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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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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高東雷 小隊 慘殺事件)은 1932년 2월 만주 무송(撫松) 지방 조선인들의 원성을 사던 북한 김일성 패거리들의 폭력배 행동을 제압하러 출동했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3중대 1소대 고동뢰(高東雷) 소대장과 소대원 9명이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에게 취침 중 참살당한 사건이다.

사건의 개요

유하현(柳河縣) - 삼원포(三源浦) - 무송현(撫松縣). 지도의 △ 표시된 곳이 유하현(柳河縣)의 삼원포(三源浦)로, 현의 서부 즉 유서(柳西) 지역에 포함된다. 삼원포 지역에 주둔하던 고동뢰 소대는 김성주 일당을 제압하러 무송현에 갔다가 변을 당했다.

믿고 따르던 상관 이종락(李鍾洛, 1907 ~ 1940)이 1931년 1월말 체포되어 구금되고, 속했던 군사조직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도 흐지부지 와해되자 의지할 데를 잃은 김일성은 무송(撫松)으로 돌아가 장아청(張亞靑, 1913~1937) 등 또래들을 모아 불량배 짓을 하고 다녔다. 이런 일로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인들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측에 제압을 요청하자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은 이 패거리들을 제압하러 1932년 2월 중순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주둔해 있던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이하 10명을 무송(撫松)으로 파견한다. 무송에 당도한 일행이 장거리 행군에 지쳐 피곤해서 잠든 사이에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은 이들 10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도망친다.[1][2][3] 이것이 김일성의 최초의 무장투쟁이다.

이 사건에 대한 당시 기록은 발견된 것이 아직 없으나, 피살된 고동뢰 소대원 중 한 명이었던 김문빈(金文彬)의 친구이자 당시 김일성과도 알고 지냈던 이시찬(李時燦)의 증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증언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1974년 당시에는 대부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나, 조선혁명군에 고동뢰 소대장이 실제로 있었고, 그가 나오는 마지막 기록은 1932년 2월 상순이라는 것이 확인된다.[4] 또 조선혁명군 측에 김성주 일당을 제압해주도록 요청했다는 조선혁명군 중대장을 지낸 장철호(張喆鎬, 1892~?)라는 인물도 확인이 된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가 길림에서 육문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의 친구 장철호(張喆鎬)로부터 학비 후원을 받았다고 하였다.[5] 김형직도 정의부(正義府) 사람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장철호를 알았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세졌던 사람조차 괴롭히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6]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마치 심용준과 대단한 친분이 있었고, 그가 은퇴한 후에도 자신을 도와주려한 것처럼 장황하게 써 놓았으나 거짓말로 보인다.[7] 심용준은 김일성이 살해한 고동뢰 소대 10명의 직속 상관 중대장이었으므로 김일성을 원수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8]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참살하고 도망갔던 김일성은 1932년 초여름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양세봉 총사령을 다시 찾아와서 지난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고 조선혁명군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세봉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주기는 했지만, 못 미더워하여 그가 원하는 직책은 맡겨주지 않았다. 이에 김일성은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만다.[9] 양세봉이 김일성이 저지른 잔혹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용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나, 그의 부친 김형직과 정의부 사람들이 가까이 지냈던 일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같다. 김형직이 무면허이긴 하지만 의사였기 때문에 정의부 사람들이 신세지는 일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劉順浩, 1962~ )는 고동뢰 피살 사건에 대해 위와는 상당히 다른 증언을 소개하는데[10], 주변 정황이 당시 기록들과 어긋나므로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위의 내용을 어느 정도 뒷받침하는 점도 있다.

《김일성 열전》의 이시찬(李時燦)의 증언

이 사건은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전 성균관대 교수의 저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에 처음 나온다. 증언한 이시찬(李時燦, 1911~ ?)은 고동뢰 소대장을 무송(撫松)으로 파견했던 당시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11]의 국민부 총관(國民府 總管) 이병근(李炳根)의 아들로, 김일성과도 직접 아는 사이였다[12]. 그의 친구 김문빈(金文彬)은 피살된 고동뢰 소대원 중 한 명이었다. 아래의 김성주(金聖柱)는 김일성, 장아청(張亞靑)은 그의 중국인 친구 장울화(張蔚華, 1913~1937)이다.

[pp.143~145] 장아청(張亞靑)과 같이 무송(撫松)에 나타난 김성주(金聖柱)는 권총을 휘두르고 다니면서 약탈의 선두에 나서 큰 문제를 일으켰다.

김성주(金聖柱) 장아청(張亞靑)은 그 지방의 껄렁한 자기 또래의 젊은 것들을 긁어모아 패거리를 지어 中國 사람들 집을 털고 다녔다. 그때 김성주(金聖柱)는 김일성(金一星)이란 이름을 썼다. 당시 웬만한 중국 사람들은 대개 집에다 경호용의 총들을 갖고 있었는데 김성주(金聖柱) 장아청(張亞靑) 등은 돌아다니면서 이걸 강탈해 같은 패거리들끼리 나누어 갖고 무장 작당이 이루어지자 다음에는 또 군자금 모집이다 해서 돈을 털고 다니기 시작했다.

무송(撫松) 일대의 중국(中國)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한국놈 金一星(金聖柱) 일당의 약탈 때문에 못 살겠다는 소리가 비등해졌다. 한중(韓中) 양민족 사이에는 큰 금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一九三一년과 一九三二년 사이의 겨울 내내 김성주(金聖柱) 일당의 행패는 그치지 않았다. 그때 무송(撫松)에는 장철호(張喆鎬)[13]라는 조선혁명군 중대장(朝鮮革命軍 中隊長)을 하다가 그만 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김성주(金聖柱) 일당의 행패를 퇴치하지 않고서는 무송(撫松) 일대에서 한인(韓人)들이 배겨나기 어렵다고 판단,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본부가 있는 흥경현 왕청문(興京縣 旺淸門)으로 급히 기별하러 갔다.

그때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총사령(總司令)은 양세봉(梁世奉)으로 바뀌어 있었다. 一九三二년 一월 一九일에 조선혁명군 총사령(朝鮮革命軍 總司令)으로 있던 김보안(金保安, 김준택[金俊澤], 1865~1935) 등이 한인(韓人) 밀정의 통보로 일제(日帝) 경찰에 체포된 불행이 있어 그 후임으로 양세봉(梁世奉)이 총사령으로 취임했던 때이다. 장철호(張喆鎬)는 양사령(梁司令)에게 가서 무송(撫松) 일대의 실정을 보고하고 김성주(金聖柱) 일당을 퇴치할 것을 요청했다. 장철호(張喆鎬)는 당시 四三세, 본명은 장치욱(張致旭, 1887 ~ ?)이었다. 그는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一九三七년) 후 북경(北京)에 가서 살다가 해방후 서울을 거쳐 고향인 평북 의주(平北 義州)로 갔다. 그 후 소식은 알 수 없으나 四男 장봉훈(張鳳勳)이 영등포(永登浦)에 살고 있다.

양세봉 사령(梁世奉 司令)은 흥경(興京)과 무송(撫松)의 중간지대인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의 국민부 총관(國民府 總管)이었던 이병근(李炳根, 本章 第三節의 證言者 李時燦씨의 부친) 에게 편지를 보내 이병근(李炳根) 총관 밑에 있는 조선혁명군 소대장(朝鮮革命軍 小隊長) 고동뢰(高東雷)로 하여금 김성주(金聖柱) 일당을 퇴치토록 하라 했다. 당시는 만주사변(滿洲事變, 一九三一년 九월 一八일) 후라서 도처에 일군(日軍)들이 마음 놓고 들락거릴 때라 한인사회는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이병근(李炳根)은 양사령(梁司令)에게 유하현(柳河縣) 자체가 일군(日軍)들 때문에 불안하니 무장병력을 무송(撫松)에까지 보내면 유하현(柳河縣)의 한인사회 보호가 문제라면서 난색을 표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양사령(梁司令)은 군인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면서 그대로 집행토록 하라는 지시를 재차 내렸다.

고동뢰 소대장(高東雷 小隊長, 黃海道 사람)은 권총으로 무장한 九명의 대원을 데리고 무송(撫松)으로 떠났다. 그속에는 이병근(李炳根)의 아들 이시찬(李時燦)씨의 화흥중학(化興中學) 동창이었던 김문빈(金文彬)도 끼어 있었다. 김문빈(金文彬)은 함남(咸南) 사람으로 고향에 가족을 둔채 왕청문(旺淸門)에 공부하러 왔던 사람이었다. 고동뢰(高東雷) 소대장 일행은 먼길을 오느라고 무송(撫松)에 도착했을 때엔 매우 지쳐 있었다.

도착한 첫날 밤은 우선 푹 쉬기로 했다. 일행은 모두 한 방에서 베개 밑에 권총을 깔고 깊은 잠에 들었다. 날이 새면 김성주(金聖柱) 일당을 찾아나서 그들을 무장해제해서 다시는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할 참이었다. 한중 양민족(韓中 兩民族)의 친화를 해치는 일을 막고 그로써 한인사회의 안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젊은 것들이 철없이 비적떼 노릇이나 하고 다니는 것을 응징할 참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고동뢰(高東雷) 소대장 일행이 무송(撫松)에 도착한 것을 김성주(金聖柱) 패들이 탐지한 데 있었다. 김성주(金聖柱) 패들은 한밤중에 곤히 잠든 고동뢰(高東雷) 일행의 잠자리를 습격하여 一○명을 몰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독립군(獨立軍)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귀중한 병력의 한 부분이 치안 확보차 출동했다가 김성주(金聖柱)에 의해 살해된 끔찍한 사건이었다. 김성주(金聖柱) 일당은 베개 밑 권총들을 모조리 거두어 달아났다. 이 사건을 저지르고 나서 김성주(金聖柱) 일당은 무송(撫松) 지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一九三二년 二월 께의 일이다. 그 후 이 해 여름까지 김성주(金聖柱)의 발자취를 말해 주는 자료도 증인도 없다.

위의 내용은 책으로 출판되기 전에 중앙일보에 먼저 《진위 김일성 열(眞僞 金日成 列傳) : 그 전설·실존·도명(傳說·實存·盜名)을 밝힌다》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아래는 해당 부분 기사이다.

고증

사건 자체를 직접 기록한 당시 신문 기사나 문헌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그러나 근래 구축된 여러 DB들을 검색해보면 그러한 정황을 뒷받침하는 당시의 자료들은 상당수 발견된다.

국민부(國民府)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총사령은 현익철(玄益哲, 1890~1938)이 맡다가 그가 1931년 8월 31일 체포되자 후임으로 김준택(金俊澤, 金保安, 1865~1935)이 맡게 된다. 김준택(김보안)도 1932년 1월 20일 체포되자 3중대장이었던 양세봉(梁世奉, 梁瑞鳳, 1896~1934)이 총사령을 맡고, 3중대장은 심용준(沈龍俊, 1896~1949)이 맡게 된다. 고동뢰(高東雷)는 3중대의 1소대장이었다. 이 사건은 이전 총사령 현익철, 김보안 등이 체포되어 양세봉이 총사령이 된 후, 김일성 일당을 제압하기 위해 고동뢰 소대를 무송으로 파견하여 일어났다. 고동뢰 소대장은 1932년 2월 상순까지 생존해 있은 것이 확인되므로 그 직후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10월경의 국민부 및 조선혁명군 조직

이시찬/이명영은 김일성 일당을 제압하러 무송으로 간 고동뢰 소대장이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주둔해 있었다고 하는데, 1931년 10월에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양세봉 아래 이영락(李永樂)·차용륙(車用陸)·고동뢰(高東雷) 등 3인의 소대장이 삼원포에 주둔해 있는 것이 확인된다.

pp.12-13 (94-95) [註 42] 국민부 및 조선혁명군의 편제와 간부들의 명단 직책은 다음과 같다.
(通化縣檔案館 통화현당안관 소장문서 檔案民1號 全宗 1號目錄870號, 「鮮匪國民府ノ現況」).

一. 본부 소재지 : 신빈현 하남가(河南街, 外新賓縣內)

  •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梁仁元(梁荷山 : 본명 梁基瑕)
동위원 : 李鐘乾·張承彦·高而虛·李時烈·李一世·朴圭洙·金杜七·金桓·劉東錫·金學奎·金燉
길림지방 독립대장 金履大, 흥화지방 집행위원장 朴春琴
  • 혁명군 사령장 김보안(金輔安, 金寬戎 : 新賓縣 河南街 苗河淸에 있음)
부사령장 張世湧·尹赫, 제1중대장 黃基淸·副官 李海雲, 소대장 金東長·權泰植

一. 지부

  1. 환인현 및 집안현내
    환인지방 집행위원장 鮮于雄, 동 경무집행위원장 李相觀(李相寬), 집안지방 집행위원장 金溢天(신임)·劉光屹(구임), 동 경무집행위원장 張世翰(신임)·朴金校(구임), 혁명군 제4중대장 姜玉成 부관 崔炳棋 소대장 張道伯
  2. 통화현 특별구 (江甸子)
    특별구 집행위원장 鄭在明(신임)·宋明奎(구임), 동 경무집행위원장 琴南
  3. 청원현
    淸原지방 집행위원장 權洛容 동 위원 鄭順喆, 동 경무집행위원 金洛玄·金昌善·李炳浩
  4. 撫本지방(永陵街) : 혁명군은 淸原縣지방으로 이동함
    撫本지방 집행위원장 金永傑, 혁명군 제2중대장 田雲鶴(南山城子 정미소) 부관 朴致華, 동 소대장 金永華 金鉉宇
  5. 유하현
    유하지방 집행위원장 宋憲 동 위원 姜允杰, 同 경무집행위원장 李炳浩 동위원 朴永勳·鄭相元·金禮三·田秋?·李學斗, 중국측 연락원 朴永善(朴利木, 柳河公安局 통역), 혁명군 제3중대장(在 孤山子, 양세봉), 同 소대장(재 三源浦) 李永樂·車用陸·高東雷, 중앙집행위원(在 三源浦) 고이허(高而虛)

유하현 삼원포( 三源浦) 국민부 총관(總管) 이병근(李炳根)에 대한 고증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을 처음 증언한 이시찬(李時燦, 1911~ ?)의 부친 이병근(李炳根)은 당시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의 국민부(國民府) 총관(總管)이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병근이 그다지 저명한 인물이 아닌데다 삼원포 총관도 비중있는 직책이 아니어서인지 기록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위 장세윤의 논문에 나오는 통화현당안관(通化縣檔案館) 소장문서에는 국민부의 유하(柳河) 지방 집행위원장으로 송헌(宋憲)이 나오고, 중앙집행위원 고이허(高而虛, 1902~1937)가 삼원포(三源浦)에 있는 것으로 나올뿐 삼원포 지역 총관이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고이허는 이듬해 1932년 1월 국민부 요인들 상당수가 체포되자 국민부 최고위 책임자인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게되며[14] 삼원포 지역 총관은 아니다.

유하현(柳河縣)에 이병근(李炳根)이 나오는 기록으로는 사건 당시보다 9년 전인 1923년의 기록 3건이 보이는데, 모두 같은 내용으로, 1922년 12월 29일부터 1923년 1월 8일까지 열린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15]의 제1회 중앙의회(第一回 中央議會) 참석자 명단이다.

南滿에 在한 我大韓統義府에서는 總長代理 副總長 蔡相德氏의 名義로써 第一回의 中央議會를 召集하야 昨年 十二月二十九日부터 今年 一月八日까지 凡十一日間 桓西第○區○○○에서 會議를 行하고 決議된 事項을 지난 一月十五日 附大韓統義府 中央議會議長 孫昞憲氏의 名義로써 公佈하엿는대 몬져 同議會에 參席하엿던 人員은 左와 如하더라.
桓西에 林圭항, 孫昞憲, 桓南에, 李基堈, 輯西에 李東煜....., 柳河에 韓圭碩, 申允淡, 李應濂, 柳西에 李益華, 李炳根氏 等 三十五人의 地方代議員과 ...

이병근(李炳根)이 대의원으로 나오는 유서(柳西)는 유하현(柳河縣)의 서부지역을 뜻하며, 삼원포(三源浦)도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환서(桓西), 환남(桓南)은 각각 환인현(桓仁縣) 서부와 남부지역, 집서(輯西)는 집안현(輯安縣) 서부지역을 뜻함] 따라서 사건 당시보다 9년전 기록이긴 하지만 유하현 삼원포 지역에 독립운동을 하는 이병근(李炳根)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확인이 된다.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는[15] 1924년 무렵 정의부(正義府)에 흡수되었다가 다시 1929년 무렵 국민부(國民府)로 개편되므로, 그가 실제로 1932년 1월에 국민부의 삼원포(三源浦) 총관이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위 명단에 같이 나오는 고할신(高豁信), 현정경(玄正卿), 오동진(吳東振) 등은 후에 정의부와 국민부의 요인이 된다.,

1932년 2월 초순의 고동뢰 소대장 기록

1932년 2월 상순 유하현(柳河縣)에 주둔 중이던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의 부관 황규청(黃奎淸)이 변절하여 일만군경을 몰고와 차용륙(車用陸) 소대장이 체포되었다. 이에 고동뢰 소대가 황규청을 사살하였다. 이것이 고동뢰 소대장이 나오는 마지막 기록이다. 그 직후 고동뢰 소대는 무송으로 출동나갔다가 김일성 일당에게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震光』은 임시정부 집권당인 한국독립당의 기관지이다.
그리고 同年(1932년) 2月 上旬에 柳河縣 境內에 駐屯이든 朝鮮革命軍 第3中隊 副官 黃奎淸이란 놈이 該 中隊長 沈龍俊 同志가 出他한 機會를 타서 敵에게 投降하고 走狗가 되어, 通化 倭領事에 가서 走狗輩 及 日僞軍警을 몰고 上記 柳河駐屯地로 드러가서 自己가 親手로 經理하던 武器 一部 20餘柄을 들추어 倭敵에게 주엇으며, 또 該隊 小隊長 車用陸 駐屯當所를 襲擊하야 車隊長 以下 兵士同志 李秉學 · 崔鎭英 · 白○○ 等 6名이 被逮되엿는데, 上 車用陸 同志는 被捕當時 飛彈에 中擊되야 面部가 破裂重傷되엿는데, 上 同志는 本來 運動線에 十餘 星霜의 아름다운 歷史를 所有햇음으로 朝中人士가 欽佩하던 터이라. 놈들 없는 짬을 타서 自己 面部傷處에 鮮血이 흐르는 肉塊와 骨碎를 뜯어내어 白紙上에 ‘朝中民衆은 合作하야 抗日하자’는 等 數 十種의 血書를 서서 各 中國人士에게 돌려 주엇다. 本來 9 · 18事變에 刺戟을 받은 中國人士들의 腦海에는 비록 外族일망정 敵手에 끌리여가는 立場과 環境이 同一한 사람의 告別의 血書를 받은 그 刹那 사이의 感慨無量한 쎈쎄이슌을 禁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可想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上 走狗 黃奎淸은 興京縣에서 第3中隊 小隊長 高東雷 一行의 義彈에 銃殺되엿다.

 同年 同月 上旬, 興京 某 地方에 朝鮮革命軍 第2中隊가 駐屯한 것을 敵이 알고 不意에 包圍襲擊하야, 該 中隊長 田雲鶴은 軍隊와의 距離를 멀리 두고 單獨히 事務를 보다가 不幸히 잡히엿고, 該 小隊 隊長 崔允龜가 部隊를 領率하고 敵과 應戰하야 敵方에 數十名의 死傷을 내여주엇고, 그리고 놈들은 桓仁 · 通化 · 興京 · 輯安 · 寬甸 · 臨江 · 撫松 · 濛江 · 柳河 · 淸原 · 海龍 · 撫順 · 本溪 等 各地에서 大活動을 施하야 우리 同志 7~80名의 死傷을 내인 바 있엇다. 以上의 記事는 中國 東北 3千萬, 아니 中國 4萬萬 大衆의 뼈저린 9 · 18慘變을 비롯하야 그 一環的 關係를 가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가슴 아픈 慘變을 가져다 준 것인 同時 本黨에 對한 一大恐慌期의 歷史 페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繼續)

4267年(1934년) 9月 25日 震光社 發行

1932년 1~2월경의 조선혁명군 상황

외무성경찰사(外務省警察史) 재만대사관(在滿大使館) 편에도 위와 동일한 내용이 실려있다. 1933년 5월 17일자 자료의 조선혁명군 조직표에는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아래 소대장으로 김성해(金成海), 김춘(金春)이 나오고, 고동뢰는 보이지 않는다.

pp.350~359 - 조선혁명군 피체자 명단 : 위와 같음
pp.360~364 - 국민부-조선혁명군 조직표 : 위와 같음
pp.869~877 - 1933년의 조선혁명당 조직표 :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은 그대로이나 소대장들은 고동뢰 아닌 김성해(金成海), 김춘(金春) 두 사람이다. 고동뢰 소대장은 변고를 당했다는 증거이다. (아래 문서를 참고하면 이것은 1933년 5월의 기록임.)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087400、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南満特委関係 第二巻(I-4-5-2-1_22_3_002)(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洲国ノ部/南満特委関係 第二巻 5.鮮人共産党関係 1933년 5월 17일 자료
pp.12, 23에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소대장 김성해(金成海), 김춘(金春)

김학규의 백파 자서전 기록

조선혁명군 참모장이었던 김학규(金學奎, 1900~1967)의 자서전에 의하면 1932년 여름 김일성(金聖柱)이 유본초(劉本初)라는 중국인과 함께 양세봉 총사령을 찾아 온 것은 사실이다. 김학규는 위 1931년 10월 국민부 현황 자료에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나온다.

자서전 서두에 필자가 50년전 1900년에 출생했다고 하여 1950년 경 집필한 것임.
조혁군(朝革軍)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16]을 말한다.
[pp.6 ~ 7] 내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중앙간부(中央幹部)가 되고 조혁군(朝革軍)의 참모장(參謀長)이 됨에 이르러서는 나는 그들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과 격렬(激烈)한 정면(正面) 충돌(衝突)을 불면(不免)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동지(同志)들을 많이 죽이고 또 나를 죽이려고 많이 힘썼다. 또 나도 나의 직권(職權)이 있는 한도내(限度內)에서 그들과 여하(如何)한 투쟁(鬪爭)도 불사(不辭)하여 처음에 이론(理論)으로부터 나중에는 실제행동(實際行動)에 이르기까지 치열(熾烈)한 투쟁(鬪爭)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실제행동(實際行動)이라 함은 물론(勿論) 서로 총칼을 가지고 상쟁(相爭)하였음을 말함이며, 그때 그들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책임자(責任者) 현익철(玄益哲)[17], 조혁군(朝革軍) 총사령(總司令) 양세봉(梁世奉)[18], 동참모장(同參謀長) 나를 가리켜 「삼대살인반동영수(三大殺人反動領袖)」라고 불렀던 것이다.
지금 북한(北韓)의 괴수(魁首) 김일성(金日成)은 그의 원명(原名)이 김성주(金聖柱)인 바, 그가 어렸을 때에 그의 집은 장백(長白)에 있었고 그의 부친(父親)은 우리 민족진영(民族陣營)의 일원(一員)이었다. 우리 정의부(正義府)에서 학비(學費)를 공금(公金)으로 주어 길림(吉林) 육문중학(毓文中學) 2학년(學年)까지 공부를 시켰는데, 그 후 그는 조혁군(朝革軍) 제(第)1중대(中隊) 이종락(李鍾洛) 대장(隊長) 아래 있다가 공산주의(共産主義)로 사상(思想)을 전환(轉換)한 것이다. 1929년(年) 내가 길림(吉林)에 어떤 대표(代表)로 가서 있을 때에 그는 상기(上記) 육문중학(毓文中學)에서 공부하면서 길림(吉林)에 있는 소년(少年)들을 몰아가지고 소년대(小年隊)를 조직(組織)하고 그가 대장(隊長)으로 있으면서 나를 찾아 다니던 것이 기억(記憶)되며, 내가 참모장(參謀長)으로 1932년(年) 하(夏) 당취오군(唐聚五軍)[19]과 같이 통화(通化)에 사령부(司令部)를 설치(設置)하고 있을 때 그는 무송(撫松)으로부터 한국공산청년(韓國共産靑年) 수십명(數十名)을 데리고 중국인(中國人) 유본초(劉本初)라는 사람과 동행(同行)하여 통화성(通化城)에 있는 양사령(梁司令)[18]과 나를 찾아와, 자기(自己)네도 항일(抗日)할 터이니 무기(武器)를 달라고 요구(要求)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미 사상적(思想的)으로 우리와는 적대진영(敵對陣營)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치지불리(置之不理)해 보냈던 것도 생각난다. 공산주의(共産主義)는 그의 기도(企圖)가 세계(世界)를 정복(征服)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들과 우리와는 언제든지 양립(兩立)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과 타협(妥協)이니 하는 것은 호상(互相) 자기(自己)네의 정략전략(政略戰略)에 의한 일종(一種) 시간(時間)을 쟁취(爭取)하는 수단(手段)에 불과(不過)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일성 회고록의 관련 기록

김일성 회고록에도 김학규의 자서전 증언대로 그가 유본초(劉本初)와 함께 양세봉 조선혁명군 총사령을 찾아간 일이 나온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 (항일 혁명 2편, 1992년 출간): 1930년 5월 ~ 1933년 2월
제6장 시련의 해 (1932년 5월 ~ 1933년 2월)

  • 3. 기쁨과 슬픔 : 당취오(唐聚五)[19], 류본초(劉本初), 우사령(于司令)이 나옴
  • 4. 합작은 불가능한가? - 당취오, 류본초, 양세봉(량사령), 우사령이 나옴
  • 5. 단합의 리념 아래 - 류본초, 양세봉, 우사령이 나옴
  • 6. 구국군과 함께 - 당취오, 류본초, 양세봉, 우사령이 나옴

유순호는 우사령(于司令)의 이름이 우명진(于明辰, 卽于學堂)이라고 한다.[20]

김일성은 사실 이 때 양세봉에게 항복하여 그의 군대에 입대할 것을 간청했다. 양세봉은 자기 부하들이 피살당하였지만 사상적으로 포섭할 수 있는 김일성 일당을 대담하게 받아들이고 그를 조선혁명군의 대원으로 키울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의 학자들과 여러 증언자들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김일성은 직접 이를 뒷받침하는 말을 이번 회고록에서 하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일 인민유격대의 남만 진출과 때를 같이하여 우사령 부대에서도 200명으로 편성된 구분대를 통화지방으로 파견하였다. 이 구분대의 인솔자는 류본초 선생 이었다. 우사령이 자기의 오른 팔이나 다름이 없는 류본초 참모장을 남만으로 보낸 목적은 당취오자위군(唐聚五自衛軍)과의 합작을 실현하며 자위군을 통하여 무장을 해결하려는데 있었다.”[21]

아닌게 아니라 그는 우사령이 파견한 유본초 부대에 붙어서 통화로 갔는데 그 목적은 당취오와 합작하는 것이었다. 당시 양세봉 장군은 당취오와 합작하고 있었으므로 김일성의 우사령 별동대는 그 양세봉을 찾아갔다. 양세봉은 우사령 부대에 붙어서 온 김일성일당을 민족대오라고 생각하여 항일의 대의(大義)를 위해 고동뢰 소대 학살에 대한 책임추궁을 약간 늦추었던 것이다.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3권》 제8장 반일의 기치 높이(1934년 2월 ~ 1934년 10월) / 1. 리광
나에게 학비를 대준 사람들은 대부분 오동진, 손정도,량세봉,장철호[13],현묵관(현익철)[22]과 같이 길림시내에 거주하거나 류하, 흥경,무송,화전을 비롯한 독립군의 본거지들에 있으면서 정의부 본부에 들락날락하던 아버지의 친구들이였다.
사건과 관련된 위에 나온 국민부와 조선혁명군 인사들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과도 알던 사이였고, 김일성에게 학비 지원도 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도 김일성은 은혜를 져버리고 패륜을 저질렀다.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7권》 제19장 2. 족제비 사냥군
김일성이 고동뢰 소대장의 직속 상관이었던 조선혁명군 3중대장 심용준과 마치 대단한 친분이 있었고, 그가 은퇴한 후에도 자신을 도와주려한 것처럼 장황하게 써 놓았으나 거짓말로 보인다.

조선족 작가 유순호의 주장

이것은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劉順浩, 1962~ )의 ⟨김일성 평전⟩의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10], 사건의 발생 과정이 위와는 상당히 다르고, 고동뢰 소대장 한 사람만 살해된 것으로 주장한다.

유순호에게 증언을 해 준 사람은 조선혁명군 사령부에서 호위병을 지내며 현익철(玄益哲, 1890~1938)의 심부름을 다녔던 적이 있는 김영철(다른 이름은 김청회)이라고 한다. 그는 광복 후에도 국민부가 있던 요녕성 신빈현에서 1983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이 사건이 1931년 여름 (7월경)일어났고, 조선혁명군 총사령 현익철이 부대원 100여명을 풀어 김성주를 잡아오라고 했다는데, 현익철이 8월 31일 체포되어 김성주에 대한 추격도 중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동뢰 소대장이 1932년 2월 초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것은 위의 자료들에서 입증이 되므로 현익철의 피체와는 무관하며, 이런 증언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또 김성주 체포조의 지휘관은 고동뢰의 후임 소대장 심용준이라고 했지만, 심용준은 1932년 초의 조선혁명군 조직표에 고동뢰 소대장의 직속상관인 3중대장으로 나오므로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김일성의 푸르허 머슴살이 이야기는 아래에 나온다.

  • 《세기와 더불어》 2권(항일 혁명 2편, 1992년 출간): 제5장 무장한 인민 (1931년 1월 ~ 1932년 4월) / 4. 혈전의 준비

머슴살이는 서술된 순서로 보아 1931년 12월 명월구 회의 뒤의 일이므로 8월 31일 현익철이 체포되면서 머슴살이를 그만두었다는 유순호의 주장과 시기도 맞지 않는다. 오히려 이시찬/이명영의 증언대로 1932년 2월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살해한 뒤 숨어다니느라 머슴살이를 했을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이명영의 저서에 나오는 이시찬의 증언은 주변 정황 기록과 대체로 부합하지만, 유순호의 저서에 나오는 김영철의 증언은 잘못된 곳이 많아 믿기 어렵다. 다만 고동뢰 소대장이 살해된 장소가 무송(撫松)이고, 범인이 김성주(김일성)와 그 친구 장아청(張亞靑, 1913~1937) 등이라는 점은 두 증언이 일치하므로 김영철의 증언도 어느 정도 이시찬의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한계가 있고, 고의가 아니라도 잘못될 소지가 많으므로 후일 증언은 그대로 믿기 전에 반드시 검증을 해야 한다. 기억이 잘못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둔필승총(鈍筆勝聰), 즉 "우둔한 글솜씨로라도 남긴 기록이 총명한 기억력보다 낫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허동찬(許東粲)의 고증

허동찬(許東粲, 1932~ )은 아래 저술에서 고동뢰소대 참살사건(高東雷小隊 慘殺事件)의 문헌적 고증을 시도하고 있고, 그도 사건이 실제 일어났던 것으로 본다. 하지만 사건의 시기를 1932년 1월 중순경으로 보고 있는데, 고동뢰 소대장이 2월초까지 생존해 있은 것이 확인되므로 약간의 오류가 있다.

[아래는 1932년 1월 작성된 昭和6年(1931년)의 조선혁명군 편제이며, 유하현(柳河縣)에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이 있음.]
「昭和六年中 警察署長管內狀況及事務報告ニ關スル件」 : 在奉天総領事館 通化分館 機密公 第17號 1932年 1月 18日
1932 年 1月 18 日, 通化分館發인 「昭和6年中 警察署長管內狀況及事務報告에 關한 件」에 의하면 當時, 國民府의 朝鮮革命軍은 다음과 같은 編制로 되어 있었다(機密公. 第 17 號).

朝鮮革命軍 本部 新賓河南街

司令長 金輔安
副司令長 張世用

第一中隊長 尹一波 通化 高力墓子

副官 李海雲 “ 快大茂子
小隊長 金益和 “ 江甸子
小隊長 李永杰 “ 快大茂子
小隊長 鄭應善 “ “
小隊長 洪錫泰 “ 江甸子
小隊長 李淸天 “ 高力墓子
小隊長 金相奎 “ 江甸子

第二中隊長 田雲鶴 新賓

副官 朴致華
小隊長 金永辛
小隊長 金鉉宇

第三中隊長 梁瑞鳳 柳河 孤山子 혹은 三源浦

副官 黃基淸 新賓
小隊長 李永傑 三源浦三成號
小隊長 車用陸 “
小隊長 高東雷 柳河五人班耶蘇堂

第四中隊長 朴大浩 寬甸

副官 崔炳模
小隊長 金東善
小隊長 張道伯
小隊長 李道俊

第五中隊長 文學彬

- 以下缺 -

허동찬은 또한 고동뢰 소대장이 피살된 후인 1932年 11月 24 日에도 그가 생존해 있는 것처럼 기록한 문건도 소개하고 있다. 당시 통화현성(通化縣城)은 당취오(唐聚伍)군의 침입으로 혼란스런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정보 갱신이 안 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pp.107~108] 唐聚伍가 通化縣城을 撤退한 後, 通化에 入城한 日本警察은, 1932年 11月 24 日, 「國民府及朝鮮革命軍의 最近狀況」이란 記錄을 남기고 있 다. 이에 의하면 朝鮮革命黨首領이 高而虛, 軍事執行委員會委員長이 梁瑞鳳, 第三中隊長은 沈龍俊, 그 第一小隊長은 高東雷로 되어 있다. 이 記錄은 通化分館이 再開된 直後의 記錄이기는 하지만 通化分館이 아니라 通化에서 멀리 떨어진 關東廳이 作成한 것이다. (外務省警察史在通化分館, 7326面)
動亂속의 이 기록은 1932년 1월 무렵에 慘殺당한 高東雷가 동년 11월이 되더라도 마치 살고있는 것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 경찰은 11월이 되어도 고동뢰소대 참살사건(高東雷小隊 慘殺事件)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통화분관(通化分館)은 일본의 봉천총영사관(奉天總領事館) 산하에 있었다.

허동찬이 말하는 1932년 11월 24일자 「국민부 및 조선혁명군의 최근상황(國民府及朝鮮革命軍의 最近狀況)」의 번역문이 아래에 실려있다.

여기에 나와있는 조선혁명군 조직표는 위에서 본 외무성 아세아국이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나 외무성경찰사 재만대사관 기록에 나오는 조직표와 완전히 같다. 1932년 1월 ~ 2월 초순 체포된 다수의 조선혁명군 인사들로부터 얻어낸 정보로 작성된 표이며, 1932년 11월이 아니라 2월 초순의 상황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2> 비적두목에 권총사들여 약탈 일삼던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3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3>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143~145
  3. 李命英, 《權力의 歷史》(成均館大出版部, 1983) p.306.
  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3권 한국독립당 Ⅰ > 기관지 > 『震光』 > 『震光』 제6호(1934년 9월호) : 그리고 同年(1932년) 2月 上旬에 ... 그리고 上 走狗 黃奎淸은 興京縣에서 第3中隊 小隊長 高東雷 一行의 義彈에 銃殺되엿다.
  5. 『김일성 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3권』제8장 반일의 기치 높이(1934년 2월 ~ 1934년 10월) / 1. 리광 : 나에게 학비를 대준 사람들은 대부분 오동진, 손정도,량세봉,장철호,현묵관과 같이 길림시내에 거주하거나 류하, 흥경,무송,화전을 비롯한 독립군의 본거지들에 있으면서 정의부 본부에 들락날락하던 아버지의 친구들이였다.
  6.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匪名『金日成』을 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
  7.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7권 19장 2절 : 족제비 사냥군
  8.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아래 제1소대장 고동뢰(高東雷) : 1932년 초의 조선혁명군 편성표
  9. 이명영(李命英), 眞僞 金日成 列傳 (13) |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10. 10.0 10.1 유순호(劉順浩, 1962~ ),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6) pp.186~188, 225~228
  11. 三源浦朝鲜族镇 百度百科 / Sanyuanpuzhen 三源浦朝鲜族镇 구글지도
  12.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5>] 제1장 김성주의 소년 시절 중앙일보 1974.04.03 종합 3면
  13. 13.0 13.1 장철호(張喆鎬, 1892~?)
  14. 1932년 2월 초순경의 국민부(國民府)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조직표
  15. 15.0 15.1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 백과사전
  17. 현익철(玄益哲, 1890~193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 18.0 18.1 양세봉(梁世奉, 梁瑞鳳, 梁世鳳) 위키백과
  19. 19.0 19.1 Tang Juwu, Tang Chu-wu,唐聚五,(20 April 1898 – 18 May 1939) Wikipedia
  20. 김일성이 창건했다는 안도유격대의 진실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블로그 2017-07-28
  21. ⟨세기와 더불어 제2권⟩ 제6장 3. 기쁨과 슬픔
  22. 현익철(玄益哲, 1890~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