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ㆍ태조 | 제10대ㆍ연산군 | 제19대ㆍ숙종 | |
제2대ㆍ정종 | 제11대ㆍ중종 | 제20대ㆍ경종 | |
제3대ㆍ태종 | 제12대ㆍ인종 | 제21대ㆍ영조 | |
제4대ㆍ세종 | 제13대ㆍ명종 | 제22대ㆍ정조 | |
제5대ㆍ문종 | 제14대ㆍ선조 | 제23대ㆍ순조 | |
제6대ㆍ단종 | 제15대ㆍ광해군 | 제24대ㆍ헌종 | |
제7대ㆍ세조 | 제16대ㆍ인조 | 제25대ㆍ철종 | |
제8대ㆍ예종 | 제17대ㆍ효종 | 제26대ㆍ고종 | |
제9대ㆍ성종 | 제18대ㆍ현종 | 제27대ㆍ순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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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大朝鮮國 조션/죠션/됴션 조선봉건왕 | |||||||
정부 형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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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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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222,300 km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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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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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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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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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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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이후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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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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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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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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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국가 |
朝鮮
大朝鮮國(대조선국)
영어: Joseon
(1392년~1897년)
개요
조선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한반도를 505년 간 다스렸던 왕조이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의 지지를 등에 업어 무관 이성계가 건국하였고,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으로 계승되었다.
역사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로 나눌 수 있다.
조선전기
중앙집권체제 완비
전임 왕조인 고려는 지방을 주현과 속현으로 나누어 주현에만 관리를 파견했던 것과 달리 조선은 모든 군현에 관리를 파견했다. 또한 고려 시대에 존재하던 차별적 지역인 향, 소, 부곡을 철폐하여 일반 군현으로 바꾸었고 여기에도 관리를 파견하였다.
법질서 완비
세조때 경국대전을 대략적으로 완성하여 반포하였으며, 이후 예종때와 성종때에 보완하고 추가하여 성종때에 완성하였다.
불교의 쇠퇴와 유교의 융성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의 영향이 그나마 남아있었다. 이는 태조가 무학대사를 왕사에 임명한 것과 건국 후 시간이 한참 흐른 명종대에 수렴청정을 행했던 문정왕후가 승려 보우를 신임했던 것 등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성립될 때부터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기에 고려 시대에 비해 불교의 영향력은 현격히 낮았으며 날이 갈수록 불교세력은 약화되었다. 이는 태조와 세조 등 역대 국왕들이 후원했던 회암사가 어느 순간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아버린 것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대주의
이전 왕조인 고려 대에 비해 사대주의가 강화되었다. 일례로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국호를 정할때 명나라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 어느 것을 국호로 하면 좋을지 물어보고 조선이 좋겠다는 명나라 황제의 의견을 따라 조선(朝鮮)을 국호로 정했다. [4]자기나라 이름 짓는 일마저도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중국에 물어보고 결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대주의 풍조는 사대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성리학의 영향이기도 하고, 요, 송, 금, 남송 등으로 중국이 분열되어 있던 고려 대에 비해 명나라라는 거대 국가로 중국이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역과 상업의 쇠퇴
조선의 지배계층은 무역을 경시하고 자급자족 농업국가를 지향했다. 국제무역의 이득을 포기하니 국가는 당연히 빈국이 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조치에는 유교사상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역 및 경제문제에 있어서 조선 지배층만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던 명나라가 바다에서의 자유통행과 무역을 금지[5]했기에 조선의 입장에서는 상국인 명나라의 결정에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비 수의 급격한 증가
1420년 예조판서 허조의 건의에 따라 세종은 노비고소금지법을 제정하였고, 이후 노비종모법을 시행하였는데 이로 인해 노비의 처우가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비의 가격이 폭등했다. 다만 이러한 노비 수의 증가는 제도적 측면 뿐만 아니라 당시 농업은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유리했다는 경제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조선 중기
국방력의 약화
처음에 조선왕조는 상류층을 이루는 양반계층은 군관으로 복무시키고, 천민을 제외한 모든 평민들은 병사로 복무하게끔 하는 일종의 징병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양반계층은 점차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도록 제도가 바뀌었으며, 평민 또한 직접 군대에서 복무하는 대신 군포를 지불하고 관청에서는 군포를 바탕으로 병사를 모집하는 일종의 모병제(방군수포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국부의 상당수를 지니고 있던 양반이 군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고, 또 관청에서 병사를 모집하는데 써야 할 군포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서 조선 중기에 들어서는 현격히 국방력이 약화되었다. 이렇게 국방력이 약화되었기에 임진왜란 때 조선군은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명나라에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후기
성리학적 명분론 심화
임진왜란을 겪은 명나라와 일본은 기존의 국가가 멸망하거나 정권이 교체되었으나, 전쟁의 피해가 가장 컸던 조선은 국가가 교체되거나 기존 질서가 변경되지않았다. 오히려 성리학적 질서가 더욱 강화되었다.
당쟁 격화
현종과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수차례의 예송과 환국이 발생하며 당쟁이 격화되었다. 여기서 예송이라는 것은 사회지도층인 양반들이 고작 상복을 몇 년 입느냐 하는 것으로 논쟁을 벌인 것이며, 환국은 급격한 정국 변화를 의미한다.
소농사회
노비를 이용한 농장 경영은 쇠퇴하고 가족 단위 중심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소농사회가 도래하였다.
실학
영조와 정조 재임기인 18세기에 기존의 사회체제의 개혁에 대한 학문인 실학이 나타났다. 유명한 실학자로는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학은 학문의 주류는 커녕 중앙정계에서 큰 관심조차 받지 못하였으며, 훗날 개화파의 기원이 되나, 결국 근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세도정치
순조, 헌종, 철종 재위 기간 동안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며 백성들은 더욱 더 큰 수탈에 시달렸다.
정치
경제
동시대 타 국가들에 비해 경제발전이 굉장히 지체되었으며 이는 서구 유럽 뿐만 아니라 주변의 중국, 일본과 비교해보아도 그러하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시기에 이런 문제가 두드러졌는데, 보급 능력이 떨어졌던 명나라 군대는 은화를 챙겨왔는데 아직도 소규모 물물거래 경제였던 조선사람들은 은화를 받질 않아, 명나라 군대가 조선 백성들을 약탈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로부터 백년가량 지난 1678년 숙종때에 이르러 상평통보가 주조되었으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6] 18세기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물물경제를 탈피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금속화폐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타국에 비해 상공업 발전은 매우 미약하였으며, 이에 대한 서술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저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은 그의 저서 <열하일기>에서 벽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박제가는 저서 <북학의>에서 도로를 닦아 수레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서술로 조선은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도로조차 없는 미개국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초적인 사회간접자본의 부재로 상업과 공업도 발달하지 못했다는 예측이 가능하다.
조선의 경제 발달이 이처럼 미약했던 것은 상공업을 천시하던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나 그 외의 기술개발과 기업가 정신의 발흥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관존민비(官尊民卑) 정치 및 행정 시스템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또한 조선이 존속하던 시대는 서구에서 대항해시대로 세계가 점점 가까워지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하여 생산능력이 급증하던 시기인데, 조선은 이 시기에 공맹 사상이나 곱씹고 무의미한 성리학적 논쟁으로 허송세월 했기에 한반도는 다른 지역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크게 뒤쳐져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며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조선 500년은 잃어버린 500년이라 할 만하다.
생활수준
경제적으로 뒤쳐졌기에 생활수준도 매우 뒤떨어졌다. 이는 조선 말기 외국인들의 저서에도 흔히 드러난다.
토지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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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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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미화
일본의 침략으로 멸망한 국가이기 때문에(물론 1897년부터 1910년까지는 대한제국이였다. 하지만 13년에 불과한 기간동안 조선이란 국호가 더 많이 쓰였다) 민족주의 진영과 좌익진영은 조선왕조를 미화하는데 많이 움직인다.
구한말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 등 국력을 약화시킨 원인이 있음에도 마치 모든게 일본때문이고 조선왕조가 백성들을 선하게 다스리고 있었는데 일본이 와서 백성을 억압했다는건 1차원적이다.
조선의 멸망
인물
조선의 역대왕
조선의 역대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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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의정
조선의 왕세자
추존왕 목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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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익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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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도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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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환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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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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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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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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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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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소생 |
왕세자 홍위(단종) |
단종 소생 |
- |
세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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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덕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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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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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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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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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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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소생 |
- |
명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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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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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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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원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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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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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소생 |
왕세자 연(현종) |
현종 소생 |
왕세자 순(숙종) |
숙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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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소생 |
- |
영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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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진종 소생 |
정조(양자) |
추존왕 장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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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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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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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문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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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소생 |
- |
철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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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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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소생 |
- |
의민황태자 소생 |
가계도
여담
- 1896년부터 조선은 8도에서 13도제가 됐는데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그 외 양반 비율이 1%가 넘은 지역은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강원도(1.1%), 전라북도(1%) 순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경기도(0.8%), 함경북도(0.8%), 전라남도(0.5%), 경상남도(0.4%), 함경남도(0.4%), 황해도(0.3%), 평안북도(0.2%), 평안남도(0.1%)였다.
- 1909년 4월1일, 민적법(民籍法)이 새로 시행되어 1910년까지 실시한 전국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 결과 총 가구 수 289만4777호 가운데 양반은 5만4217호로, 전체 인구의 1.9%에 불과했다고 한다.#
각주
- ↑ 1592년 6월부터 1593년 11월까지는 최흥원이 영의정이었다.
- ↑ 수차례 면직 및 파직, 사퇴가 반복되었다.
- ↑ 1395년까지는 한양이라고 불렀다.
-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29일 병오 1번째기사
- ↑ 이영훈, 『한국경제사I』, 2016, 일조각, p313
- ↑ https://n.news.naver.com/article/015/0003109806
- ↑ 에른스트 폰 헤세 바르텍, 『조선, 1894년 여름』, 정현규 역, 책과 함께, 2012년, p8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