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여러 가지 만행을 저질렀다. 8월 25일에 점령군인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자신들이 해방군인양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양민에 대한 무차별 약탈과 부녀자 강간이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일제가 지은 발전소, 공장 등 산업시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하고, 쌀 등의 식량도 가져갔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북한 시민들의 저항도 잔인하게 분쇄하였다. 무수히 많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김일성은 이런 일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의 산업설비 반출에 협력하기도 했는데,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대리인으로 발탁된 인물의 한계를 보여준다.

신의주 학생 사건

소련 군정에 저항하다 무참히 진압 당하는 여러 비극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신의주 학생 사건이다.

1945년 11월 21일 용암포에서 시민대회가 열렸었는데, 이곳에서 공산당 비난 연설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집회는 공산당 성토장으로 변하였고, 공산당원으로 구성되어있던 무장 진입 부대가 출동하여 시민과 학생들을 공격했다. 신의주 학생자치대 본부는 해당 사건을 조사하고자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소련군사령부는 이들의 조사를 저지하였다. 이에 학생대표들은 11월 23일 신의주공업학교에 모여 공산당 타도 데모에 나서기로 결의하였다. 데모 당일 학생들은 무장충돌에 직면했고 소련군인들은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일부 증언에 의하면 기총소사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13명의 학생들이 기총소사에 목숨을 잃었다. 당일 학교측에서 확인한 사망자는 24명, 체포자는 천여명에 달했다. 이후 소련군정의 검거선풍이 일었고, 학생조직은 궤멸하였다.

  • [단독] 신의주 학생반공의거 '23명의 영웅'...78년만에 최초 공개 자유일보 2023.11.23
    • 세계 첫 소련 공산당 항거운동...헝가리 보다 11년 먼저 발생
    • 돌멩이 든 중학생들에 소련군 기관총 난사 23명 현장서 사망
    • 부상 350명·시베리아 유형 200명...北 공산당 항거운동 도화선
    • 좌편향 교과서 등에서 모두 빠지고 정부 차원 추모행사도 없어
한국자유총연맹, 신의주학생의거 역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해 KOREA뉴스 2023-11-23
3분 15초부터 소련군의 만행에 저항한 신의주 학생 사건과 김일성의 당시 행동에 대한 해설
『咸錫憲全集 4.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1983년 7월 한길사)에 재수록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 씨알의소리 1971년 11월 6호
⊙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사망자 20~150명, 부상자 300~700여명, 학생·시민 1000여명 체포, 시베리아 200여명 유형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2) 자유아시아방송 2018-06-05

함흥 학생 반공의거

1946년 3월 13일 함흥에서는 학원으로까지 침투해오는 공산마수를 규탄하기 위해 학생들이 선두에서 반소·반공운동을 벌였다가 1백여명이 사상되고 7백여명이 투옥됐었다.[1][2]

소련군 중좌 표도로프가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에게 올린 보고서

2010년에는 평양의 소련군 중좌 게오르기 표도로프(Георгий Федоров, Georgy Fedorov, 1908~1964)[3]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1945년 12월 29일 작성하여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위원인 스티코프 상장에게 올린 13쪽 분량의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 당시 소련군의 약탈 상황을 가감 없이 현장감 있게 전달한다. 보고서 내용에는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낮 만취 행패… 무전취식에 부녀자 겁탈까지
■ 소련군이 쓴 보고서 발견
“조선인 노예로 더 있게하자 / 봉기땐 절반 교수형 시킬것”
처벌 거의 없어 만행 지속 / “일벌백계” 건의도 묵살당해
[사설] 광복 후 ‘좋은 점령군’이라던 소련 군대의 만행 동아일보 2010-03-11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소련군의 산업설비 반출에 대한 김일성의 협력

  • G-2 Periodic Report : 1946.02.18 미군 정보참모부(G-2) 보고서
    김일성 중심의 임시인민위원회 구성 소식; 조만식의 구금.
    미소위원회가 평양서 열리는 줄로 잘못알고 북한 다녀온 기자의 현지 사정 증언: 1월 3일 학생, 근로자 4,000여명 동원한 평양의 관제 찬탁 데모.- 처음에는 독립시위로 속임. 북한 주민의 공산당 지지율 20% 미만.
    소련군이 수풍댐(Sui-ho Dam)에서 철거한 발전시설을 선박으로 실어가기 위해 청진으로 수송할 수 있도록 평양 철도 관리국장 김원걸 및 기술자 10여명을 현지로 파견하여 선로 연결 작업을 시킴.
  • 美軍政 情報報告書 - 駐韓美陸軍司令部惰報參謀部 日日報告書 - 第2卷 (1946. 2-1946. 7) 國土統-院 : p.91에 평양 철도국장 김원걸이 수풍댐 갔다는 부분 나옴.
    (4) 그 신문기자가 보낸 계속된 보고는 소련군이 수이호 댐 (수풍동(800-1990))에서 발전기를 제거하고 있으며 이를 청진(1250 - 2150)항을 거쳐 운반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의 철도 보수국장인 김원걸 (KIM, Won Gul)이 10명의 기술자와 함께 수이호 댐으로 갔는데 이는 이 기계가 철도로 운반될 수 있도록 철도 운반도를 마련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서 였다.
  • General reports, 1945/ Byrnes, James F. Report of political adviser for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소련군이 압록강(Yalu rifer) 수풍발전소 시설을 철거하여 소련으로 반출하는 일에 대한 정보가 다수 나옴.
    8. The removal of Yalu river plants
    10. Yalu river power plant's stripping
    20. Plant removals by Soviets
  • 6.25 때 포로가 된 인민군 소좌 출신 주영복(朱榮福)의 증언[4]
    시간을 봐서 鴨綠江(압록강)의 水豊(수풍)댐에 견학을 갔다. 당시까지만해도 水豊(수풍)댐은 한국 제일의 발전소이고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댐이었다. 이전에 水豊(수풍) 발전소에서는 10만kw의 발전능력을 가진 7基(기)의 발전기 중 4基(기)를 소련이 전리품으로 뜯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곳에 견학가서 실제로 발전기를 뜯고 직경이 약 10m 쯤 되는 그 자리를 널빤지로 막아 놓은 것을 보았을 때는 어딘지 섭섭한 감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침략자가 건설했다고 해도 우리나라 재산인데.

윤하영(1889~1956) / 한경직(1903~2000) 목사가 미군정청에 제출한 청원서

故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평안북도 상황을 알린 비밀청원서 발견
"청원서 받은 美군정 정치고문… '소련군 활동, 믿을 만한 첫 증언'
소련군, 도시에 들어가면서 현금 강탈·부녀자 강간 일삼아"
pp.1~7 한경직/윤하영 목사의 청원서 KyungJik Han / Ha Young Yoon
pp.15~18 한경직, 윤하영 청원서

극작가 오영진의 증언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의 책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5]에는 소련군의 만행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는 평양에서 살다 해방 직후 소련군의 평양 진주(8월 26일) 직전 서울에 와서 3주간 머무는 동안 소련군의 만행에 대한 풍문을 들었다.[6]

  1. 서울의 조선영화사에서 특파한 촬영기사 이용민(李庸民)이 함흥에서 스파이 혐의로 소련병에 억류되고, 지니고 있던 「아이모(영화촬영기계)」[7]를 신식무기라며 압수당했다.
  2. 소련군사령관이 함경남도지사를 만나 사무 일체를 넘겨 받으면서 지사가 몸에 지닌 장신구와 시계까지 압수했다.

소련군 사령관(이반 치스차코프)의 행태도 무지한 병사들보다 나을 바도 없었다. 같은 책의 제4장 금수강산과 붉은 군대 (p.54 ~ )에는 그가 평양으로 돌아가니 자신의 집도 소련군에 약탈을 당해 초토화 되어 있었고, 그외 소련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목격담이 나온다.

소련의 반(半)식민지주의적 통치 방식

소련 25군의 군사재판소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재판이 이뤄졌다. 25군의 특별재판소에서 선고를 받은 50명의 명단이 발견되었는데, 징역형을 받은 사람들은 소련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명단을 통해 소련 정부가 1945~1948년 사이 한반도 북부에 자국의 형법을 적용하는 등 어느 정도 자기 영토로 인식하고 반(半)식민지주의적 통치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군의 만행에 대한 증언

소련 여군도 조선 남자를 납치 강간

소련 남자군인들의 조선인 부녀자 강간은 일상적으로 있었고, 심지어는 소련 여군들의 조선인 남자 납치 강간도 흔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책에는 6.25 때 부산에 잠입했다 체포된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 25세)[8][9]의 증언이 나온다.

[p.379] 여기에서 조옥희는 새로운 열의를 내어 부지런히 일을 했다. 밖에서 는 어디서 소련군인 몇이 작당해 가지고 가정부인을 강간했느니, 어떤 여학생은 강간당하고 자살해 죽었느니, 또는 거꾸로 소련 여자군인 수 명이 한국인 남자 하나를 납치해 강간한 후 총살을 했느니 하고 별의 별 소문이 떠돌았으나 조옥희는 이 모든 것을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일에만 열중했다.
......
[p.389] 그 사이에 사회는 몰라보도록 변천되어 갔다. 토지개혁이라 해서 지주를 강제로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는가 하면 별의별 공산당의 주구 단체가 생겨 국민들을 괴롭히고 공포의 구렁텅이 속에 몰아넣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군까지 여전히 만행을 거듭하고 있었다. 심지어 모란봉 밑에 있는 소련 여군 숙소에서는 지나가던 남자 중학생을 잡아다가 몇 사람이 덤벼들어 성행위를 강요한 나머지 얼마 후에는 요구를 들을 수 없게끔 중학생이 녹초가 되니까 차에 태워다 모란봉 잔디밭에 내버린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일본어 원제목은 『朝鮮戰爭』)
소련군 여군병사에 의한 조선인 남자사냥도 있었다. 이말을 해준 사람은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장건섭(張健燮) 씨. 장씨는 1924년 생으로 68세. 일본군에 징병되어 8·15 해방은 평양에서 맞았다. 21세였다.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장씨를 만나 그의 저서 '생과 사의 갈림길' 을 얻었는데 그속에 쓰여있다.

장씨 친구의 체험이라고 되어 있는 소련군 여군병사에 의한 강간사건은—.
어느날 평양 거리에서 갑자기 소련군 지프차가 섰다. 한 여군병사가 내리더니 권총을 대고는 "타라” 한다. 차안에 있던 또 하나의 여군이 헝겊으로 눈을 가렸다. 지프차는 여기 저기를 빙빙 돌다가 한 건물에 닿았다. 소련군 병영이었다.
눈 가리개를 풀고 끌려간 방에서 5명의 여군병사가 차례 차례로 덤벼들어서 욕정을 채웠다.
그날중으로 집에 돌려보내 주려니 생각했는데 사흘이나 감금 당했다. 덩치 큰 풍만한 육체의 젊은 여군이 쉴새없이 차례로 덮쳐 거친 숨소리로 '할러쇼, 할러쇼' 하며 헐떡인다.
청년의 두 눈은 쑥 들어가고 일어서지도 못하게 되었을때 겨우 석방되었다.
또 눈가리개를 한뒤 시내의 한 모퉁이에 내려주었다 ᅳ.
나는 장씨에게 물었다.
"이건 친구의 이야기로 쓰셨습니다만 굉장히 리얼한데, 혹시 선생님 자신의 체험이 아닙니까?"

장건섭씨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소련군 최악의 만행

해방 직후 소련군이 저지른 여러 만행 중에서도 최악은 북한 주민들이 체재와 지도자를 선택할 권리를 강탈했다는 것이다. 정치공작과 강압을 통해 자신들이 5년간 교육시켜 데려온 꼭두각시 대리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앉힌 결과 북한주민들은 그후로 오늘날까지 70년이 넘도록 자자손손 김일성 일족의 노예로 살고 있다.


소련은 조선독립운동을 일제보다 더 잔인하게 탄압한 국가

북한을 점령하고 해방군이라 자처하던 소련은 사실은 조선독립운동을 일제보다 더 잔인하게 박해한 나라이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해방군이 되기에는 이미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원죄가 너무 컸다.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 1921년 6월

민족계열 조선인 항일무장투사들을 소련의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로 유인하여[10] 1천여명 가까이 몰살시켜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무장투쟁의 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1937년 가을 스탈린은 소련의 연해주 일대에 살던 고려인들 중 지도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8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켜, 그중 1/3 가량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첫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북한 진주 소련군의 만행에 대한 변명을 실은 1945년 10월 3일자 해방일보 1면 기사. 이 기사는 역설적으로 당시 소련군이 민간을 상대로 벌이는 약탈 행위가 심각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클릭 확대]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소련군 옹호

해방 직후 서울에서 간행되던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 1945년 10월 3일자 1면에는 월남민들에 의해 전해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양민들을 상대로 벌인 만행에 대한 변명이 장황하게 나온다.

소련군인들이 시계등을 빼앗았다는 주장은 북한에서 쫓겨나 월남한 부호, 주구배(走狗輩)들이 퍼뜨린 데마에 불과하며, 소련군은 시계를 가져가더라도 반드시 대금을 지불하거나 구두 3,4켤레 또는 담배 몇 갑 등 상응하는 물건으로 보상해 준다는 근거도 없는 말로 변호한다. 또 소련군이 행색이 수상하거나 도망하는 자를 붙잡아 물건을 압수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서울에 퍼진 소련군의 만행에 대한 나쁜 소문을 의식해서 이를 불식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일보의 이런 기사는 역으로 당시 소련군이 민간을 상대로 벌이는 약탈 행위가 심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 자료

[김기철 전문기자의 Special Report] 민주화운동 元祖가 밝힌 ‘소련=해방군’의 진실
아군(俄軍)은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군대, 즉 소련군을 말한다.
⊙ “소련군 사령관,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색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함석헌)
⊙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사망자 20~150명, 부상자 300~700여명, 학생·시민 1000여명 체포, 시베리아 200여명 유형
⊙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戰利品… 일본이 소련에 끼친 엄청난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 소련으로 이송돼야”
⊙ 미국의 점령은 일본을 대상으로 한 것…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한다”

함께 보기

각주

  1. 함흥 반공 의거 21주 중앙일보 1967.03.13 종합 3면
  2. [오늘의 역사] 함흥 학생 반공의거 충청투데이 2008년 03월 13일
  3. [이휘성(국민대학교 책임연구원) 북한 어제와 오늘] 6·25 발발前 굶주리는 北인민 살렸던 ‘영웅’ DailyNK 2022.03.29
  4. 6.25 北(북)에서 본 證言(증언) <16> 제4부 開戰準備(개전준비) 진행 (1949년) 1980.07.03 경향신문 3면
  5.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복간본 (국토통일원, 1983)
  6.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복간본 (국토통일원, 1983) p.44.
  7. 「아이모(영화촬영기계)」
  8.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 25세)의 기자회견 기사 : 국제신보 1951년 3월 1일자 2면
  9.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 25세)의 기자회견 기사 : 부산일보 1951년 3월 1일자 2면
  10. 스보보드니 (Свобо́дный, Svobodny) 구글 지도
    Svobodny, Amur Oblast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