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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과 공산당
최근 수정 : 2018년 10월 15일 (월) 16:17

여운형 정치인생의 복잡성

여운형은 청년기와 장년기에 미국 기독교와 중국혁명, 소련 국제공산당 이라는 3개국 단체와 각각 특이한 인연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발전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피상적으로만 인식한 상태로 국제공산주의가 지휘한 1925년 5.30 중국 혁명의 배후역할을 했다. 1929년 체포되어 귀국한 후 수형생활을 하다가 1932년 출옥한 후 조선중앙일보 사장 등 언론에 종사했으며, 일제말에는 과거 소련 국제공산당 지도자들과 쌓은 인맥이 기반이 되어, 소련과 교섭라인을 원하는 일제 고위 관료와 교제를 하면서 친일파로 비난을 받았다.
해방직후에는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영향하에 들어갈 것으로 착각하여 건국동맹을 급조하고 박헌영의 인민공화국에 둘러리 섰으며, 미군의 진주와 더불어 모스크바 협정에 따른 한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꿈꾸다가 미소공위 중지와 박헌영의 도전 때문에 무산되었으며, 다시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미군정이 지원하는 좌우합작운동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스탈린의 지시로 좌절되었다.
그의 사상은 공산주의라기 보다는 민족주의를 우선으로 하는 중도좌파에 가까우며, 그의 한 단면만 보고 그를 친일파나 분단의 원흉인 공산당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실상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 그의 전기를 쓴 이정식의 주장이다.


기독교 전도사 여운형

여운형 집안은 동학을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는데, 그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발생한 민족자각의식에 눈을 뜨고 부친상을 끝낸 후 사랑방에 광동교회를 세우고 어린이들의 교육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서울로 올라와서는 인사동 승동교회에서 곽안련(Charse Allen Clark)의 조사(助師)로 5년간 (1907~1910, 1911~1913)지내다가 목사가 되기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한편으로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오만이 싫어서 1914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언더우드 목사에게 소개장을 얻으러 갔을 때는 금릉내학 신학부에 가겠노라고 했다함)

승동교회 전도사 경험이 없었다면 중국 난징 진링(금릉)대학 학생 여운형은 없었을 것이고 동경 한복판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동양평화론'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여운형은 남경에서 2년간 금릉대학을 다니다 생활비 때문에 중단하고 상해로 이동하여 1917년 1월부터 미국인 선교사 죠지 휫치가 경영하는 협화서국이라는 서점에서 일하면서 교민사회의 일과 YMCA 전도활동을 병행하였다. 그는 금릉대학과 상해 생활을 통해 당시 중국사회에서 드믈게 기본적인 영어회화와 중국어를 습득하였으며 이 능력은 그의 앞날에 남다른 무기가 되었다.


여운형과 공산당

여운형은 1920년 5월경 국제공산당의 아시아 담당자 보이틴스키가 김만겸을 통해 자신을 만나 국제공산당이 조선독립운동을 원조할 의지를 갖고있다는 말을 듣고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고려공산당은 창당 초기부터 김만겸과 이동휘로 분열,대립되어 오다가 1922년 상해에서 격렬한 분쟁을 겪은 후 국제공산당에 의해 해산명령을 받고 해체되었으며, 여운형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심문받은 내용으로 볼 때 고려공산당에서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평가되는데, 이정식은 그 이유를 그가 자유시 사건에 관계된 한인공산당원들이 이르츠쿠에서 억울하게 재판받는 것을 지켜보고 파벌싸움의 해독을 깊히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이정식 여운형 326쪽)

1929년8월 취조경찰의 심문에 대한 답변에서 여운형은 자신의 고려공산당 활동은 "국제공산당으로 부터 월100원을 받아 공산주의에 관한 서적을 수집하고 교양활동한 것. 공산당선언, 공산주의 독본 등을 한글로 번역하고 500~1000부 인쇄하여 만주의 각독립단체와 국내에 송부한 것 말고는 없다"고 말했다.(이정식 289~290쪽) 여운형의 측근인 이란 등의 증언으로는 그의 사상적 깊이는 공산주의든 그 어떤 정치사상이든 개괄적인 이해수준을 넘지 못하고 본론 전개에 대한 지식,논리가 취약하다고 한다.

여운형이 중국에서 공산당 활동을 한 것은 미국인 국제공산당 아시아 담당자 보이틴스키와 중국 국민당 및 공산당 혁명활동에 참여를 통해서였다. 그는 신규식이 구축한 중국 혁명가들과의 인맥을 통해 1919년 3.1운동 직후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열광적 지지를 보여준 손문과 교제하면서, 손문과 연결된 국제공산당 지도자들 포타포브, 보이틴스키, 보론 등과 어울리면서 1925년 중국의 5.30운동의 배후지휘세력으로 깊숙히 참여하여 운동방향을 지도함으로써, 특이하게도 한국인으로서 국제공산당 일원으로 소련인과 함께 중국혁명운동의 지도부 또는 사령탑의 막료 역할을 했다. 이 성취의 경험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서 목격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연설장면과 함께 오랫동안 그의 뇌리속에 소련공산당에 대한 그의 피상적인 이해와 친소련 정서를 구축했다.


여운형과 자유시 사건

여운형은 상해파 이동휘와 반목하는 이르크추쿠파 공산당원으로 분류되지만, 니항사건이나 자유시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가 이르츠쿠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동방피압박민족대회(또는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고자 상해를 떠난 것은 자유시 참변이 종결된 이후인 1921년11월이었으며, 그는 이르츠쿠에 도착한 후 자유시 참변으로 체포된 동포청년들이 억울한 죄로 재판당하는 것을 보고 분열적인 이르츠쿠파 조직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유시 사건 개요

이정식은 [여운형. 2008년]에서 자유시 참변의 원인이 고려공산당 내 파벌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간의 갈등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힘이 약한 러시아의 신생 볼쉐비키정권이 1920년 2월 부터 일본과의 국교회복을 요청한 상태에서, 1918년 8월 부터 시베리아를 독점하고자 대병력을 파견중인 일본군의 철군을 촉진시키기 위해, 일본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여 한국독립군세력(고려공산당 상해파군대 + 청천리,봉오동 전투를 끝내고 소련령으로 피신간 한국독립군)을 무장해제시키려는 의도하에 발생한 사건으로 본다. 볼쉐비키 정권은 한국무장독립운동 세력을 자기들의 휘하로 흡수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려공산당 이르츠쿠파의 오하묵을 시켜 이들 한인 독립군세력을 자유시에 집결시키고 무장해제를 명하였는데, 죽을 고생을 하며 이제 막 조직을 만들고 왜적과 싸우려한 한인독립군이 명령을 정면 거부하여 격투가 벌어지고 결국 볼쉐비키군대가 한인독립군을 사살,체포해 간 것이다.

자유시 사건 1년 전인 1920년 1~5월경에, 일본은 과거부터 러시아의 극동 전진기지였던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옙스크(니항尼港)를 소수 병력을 이용 점령하였으나, 현지 볼쉐비키계 무장 러시아인(야코 트리아피친 지휘)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전투에 패배했다가 역공하는 과정에서, 박 일리야 한인부대가 볼쉐비키군 지휘자 트리니친의 명령에 따라 300명의 일본인 민간인 남녀노소를 처참하게 학살하자, 이에 격분하여 일본군 대병력을 연해주에 진주시키고 시베리아를 본격 공략하려 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기동을 중지한 상태에서, 일본군 철병의 조건으로 민간인 학살의 원흉인 박일리야 부대와 눈에 가시 같은 청천리,봉오동의 한국독립군의 제거를 요구하였던 것이며, 볼쉐비키 정권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1000명에 가까운 한인독립군 병사들이 포로가 되어 2,000킬로미터 서쪽의 이르크츠쿠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은 후 적군에 편입되거나 투옥되거나 강제노역에 끌려갔다. (김홍일에 의하면 700~800명이 사살되고 천 명이상이 부상당했으며, 기타 많은 수가 고역을 치루었다고함)
박 일리야는 상해파 공산당 지도자 이동휘의 영향하에 있던 사람으로서, 니콜라옙스크 볼쉐비키 지도자 야코 트리아피친이 볼쉐비키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한국독립을 위해 돕겠다고 약속하고 합의서에 서명하자, 이를 믿고 수백명의 한인청년을 동원하고 트리니친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함으로써 일본인 민간인 학살의 주역이 되었으며, 결국 러시아와 일본의 밀약으로 자신의 부대 뿐 아니라 자유시에 집결한 수천명의 한인독립군의 말살로 이어졌다.
이정식은 자유시 사건은 결국 이동휘의 지론인 무장독립투쟁론의 문제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나라 잃은 민족의 후예들이 나라가 주권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남의 나라에 가서 타민족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하겠다는 것은 결국 요행을 바라는 것에 불과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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