는 발언이었다. 하기는 그 얼마전에 경성(京城)으로 부터의 보도라하여 소위 중앙정부(中央政府) 명단을 열거한 벽보가 평양(平壤) 거리에 나붙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에는 주석(主席) 김구(金九), 총리(總理) 여운형(呂運亨) 등등의 대신들 중에 군부대신(軍部大臣) 김일성(金日成)이라는 이름도 끼어 있어 한때 사람들의 화제에 오른 일이 있었다. 문태영(文泰永)은 이것과 관련하여 자기딴은 김일성(金日成)에게 아첨하느라고 이런 소리를 꺼낸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김일성(金日成)이가 여기 대해 무어라고 하는가 주목을 했다. 그런데 김일성(金日成)은 문태영(文泰永)을 향하여 비난하는 듯한 눈초리를 돌려서 자못 불쾌하다는 듯이 이렇게 뱉았다.

『군부대신? 군부대신을 해 무엇하오?』

그 말투가 하도 분개조로 퉁명스러웠기 때문에 공산위원 문태영(文泰永)이 당황한 것은 물론이어나와 다른 사 람들도 의외의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金日成이의 진의를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겸손하는 말인가? 아직 그런 것은 논급할 때가 아니라는 말인가? 김구 주석(金九 主席) 여운형 총리(呂運亨 總理)의 중앙정부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인가, 군부대신이 불만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군부대신 따위의 초라한 자리는 불만이란 말이었다. 이제 와서 그 진의가 의심할 여지 없이 드러났다. 이 때에 벌써 金日成은 군부대신 따위가 아니라, 이 나라의 수령 공산조선(共産朝鮮)의 대통령 아니면 수상을 꿈 꾸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기도 뜻하지 않고 불쑥 이런 말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아직 그만큼 정치적 소양이 부족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위 내용으로 보아 당시 평양에서도 해방 직후부터 동진공화국 조각 명단이 나돌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에 온 무명의 소련군 진지첸 대위도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동진공화국 군부대신으로 거론되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지지세력도 전무하여 자기 힘으로는 평양의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형편도 안 되던 그가 소련군 무력의 일방적 도움을 받아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무명의 핸디캡을 극복하려는 중에도, 이미 스탈린으로부터 북한 지도자로 낙점을 받은 터라 문태영이 그에게 군부대신을 거론하자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여운형(呂運亨)이 1946년 9월 23일부터 30일까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올 당시 서울에서 3.8선까지 그의 차를 왕복 운전했던 운전사 홍순태(洪淳泰)의 증언에 의하면 돌아온 여운형이 자기가 김일성을 만났더니 김일성이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며 "통일이 되면 국방부 장관이나 시켜달라"고 말하더라고 했다 한다.[46] 당시 소련 군정김일성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세워 토지개혁까지 단행하는 등 북한에 단독의 공산정권을 세울 방침을 굳히고 있을 때이므로 이러한 김일성의 말에 진정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동진공화국 루머를 떠올리고 지나가는 말로 여운형에게 이런 소리를 했을 수도 있다.

북한의 철원읍 관전리에 나돈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官田里)는 38선 이북으로 해방 직후에는 북한이었으나 6.25 때 수복된 지역이다.[47][48] 일본 항복 후 소련군이 8월말 철원 지역을 점령하기 이전에 이곳에도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삐라가 나돌았다는 것이 확인된다.

[p.120] 관전리에 있는 같은 반 친구네 집에서 라디오로 일본 항복소식을 접했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고 가게 뒤에는 일본 요정이 있었는데 그들은 우왕좌왕하며 짐을 꾸렸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완장을 차고 치안대 노릇을 했으며, 전봇대에는 이승만, 김일성, 여운형 관련 삐라가 여기저기 붙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마디로 무법천지였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2017 *).

*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2017. 철원의 장소기억에 관한 평화예술 프로젝트. 서울: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Seoul National University IPUS. 2017. Peace and Art Project on Place Memory in Cheorwon. Seoul: Seoul National University EPI.
“철원의 장소기억에 관한 평화예술프로젝트”,통일기반구축 연합 학술대회 : 통일기반 조성을 위한 서울대학교의 역할과 비전, 2016년 11월 29일(2인)

위에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해방 직후 나돈 이승만, 김일성, 여운형 관련 삐라라면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일 것이다. 소련군이 철원 지역을 점령하기 전에는 이승만이나 여운형 관련 삐라가 나돌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북한이 조작한 해방축하 시위의 "김일성 장군 만세" 플래카드 사진

북한은 해방을 맞아 거리에 쏟아져 나온 군중들이 "김일성 장군 만세"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든 사진을 내놓았는데, 조작한 흔적이 역력히 나타난다.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해방직후부터 지도자로 널리 거론되었다는 증거로 보여주기 위해 조작해낸 것이다.

이런 사진까지 조작해내면서도 북한이 정작 김일성이 나오는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은 거론하지 않는 것은 김일성의 직책이 이승만, 김구보다 아래인 군무부장 정도로 거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진공화국 조각 명단이 나오는 해방 당시 자료를 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또 이런 조작 사진까지 내놓은 것은 역설적으로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이 국내에서 유명했다는 마땅한 다른 증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에 나오는 조작한 해방축하 시위 사진. "우리의 영명한 영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플래카드는 그려 넣은 것이 역력하다. 해당 플래카드를 든 사람은 앞쪽에 있으나 플래카드 자체는 다른 것보다 뒤로 보인다.

해방 당시 소련군 88여단의 진지첸 대위(북한 김일성)를 알던 사람은 국내에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를 김일성 장군으로 알던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얻어타고 9월 19일 원산항으로 몰래 귀국하여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을 쓰며 숨어다니던 소련군 진지첸 대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조작 사진이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퍼져 있는 것에 대처하기 위해 후일에 조작한 것같다.

위 사진을 찍은 장소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당시 서울에서는 저런 플래카드가 등장한 적이 없다. 해방 직후 평양에 진주했던 소련군 25군의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1909~2006) 중좌는 당시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라고 증언했으니[50][51] 평양에 저런 플래카드가 실제로 등장했을 가능성도 없다. 해방 직후에는 거리에 나온 군중들이 해방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만 들었을 뿐 특정 지도자를 내세우는 경우는 없었다.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서 김일성보다 우선적으로 거론되던 이승만이나 김구 또는 여운형을 지지하는 플래카드도 없었다.

아래는 평양 혁명박물관에 전시된 유사한 다른 조작 사진으로, 조작하기 전의 원본 사진까지 발굴되어 있다.

유명한 8.15해방축하 사진 조작, 김일성 우상화 위해 픽펜 picpen.chosun 2015. 8. 14

북한이 간행한 1982년 간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란 책에는[52][53]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54]

해방 직후 김일성 장군님이 서울에 개선한다는 소문이 퍼져 수십만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이는 위의 조작한 사진의 플래카드를 지칭하는 말로 보인다.

날조 왜곡과 선동으로 체제유지한 북괴

참고 사항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은 비록 유언비어에 불과하지만,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일성을 들고 있었다. 이들 중 이승만, 김구, 여운형은 남한의 해방정국을 주도하였고, 명성만 있고 실체는 불분명한 김일성의 이름을 소련군이 데려온 꼭두각시 진지첸 대위가 사칭하면서 소련군의 도움으로 북한의 실권을 장악했다.

아래에서 보듯이 해방 직후 10월 14일 북한 김일성이 평양 대중 앞에 출현하기 전에 거론되던 해방정국 유력인물에는 김일성 이름이 없거나, 거론되는 경우라도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볼만한 인물이다.

1944년 미군이 작성한 유력 조선인 명단

1944년에 미군이 만든 참고자료에는 한국이 해방될 경우 가장 유력한 인물로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3~1950),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양주삼(梁柱三, 1879~?) 박사,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6~1945) 등 5인을 들고 있는데, 모두 당시 국내에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조만식은 북한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으나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김성수는 대한민국 건국 후 2대 부통령을 지냈고, 다른 사람들은 정치활동은 하지 않았다.

<조선 유력인사 5명 美 인물평가 내용> 연합뉴스 2008-08-08 06:42
광복 1년전 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人' 평가표 조선일보 2008.08.09 / 종합 A2 면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조각명단

전국인민위원 명단 기사 원문에는 김일성(金日成) 아닌 김일성(金一成)으로 되어 있다.
조선인민공화국 조각 명단 : 朝鮮人民共和國發表(九月十四日午後三時)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년 09월 24일 1면

9월 14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조각 명단은 박헌영 계열이 임의로 작성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 빠짐없이 나오는 사람 중 유독 육군대신 김일성만 나오지 않는다. 유언비어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과 달리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작성한 명단이므로 이름은 유명하나 실제로는 누군지 잘 모르는 김일성은 제외했을 것이다. 이보다 앞선 9월 6일에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명단에는 김일성(金一成)이 들어 있는데,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 동진공화국 육군대신으로 거론되던 김일성으로 보이며, 직무가 특정되지 않는 자리에는 지명도만으로 선임해도 별 문제될 것이 없어서 일 것이다. 당시는 이승만, 김구 등 해외에 있던 인사들이 귀국하기 전이므로 본인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임의로 작성한 명단이다. 명단 작성에 간여한 박헌영이나 여운형도 당시까지는 소련군 88여단의 존재나 진지첸 대위(북한 김일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88여단의 존재나, 김일성의 소련군 경력이 제대로 밝혀지는 것은 1990년 이후이고, 당시 소련군정이나 김일성 본인도 그의 소련군 경력을 극구 숨겼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은 북한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귀국길의 북한 김일성 일행이 거명한 유력 인물

진지첸(북한 김일성) 대위를 비롯한 소련군 88여단 조선인들은 1945년 9월 중순 육로로 입북을 위해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 도착했으나 일제가 기차 터널을 파괴하여 북한으로 가는 철길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역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이기건(李奇建, 1919~ ?)이 그때의 대화에 대해 증언했다.[6][55]

다음은 蘇聯軍(소련군)의 포로취급을 받다 탈출, 歸還途中(귀환도중) 滿州(만주) 목단江驛(강역) 構內(구내)에서 金日成(김일성) 일당의 入北(입북)을 우연히 목격하게된 李奇建(이기건)씨(五三(오삼)·현內外問題研究所長(내외문제연구소장)·예비역준장)의 얘기.

......
「하루빈」가는 기차를 타려고 목단江驛前(강역전)을 서성거릴 때입니다. 그때가 아마 八月(팔월) 하순경이 아닐까요. 驛構內(역구내)에 소련군장교 三(삼), 四十(사십)명 가량이 몰려있어요. 가까이갔더니 中國(중국)말로 얘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 어투로 봐서 韓國人(한국인)임이 틀림없었읍니다. 나는 中國語(중국어)에 능했지요. 그래서 그중 인상이 좋아보이는 자에게 다가가 우리말로

"당신 朝鮮(조선) 사람 아니요"

하고 반갑게 말을 붙였더니 그 말엔 대꾸를 않고

"당신은 누구요"

하고 우리말로 되물어요. 그래서

"나도 조선사람이요"

했더니

"우리가 급히 조선으로 들어가려는데 왜놈들이 기차터널을 폭파해서 못 가고 있소"

라고 대답합디다. 당시 목단江(강)에서 韓國(한국)의 청진 회령으로 들어가는 철도가 있었지만 咸鏡道(함경도)에서 가까운 老松嶺(노송령) 터널을 日軍(일군)이 폭파해서 막히는바람에 교통이 두절됐었지요.
그리고는 이어 "지금 朝鮮內部事情(조선내부사정)이 어떻게 됐느냐"고 캐물어요. 그래서 목단江市(강시)에서 "朝鮮(조선)에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 탄생됐다"【注(주) : 해방직후인 八(팔)월하순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라는 벽보내각이 나붙었으나 그 출처는 모른다】는 放送(방송)을 들은 기억이 떠올라 그 말을 전했더니 그 소련軍上尉(군상위) 복장을 한 韓國人(한국인)은

"金九(김구)요, 李承晩(이승만)이요"

하고 물읍디다. 모른다고 했읍니다. 한참있다 그 소련군 장교는

"우리는「블라디보스톡」으로 일단 가서 거기서 배타고 朝鮮(조선)으로 들어가겠소"
라고 말한 일이 있읍니다. 그런데 그 일당이 누구인지 모르고 헤어졌다가 내가 四七(사칠)년 북한에가서 소위 人民軍(인민군) 창설에 관여하면서 보니까 그때 목단江驛(강역)에서 보았던 그 蘇聯軍上尉(소련군상위)가 바로 北傀(북괴) 괴뢰軍總參謀長(군총참모장)으로 올라앉은 안길(安吉, 1907~1947)이었읍니다. 安吉(안길)이와 함께 있던 中尉(중위)에서 소좌에 이르는 三十(삼십)여명의 소련군 장교중엔 나중에 北韓(북한)을 틀어쥔 金日成(김일성) 金策(김책) 金一(김일) 崔賢(최현) 林春秋(임춘추)등도 서있었다고 봅니다. 아마도 金日成(김일성) 일당이 韓國(한국)으로 나오고 있던 한 장면이었다고 여깁니다.

귀국길에 오른 북한 김일성 일행은 오랜 외국생활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세가 이승만, 김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이 국내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이기건이 위와 같은 증언을 할 1972년 당시에는 김일성 일행이 기차로 귀국하려고 실제로 만주 무단장 역까지 갔다가 철로가 막혀 블라디보스톡에서 소련 군함을 타고 입북했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민중일보(民衆日報)에 소개된 명사

아래 민중일보(民衆日報)에 소개된 명사들은 당시 해외에 체류하던 해방정국의 유력 인사들이다.

이어서 민중일보는 "志士의 追憶"이라는 제목으로 17회에 걸쳐 당시 이미 작고한 독립지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閔忠正公(민영환) / 趙秉世 / 李儁 / 李甲 / 朴星煥 / 崔益鉉 / 安昌浩 / 李東暉 / 梁起鐸 / 金德基 / 羅喆 / 孫秉熙 / 李昇薰 / 朴殷植 / 申采浩 / 柳瑾 / 周時經

자유신문(自由新聞)에 소개된 유력 망명지사

함께 보기

각주

  1. 진방(震方)은 팔방(八方)의 하나로 정동을 중심(中心)으로 한 45도 각도(角度) 안의 방위(方位)를 가리킨다.
  2. 2.0 2.1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 『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東京 : 巖南堂書店, 昭和39 [1964] : p.81
  3.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해방 당시 김일성은 국내서는 무명인사 : 우남위키
  4. #만주에까지 퍼진 동진공화국 루머
  5. 5.0 5.1 白善燁(백선엽) 回顧錄(회고록) 軍(군)과 나 (11) 5년만의 平壤(평양) 1988.09.01 경향신문 5면
  6. 6.0 6.1 6.2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7. 政客(정객)통해 파헤친 해방전후사 1991.07.01 경향신문 23면
  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1권 일본 · 미국보도기사 / 일본보도기사 / 165. 피로 물들인 조선의 독립운동, 전쟁과 함께 치열화, 앞길에 여전히 수많은 파란 : 『朝日新聞』(東京版), 1945년 10월 3일. 국사편찬위원회 2011년 06월
  9. 名士의 片影(其五), 金日成氏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면 기사.
  10. 莫府(모스크바)서 작전을 연구(作戰을 硏究) / 김일성 장군(金日成 將軍)은 건재 활동 중(健在 活動 中) 자유신문(自由新聞) 1945년 10월 17일자 2면
  11.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 해제(解題) 국사편찬위원회
  12. 정관해(鄭觀海, 1873~1949),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 한국사료총서 제44집 (국사편찬위원회 , 2001년 12월 30일)
  13. 鄭觀海 著, 觀瀾齋日記 : 韓國史料叢書 第44 (과천 : 國史編纂委員會, 2001) pp.1055 ~ 1057. (국회도서관 온라인 원문보기)
  14. 崔炳彩日記 5 (한국사료총서 제59집) > 崔炳彩日記(一九四五年 下) > 七月 > 七月十一日己未(陽八月十八日、土曜日) 국사편찬위원회 2017년 12월 22일
  15. 崔炳彩日記. 3-5 : 韓國史料叢書 ; 第59 (과천 : 국사편찬위원회, 2017) pp.529~531. (국회도서관 온라인 원문보기)
  16. ‘안동선비’ 류영희 일기…“연호가 ‘明治’라니… 애통하도다 동아일보 2004-02-09
  17. 17.0 17.1 국호(國號)를 동진(東辰)으로 표기한 1945년 8월 17일자 [중선일보(中鮮日報)] Kobay Auction 126회 2010년 6월 19일
  18. 「주일명(主一銘)」 ○(七月)十二日(庚申) : 양력 1945년 08월 19일
  19. [우리동네 이야기 속으로] 42.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경북일보 2021년 07월 24일
  20. 안동부(安東府)
  21. 안동군 임현내면(臨縣內面) 송천리(松川里) 디지털 안동문화대전
  22. 「주일명(主一銘)」 ○(七月)十三日(辛酉) : 양력 1945년 08월 20일
  23. 여름철 더위를 먹어서 하는 설사를 서설(暑泄) 이라고 합니다. 현등한의원
  24. 「주일명(主一銘)」 ○(九月)二十三日(庚午) : 양력 1945년 10월 28일
  25. 일제강점기 일어신문기사 수록 대전사료총서 발간 연합뉴스 2015-11-08
  26. [동로하선] 중선일보 충청신문 2013.08.13
  27. 『인민 해방보』 : 부산향토문화백과
  28. 유수생(流水生, 필명) 수필(隨筆) 《전재민(戰災民) : 만주잔류동포(滿洲殘留同胞)를 생각하며》 1947.01.07 동아일보 4면
  29. 독립운동사 제6권 : 독립군전투사(하) - 제3편 광복군의 후기 활동 / 제3장 8·15해방과 확군 / 제2절 광복군의 국내 정진 / 2. 국내 정진과 사태 변동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30. 노능서(魯能瑞, 1923~2014)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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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75>「美·蘇共委(미·소공위)」와 「左右合作(좌우합작)」 (9) 꿈으로 사라진 左右合作(좌우합작) 1972.04.13 동아일보 4면;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한얼문고 1972 ; 고려원 1987)
  47.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디지털철원문화대전
  48.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구글 지도
  49. 김지나, 조경진, 박한솔, 구철원 시가지의 장소기억 재구성 국토연구 제93권 (2017.6) pp.105~125
  50. 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49
  51.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 위클리 조선 2011년 11월 21일
  52.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평양, 조국통일사, 1982) - 631페이지
  53. 이 책은 2010년 남한에서도 제목을 바꾸어 간행되었다 : 『북한이 공개한 북의 지령 따라 움직이는 남쪽 사람들』 한국현대사 자료편찬위원회 정리(서울, 비봉출판사, 2010년 12월 20일)
  54. [신동욱 앵커의 시선] 서울 거리의 우상과 허상 TV조선 2018.11.20
  55.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