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공화국
朝鮮人民共和國
미승인국
1945년 9월 6일 ~ 1946년 2월 19일

일제강점기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정부 형태
주석제
부주석
기본 정보
면적
220,951 km2
수도
공용어
통화
원(圓)
조선인민공화국 성립

미국 서울 점령과 군정
모스크바 삼상회의
태극기 게양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 설립

1945년 9월 6일

1945년 9월 8일
1945년 12월 16일
1946년 1월 14일
1946년 1월 16일
1946년 2월 19일

이전 이후 국가
존속기간
1945년 9월 6일 ~ 1946년 2월 19일
이전 국가
이후 국가
현재의 국가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약칭 인공(人共))은 해방 직후 여운형 등 좌파들이 주도하여 만든 국가를 자칭하는 조직이며, 각료명단까지 발표하기도 했으나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실질적으로는 아무 기능도 하지 못했다. 이승만을 국가 주석으로 선임하고, 그가 귀국하자 취임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해방 직후 국내의 우파들은 임시정부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입장이었으나 좌파들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별도의 국가를 만들려고 시도한 것이 조선인민공화국이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나 조선인민공화국 어느 쪽도 인정하지 않았다.

북한이 자칭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전혀 다른 조직이다.

1945년 9월 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선언문 전단지.[1] 선언문과 인민위원, 후보인민위원 및 고문의 명단이 나와 있다.

개요


조선인민공화국 각료 선정은 여운형허헌(許憲, 1885~1951)[2][3] 등이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의견차이가 상당히 커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실제로는 여운형이 가평으로 내려간 사이에 박헌영이 주도하여 각료명단을 작성하고 허헌의 재가를 얻어 기습적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해외에 있던 인사들은 귀국도 하기 전이므로 본인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임의로 작성한 명단이다.

여운형과 박헌영은 좌파 세력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였다. 국민적인 지지도는 여운형이 박헌영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으나, 여운형이 뭔가 일을 시작해 놓으면 박헌영 세력이 들어와 주도권을 차지하는 일이 잦아 두 사람 사이는 극도로 나빠지게 된다. 김일성여운형박헌영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가까워져 둘 사이에 밀서도 자주 오가고 비밀 회담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 암살의 배후가 박헌영이라는 주장도 있고, 김일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나중에 박헌영이 북한에서 숙청 당할 때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이승만을 선정한 것도 중요한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해방 직후 여운형이 주도해 만든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약칭 건준)에서는 1945년 9月 6日 오후 9시 경기고녀 강당(京畿高女講堂)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全國人民代表者大會)를 열고 ‘인공’ 임시조직법안을 상정 통과시키고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명단을 발표했다. 해외에 있던 인사들은 귀국하기 전이라 대부분 본인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임의로 이름을 집어넣은 명단이다.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명단 (1945.09.06 발표)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이승만(李承晩) 여운형(呂運亨) 허헌(許憲) 김규식(金奎植) 이관술(李觀述) 김구(金九) 김성수(金性洙) 김원봉(金元鳳) 이용설(李容卨) 홍남표(洪南杓) 김병로(金炳魯) 신익희(申翼熙) 안재홍(安在鴻) 이주상(李胄相) 조만식(曺晩植) 김기전(金起田) 최익한(崔益翰) 최용달(崔容達) 이강국(李康國) 김용암(金龍岩) 강근(姜近) 하필원(河弼源) 김계림(金桂林) 박낙종(朴洛鍾) 김태준(金台俊) 이만규(李萬珪) 이여성(李如星) 김일성(金一成) 정백(鄭栢) 김형선(金炯善) 이정윤(李廷允) 김정권(金正權) 한명찬(韓明燦) 유축운(柳丑運) 이승엽(李承燁) 강기덕(康基德) 조두원(趙斗元) 이기석(李基錫) 김철수(金綴洙) 김상혁(金相赫) 정태극(鄭泰極) 정종근(鄭鍾根) 조동우(趙東祐) 서중석(徐重錫) 박문규(朴文圭) 박광희(朴光熙) 김세용(金世鎔) 강병도(姜炳度) 이순근(李舜根) 김무정(金武亭) 장기욱(張基郁) 정진태(鄭鎭泰) 이순금(李順今) 이상훈(李相勳) (以上 55名)

후보(候補)
최창익(崔昌益) 황태성(黃泰成) 홍덕유(洪德裕) 이청원(李淸源) 최근우(崔謹愚) 김준연(金俊淵) 한빈(韓彬) 양명(梁明) 최원택(崔元澤) 안기성(安基成) 정재달(鄭在達) 김두성(金斗星) 권오직(權五稷) 김두수(金斗洙) 장순명(張順明) 이광(李珖) 최성환(崔星煥) 이임수(李林洙) 현준혁(玄俊赫) 김덕영(金德泳) (以上 20名)

고문(顧問)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김창숙(金昌淑) 정운영(鄭雲永)[4] 이시영(李始榮) 홍명희(洪命憙) 김항규(金恒奎) 김상은(金相殷) 장도빈(張道斌) 김용기(金容起) 김관식(金觀植) 이영(李英) (以上 12名)

후보 명단에 있는 현준혁(玄俊赫)은 9월 3일(또는 4일) 평양에서 암살당했는데 서울에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것 같다.

조선인민공화국 성립을 보도한 1945-09-07 매일신보 기사.[5]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명단 등이 나와 있다.

전국인민위원 김일성(金一成)은 누구인가?

전국인민위원에는 김일성(金一成)이란 이름이 보이는데, 누구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좌파들은 북한 김일성이라고 주장하나, 당시 하바로프스크의 소련군 88여단에 있던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북한 김일성) 대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국내에 없었으므로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누구인지 불분명한 전설적 이름 김일성 장군으로 보인다.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 나오는 김일성과도 같은 사례로 볼 수 있다. 9월 14일 발표된 인공 각료명단에는 김일성이 들어있지 않는 것도 이름은 유명하지만 누구인지 불확실해서일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 각료명단 발표

1945년 9월 14일 오후 3시에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조각명단이 발표되었다. 주석은 이승만이다. 전국인민위원에 들어있던 김일성(金一成) 이름은 각료명단에는 없다.

좌파들이 이승만 대세론에 편승한 것은 이를 인정해서라기 보다는 그가 자신들의 얼굴마담이 되어 협력해 주기를 기대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은 인공의 주석 취임 요청을 거절하였고, 그가 정치 활동을 개시하면서 좌우 대립은 점점 격화되어 간다.

1945-09-15일자 매일신보 기사의 인공 각료 명단
1945-09-15일자 매일신보 기사의 인공 각료 명단 : 확대
조선인민공화국 조각완료(朝鮮人民共和國 組閣完了)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에서는 지난 6日 전국인민대표회의(全國人民代表會議)에서 선출된 인민대표들이 그동안 연일 정부조각에 주력한 결과 다음과 같은 부서를 결정 14日 정부(政府)로부터 발표하다.

조선인민공화국 정부발표(朝鮮人民共和國 政府發表) (9월 14일 오후 3시)
조선인민공화국 정부 부서(朝鮮人民共和國 政府部署)

주석(主席) 이승만(李承晩)
부주석(副主席) 여운형(呂運亨)
국무총리(國務總理) 허헌(許憲)
내무부장(內部部長) 김구(金九)

(임시대리(臨時代理) 허헌(許憲))

외교부장(外交部長) 김규식(金奎植)

(임시대리(臨時代理) 여운형(呂運亨))

군사부장(軍事部長) 김원봉(金元鳳)

(임시대리(臨時代理) 김세용(金世鎔))

재정부장(財政部長) 조만식(曹晩植)
보안부장(保安部長) 최용달(崔容達)
사법부장(司法部長) 김병로(金炳魯)

(임시대리(臨時代理) 허헌(許憲))

문교부장(文敎部長) 김성수(金性洙)

(임시대리(臨時代理) 이만규(李萬珪))

선전부장(宣傳部長) 이관술(李觀述)
경제부장(經濟部長) 하필원(河弼源)
농림부장(農林部長) 강기덕(康基德)
보건부장(保健部長) 이만규(李萬珪)
체신부장(遞信部長) 신익희(申翼熙)

(임시대리(臨時代理) 이강국(李康國))

교통부장(交通部長) 홍남표(洪南杓)
노동부장(勞動部長) 이주상(李胄相)
서기장(書記長) 신강옥(申康玉)
법제국장(法制局長) 최익한(崔益翰)

기획국장(企劃局長) 정백(鄭栢)
조선인민공화국 조각명단을 보도한 1945-09-24 민중일보 기사[6]

인공의 조각명단이 나오기까지

인공의 조각명단이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곡절을 겪었다. 손세일은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종원경(侍從院卿) 등을 지낸 한말의 문신으로서 한일병합 뒤에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은 윤덕영(尹德榮)의 옥인동(玉仁洞) 별장이 인민공화국의 사무실이 되어 있었다.

중앙인민위원회는 그곳에서 매일 오전과 오후로 회의를 계속했고, 9월 14일 오전에는 인민공화국의 「선언」과 「정강」 이외에 「시정방침」까지 발표했다. 위원들은 허헌에게 조각 발표도 강력히 요구했다. 이날은 앞에서 본 대로 9월 8일의 중앙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인민공화국의 조각을 여운형과 허헌 두사람에게 위임하면서 못 박은 시한의 하루 전날이었다. 조각이 발표되어야 인민공화국의 실체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었다. 가평에서 정양하고 있는 여운형은 조각 발표 전에 자기에게 한번 더 의논하라고 허헌에게 다질러 놓고 있었다. 여운형은 조각 발표를 보류하고자 했는데, 그 이유는 세 가지였다고 한다. 첫째로 정부 조직에는 미군정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둘째로 정부로서 체면을 유지할 만한 청사가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준비되지 않았으며, 셋째로 정부 주석은 대통령과 같은데 일국의 주석의 신분으로 체면을 유지할 만한 준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황급히 인민공화국을 선포해 놓은 상황에서 인민공화국의 조각은 미군정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여운형에게는 공산당의 계획을 제압할 만한 힘이 없었다. 이처럼 엄중한 시간에 여운형이 시골에서 정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유부단한 그의 고뇌를 짐작하게 한다. 정부 각료 인선은 여운형과 허헌에게 위임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박헌영 그룹이 작성하여 허헌의 동의를 받아서 확정한 것이었다. 의장인 이만규는 조각 발표와 같은 중대한 행사는 위원장이 출석한 자리에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가평에 있는 여운형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의견을 들어 오도록 고집하여 대표 두 사람을 가평으로 내려보내고 회답이 올 때까지 정회했다. 오후 4시에 회의를 속개하자 회답을 받아 왔다면서 위원장이 곧 발표할 것을 승낙하고 내일 출석하여 소감을 말하겠다고 하더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가평으로 보낸 사람들이 가평에는 가지 않고 몇 시간 뒤에 나타나서 여운형의 승낙을 받아 왔다고 한 것이었다. 이에 이만규는 회의장에서 퇴장해 버렸다. 이때의 일에 대해 이만규가 “이 부서〔조각〕발표에 대한 상세한 이면은 나로서는 영구히 비밀에 부친다. 중간교섭에 (있었던) 착오를 말하지 않겠다. 어찌되었든지 몽양(夢陽: 呂運亨)은 발표 후에 알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각 발표가 공산당의 위계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광복 75주년] ‘조선인민공화국’ 탄생과 인민위원 명단 뉴시스 2020-02-02

함께 보기

각주

  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명칭 : 조선인민공화국 선언문 (다른 명칭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단) / 소장품번호 : 한박13327
  2. 東亞 100년, 東友 100인 – 허헌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2019.03.15
  3. 허헌(許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정운영 (鄭雲永) 한국현대인물자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매일신보 1945년 9월 3일 제1면 등 26종 p.3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6. 朝鮮人民共和國發表(九月十四日午後三時), 朝鮮人民共和國中央委員如左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년 09월 24일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