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
  • 토론
  • 읽기
  • 원본 보기
  • 역사 보기
봉오동 전투
최근 수정 : 2021년 10월 2일 (토) 11:56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당시에 찍은 봉오동 전투의 두 주역 홍범도(洪範圖)와 최진동(崔振東)의 사진. '홍범도 일기'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은 소련 최고지도자 레닌을 접견하고 권총 1자루와 금화 100루블, 레닌이 친필 서명한 '조선군 대장' 증명서 등을 선물 받았다.[1][2][3]
함경북도의 청진 인근 나남(羅南)[4]에 있었던 19사단[5] 사령부. 봉오동 전투에 참여한 야스카와 추격대(安川追擊隊) 등은 그 예하에 속했다. 당시 사단장은 高島友武 中将:1918年(大正7年)7月24日 - 1921年(大正10年)7月20日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6일 ~ 6월 7일)는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과 싸워 대패시킨 전투이다.

개요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은 간도 내의 독립군단 토벌에 나섰다.

이에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안무(安武)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중국 지린성 화룡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결과

교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독립군은 1천 3백여명이었고 일분군은 500여명이었다. 전투 결과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이 발생하였고,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을 대패시킨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으며 병력보강과 군비확충에 활력을 주었다. 한편 조선총독부와 일본은 독립군의 병력을 새로이 평가하고 대토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은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를 전개해 나갔다.

전투 쌍방 인명 피해에 대한 당시의 기록

봉오동 전투에서의 쌍방 피해는 당시 일본측 기록과 임시정부측 기록이 판이하게 달라서 논란이 되고 있다. 관련된 여러 기록들을 미디어워치가 정리한 기사가 있어 참고가 된다.

일본군 전사자, 상세전투보고서 포함 다양한 일본 측 사료에 단 1명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만 52명, 60명, 120명, 150명, 157여명 등 매번 다르게 기록하며 ‘과장선전’
여러 기록들에 나오는 봉오동 전투 당시 쌍방의 인명 피해에 관한 기록들을 정리한 표.[6] 일본측은 간도국민회가 배포한 호외나 <지명서(指明書)>의 내용을 보고하면서 허위라고 하였다.[7][8][9][10]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내용도 간도국민회 문건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위 표에서 누락된 당시 국내 신문들에 보도된 전투 쌍방의 인명 피해이다.

국내 신문명 일자 일본군
전사
일본군
부상
독립군
전사
독립군
부상
기타

매일신보 봉오동전투 기사[11]

20/06/10

사상자 12

24

- -

동아일보 봉오동전투 기사

20/06/20

1

2

34

- -

조선일보 봉오동전투 기사

20/06/20

1

2

34

- -

매일신보 봉오동전투 기사

20/06/21

1

2

34

- -

독립군 측이 아군측 사망자 시신을 쌓아 놓고 일본군 시신인 것처럼 사진을 찍어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고 함.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과 달리 한 국가의 정규 군대이니만큼 말단부대로부터 중앙정부까지 일사불란한 지휘보고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낼 방법이 없는 이상 150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했는데도 1명 전사로 허위 보고할 간 큰 지휘관은 없다고 봐야 한다. 허위보고를 한다고 해도 150명의 인원 손실을 보충할 방법이 없으니 이를 숨길 수 없고 금방 탄로날 수 밖에 없다. 조선군이 당시 전황을 육군성에 보고한 문건은 많이 남아 있지만 어디에도 150명이나 되는 대규모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볼만한 것은 없고, 일관되게 전사자는 병졸 1명이다. 말단부대 지휘관이 전사자 수를 150명이나 줄여 허위 보고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엄중한 처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 전사자가 1명이라고 보고한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허위보고로 처벌 받은 적도 없고, 부대원 대다수에 해당하는 150명 병력을 잃은 참패에 대한 문책도 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같은 해 10월의 청산리 전투에서도 여전히 일본군 지휘관으로 활동했다.[12][13][14] 그가 만일 봉오동 전투에서 부하가 150명이나 전사했는데도 1명 전사로 허위보고를 했다면 인원보충도 받지 못했을 것이므로 4개월 뒤의 청산리 전투에는 유령들을 데리고 싸웠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일본군 병사들 입장에서 보아도 봉오동 전투에서 150명이나 전사했는데도 상관들의 허위보고로 전사자 예우도 받지 못하고, 유족들에게 아무 보상도 없었다면 그들이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울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겠는가? 이로 보아 야스카와 소좌가 봉오동 전투의 일본군 전사자가 1명이라고 한 보고는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더구나 일본 정부 측은 간도 영사관으로부터 간도국민회가 호외 또는 지명서를 배포하며 일본군 전사자가 150명 또는 49명이라 허위선전한다는 보고까지 여러 차례 받고 있고,[7][8][9][10] 상해의 독립신문 등이 일본군 측 인명피해가 큰 것으로 보도한 언론기사들까지 접할 수 있었다. 당시 간도국민회가 배포한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승했다는 문건들도 일본 정부에 보고됐기 때문에 그것이 기록으로 보존되어 오늘날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보아도 야스카와 추격대나 간도 영사관이 본국 정부에 인명피해에 대해 허위보고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의 일본군과 같은 정규 군대에서는 전사자가 발생하면 장례문제, 예우문제, 유족에 대한 통지와 보상문제등이 수반되므로 함부로 전사자 수를 줄여 보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사자 수는 물론 명단까지 정확히 보고할 수 밖에 없다. 또한 150명이 전사했는데도 보고가 되지 않았다면 이들을 위한 보급품, 봉급 등이 계속 내려오게 되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부정으로 대리 수령을 한다고 해도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또 때가 되면 인사이동 발령이 날텐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미 전사한 사람들을 보고도 하지 않고 언제까지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겠는가? 전투에서 상대편에 준 피해는 과장해서 허위보고도 할 수 있겠지만 금방 드러나는 자기 편 인원손실은 속여서 허위 보고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물론 언론에는 피해를 줄여 허위발표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상부에서 결정해서 할 일이고, 말단 전투부대가 상부에 대규모 전사자 발생을 속이고 허위보고할 수는 없다.

반면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기사는 간도국민회에서 배포한 호외나 <지명서(指明書)>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독립군의 정확한 전과를 기록한 것이라기 보다는 선전물에 가까워 보인다. 간도국민회나 독립군과 임시정부 측은 사기 진작을 위해 또는 원활한 후원금 모금을 위해 독립군의 전과를 부풀려 선전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남긴 기록이 정확하다고 믿을만한 근거는 별로 없다. 간도국민회나 임시정부는 일본군에 대한 흑색 선전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는 그런 전략도 필요했겠지만, 후대의 연구자들은 확인없이 이런 것들을 모두 사실로 믿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아래는 위 표에 나오는 쌍방 피해가 기록된 원문 링크이다. 위 표에 빠진 기록들도 추가하였다.

간도국민회 문건

간도 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15][16]는 만주의 간도 지역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단체이다.[17] 간도 지역 여러 곳에 다수의 지회를 두고 있었는데[18] 아래는 봉오동 전투와 관련된 그 중 일부이다. (1921-03-31 현재)

지방회 명칭 위치 회장
大韓國民會總部 春陽鄕 蛤蟆塘 [汪淸縣], 志仁鄕 依蘭溝 [延吉縣] 具春先 會長 (大正九年八月改選)
第一南地方會 智新社 太拉子 [和龍縣] (현재의 龙井市 智新镇) 馬龍河 會長 (德新社, 龍河 馬晉 三寸)
第一北地方會總會 春華鄕 石峴 [汪淸縣] (현재의 图们市 石岘镇) 金允德 總會長
第二北地方會 春融鄕 汪淸 (연재의 汪清县 百草沟镇) 金南轍(鳳熙) 會長 前
金貞(東奎) 同 後
第二中部地方會 志仁鄕 依蘭溝 東滿 [延吉縣] (현재의 延吉市 依兰镇) 姜九禹 會長 (志仁鄕 西溝 廣濟村)

각 지회의 소재지는 아래 간도성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봉오동 전투 당시 각 지회에서 배포한 소식을 알리는 문건으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일본측 문헌에 전한다.

  • 1920년 6월 10일 간도국민회 제1남부지방회의 "호외"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間島 不逞鮮人團에 관한 參考書類 [高警 제34318호] : 國民會 南地方會 通告文 (朝鮮總督府 警務局, 1920-10-28) pp.35~37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자료집 10 :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조선총독부 보존 문서 > 9. 국민회 남부지방회 통고문 pp.288~289 : 공훈전자사료관[19]
9. 국민회 남부지방회 통고문

국민회 남지방회의 통고문
대한민국 2년 6월 10일 호외
대한 국민 제일 남지방회장 마용하
지회장 좌하
1. 독립전 개시의 건
본부 통신에 따르면 6월 7일 오전 8시경 아군 주둔지 봉오동(鳳梧洞)에서 독립전을 개시하여 적의 전대(前隊) 1백 50명이 전몰하고 아군의 전사자 38명, 전쟁은 계속중, 참전군은 북로독군부(최홍) 신민단 30명, 아군은 대 승리를 획득하였다.
1. 군사 통신의 건
본부 통신에 의하면 군사 통신은 전파를 쓰는 데 위법자는 군법에 의한다.
1. 간호대 파송 요구
본부 통신에 따르면 혈전을 개시하였다.
전지 부근의 남녀는 간호에 좇아도 불충분하므로 귀 지회에서는 경호대를 주로하는 간호대를 조직해 두어 지방부의 통지가 있는 대로 즉시 파송할 것.
1. 고진(膏眞) 경편의 군량 준비 건

본부 통신에 따르면 아군은 대승리를 획득하여 우세를 계속중으로서 고진 경편한 군량이 아니면 불가하므로 먼저 근변(近邊 ; 戰地) 제1, 2북 지방 제2중 지방은 고진 경편하니 양자(粮子)를 화속히 전지로 향하여 수송하였는데 귀 지회에서도 백미 가루 혹은 밀가루를 집집마다 5승씩 준비해 두고 지방부 통지에 의하여 수송한다.
일본 측은 간도국민회의 호외의 내용을 보고하며 허위선전이라 하고있다.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都督府와 國民會의 鳳梧洞戰鬪 선전물 발행] 朝特 제45호 1920-06-15 : 공훈전자사료관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軍務都督府에서 鳳梧洞전투 軍情報新報 號外 발행, 國民會에서 봉오동전투 선전물 제작, 일본군 150명 전사라고 함.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 [不逞鮮人團의 승리선전] 8203(暗) 제166호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5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6일
일본군 전사자 150명이라고 선전
鳳梧洞 不逞鮮人團이 越江진격대에 대승리했다고 선전|警團隊와 看護隊 派遣 獨立전쟁제1회전|獨立의군
  • 1920년 6월 10일 간도국민회 중부지방회 통첩문(通牒文)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9 > 國民會가 살포한 통첩문에 관한 건 : 機密 제152호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26일 / 수신일 1920년 07월 03일
p.3에 통첩문 전문의 일본어 번역이 실려 있음.
독립운동사자료집 10 :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조선총독부 보존 문서 > 10. 국민회 중부지방회 통달문 p.289 : 공훈전자사료관[19]
10. 국민회 중부지방회 통첩문(通牒文)

제2 중부발
대한민국 2년 6월 10일
제2 중부회장 강구우(姜九禹)
지회장 전(前)
독립전쟁 제1차 대승리에 관한 건

수제의 건에 관하여 본부 제104호 공함을 접수한즉 지난 7일 봉오동에서 왜 육군 수백 명과 본 독군부와 교전하여 왜노 1백 20명을 격살하고 기관총 2문 및 소총 약간을 탈취하고 아 독립군에는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어 기쁨을 이기지 못함에 대하여서는 양해하여 주시며 일반에게는 비밀히 하고 알려드리오니 그리 아시옵소서.
  • 1920년 6월 13일 간도국민회 제2북부지방회의 <지명서(指明書)>
일본 측은 지명서 내용 전문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보고하고, 그 내용이 허위라고 하고 있다. (이것이 전하는 원본임.)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國民會가 살포한 指明書에 관한 건 / 機密 제149호 1920-06-23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鳳梧洞 金貞(國民會第二北地方會長)|黃河白(조선전사자)|朱澤烈(조선전사자) 國民會 日本군 추격사건에 대한 선전활동|적의 대대장 중대장 각 1명과 병졸 49명 즉사 조선군의 대첩
독립운동사자료집 10 :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조선총독부 보존 문서 > 11. 제2북부지방회 지명서(指明書) pp.289~290 : 공훈전자사료관[19]
11. 제2북부지방회 지명서(指明書)

대한민국 2년 6월 13일
제2 북지방회장 김정(金貞)
제2 지회장 귀하
1. 아군 대첩에 관한 건
본월 10일 오후 10시에 발송한 지령을 본일 오전 1시 접수한 바 봉오동에서의 진쟁은 7일 오전 10시부터 개시되어 잠시 계속하였는데 적은 점차 궤주하였으며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ㄱ) 적의 대대장, 중대장, 준사관 각 1명 병졸 49명 즉사함.
(ㄴ) 중경상자는 그 수를 알수 없음.
(ㄷ) 아군의 군의 황하백(黃河白), 군인 주택렬(朱澤烈) 양씨는 순국하고 그 밖에 경상 2명, 피해 부녀·아동 16명, 소 6두, 개 2두
(ㄹ) 전리품은 무기 20정, 기타 잡품 약간이 있음. 이상.
다만 군량, 기타의 물품이 급속히 필요하니 지급 취집하여 둘 것.

[주 : 원본은 1920년 6월 23일 북간도에 있는 국민회가 산포한 지명서를 계여삼길(堺輿三吉)이가 보고한 것인바 구 충독부 문서 중에 포함되어 있음]
연변대학 교수 박창욱(朴昌昱)은 국민회 제2북부지방회가 봉오동 근처인 석현(石峴) 부근에 있었으므로 전투상황을 가장 잘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위 기록이 실제에 가까울 것으로 본다.[20][21] 하지만 봉오동에 인접한 석현(石峴)에는 국민회 제1북부지방회가 있었고, 위 지명서를 배포한 제2북부지방회는 왕청현 춘융향(汪淸 春融鄕) 즉 오늘날의 왕청현 백초구진(汪清县 百草沟镇)에 있어 봉오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따라서 제2북부지방회가 봉오동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배포한 문건이 정확할 것이라는 주장은 착오로 보인다.
원문 이미지 보기 : pp.98~99
김정규(金鼎奎) 일기 1920년 6월 9일 과 12일자 (움력 4월 23일과 26일) 봉오동 전투 관련 기록.
1920-06-09 (양력) : 1920-04-23 (음력) 경신(庚申)년 신사(辛巳)월 무술(戊戌)일
[四月] 二十三日戊戌 小雨. 朝據來信, 則日兵四百名 突來汪淸縣鳯梧洞地方, 與吾軍相戰數時, 死傷甚多云云.
음력 4월 23일 무술일 비가 약간 옴. 아침에 온 소식에 따르면 일병 400명이 돌연 왕청현 봉오동지방에 와서 우리 군과 수시간 동안 싸워 사상자가 심히 많다고 한다.
1920-06-12 (양력) : 1920-04-26 (음력) 경신(庚申)년 신사(辛巳)월 신축(辛丑)일
[四月] 二十六日辛丑 陰. 午天, 據梧洞的報, 則日兵死者百餘名, 吾軍死者三人, 洞民死傷者十數名.
음력 4월 26일 신축일. 한낮 봉오동 소식에 의하면 일본군 사망자는 100여명이고, 우리 군의 사망자는 3인, 동민 사상자는 십수명이라 한다.
김정규(金鼎奎, 1881~1953) : 독립유공자 애국장(1993)
윤병석, 용연(龍淵) 김정규(金鼎奎)의 생애(生涯)와 「야사(野史)」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5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12)
김정규는 봉오동 전투에 직접 참가하진 않았으나 당시 간도 지역에 있었고, 전투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일기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간도국민회에서 배포한 문건들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임시정부측 기록

주로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에 보도된 기사이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에서 검색해서 볼 수 있다. 신문의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 모두 올라 있다.

  • 임시정부 『공보호외(公報號外)』 1920년 6월 20일자
일본군 전사자가 120여명이라 함.
당일 공보호외 실물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나,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6월 22일자와 상해에서 간행되던 신문 『시보(時報)』 6월 23일자에 인용되어 있다.
자료한국독립운동4(2)권 : 韓日兩軍의 三屯子 및 鳳梧洞激戰 『시보(時報)』 (상해의 신문) 1920-06-23 : 공훈전자사료관
又據韓國臨時政府發刊六月二十日公報號外云。六月七日 上午七時許。吉林省汪清縣駐屯韓軍獨立軍七百餘人。 行陣往駛梧洞之際。忽有敵軍三百餘名。亦直向駛梧洞。 韓國獨立軍大將洪範圖崔明祿。在路中突然急呼射擊。 與敵接仗。敵軍死者一百二十餘名。敵軍恐煌莫措。四散崩潰。韓國獨立軍乘勝長驅。追擊敵軍。尚在戰爭中。 最後勝捷。
獨立軍勝捷
鳳梧洞에셔 敵을 大破
敵은 潰亂死傷 一百二十
六月七日 接戰에 關한
我軍의 公報

六月七日 北陸我獨立軍과 敵의 接戰에 關한 敵의 報道는 別項과 갓거니와 六月二十日 我軍의 通信이 國務院에 到着되엿슴으로 臨時政府公報號外로 如左히 發表되다, 이로써 보건대 敵의 報道가 如何히 信用치 못할 것임을 알리라

六月七日 上午 七時에 北墾島의 駐屯한 我軍 七百이 北路司令部 所在地인 汪淸縣鳳梧洞을 向하야 行軍할새 不意에 同地點을 向하는 敵軍 三百을 發見한지라 同軍을 指揮하는 洪範圖 崔明錄 兩將軍은 直時 敵을 攻擊하야 急射擊으로 敵의게 一百二十餘의 死傷者를 出케 하고 敵의 潰走함을 乘하야 直時 追擊戰에 移하야 目下 戰鬪中에 在하다 此 急報를 接한 東路司令官 ○○은 直時 戰鬪點으로 急行하엿다고
6월 20일자 『공보호외(公報號外)』의 보도내용이라 했다. 이 기사에는 일본군 사자(死者) 아닌 사상자(死傷者)가 120여명이라 했는데, 6월 24일자 독립신문 제86호에는 사상자(死傷者) 아닌 사자(死者)가 120명이라며 바로 잡고 있다.[25] 그러나 같은 날 이어지는 후속 기사에는 일본군 사상병졸(死傷兵卒)이 12명(?)이라고 하여 대폭 줄어 있다.
我軍江陽洞進擊 독립신문 제85호 1920-06-22 2면
我軍江陽洞進擊
六月四六七日에 敵과 交戰하야
我軍 死者 二十五, 損害不少
敵의 死傷兵卒 十二(?)

此는 敵軍司令部가 公表한 바에 依한 것이니 足히써 國境方面의 我軍의 活動의 一般을 察知하는 것이다 交通의 不便으로 我의 報道가 困難함은 遺憾이다

............
交戰 約 四時 後에 我를 擊退하엿다 하며 我의 兵力은 未詳하나 約 二百名이라 云 彼我損害의 槪數는 敵隊死傷兵卒이 十二, 我의 損害는 未詳하나 委棄한 屍體가 二十四, 其他 相當한 死傷이 잇는 것 갓다 (이 數字는 모도 敵의 主張하는 바라) 또 敵의 所謂 鹵獲品의 銃彈多數 被服書類若干, 敵의 追擊隊는 午後 八時 柔遠鎭 對岸에 到着하야 左岸에서 露營하고 八日 同地에서 休養하다
獨立軍連戰連勝
敵의 死者 六十 傷者 五十
我軍傷者 二名

六月七日 鳳梧洞에서 敵軍을 大破함은 旣報와 如하거니와 本社는 汪淸戰에 關한 如左한 至急通信을 今日 接受하다 其詳細는 次號紙上에 揭載하리라

北間島 汪淸城峴 烽火里에 駐屯中이던 我獨立軍 百餘名은 六月六日 上午에 國境을 너머 潛入한 敵軍 五百과 衝突하야 이를 大破하고 敵에게 死者 六十餘 傷者 五十餘의 損害를 주어 敗走케 하다 我軍의 負傷者 二名이오 村民의 流彈에 中하야 死한 者 九名이라 我軍의 大部分은 마참 他方面에 出動中임으로 敵을 追擊全滅함에까지는 니르지 못하다
  • 독립군 승첩 신한민보 1920년 07월 29일 2면 2단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독립군 승첩 신한민보 1920년 07월 29일 2면 2단 : 공훈전자사료관
『신한민보(新韓民報)』는 미국의 교민들이 간행하던 신문인데, 6월 22일자 『독립신문(獨立新聞)』 제85호에 실린 『공보호외(公報號外)』와 후속 기사 내용들을 거의 그대로 싣고 있다.
11월 12일에 임시정부 군무부가 발표한 내용을 수록.
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 十一月十二日 軍務部發表

鳳梧洞附近의 戰
三. 彼我의 損害數

敵軍의 死者 百五十七名, 重傷者 二百餘名, 輕傷者 百餘名이오 我軍의 死者將校 一人, 兵員 三人, 重傷者 二人이며 敵의 遺棄物은 多有하나 我軍의 輜重預備馱馬가 無하고 且戰鬪를 目的한 計劃戰이 아니오 不虞戰이 됨으로 此를 獲取키 爲하야 力을 費할 餘地가 無함으로 步兵銃若干梃만 收取하다.
三. 我獨立軍의 戰鬪
元年年末부터 北墾島에 駐屯한 我獨立軍이 敵兵으로 더부러 屢次 交戰이 間有하던바 六月七日에는 洪範圖 崔明錄 兩將軍이 七百의 義軍을 率하야 三屯子에셔 倭兵 一百五十七名을 擊殺하고 二百餘名을 重傷한 後 小춍 一百六十餘挺, 機關총 三門, 手춍 여러슬 獲得하다
秋七月에 聯隊長 洪範圖, 金佐鎭, 崔振東이 部下兵을 率하고 鳳梧洞에셔 倭兵 百五十七名을 殲滅하다
冬十月에 琿春事件으로 敵이 多衆의 軍隊를 北墾島에 出하야 靑山里附近으로 來하는지라 洪範圖, 金佐鎭, 崔振東 三將軍이 邀戰하야 倭兵 六百餘名을 射殺하다
최명록(崔明錄)과 최진동(崔振東)은 동일인이나 서로 다른 사람으로 안 듯하다.
번역문 : pp.73~74, 원문 영인 : p.95
朝鮮民族運動年鑑 : 大正8年-昭和7年 在上海日本總領事館 경찰부 제2과, 1932 : 국립중앙도서관
독립운동사자료집 7 : 임시정부사자료집 > 조선민족운동연감 > 대한민국 2년(대정 9년) (조선 기원 4253년 서력 1920년) : 공훈전자사료관
1920년 6월 4일 봉오동 전투
최진동(崔振東)을 사령관으로 삼고 안무(安武)를 부관으로 삼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복강삼태랑(福江三太郞 : 헌병 군조[軍曹])·신미이랑(新美二郞 : 남양[南陽] 수비 대장)·안천소좌(安川少佐 : 제19사단) 등의 부대와 봉오동(鳳梧洞) 부근에서 전투를 하여 일본군의 전사자 1백 20명을 냄. 동 독립군의 간부 성명은 다음과 같음.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
제2중대장 강상모(姜尙模)
제3중대장 강시범(姜時範)
제4중대장 조권식(曹權植)
연대장 홍범도(洪範圖)
이원(李園) 부대 제1중대 제1분대장 이화일(李花日)
朝鮮民族運動年鑑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거사 직후 상해 일본 영사관이 일본측이 압수한 임시정부 문서들을 토대로 1919년~1932년간 독립운동을 연월일 순으로 요약, 정리한 책이다. 1932년 당시 임시정부가 보관하고 있던 기록에 나오는 그대로를 요약한 것이다.

중국측 기록

  • 중국 연길보위단(延吉保衛團) 제1대 대장(第1隊 隊長) 서육린(徐毓麟)이 1920년 6월 14일 상부에 보고한 보고서 "汪淸縣呈報韓亂事件"[28][20][21]
독립군 1명 전사 1명 부상, 일본군 병사 49명과 장교 3명 사망. 시체는 그날로 모두 모아 수레에 실어 가져갔다. 독립군은 보총 14자루 노획.
孟富德(保衛團長) / 알아하(嘎鴉河) 알아하(嘎呀河)
汪清縣呈報韓亂 : 呈報 - 向上級報告, 상신(上申), 보고서. 신고서.
延吉道尹公署外交科, 「汪淸縣呈報韓亂等第2號」 第40號卷, 延邊檔案館 소장; 김춘선,. 2016[29]: 479쪽에서 재인용.
“1920년 6월 13일 延吉保衛 제1대 대장 徐毓麟이 延吉道尹 陶彬에게 올린 보고”(延吉欓案館 소장 문서, 독립기념관 소장 사본)
大正九年六月十四日在間島日本總領事代理領事堺․延吉道尹張世銓殿 외
不逞鮮人取締問題ト關海淸ノ延吉道尹轉任ニ關スル件 1920.06.12
不逞鮮人取締ト延吉道尹更任ニ關スル件 1920.06.18
新任延吉道尹陶彬ノ京城滯在ニ關スル件 1920.07.03
  • 대련신문(大連新聞) 6월 12일자 「不逞鮮人과 我軍 충돌」, 6월 15일자 기사 「支那에 소굴을 둔 불령선인들 거의 전멸상태에 직면」[30]
해외의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ⅩⅩⅠ): 중국편(9) 대련신문 공훈전자사료관
1920년 6월 12일 및 15일자 『대련신문(大連新聞)』이 보도한 봉오동 전투 기사.[31]

Ⅰ. 1920년
1. 1920년 6월 12일 제2면
불령선인과 아군 충돌(不逞鮮人我兵衝突)
경성(京城) 10일 전보. 6월 4일부터 7일까지 약 200명에 달하는 불령선인들이 국경을 습격하여 아군 파견대와 교전을 벌였다. 그들의 사상자는 24명, 아군의 사상자는 12명에 달했다. 아군은 약간 명의 포로와 무기·탄약 다수를 노획했다(군 사령부의 발표).

2. 1920년 6월 15일 제3면
중국에 소굴을 둔 불령선인들이 거의 전멸 상태에 직면(支那領に巢ふ不逞鮮人全滅近にあり)

9일 군사령부에서 발표한 불령선인들이 습격하여 온 지점은 함경북도 온성군 강양동(咸鏡北道 穩城郡 江陽洞)으로서 두만강 연안에 위치한 부락이다. 불령단(不逞團)은 6월 4일부터 7일까지 강양동 대안(對岸) 중국령(支那領)에서 침습을 시도하였다. 아군 수비대는 헌병 경찰과 협력하여 그들을 대안(對岸)으로 격퇴하고 현재 엄중 경계 중에 있다. 그들의 총 인원이 얼마인지는 명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약 200명 내외로 추산된다. 이번 접전에서 약간 명의 포로와 소총과 탄약을 노획하였다. 그들이 유기한 시체는 24구이다. 아군 사상자는 12명에 달하였다. 그들의 소굴은 대안(對岸) 중국령이다. 그들의 근거지를 소탕하기 위하여 당국에서도 상당히 고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길장 일보』는 1920년 6월 22일 신문에 ‘일한 군대의 대격전’이라는 제목으로 독립군이 봉오동에서 거둔 역사적 승리를 세상에 널리 알리였다. 신문기사에서 “~ 산길을 잘 알고 있는 독립군은 사면에 잠복하였다가 습격하니 왜군은 대패하였는바 당장에서 150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강을 건너 도망쳤다. 이번 전투에서 독립군은 보총 60여 자루, 기관총 3정, 권총 여러 자루 노획하였다”고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6월 4일 전투 : 한국군 피해는 사망 1인, 부상 2인, 포로 1인이나 일본측은 숨기고 발표 않음.
6월 6일 전투 : 한국군 피해는 사망 4인이나 일본군 손실은 여전히 숨김.
6월 7일 전투 : 한국임시정부 발간 6월 20일자 공보 호외(公報號外)에 일본군 사망자 120여명이라 함.
1920-06-23일자 중국 상해의 『시보(時報)』 가 보도한 봉오동 전투 기사.
三O八、韓日兩軍의 三屯子 및 鳳梧洞激戰
【新聞名】 時報
【發行處】 上海.
【年月日】 一九二0年六月二三日

韓日兩軍之大激戰
六月四日。午前五時許。韓國獨立軍約五十人。竄入 鍾城郡江陽洞。先與駐屯該地之日本卜士斥候兵接仗。 至三屯子(在江陽洞對面之地)。整頓陣容。再接再厲。 此時日本派駐韓大將。新美中尉聞訊。自南陽率兵馳至。 於三屯子北方山巓。對峙助擊。韓軍雖薄。然不少悸。 戰益劇。計此次惡戰。兩方俱有死傷。於韓軍方面。死者一人。傷者二人。被擄者一人。又失小統三挺。彈丸 四百四十五發。及其他雜物等。日軍方面之損失。則匿而不露。恐彼邦與世界之人同爲注目也。

鳳梧洞之戰
六月六日韓軍從三屯子再襲日軍斥候兵。此時日軍以自羅南碍援兵。其勢益大。故韓軍退至鳳陽洞。始與日軍激戰。衆寡不敵。不得已。又退至安山方面。所退出之境。如鳳梧洞之各村落。俱被日軍之焚掠搶殺。幾成赤土。

是日正午。韓軍約二百名。已退至鳳梧洞東方之高原。 再與日軍激戰。四時兩軍損失甚鉅。據所報韓軍有死者 念四人。日軍之損失。又匿而不報。迨後日軍在柔遠鎮對岸屯營云云(此報係自日人機關新聞報節譯而出。 故只揭韓軍之不利。而于日軍隊之損失。則俱不言)。又據韓國臨時政府發刊六月二十日公報號外云。六月七日 上午七時許。吉林省汪清縣駐屯韓軍獨立軍七百餘人。 行陣往駛梧洞之際。忽有敵軍三百餘名。亦直向駛梧洞。 韓國獨立軍大將洪範圖崔明祿。在路中突然急呼射擊。 與敵接仗。敵軍死者一百二十餘名。敵軍恐煌莫措。四散崩潰。韓國獨立軍乘勝長驅。追擊敵軍。尚在戰爭中。 最後勝捷。

일본측 기록

일본군의 사상자 수가 나오는 일본측 기록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전사자는 모두 1명으로 기록했고, 부상자는 2명이나 약간 다르게 기록한 것도 보인다. 위의 미디어워치 기사의 표에 포함되지 않은 것도 더 있다.

鳳梧洞戰鬪詳報(봉오동 전투 상보) {생산자 안천(安川), 생산년도 1920)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을 통틀어 가장 상세한 사료가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의 추격대(이른바 ‘안천추격대’)가 작성한 『봉오동부근전투상보(鳳梧洞附近戰鬪詳報)』다. 이 문건은 전투 중이던 6월 4~7일에 걸쳐 각 부문 지휘관들의 보고를 총지휘관이던 야스카와 소좌가 작성해 다시 상부에 보고한 62쪽짜리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 당시 일본군의 피해는 병졸 1명 사망, 2명 부상(병졸 1명, 순사 1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 육군대신에게 보낸 조선군사령관의 전보 : 陸軍大臣(田中義一)宛 朝鮮軍司令官(宇都宮太郞) 電報
大正9年6月9日 電報 朝特35 : C06031201400 六月八日 午後六時十分発 午前一時五十八分着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7) [穩城方面의 戰況 報告의 건] 朝特 35 공훈전자사료관
일본군 병졸 1명 전사, 적 피해는 명확하지 않으나 유기사체 24구.
大正9年6月9日 電報 朝特33 : C06031201500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大正9年6月9日 電報 朝特34 : C06031201300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 越境추격대의 狀況에 관해 다음과 같이 咸鏡北道知事로부터 電報 : 7940(暗) 제155호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09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0일
일본군 피해 병졸 1명 전사, 1명 부상, 독립군 측 유기 사체 24구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 [不逞鮮人團과 교전] 7968(暗) 제156호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0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1일
일본군 피해 전사 병졸 1명, 독립군 측 전사 20여명
  • 川南省一(局子街分館主任)이 堺與三吉(總領事代理)에게 올린 보고문 : 1920년 6월 10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不逞鮮人 추격을 위해 越江 支那령에 진입한 아군대의 行動에 관한 건 / 機密 제131호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4일 / 수신일 1920년 06월 23일
咸鏡北道 穩城군|汪淸縣 空洞山|高麗嶺南溝|草帽項子|嘎呀河 川南省一(局子街分館主任)|張世銓(延吉道尹)|孟(團長)|崔明祿|安川(少佐)|丁(琿春工兵營長)|吳(琿春步兵營長)|熊(琿春縣知事) 日本군대 越境문제에 대한 훈령|崔明祿 가택搜査|朝鮮人2명 총살 4명부상 45명 逮捕|道尹과 교섭 朝鮮人決死隊|부녀의 사상
p.688부터 봉오동 전투 관련 당시 기록이 나옴.
  • 와쿠이 키치노수케(和久井吉之助)가 川南省一(局子街分館主任)에게 올린 복명서(復命書) : 大正九年七月三日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권 中國東北地域篇 Ⅳ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Ⅳ > 越境追擊地方面ノ踏査復命書進達ノ件 (원문 텍스트)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9 越境 追擊隊 방면의 搜査復命書의 건 機密 제185호 (원문 이미지)
발신자 在間島 總領事代理領事 堺與三吉 / 수신자 外務大臣 子爵 內田康哉 / 발신일 1920년 07월 21일 / 수신일 1920년 07월 29일
復命書 : 大正九年七月三日 在間島局子街分館主任警察署 外務省警部 와쿠이 키치노수케(和久井吉之助) / 在局子街 分館主任 川南省一 殿
“봉오동에서 我軍의 死 병졸 壹名 부상 5명 7명 혹은 十數名이라고 한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9 > 往電 제177호에 관해 : 9458(暗) 제190호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7월 05일 / 수신일 1920년 07월 06일
不逞鮮人 수색,日本군 越江 추격 시 양민 사망자 男女小兒 17명,부상자4명,不逞鮮人 侵入으로 가옥 피해
和久井光之助(警部)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9 > [鳳梧洞 交戰 이후의 鳳梧洞지역 동향] 9526(暗) 1920년 07월 06일
양민사상자 조사,총계 24명,鳳梧洞의 사망자 16명,부상자 2명, 警部(和久井光之助)는 각지에서 조선민 집합시키고 日本군대가 不逞鮮人 추격 상 불가피했음을 설명,피해자 유족의 항의,중국군경이 日本경찰 감시
作成者名称 : 朝鮮軍参謀長 林仙之
pp.10~11 : 봉오동 전투 야스카와 소좌(安川 少佐), 약간(若干)의 사상자를 내며 격퇴
p.82 : 청산리전투 安川 少佐

국내 신문의 보도

봉오동 전투에 관한 국내 신문 최초 보도인 6월 10일자 매일신보 기사에는 일본군 사상자가 12명이고, 독립군의 피해는 불명이나 버리고 간 유기시체가 24구라고 하였다.[11]

6월 20일자 동아일보조선일보, 21일자 매일신보 등에 보도된 쌍방 피해는 일본측 기록과 거의 유사하다.

일본측 : 전사 보병 이등졸 호리이 시게쿠니(堀井茂邦) (흉부 관통 총상)

부상 일등졸 카지우라 긴지로(梶浦銀次郞) 외 순사 1명

조선인 측 : 유기시체 34구, 부상자 다수, 포로 8명

조선인의 사체를 쌓아놓고 사진을 찍어 상해 가정부(上海 假政府)로 보내어 선전에 이용함.

후일의 증언

어릴 때 봉오동 전투를 직접 겪었던 사람들의 후일 증언들이 나옴.
나무위키 봉오동 전투에 최상준(1909~ ?) 등의 증언이 인용되어 있다.
<최상준의 후안산 전투 회고> : 1987~1989[32]
  • 유기석(柳基石, 1905-1980) 회고록
유찬희, 유기석, 유기문 선생 : 독립기념관, 2020년 5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30년 방랑기-유기석 회고록 발간 2010.11.15 국가보훈처
『30년 방랑기-유기석회고록』은 선생이 생의 말년을 보낸 중국 소주(蘇州)에서 1960년부터 1968년까지 약 9년 동안 두 권의 노트에 쓴 것.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ⅩⅤ) : 삼십년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 제2편 망명 견문 / 제3절 무장투쟁 공훈전자사료관
발행자 : 국가보훈처, 발행일 : 2010/11/15, 편저자 : 국가보훈처
3. 무장투쟁

(1) 봉오동鳳梧洞 전투
1919년 나의 부친은 국민회에 참가하여 재무장관을 역임하였다. 어느 날 왕청현의 한 산골짜기 국민회 본부에서 봉오동전투 시기 일본군을 섬멸한 과정을 이야기하였는데, 나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서 지금까지 전투 이야기의 줄거리를 기억할 수 있었다.
1920년 6월 모일, 일본군 300여 명은 두만강 남쪽 기슭 온성군穩城郡에서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의 초모정자草帽頂子 방향으로 침범하였다. 당일 새벽녘에 일본군이 도강을 시작한다는 정보가 각 마을 통신원의 마라톤을 통하여 독립군 지휘소에 전달되었다. 당시에 봉오동에 주둔한 조선 독립군은 300여 명이었다. 그들은 엄격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며, 실제 전투 경험은 더더욱 말할 수도 없었다. 그 중 몇 십 명만이 많은 전쟁과 어려움을 겪은 의병대장 홍범도의 부하 노병老兵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이 망하기 전에 국내에서 의병에 참가했었다.
긴급 정보에 따라 지휘소는 바로 전체 마을 농민을 동원하여 잠시 부근의 십여 리 밖에 있는 석현촌石峴村 등지로 거주지를 옮겨 전장을 피하도록 하였다. 마을의 주둔군도 산으로 올라가 산꼭대기에서 세 군데로 나뉘어 적이 마을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봉오동은 왕청현에 속하는 작은 두메마을로 두만강변에서는 60리 정도밖에 안 되었으므로, 적이 온성을 출발하여 도보로 늦어도 오전 10시쯤이면 도착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러나 8시, 9시가 되어도 적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는데, 설마 적군이 도중에 방향을 바꾼 것일까? 아니었다. 적군은 경원慶源의 월성月城 ‘헌병국경감시소’ 앞 나루터에 도착하여 강폭이 200m로 건널 수 없게 되자 민간 선박을 타고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작은 배 한 척으로는 몇 십 명밖에 실을 수 없어 수십 차례 왕복하였으므로 그 결과 몇 시간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전쟁에 임하기 전 독립군은 여유 있게 빈틈없이 경계망을 배치할 수 있었으므로 마을 입구의 고지 위에 50명의 전사를 매복시켰다. 마을 뒤는 두 개의 골짜기 입구가 통해져 있었고, 마을은 산골짜기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약 100여 농가가 있었다. 마을 뒤 두 개의 산꼭대기에는 200명의 전사가 지키고 있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철수하였고, 마을 입구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잠시 움직이지 않고 적군이 마을 깊숙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막 정오가 될 무렵 일본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줄지어 걸어서 마을로 들어왔다. 300여 명의 적군이 전부 들어올 즈음 지휘소가 명령하자 각 산 정상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 전사들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집중 공격하였다. 적에게 발사한 첫 발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던 적군 지도자에게 바로 명중하였고 두 번째 발사는 적군의 기관총수를 명중시켰다. 삽시간에 두메마을의 작은 길 위에 적군의 시체가 나뒹굴었으며 한바탕 ‘빠가야로’ 소리가 넘치고 대성통곡 소리가 울리고 사방에서 총소리가 산골짜기를 메아리쳤다. 적군은 뜨거운 솥 위의 개미처럼 되어 극히 일부의 적군만이 초가집으로 도망쳐 들어가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알을 피했다. 오합지졸이 된 나머지 적군이 뒤로 돌아서 철수를 시작할 즈음에야 비로소 마을 입구 고지 위의 독립군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적군은 목숨을 걸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반격을 하였는데 고지 위의 전사들은 정면에서 총공격으로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적군이 희생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올 때 아주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가득 몰려오더니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우르릉 울리며 세차게 비바람이 몰아쳐 적군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앞을 볼 수 없어 전진할 방법이 없었다. 적군은 하는 수 없이 풀이 죽고 기가 꺾이어 잔류 병사를 수습하여 조선 국경 내에서 퇴각해 돌아갔는데, 적군의 사상자는 120여 명이었다.

이것은 조선 독립군이 연변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펼친 이후 첫 번째 획득한 승리였다. 전후에 왕청현 지방부대 중국 보위여단은 조선 독립군이 일본 침략자를 격퇴하였다는 것을 듣고 크게 흥분하여 모두들 망한 나라인 ‘고려인’도 궐기하여 일본 놈을 섬멸하는데 중국 군대는 왜 일본인을 건드리지 못하는가라고 하였다. 단지 북양北洋 군벌만이 친일하며 일본 놈들에게 아부하여 국권을 버리는 치욕적인 행위를 할 뿐 기층 민중은 일본 침략자를 모두 증오하였고 독립군을 동정하였다. 그들은 보위여단 전사를 대표로 파견하여 담배와 술 등의 위문품을 보내 용감하게 싸운 독립군 전사를 위로하였으며 조중朝中 민중의 마음이 서로 통하고 서로 지지한다는 우의友誼를 표현하였다.
삼십년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 제23편 망국한 / 제2장 (先親 柳纘熙 略傳) :유찬희(1883-1930)

전투 관련 국내 신문 보도와 증국 및 일본측 추가 기록

국내 신문의 전투 경과 보도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추기(追記) 매일신보[每日申報] 1920년 06월 21일 3면 7단
排日軍(배일군)의組織內容(조직내용) 군긔는최신식규률은엄정 동아일보 1920-06-20 3면

중국 측의 전투 관련 추가 기록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안관(延邊朝鮮族自治州 檔案館)에 소장되어 있는 한인관계 자료들을 수집해 온 것이다.

1. 大正九年六月十四日在間島日本總領事代理領事堺․延吉道尹張世銓殿 외 1920.06.14
한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총영사와 연길도윤의 왕복공문 등
2. 日領照爲樺田社韓党鳴枪向日警射發等情照復幷鄕行 외 1920.06
일제의 간도출병과 한인 학살에 관한 건 등
3. 汪淸知事呈報日軍撤退日期由 1920.06.22
일본군의 출병과 한인 탄압 상황 등
1. 韓黨越入鮮境鄕掠各業日領事來照74號 : 1920년 6월 7일
5월 27·30일, 6월 1·2일 연달아 무장한 ‘불령선인’이 중한 국경을 넘어 穩城·慶源 경계의 산중에 출동하여 日本憲兵補에게 총격을 가함은 물론이고, 鐘城의 경찰주재소 부근에까지 출몰하였다. 이들의 근거지가 연길 일대의 山地로 확인되는바, 중국 지방당국의 철저한 취체가 요망된다는 내용을 담은 延吉道尹에게 보낸 駐龍井村日本總領事의 조회.
2. 爲日軍越界並擊斃良民照抄往來照會呈請鑒核 : 1920년 6월 15일
韓黨 추격을 명분으로 越界하여 和龍縣에 이른 일본군이 양민을 擊殺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 측은 연길에 근거지를 둔 한당이 월경하여 사단을 일으킴에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일본군이 국경을 넘은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국관헌의 조사에 의하면 연길지역 한당이 국경을 넘어간 사실이 없으니 일본군의 출병은 위법이라는 주장이었다. 본 문건은 일군에 의한 양민 격살 사건을 둘러싸고 중국관헌과 일본영사관 사이에 오간 照會 및 연길도윤이 길림성장과 도독에게 올린 呈文 등.
3. 徐毓麟調査韓黨與日軍攻占情形密拿鑒核 : 1920년 6월 18일
韓黨 추격을 명목으로 일본군이 汪淸縣 경내에까지 진출하여 총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하자 延吉保衛隊 第1隊隊長 徐毓麟을 현지에 파견하여 한당과 일본군의 상황을 조사토록 하였다는 延吉道尹의 呈文.

일본 측의 전투 관련 추가 기록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08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7일
堺與三吉(總領事代理)으로부터 張世銓(延吉道尹) 앞의 공문, 不逞行動의 개황 : 不逞鮮人 잠입경로,憲兵補에 대한 일제사격,면장 등 민간인 납치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江陽洞 전투 / 지명 :咸鏡北道 穩城 江陽洞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江陽洞 전투의 진행 상황 朝特 제31호] 1920-06-06 : 공훈전자사료관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獨立軍의 穩城 襲擊, 江陽洞 戰鬪 / 지명 :咸鏡北道 穩城, 江陽洞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南陽守備隊 강화 목적으로 일본군 增派 朝特 제32호] 1920-06-06 : 공훈전자사료관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南洋守備隊 강화 목적으로 일본군 增派 / 지명 : 咸鏡北道 羅南, 會寧, 鍾城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間島지방의 독립군과 일본군 동향]
齋藤實(朝鮮總督) /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사건 安川二郞 지휘 일본군의 高力嶺 등지 수색, 중국군의 馬牌 등지로 이동, 大韓軍政府 등 독립군단체의 일본군 공격계획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第十九師團長의 中村討伐隊 北蒼坪 집결 명령] 朝特 제37호 1920-06-10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 第十九師團長의 中村討伐隊 北蒼坪 집결 명령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安川二郞 추격대 등의 동향] 朝特 제38호 1920-06-10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 安川二郞 추격대 등의 동향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 1920년 06월 11일 / 1920년 06월 12일
사건 : 安川 추격대에 대한 사단명령으로 철퇴,道尹에게 양민살해 보고,가옥 내에서 사격,민간 사망자 발생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原敬(내각총리대신) 외 / 사건 : 間島軍政署의 動向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安川二郞의 독립군 동향 보고] 朝特 제44호 1920-06-14 : 공훈전자사료관
密第102号其981 大臣宛朝鮮軍司令官よりの電報 朝特 제44호: C06031174400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原敬(내각총리대신) 외 / 사건 :東崗子지역의 독립군 증가 보고 / 인명 :安川二郞(少佐)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軍務都督府에서 鳳梧洞전투 軍情報新報 號外 발행, 國民會에서 봉오동전투 선전물 제작, 일본군 150명 전사라고 함.
발신 :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 / 수신 :田中義一(陸軍大臣) / 사건 :中村討伐隊와 安川追擊隊의 歸還 / 인명 :中村, 安川二郞(少佐) / 지명 :咸鏡北道 穩城
密第102号其1003 陸軍大臣宛朝鮮軍司令官よりの電報 大正9年6月 23日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수신 :宇都宮太郞(朝鮮駐箚軍司令官)사건 :鳳梧洞 부근 독립단의 정식군대 體式 제정, 鳳梧洞 전투인명 :지명 :豆滿江, 鳳梧洞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6031086700、大正8年乃至同10年共7冊其1 朝鮮騒擾事件関書類(密受号其他) 陸軍省(防衛省防衛研究所)」
不逞鮮人団取締に関する件 大正9年6月16日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外務大臣男爵 内田康哉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09일 / 수신일 1920년 06월 09일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咸鏡北道 穩城군|汪淸縣 空洞山|高麗嶺南溝|草帽項子|嘎呀河 川南省一(局子街分館主任)|張世銓(延吉道尹)|孟(團長)|崔明祿|安川(少佐)|丁(琿春工兵營長)|吳(琿春步兵營長)|熊(琿春縣知事) 日本군대 越境문제에 대한 훈령|崔明祿 가택搜査|朝鮮人2명 총살 4명부상 45명 逮捕|道尹과 교섭 朝鮮人決死隊|부녀의 사상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鳳梧洞 金貞(國民會第二北地方會長)|黃河白(조선전사자)|朱澤烈(조선전사자) 國民會 日本군 추격사건에 대한 선전활동|적의 대대장 중대장 각 1명과 병졸 49명 즉사 조선군의 대첩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內田康哉(外務大臣)
局子街|鳳梧洞 姜九禹(國民會제2中部會長) 局子街分館|大韓國民會 國民會의 통첩문 살포|鳳梧洞 승리 선전|日中合同搜査|支會 內 민가에 통지하여 輕便 군량준비 국민의무금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5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6일
일본군 전사자 150명이라고 선전
鳳梧洞 不逞鮮人團이 越江진격대에 대승리했다고 선전|警團隊와 看護隊 派遣 獨立전쟁제1회전|獨立의군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6월 16일 / 수신일 1920년 06월 17일
鳳梧洞 교전 시 총탄에 맞은 촌민 사체 사진촬영,日本군의 학살로 선전,日本군이 국제공법 무시하고 支那영토 侵入
발신자 木村**(朝鮮總督府 警務局書記) / 발신일 1920년 06월 25일
사건 : 추격대의 총탄에 맞은 양민에게 葬祭料 지급
발신자 堺與三吉(總領事代理) / 수신자 內田康哉(外務大臣) / 발신일 1920년 07월 05일 / 수신일 1920년 07월 06일
不逞鮮人 수색,日本군 越江 추격 시 양민 사망자 男女小兒 17명,부상자4명,不逞鮮人 侵入으로 가옥 피해
和久井光之助(警部)
양민사상자 조사,총계 24명,鳳梧洞의 사망자 16명,부상자 2명, 警部(和久井光之助)는 각지에서 조선민 집합시키고 日本군대가 不逞鮮人 추격 상 불가피했음을 설명,피해자 유족의 항의,중국군경이 日本경찰 감시
상해 임시정부가 봉오동 전투 후 독립군이 회령(會寧 )으로 가는 경편철도(輕便鐵道) 40여리를 점령하여 일본군의 교통이 단절되었다고 허위 주장한다고 보고.
발신자 第十九師団長子爵 高島友武 / 수신자 육군병기본창 / 발신일 1920년 08월 17일

논란

홍범도가 벌였다는 봉오동·청산리전투는 알고보면 대승·대첩이 아니라 잘해야 무승부였다. 사상적 동지였던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해서는 동료 독립군을 몰살하는 편에 섰던 사람이 홍범도다. 레닌으로부터 소비에트 적군 편입을 거부하는 한국 독립군을 청소해줘 고맙다고 격려금과 권총까지 선물받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된 사람이다. 홍범도가 과연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기에 문재인 대통령은 그를 “최고의 예우로 보답”하려는 것이며, 1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려는 것일까?
항일 의병장 유인석, “상놈 주제에 양반에게 대든” 죄목으로 의병 선봉장 김백선의 목을 베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김좌진은 독립 군자금 마련 위해 무장 강도 행각 벌여.
독립 군자금 강제 징수하다 연해주 한인 교포들에게 맞아죽은 독립군 대장 최영호.
자유시에서는 소련 적군과 손잡은 한인 무장부대가 동료 대원 수백 명을 사살·체포.
홍범도, 자유시 참변 당시 가해자 편에 서서 한인 독립군 몰살 후 레닌에게 군복·권총 선물받아

참고 자료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1) 봉오동승첩 우리역사넷
朴昌昱 著 ; 金春善 譯 국회도서관
독립전쟁 日 자료 분석… 이해 높여
“조명받지 못했던 역사, 국군의 역사로 편입 계기”
“일본군 1명 사망” 날조된 역사 ‘봉오동 전투’ [밀리터리 인사이드] 서울신문 2021-06-06
양민의 피로 쓴 日 전투보고서…진실은 / 일본이 만든 ‘봉오동부근전투상보’/ 독립군에 포위됐지만 ‘전사자 1명’/ 양민 학살해 ‘독립군 사살’로 둔갑 / 일제 역사왜곡에 휘둘리지 말아야

최운산 관련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봉오동 대첩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연합뉴스 2019-12-30
  2. 봉오동 전투의 주역…최진동 장군 사진 '최초 공개' SBS 뉴스 2019.12.30
  3. '봉오동 대첩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SBS 뉴스 2019.12.30
  4.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
  5. 第19師団 (日本軍) 일본어 wikipedia
  6. ‘봉오동 전투’가 승전? 일본군 공식 사망자는 단 1명에 불과 미디어워치 2019.08.16
  7. 7.0 7.1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都督府와 國民會의 鳳梧洞戰鬪 선전물 발행] 朝特 제45호 1920-06-15 : 공훈전자사료관
  8. 8.0 8.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 [不逞鮮人團의 승리선전] 8203(暗) 제166호
  9. 9.0 9.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國民會가 살포한 指明書에 관한 건 / 機密 제149호 1920-06-23
  10. 10.0 10.1 密第102号其1066 1.仮政府の虚報発表に関する件 2.上海在留朝鮮人に対する注意書の件 : C06031177400 大正9年8月6日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1. 11.0 11.1 국경 대안에 무장단이 襲來 매일신보[每日申報] 1920년 06월 10일 3면 1단
  12. 間島出兵史送付の件 : 第二章 作戰行動, 第五節 第十九師團의 剿討行動 大正15 (1926)年 05月 03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C03022770200」 p.82 : 청산리전투 安川 少佐
  13. 신편 한국사 근대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2) 청산리대첩 (4) 청산리대첩 가. 백운평전투 우리역사넷
  14.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 國民會를 論年함(朴昌昱) 國史館論叢 第15輯 (국사편찬위원회, 1990-09-29)
  17.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 ): 중국편(5) 북간도지역 독립군단명부 : 대한국민회 조직계통(2) 공훈전자사료관
  18.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 중국편(5) 북간도지역 독립군단명부 : 대한국민회 총부(소재지 및 임원명부) 1921-03-31 공훈전자사료관
  19. 19.0 19.1 19.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第1輯 - 14輯, (서울 :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84)
  20. 20.0 20.1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 庚申年反討伐戰을 재론함 / 朴昌昱 한국사연구. 111 (2000. 12), (韓國史硏究會, 2000.12.30) pp.115~117
  21. 21.0 21.1 박창욱(朴昌昱) 著 ; 김춘선(金春善) 譯, 東北 지역 한민족독립운동사 관련 사료 정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2. 8) pp.293~294
  22.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間島 不逞鮮人團에 관한 參考書類 [高警 제34318호] : 國民會 南地方會 通告文 (朝鮮總督府 警務局, 1920-10-28) pp.35~37 : 공훈전자사료관
  2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9 > 國民會가 살포한 통첩문에 관한 건 : 機密 제152호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8 國民會가 살포한 指明書에 관한 건 / 機密 제149호 1920-06-23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5. 死者 百二十(正誤) 독립신문 제86호 1920-06-24 3면 : "本紙前號所載 「獨立軍勝捷」 題下에 「敵에게 一百二十餘의 死者를 出케 하고」 할 것을 錯誤로 因하야 一部分 紙上에는 「死傷者」라 誤植되엿싸옵기 訂正함."
  26. 獨立軍勝捷 독립신문 제85호 1920-06-22
  27. 北墾島에 在한 我獨立軍의 戰鬪情報 독립신문 제88호 1920-12-25
  28. 연길도윤 공서(延吉道尹 公署 ) 외교과, <汪淸縣呈報韓亂 等 제20호>, 民國 9년 ~ 10년 제40호권, 연변자치주 당안관 장서
  29. 김춘선. 2016.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서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 원.
  30. 장세윤,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립전쟁의 주요 쟁점 검토 재외한인연구 제54호(2021. 06) p.39
  31. 해외의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ⅩⅩⅠ): 중국편(9) 대련신문 공훈전자사료관
  32. 봉오동 전투는 과장 되었나? Charles Kim 네이버 블로그
최근 바뀜
자유게시판
+
-
기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