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대ㆍ태조 | 제10대ㆍ연산군 | 제19대ㆍ숙종 | |
| 제2대ㆍ정종 | 제11대ㆍ중종 | 제20대ㆍ경종 | |
| 제3대ㆍ태종 | 제12대ㆍ인종 | 제21대ㆍ영조 | |
| 제4대ㆍ세종 | 제13대ㆍ명종 | 제22대ㆍ정조 | |
| 제5대ㆍ문종 | 제14대ㆍ선조 | 제23대ㆍ순조 | |
| 제6대ㆍ단종 | 제15대ㆍ광해군 | 제24대ㆍ헌종 | |
| 제7대ㆍ세조 | 제16대ㆍ인조 | 제25대ㆍ철종 | |
| 제8대ㆍ예종 | 제17대ㆍ효종 | 제26대ㆍ고종 | |
| 제9대ㆍ성종 | 제18대ㆍ현종 | 제27대ㆍ순종 | |
|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 탐라 · 발해 · 후삼국 · 고려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 강점기 · 임시 정부 · 대한민국 · 북한 | |||
| 태조 太祖 | |
| 약력 | |
| 직책 | 조선국 제1대 왕 (양력 1392년 8월 5일 ~ 1398년 10월 14일) 후임→ |
| 생몰기간 | 1335년 10월 18일 ~ 1408년 6월 18일 |
| 묘호 | 태조(太祖) |
| 시호 | 성문신무정의광덕대왕
(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 |
| 성 | 이(李) |
| 휘 | 단(旦) |
1. 개요
태조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 1335년 10월 27일(음력 10월 11일) ~ 1408년 6월 18일(음력 5월 24일))은 조선(朝鮮)의 초대 군주로, 묘호는 태조,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혹은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성은 이, 본관은 전주, 휘는 성계(成桂)였으나 즉위 후 단(旦)으로 고쳤다.
고려 말대의 장수였으나(왜구 소탕이나 1차 요동정벌 등의 많은 공을 세웠다.)
왕명으로 2차 요동정벌을 나가다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조선(朝鮮)을 세워 초대 국왕이 되었다.
(책봉만으로 보면 이성계는 명나라로 부터 조선국왕이 아닌 권지고려국사(임시로 왕대신 고려의 일을 처리하는)로만 책봉을 받았다.
3대 태종 이방원 때에 가서야 명나라는 태종을 처음으로 조선 국왕으로 책봉을 해줬다.
(이때는 명나라도 쿠데타로 조카를 보내고 영락제가 즉위한 상황이라서 이방원을 빠르게 조선국왕으로 책봉을 해주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차 왕자의 난 때 아들 이방원에 의해 사실상 축출 되서 정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이후 행궁 비슷한 사찰 회암사(양식이나 규모가 거의 궁궐 수준이다.)에 머물렀다.
아들 이방원을 역으로 축출하기 위해 조사의 난이라는 반격을 하기도 했지만 진압 당했다
(실록에서는 조사의 난이라고 했지만 실상 이걸 주도한 것은 이성계라는 게 학계에서는 많이 지지되는 이론이다.)
이후 아들(이방원)과는 화해를 한 것 같다.
2. 선대
태조는 즉위 후 고조부 이안사(李安社, ? ~1274)는 목왕(穆王), 증조부 이행리(李行里)는 익왕(翼王), 조부 이춘(李椿, ? ~1342)은 도왕(度王), 부친 이자춘(李子春, 1315~1361)은 환왕(桓王)으로 추존하였다.[1][2]
태종 때인 1411년 선대의 묘호를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로 가상하였다.[3]
태조의 선대 가계에 대해서는 아래 실록의 기사에 자세히 나온다.
-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1393년) 9월 18일 경신 2번째기사 / 동북면 함주에 환왕의 정릉비를 세우다 조선왕조실록 - 국사편찬위원회
3. 사대주의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국호를 정할때 명나라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 어느 것을 국호로 하면 좋을지 물어보고 조선이 좋겠다는 명나라 황제의 의견을 따라 조선(朝鮮)을 국호로 정했다. [4]자기나라 이름 짓는 일마저도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중국에 물어보고 결정했다는 점에서 태조를 사대주의의 시작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근데 엄밀히 말하면 사대주의긴 한데 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화령중 이성계의 고향이름은 화령은 명나라가 받기 힘든 이름으로(중국 발음이 원나라 도시와 비슷) 조선이라고 정하고 하나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을 끼워 놓고 추인해 달라고 한 것이다.
이성계의 심복 조선 초기 설계자인 정도전만 봐도.
역대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등은 자기 멋대로 나라이름을 참칭하고 반도 끝을 점유해서 정통성이 없고,
오직 조선만이 중국으로부터 국명을 하사 받았으니 정통성이 있다는 논리를 폈다.
이거 말고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때부터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쳐서는 안된다는 명분을 내걸기도 했고, 홍무제가 뭐라하는 문서를 보내자 자국을 오랑캐라고 하는 등 이런 적이 많았다.
3.1.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 기록에 태조가 이인임(李仁任, ?~1388)[5]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재된 것이 알려져 조선에서는 개국초부터 이를 바로잡고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명나라는 사정을 알면서도 조선의 약점을 잡아 횡포를 부리며 바로잡아 주지 않았다.
무려 200여년을 노력한 끝에 선조 대인 1589년에야 겨우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는 이걸 굳이 바로잡을려고 목을 맨 것을 보면 조선의 사대주의적인 면모라고 볼 수도 있다. 조선왕은 자기 통치의 정통성을 중국의 천자로부터 제후로 책봉 받는 것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여기에 특히나 목을 맨 것으로 보인다.
근데 왕조 입장에서 자기네 선조가 이인임의 아들이다 이런식의 잘못된 기록은 당연히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거긴 하다. 너무 노골적으로 목을 매서 조선에 온 사신들이 횡포를 부리고 먹튀까지 하게 한 것은(사신으로 와서 해준다고 해 놓고 대접만 거나하게 받고 정작 안 해줬다 계속) 외교적 실책으로 보인다.
- 종계변무(宗系辨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조와 신덕왕후 강씨의 딸 경순공주(慶順公主, ?~1407)가 이인임의 조카 이제(李濟, 1365~1398)와 혼인하여 태조와 이인임은 사돈간의 가까운 관계였다. 후에 경순공주는 이방원의 난으로 남편과 동생들(방번, 방석)이 죽자 승려가 되었다.
4. 피휘(避諱)
조선조에서 역대 왕의 이름 글자는 신하나 백성들이 함부로 이름 글자에 넣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불편을 덜기 위해 왕의 휘는 거의 쓰이지 않는 벽자를 택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태조의 휘 단(旦)은 자주 쓰이는 글자이고, 문종의 휘 향(珦) 등도 가끔씩 쓰이므로 후대 사람들은 아예 이름에 쓰지 않으니 문제가 없으나, 이전 고려시대 사람들의 이름도 본래대로 쓰지 못하고 다른 글자로 대체해야 했다. 인명의 단(旦)은 같은 뜻의 조(朝)로 바꾸어 적었다.
고려조 인물 호종단(胡宗旦), 하천단(河千旦), 유승단(兪升旦), 흔승단(昕昇旦), 왕정단(王丁旦) 등은 조선조에는 호종조(胡宗朝), 하천조(河千朝), 유승조(兪升朝), 흔승조(昕昇朝), 왕정조(王丁朝)로 적었다.[6] 이들은 이름 글자가 달리 적혔더라도 동일인이므로 유의해야 한다. 안향(安珦)도 조선조에는 초명이었던 안유(安裕)로 불렸다.
5. 각주
- ↑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년) 7월 28일 정미 2번째기사 / 태조의 4대 조상에게 존호를 올리다
-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1392년) 11월 6일 계미 1번째기사 / 4대 선조의 존호를 정하여 올리다
- ↑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1411년) 4월 22일 임자 1번째기사 / 종묘의 4실에 존호를 가상하다
-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29일 병오 1번째기사
- ↑ 이인임(李仁任, ?~138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권문해(權文海, 1534~1591), 초간집 > 草澗先生文集卷之四 > 大東韻玉凡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