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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단
최근 수정 : 2019년 6월 6일 (목) 10:36
창덕궁과 창경궁을 일종의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국보 제249호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대보단(大報壇).[1]

대보단(大報壇)은 명(明)나라의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지내던 제단으로, 조선조 숙종 30년(1704)에 창덕궁(昌德宮) 안의 금원(禁苑, 비원) 서쪽에 설치하였다. 경기도 가평군 조종암(朝宗巖)에도 같은 이름의 단(壇)이 만들어져 있다.

개요

대보단(大報壇)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해준 명(明)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의 은덕을 기린다는 취지로 1705년 숙종 때 창덕궁 후원에 세운 제단이며, 매년 왕이 직접 제례를 올렸다. 영조는 명 태조 홍무제(洪武帝)와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을 제례 대상에 추가했다. 명을 세운 홍무제는 조선의 창업을 승인하고 국호를 정해준 대조(大造)의 은혜를 베푼 왕으로, 숭정제는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군을 보내준 왕으로 추대됐다. 대보단 제례는 갑오개혁(1894~1895)에 와서야 중단됐다.


조선은 삼전도 항복(1637·청 태종에 패한 후의 굴욕적인 항복) 이후 정신적 혼돈에 빠져 있었다. '오랑캐의 나라'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새 책봉국이 되었지만 조선 지배층의 의식 속엔 여전히 명이 '아버지의 나라'였다. 유교 질서의 종주국이 사라지면서 조선의 지배 질서마저 흔들릴 참이었다. 목소리만 높았던 북벌론도 기세가 꺾이자, 왕실로서는 존명의리의 이데올로기를 복구할 '상징'이 필요했다. 숙종은 대보단 제례를 주창하면서 '명과의 특별한 군부·신자 관계와 임란 때 나라를 살려준 재조(再造)의 은혜'를 강조했다.

조선왕조실록의 대보단 관련 기록

대보단(大報壇)이 준공(竣工)되었는데, 단(壇)은 창덕궁 금원(禁苑)의 서쪽 요금문(曜金門) 밖 옛날 별대영(別隊營)의 터에 있었다. 단의 제도는 좌의정 이여(李畬)의 말에 따라 우리 나라 사직의 제도를 모방하여 유(壝)640) 가 있고 장(墻)이 있는데, 담장 높이는 4척(尺)으로서 사직단에 비하여 1척이 높고 사방 넓이가 25척이며 네 면에 모두 9급의 층계(層階)가 있었다. 유(壝)와 장(墻)의 네 면은 모두 37척이요, 단소(壇所)로부터 외장(外牆)을 쌓아 행인(行人)이 내려다보지 못하게 하였다. 10월 초3일로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공사를 마쳤는데,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공조 판서(工曹判書) 서종태(徐宗泰)·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채(趙泰采) 등이 시종 감독했다. 그 사이 민진후(閔鎭厚)는 수어사(守禦使) 직임의 일로 남한 산성에 나가 있었고 김진규(金鎭圭)가 차관(次官)으로 명을 받들고 공역을 감독한 지 매우 오래 되었다.
제사 지낼 때를 정한 의논은 아래에 덧붙여 보이는데, 여러 대신들이 모두가 1년에 한 번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며, 제사를 행하는 기일에 있어서는 혹은 정월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3월이 마땅하다 하였으며, 혹은 2월이 마땅하다 하고 혹은 4월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마침내 3월로 결정되었다. 단호(壇號)는 처음에 민진후의 말로 태단(泰壇)으로 정하고자 했으나, 또 2품 이상의 관원을 패초(牌招)하여 의논해서 정하게 했는데, 우의정 이유(李濡)의 말로 인해 대제학 송상기(宋相琦)에게 명하여 찬정(撰定)하게 했으니, 곧 지금의 이름이다. 악(樂)은 팔일(八佾)을 쓰고 악장(樂章)은 또한 송상기가 지어 올린 것이다. 이여(李畬)는 문묘(文廟)의 석채(釋菜) 때의 악장을 모방함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여러 대신이 사직제(社稷祭)의 악장에 의거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금원(禁苑)은 비원(祕苑)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이다.
  • 영조 때 대보단에서 명 태조와 의종도 추가로 제향하기로 결정함.
영조 25년(1749년) 3월 2일 경술 1번째기사 : 대신과 예조 당상을 인견하다
영조 25년(1749년) 3월 14일 임술 1번째기사 : 신종·의종 두 황제를 함께 대보단에 제향하는 의식을 정하다
영조 25년(1749년) 3월 23일 신미 1번째기사 : 태조·신종·의종 세 황제를 대보단에 병향하는 의식을 정하다
대보단(大報壇), 만동묘(萬東廟), 숭의묘(崇義廟), 동관묘(東關廟), 남관묘(南關廟), 북관묘(北關廟) 및 지방 관묘(地方關廟)의 제사를 폐지하고, 대보단의 터는 궁내부에서 관할하며 숭의묘와 북관묘는 국유로 이속시킨다. 만동묘, 동관묘, 남관묘 및 지방 관묘는 해당 지방 관청에 넘겨 백성들의 신앙에 따라 따로 관리할 방법을 정한다. 역대의 묘, 전, 능, 사 및 지방에 설치한 사직단과 문묘는 모두 정부의 소관으로 한다. 이 칙령(勅令)은 반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가평 조종암의 대보단과 대통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대보리 조종암(朝宗巖)에도 같은 이름의 단(壇)이 만들어져 있고, 근처 조종암 대통묘(朝宗巖 大統廟)에서 명나라 태조·신종·의종과 9의사 제향을 올리고 있다. 대보리 지명도 대보단에 유래한다.

1908년 서울 비원 안에 있는 대보단(大報壇)과 괴산 화양동의 만동묘(萬東廟)가 철폐당한 뒤에도 가평의 대통묘에서는 비밀리에 제향을 계속하다가 1934년부터 절사(絶祀)되었다. 1958년 가평 지방 유지의 발기로 옛 터에 다시 제단을 보수하고 음력 1월 4일 대통묘에서 명나라 태조·신종·의종과 9의사 제향을 지내고 있다.

경내의 건물은 대통묘·신문(神門)·조종재(朝宗齋) 등이 있다. 대통묘의 중앙에는 명나라 태조·신종·의종을 주벽(主壁)으로 봉안하고, 동편에는 김상헌(金尙憲)·김응하(金應河)·홍익한(洪翼漢)·임경업(林慶業)·이완(李浣)·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이항로·유인석 등 조선문무(朝鮮文武) 9현을, 서편에는 왕미승(王美承)·풍삼사(馮三仕)·황공(黃功)·정선갑(鄭先甲)·양복길(楊福吉)·배삼생(裵三生)·왕문상(王文祥)·왕이문(王以文)·유계산(柳溪山) 등 명나라 9의사를 종향하고 있다. 제향은 매년 음력 3월 19일에 봉행(奉行)하고 있다.[2]

현대에 부활한 사대 망령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국보 제249-1호 동궐도 (東闕圖)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2. 조종암대통묘 숭명배청 중화사상 현스바비큐 아카데미 / 문화유산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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