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여단에서 넘어옴)
제88독립보병여단(第88獨立步兵旅團,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88th Separate Infantry Brigade)[3], 약칭 88여단(88旅團)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긴 만주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Northeast Anti-Japanese United Army) 잔존 세력이 소련의 극동지방으로 도피하여 오자 이들을 수용하여 1942년 7월에 소련 극동전선군 산하에 만들어진 중국인, 조선인, 소련인, 나나이족 등 다민족의 혼성부대이다.
만주서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던 동북항일연군 잔존세력은 1939년 ~ 1941년 초 기간에 모두 소련으로 도피한다. 김일성은 직속상관인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허락도 받지 않고 갓 결혼한 아내 김정숙과 함께 부하 몇명을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4].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 B 야영)과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 야영) 두 곳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들어간다. 거기서 김정일이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5] 김정일이 태어난 집은 라즈돌노예 마을길 (Lazo St.) 88번지(2층 빨간벽돌집)로 기차역 부근이며, 지금도 남아있어 연해주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로 되어 있다. 라즈돌노예 기차역은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 한인들 17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실어나르던 출발지로, 고려인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
소련으로 넘어 온 항일연군 잔존 세력의 총 지휘관은 2로군 총사령이었던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이었다. 그는 만주에 남아 있는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을 찾아서 데려올 목적으로 김일성이 인솔하는 대원 28명을 만주로 파견한다. 이들은 1941년 4월 10일 출발하여 1941년 11월 12일에 소련으로 돌아왔다.[6][7] 주보중은 이들에게 들려보낸 위증민에게 보내는 편지에 김일성이 상관의 허락도 없이 무단 이탈하여 소련으로 넘어와 군기를 심각하게 위반했으므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하였다.[4][8]
『그 어떤 곤란과 원인이 있든 김일성. 이준산(伊俊山) 두 동지 소속부대원들이 소련 국경을 넘은 것은 오류다. 이 오류가 비록 전반적 혁명입장이 동요되었거나 총적 방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제1로군 총부대를 이탈하고 유격대가 투쟁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한 조건을 포기한 것이다. 또 전반 환경을 이해하지 않고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았으며 곤란을 극복할 방법을 더 많이 생각지 않고 기회주의적 성격인 월경방법을 취한 것이다.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김일성과 그 부하들 및 당간부들이 각성하고 그 오류를 비록 승인하기는 했지만 기율상에서 김일성 동지등에게 적당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적당한 처분을 주기 바란다.』
하지만 위증민은 이들이 만주로 출발도 하기 전인 3월 8일에 사망하였고[9], 파견원들은 이러한 사실도 확인하지 못한 채 위증민의 행방을 찾는데 실패하고 돌아왔다. 김일성은 군기위반에 대한 처벌권이 있는 직속 상관 위증민이 사망한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
김일성은 만주 파견 기간 중 8월 10일 ~ 9월14일 간에 소련으로 돌아와 보고를 하고 다시 만주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래는 당시 김일성이 인솔했던 만주 파견대원 28명의 명단이다.[6]
金日成率領的第一小部隊, 共有 28 名隊員:② 朴德山(金一)、柳三孫、董崇斌、金鐵宇、林春秋、劉玉全、全文涉、徐寶仁、李伍松、李斗益、金益顯、崔仁德、李煥仁、孫宗俊、金明俊、武良本、牟子河、李致浩、金洪洙、張興龍、李正涉、金福祿、金庚勛、陳寶山、朱明增、池甲龍、宋魁信、連合東
②《中共滿洲省委文件》:《1941年 B野營被派遣各分隊之名單》。
1942년 7월 하바로프스크 인근 북야영에 남북야영의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하는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김일성 가족은 남야영을 떠나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로 이주한다.[10]
88여단을 중국인들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東北抗日聯軍教導旅)라 불렀으며, 여단장은 중국인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이었다. 그러나 부대의 운영을 실제로 관할하는 사람은 주보중의 상관인 왕신림(王新林)이란 중국식 암호명으로 불리던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이었고, 정찰부국장은 미하일 안쿠지노프(Mikhail Ankudinov, 1905~1974) 대좌였다. 극동전선군의 사령관은 88여단 창설 당시는 아파나셍코(Iosif Apanasenko) 대장이었으나 1943년에 막심 푸르카예프(Maxim Alekseevich Purkayev, 1894~1953) 대장으로 바뀌었다.
부대는 극동전선군 사령부가 있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의 뱌츠코예(Вятское) 마을에 있었으며, 일본이 항복한 후인 1945년 9월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해체되었다.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하여 남야영에 수용되었던 북한 김일성도 88여단 창설 당시부터 이 부대에 소속되어 100여명 정도를 통솔하는 1대대 영장(대대장)으로 있었으며, 계급은 대위(Капитан, Captain)였다. 모두 4개 대대(敎導營)가 있었는데, 왕효명(王效明, 중국인), 허형식(許亨植, 1909 ~ 1942), 시세영(柴世榮, 중국인)이 역시 대위계급으로 2, 3, 4 대대 영장(營長)을 나누어 맡았다.[11]
항일연군은 반만항일(反滿抗日)을 목표로 한데 비해 소련은 정반대로 만주국(滿洲國, Manchukuo)을 승인한 몇 안 되는 나라들 중 하나이고[12][13], 1941년 4월에는 일본과의 충돌을 방지하려고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을 맺기도 했다[14][15]. 소련은 2차대전 당시 유럽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극동에서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였다. 그래서 연해주에서 항일투쟁 하던 조선인들 때문에 일본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려인 지도자 2천여명을 처형하고 17만명을 중앙아시아로 추방하는 고려인 강제이주까지 단행하였다.
하지만 항일연군을 수용한 이유는 장차 있을 지도 모를 일본과의 전쟁 또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이들은 활용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이런 식으로 필요에 따라 조선인(고려인)들의 항일 활동을 탄압하기도 하고, 적절히 이용하는 방안을 택하기도 했다. 반만항일을 내세웠던 항일연군 잔존세력이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은 소련으로 피난처를 찾은 것은 이들의 애초목적이 반만항일 자체보다 공산혁명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88여단의 인원 수는 계속 변동이 있었다. 창설 당시 인원은[16]
중국인 373명, 조선인 103명, 나나이족 316명, 로시안인 462명, 기타 100명 등 총 1,354명(장교 149명, 하사관 358명, 병사 847명).
88여단 소속 만주 빨치산 출신 조선인들은 60여명이었으며, 이들은 해방 당시 국내에 아무 기반도 없고 지지세력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되어 권력을 자손들에게까지 세습한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만주서 출생했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한 탓에 중국에 거의 동화된 의식 구조를 가졌고, 자신들끼리 대화도 중국말로 할 정도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희박했다.[18] 한자로 된 이름도 러시아어로 적을 때 모두 조선 발음 아닌 중국 발음으로 표기하였으며, 김일성은 한자 金日成의 중국발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었다.[19][20][21][22] 해방 당시 김일성도 중국말에는 능했지만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다는 증언이 많다.[23][24]
이들은 만주에서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공당원으로서 만주 적화를 위해서 투쟁했을 뿐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볼 수 없다. 소련에서는 해방전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한 바 없으며, 소련인들의 목적에 맞는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이다. 국내에 지지세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소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 소련이 이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운 이유이다. 독자적 생존력이 있는 집단은 소련의 말을 잘 듣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중등교육 수준 이상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중학 중퇴자인 대위 김일성 외에 대위 최용건,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 상조 임춘추 등의 6인 뿐이고, 그 외 54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20] 최현(崔賢, 1907 ~ 1982)은 한글도 쓸줄 모르는 무학자였다. 이런 저학력자들이 공산주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당시 만주의 분위기에 휩쓸려 산야를 숨어다니며 게릴라전을 벌인 경력 밖에 없어 성격도 거칠었기 때문에 국가를 통치할만한 자질이 애초에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꼴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인민군 소장으로 있다 숙청되어 10년간 징역형을 살고 중국으로 탈출한 강수봉(필명 呂政)은 이들 집단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25]
만주항일연군에 소속돼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았던 항일 빨치산들은 소련(蘇聯) 땅에 쫓겨갈 때까지 극좌노선의 지배를 받을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어 정치이론을 배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소학교 교본조차 보지 못했다. 소련(蘇聯) 땅에 들어가 있는 5년동안 소련(蘇聯) 공산당 역사와 레닌주의 제문제를 배우기는 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이 보고 접촉한 것은 전쟁에서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사람들 뿐이었다. 그 5년 동안에 항일 빨치산들 속에는 소련(蘇聯) 안전기관의 비밀정보원이 생겨나고 서로 감시하고 의심하는 악랄한 분위기가 팽배했다.정치(政治) 몰라 비극심화
항일빨치산들의 그런 공통적인 특징은 오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적개심만 있을뿐 정치가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실천경험이 없고 극단적 좌경노선을 그대로 갖고있는 이들에게 국가통치의 대권(大權)이 부여됨으로써 북조선의 비극은 심화됐던 것이다.
소련(蘇聯) 안전기관은 KGB (국가보안위원회, Committee for State Security)를 말하며, 당시의 명칭은 그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였다.
소련인들은 88여단의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을 신임하지 않았으므로 그들 사이에 동태를 감시해서 보고하는 밀고자들을 심어 두었다. 밀고자들 중 일부는 비밀 NKVD 요원이 되었는데, 표면적으로 1대대 영장이었던 김일성도 비밀 요원 중 한 명이었다.
1943년 9월 4대대 영장 시세영(柴世榮, 1894~?)[26]과 정치위원 계청(季青, 1911~1988)[27]이 체포되어 강제노동형에 처해졌는데, 공식적으로는 스파이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스파이 행위를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므로 아마도 사석에서 소련이나 소련군 상관들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한 것을 김일성과 같은 비밀 요원들이 밀고하여 처벌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청은 13년 시베리아 강제노동형을 받아 형기를 마친 1956년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하나, 시세영은 15년 형을 받고, 실종되었는데 형기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과 함께 처벌 받은 사람들 중에는 조선인 김윤호(金潤浩)도 있는데, 이후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다.
88여단장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에 이 사안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28]
柴、季問題, 原東北抗日聯軍第五軍軍長柴世榮和政委季青, 在抗戰後期仍率領抗日遊擊小部隊活動於東北抗日戰場上。1943年秋· 他們到達蘇聯境內的 東北抗日聯軍教導旅駐地時, 即被蘇聯紅軍遠東方面軍司令部有關部門扣壓、柴世榮同志至今下落不明 季靑同志與朝鮮金潤浩同志被流放到西伯利亞。強制勞動達13年。季青同志于1956年回國。
한편 김일성은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극동전선군 사령관 푸르카예프 대장에게 보고하는 NKVD (KGB 전신) 비밀 요원이었다. 이로 인해 상관들의 신임을 얻어 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것이 1945년 9월초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발탁한 배경이다.
귀국에 앞서 김일성은 88여단의 다른 간부들 몇명과 같이 1945년 8월 29일에 적기훈장(赤旗勳章, Орден Крaсного Знамени)을 수여받았다. 이들은 전쟁에 참여한 적도 없지만 본국으로 데려가 이용하려면 대단한 전공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훈장이 김일성이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앞에 처음 나서던 날 가슴에 달고 나온 것이다.]
1945-08-29 김일성 및 88여단 간부들에 대한 적기훈장 수여 결정서 : 첫번째가 안지(Ань Цзи) 대위 즉 안길(安吉, 1907~1947)이며, 5번째가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대위, 즉 김일성이다.
[1945년] 8월 28일에는 제2극동방면군사령관 푸르카예프(Maksim A. Purkaev)의 명령으로 88독립보병여단 관계자들에게 적기훈장(赤旗勳章)이 수여되었다. 적기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은 부여단장 이조린 등 중국인 4명, 정치부장 셀레긴과 참모장 치린스키의 소련인 2명, 그리고 한국인은 김일성, 김책, 안길, 강건(姜健: 姜信泰) 4명이었다. 이상하게도 최용건의 이름은 빠져 있다.[29]
88여단에는 만주 빨치산 출신 조선인들 외에도 유성철(兪成哲, 1917~1995), 최원(崔元), 등 소련의 고려인도 여러 명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이들 대다수는 김일성과 같이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평양으로 왔다[30]. 스탈린이 88여단의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결정한 때문에 이들도 각 부처의 핵심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원활한 북한 통치를 위해 소련군은 각 분야에 전문 지식이 있는 소련의 고려인 200여명을 5차에 걸쳐 북한에 데려 온다. 이들을 소련파라고 하는데, 88여단 출신 고려인들도 소련파로 분류된다. 북한의 권력 핵심은 만주 빨치산과 88여단을 모두 거친 빨치산파들이 장악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일성 권력의 기반이 잡히자 88여단 출신자를 포함한 소련파들은 거의 모두 숙청 당하며, 다수는 소련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처형 당하거나 실종되었다.[31][32][33]
김일성 등 88여단의 조선인들은 국내에 전혀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국내 사정에도 어두운데다 아무 정치적 기반도 없고 지지세력도 없었기 때문에 해방 후 소련군이 이들을 북한으로 데려와 최고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동북항일연군의 본거지인 만주로 가서 조선족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김일성은 공산화 된 중국에서 중공당이 그가 원하던 대로 만주의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는 충분히 시켜줄 수 있었을 것이다.[34]
국내에 그 존재조차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김일성 등 88여단의 조선인들은 해방 후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될만한 아무런 정당성도 없었지만 소련군의 앞잡이가 되어 그들의 일방적인 지원을 받아 북한 주민들의 주권을 강탈하고 자신들만의 왕국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세습하고 있다.
아래 미의회도서관 자료는 북한의 소련파 출신들의 수기인데, 이 중 리동화(Yi, Tong-hwa, 전 군의 총국장), 유성철(Yu, Song-ch'ol,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 김창국(Kim, Ch'ang-guk,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 대좌) 등이 88여단 출신자들이다. 이들의 수기에 88여단 당시의 사정에 대해서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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