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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점령 소련군의 만행
최근 수정 : 2019년 7월 19일 (금) 04:44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여러 가지 만행을 저질렀다. 8월 25일에 점령군인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자신들이 해방군인양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양민에 대한 무차별 약탈과 부녀자 강간이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일제가 지은 발전소, 공장 등 산업시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하고, 쌀 등의 식량도 가져갔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북한 시민들의 저항도 잔인하게 분쇄하였다. 무수히 많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김일성은 이런 일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의 산업설비 반출에 협력하기도 했는데,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대리인으로 발탁된 인물의 한계를 보여준다.

당시의 사건이나 사정을 기록한 문헌으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신의주 학생 사건

소련 군정에 저항하다 무참히 진압 당하는 여러 비극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신의주 학생 사건이다.

1945년 11월 21일 용암포에서 시민대회가 열렸었는데, 이곳에서 공산당 비난 연설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집회는 공산당 성토장으로 변하였고, 공산당원으로 구성되어있던 무장 진입 부대가 출동하여 시민과 학생들을 공격했다. 신의주 학생자치대 본부는 해당 사건을 조사하고자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소련군사령부는 이들의 조사를 저지하였다. 이에 학생대표들은 11월 23일 신의주공업학교에 모여 공산당 타도 데모에 나서기로 결의하였다. 데모 당일 학생들은 무장충돌에 직면했고 소련군인들은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일부 증언에 의하면 기총소사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13명의 학생들이 기총소사에 목숨을 잃었다. 당일 학교측에서 확인한 사망자는 24명, 체포자는 천여명에 달했다. 이후 소련군정의 검거선풍이 일었고, 학생조직은 궤멸하였다.


함흥 학생 반공의거

1946년 3월 13일 함흥에서는 학원으로까지 침투해오는 공산마수를 규탄하기 위해 학생들이 선두에서 반소·반공운동을 벌였다가 1백여명이 사상되고 7백여명이 투옥됐었다.[1][2]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에게 올린 보고서

2010년에는 1945년 12월 29일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든 총 13p 분량의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 보고서 내용에는 258 소총사단장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평양의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조사한 뒤 만들어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위원인 스티코프 상장에게 올린 13쪽짜리 보고서. 당시 소련군의 약탈 상황을 가감 없이 현장감 있게 전달한다.


소련군의 산업설비 반출에 대한 김일성의 협력

  • G-2 Periodic Report : 1946.02.18 미군 정보참모부(G-2) 보고서
    김일성 중심의 임시인민위원회 구성 소식; 조만식의 구금.
    미소위원회가 평양서 열리는 줄로 잘못알고 북한 다녀온 기자의 현지 사정 증언: 1월 3일 학생, 근로자 4,000여명 동원한 평양의 관제 찬탁 데모.- 처음에는 독립시위로 속임. 북한 주민의 공산당 지지율 20% 미만.
    소련군이 수풍댐(Sui-ho Dam)에서 철거한 발전시설을 선박으로 실어가기 위해 청진으로 수송할 수 있도록 평양 철도 관리국장 김원걸 및 기술자 10여명을 현지로 파견하여 선로 연결 작업을 시킴.

  • 美軍政 情報報告書 - 駐韓美陸軍司令部惰報參謀部 日日報告書 - 第2卷 (1946. 2-1946. 7) 國土統-院 : p.91에 평양 철도국장 김원걸이 수풍댐 갔다는 부분 나옴.
    (4) 그 신문기자가 보낸 계속된 보고는 소련군이 수이호 댐 (수풍동(800-1990))에서 발전기를 제거하고 있으며 이를 청진(1250 - 2150)항을 거쳐 운반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의 철도 보수국장인 김원걸 (KIM, Won Gul)이 10명의 기술자와 함께 수이호 댐으로 갔는데 이는 이 기계가 철도로 운반될 수 있도록 철도 운반도를 마련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서 였다.


윤하영(1889~1956) / 한경직(1903~2000) 목사가 미군정청에 제출한 청원서

광복 직후 소련군 만행 폭로…故 한경직 목사 ‘비밀청원서’ 발견돼 중앙일보 2017.08.16
故 한경직 목사가 증언한 해방 후 북한, '비밀청원서' 발견 YTN 2017-08-16
RG 59, Central Files, The Decimal File, 1910-63, 740.00119, Control(Korea) Series, 1945.10-1945.12, Attitudes towards Occupation Forces in Korea
pp.1~7 한경직/윤하영 목사의 청원서 KyungJik Han / Ha Young Yoon


소련의 반(半)식민지주의적 통치 방식

소련 25군의 군사재판소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재판이 이뤄졌다. 25군의 특별재판소에서 선고를 받은 50명의 명단이 발견되었는데, 징역형을 받은 사람들은 소련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명단을 통해 소련 정부가 1945~1948년 사이 한반도 북부에 자국의 형법을 적용하는 등 어느 정도 자기 영토로 인식하고 반(半)식민지주의적 통치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군의 만행에 대한 증언


소련군 최악의 만행

해방 직후 소련군이 저지른 여러 만행 중에서도 최악은 북한 주민들이 체재와 지도자를 선택할 권리를 강탈했다는 것이다. 정치공작과 강압을 통해 자신들이 5년간 교육시켜 데려온 꼭두각시 대리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앉힌 결과 북한주민들은 그후로 오늘날까지 70년이 넘도록 자자손손 김일성 일족의 노예로 살고 있다.


소련은 조선독립운동을 일제보다 더 잔인하게 탄압한 국가

북한을 점령하고 해방군이라 자처하던 소련은 사실은 조선독립운동을 일제보다 더 잔인하게 박해한 나라이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해방군이 되기에는 이미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원죄가 너무 컸다.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 1921년 6월

민족계열 조선인 항일무장투사들을 소련의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로 유인하여[3] 1천여명 가까이 몰살시켜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무장투쟁의 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1937년 가을 스탈린은 소련의 연해주 일대에 살던 고려인들 중 지도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8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켜, 그중 1/3 가량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첫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각주

  1. 함흥 반공 의거 21주 중앙일보] 1967.03.13 종합 3면
  2. [오늘의 역사] 함흥 학생 반공의거 충청투데이 2008년 03월 13일
  3. 스보보드니 (Свобо́дный, Svobodny) 구글 지도
    Svobodny, Amur Oblast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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