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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국대신 위안스카이- 좌절한 조선의 근대와 중국의 간섭[1][2]

이양자 (지은이), 한울(한울아카데미),2020-02-05

부산 출신(1941년생)
경남여고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 문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동양사 전공) 문학석사
영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동양사 전공) 문학박사
2019년 현재 동의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중국사학회 회장, 현재 고문
한중인문학회 고문
중국근현대사학회, 동양사학회 평의원
여성문제연구회 부산지회 명예회장
저서: <송경령 연구>(1998), <역사를 움직인 중국 여성들>(2014), <자성의 길목에서>(2017), <20세기 중국을 빛낸 자매, 송경령과 송미령>(2019)

저자인 이양자 명예교수는 책의 맺음말에서 "임오군란~청일전쟁의 시기는 그야말로 날로 격화되는 세계적 제국주의 상황에서 조선에는 짧지만 자주 개혁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는 기간이었는데 이 황금같은 시기가 원세개의 기막힌 간섭과 책동으로 유실되고 말았다"

책소개

19세기 중반에 근대 국민국가와 제국주의가 새로운 세계질서로 부상하자, 청은 전통적인 유교적 천하관에 기초해 의례적으로 따랐던 '사대(事大)', '종번(宗藩)' 관계를 실질적 속국화 정책의 근거로 사용해 조선을 복속시키려 했다. 청은 조선을 속국화하기 위해 실질적 감국대신 위안스카이를 내세워 정치·경제·외교 분야에서 전례 없는 온갖 간섭을 자행했다.

조선위안스카이와 같은 기회주의적 인물에게 10여 년간 내정간섭을 받으며 국가적으로 크나큰 모욕수모를 당해야 했고, 그 결과 대한제국은 우리 국토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비극을 겪은 뒤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말았다.

21세기 들어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패권경쟁이 한층 더 거세지며, 한반도에 대한 두 국가의 영향력 경합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마치 19세기 역사의 재현인 양, 주변 강국에 둘러싸인 한반도는 종속자멸이냐, 번영통일국가로의 도약이냐 하는 중대 기로에 서 있다.

임오군란에서 청일전쟁까지 10여 년 동안 이루어진 청의 군사·정치·경제 침탈과 그 현지 집행자 위안스카이는, 21세기 지정학적 분쟁의 중심에 선 우리에게 이사위감(以史爲鑑)의 사례로 냉철한 통찰을 요구한다.

책속으로

속칭 “원대인(袁大人)”이라 불린 원세개이홍장을 중심으로 한 청 조정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감국대신’처럼 행세하면서 조선과 청국의 종속관계를 유지·강화하는 데 큰 공훈을 세웠다. 원세개는 정치적으로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음은 물론이고, 경제 면에서 청상의 보호와 통상 및 교역의 증대에도 공헌했다. 청 정부는 원세개를 통해 조선 무역에 종사하는 자국 상인을 지원하기 위해 양국의 해관 통합, 조선에 대한 차관 전담, 조선 전선부설권의 선점, 기선 운항 등을 강행했다. 이렇듯 원세개는 조선의 일을 청이 주관하게 만들고, 차관 문제에까지 간여함으로써 조선이 외세와 결탁하는 것을 방지했다. _20쪽

문필에 재능이 없어 과거를 포기하고 일찍이 군문에 들어간 원세개는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직책이 비록 행군사마(行軍司馬)라는 미관이었으나, 이처럼 배후에는 진사 출신으로 한림원 형부시랑에 오른 삼촌 원보항과, 이홍장의 막료로 여순 군항 수축에 종사한 종숙 원보령이 있었다. 원세개는 일족의 후원과 북양해군의 뒷받침으로 오장경과 함께 조선에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조선이라는 무대는 자신의 기량을 시험하고 앞날을 위한 기초를 굳힐 절호의 장소였다. _33쪽

그러나 원세개는 북양대신 이홍장의 조선 정책을 충실히 집행해야 할 대리인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청프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임기응변적이고 독단적인 판단을 과단성 있게 결행해 성공시킴으로써 이홍장의 회군 진영에서 견고한 입지를 확보했다. 갑신정변 때 그의 단독적인 군사행동을 예로 들어보면, 그는 청프전쟁으로 인해 이홍장이 동쪽의 조선 문제에 전념할 겨를이 없으므로 조선에 주둔한 청군이 자유재량으로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것을 재빨리 간파했다. 오조유가 이홍장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원세개는 끝내 일본 병사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_62쪽

날조 전보로 조정 대신들을 위협한 것은 조선을 능멸하고 종주국으로서의 청의 위치를 강하게 부각해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한 것이다. 주한 각국 공사들이 원세개를 일컬어 “오만한 기세로 거들먹거리면서 한정(韓廷)을 위협하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모의한 국왕 폐위 문제를 보더라도 그의 행동이 얼마나 방자하게 조선을 능멸하고 모욕하고 있었는지를 명백히 증명한다. _85쪽

이홍장은 청상의 용산 이전 문제에 대해 “청상들이 이에 따르지 않고, 날마다 의논했으나 화합하지 않으니 홀로 옮기라고 할 수가 없다”고 하며, 도리어 “조선 정부가 청상의 상잔(商棧) 이전료를 빨리 조달하는 것이 급선무다”라는 말로 이전료 조달을 독촉했다. 이렇게 되자 조선 정부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_132쪽

당시 조선 정부 내에서는 이권 회수 운동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1889년 5월 민영익은 외교 고문 데니, 주한 프랑스 공사 콜린 드플랑시(Collin de Plancy, 葛林德)와 함께 비밀스럽게 차관 교섭을 진행한 끝에 프랑스 은행(公達銀行)에서 200만 냥을 차관하기로 약속받았다. 이 200만 냥 가운데 130만 냥으로 각국의 대소 차관을 원리금 합해 청산하고 나머지 70만 냥을 광산 개발과 철도 부설을 위한 자금으로 충당하고자 한 것이었다. 외아문 독판서리 조병직(趙秉稷)을 통해 이를 전해들은 원세개는, 이 차관이 해관 담보임을 알게 되자 즉각 조병직 등에게 압력을 넣어 중지시켰다. _162쪽

언론소개

~발췌~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국은 조선 정세에 개입하기로 하고 수사제독(水師提督) 오장경이 이끄는 3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원세개는 오장경의 막하로 조선땅에 들어왔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에 불과했으나 민비의 정적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해 연금하고 반군을 진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갑신정변 때에는 고종을 보호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조선은 물론 본국 청의 정치 무대에서도 뚜렷이 존재감을 부각했다.
대원군고종, 민비, 일본과 청국의 군대 등 모두가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임오군란 와중에 대원군을 제압하는 것만이 청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사태를 수습하는 길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그를 납치해 청국으로 압송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킨 조선 군사들을 제압한 것도 원세개였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갑신정변에서는 더욱 결정적 역할을 맡는다. 1884년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개화파들이 거사해 중신들을 살해하고 신정부를 수립하자 원세개는 직속 상관인 오장경은 물론 청국의 실력자인 이홍장까지도 건너뛰어 독자적 판단으로 개화파와 이를 지원하는 일본군을 격파하고 '삼일천하'에 종지부를 찍었다.
 원세개는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조선에 주재하는 동안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감시하는 것은 물론 조선 해관(海關·현대의 세관과 유사)을 중국 해관에 통합·종속시켰고 조선의 차관 문제도 낱낱이 간섭해 청국으로부터만 차관을 얻도록 했으며 전신·통신 분야의 시설도 청국이 선점 및 독점토록 하는 것과 함께 청국 선박에 조선의 연해와 주요 강에 대한 독점적 운항권을 부여하는 등 경제적 침탈에도 열을 올렸다.

원세개의 비호를 받은 청국 상인들은 버젓이 밀무역을 일삼았고 이를 단속하는 조선 관청을 습격하는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원세개의 '활약'으로 조선 경제에서 청이 차지하는 비중은 훨씬 더 일찍 조선에 진출한 일본을 능가할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사유가 됐다.


 청은 조선을 속국화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총독’ 구실을 하는 ‘감국대신’(監國大臣) 위안스카이를 내세워 정치·경제·외교 분야에서 전례 없는 온갖 간섭을 자행했다. 조선에 머물며 내정간섭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조선을 정치적·경제적·외교적으로 청나라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조선 정부의 차관 교섭을 방해하고, 외교관 파견을 봉쇄했다. 위안스카이 치하에서 조선은 국가적으로 크나큰 모욕과 수모를 당했다. 출세가 목마른 조선의 사대부들은 사실상 ‘조선 국왕’인 그에게 잘 보이려고 혈안이었다. 주권확립을 위한 마지막 골든타임(golden time)의 기회를 상실한 조선은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시대에 빠졌다.


 "그런데 대다수 한국인들은 조선의 망국을 일본 탓으로만 돌리고 있으며, 청이 서양과 일본에 대항해 중화제국의 부흥을 시도하며 조선을 침략한 역사는 잘 모르고 있다. 임오군란에서 청일전쟁까지 10여 년 동안 이루어진 청나라의 군사·정치·경제면에서의 침탈과 그 현지 집행자였던 위안스카이의 존재를 다시 기억해 내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 시진핑의 망언? 트럼프의 오해?

각주

  1.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1893508 감국대신 위안스카이, 알라딘
  2.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46068162&orderClick=LEa&Kc= 감국대신 위안스카이, 교보
  3. AKR20191023144700005_01_i_P4.jpg 젊은 시절의 원세개
  4. AKR20191023144700005_02_i_P4.jpg 중년의 원세개
  5. 25588_33474_5919.jpg 2017년 12월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을 수행하던 한국 기자단이 중국측 경호원들로부터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중국은 한국의 내정은 물론 외교문제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세상이 되었다
  6. 25588_33475_317.jpg 중국 정부는 6·25전쟁 당시 중공군 수만 명이 수장 당한 파로호 지명이 기분나쁘다고 명칭 변경을 요구했다. 문재인 정부는 파로호를 대붕호로 바꾸려다 시민단체들의 항의와 반대에 부딪쳤다.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지명까지 바꾸라고 지시하는 것을 보면 한국의 내정을 좌우하고 있는 셈이다. 사진은 화천호를 파로호로 명명한 이승만 대통령 휘호)
  7. 25588_33477_651.jpg 중국의 내치와 외교 압박으로 한미동맹 파기, 한중동맹 체결이 이루어지면 청와대 뒷뜰에 마오쩌둥, 덩샤오핑 주석을 기리는 대보단 같은 것을 세우고, 그들의 기일이나 중국 국경일에 그곳에 가서 한국의 3부요인들이 제사를 올려야 할 것이다. 사진은 조선시대 창덕궁 뒷뜰에 세워졌던 대보단 터를 표시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