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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독립보병여단
최근 수정 : 2019년 4월 28일 (일)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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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독립보병여단(第88獨立步兵旅團,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88th Separate Infantry Brigade)[1], 약칭 88여단(88旅團)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긴 만주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Northeast Anti-Japanese United Army) 잔존 세력이 소련의 극동지방으로 도피하여 오자 이들을 수용하여 1942년 7월에 소련 극동전선군 산하에 만들어진 중국인, 조선인, 소련인, 나나이족 등 다민족의 혼성부대이다.

1943년 10월 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88여단 대원 사진. 제1열 좌로부터:바탈린( N. S. Batalin, 巴達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제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제2열:장광적(張光迪, 중국), 풍중운(馮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貴, 중국), 팽시로(彭施魯, 중국)。제3열:양청해(楊淸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俠, 조선), 수장청(隋長靑, 중국)。제4열 :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 조선), 최용진(崔勇進,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
소련군 88여단 시절의 김일성과 동료들. 왼쪽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靑, 중국인), 최현(崔賢), 안길(安吉). 북한은 이 사진을 연속 조작하는데, 처음에는 중국인 계청만 삭제했다가 다음에는 김일성을 가운데로 이동시키고 오른 쪽으로 기울어진 자세도 바로세웠다. 계청은 1943년 9월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노동형을 받게 되므로 그 이전의 사진이다. 김일성은 88여단에서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에게 보고하는 프락치였으므로[2], 계청의 시베리아 유형과, 4대대 영장 시세영(柴世榮)이 스파이 혐의를 받고 실종된 사건도[3] 그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부대의 편성

만주서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던 동북항일연군 잔존세력은 1939년 ~ 1941년 초 기간에 모두 소련으로 도피한다. 김일성은 김정숙과 함께 부하 몇명을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4].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 B캠프)과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캠프) 두 곳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들어간다. 거기서 김정일이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5] 김정일이 태어난 집은 라즈돌노예 마을길 (Lazo St.) 88번지(2층 빨간벽돌집)로 기차역 부근이며, 지금도 남아있어 연해주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로 되어 있다. 라즈돌노예 기차역은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 한인들 17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실어나르던 출발지로, 고려인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 김일성 가족이 88여단이 창설되면서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이다.[6]

88여단을 중국인들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東北抗日聯軍教導旅)라 불렀으며, 여단장은 중국인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이었다. 그러나 부대의 운영을 실제로 관할하는 사람은 주보중의 상관인 왕신림(王新林)이란 중국식 암호명으로 불리던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이었고, 정찰부국장은 미하일 안쿠지노프(Mikhail Ankudinov, 1905~1974) 대좌였다. 극동전선군의 사령관은 88여단 창설 당시는 아파나셍코(Iosif Apanasenko) 대장이었으나 1943년에 막심 푸르카예프(Maxim Alekseevich Purkayev, 1894~1953) 대장으로 바뀌었다.

부대는 극동전선군 사령부가 있는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의 뱌츠코예(Вятское) 마을에 있었으며, 일본이 항복한 후인 1945년 9월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해체되었다.

1940년 10월 23일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한 북한 김일성도 창설 당시부터 이 부대에 소속되어 100여명 정도를 통솔하는 1대대 영장(대대장)으로 있었으며, 계급은 대위(Капитан, Captain)였다. 모두 4개 대대(敎導營)가 있었는데, 왕효명(王效明, 중국인), 허형식(許亨植, 1909 ~ 1942), 시세영(柴世榮, 중국인)이 역시 대위계급으로 2, 3, 4 대대 영장(營長)을 나누어 맡았다.[7]

88여단의 조선인

88여단 소속 만주 빨치산 출신 조선인들은 60여명이었으며, 이들은 해방 당시 국내에 아무 기반도 없고 지지세력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되어 권력을 자손들에게까지 세습한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만주서 출생했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한 탓에 중국에 거의 동화된 의식 구조를 가졌고, 자신들끼리 대화도 중국말로 할 정도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희박했다.[8] 한자로 된 이름도 러시아어로 적을 때 모두 조선 발음 아닌 중국 발음으로 표기하였으며, 김일성은 한자 金日成의 중국발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었다.[9][10][11][12] 해방 당시 김일성도 중국말에는 능했지만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다는 증언이 많다.[13][14]


이들은 만주에서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공당원으로서 만주 적화를 위해서 투쟁했을 뿐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볼 수 없다. 소련에서는 해방전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한 바 없으며, 소련인들의 목적에 맞는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이다. 국내에 지지세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소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 소련이 이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운 이유이다. 독자적 생존력이 있는 집단은 소련의 말을 잘 듣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중등교육 수준 이상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중학 중퇴자인 대위 김일성 외에 대위 최용건,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 상조 임춘추 등의 6인 뿐이고, 그 외 54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10] 최현(崔賢, 1907 ~ 1982)은 한글도 쓸줄 모르는 무학자였다. 이런 저학력자들이 공산주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당시 만주의 분위기에 휩쓸려 산야를 숨어다니며 게릴라전을 벌인 경력 밖에 없어 성격도 거칠었기 때문에 국가를 통치할만한 자질이 애초에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꼴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인민군 소장으로 있다 숙청되어 10년간 징역형을 살고 중국으로 탈출한 강수봉(필명 呂政)은 이들 집단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5]

만주항일연군에 소속돼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았던 항일 빨치산들은 蘇聯(소련) 땅에 쫓겨갈 때까지 극좌노선의 지배를 받을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어 정치이론을 배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소학교 교본조차 보지 못했다. 蘇聯(소련) 땅에 들어가 있는 5년동안 蘇聯(소련) 공산당 역사와 레닌주의 제문제를 배우기는 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이 보고 접촉한 것은 전쟁에서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사람들 뿐이었다. 그 5년 동안에 항일 빨치산들 속에는 소련(蘇聯) 안전기관의 비밀정보원이 생겨나고 서로 감시하고 의심하는 악랄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政治(정치) 몰라 비극심화

항일빨치산들의 그런 공통적인 특징은 오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적개심만 있을뿐 정치가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실천경험이 없고 극단적 좌경노선을 그대로 갖고있는 이들에게 국가통치의 大權(대권)이 부여됨으로써 북조선의 비극은 심화됐던 것이다.

소련(蘇聯) 안전기관은 KGB (국가보안위원회, Committee for State Security)를 말하며, 당시의 명칭은 그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였다.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 배경

한편 김일성은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극동전선군 사령관 푸르카예프 대장에게 보고하는 NKVD (KGB 전신) 비밀 요원이었다. 이로 인해 상관들의 신임을 얻어 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것이 1945년 9월초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발탁한 배경이다.[2]

북한진입

88여단에는 만주 빨치산 출신 조선인들 외에도 유성철(兪成哲, 1917~1995), 최원(崔元), 등 소련의 고려인도 여러 명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이들 대다수는 김일성과 같이 소련 군함을 타고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평양으로 왔다[16]. 스탈린이 88여단의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결정한 때문에 이들도 각 부처의 핵심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원활한 북한 통치를 위해 소련군은 각 분야에 전문 지식이 있는 소련의 고려인 200여명을 5차에 걸쳐 북한에 데려 온다. 이들을 소련파라고 하는데, 88여단 출신 고려인들도 소련파로 분류된다. 북한의 권력 핵심은 만주 빨치산과 88여단을 모두 거친 빨치산파들이 장악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일성 권력의 기반이 잡히자 88여단 출신자를 포함한 소련파들은 거의 모두 숙청 당하며, 다수는 소련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처형 당하거나 실종되었다.[17][18][19]

외부 링크

88여단 출신 고려인들의 수기

아래 미의회도서관 자료는 북한의 소련파 출신들의 수기인데, 이 중 리동화(Yi, Tong-hwa, 전 군의 총국장), 유성철(Yu, Song-ch'ol,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 김창국(Kim, Ch'ang-guk,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 대좌) 등이 88여단 출신자들이다. 이들의 수기에 88여단 당시의 사정에 대해서도 나온다.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서울: 경인문화사, 2006.

함께 보기

각주

  1. 현재 러시아군의 보병여단은 ‘베호트나야 브리가다 (пехотная бригада)’라고 부르나, 1940년대에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스트렐코와야 브리가다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라고 불렀다. 따라서 현대 러시아어로 стрелковая는 저격(狙撃)의 의미가 맞지만, 88여단 정식명칭을 '저격여단(rifle brigade)'이라 번역하면 잘못이고, '보병여단(infantry brigade)'이 맞다.
  2. 2.0 2.1 빨치산 동료들을 감시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로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다. : 우남위키 김일성
  3.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810 하단 주석 : 1943년 가을
  4.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5. 특별기획 김정일 ‘제1편 유라 킴 (Yura Kim)’ : 2011년 12월 22일 밤 10:00 방영
    (황호택 칼럼)유라의 탯줄을 길게 자른 조산원 엘냐 동아닷컴 2015-08-05
    "金正日(김정일) 출생지는 蘇(소)「하마탄」마을" 동아일보 1992.06.13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 부근 위성 사진 : 구글 맵
  6. 소련 극동전선군 제88 독립보병여단 (蘇聯極東戰線軍第八八獨立步兵旅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91年 人民出版社) p.660 : 1942년 7월 19일자에 김일성이 어제 보로실로프에서 하바로프스크로 와서 뱌츠코예 마을 본 숙소에 머문다고 하였다. (七月十九日 金日成同志已于昨日由B城來X城 住B街本寓); B城은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로 지금의 우수리스크이고, X城은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 B街는 뱌츠코예(Вя́тское)를 말한다.
  7.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658 : (1942년 7월 16일) 제1로군 인원을 기간으로 하여 교도 제1영을 편성하고, 영장은 김일성, 정치위원은 안길로 한다. [以第一路軍人員爲基干, 編成敎導第一營 營長金日成 政治委員安吉] / p.661 : (1942년 7월 22일) 김일성, 왕효명, 허형식, 시세영은 대위 계급으로 각 교도영의 영장(營長)을 나누어 맡는다. [金日成, 王效明, 許亨植, 柴世榮 軍稱號大尉 分任各敎導營營長]
  8. 해방후 귀국길에 오른 김일성 일행을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서 만났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의 증언 : 역구내(驛構內)에 소련군장교 三(삼), 四十(사십)명 가량이 몰려있어요. 가까이갔더니 중국(中國)말로 얘기들을 하고있었는데 그 어투로봐서 한국인(韓國人)임이 틀림없었읍니다.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9.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2.
  10. 10.0 10.1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61~63, 제3장 제88정치여단
  11.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179~185
  12. 소(蘇), 6.25 남침(南侵) 비밀 문건(文件) 공개 동아일보 1992.06.17 일자 2면
  13.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14.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15.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12> 1990.07.08 동아일보
  16. [사건으로 보는 북한] 45년 김일성의 입북 NK Chosun 2002-02-15
  17.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고려인 81명의 手記 : 미국 의회 도서관
  18.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서울: 경인문화사, 2006.
  19. 북한서 숙청된 소련파인사 45명/유엔에 「생사확인」 청원 중앙일보 1991년 11월 16일
    인권옹호韓國聯盟(한국연맹) 北(북)숙청 蘇聯派(소련파)인사 45명 유엔등에 生死(생사)확인 청원 1991.11.18 동아일보 2면
    김국후, 평양의 카레이스키 엘리트들 (한울 아카데미, 2013) pp.251-252: <표 8.1> 6.25 전쟁 참전 후 북한에서 소련으로 돌아가지 못한 고려인 장령(장군)들과 군관들: 최원, 인민군 소장, 사상검토후 무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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