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직후 평양이 자유롭던 시기는 단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1] 8월 26일 소련군이 진주해 오면서 일제시대보다 더 못한 상황으로 변해 갔다. 소련군은 도처에서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2] 일제가 건설해놓은 산업시설도 마구잡이로 뜯어내어 소련으로 반출해갔지만 김일성은 미천한 경력의 자신을 지도자로 만들어준 소련에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했다.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명이 "동무 잠깐 봅시다"라는 한마디에 끌려나가 행방불명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헌들

남한 언론의 기사

美,蘇聯合軍 (미소연합군)이 三十八度(삼십팔도)를 限界(한계)로 朝鮮(조선)에 進駐(진주)한 以來(이래) 蘇軍駐屯(소군주둔)한 三十八度 以北(삼십팔도 이북)에 는 여러가지 制限(제한)과 交通關係(교통관계)로 連絡(연락)이 杜絶(두절)되어 . 明朗(명랑)한 消息(소식)을 三十八度 以南(삼십팔도 이남)에서는 자서히 알수업든 바 여러가지 苦難(고난)을 격그며 平壤(평양)에서 徒步(도보)로 入京(입경)한 某氏(모씨)는 다음과 갓치 말하였다.

赤衛軍 武裝解除(적위군 무장해제)
八月十五日(팔월십오일) 後(후)에는 實(실)로 混亂狀態(혼란상태) 이엇다. 蘇軍 進駐 當時(소군 진주 당시)에는 共産黨 絶對支持(공산당 절대지지)로 나갓슴니다. 그러다가 所謂 共産黨員(소위 공산당원)들의 非行(비행)이 逐日 增加(축일 증가)함을 따라 人民(인민)의 期待(기대)와 同情(동정)을 일케되엇습니다. 勿論(물론) 眞實(진실)한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도 잇겟지만 大多數(대다수)는 거리의 쌈패나 또는 食堂(식당) 뽀이 等(등) 其他 無賴漢(기타 무뢰한)이올시다. 그래서 처음에는 赤衛隊(적위대)을 組織(조직)하야 治安(치안)에 協力(협력)하게까지 하였다가 暴行(폭행) 掠奪(약탈)이 日益尤甚(일익우심)하게 되니 蘇聯軍司令部(소군사령부)에서 赤衛軍(적위군) 武裝解除(무장해제)를 시켰슴니다. 甚(심)한 實例(실례)는 滿洲方面(만주방면)에서 오는 避難民 所持品(피난민 소지품)까지 掠奪(약탈)하엿습니다. 그리고 農民委員會(농민위원회)에서는 農民(농민)에게 肥料配給(비료배급)를 안 준다고 威脅(위협)을 하면서 加入(가입)을 强要(강요)하는 例(예)가 만슴니다.

民心(민심)은 共産 離脫(공산 이탈)
이러케 不合理(불합리)하고 暴行(폭행)을 하게되는 까닭에 蘇軍 (소군)에서는 朝鮮民主黨(조선민주당)을 土臺(토대)로 한 民主主義政治(민주주의정치)를 絶對支持( 절대지지)한다는 態度(태도)를 取(취)하게 되엇습니다. 金日成將軍(김일성장군)도 共産黨(공산당)의 非行(비행)에 對(대) 해서는 憤慨(분개)하며, 民主主義政體 樹立(민주주의정체 수립)을 熱望(열망)하게 되엇습니다. 一般民心(일반민심)은 共産業(공산당)에 對(대)하야 날이 갈수록 漸漸 離脫(점점 이탈)하는 傾向(경향)이 잇습니다.

人共(인공)은 政府(정부)로 行勢(행세)

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에서 政府行勢(정부행세)를 안는다고 聲明(성명)를 發表(발표)한 記事(기사)를 읽엇는데 내가 黃海道 海州(황해도 해주)에 갓드니 黃海道廳出入證(황해도청출입증)에 “朝人民共和國黃海道委員會(조선인민공화국황해도위원회) 00課長(과장)"이라고 하면서 地方(지방)에서는 自稱 政府(자청 정부)로서 行勢(행세)를 依然(의연)히 하고 잇음니다. 人民委員會 (인민위원회)는 結局(결국) 政權慾(정권욕) 박게는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업슴니다. 세상에서 모두 非難(비난) 하고 攻擊(공격)하는 日本人財産賣買問題(일본인재산매매문제)에 잇서서도 第一 華麗(제일 화려)하고 큰 집에는 共産黨員(공산당원)이나 人民委員(인민위원) 사람이 들어잇습니다. 日本帝國主義治政下(일본제국주의치정하)와 主人(주인)이 밧귀엿슬 뿐임니다. 그래서 一般 人民(일반 인민)은 무슨 새 政治(정치) 새 空氣(공기)를 熱望(열망)하야 마지안는다. 蘇軍側(소군측)에서는 金日成 將軍(김일성 장군)도 共産黨員(공산당원)의 非行(비행)은 嚴重取締(엄중취체)하도록 力說(역설) 하고 잇슴니다.
투옥지사(投獄志士) 2천명(二千名), 백미 1두(白米一斗)엔 2천원(二千圓), 보라! 처절처절(悽絶悽絶)한 이 현상(現狀)을
북한의 선전이 사실인 줄 알고 속아 월북했다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학생의 체험담이다. 북에서 지인이었던 이기영 (李箕永, 1895~1984)을 만났는데, 본인은 물론 이강국 (李康國, 1906~1956)도 월북을 후회한다더라고 했다.
북조선 『자유황해』라는 신문을 보면 김일성 장군을 례찬하는 노래가 있다. △이건 농군 박서방이 부르는 노래란다. △그 한 구절을 보면 △김일성 장군 빛나는 그 이름 받들어 한민족의 태양이라 찬양함은 장군이 오시므로 장군이 게시므로 봄빛처럼 다사로운 행복이 내 향토와 내 살림에 갈피갈피 깃드러 빙산같이 풀일 길 없던 온갓 고통이 영원히 영원히 사라진 까닭이라.
△이 노래를 드르면 북조선은 극락이오 천당이라. △그러나 하로에 몇천명씩 아버지 할아버지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쪼껴서 온갓 모욕을 당하며 남으로 남으로 밀려오는 동포는 김일성 장군과 같은 피가 흐르는 동포가 아니던가 △이북 천지가 어두어 촉누락시에 민누락(燭淚落時 民淚落)인데 Δ홀로 빛나신 분은 김일성 장군만이시런가
棄權(기권)은 國民(국민)의 義務(의무)를 拋棄(포기) 1948.04.30 동아일보 3면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요인이며 북로당원의 일인인 柳在敏은 북조선의 金日成정책이 비민족적임을 지적하고 25일 월남하여 시내 모 여관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氏는 왕방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북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 金九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金九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동아일보 1948년 04월 30일

한국 문헌

《蘇軍政下의 北韓: 하나의 證言》 국토통일원, 1983 (복간본) -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판형을 바꿈.

함석헌(咸錫憲)의 증언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은 해방 직후 2년간 북한에서 살다 1947년 월남하였다. 해방직후 평양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처럼 평안북도에는 이유필을 위원장으로 하는 자치위원회가 있었고, 함석헌은 교육부장을 맡았다. 평안북도에도 공산주의자는 몇 사람 되지도 않았지만 소련군이 진주한 후 갑자기 공산주의자들의 세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김성호: 교육부장으로 계시면서 주로 어떤 일올 하셨나 용
함석헌: 그 땐 누구든지 계획을 세워서 큰일 하기 보단 치안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었어요. 위원장인 이유필 씨의 말을 빌면「우리는 치안을 유지해 가다가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가 국내에 돌아오면 고스란히 갖다가 바치면 된다」는 것이죠. 그 말을 듣고 정치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도 속으로 너무나도 단순하게 생각하는구나 생각했죠. 그렇지만 어느 의미로는 그때의 일반의 기분을 잘 표시한 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더라도 함옹은 참 열심이라면 열심으로 일했다고 한다. 이왕이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한번 실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함옹을 바쁘게 만든 셈이다.

김성호: 평소에 생각하셨다는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함석헌: 주로 세 가지를 생각해 왔어요. 어릴 적부터 기독교요 민족주의적 신앙 속에서 자라났으니까 기독교 신앙이 하나 있어야 하고, 민족은 물론 생각해야하고, 또 농촌 중심으로 신생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한 것이죠.
김성호: 평북 자치위원회와 평남 건국준비위원회와는 관계가 있었습니까?
함석헌: 처음에는 연락 없이 했구요. 그랬다가 그해 10월인가 날짜는 모르겠고, 이북 5도 연합회의가 열린다고 해서 평양에 나갔다가 왔죠. 그땐 김일성이 아직 나오기 전이죠.

함석헌옹이 고당 조만식 선생을 만난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외로워 보였다고 함옹은 회상한다.

김성호: 평북 자치위원회에 좌익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참여했습니까? 아니면 민족진영뿐이었나요.
함석헌: 자치위원회는 7〜8개 부를 정부 모양으로 두고 있었는데 공산주의자도 몇 사람 들어와 있었어요. 해방 직전까지 일본 동경에 유학한 사람으로서 좌익 사상을 가진 백용구(白容龜)란 사람이 부위원장으로 있었고, 학생 시절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져 퇴학당한 사람이 몇이 있었죠. 그런데 그때 보면 순수한 공산주의자도 아니야. 순수가 어디 있었겠어요. 고약한 사람이 많았어요. 그중에 경찰 책임을 맡은 보안부장 한웅(韓雄)이란 사람은 참 악독한 사람이었어.

한웅이라고 하면 신의주사건 당시 고등학생들에게 총을 쏘라고 발포명령을 내린 장본인이다. 그는 그 후 김일성에 의해 신의주사건 발생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총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안북도 자치위원회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좌익 인물이 참여하긴 했어도 그 수는 민족진영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대세는 자연 민족진영인 기독교인과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흘렀다. 그러나 소련군이 북녘 땅에 진주하면서「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하룻밤 사이에 세상은 뒤집히고 상황은 변하고 말았다.

김성호: 신의주에 소련군이 들어온 것은 언제쯤이었습니까?
함석헌: 기억을 잘 못하겠는데, 아마 9월 말쯤일꺼요.
김성호: 소련군을 맞은 위원회의 입장이랄까 분위기는 어땠나요.
함석헌: 소련군이 들어오던 날, 우리는 정무회의를 하고 있었어요. 말하자면 각료회의랄까.자치위원 전원이 앉아서 회의를 하는 데, 갑자기 소련군이 시내로 들어온다고 전해주더군요. 그러니까 우스운 게, 환영을 나가야 한다면서 무슨 부장 무슨 부장 하는 것들이 서로 의논할 겨를도 없이 다 뛰쳐나가 버리고, 자리에는 이유필위원장과 나와 둘만이 건네다 보면서 웃고 있었단 말이야.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말이야.

공산당도 내겐 뭐라고 못했지
소련군이 들어온 이후로 신의주시는 또다시 공포 분위기에 싸이게 됐다. 자치위원회에는 비슷비슷한 내용들의 이야기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전해졌다. 그야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하면 소련군이 상점을 약탈해 갔다는 것이고 여자 문제였다. 소련군이 일본인들을 모두 한 수용소에 모으고 젊은 여자들만 골라 순번으로 소련 군인에게 보내기로 했는데, 일본 여자들도 그것을 승락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해방으로 인해 왔던 감격, 바다같이 넓어졌던 민중의 마음, 서로 믿고 협력하고 일하려던 그「열심」은 다 달아나 버리고 남은 것은 공포, 불안, 분개, 낙심뿐이었다. 걸국 함옹은 더 있고픈 마음이 없어 어느 날 위원장에게 그만두겠다는 뜻을 전한다.

함석헌: 그 땐 누구든지 계획을 세워서 큰일 하기 보단 치안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었어요. 위원장인 이유필 씨의 말을 빌면「우리는 치안을 유지해 가다가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가 국내에 돌아오면 고스란히 갖다가 바치면 된다」는 것이죠. 그 말을 듣고 정치에 경험이 없는 나로서도 속으로 너무나도 단순하게 생각하는구나 생각했죠. 그렇지만 어느 의미로는 그때의 일반의 기분을 잘 표시한 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더라도 함옹은 참 열심이라면 열심으로 일했다고 한다. 이왕이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한번 실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함옹을 바쁘게 만든 셈이다.
『咸錫憲全集 4.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1983년 7월 한길사)에 재수록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 『씨알의 소리』 1971년 11월 6호 : 함석헌 기념사업회

Pauley 보고서

  • Pauley 보고서 : 1946년 6월 -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북한점령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허락을 얻어 1946년 5월 29일 ~ 6월 4일 기간 북한 지역을 돌아보고 대통령에 올린 보고서
Edwin Wendell Pauley, Report on Japanese Assets in Soviet-occupied Korea to the President of the Unites States June, 1946.

[p.6] (b) Throughout the cities and in every factory visited the walls were virtually covered with propaganda posters praising Kim Il Sung, Stalin and the Liberating Red Army, and denouncing Kim Koo and Dr. Syngman Rhee. The most prominent poster displayed was one showing a skull with two snakes coming out of the eye sockets, signifying Rhee and Kim Koo. Hundreds of small posters written in Korean were observed in railroad stations and on the walls of buildings praising Kim Il Sung as a great hero and patriot.
폴리 대사의 북한 시찰 보고서 : “한국은 이념적인 전쟁터이다” - 에드윈 W. 폴리 대사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1946년 06월 22일
Ambassador Edwin W. Pauley to President Truman Tokyo, June 22, 1946.[4]
그가 북한 방문시에 파악한 소련의 의도에 대해 서신형태로 보고하는 것이며, 위 보고서의 요약에 가깝다. 대체로 타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소련이 "한국에서 일정량의 비축물과 최근의 생산품들을 가져가고 있을 가능성은 있으나, 자본재 시설은 실질적으로 반출하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소련은 당시 이미 북한 지역의 많은 산업시설을 뜯어내어 소련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Press Conferences, May 1946 - NARA(국립문서기록관리청) : Pauley 방한 당시 서울에서의 기자회견, 신문기사 등
George M. McCune(1908~1948), Korea Today : 북한에서 소련군의 산업시설 철거 반출이 별로 없었다는 Pauley의 보고서에 의문을 표함.

미군정의 기록 문서

p.1 : 1항 - 군대조직 100만 - 김일성 부하들과 일본군 경력 2년 이상자를 훈련시켜 장교로 임용. 만주와 북중국의 일본군 하급병사 출신이 많음.
p.3 : 4항 - 패한 8로군이 북한으로 들어옴. 강계와 평북 주둔. 1946년 9월 3만6천명., 10월 6만명.
p.5 : 13항 - 막대한 농업현물세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 : 현물세 25%는 말 뿐이고, 70~80%도 많이있고, 평균 50%는 됨. 곡물을 소련으로 반출함.
p.8 : 26항 - 북한 전역에 김구와 이승만이 민족반역자 우두머리라는 포스터를 붙임.


North Korea Today, for American Eyes Only (G-2,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August, 1947) : An Anthology of Selected Pieces From the Declassified File of Secret U.S. Materials on Korea Before and During the Korean War (Volume 1), (Seoul, National Unification Board, 1981) pp.1 ~ 40.
pp.9~10 - 김일성 경력
  • 미국 CIA 문서 KOREA : 1947 : 해방 후 당시까지 남북한 정세 정리.
    날짜가 January 2, 1948로 분류되어 있으나, 문서 자체에는 작성일이 명기되어 있지 않다. 내용으로 보아 1947년 3월 29일의 Truman Doctrine 발표 이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기 이전에 작성된 것임.

소련군정 기록

아래는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에 올라 있는 러시아연방국방부중앙문서보관소 문서들이다.

[연구과제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동국대학교

소련군정 기록의 북한 공산주의자 수

현재 개별적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크지 않은 그룹들이 통합되고는 있지만, 개별적인 조직들은 아직도 서로 간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
최근에 평성, 함흥, 해주 등지에 조선공산당 도위원회들이 조직되었다. 또한 군, 면, 그리고 기업소들에 하급조직들이 조직되고 있다. 이러한 조직은 아직은 그 수가 많지 않다. 요컨대, 평안남도의 경우 모두 약 300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있고, 황해도의 경우에는 단 90명이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서울에 위치하면서, 개별적 조직들을 완전한 단일체로 통합하는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중앙위원회는 자기의 대표자를 해주에 파견하였으며, 대표자는 그곳에서 지역 도위원회 비서로 복무하고 있다. 중앙위원회의 대표들이 다른 도시들로도 파견되고 있다. 개별적 지역당위원회들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내걸었다. 1) 인민공화국의 수립, 18세 이상의 남성과 여성에게 투표권 부여, 2) 과거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은행, 공장, 광산, 철도의 국유화, 3) 일본인들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 4) 기업소들에서의 8시간 노동제, 5) 아동 의무교육과 문맹 퇴치. 이 구호들은 근로대중들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하고 있다. 해주시 당조직은 지역자치기구 [판독불가] 민족주의적 성향 [판독불가] 압력을 가하기 위해 정치적 시위를 조직하였다. 공산주의자들에 찬동하여 20,000명이 참여하였다. 지역자치기구지도부는 사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자치지도부가 선출되었는데, 그 구성원 20명 가운데 15명이 공산주의자였다.
김일성은 언제 북한의 지도자로 지명되었나 NK News 2015년 11월 04일
우드로윌슨센터: 김일성, 1945년까지 북한 지도자로 미확정 사료 공개
Soviet Report on Communists in Korea, 1945 Wilson Center
전(前)소련공산당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비서 말렌코프 동지,

소비에트 연방 국방 인민워원회 부위원장 불가닌 대장 동지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 시킨 상장 동지께
원래 보고해 드렸던 내용에 추가로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북조선에서는 10월 20일 현재 공산주의자 3000명 이상이 있습니다. 모든 이북 5도에 당 도위원회는 설립되었으며, 군대 내에 군 위원회도 다수 형성되었습니다. (중략)

헤이조(평양)시에는 10년 동안 만주 조선인 빨치산 부대 사령관을 지냈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하바롭스크 지역 88특수여단 대대장이었던 김일성이 있습니다. 김일성의 이름은 조선 인민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투사 그리고 조선 인민의 항일 영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인민 사이에는 이 사람에 대한 수많은 일화가 있고, 그는 참으로 조선 인민에게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김일성을 잡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였고, 그의 체포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모든 민주 계층, 특히 농민 속에 인기가 높습니다. 김일성은 향후 조선 정부를 위한 적합한 후보자입니다. 인민민주전선이 설립되면 김일성은 이를 지도할 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김일성에 대립하여, 미국인들은 하와이 열도에서 유명한 조선인 망명자인 이승만을 조선에 데리고 왔습니다. 10월 20일에 리승만을 찬양하는 데모가 서울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결론과 제안

박헌영이 영도하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조선에서 진행된 혁명을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으로 봐야한다는 유일하게 올바른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 박헌영이 영도하는 조선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조선의 전체 공산주의 조직들을 영도하는 중앙 기관으로 인정하여야 합니다. 박헌영은 가장 준비된 간부로서 자기 기관을 강화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중략)

● 공산당, 민주당, 민주청년동맹, 여성민주조직, 직업동맹 등등을 통합하여 반일민주조직으로 통일된 민주연합을 설립하여야 합니다. 이 연합 지도자로 제일 인가가 높고 인민이 사랑하는 민족적 영웅, 김일성을 임명하여야 합니다.
이 문서를 보고 김일성이 당시까지도 북한 지도자로 결정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10월 14일의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이 연설한 것은 그가 북한의 지도자로 처음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절차였다. 김일성이 유명하고 인기가 높다는 것도 그가 가짜라는 소문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진실로 보기 어렵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유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여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련 문헌

《우리는 조선을 보았다 (мы видели Корею, We saw Korea)》 (1948) 초판의 김일성 사진.
Molodaya Gvardiya(Young Guard), Leningrad (Молодая Гвардия, Ленинград), 1948.
러시아어 txt 파일을 번역기로 영역하여 보면 내용을 알 수 있고, 러시아어 원문 pdf 파일도 볼 수 있음.
해방 1주년인 1946년 8월 15일을 전후한 북한 여행기이다. 북한을 미화 찬양하는 선전물에 가깝다.
pp.23~35 : 김일성 장군(General Kim Ir-Sen, Генерал Ким Ир-Сен)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그리고 있으나, 실제와는 거리가 먼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러시아어 초판(1948)의 일부 이미지 : 2판과 달리 "김일성 장군" 부분에는 사진도 들어 있다.
한국어 번역본
A. 기토비치, B. 볼소프 공저 / 최학송 역, 『[소련작가들의 해방직후 북조선 방문기] 1946년 북조선의 가을 : 우리는 조선을 다녀왔다』 서울, 글누림, 2006년 04월 18일

해방 직후 북한 정권 내막에 대한 이기건(李奇建)의 증언

이기건(李奇建)은 평안북도 출신으로 해방 직후 서울에서 여운형의 비서를 하며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달하러 평양도 들락거리다 월북하여 북조선 공산당에 가입하고, 인민군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폭압적인 정치 행태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에게도 위해가 다가오자 도로 월남하여 국군에 참여했다. 북한에 있을 때는 김일성 등 최고위급 인사들과도 더러 만났으며 당시 북한 정권 중심부의 내막을 들여다볼 기회가 상당히 있었으므로 후일 이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기타

October 23, 1946 RUSSIAN ZONE IN NORTH KOREA  : pp. 378~385
Mark Gayn은 Chicago Sun지 동경 지국장으로 1946년 가을 한국을 방문했으며, 10월 23일에는 38선 너머 해주 지역까지 방문했는데, 그날의 일기이다.
Anna Louise Strong (1885~1970), 《In North Korea: First Eye-Witness Report》, 『Soviet Russia Today』, New York: 1949 : Text version
번역 : 안나 루이스 스트롱, 《기행 : 북한, 1947년 여름》
김남식 외 저, 『해방전후사의 인식(解放前後史의 認識) 5』 (서울 : 한길사, 1989; 개정판 2006) pp.497~538.
Anna Louise Strong은 지독한 공산주의자였으며, 주로 중국에서 활동했고, 거기서 죽었다. 스트롱이 1947년 8월 5일부터 19일까지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도 만나본 후 쓴 위 기행문도 북한에 대한 찬양 일색이고,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서도 터무니없이 미화하고 있다. 또 소련이 북한에 공산주의 체제를 강제로 만들어 가면서 조만식 등 우파 인물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실상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월남자와 월북자의 수

해방 직후 남한과 북한으로의 이주민 수를 비교한 1947-10-21 일자 조선일보 기사. 월남민은 150만명이나 월북한 사람은 그 1 % (1만 5천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해방 당시 사람들이 남북한 중 어디를 선호했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는 월남자와 월북자의 수이다.

해방공간에서 북한의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월남한 사람들은 약 150만명에 달하는데, 거꾸로 남한을 떠나서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불과 13만명 밖에 되지 않는다(김재웅, 2016, 189~232). 이것은 당시의 민심이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보다는 남한의 민주주의 체재를 선호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AP 통신 기자가 한국에서 조사하여 보도한 기사의 인용으로 당시까지 월남민은 150만명이나 월북한 사람은 그 1 % (1만 5천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기사에 언급한 Anna Louise Strong (1885~1970)은 미국인 공산주의자로 1947년 8월 5일부터 19일까지 북한을 방문했으나 남한은 방문한 적이 없으므로 그녀가 남한에 대해 한 말들은 근거가 없다. 북한을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