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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일제시대에 1920년 경부터 전설적인 항일 투사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증언했다. 하지만 이에 해당하는 실존 인물을 확인하기 쉽지 않아 논란이 되어왔다. 북한 김일성이 해방직후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1945년 10월 14일 대중앞에 처음 나섰을 때는 나이가 33세에 불과해 1920년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과는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이 자명해서 가짜 김일성이란 꼬리표를 달게 된다.

실제의 일제시대 기록을 보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동명이인들이 10여명 이상 발견되지만,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볼만한 유명 인물은 찾기 어렵다.

이외에 누군지 불분명하지만 유명한 항일투사 김일성 이름이 나오는 1940년대 전반의 법원 판결문이 아래와 같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김일성의 이름이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40년 전반 판결문에 주로 나오는 것은 이때 비로소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져서가 아니라, 전쟁시기에 김일성에 관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엄격하게 단속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하여 더 이상 그에 관한 신문기사는 나오지도 않을 때이다. 일제 기록에는 항일 영웅 김일성에 대한 소문이 초등학생들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했으며, 이를 유언비어로 보고 있는데, 이런 영웅적 인물은 실존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판결문 사례들은 일제시대에도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증거가 될 수 있으며, 이것이 해방 이튿날부터 나돈 출처불명의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도 김일성 이름이 들어가게 된 이유일 것이다.

1944년 11월 18일 일본 귀족원 사상조사위원회(貴族院 思想調査委員会) 질의응답 자료에 당시 조선에 "김일성이 영웅(金日成 英雄)"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져 있다고 했다.[1]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일성의 이름이 보천보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며, 그가 사건의 주역이 맞으므로 진짜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 판결문에는 유명한 김일성 이름과 함께 보천보 사건을 거론한 경우는 보이지 않으므로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졌다고 볼 근거는 없으며,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보천보 사건은 일과성 사건으로 당시 언론에 보도된 이후 곧 잊혀졌다. 해방직후 남한 좌익지의 김일성 찬양 기사들에도 보천보 사건은 전혀 거론되지도 않는다. 김일성이 북한에서 집권한 이후 자신의 항일 공적으로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더구나 보천보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해방 직후 1945년 12월의 인터뷰에서 보천보 사건을 알지도 못해 엉뚱한 동흥사건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2]

개요

가마다 사와이치로(鎌田澤一郞, 1894-1979)의 저서 『조선신화(朝鮮新話, 1950)』에는 김일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3]

“..... 7년 전(1943년)에 나는 南鮮의 어떤 소학교 6학년생과 중학교 2학년생을 모아놓고 강연을 한 후, '제군은 현재 누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정직하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무기명으로 투표해 보라' 고 말하면서 안심을 시킨 후 투표해 본 결과 놀랍게도 그들 중 67%가 김일성이라고 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북한 김일성이 일제시대 당시 초중생들에게도 영웅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4] 그러나 이 사람이 북한 김일성이라고 단정할만한 근거는 없다. 『조선신화(朝鮮新話)』pp.381~385에는 위 투표 이야기도 나오지만 1930년대에 저자가 들었던 일찍부터 유명했던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며, 실제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5]에 가마다(鎌田)의 책에 나오는 김일성과 관련한 주요 내용의 번역과, 그가 1971년 2월에 직접 가마다(鎌田)의 자택으로 찾아가서 들은 당시 일에 대한 배경 설명이 나온다. (이명영은 가마다(鎌田)를 줄곧 謙田으로 잘못 쓰고 있다.)

[김일성 열전 pp.73~79]

一九五○年一一月에 東京서 出版된 「朝鮮新話」 속에서 謙田(一八九三년생)은 一九三○年代의 滿洲의 中共黨遊擊隊의 金日成 以前에도 金日成이란 獨立運動의 猛將이 옛날에 있었음을 記錄하면서 大略 다음과 같은 說明을 하고있다.
『初代의 金日成은 一九一八年에 日本이 시베리아에 出兵할 무렵에 또한 사람 있었던 사람이다. 帝政러시아가 崩壞한 直後 그 亡命將軍 세묘노프가 시베리아에서 궐기 하자 日本이 이 白色將軍을 援助하여 시베리아에 出兵했을 때에 이 金日成은 소련革命軍(赤軍) 側에 서서 日軍 및 세묘노프軍과 싸운 사람이다. 그는 咸鏡北道 胎生으로 韓日合倂 때에 나라를 떠나 滿洲 시베리아를 放浪하면서 抗日의 民族主義者로서 吉林 間島를 根據로 하여 크게 活動하다가 러시아에 革命이 일어나자 共産主義者가 되어 韓國出身의 赤軍大部隊를 引率, 세묘노프軍 討伐司令官으로서 活動 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滿洲에 들어와 地下에 潜入、滿洲國이 成立되기 前부터 抗日軍을 指導하면서 때로는 北韓의 淸津에서 暴動工作을 하기도 했던 사람인데 그 때 當時 四0을 넘은 사람이었으므로 살아있다면 벌써 八○(一九五○年 現在)에 가까운 老人이겠으나 近二○年 동안 그 소식을 알 수 없다. 한 때는 樺太로부터 北海道에 潜入하여 札幌의 北海道大學附屬病院에 入院、가만히 盲腸炎手術까지 받은 일이 있었으나 그 후 生死不明이다』
筆者는 이와 같은 記錄을 좀 더 檢討하기 위하여 一九七一年二月에 直接 謙田을 그의 自宅으로 찾아 이와 같은 記錄의 出處를 물어본 일이 있다. 謙田은 宇垣一成이가 一九三一年 여름에 朝鮮總督으로 赴任했을 때에 그에게 발탁되어 朝鮮總督府 政策顧問으로 서울에 왔던 사람이다. 그 自身이 民族主義者로서 韓國의 獨立은 日本사람의 손으로 주어져야 된다는 것을 믿고 있었으므로 呂運亨 宋鎭禹 金性洙같은 사람들과 交分이 두터웠다고 한다.
.....
謙田은 滿洲에서 東北抗日聯軍(그 속에 金日成部隊도 있었다)에 對한 大討伐戰이 進行되고 있었을 때인 一九三九年、四○年 頃에 滿洲에 가서 關東軍參謀들로부터 戰況에 關한 브리핑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 비로소 옛 金日成의 存在에 對해 知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關東軍의 說明은 上海臨時政府가 만들어지기 전에 滿洲쪽에서 먼저 獨立運動이 있었고 그 때 벌써 金日成이란 사람이 活動하고 있었는데 그 金日成은 自己가 「朝鮮新話」에 쓴 바와 같은 人物이었다고 한다. 關東軍은 이 옛 金日成은 상당한 人物이었는데 自己들이 討伐하고 있는 東北抗日聯軍의 金日成은 그 옛 金日成과는 다른 사람이며 이름만 같을 뿐이라고 했다. 같은 이름을 繼承하고 있는 것은 部下를 모으는데 있어서나 게릴라戰을 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로 有利하니까 그런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른바 共匪狀況分析의 秘密記錄을 보여주더라고 謙田은 回想했었다.
그 때 謙田은 거기서 들은 이야기들을 自己 수첩에다 메모해 두었던 것이 남아 있어서 「朝鮮新話」란 冊을 쓸 때에 參考했던 것인데 그 關東軍의 秘密文書 속에는 金日成이 北海道에 潛入하여 盲腸炎手術까지 받았다는 것도 記入되어 있었다고 한다。이러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던 當時 關東軍의 參謀는 謙田이 朝鮮新話를 쓸 때까지만 해도 東京에 살아있었으므로 謙田은 그 參謀를 만나서 當時의 아주 자세했던 記錄들을 다시 볼 수가 없을까 하고 問議했더니 關東軍文書는 敗戰과 더불어 全部 블태워 버렸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어서 옛 金日成에 關해 좀 더 仔細하게 쓰려고 했으나 안되어서 수첩에 메모해 두었던 要點들을 대충 옮겨서 冊을 쓴 것이라고 謙謙田은 筆者에서 證言해 주었다.
謙田은 이어서 『金日成은 때로는 金一成으로도 表記되었는데 같은 人物이었다. 시베리아 또는 滿洲를 根據로 하는 게릴라部隊長으로서의 金日成은 굉장히 일찍부터 韓國內에 알려져 있었던 것이 分明하다. 내가 滿洲視察에서 돌아와 내 近處에 出入하는 많은 韓人 知識人들과 당신들도 金日成이란 사람에 대하여 아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더니 모두가 알고 있었으며 大正때(1912~1926)부터 무력 항쟁에 나서 있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이 謙田의 「朝鮮新話」는 북한의 金聖柱傳記에도 인용되고 있다. 그것은 해방전 3, 4년경에 남한의 어느 學校에서 人氣投票에서 60%의 어린이들이 金日成을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다는 대목이다. 「朝鮮新話」속에 이런 대목이 분명히 나오는데 이 인기투표는 謙田이 실시했던 일로서 謙田은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깊이 존경받고 있는 金日成은 바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金日成과 최근의 金日成 (동북항일연군내의 金日成)과의 이미지가 겹친 것이었으리라고 책에 쓰고 있는데, 金聖柱傳記에서는 이러한 글 중에서 我田引水격으로 자기들에게 有利하게 보일 수 있는 몇줄의 部分만을 引用했을 뿐 앞에서 적은 初代 金日成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가타부타의 일체의 언급도 없는 것이다.

위 내용은 일제시기에 일본인들도 만주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보다 훨씬 더 일찍부터 다른 김일성(金日成)이 있었다고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유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에 대해 일본인들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의 1940년대 전반 판결문에 나오는 유명한 김일성도 위와 같이 大正때(1912~1926)부터 알려졌던 사람이며, 사관학교를 졸업했다거나 장개석의 부하라는 등 구구한 풍문의 인물 김일성의 실체가 잘 확인되지 않으므로, 일제는 이런 소문을 유언비어로 단정하고 무시하다가, 1937년 7월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 등이 일어나면서부터 전시에 집중 단속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정으로 1940년 경부터 단속된 사람들의 수사기록이나 판결문에 김일성 이름이 자주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국가기록원 판결문

피고인은 ... 소화 16년(1941년) 11월 15일 오후 1시부터 4시경까지 예산경찰서 연무장에서 동(同) 서장의 명에 의하여 순사 호전원삼랑(戶田元三郞) 외 1명 및 이동(伊東) 공의(公醫, 의사) 입회 아래 육군특별지원병 지원자 전형 체격검사를 받게 되어 동(同) 농업학교 제 5학년생도 37명이 이를 수검하였고 수검을 받은 학생 대부분이 지원병의 응모에 불만을 품고 기피의 태도가 농후된 것을 간파하기에 이르러 자기 또한 조선민족은 육군특별지원병으로서 황군의 일원이 되어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할 필요는 없으나 학교 당국의 강한 종용에 의해 부득이 본일 체격검사를 받는다는 것은 가령 채용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들은 조선 민족의 정신을 잃지 않는다는 의사 아래 동일(同日) 오후 2시경 동(同) 장소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학생에 대하여 전에 만주에 있는 공비의 두목으로 민족운동에 여념이 없었던 조선인 김일성(金日成)을 예로 조선어로 '지원병이 되더라도 김일성과 같은 정신을 잃지 말라.”하고 총독정치의 중요시설이 되는 조선육군특별지원병제도의 취지에 배반하고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론을 함으로 인하여 치안을 방해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1. 소화 15년(1940년) 9월경 목포부(木浦府) 북교동(北橋洞) 23번지 산중민홍(山中 敏弘)의 집에서 산중민홍 외 약 7명의 교우와 함께 위로회를 열었을 때 동인(同人) 들에게 우리는 국체의 변혁을 목적으로 「백두산의 깊은 곳에서 김일성(金日成)이라 는 자가 다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고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는 현재 한국정부가 있어 왕성하게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 학생은 각성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상급학교로 나아가 지식을 넓혀 장래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내용을 말하고, ...
[p.3] 2) 동년 12월 20일경 피고인 송원일수(松原一秀)의 임시 거처인 수원읍 궁정 택전(澤田) 아무개 집에서 피고인 신정인종(新井仁鍾)에게 전기 집단의 목적을 알리고 동 집단에 참가를 권유, 동 피고인을 동 집단에 가입시키고 계속하여 동소에서 피 고인 중천준석( 中川濬晳), 동 금해길준(金海吉俊), 동 홍원종철(洪原鍾哲), 동 고산태종(高山泰鍾), 동 송원일수(松原一秀), 동 신정인종(新井仁鍾) 등과 같이 만주국으로 가서 마적(馬賊)이 되어 그 곳의 항일비적의 거두 김일성(金日成)과 연락하여 조선 의 독립과 공산화를 위하여 운동해야한다는 취지를 협의하고,..........
남정준(南廷埈, 1923~1948) 독립운동자공적자료
[pp.6~7 (원문 pp.12~13)] 제3피고인 덕산영세(德山英世)는 ...
5. 동 17년 2월 하순 서중 3학년 2반 교실 안에서 상피고인 천천홍 외 3명과 모였 을 때 동 피고인이 「김일성(金日成)은 일본의 모 대학을 마치고 취직하지 않고 만주 로 건너가 현재 다수의 부하를 인솔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조선은 꼭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독립지사가 될 수 있는 자는 중등교육을 마친 자 로 우리들의 책무는 중대하다. 당연히 분기해야 한다.」라고 역설하자 즉시 이에 찬 동의 뜻을 표하고,....
[pp.8~9 (원문 p.15)] 제4. 피고인 길전균우(吉田均雨)는 ...
3. 동 17년(1942년) 2월 하순경 동급생 금전박창(金田博彰)의 하숙집인 광주부 남정 송도전기상회에서 동인, 평산문웅(平山文雄), 나승만(羅承滿), 강촌성전(姜村聲淟), 신정무훈 (新井武勳)과 만난 자리에서 동인 등에게 국본선생은 일본인 선생에 비하면 월급도 적고 봉급날에는 봉급을 받아도 조선인이라 항상 비애이다. 이 비경(悲境)의 타개는 조선의 독립 밖에 없고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책으로써는
1) 외국망명 중의 선배 그 중 중국의 임시정부(假政府)와 김일성 군(金日成軍)의 소련에 원조를 구한다.
.......
5. 그해 3월 24일 무렵 위 상피고인 무곡무남(武谷茂男) 집에서 동 피고인, 상피고인 신정화랑(新井和郞) 외 1명과 모여 동 피고인 등에게 ‘상급 학교 입학에 관한 일본, 조선인 간의 차별, 김일성 및 서중(西中) 선배 손의석(孫宜錫)의 독립 운동 상황 등을 의논한 끝에 조선의 현 재 상태에 대해 논의를 주고받고 조선인의 공통적 결함에 대해 검토를 거듭하여 서중생(西中生)인 자는 당연히 선배의 의사를 이어 조선독립을 위해 궐기해야 한다. 일전의 광주학생사건 당시부터의 전통적 서중 혼을 아름답게 해야만 한다. 라고 강조하고, ...
[pp.2~3] '일본은 일·미전에서 불의의 타격으로 큰 전과를 얻었지만 미국은 재기하여 장기전의 결과 일본을 이긴다.'는 뜻, 또 '일·소 전은 필연으로 일본은 일·미전에서 피폐해져 패전하고 소련 세력이 먼저 조선에 들어와서 우리들은 소련 세력에 호응 궐기하여 독립을 기대해야한다. 소련의 극동에는 조선인부대가 다수 있어 그들이 조선에 들어올 경우 환영하고 총 궐기하여야 한다.’ 는 뜻, 혹은 '일·소 개전에서 일본이 패배하면 그 기회에 김일성(金日成)은 다수의 부하를 모두 모아 조선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다.'는 뜻,
또는 「대동아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이때가 조선독립의 호기라는 뜻, 또는 독 일의 패배할 쯤에는 소련병력은 극동을 향해 온다는 뜻, 조선 민족이 취할 길은 오로지 자유해방 이외는 없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로써 피고인 두 명은 범의를 계속 유지 조선독립의 목적, 그 목적사항의 실행에 관하여 협의하고 선동을 한 것이다.
피고인 송천금보(松川今甫)는 현재 시국의 약간 불리한 틈을 타 시끄럽게 어지럽히는 자로 깊은 사상적 근거도 없고 철저한 수단을 사용하지도 않고 단순한 유언비어를 하는 자에게 사상적 근거의 유무를 따지지도 않고 근거 없이 도청한 말에 징계를 하고 있다. 세상은 독립운동자들이 좋은 기회가 왔다고 망상하는 시기를 만나 피고와 같은 경솔한 자는 여기에 편승하게 되었다. 현재의 정세를 보면 프랑스, 벨기에에서의 독일 제 5부대의 활약이 최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역사상 최대의 교훈으로 독립주의자 김일성(金日成)에게 대한 유언비어는 본건 기록에도 있듯이 우리 지방 인천 관내에서는 일반화 되어 있고 일본인 9살의 국민학교 아동들도 이를 말할 정도로 넓게 퍼져있는 상황에서 이번 본건은 단순한 유어비어에 지나지 않는다.
제1. 피고인 평전영(平田榮)은 소화 19년(1944년) 7월 중순 날짜 불상 경 오후 7시경 경성역 구내 남원방향 전철수 대기소에서 피고인 백천홍식(白川興植)외 여러 명의 역원과 잡담 중 이야기가 우연히 북구주(北九州,큐슈) 폭격에 미치자, 동인 등에게 '장개석(蔣介石)의 부하에 김일성(金日成)이라는 조선인으로 위대한 사람이 있다. 김일성은 일본인, 중국인, 러시아인, 미국인 등 상당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옛날의 마적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김일성은 학력도 있고 덕망도 있다. 장개석은 소련과 연락하면서 일본에 대항하고 있다. 김일성 말에 의하면 미국 비행기는 일본 본토를 폭격하더라도 조선은 폭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조선인은 안심하고 살아도 괜찮다'고 함부로 말하여 이번 대동아 전쟁 시기에 사람들의 마음에 혹란(惑亂)을 유발 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였다.
[p.2]
제6. 그달 21일 오후 9시경으로부터 다음 날 오전 1시경까지 동명여관의 내실 온돌에서 옥천용웅(玉川龍雄) 외 3명에게 옥천용웅이 숙박비 미불금 청산을 요구하자 ‘자기는 북경대학을 거쳐서 18세 때 김일성의 부하가 되었는데 이번에 길일성 본부로부터 조선 2,600만 동포를 구제하라는 밀명이 있어 여비를 받아 동지(同志) 200 명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으며 동지는 지금 선내에서 각각의 담임 지구를 순회하고 조선독립운동을 위하여 활약 중이다. 나는 충청남도(忠淸南道)를 맡아서 시골 지방을 순회하고 있는데 동포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를 인도를 계속하여서 이천육백만 동포를 위하여 활약 중이며, 여비가 모자라서 무전여행을 계속하는 중인데도 같은 동포로써 어찌하여 동정을 아무도 하지 않은지. 전라남도(全羅南道) 목포(木浦) 지방 에서는 동지 40명이 비밀 집회를 하여 조선독립운동을 의논할 때 동지 2명이 경찰 당국에 밀고하여 동지 일행으로부터 살해당한 사실이 있었다.”는 취지의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유포함으로 인하여 치안을 방해하고,
제7. 그달 14일 오후 10시경 및 동월 21일 오후 6시경 2회에 걸쳐서 동명여관 제 13호실 온돌에서 동숙자인 목촌규성에게 '나는 18세 때부터 김일성의 부하가 되었는데 김일성은 공산주의자이다. 라고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유포함으로써 치 안을 방해한 자이다.
피고인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인데 소화 20년(1945년) 4월 10일 오전 10시경 거주지 마을(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소류지(小溜池) 공사장에서 공사장 인부 남충원 (南忠元) 외 6명에게 “김일성(金日成)이 동경(東京)에 와 큰 소요를 일으키니 백의를 입어 일본인과 구별되게 해야 한다. 또 적의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보니 조선인이 타고 있었다." 라고 말해 시국에 관한 조언비어를 한 자이다.
제1. 피고인들은
(1) 소화 19년(1944년) 3월 어느 날 피고인 금정태영의 위에 적힌 거주지(금산군(錦山郡) 금산읍)에서 회합하여 우리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총유(總有) 방해를 배제하고 현재 만주국에서 활약중인 김일성(金日成)의 부하가 되어 조선독립을 위하여 활약하자고 합의하였다.
[p.1] 제1. 피고인 곡산영덕(谷山永德)은,
(1) 소화 19년(1944) 10월 초순 날짜 불상 오후 6시경부터 동 7시경까지 자기의 근무처인 경성부 중구 남미창정 81번지 겸익안사 합명회사 사무실에서 상피고인 금성재선(金城在善), 청수창길(淸水昌吉) 및 산본차정(山本次正), 금본인태(金本仁泰), 덕산의가(德山義架) 등과 잡담 중 동인(同人) 등에게 ‘김일성(金日成)은 일본 장교로 변장하고 하루핀(ハルヒン)[6] 적십자병원에 입원하고, 퇴원 후 동인이 병원에 사실 자신은 군인이 아니라 조선의 김일성이라고 통고했던 적이 있다. 김일성은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여 조선민족을 행복하게 하려고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영웅이다' 라고 말을 퍼트려 정치에 관해 불온(不德)한 언동(言動)을 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판결문

독립운동사자료집 12 : 문화투쟁사자료집 - 성명 목야경성(牧野警聲) 당 28세 등 판결 : 소화 20년(1945년) 형공(刑公) 제481호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7) : 공훈전자사료관
[p.1126] (3) 동년(1943년) 11월 하순 동소(同所)에서 동녀(同女)에 대하여, 만주에는 김일성(金日成)이라는 조선독립운동가가 있어서, 동인은 원래 조선에의 민족해방운동에 힘쓰던 중 검거를 피하기 위하여 만주국으로 도망한 자인데, 다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신인(神人)처럼, 6일 앞의 일을 예지(豫知)하는 영웅이라고 말하고, 또 조선 국기를 손가락으로 그려 보이고 조선도 전에는 찬연한 독립국가였다고 말하고,...
이 김일성은 신화화된 인물로 북한 김일성으로 볼 수 없다.
p.8 : 만주 김일성 귀선(歸鮮) 독립운동
pp.7~8 : 김일성부하가 되려함.- 김일성은 만주 소련에서 활동
강덕재(康德在, 1920~1994) / 康秀雄 독립운동자공적자료
pp.9~10 : 김일성은 사관학교 졸업
민족의식을 유포하고 일본의 패전을 논함, 김일성이 이끄는 독립군이 조선으로 진입할 것이라 유포함
장봉숙(張鳳塾, 1920~2004) / 玉山鳳塾 : 독립운동자공적자료
pp.19~20 김일성, 임시정부(假政府), 장개석(蔣介石)...
p.9 : 김일성 처로 갈 계획

고려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컬렉션 판결문

  • 금풍진규(金豊鎭珪, 金鎭珪)의 판결서(判決書) : 1943-01-29 (海州地方法院 판결일 1942.12.26)
1943년 1월 29일 海州地方法院 檢事正이 송부한 문건으로, 黃海 信川郡 金豊鎭珪(金鎭珪)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의 판결서로서 단기 2년 6월, 장기 4년이 선고되었다.
금풍진규(金豊鎭珪)의 판결서(判決書) : 100-026. 鮮內검사국 정보 -6 p.361 고려대학교 도서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컬렉션
p.365 만주 김일성
鮮內檢事局情報 : 1943년 (100-026) : p.339 (국회도서관)
p.342 만주 김일성
  • 이원영무(利原永茂, 徐澤均)의 판결서(判決書) : 1943-01-19 (海州地方法院 판결일 1942.12.26)
1943년 1월 19일 海州地方法院 檢事正이 송부한 문건으로, 黃海 鳳山郡 利原永茂(徐澤均)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의 판결서이다. 당사자는 징역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원영무(利原永茂)의 판결서(判決書) : 100-026. 鮮內검사국 정보 -6 p.369 고려대학교 도서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컬렉션
p.375 만주 김일성
鮮內檢事局情報 : 1943년 (100-026) : p.346 (국회도서관)
p.352 만주 김일성
이원영무(利原永茂)의 판결서(判決書) : 1943-01-19 : 한국민족해방운동사자료집7권, 공훈전자사료관
p.7 만주 김일성

변은진(卞恩眞)이 수집한 사례들

p.172 : 변은진(卞恩眞), 《만주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여론대책과 조선민중의 인식에 대한 여론대책과 민중인식》
pp.185~188 : <‘김일성 부대’에 관심을 가졌던 국내와 일본의 소규모 비밀결사운동 사례>[7]
pp.195~197 : 김일성대(隊)의 활동[8]

변은진은 자신이 발굴한 위의 기록들에 나오는 김일성을 만주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 즉 북한 김일성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명한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는 1920년경부터 전설처럼 퍼졌으며, 항일연군의 김일성 때문에 비로소 유명해진 것이 아니므로 그가 발굴한 기록들에 나오는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런 기록들은 당시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했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북한 김일성이 유명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더구나 보천보 사건이나 혜산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도 아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은 1936년 가을 ~ 1937년 말 기간은 제1로군 6사장 김일성이고, 1939년 ~ 1940년 7월 기간은 제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다.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제2방면군장이 북한 김일성이다. 하지만 당시는 문맹율이 80%를 상회하고, 신문 구독자 수도 상당히 제한적인데다, 후면에 조그마하게 난 기사를 굳이 찾아 읽는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내용도 대부분 양민들 약탈하는 것이라 이런 신문 기사들 때문에 북한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졌다고 보기 어렵다. 제2방면군장이었던 북한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했고, 해방 때까지 소련군 88여단에 있었다.

또 당시 사람들이 항일연군의 김일성 이름을 들었더라도 일찍부터 알려졌던 유명한 김일성 장군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분간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일제시대에 일찍부터 널리 퍼져있던 신화적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 북한 김일성 본인도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교육을 받고 자라, 자신이 마치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이름을 따라 쓰기 시작했고, 해방 후 평양에 와서도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다 가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pp.182~183]

3. 일제말 소규모 비밀결사운동의 ‘김일성 부대’ 인식

1) 항일비밀결사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의 인식

일제말 전시파시즘기에 저항과 항일을 꿈꾸던 민중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민족운동세력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의 항일무장부대였다. 당시 동북항일연군으로 편제되어 있던 만주지역 조선인 항일무장투쟁세력에 대해, 청년학생 등 일반 조선인들은 주로 ‘김일성 부대’라고 불렀다.
‘김일성 부대’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이유는 조선 내에서 이렇다 할 만한 민족운동세력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던 지역이 만주였으며,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대만(對滿) 정책의 변화로 인해 만주는 일반 조선인도 자주 왕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 무장부대의 존재는 1937년 ‘보천보전투’나 이후의 검거사건인 ‘혜산사건’등으로 인해 『동아일보』 등 신문지상에 몇 차례 보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이래 조선인이 무장력을 가지고 국경 일대에서 일본군·경찰과 ‘직접’전투를 전개했다는 사실은 풍문을 통해서도 이미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1920년대 초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활동이 있기는 했으나 오랜 기간 개별적인 테러 외에 조선인이 조직적으로 ‘직접’ 일제의 무장력에 맞서 싸웠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국내 진격을 목적으로 ‘조선인부대’가 무장투쟁을 전개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청년학생층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여전히 조선인의 문맹률이 높았고 언론매체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소식을 접하기에는 한계가 많았지만, 이러한 소식은 국경 근처나 만주를 왕래하던 주민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풍문을 통해 전달되는 ‘사실’들은 오히려 조선민중에게 여러 가지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김일성을 둘러싼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일정 부분 사실에 부합하기도 했으나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으로 퍼져 가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김일성에 대한 ‘신화 창출’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함께 보기

제가 북한에 방문해보니 일제시대의 김일성 장군은 실존인물이었으며 역사적으로도 실제로 젊은 나이에 항일투쟁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내용을 북한에 가서 실제로 알고 느껴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사를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진술하기도 하였던 점(증거기록 제347면) 등을 종합하여 보면, ....

각주

  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1286000、本邦内政関係雑纂/植民地関係 第二巻(A-5-0-0-1_1_002)(外務省外交史料館)」標題:6.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昭和19年(1944年) 11月 18日> p.8
  2. 보천보사건#북한 김일성은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알지도 못해 : 우남위키
  3. 鎌田沢一郎(1894-1979), 『朝鮮新話』 (東京, 創元社, 1950.11) p.384
  4. 장세윤(張世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1권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009년 11월 20일) p.277 : 제5장 중국공산당 만주조직과 한인들의 민족운동 / 3. 동북항일연군 제1군 6사의 활약 -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
  5.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 列傳』(신문화사, 1974) pp.73~79.
  6. 중국 헤이룽장성(黑龙江省, 黑龍江省)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시를 말하는 듯함.
  7. 변은진,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 (선인, 2013)의 1장 4절, 5장 3절
  8. 변은진, 『일제말 항일비밀결사운동 – 독립과 해방, 건국을 향한 조선민중의 노력』 (선인, 2018), 268~2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