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혁 玄俊赫 | |
기본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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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성 |
출생일 |
1904.03.13[1] |
사망일 |
1945.09.03 (암살[2]) |
직업 |
대구사범학교 교유(敎諭)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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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일본 경성제국대학 졸업 |
현준혁(玄俊赫, 1904.03.13[1][3] ~ 1945.09.03[4][5])은 일제 시기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다.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로 대구사범학교 교유(敎諭)로 재직시 검거되기도 했다. 그는 대구사범에서 학생들에게 공산주의보다는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말을 많이 해 주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 정치활동을 개시하여 공산주의 조직을 꾸리기도 했고,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의 압력으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우 동수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될 때 조만식 위원장 아래 부위원장을 맡았으나 곧바로 암살당했다.[6]
박정희 전대통령이 1932년 4월 대구사범에 입학하기 한달여 전에 모종의 사건으로 학교를 떠났으므로 직접 사제 관계는 아니다.
이름 혁의 한자는 赫과 爀이 혼용되고 있다. 공문서 등에 赫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쪽이 맞을 듯하다.
그의 생년월일은 흔히 평양의 ‘혁명열사능’에 있는 현준혁 묘비를 따라 1906년 5월 13일로 적고 있으나 오류로 보인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4년 3월 13일로 나온다.[1] 1935년 작성된 아래 문건에는 그의 나이가 32세로 나오므로 1906년이 아닌 1904년생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1945년 10월 3일자 기사 「현준혁(玄俊赫) 동무를 조(弔)함」에도 피살 당시 그의 나이가 42세로 나오므로 1904년생이 맞을 것이다.
현준혁은 대구사범 교유(敎諭)로 있다 1932년 2월말 검거되어 학교를 떠나므로 1932년 4월 대구사범에 입학한 박정희 전대통령과는 직접적 사제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인기있는 선생이었으므로 학생들을 통해 간접적 영향은 주었을 수 있다.[8]
1929년 5월 대구사범학교 교사가 되어 심리학·영어·한문·교육사를 가르치다 1930년 가을부터 교내 비밀결사인 사회과학연구그룹을 지도했고, 1931년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야학을 설치했다. 1932년 2월 사회과학연구그룹 사건으로 휴직했고,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1933년 개천 및 영변 일대의 적색농민조합 준비활동을 지도했다. 1934년 9월 부산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고, 1935년 경 평남 개천협동조합을 좌익소비조합으로 전환시켰다. 이 무렵 재차 체포되어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 사건으로 교사직에서 파면되자 귀향하였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기독교 세력이 강한 곳이라 해방 당시 공산주의 세력이 상당히 약했다.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서울에서 현준혁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8월 26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민족주의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에게 공산주의자들도 동수로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여 건준을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각 16명씩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하고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오윤선(吳胤善, 1871~1950)과 현준혁 두 사람이 맡게 된다.
온건한 공산주의자였던 현준혁은 조만식에 협력하였다고 한다.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 현준혁은 위원장 조만식과 함께 소련군 사령부를 방문했다가 같은 차에 동승해서 나오는 길에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그가 암살당한 정확한 일자나 배후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현준혁은 45년 9월4일 소련군 환영회에 출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인민정치위원회 근처에서 저격당했는데 범인은 자동차가 서행하는 틈을 타서 뛰어올라 현을 확인한 다음 권총 한발로 즉사시켰다.』
위와같은 기록들로 볼 때 현준혁의 피살 시기는 9월말이 아니라 9월초인 것은 대체로 분명한 것같으나, 북한이 주장하는 9월 3일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모리타 요시오의 기록까지 종합하면 현준혁의 피살일자는 9월 3일 또는 4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위 나일부(羅一夫)의 글에 의하면 현준혁은 8월 15일 해방 당일 나일부의 집에서 같이 축배를 들었고, 그의 전송을 받으며 8월 17일 서울역에서 평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9월 3일에 피살되었다. 이 날짜는 북한의 묘비에 적힌 것과 같다.
남한에서는 암살 배후가 김일성이라는 주장이 있어왔으나[10] 9월초에 암살 당했다면 김일성이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22일 평양에 도착하기 이전의 일이므로[22]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배후가 소련군이라는 설, 다른 국내 공산주의자라는 설, 우익의 백색테러라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당시 소련군은 암살의 배후를 조사하는데 미온적이었고,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온건파로서 북한 주민들의 신망이 높던 조만식에 협력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암살 당한 배경이라는 주장이 있다. 북한 지역의 공산주의자 중에 가장 신망이 높던 그를 다른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암살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장시우(張時雨, 1891~1953)[23]가 배후라는 주장이 많다.[10] 한국에는 종래 소련군측이 김일성과 모의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하고 장시우를 시켜 실행하게 했다는 설이 많았다. 그러나 김일성이 귀국하기 전인 것은 비교적 확실하므로, 그는 빼고, 소련군측과 현준혁을 못마땅해 하던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공모해서 암살했을 가능성은 있는 것 같다.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 후 한민당은 여운형 참변을 정략화하는 것에 대한 비난 성명서를 발표했는데[24], 거기에는 현준혁 암살이 처음에 우익의 소행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지만 나중에 좌익의 소행으로 밝혀졌다고 했다.
[여운형 암살] 범인은 이북에서 왔다는 혐의가 농후하다. 그러면 呂씨 살해범은 과연 누구일까? 이북에서 왔으면 좌익의 범행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평양에서 현준혁(玄俊赫)씨 살해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우익의 소위라고 하여서 좌익측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해 놓고 보니 결국 그 범인은 좌익에 속한 것이 판명되어서 그들의 모략은 민중의 민소(憫笑)를 사고 말았다고 하지 않는가? 금번 呂씨 사건도 그 분류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일까?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과 부친 오윤선(吳胤善)의 일을 돕던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당시 평양의 공산주의자들의 사정에 대해 "국수집 2층에서 조직된 공산당을 돕기위해 서울에서 현준혁을 파견했는데, 국수집파는 서울서 온 현준혁이 헤게모니를 잡을까봐 경계했다. 이들은 사무소를 대화숙(大和塾)으로 옮겼으나 아무런 계획도 실천도 없었고 시민들도 냉담했다. 8월 26일 소련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는 그들에게는 머리도, 돈도, 힘도 없었다."고 하였다.[25] 즉 평양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서 온 인텔리 현준혁이 헤게모니를 잡는 것을 경계했다고 하므로, 이들이 암살의 배후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오영진은 당시 조만식과 부친 오윤선의 일을 돕고 있었으므로 당시 상황에 대해 잘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北韓) : 하나의 증언(證言)》에서 현준혁의 암살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26]
[조만식] 선생(先生)의 곤경(困境)을 가장 잘 이해(理解)한 사람으로서 기본동지(基本同志) 이외(以外)의 사람으로 부위원장(副委員長)인 현준혁(玄俊爀)을 꼽아도 무방(無放)할듯싶다. 비록 노선(路線)은 달랐으나 현(玄)은 선생(先生)의 고결(高潔)한 인격(人格)과 치밀(緻密)한 두뇌(頭腦)와 강직(剛直)한 의지(意志)와 열렬(熱烈)한 애족심(愛族心)을 존경(尊敬)했고 선생(先生)은 온건(穩健)한 현(玄)의 성품(性品)과 그의 깊은 교양(敎養)을 아까와 했다. 그는 범백(凡百)의 공산과격파(共産過激派)와는 달리 같이 정사(政事)를 논의(議論)할만 하다. 현(玄)은 평남 개천군(平南 介川郡) 출신(出身)으로 경성제대(京城帝大)를 졸업(卒業)한 후(後) 오래 학생운동(學生運動)을 지도(指導)하던 지식인(知識人)이다. 그러나 현(玄)의 존재(存在)조차 조선생(曺先生)에게는 허락(許諾)되지 않았다.현(玄)이 인민정치위원회(人民政治委員會)에서 점점 신임(信任)을 얻어가는 기미(氣味)를 알자 김용범(金鎔範) 장시우(張時雨)가 영도(領導)하는 공산당 과격파(共産黨 過激派)는 그를 경계(警戒)하고 감시(監視)하기 시작했다. 그를 중심(中心)으로한 새로운 당내 세력(黨內 勢力)의 형성(形成)을 두려워 한것이다. 그의 존재(存在)로 말미암아 장래(將來)할 당(黨)의 중심세력(中心勢力)의 이동(移動)과 분열(分裂)을 미연(未然)에 방지(防止)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면 그 방법(方法)은? 그들은 소련(蘇聯)의 방법(方法)을 본받는 길 밖에 없었다. 그것이 지상(至上)의 그리고 유일(唯一)의 표본(標本)이기 때문에.
9월초(九月初) 평남지구(平南地區)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은 백주 대로상(白晝 大路上)에서 현준혁(玄俊爀)을 암살(暗殺)했다. 조위원장(曺委員長)과 동승(同乘)하고 철도(鐵道)호텔로 치스차꼬프 장군(將軍)을 방문(訪問)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동차(自動車)가 호텔에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인 네거리에 이르자 돌연(突然) 괴한(怪漢)이 차(車)에 뛰어올라 권총(拳銃)을 발사(發射)하였다. 기민(機敏)한 군사령부(軍司令部)의 헌병(憲兵)은 하려고만 했으면, 당장에서라도 범인(犯人)을 체포(逮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눈을 딱 감고 모른 척 했다. 조선생(曺先生)은 『범인(犯人)이 누군지 뻔히 알면서두…』하고 탄식(嘆息)했다. 며칠 후(後) 고 현준혁(故 玄俊爀)을 위하여 성대(盛大)한 장례식(葬禮式)을 거행(擧行)하고 그 시체(屍體)를 장중(鄭重)히 구 평양신사(舊 平壞神社) 자리 해방기지(解放墓地)에 묻었다. 최초(最初)의 피의 숙청(肅淸)이다.
현준혁(玄後爀)의 후임(後任)으로 취임(就任)한 공산당 출신(共産黨 出身) 김유창(金裕昌)은 해방전(解放前)까지 오래동안 평양 남문통(南門通)에서 조선사진관(朝鮮寫眞館)을 경영(經營)하고 있던 사진사(寫眞師)이다. 그는 온건(穩健)한 신사(紳士)이었으나 동시(同時) 사진기술(寫眞技術) 이외(以外)에는 별(別)로 출중(出衆)한 기능(技能)이 없는 무능(無能)한 인물(人物)이다. 공산당(共産黨)은 가장 적임자(適任者)를 선택(選擇)하여 부위원장(副委員長)으로 파견(派遺)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自己)의 의견(意見)을 제출(提出)할 줄 모르는 대신에 당(黨)의 명령(命令)을 충직(忠直)히 이행(履行)하는 『대변인(代辯人)』만이 필요(必要)한 것이다. 김유창(金裕昌)은 이런 의미(意味)에서 최적임자(最適任者)이다.
현(玄)을 암살(暗殺)하고 총무부장(總務部長) 이주연(李周淵)을 매수(買收)하고 동(東) 서(西)평양서장(署長)을 반동음모죄(反動陰謀罪)로 불법체포(不法逮捕) 구금(拘禁)한 후(後) 공산당원(共産黨員)으로 대치(代置)하여 그들은 차차로 본성(本性)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제1단계(第一段階)의 중점적(重點的)인 포석(布石)이 끝나자 이제 공공연하게 위원장(委員長)과 대립(對立)하기 시작했다.
한재덕은 현준혁과 상당히 친했는데 그의 피살 시기를 "9월의 태양 아직도 대지를 불태우는 듯한 어떤 날 대낮"이라 했다.
또 배후로 소련군정과 김일성이 모의하여 장시우(張時雨, 1891~1953)가 거사를 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아직 귀국하기 전의 일이 확실하므로 김일성과는 무관한 일로 보아야 한다. 소련군정 당국자와 장시우의 관련설은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연재물 (4)회에서 한재덕은 자신이 현준혁과 가까왔는데, 그의 당책 자리를 탐내는 자들의 흉탄에 암살당했다고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의 두 저서[12][13] 모두에 소련군과 김일성 등이 현준혁의 급진 공산화를 배격하고 조만식 진영의 민족주의자들과 협력하는 노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암살을 모의하고 장시우가 부하를 시켜 실행하도록 했다고 나온다. 당시 소련군은 범인을 체포해 수사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언론도 보도를 못하게 하다 며칠 후 조그만 기사로 보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은 아직 귀국도 하기 전의 일이므로 그는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
장시우(張時雨)가 현준혁(玄俊爀)을 암살한 음모는 뒷날 한인계의 소련파인 유재일(兪在日)의 「취중실언(醉中失言)」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하여 로마넨코 정치사령부의 요원으로 활약하던 유재일(兪在日)도 숙청되어 「시베리아」로 귀양갔다. 현준혁(玄俊爀)이 암살되자 소련점령군은 일단 「사회장」으로 예우하고 평양 모란봉에 장례지냈다. 그러나 신문에 크게 나지 못하도록 통제했으며 특히 지방신문에는 2단정도로 머물게 했다. 이것으로 현준혁(玄俊爀) 암살사건 를 마무리짓고자 했다. 그러나 평양시민를 사이에는 현준혁(玄俊爀)이 무자비한 소련 점령군에 의해 암살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따라서 그에 대한 「동정심」이 확산되었다. 영결식장에서의 조만식(曺晩植) 선생의 간절한 조사가 동정심을 자극하는데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현(玄)의 피살은 소련 점령군에 대한 북한주민의 반감을 더욱 높였으며, 장시우(張時雨)가 그 배후 주동자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장(張)에 대한 증오가 커져, 소련 점령군은 그에게 「논공행상」을 할 수가 없었다.그리하여 겨우 평양 소비조합위원장이란 「한직」이 그에게 돌아갔을 뿐인데, 그 역시 뒷날 김일성에게 숙청된다. 이처럼 현준혁(玄俊爀)의 암살이 소련 점령군에 대한 반감을 증대시키자, 소련 점령군은 현준혁이 우익세력에 의해 암살됐다는 거짓말을 조직적으로 유포시키면서 백색 테러를 박멸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우익진 영에 대한 탄압을 더욱 노골화하였다. 이 시점에서부터 우익 민족진영 지도자들의 남하(南下)가 시작됐다.
사건 당시 동평양경찰서장(東平壤署長)을 지낸 유기선씨(79·의사·부산시 중구 보수동 1가 130)[27][28]가 최근 주목할만한 증언을 하고있다.
유씨의 증언.
『민족계열이었던 내가 동평양경찰서장을 맡은지 얼마되지 않은 9월초로 기억합니다. 3일 아니면 4일쯤이었을 겁니다. 점심시간이 지나 평상시처럼 서장실에 앉아 있는데 고등과서원(경찰서 직원)들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습니다. 조만식 선생과 트럭을 타고 가던 현준혁이 평양경찰서 관내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충격이었습니다. 현은 당시 합리적인 공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 민족진영에 인기가 있었고 조만식선생과도 잘지냈습니다.
깜짝 놀란 마음으로 먼저 조만식 선생의 집으로 부하들과 달려갔습니다. 조선생댁에 가보니 선생은 댁에 와계셨는데 놀라서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머리에 발찌가 나서 붕대를 두르고 눈이 휘둥그래진 모습으로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유씨가 전하는 조만식선생의 증언.
『나와 현준혁군(조만식선생은 당시 현을 그렇게 불렀다)을 태운 일제 트럭이 평양시 교외의 커브길을 도는데 갑자기 17∼18세 정도로 보이는 적위대차림을 한 청년이 올라타는 거야. 운전사옆 가운데에 내가 앉고 문옆에는 현군이 앉았어. 커브길이니까 속력이 줄어든 트럭에 골목에 서 있던 이 청년이 달려오더니 올라타. 그러면서 트럭문을 잡고 안을 흘끗보더니 현군의 가슴에 대고 권총을 쏘는거야. 땅 땅하는 소리가 몇 번 들렸던 것 같은데 현군이 내 무릎위로 푹 쓰러져. 그래 내가 「현군,현군」하고 소리를 치며 일으켜 세웠더니 가슴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어. 정신이 아득해지더군. 총을 쏜 청년은 뒤를 흘끗 흘끗 보면서 천천히 골목속으로 사라졌어.』
소련군정의 1945년 9월 22일자 보고서에 현준혁의 피살 사건에 대한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29]
평양시에 소련군이 진주한 초기에 그곳에서 “민족사회당”이 선포되었다. 지역 공산주의자들은 평성 시에서 발생한 공산당 시위원회 비서의 살해가 이 조직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 조직은 해산되었다.
살해된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으나 현준혁으로 보이며, 범인을 민족사회당원으로 의심하고 있은 듯하다.
현준혁이 암살당한 후인 1946년 3월 1일 그가 재직했던 대구사범학교(邱師) 강당에서 그를 포함한 반일희생자 추도회가 열렸다.
일제시대 그를 검거 투옥했던 고등계 형사 송세태(宋世泰)가 1949년 3월 14일 반민특위 경북지부에 의해 구속 수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