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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는 잡지《삼천리(三千里)》 1937년 10월호에 실린 기사로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장(惠山鎭支局長) 양일천(梁一泉, ? ~ 1946)이 썼다. 내용은 만주 장백현 19도구(長白縣 十九道溝)에 사는 지주 김정부(金鼎富, 1864 ~ ?)가 1936년 8월 31일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 1937년 3월 3일 구출될 때까지[1] 갇혀 있는 동안 1936년 12월 6일에 김일성을 만나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삼천리(三千里)』 1938년 11월호에 대화의 속편이 이어진다.

이 문헌은 당시 활동하던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동일인인지 아닌지 판단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다.

이 회견기에 나오는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으로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에 나오는 지주 김정부 관련 내용은 거의 모두 조작이다.[2]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해설

잡지《삼천리(三千里)》의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와 그 속편은 마적 및 동북항일연군 산하 김일성 부대에 의한 양민들의 피해와 고통에 대해 많이 다루고 있고, 또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었던 만주 장백현의 지주 김정부가 '마적두목' 김일성을 회견하며 문답한 내용도 나온다. 북한은 삼천리의 이 기사와 지주 김정부의 이야기를 조작하여 김일성 미화에 이용하고 있다.

마적과 김일성 부대에 의한 양민의 피해

잡지《삼천리(三千里)》의 기사에는 장백현의 지주 김정부(金鼎富)정도익(鄭道益) 등이 1936년 가을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 가서 겪은 고초와 아울러 장백현내의 양민들이 마적단과 동북항일연군 및 그 산하 김일성 부대에 의해 당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 등의 피해에 대해 자세히 나온다.

양민들은 마적단에 피해를 당하고, 그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약탈한 물자들을 본거지까지 운반해 주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또한 비적과 내통 또는 협력했다는 소위 통비(通匪)의 혐의로 관에도 불려가 취조를 당하고 옥살이를 하기도 하는 등의 이중고(二重苦)를 겪었다.

이 기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김정부가 산채에 갇혀 있을 때인 1937년 1월 25일에 김일성 부대는 김정부가 장백현 십구도구 상관방자(十九道溝 上官房子) 마을에 설립하여 운영하던 종산학교(宗山學校)에 방화하여 소실시킨다.[3][4][5]

지주 김정부는 김일성 부대에 의한 최대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장백현 지주 김정부가 김일성과 나눈 대화

장백현 지주 김정부는 1936년 8월 31일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가서 갇혀서 고생을 하다 이듬해 3월 3일 산채를 습격해온 토벌군에 의해 구출된다. 산채에 갇혀 있는 동안 1936년 12월 6일에 두목 김일성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내용이 실렸는데, 김일성의 신상에 대한 말이 좀 나온다. 회견기 속편에서는 김일성이 나이는 24세이고, 평양 출신이라고 말하지만, 또한 장백현으로 온지 30년이 넘었다고 하고, 간도에 부모와 처자가 있다고 했다.

24세인데 장백현으로 온지 30년이 되었다고 하니 말이 앞뒤가 맞지 않으며, 간도에 부모와 처자가 있다고 한 것은 부모가 모두 죽고, 처자도 없는 북한 김일성과 다르다. 6사장 김일성이 극비로 해야할 자신의 정확한 신원을 피납자에게 말해 줄 리도 만무하므로 이 말을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경성일보(京城日報) 1936년 9월 11일자 김정부 납치 기사에는 김일성의 출신지가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甲山郡 會隣面 石陽里)라 하였다. 회린면 석양리(石陽里)는 석우리(石隅里)의 착오로 보인다. 6사장 김일성이 갑산군 회린면 출신이란 기록은 다수 있으므로[6] 이것이 사실일 것이고, 평남 대동군(大同郡) 출신의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증거이다.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삼천리(三千里)』 기사의 원문 이미지가 있음.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백의동포(白衣同胞) 14명과 함께 인질로 「마적」대에 잡혀서
장백산(長白山) 밀림 속에 인질로 잡혀가서 인간의 고초란 고초를 다 맛보고, 요행 탈출하여 나온 이 피의 눈물의 기록
장백현(長白縣)은 백두산(白頭山) 밑 무서운 드메산꼴임으로 매우 숲 깊어서 본래 마적의 소굴로 유명하거니와 작추(昨秋)부터는 북만 일대(北滿一帶)에 있는 마적까지 엄습하여 큰 수라장을 일우어 놓었다.
현내(縣內) 우리 동포가 3천 호 - 2만 여의 인구를 산(算)하는데 작년 7월 이후 6개월간(六個月間), 물경(勿驚)! 방화 소실(放火 燒失)된 가옥이 천여 호(千餘戶) - 피해 인원(被害 人員)이 만(萬)에 달(達)하거니 그 참담한 광경은 너머나 심하지 않었는가. 더구나 이것이 천재지변이 아니고 인간의 작란(作亂)인데야 어찌하랴! 돈을 빼았기고 양식과 집을 잃은 수많은 동포들은 설풍(雪風)찬 이역에서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지금 어느 곳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이 봄을 맞이하는가.
북국(北國)의 봄은 오로지 유랑민의 봄이다. 압록강두(鴨綠江頭)에는 보찜과 이불찜에 박아지를 조롱조롱 매여달고 강을 건너가는 이도 많지만 대부분이 강을 건너온다. 웨-만주(滿洲)에 살지 않고 오느냐고 무르면 그들은 힘없는 소리로 「그놈들의 성화에 집 불 질으고 양식 빼앗기고 어찌 살겠오...」하고 한숨을 지운다. 어느 해인들 강을 건느고 오는 이 없으리마는, 이 해 이 봄은 그 수가 더욱 많은 데야 어찌하랴!
마적(馬賊)! 그들은 웨 산중에서 칼을 갈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인간을 잡어 먹는 업(業)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가... ...지난 4월, 장백현(長白縣)의 피납동포(被拉同胞) 14명이 일시에 마적굴을 탈출하여 나왔다.
그들의 모험담과 마굴(魔窟)의 흑막(黑幕)을 알고저 필자는 장백(長白) 시내의 김정부(金鼎富)·정도익(鄭道益) 양씨(兩氏)를 찾었다. 그들은 마적굴에서 7, 8개월이나 신음하든 분이라 얼굴이 붓고 상처가 많으며 고로(苦勞)가 역력해 보인다. 병여(病餘)의 몸이라 겨우 이야기는 시작되였다.

극적 광경(劇的 光景)의 납거(拉去)
정도익씨(鄭道益氏)가 붙잡히든 때는 작년 9월!
「산우욕래풍만루(山雨慾來風滿樓)[7]」!
비가 오려면 바람이 가득 찬 것 같이 그 때의 장백 18도구(長白 18道溝) 일대는 긴장된 공기 속에서 개만 짖어도 가마귀만 울어도 야릇한 생각만 떠돌았다.
「쉬-총소리가 나네」
「이 사람들 도망갈 생각말고 꼼짝 말고 업드리게」
이렇게 노루 잡는 포수의 총소리에도 가슴을 놀래이며 불안과 공포 속에서 그날 그날을 보내였다. 18도구(18道溝) 신도리촌(新道里村) - 그 곳에는 10여 호 소작 농가가 있다. 바로 이 마을의 지주(地主)님도 벌서 마적의 독아(毒牙)에 사로잡히였고 어느 날 새벽에는 그네의 대부대(大部隊)가 이 동리를 통과하였고 익조(翌朝)[8]에는 서슬이 시퍼런 토벌대가 들어 밀었다.
총칼이 번적이고 말발굽 소리가 요란할 때 군대 통역(軍隊 通譯)님이 무엇이라 말을 전하였는지 그들은 눈알을 굴니며 호령을 나리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벌 떨기만 하는 것이다.
이 동리에 2, 3차나 폭풍우가 지나간 9월 19일 밤 마적의 일단이 정(鄭)씨의 집을 돌격-덮어놓고 결박을 지여 끌어가니 그 날 그 밤의 18도구(18道溝) 일대는 먼 촌의 개 짖는 소리조차 무시무시한 판이니 험악한 대륙의 공기는 모든 인간을 삼킬 듯이 암흑의 입을 버리고 있지 않은가.

암야 고행 백여리(暗夜 苦行 百餘里)[9]
30여 명 마적이 만인 지주(滿人 地主) 7인을 벌서 묶어 오고 황우(黃牛) 20여 수(首)를 약탈해 오고 식량을 공작해 온 것이 그 운반인부(運搬人夫)만 100여 명! 이렇게 그들은 이번 길에 득의 양양하야 본굴(本窟)로 행각(行脚)하는 판이다. 이 밤에 동천(東天)을 바라보니 이도강 시가(二道崗市街)가 화광(火光)이 충천(衝天)이요 총성이 은은(殷殷)하니 저기도 습격을 당하야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할 때에 잔학한 그들 행동이 더욱 알미워었다.
정(鄭)씨는 두 팔에 팔자에 없는 결박을 당한 채 어슬넝 어슬넝 끌려가는 소(牛)모양으로 오라는 이도 없고 가라는 이도 없것만 아니 끌여가지 못하는 서름 길을 어이하랴!
이대로 끌여가서 영영 죽엄 길이나 그렇지 않으면 다시 인간 셰상을 보는 날이 올까 하고 실망과 희망의 길이 괴로운 가슴속을 설네였다고 한다.
밀림 속으로 밀림 속으로 밤길 100리를 엎어지며 잡바지며 힘없이 끌여오고 나니 날이 밝었다는데 흑(黑)사자골에서 김일성(金日成)을 두령으로 한 본대(本隊)에 와서 3일을 류(留)하게 되였다.

삼엄(森嚴)한 훈련(訓陳)
첩첩산중 골 깊은 곳에 삼림이 무진장(無盡藏)으로 쌓여 있고 그 속에 나무를 베여 겨우 적은 비를 피할 만큼 적은 초막을 10여 개소(個所) 지여 놓고 약 300명의 일대(一隊)가 주둔하고 있다. 다갈색(茶褐色) 혹은 황갈색(黃褐色) 군복에다 가죽(狗皮)모자와 지하(地下)다비신을 신었고 담총(擔銃)한 무기는 구비(具備)하였다고 한다. 비록 그들은 산중으로 잠행(潛行)하며 조밥을 먹으며 단여도 검으테테한 그 얼굴은 모다 씩씩해 보였고 건강해 보였다고 한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마적단(馬賊團)하고도 소파당(小派黨)들을 총 연합(總 聯合)시켜 「항X연합군(抗X聯合軍)」이라 하고 연설도 하고 격려도 해 가며 정신적 훈련을 해 간다고 한다.
중에는 만주인(滿洲人)과 조선인(朝鮮人)이 각(各) 반수(半數)를 점하였으며 담총군복(擔銃軍服)한 여자도 10여 명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조직체계를 보면

10명이 1반(班)이 되고(十名爲 一班)
3개 반이 1패(牌)가 되고(三班爲 一牌)
3개 패가 1단(團)이 되며(三牌爲 一團)
3천명이 1사(師)가 된다(三千名爲 一師).[10]

이렇게 반(班)에는 반장이 있고 패(牌)에는 패장(牌長), 단장(團長), 사장(師長) 등 지휘자가 있어서 군령을 절대 복종하여 일동일정(一動一靜)을 일사불란(一絲不亂)히 한다고 한다. 탐보군(探報軍)이 소식통(消息通)을 가지고 통신연락(通信連絡)을 민속(敏速)히 하고 출장대(出張隊)가 식량을 탈취해 오고...... 쉬- OO에서는 지금 전쟁을 하는 중이며 토벌대는 OO구(OO溝)까지 돌입하였다. 그리고 군대 밀정인 듯한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런 정보가 비래(飛來)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들 수뇌부(首腦部)는 긴장한 얼굴로 수구밀의(首鳩密議) 모반모대(某班某隊)를 명하야 제1선(第一線)의 방어진을 배치하는 것이다.
대내(隊內)에는 비품, 식량 공급 등 내부적 역할을 다하는 내무부(內務部)가 있고 군대의 감독 원정 등을 지휘 외정(外征)을 총섭리(總攝理)하는 외무부(外務部)를 두고 각 부에는 부관(副官)을 (呼名曰 푸관) 두어 일을 처리해 간다.

<40>

내무부는 심심산곡(深深山谷), 운심임심부지처(雲深林深不知處)[11]에다 그 사무소를 두고 수뇌부(首腦部) 이외에는 그 소재를 알지 못하게 되여 있고 위험하게 되면 내무실(內務室)을 어데로 이전하겠다는 만일의 준비까지 정돈하고 있는 모양이다. 외무부(外務部)에서 공작해 온 식량과 물품과 병기는 전부 내무실(內務室)에 보관해 둔다.
「푸관님 신 한커레 주소. 다 헤여젓읍니다」하고 아츰마다 병졸들이 청구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엇잿든 내무실(內務室)은 그들의 생명의 창고다. 이것을 토벌 당하는 날 그들의 생명도 마지막이다.
매일 수백 명 인부가 식량을 가지고 이 산곡(山谷)으로 저날은다. 그리고 탈취해 온 우마(牛馬) 수백 수(首)!

농민(農民) 이중고(二重苦)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이 있거니와 마적과 토벌대 등살에 죽어 나는 것은 농민이다. 조선(朝鮮)에서 월강(越江)한 궁민(窮民)이니 산간(山間) 화전에 귀리 감자를 심어 연명하는 그들이어니 마적들은 *착하게도 양식을 빼아서 가지고 토벌군과 연락을 취한다는 구실노 덮어놓고 구타도 하고 방화도 한다. 그리고 일시(一時)에 수백 명식 양식을 지여 가지고 목동이 도야지 떼를 몰고 가듯이 사정없이 채찍으로 때려 가며 산중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한설북풍(寒雪北風) - 눈길 백 리를 끌여갔다 온 그들은 수족이 얼고 끈어지고 생명까지 잃은 자가 장백(長白) 일대에 너머나 많다는 비보(悲報)를 필자는 항다반(恒茶飯)의 일같이 들었다.
「마적에게 식량과 금품을 공급하거나 연락을 취한 자는 마적으로 인(認)하고 즉시 총살함」 이것은 현내(縣內) 요처(要處)에 붙은 서슬이 시피런 포고문(佈告文)이다. 상기와 같은 죄명으로 2개월 전에 K라는 사람이 총살당하는 것을 목도(目眺)하였고 H, K, K 8인의 벗이 의심을 받어 1개월 동안이나 옥중고(獄中苦)를 겪든 일을 나는 기억한다. 「여보게 극비밀(極秘密)일세. 손발이 얼어 떠러저도 방안에서 고이 죽지 마적에게 양식을 날너주었다는 소문이 나면 큰일나네」 이렇게 벌벌 떨기만 한다.
토벌군도 산간 농가에 방화를 한다. 그 이유는 산간에 농가가 있음으로 마적이 의접(依接)한다는 것이다. 지금 집단부락을 실현 중이어니와 천여 호 방화를 맞인 농가이다.
장백현내(長白縣內) 방화 소실된 가옥을 약기(略記)하면

16도구 두도소구(十六道溝 頭道小溝) 66호
대덕수촌(大德水村) 42호
신창동(新昌洞) 50호
소문언동(小文彦洞) 15호
7형제동(七兄弟洞) 72호
천교학교촌(天橋學校村) 60호
함흥촌(咸興村) 46호
군량동(軍糧洞) 50호
독동 덕리(獨洞德里) 50호
요방자(要房子) 50호
도천리(桃泉里) 107호
도망(逃亡)골 70호
김정부촌(金鼎富村) 140호
마O자(馬O子) 20호
삼구상리(三溝上里) 20호
20도구 상리(二十道溝 上里) 20호
8도구 내면(八道溝 內面) 300여호
(작년 12월말 현재)

감옥행(監獄行)
각지의 출장대(出張隊)가 활동을 해서 양식(糧食)바리가 들어오고 인질도 잡어오는 사람이 하나하나 늘어가더니 정씨(鄭氏)는 4, 5인 마적에게 옹호(擁護)되여 백여 리 되는 심곡(深谷) 감옥(監獄)으로 들어가는 판이다. 저승길을 것듯이 한없이 적막하고 쓸쓸한 길이였다.
때때 9월! 만주(滿洲)의 가을은 덧없어서 어느 듯 백설이 날니고 모진 북풍이 사정없이 불고 주인도 없는 듯한 황막한 들판 - 노루와 사슴이 멋대로 뛰고 송풍(松風)은 스르릉- 물 흘으고 새가 노래하는 대자연의 아취(雅趣)야 변함이 있으랴- 그러나 두 팔을 묶기여 가는 그에게는 모든 것이 울음이요 서름이였다.
낙엽(落葉)! 그는 발길에 짓밟히는 가여운 낙엽이 아니냐. 그는 아픈 가슴을 부둥켜안꼬 오직 한을(하늘)을 처다보고 묵도(默禱)를 올였다.
「하눈님이여!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여 이 죽엄 길을 것게 하나이까. 그저 불상히 역이사 살여주옵소서」
이렇게 그는 몇 번이나 눈물을 흘니며 애원했는지 모른다.
아! 가여운 인생의 마지막 길이여!

옥중봉고인(獄中逢故人)[12]
옥! 그 곳은 방향조차 알 길이 없는 심곡(深谷)! 울창한 수목, 길 넘는 황초(黃草) 속, 겨우 풍우(風雨)를 피하도록 초막(草幕)을 지여 놓고 그 속에 결박을 지여 앉처 놓았는데 그 중에서 정씨(鄭氏)는 자기보다 1개월이나 먼저 입옥(入獄)한 김정부(金鼎富), 김정칠(金鼎七), 허봉래(許鳳來), 허룡*(許龍*) 제씨(諸氏)를 반가히 맞났다는데 옥중 봉고인(獄中 逢故人)은 더 한층 반가웟다고 한다.
이 옥(獄)에는 조선인(朝鮮人)이 5인 만인(滿人)이 9인 그리고 간수가 6인 여간수가 1인! 이렇게 옥중 살님을 게속해 간다.
오던 날 익일(翌日) 아츰 만인(滿人) 강수산(姜壽山)씨가 절명(絶命)! 그는 60 고령(高齡)이라 식음(食飮)의 부적(不適) 심신의 과로 등으로 기진 맥진하야 죽었는데 씨(氏)는 일즉이 장백현립(長白縣立) 정몽학교장(正蒙學校長)으로 있든 분으로 지덕이 겸비한 노인이였다는데 이렇게 비통한 최후를 마치게 됨에 일반은 눈물노 조의(吊意)를 표(表)했든 것이다.
바로 강씨(姜氏)가 죽기 수일 전 정치진씨(鄭致鎭氏)(二十道溝 鐵路頭人)는 그들에게 총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한 달에도 몇 번식 초상(初喪)을 치른다고 하는데 그들의 애닯은 혼이 있다면 밤마다 소리처 울 것이다.

옥중 7개월(獄中七個月)
옥중의 일상 생활은 극히 간단하다.
1일에 보리죽물 2완(二碗)[13]식 먹는 것.
수면(睡眠)은 1일에 꼭 3시간 자는 것.
대소변은 1일 2회 여렀이 일시에 출입하는 것.
이것은 어대까지 규칙적 실행(實行)이다. 만일 조을거나 바지에 소변을 싸게 되면 규칙 위반이니 간수님은 사정없이 방망이로 내려 갈닌다. 그들이 심심산곡(深深山谷) 옥중에서까지 팔에 노끈을 풀지 아니하고 혹독한 악형을 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마적과 옥중인은 서로 적이 아니냐. 적을 양(養)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옥인(獄人)은 언제나 마적을 타살하고 도주할 기회를 였볼 것이니 차라리 그들의 영양(營養)을 부족케 하고 수면을 적게 하야 원기를 죽여서 도주할 기력이 없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자위책인 것이다.
그들의 정책이 이러하매 육신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라 犯則을 아니해 내는 재간이 없다고 한다. 하로에 몇 번식 조을고 어더 맞고 바지에 오줌을 싸서 머리를

<41>

얻어맞고... 이와 같은 일은 보통으로 당하는 일이어니와 속탈이 나서 설사를 맛났을 때 정씨(鄭氏)와 이씨(李氏)가 옷에 오물을 싸서 멫 번이나 독한 매를 얻어 맞었다고 한다. 아-그들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리라. 너머나 심하지 안으냐... ...아니, 그래서 「마적」이란 별명을 가지지 않었든가.
일과는 매일, 판에 박은 듯이 한걸같었다. 조을고 매맞고 오줌싸고...이렇게 한 달을 지내고 보니 영양이 극도로 부족되여 언제든 밥이나 한번 먹어 보았으면-하고 원(願)뿐이였다고 한다.
밥으로 사는 인간이 밥을 못 먹을 때에 괴로움! 그것은 너머나 큰 고통이 아닐까.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이 밥 뿐이요 그 때에 전부는 밥! 그것 뿐이였다 한다. 10월에 어느 날 아츰 샘(泉)에 물 길너 가든 틈을 타서 김만춘군(金萬春君)이 놈들의 총알과 경주(競走)를 해 가며 도망해 나왔다. 그는 용감한 남아다. 그 철망(鐵網)을 버서나 뛰어나온 것은 범인(凡人)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로부터는 박해가 더욱 심하야 김(金)의 괴로을 옥인(獄人)들이 분담하였다고 한다.
10월, 11월 옥중에도 뜻 없는 세월은 흘넜다. 자연의 절후(節侯)야 사정(事情)이나 있으랴. 만주(滿洲)의 산야(山野)에는 길 넘는 백설이 덮이고 때때로 매운 바람은 불어서 치위는 빼살을 어여냇다.
온돌도 없는 초막 속에 우등불 놓고 쪼인다. 8, 9월에 겹옷을 입고 간 것이 겨을 한 바람에야 그 무슨 방한(防寒)이 되랴. 그저 살이 노랗게 구어지도록 이렇게 5개월 간이나 우등불을 쪼이고 나니 얼굴이나 살이나 모다 시커먹코 눈만 샛별처럼 멀둥 멀둥한 것이 건들바람에도 쓸어질 듯한 허수아비와 같은 인형! 흑인도 황인도 아닌 산중의 일대괴물(一大怪物)임에 틀임없었다.
옥(獄)에서 20리 상거(相距)되는 곳에 내무 푸관실이 있다. 간수님이 푸관에게 한 번식 갔다 오면 대우살식(大牛殺食)! 탈취한 소를 잡는다. 그 고기는 놈들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눈 속에 파묻어 놓고 저이들끼리 먹고 겨우 먹다 남은 앙상한 빼만 옥인(獄人)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빼를 가지고 상가구 쟁골격(喪家狗爭骨格)[14]으로 싸움판이 벌어저서 서로 먹고살겠다고 눈이 벌것다 한다.
김정부옹(金鼎富翁)은 당년(當年) 73. 그는 관방자(官房子)의 지주였든 관계로 이 늙은이는 이 몹쓸 고생을 겪는데 이번까지 마적에게 납거 신음(拉去 呻吟)하기 범(凡) 3차. 1년 혹은 반년(半年) 식 가진 고초와 풍상을 다 겪은 옥중의 가장 원로요 경험자다. 그러므로 대소사를 그의 지시로 처사(處事)한 일이 많었다고 한다. 노인(老人)이라 마적들도 후대(厚待)는 하였다고 하나 그의 원기는 아직도 씩씩하고 노당익장(老當益壯)하시다.
옹(翁)의 이야기로 들으면 마적단도 10년 전보다는 개명하였다고 한다. 위선 아편을 들 먹는 것. 규율이 엄정한 것. 훈련을 잘 받은 것 등 그들도 이지적으로 일을 전개시킨다고 한다.

김일성 회견(金日成會見)
「마적 대장 김일성(金日成)」이라 하면 국경 일대에선 너머나 알니엇고 신문지(新聞紙)나 본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리라.
총사장(總師長)이란 이름을 가지고 X에 가까운 만인(滿人), 조선인(朝鮮人) 부하를 이리저리 통제해 가며 습격 싸홈, 완강히 군대와 저항해 가며 산중 소굴을 지휘해 가는 그! 그는 과연 어떤 인간인고?
김정부옹(金鼎富翁)은 많은 흥미를 가지고 이 수수꺽기의 인간을 회견하였든 것이다.
후리후리한 키, 우락부락한 말소리 음성을 보아 고향은 평안도(平安道)인 듯. 예상보다 연령은 너머나 젊은 혈기방장(血氣方丈)[15]의 30미만의 청년. 그는 만주어(滿洲語)에 정통, 어대까지 대장이란 표적(標的)이 없고, 복장, 식음(食飮)에까지 하졸과 한가지로 기거를 같이하며 감고(甘苦)를 같이 하는데 그 감화력과 포용력이 잇는 듯하게 보엇다.
「노인(老人)님 추운데서 얼마나 걱정되십니까」 그는 먼저 이렇게 부드러운 말노 인사를 들이고는
「모측(某側)의 정보에 의하면 노인(老人)님이 5만원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남래(拉來)한 것인데 기후(其後) 사실을 조사한 결과 무근의 설임을 알었읍니다. 노인(老人)님이 설사(設使) 기천 원의 전 재산을 우리에게 납부하는 것은 우리는 남의 돈을 빼았는 것이여서 즐겨하지 않읍니다. 그리나 우리는 우리 일이 잇스니 부득이 하지요... 」
「이런 고생을 왜 시키느냐구요? 노인(老人)님 우리가 고생하는 걸 좀 체험하시여 감고(甘苦)를 아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 몸이 따뜻한 자리 평안한 생활을 누가 싫여하겠오. 2, 3일식 보리죽도 못 얻어 먹어 가며 이 고생을 달게 하는 것은 다 그리되어 그리것이요. 나도 눈물도 있고 피도 있고 혼도 있는 인간이요. 그러나 이 추운 겨을을 우리는 이러케 도라다니는 구려」
그는 생각든 바와는 좀 달느게 비적수괴(匪賊首魁)답지 안케 음성(音聲)도 조용하고 태도도 우락부락하지 안엇다.
그는 김옹(金翁)을 여러 가지 말노 위무(慰撫)해가며 지금은 엄동이라 설중(雪中)에 촌보(寸步)를 옴길 수 없고 새 봄에는 꼭 노인(老人)님을 환가(還家)시킬터이니 안심하라고 하고 부하 간수에게 특별 우대하기를 명하였다고 한다.
김일성(金日成) - 비적수괴(匪賊首魁)인 그는 골격이 여무러 보이고 말 잘하고 뱃심 있어 보이는 그! 나이에 비해서 풍상을 겪은 지라 노숙(老熱)해 보이는 그! 그는 마적 대장이라 자칭함이 그럴듯하더라고 김옹(金翁)은 여러 번 말하였다.
과연 그는 만주(滿洲) 벌판이 좁다 하고 마적 대장으로 일생(一生)을 마칠 터인가. 그의 나이 아직 점거니 방향을 전환할 것인가 써! 장래여하(將來如何)?
「토벌군이 온 듯하니 시급히 옥(獄)을 이전하라」 그 내무(內務) 부관의 통첩(通牒)이 왔다. 그리고 부관이 명일(明日)에 옥(獄)으로 갈 터이니 내일 꼭 이사하도록 준비하라는 것이다. 익일(翌日) 아모리 내무원(內務員)을 고대(苦待)하여도 오지 않음으로 그 곳에서 5리 되는 곳으로 옥(獄)을 이전하였다. 그 집은 만일의 위험을 방비하기 위하여 여름에 초막을 미리 지여 두었든 것이다. 온다고 약속한 부관은 기후(其後) 3일이 지나도 소식이 묘연(杳然)하고 식량은 벌서 다-먹어 버리고... ...일은 점점 미궁으로 들어가는 판이다. 생각다 못해 얼어죽은 말고기(馬肉)를 가저다 벌서 3일이나 먹었는데 내무부(內務部)로 가고 보니 어대로 도망을 갔는지 탱비여 있다는 보고가 왔다. 그리고 간수 한 놈이 땀을 흘니며 달녀오드니 밀정인 듯한 2명을 발견하였다. 불원(不遠)에 이곳을 습격할넌지 모르니 지급(至急)히 피신(避身)하자는 것이 그 놈의 제안이다. 놈들은 눈이 둥그렇다. 일은 났다.
「하누님이여! 이 마굴(魔窟)의 열쇠를 열어주옵소서」하고 옥인(獄人)들은 얼마나 축원(祝願)했는지 모른다고 한다.
양식도 끈어지고 여기서는 그냥 설중고혼(雪中孤魂)될 것이니 인간촌(人間村)으로 찾어가자고 보찜을 지고 떠나려고 할 때에 간수들은 너히들은 우리가 가서 식량을 얻어 올 때까지 여기에 있으라는 명령인데 그 동안에는 소미(小米) 1두(斗)와 감분(甘粉) 1승(升)이 있으니 연명하라고 하며 그들은 가 버리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궁여일책(窮餘一策)으로 줄행낭을 놓는 판국이였다.

넌센쓰극(劇) 일막(一幕)
간수 일행 떠난 지 20분도 채 못 되여서 총성은 나기 시작하였다. 콩 볶는 듯한 총소리! 그것은 너머나 장쾌(壯快)한 소리다.
총살이 비 오듯하는 옥중(獄中)에는 일장희극(一場喜劇)이 열니였다. 죽은 말고기 빽다귀 싸움. 이것은 먹고 살기 위한 너머나 무서운 싸음이 아니냐. 마골쟁탈전(馬骨爭奪戰)! 힘세고 억센 껑가(哥)놈이 정씨(鄭氏)가 쥔 것을 전부 받았고 만인(滿人)끼리 합세(合勢)를 해서 정씨(鄭氏)의 말뼉다귀를 빼앗고 노당(老黨)들은 세력가(勢力家)들에게 구걸해 먹고... 시급한 대로 감분(甘粉)으로 범벅을 끌여먹는데 서로 많이 먹겠다고 입술에다 얼굴에다 발너놓고 마지막에는 껑씨와 정씨(鄭氏)가 남비 채로 들고 도망을 가서 독식(獨食)을 하면 노파(老派)에서는 힘센 놈만 살고 늙은 것은 죽어야 하느냐고 불평이 자자(籍籍)하든 일은 일소(一笑)를 불금(不禁)하려니와 조밥을 또 지여가지고 쌀이 반(半)도 익기 전에 밥 싸움을 하던 광경은 이야기만 들어도 요절할 일이다. 인간이란 먹고 배부른 후의 일이다. 배 곺은 때에야 예절을 차릴 것이 무엇이며 금수(禽獸)에 다를 것이 무엇이랴! 층소리야 나거나 말거나 그런 것은 지금 상관할 배 아니라는 듯이 밥 싸움으로 한나절을 보내였든 것이다.

탈출(脫出)! 탈출(脫出)!
조곰 있드니 간수가 6인 중에서 2인은 어대로 가고 마러 버리엇다. 위기일발 사람을 살니라는 듯이 헐덕이며 지금 토벌군이 따라오니 주의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숨을 돌닐 새도 없이 어대론지 뺑손이를 첬다.
일은 일단락(一段落)을 고한 듯 싶다. 7, 8개월을 굼다가 처음으로 배불니 먹어 놓으니 밥에 취해서 그냥 그냥 그 자리에 쓸어저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원로(元老)인 김영감(金令監)을 모시고 회의(會議) - 양식이 떠러젔으니 여기에 있어도 죽을 바에야 인간촌(人間村)을 찾어가다 죽는 것이 죽어도 한이야 없지 않겠느냐」고 일치가결(一致可決)! 석양의 산(山) 그늘이 길에 눗고 무색(無色)한 낙조(落照)가 미련을 남긴 듯이 서산(西山)에 걸여 있을 때 그들은 지팽이를 집고 이 옥(獄)을 떠나게 되였다. 기진 맥진해 넘어진 노약자 5인은 그냥 버리고 원기(元氣) 있는 사람이나 살어야 한다고 9인만 눈길을 밟어 나왔다. 5리 길도 못되는 곳을 어두울 때까지 기여나오니 군대에선 적(敵)인 줄 알고 총을 연발한다. 기실(其實)은 지척지점(咫尺地點)에까지 군대가 와서 있고 내무실(內務室)과 옥(獄)의 통로라고는 동서북(東西北) 3면이 전부 설성(雪城)으로 막켜저 있고 오직 남행로(南行路) 일선(一線)밖에 없다. 군대에서는 이것을 알고 벌서 1개월 전부터 이 통로에 영사(營舍)를 건축하고 식량이 진(盡)해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 정책은 완전히 성공을 해서 적(賊)들은 내부(內部) 부관(副官) 이하 산산히 분산되고 옥리(獄吏)들도 도망, 옥(獄)도 파옥(破獄)! 간수 2명이 이 길노 나오다가 총살을 당했으며 그 산중에 남어 있든 간수들도 식량도 없는 곳에서 속수무책으로 아사 동사(餓死 凍死)하는 외 타도(他道)가 없었으리라고 한다.
아! 반가울사! 꽝-하고 토벌군이 놓는 반가운 총성이여! 신명(神明)이 무심치 않어 그들은 재생의 기쁨에 넘처 사력을 다하야 고함을 첫다. 「우리는 방표인이다」라고.(방표인은 적에게 붙들려갔든 사람임)
익조(翌朝) 50명 군대와 같이 옥(獄)으로 가서 넘어진 5인을 구출해 오고 매맞고 원망스럽든 마(魔)의 옥(獄)에다 불을 활-활 질너버리니 그 때의 통쾌하던 마음은 비할 데 없었다. 그리고 기운 없고 당금 넘어저가는 늙은이들도 다같이 손을 들어 「만세(萬歲)」를 소리 높여 불넜다고 한다.
혜산진(惠山鎭)·양일천(梁一泉) 기(記)

<42>

김일성 회견기 (속편)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었던 김정부가 김일성을 회견한 이야기 속편이 『삼천리(三千里)』 1938년 11월호의 아래 기사에 나온다. 필자의 이름이 나와있지 않으나, 위 기사에 이어지는 내용이므로 역시 양일천(梁一泉, ? ~ 1946)이 쓴 것이다. 이 기사의 전반부는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었다 귀순한 여당원 2명의 이야기이고, 후반부에 지주 김정부가 김일성을 회견했던 내용의 후속편이 이어진다.

  • 『삼천리(三千里)』 1938년 11월호는 아래 영인본에 실려있다.
『삼천리(三千里)』 (영인본, 서울, 한빛, 1995) : 국립중앙도서관 / 국회도서관
귀순(歸順)한 여당원(女黨員)과 김일성(金日成), 그의 운명(運命)은 장차 엇더케 될가

「마적 대장 김일성(金日成)!」
그는 국경 일대을 아직도 각금 식그럽게 하며 도라다닌다.
재작 추(再昨 秋) 북만(北滿)으로부터 수백의 부하를 거느리고 장백현(長白縣) 일대를 습래(襲來)한 후로는 국경은 이리저리 각금 수선한 상태이다. 방백현(長白縣)내에는 우리 동포가 그들노 인하야 천여 호(戶)가 방화 소실을 당했고 피살자도 수백 명! 오지 농민은 유리(流離) 사산(四散)하야 처참한 광경을 보이고 있거니 ---.
그리고 재작년 6월 4일 보천보(普天堡)를 월경(越境) 습격한 후로는 혜산진(惠山鎭)을 중심으로 경비진을 일층 강화하는 등 총검 빛나며 경비원을 괴롭게 굴거니와 만주 산간의 괴물 김일성(金日成) 그는 과연 어떤 자인가. 그 역(亦) 인간인지라 무슨 생각을 갓고 있는가. 이 수수꺾이에 인물을 알고저 요전날 자동차를 달여 무시무시한 국경선을 너머서 장백현(長白縣) 시내로 들어섯다.
구즈레한 시가 능글능글한 편발아(編髮兒) 똑박똑박 것는 편족랑(編足娘)! 최신식 모단랑(毛斷娘) 아편 중독자 등 이역(異域) 풍경이 그럴 듯 하거니와 눈알을 굴니는 파수병 그리고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 처처에 붙은 서슬이 싯퍼런 토벌 포고문 등 모든 것이 살기가 등등한 품이 이렇게 「압록강」이란 물 하나를 건느면 「화려 강산」과는 딴판인 것이다.
김일성(金日成) 부하로 5년 간이나 활약하든 여당원 두 사람이 일전에 귀순하야 나왔다는 말을 듯고 먼저 그들을 맞나려고 장백(長白) 협화회(協和會) 본부로 가서 여러 시간 기다린 끄테 겨우 그들과 이약이 할 기회를 어덧다.
그는 아직 20을 넘지 못한 샛파란 아가씨 방금, 피랴는 봉오리인 여인들! 그는 산중의 형극(荊棘)을 5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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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았고 남자 이상으로 총칼을 휘둘으며 도라다니든 그 얼굴에 지난 날의 괴롬도 가득해 보였으며 활달한 말솜씨도 명함을 내여논 기자에게 「어서 안즈시지요」하고 인사를 함으로 만주식 「캉」에 올너 앉엇다.

記.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시였나뇨. 나는 잡지사에서 왔는데 두 분이 고생하시든 이약이를 좀 들을나구요 - 」
朴. 「별 고생 없음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난 일이 모다 꿈같슴니다」
記. 「일홈은 누구심니까」
朴. 「네- 나는 박O옥(朴O玉, 20), 저 양반은 노O순(魯O順, 19)라고 함니다. 그들의 요구에 의하야 은명(隱名)함」
記. 「고향은 어듸?」
朴. 「네, 나는 북간도(北間島) 연길현(延吉縣)서 나구요. 노(魯)는 역시 간도(間島) 충신장(忠信場)[16]에서 났지요. 그래서 조선 땅에는 고향도 없지요」
記. 「어떻게 되어서 그런 길노 나섯든가요?」
朴. 「6, 7년 전 북만(北滿) 일대에는 공산비(共産匪)가 심해서 그것을 토벌하기 위해서 토벌대들이 출동했지요. 하략」
記. 「그 군대의 일홈은?」
朴. 「동북 연합군임니다」
記. 「김일성(金日成)은 어떤 자임니까」
朴. 「그는 아직 27세 밧게 안 되는 건창한 청년입니다. 그를 처음 만나기는 작춘(昨春) 무송현(撫松縣)에서 연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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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부터인데 젊은 사람치고는 퍽이나 노련된 자임니다. 그의 기본 부대는 60명 밧게 안되나 기외(其外) 수백 명 보조대가 있음니다.
그는 일동일정(一動一靜)을 경(輕)히 하지 않고 언제나 심사숙고한 후(後) 처사(處事)함니다. 그래서 김일성(金日成)은 무언자(無言者)이며 침묵을 직히며 수백의 부하를 여자 당원 11명 내에 만주인(滿洲人)이 약 반수 일사불란하게 통제해가며 외공내수(外攻內守)하는 그의 수완은 듯는 대로지요」
여기까지 이약이 하고는 사정이 있어 중단하였다.

기자는 다시 장백현(長白縣) 시내 김정부(金鼎富, 73)라는 노인을 찾어가서 김일성(金日成)과 문답한 이약이를 들엇다. 김(金)옹은 작추(昨秋) 그들이 납거(拉去)하야 7개월이나 신음하다가 탈출한 노인이다.

회견 장소 장백현(長白縣) 횡산(橫山) 북록(北麓) 산(山)채에서(소위 마적 감옥)
회견시일 재작년 12월 6일
인물 김일성(金日成) 김정부(金鼎富) 정도익(鄭道益) 외 12인 (이상 납거자[拉去者])

김(金)노인과 김일성(金日成)은 회견했는데 그 문답은 아래와 같다. (이하 김일성(金日成)을 (K)라 하고 김정부(金鼎富)를 (김)이라 약칭함)

K. 「아바지 어찌 고생합니까」
김. 「위선 굶머 죽겠소. 보리죽 물을 하로에 두 완자(碗子)[17]식 주니 늙은 놈이 어떻게 살어가나뇨. 나 뿐 아니라 여긔 납치된 십여인이 한 달을 못가서 다 죽을 것이요」
K. 「특히 노인님 많은 밥을 지여 들이도록 하겠소. 우리의 살님사리가 넉넉지 못하니 자연 그렀케 됨니다」
김. 「이렇게 농민을 붓들이 오고 하니 백성이 어떻게 산단 말이오」
K. 「내가 장백현(長白縣)으로 온 지 30년이나 되는데 그 사정은 대강 알지요. (하략)
김. 「그도 그러치만 우마(牛馬)를 잡어다 저럿케 굼겨 죽이니 너머도 잔인하지 않느냐」
K. 「일 없소. 어느 새에 그것을 다 돌보겠소」
김. 「지금 무슨 생(生)이요?」
K. 「무슨 생(生)이랄게 업소. 시방 수물 네살이외다」 (3년 전 冬에)
김. 「고향은?」
K. 「평양 태생인데 유시(幼時)에 간도(間島)로 왔소. 지금 간도(間島)에 집이 있고 부모 다 처자 다 있소. 집에서는 생활도 넉넉한데 나는 보리죽을 먹으며 이 고생을 하오」
김. 「어듸 김(金) 씨요?」
K. 「선산(善山) 김(金)가 올시다」
K. 「그리고 여긔온 수인(囚人) 여러분들 들으시요. 여러분들 집에서도 기다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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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고 해서 보내 들이겠는데, 지금은 외분(外奔)하고 또 눈이 「백설(白雪)」 한 길식 쌓여서 좀 날이나 따뜻해이면 도라가서 농사를 짓도록 할 터이니 안심하시요」
김. 「그런데 대관절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는 거요」
K. 「여러분이 우리를 차저와 돈을 줄 리는 없고 먹고 남는 것 좀 보조해 달나는 말입니다. 1원도 좋고 10원도 좋고- 」
김. 「백성을 죽이고 잡어 오고 못살게 구니 무슨 일이 되겠소」
K. 「략(略)」
김. 「나 역(亦) OOO시대에 일해본 적 있지만 그렇게 일이 쉽사리 되여질 것 갓지 안소. 내 보기에는 당신네가 집 자리 보러 단이는 폭 밧게 아니 될 듯 하오」
K. 「아바지는 늙은이가 되여 잘 모름니다. 보리죽도 우리에겐 과한 줄 아오. 일을 위해서는 적은 일을 돌보지 말아야지요」
김. 「장백부(長白府)를 치겠는가」
K. 「장백(長白)는 한 시간이면......... 그러나 산세 지리가 3일을 점령치 못할 지역이다. 공연히 생민(生民)에게 고(苦)를 준다면 그 무슨 이덕(利德)일가 철없는 부하들은 치자고 하지만 나는 절대 불응했소. 기외(其外) 강안(江岸) 십여 소(小) 시가는 다 한 번식 손을 대였지요. 말하자면 우리 본대는 북(北)에 얼마든지 있고 우리는 지금 압록강 안(岸)으로 시찰온 것이요- 」
이렇게 장시간 그들의 문답은 계속하였다고 한다.

김일성(金日成)
그는 아직 혈기 방창(方漲)한 27세 청년! 그는 대세에 순응하여 수백의 부하를 거느리고 귀순하여 선량한 국민이 되여 새 세상을 보게 될 것인가 그러치 안으면 만주 산중의 마적화 하야 약탈 殺익을 일삼을넌지 - .
근일(近日)도 국경 일대는 그를 토멸하려고 군대가 강안(江岸)에는 견양 총을 하고 섯다.
북(北)쪽 - 만주의 산야는 녹음이 욱어저서 김일성(金日成) 일당은 지금 동서로을 다니고 있으리라. 압록강 저 편 - 바라보니 대륙의 공기는 더욱, 험악할 뿐 희(噫)! 미지 장래 여하(未知 將來 如何)[18]. 김일성(金日成)은 지금 무었을 꿈꾸는지
- (만주 장백현[長白縣]에서)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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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부(金鼎富)와 정도익(鄭道益)의 피랍(被拉)과 구출 기록

김정부가 살던 마을 위치

조선인 지주 김정부(金鼎富)가 살았던 만주 장백현 십구도구 제양포(中國 長白縣 十九道溝 濟陽浦)의 이름은 중국식으로는 상관방자(上官房子)이나, 제양포(濟陽浦), 계양동(桂陽洞), 계양촌(桂陽村), 경양포(景陽浦)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조선식 이름 "지양개"로 나온다.[2]

지도 왼편 하단에 혜산진(惠山鎭)이 있고, 압록강 맞은 편 약간 오른 쪽에 장백부(長白府)가 있다. 그 오른쪽으로 압록강을 따라 조금 북상하면 19도구(十九道溝)의 제양포(濟陽浦)가 나온다. 19도구(十九道溝)는 29도구(卄九道溝)로 잘못 적혀 있다. [스물 입: 卄 = 廿]

북한은 삼천리 기사와 지주 김정부를 김일성 미화에 이용

김일성 회고록에는 삼천리의 기사와 지주 김정부의 이야기를 조작하여 김일성 미화에 이용하고 있다.[2]

『삼천리(三千里)』 기사(1938년 11월)에는 1936년 12월의 회견 때 6사장 김일성이 김정부에게 자신의 신상에 대해 한 말로 당시 24세, 평양 출신이라고 했으니 북한 김일성과 유사한 점이 있어 보이나, 어릴 때 간도로 왔고, 장백현(長白縣)에 온지 30년이 되었다고도 했으니 나이가 35~6세는 될 것이므로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 간도에 부모와 처자가 있다고 한 것은 당시 처자도 없고, 부모도 세상을 떠난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르다.

김 (김정부): 「이렇게 농민을 붓들이 오고 하니 백성이 어떻게 산단 말이오」
K (김일성): 「내가 장백현(長白縣)으로 온 지 30년이나 되는데 그 사정은 대강 알지요. (하략)
김: 「그도 그러치만 우마(牛馬)를 잡어다 저럿케 굼겨 죽이니 너머도 잔인하지 않느냐」
K: 「일 없소. 어느 새에 그것을 다 돌보겠소」
김: 「지금 무슨 생(生)이요?」
K: 「무슨 생(生)이랄게 업소. 시방 수물 네살이외다」 (3년 전 冬에 [註: 1936년 12월임])
김: 「고향은?」
K: 「평양 태생인데 유시(幼時)에 간도(間島)로 왔소. 지금 간도(間島)에 집이 있고 부모 다 처자 다 있소. 집에서는 생활도 넉넉한데 나는 보리죽을 먹으며 이 고생을 하오」
김: 「어듸 金 씨요?」
K: 「선산(善山) 金가 올시다」

이 대화에서 6사장 김일성은 김정부에게 자신의 부모가 간도에 생존해 있다고 말하며, 김정부는 그의 부모를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자신이 부친 김형직(金亨稷, 1894 ~ 1926)으로부터 김정부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하고, 김정부도 자신이 1926년에 이미 사망한 김형직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말한다.[2]

《실례이지만 장군(김일성)은 이 졸부(김정부)의 과거를 어쩌면 그렇게도 잘 알고계시오?》

《선생의 함자는 선친을 통해서도 듣고 오동진, 장철호, 강진건 선생들을 통해서도 익혀두었습니다.》

《선친의 성함이 무엇이기에?》

《김형직이라고 합니다. 우리 아버님께서 팔도구와 무송에 계실 때 선생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런 변이라구야!…》

김정부는 눈을 슴뻑거리며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김장군이 김형직의 자제분이라는걸 모르고있었다니… 이 늙은게 몇해째 초야에 묻혀 속절없이 지냈더니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것도 모르는 속물이 되고말았소이다. 이렇건저렇건 장군의 선친과 나는 가까운 사이였지요. …오늘 선친이 밟고다니던 땅에 군사를 이끌고 온 장군을 보니 그 감격을 무엇이라고 표현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이 대화는 명백히 지어낸 거짓이며, 북한 김일성은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잡지 『삼천리(三千里)』의 김일성 회견 기사는 1937년 10월호의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1938년 11월호에 실린 속편 기사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김일성 회고록 편찬자들이 이를 보지 못하고 위와 같은 거짓 대화를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또 김정부가 회견한 김일성은 자신이 「선산(善山) 金가」라고 하는데, 이 말의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어릴 때 만주로 간 북한 김일성은 국내에 선산 김씨가 있다는 것조차 알 리가 없고, 자신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것도 회견기의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증거이다.

김정부는 만인(滿人) 유력자 천성보(千成寶) 등과 함께 1936년 8월 31일 십구도구 상관방자(十九道溝 上官房子)에서 김일성 부대에 납치 당했는데, 이듬해 3월 3일 일만(日滿) 혼성 토벌대가 이십도(二十道) 오지(奧地)의 김일성 부대 산채를 급습할 때 구출 되었다.[20] 김정부와 함께 기사에 나오는 정도익(鄭道益)은 1936년 11월 6일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었다가[21], 이듬해 3월 김정부와 같이 구출되었다.

경성일보(京城日報) 1936년 9월 11일자 조간 5면 기사에는 김일성이 납치한 김정부(金鼎富)의 몸값으로 현금 1만원을 요구했다고 나온다. 또 이 기사에는 김일성이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甲山郡 會隣面 石陽里) 출신이라고 하여 북한 김일성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더구나 김정부는 십구도구 관방자(十九道溝 官房子)에 종산학교(宗山學校)를 설립하여 운영하던 사람인데, 그가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 가 있던 기간인 1937년 1월 25일 밤 김일성 부대가 관방자 마을을 습격하여 식량을 약탈하고 민가 10 여호와 학교까지 불질러 태워버렸다.[3] 이로인해 마을주민들과 학생들이 많은 고초를 겪고 있고, 김일성 부대에서 구출되어 나온 김정부 노인도 학교 복구을 위해 노심초사한다는 보도기사가 있다.[4][5] 따라서 김일성과 김정부는 김일성 회고록에 나오는 것과 같이 우호적인 사이였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또한 삼천리 기사에 나오는 사람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으로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다.

김일성 회고록의 김정부 이야기는 김일성이 계급의 적인 지주도 포용하고 감화를 주어 자발적으로 자신을 지원하게 만든 통큰 지도자라는 식으로 지어낸 가공의 것이며, 삼천리 잡지를 참고하여 조작해낸 것임이 명백하다. 당시 기록으로 확인되는 김정부는 김일성 부대의 최대 피해자 중의 한명일 뿐이다.

남한의 학자들 중에도 북한의 주장을 추종하여, 삼천리 기사에 나오는 김일성 부대에 의한 양민들의 혹심한 피해는 무시하고 이를 북한 김일성 미화의 근거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이 기사의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거나 알면서도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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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347~348.
  2. 2.0 2.1 2.2 2.3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3장 6절 "애국지주 김정부"
  3. 3.0 3.1 일야양처(一夜兩處)를 습격(襲擊)코 민가 백여호 소각(民家 百餘戶 燒却) 1937.01.31 조선일보 석간 7면
  4. 4.0 4.1 長白縣二萬餘同胞(장백현이만여동포) 凶作(흉작),衝火(충화)로離散(이산) 동아일보 1937.06.18 석간 2면
  5. 5.0 5.1 兵禍(병화)로校舍燒失(교사소실) 數百兒童道中彷徨(수백아동 방황) 동아일보 1937-06-23 조간 5면 / 宗山學校設立者(종산학교설립자) 金鼎富氏(김정부씨) 談(담) 동아일보 1937.06.23 조간 5면
  6. 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는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隣面) : 우남위키
  7. 산에 비가 오려고 하니 누각에 바람이 가득하다.
  8. 익조(翌朝): 다음날 아침
  9. 어두운 밤에 고생하며 100여리를 가다.
  10. 3천명이 1사(師)가 된다는 것은 잘못이다. 대개 3개 단(團)이 1사(師)가 되며, 270명 정도가 사의 편성 인원수이다. 실제 1개 사(師)의 인원은 100 ~ 300 명 정도였으며, 인원 손실이 심할 때는 100명 이하가 되기도 했다.
  11. 구름도 깊고 숲도 깊어 알기 힘든 곳
  12. 감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다.
  13. 碗 【완】그릇(器) (椀과 同字) (盌과 同字)
  14. 상가집 개가 뼈를 놓고 다투는 격
  15. 혈기방장(血氣方丈) : 혈기방장(血氣方壯)의 오기이다.
  16. 和龍鎮舊名「三道溝」或「忠信場」 (和龙镇旧名「三道沟」或「忠信场」) : 和龙市- 维基百科
  17. 완자(碗子): 그릇
  18. 장래가 어찌될지 모르겠다.
  19.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347~348.
  20.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東京 みすず書房, 1976) p.348.
  21. 長白荒しの 不敵な强盜 共匪金日成一味の 廻し者の嫌疑濃厚 경성일보(京城日報) 1936년 11월 27일 (26일 석간) 4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