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親日派)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일본 제국이 동아시아 각국을 침탈할 무렵에 일본 제국에 가담하여 그들의 침략과 약탈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하여 추종한 무리를 가리킨다.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 중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일제가 침략하거나 전쟁을 일으킨 지역의 국가들에서는 이들을 부정적으로 본다.

지금 기준으로는 거의 허수아비 때리기 와 같이 우파를 공격하는 좌파에 공격수단이다. 종북에 대한 카운터로 원래는 소련지령으로 소련에 마음에 안드는 인사를 친일파로 몰았다. 소련에 협력적인 사람은 일제시대때 고위직이어도 시비를 걸치 않았다.

종북이라고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은 엄연히 존재하는 실존적 위협이라며, 좌익이 말하는 친일세력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정치세력이다. 또 국제사회에서 냉정하게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지금은 도리어 일본이랑 잘 지내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는 애국이다.

명칭

“친일파”란 단어는 나무위키에 따르면 임종국이 1966년 출간한 《친일문학론》에서 처음으로 나온다고 알려져 있는데, 국립 중앙도서관의 신문 아카이브 등[1]에서 보듯이 해방 직후에 널리 쓰이던 말이다. 이미 해방 후 친일(親日)은 “일본과 친하다”라는 뜻으로 정의되었으며 친일파라는 명칭은 당시 기득권을 쥐고 있었던 사회지도층 세력인 부일배 표현 대신에 사용된 것이다. 부일(附日)은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다”라는 뜻으로 단순히 일본과 친하다라는 개념을 넘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의도를 적극적으로 도운다는 의미이다.

친일파는 일본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필요성을 주장한 지일파나 학일파(學日派), 경제·문화면에서 일본으로부터의 극복을 주장한 극일파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단순히 일본 문화 전반이나 일본인을 좋아하거나 이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인 친일과도 구별된다.

기준과 대상

친일 행위 및 친일파의 기준, 범위나 대상 설정 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한 자와 경술국치 당시 관직자 만을 대상으로 하는가, 창씨개명자 및 소극적인 친일행위자, 민족개량주의자 등도 포함하는가의 여부 등 그 쟁점은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체제 하에서 수동적인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은 친일파로 볼 수 없으며, 생존을 위해 소극적으로 협력한 정도는 이른바 반민족행위와는 다르게 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또다른 이들은 이 역시 결국은 똑같은 친일행위라고 반박한다.

1948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서는 다음과 같은 자들에게 죄가 있다 하였다.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했거나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일본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거나 일본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던 자,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하거나 지휘한 자, 습작(襲爵)한 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참의, 칙임관 이상의 관리, 밀정행위자, 독립 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한 자, 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 행위를 한 자,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도·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된 자 중에서 일제에 아부하여 죄적이 현저한 자, 관공리 중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 본부의 수뇌간부 중 악질적인 자, 종교ㆍ사회ㆍ문화ㆍ경제 기타 각 분야에서 악질적 언론 저작과 지도를 한 자, 일제에 대한 악질적인 아부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2]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자발성이라는 기준 하에 친일파를 더욱 광범위하게 잡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또는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 같은 자발적으로 일제에 복무한 장교들은 친일인명사전에 개시하고 있으나, 학병 출신들과 같이 지원을 가장한 징병된 사람들은 친일인명사전에 개시하지 않고 있다. 일제말기에 일제는 초급 장교 수가 부족해지면서, 지원제를 가장해 강제적으로 조선인 대학생들을 징병했기 때문이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창씨개명의 경우 강제로 이루어졌기에 이를 친일로 보고 있지 않다.

친일파 인물로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파악한 7,000여명의 조사대상자, 1966년 이후 임종국이 발굴해낸 친일인사,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독자적으로 정한 일제강점기 친일파 3,090명,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정한 1,005명 등이 거론되는데, 그 기준과 적용 문제로 인해 친일 인사로 지목된 본인 혹은 그 후손으로부터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친일파 논란의 실제

좌파 정권 등장이후 재점화된 친일파 논란은 과거사를 바로잡겠다는 그들만의 논리로 백년이 다 된 과거사를 권력투쟁의 중요한 도구로 이용하여, 정작 중요한 국가와 국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치열한 토론은 실종되게 만들었다. 조선후기에 국제정세의 변화에는 눈감고, 백성들의 삶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예송논쟁 등으로 권력투쟁을 벌이다 나라를 망하게 한 조선조 유신들의 재림을 보는 듯하다. 일제시대를 살지도 않은 사람들이 당시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자신들만의 논리로 재단하겠다는 것은 권력으로 역사를 유리하게 조작하려는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그렇게 반대하던 문재인이 최고 권력자가 되어 자신이 직접 나서 역사를 사실과도 맞지않게 제멋대로 재단하는 것은 나만이 정의라는 오만의 소산이고, 권력자의 횡포이다.

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며 친일잔재 청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친일은 반성해야 하고, 독립운동은 예우받아야 한다는 가장 단순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친일잔재 청산"이라며 "이 단순한 진실이 정의이고,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이 공정한 나라의 시작"이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아직도 사회에서는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는 도구로 빨갱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라며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 친일잔재"라고 강조했다.

이어 "(빨갱이라는 말은) 해방 후에도 친일청산을 가로막는 도구가 됐다"며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경찰 출신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기도 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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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의 부친 문용형씨는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명문이던 함흥농고를 졸업한 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흥남시청 농업계장·과장을 지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월남해 문 대통령을 낳았다. 그가 친일행적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경남 거제에 정착한 뒤 공무원 경력을 인정받아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노무자로 일했다.

반면, 일제 시대 돈 없고 빽 없는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공무원 밖에 없었다면서 무조건 친일파로 봐서는 안 된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홍영표 원내대표는 지난 2015년 자신의 SNS를 통해 "민족 앞에 당당할 수 없는 저는 친일후손"이라는 글을 올려 조부의 친일행각에 대해 공개사과한 바 있다. 홍 원내대표의 조부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홍종철이다.
일제시대에 문재인 부친은 돈없고 빽도 없어 공무원을 했으니 친일파가 아니고, 박정희는 돈도 많고 빽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군 소위를 했으니 거물 친일파라는 논리인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일제시대 흥남시청 농업과장 문재인 부친은 빠지고, 만주군 소위 박정희는 반드시 들어가야 되는 이유를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 전형적인 내로남불의 사례이다.
문재인의 속내는 친일파의 피해를 과장 강조하여 그보다 몇배나 더큰 해방 후 빨갱이들에 의한 피해를 감추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제 35년간의 피해보다 해방 후 70여년간 빨갱이들에 의한 피해가 몇배나 더 크다. 일제의 피해도 절대적으로는 일본인들에 의한 것이고, 소위 조선인 친일파들에 의한 피해는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문재인의 3.1절 발언은 빨갱이들의 폭정을 피해 흥남철수 당시 미군 배를 얻어타고 월남한 자신의 부모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윤봉길 의사의 손녀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은 문재인 정권에서 사퇴를 강요받아 물러났다. 박근혜가 임명했으니 '적폐청산'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 타령하는 친일파 후손들에 의해 진짜 독립운동가 후손이 핍박받는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이다.
국가보훈처는 문창극 전(前) 국무총리 후보자가 "독립유공자 문남규(文南奎, 1890~1920) 선생의 손자"가 맞는 것으로 확인하였다.[3][4]
독립운동하다 순국(殉國)한 분의 손자를 친일파로 몰아 총리 임명을 막은 사람들은 평소에 "친일파 후손은 떵떵거리고 살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은 배곯는다"는 지론을 가진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해방 직후 조만식 선생을 친일파로 몰아 연금했다 총살하고, 수많은 좌파 항일투사들을 숙청 처형한 김일성 치하의 북한보다 지금의 남한이 별로 나을 바가 없다.

참고 자료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숙청 북한에서는 어떻게 진행되었나 《북한(北韓)》 2002년 4월호(통권 제364호) , 24~30쪽, 전체 7쪽 (북한연구소)
대한민국의 건국과 위대한 성취…절대로 수긍 않는 좌파
결국 그들(공산주의자)을 막고 그들 조직을 파괴하고 마침내 그들 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이들 친일세력 친일파들이었다. 우리나라 좌파 좌편향 세력들이 집요하게 친일파를 공격하는 것은 식민시대의 그들 행위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 후 대한민국 건립에서의 그들의 지대한 공헌을 증오하는 것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드디어는 김일성 주도하의 남북통일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북에서의 친일파 기용은 언급을 회피했다. 반대로 이북은 친일파를 완전히 소탕했다고만 지금도 거짓 주장하고 있다. 친일파의 유능함과 유용성은 이북도 이남이나 마찬가지였다. 남한이 친일세력을 「이이제이」 했다면 이북은 친일세력을 「이이호제(以夷護制)」했다. 친일파라는 적을 기용해서 그들 몸을 지키고 그들 체제를 보호한 것이다. 그것도 남쪽보다 더 노골적으로 더 높고 센 자리에 김일성이 친일파를 갖다 앉혔다. 그들은 숨기려 노력했지만 그 친일파들의 면면은 예나 이제나 잘 밝혀져 있다.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