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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근 수정 : 2021년 6월 18일 (금)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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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진국)


원삼국 시대
(부여옥저동예마한진한변한)


삼국 시대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남북국 시대
(발해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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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태봉신라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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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일제강점기임시정부)


해방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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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고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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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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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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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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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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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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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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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정종
제11대
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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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
충정왕
제31대
공민왕
제32대
우왕
제33대
창왕
제34대
공양왕

高麗 고려 (AD)918~1392

개요

태봉의 시중이었던 왕건918년 쿠데타로 건국한 나라로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다시 후삼국으로 분열된 나라를 936년 통일하였다. 926년 북쪽의 발해가 거란의 침입으로 망하자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고구려(高句麗)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고려(高麗)로 하였으며 그에 따라 개국이후 북방 진출 노력을 계속하여 대동강 선에 있던 국경을 천리장성까지 확장했다. 1392년 조선의 첫 번째 임금인 이성계에게 멸망했다.

역사

초기

호족간의 연합체적 성격으로 건국하고 통일했기에 호족 간의 권력 다툼이 심했고, 왕권이 강하지 않았다. 제4대 왕인 광종(光宗)대에 호족의 숙청, 노비안검법으로 인한 경제적 기반 약화, 과거제 실시를 통한 새로운 관료층 등용 등으로 호족의 힘은 다소 약화되었으며, 이러한 호족들은 문벌귀족으로 탈바꿈하거나 대개는 고을의 향리가 되었다.

중기

국가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나 거란여진의 침입 등으로 인해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사회적으로는 음서라는 제도를 통해 문벌귀족 계층이 사회적 지도층으로 떠올랐다.

무인시대

문신(文臣)들에 비해 박한 자신들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무신(武臣)들의 정변으로 무인시대가 초래되었다. 몽골의 침입과 화친으로 타파된다.

원(元) 간섭기

원(元)과 화친하는 대가로 고려 왕자는 몽골공주와 결혼해야 했으며 그에 따라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권문세족이 사회의 지도층으로 떠올랐으며 후반부에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신진사대부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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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중앙행정

당(唐)의 3성 6부 제도를 고친 2성 6부제를 기본골격으로 하여 송의 기구인 삼사, 고려 고유의 기구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을 설치하였다.

지방행정

5도 양계를 광역 행정구역으로 하고, 각 고을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과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나뉘었다. 또한 특정한 고을을 향, 소, 부곡 등으로 지정했는데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신분이 낮고 특수한 물품(도자기 등)을 생산하고 왕실에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진 지역이었다.

관료선발

광종 대 부터 과거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는 한민족 최초의 과거제 도입이며, 이 때 도입된 과거제도는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경제

수취제도

관리들에게 토지에 대한 수조권(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을 나누어주었으며 이를 전시과(田柴科)라 한다. 전시과는 여러 번 개정되었다.

토지제도

전시과(田柴科) 제도로 관리들에게 수조권를 나누어주었으며, 당연히 국가에서 직접 조세를 걷는 토지도 존재했다. 전자를 가리켜 사전(私田) 후자를 가리켜 공전(公田)이라 했다. 그리고 농민은 공전 또는 사전에서 작물을 경작할 수 있는 경작권을 보유하였다. 즉,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완전한 소유권이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라, 토지에 대한 권리가 국가 또는 관리의 수조권과 농민의 경작권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는데 바로 고려시대에도 현재와 같이 토지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이 존재하였다고 보는 토지 사유지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국공유지가 공전(公田), 사유지가 사전(私田)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경제사학자인 이영훈 교수는 고려 왕조가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를 금지했다는 점을 근거로 토지 사유지설을 부정[2]하였다.

문화

국교가 불교였으며 성리학은 고려 말에야 알려졌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만연했던 문화에서의 유교적 영향은 덜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서(史書)

고려 시대에 과거 제도 등의 도입으로 인해 이전 시대에 비해 숭문적인 분위기가 있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여러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일단 고려 이전 시대인 삼국시대를 다룬 삼국사기삼국유사가 바로 고려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이다.

문하시중(조선의 영의정급)이었던 김부식이 편찬하였다. 국가주도로 김부식 외에도 여러 인력이 투입되어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했다.

고려 말의 승려 일연이 집필했다. 삼국사기에 들어있지 않은 각종 이야기나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고려는 당대의 기록도 남겨 왕이 서거할 때마다 왕의 재임 시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과 정책 결정 과정 등을 수록한 역사책의 일종인 실록을 편찬했으며, 모든 고려 왕들의 실록을 일컬어 고려실록이라 했다.

조선왕조 개창 이후에 이 고려실록을 토대로 고려사고려사절요가 편찬되었으며 고려실록 원본은 조선 중기까지 남아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각주

  1. 1000년 어림
  2. 이영훈, 한국경제사I, 2016, 일조각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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