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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최근 수정 : 2019년 7월 22일 (월) 16:11
자유시(스보보드니) 지도(크게 보기 클릭)

개요

항일무장투쟁사(史) 최악의 참사. 1921년 6월 27일에 러시아령 아무르 주 자유시(러시아어명: 스보보드니 Свобо́дный, Svobodny)[1]에서 한국 독립군 부대와 소련 적군(볼쉐비키 혁명군)이 교전을 벌인 사건.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고,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어 소련 적군에 편입되었다.

당시 소련 적군의 가장 큰 목표 중의 하나는 "일본과 싸우지 않는다" 였다. 따라서 소련 적군은 일본이 조선 항일무장단체의 해체를 요구하자, 대한독립군단을 자유시로 유인하여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생존자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킨다. 희생자의 규모 자체도 최악인 데다, 일본군과의 전투도 아닌, 소련 적군에 유인되어 대한독립군단 수뇌부가 군권을 잃고 농락당한 결과라는 점, 그리고 아울러 불완전했던 임시정부 내부를 분열시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사건이란 점으로도 더 비극적이다. 이후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단체들이 오랫동안 통합한 연합 부대를 못 만들고, 결코 힘을 회복 못 했다는 점에서도 최악의 사건으로 꼽힐 만하다.

사건 배경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 중이어서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赤軍)와 반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백군(白軍)이 대립하고 있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동시에 반일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한인무장대를 소탕하고자 했다. (이때 발생된 것이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 간도 참변)

이에 독립군은 적군에 가담했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소련 적군는 일본군과 백군을 전멸시켰다.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 및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적군이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의병대도 행동을 같이했다.

이 한인의병대는 일반적으로 이만군대, 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인 무력군으로, 이만군대 사령관은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 김덕보였고, 다반군대 사령관은 최니콜라이였다. 이들 연해주의 한인무장대들은 임시흑룡주정부가 극동공화국으로 강화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자유시로 집결했다.


당시 한인의병대 (대한독립군단) 조직

1920년 니콜라옙스크 사건,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면서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따라서 독립군들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동 중 일단 밀산에서 독립군을 통합 및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은 다음과 같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이었고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었으며,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되었다. 여단장에 이청천(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 등이 선임되었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밀산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3월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노령 연해주와 헤이룽장 일대에서 활동중이던 문창범, 한창해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소련 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는 아직 일본이 연해주에 남아 있는 상황이라 일본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소련 측은 무장해제 후 자신들이 식량과 군복과 무장을 책임질테니 자유시로의 이동을 권유했다.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등도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

이런 무장해제 요구에 서일, 김좌진, 이범석,김홍일 등은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갔지만 최진동의 총군부,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박두희가 이끄는 북로군정서 일부는 요구를 받아들여 자유시로 집결했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남은 독립군들은 자유시에 집결했다. 간도 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등의 독립군 등 군정서가 있었으며, 러시아 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도르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와 고명수의 니항군·자유대대, 박그리고리와 최파샤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다.

이들이 자유시 집결 목적은, 분산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모아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내어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중 이만 시로 들어간 지청천 부대는 홍범도의 소개로 소련 적계군 한인부대장인 박일리야 연대장을 알고, 박일리야는 소련 교관을 한국독립군부대에 배치하여 전술법을 교육하는 등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 부대, 한국광복군 단원들. 대한민국 22년(1940년) 12월 26일 중국 서안(西安)에서 찍은 사진.[2]

갈등의 전개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오하묵의 자유대대와 박일리야의 이항군 사이에 독립군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오하묵측(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박일리야측(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일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통고했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와 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측과의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을 총사령관, 그리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두도록 했다.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한인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의회(임시군정의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 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전한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칼란다리시빌리는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대해 계속 반항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리고리예프도 칼란다리시빌리에 투항하자, 칼란다리시빌리는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사할린의용대는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와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 자유시참변(흑하사변) 뒤 자유시에 남아있던 병력은 붉은 군대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1989년 8월 15일 동아일보에 실린 현장약도(급수탑 뒤쪽에는 사할린 의용대의 진지가 있었다)[3]


평가

자유시 참변을 "독립군 내부의 세력다툼에 의한 사건"이라고만 결론짓고 넘어가는 것은 곤란하다. 큰 배경과 맥락은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눈치를 보던 소련 적군파가 한인 항일단체를 제물로 바친 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적군(공산주의)에 가담한 한인(韓人) 독립군 간 서로 총을 겨누는 일이 일어난 사건이라, 이 사건을 한인간의 최초의 이데올로기적 동족상잔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사건 이후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여기에 책임을 지고 두 달 뒤 밀산에서 자결했다.

또한 독립운동계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는데, 바로 매카시즘이 일어나기에 앞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극도의 반공주의를 확산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소련 적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니까 우리편" 으로 생각했는데, 배신을 겪었다는 감정과 함께 "공산당은 상종할 놈들이 아니다", "공산당은 결국 분열을 일삼는다" 라는 인식을 깊이 심어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김구, 김좌진, 이범석, 장준하가 반공주의를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고, 공산당과 협력하자는 입장을 보인 김원봉, 여운형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대를 거부한 까닭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공산당 자체의 분열과 민족지도자의 반공정서는 훗날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소련 적군에 편입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말년에 극장 수위장 등으로 있다가 광복 2년 전 생을 마감했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은 만주로 돌아와 민심을 얻기 위해 방앗간 등을 운영하며 공산주의자들을 뺀 아나키스트도 받아들이면서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오래 못가 피살됐으며 북로군정서 등의 독립운동가들도 반공을 고수하다 역시 대부분 피살을 겪어 몰락했다. 지청천 장군은 자유시 참변을 겪은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오하묵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1921.8)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양세봉 장군은 공산주의자의 협력 요청에 "적어도 민족주의자들은 당파는 만들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라며 공산주의자에게는 협력을 거부했다.

자유시 참변에 대해 만주 계열 독립군 중심으로는 많이 이야기 되나 러시아 계열 독립군에 대한 이야기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특히 사할린 의용대의 중심인물이자 무장해제에 저항했던 박일리야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의 테러와 학살과 관련된 인물이다. 이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반병률 같은 극소수 학자들을 빼면 전문가들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자세한 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참고.


연표

  •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 멸망, 러시아 내전발생
  • 1918년 11월 11일 -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
  • 일본 군이 하얀군대를 돕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동했지만 붉은 군대와 싸우던 미국과 체코슬로바키아, 그 외의 연합군이 철수함
  • 일본 국회가 러시아에서 일본 군도 철수하기로 결의
  •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발생
  • 1920년 3월 - 니콜라옙스크 사건
  •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있는 조선 항일 무력단체들을 토벌하기로 함
  • 일본군 19사단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군을 공격
  • 1920년 6월 - 봉오동 전투 발생. 최진동장군이 이끄는 북로독군부가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싸워 크게 이김
  • 1920년 10월 21일 - 최진동장군,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침
  • 일본군 21사단은 남쪽의 서로군정서군을 공격
  • 연이어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 개시
  •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인해 독립군은 전략상 노령(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동중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킴. 병력은 약 3,500명 정도
  •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진입, 분산된 모든 독립군들을 자유시로 불러모음
  • 1921년 6월 27일 -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의 소수파인 공산주의자 와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함. 자유시 참변 발생. 분산되었던 조선의 독립군들이 모두 모여서 3500명의 대규모 부대를 이루어 놓은 것을 소련 적군(赤軍)에 의해 사살, 부상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감. 탈출한 사람은 드물었고, 연해주 지방의 조선독립군 세력은 모두 와해됨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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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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