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1945년 8월 15일 독립 이후 38도선 이남 지역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미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 군정이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공산주의 세력만을 인정하고 기타 민족주의 세력 등은 철저히 탄압하고 뿌리를 뽑은 것과 달리, 미군정은 한국에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목적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초반부에는 박헌영이 이끄는 극좌파 공산주의자들이 온갖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고, 좌파 지도자 여운형, 중도 우파라 주장하는 안재홍, 우파계열의 이승만, 김구 등의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다.

미군의 입경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

1945年 9月 9日 오후 4시 이날 연합군과 일본측과의 종전협정에 대한 항복문서의 조인식은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이 조인식에는 연합군측의 태평양방면 제24군사령관 하지중장과 태평양방면해군사령관대표 킹케이트대장 이에 대하여 일본측 조선군관구사령관 上月良夫중장, 진해경비사령관 山口儀三郞중장, 조선총독 阿部信行대장이 열석한 중 먼저 연합군측 노앰 에이취 무어중좌로부터 조인식 거행의 개회사가 있자 미국측 장교의 안내로 上月, 阿部, 山口 대표의 순서로 입장, 장내는 이 순간부터 긴장한 빛을 띠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입장한 일본대표는 잠시 부동자세로 지정한 의자 앞에 列立하자 그 越便에는 연합군측대표 장교단 13명은 이미 착석, 이어서 무어중좌의 지시에 의하여 일본측대표가 착석하고 나자 이어서 연합국측 대표, 하지중장과 킹케트장군이 일동기립의 호령에 의하여 정중한 步武로 입장하여 착석한 후 “태평양방면육군총사령관 맥아더대장을 代하여 余는 오는 남조선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자 조인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하자 연합군측으로 美國文과 日本文으로 된 이 조인문서가 먼저 일본측 대표에게 제출되었다. 이 조인서에 대하여 일본측 上月軍司令官, 鎭海司令官, 山口中將, 阿部總督의 순서로 각각 서명을 하자 이에 이어 연합군측 하지將軍과 킹케이트將軍 또한 서명을 하고 별항과 같이 하지將軍으로부터 조선동포에 대한 성명서를 낭독하고 식을 시작한지 불과 25분 만에 조인식은 끝이 났다.
맥아더 포고령

전개

미군정청은 정부를 자칭하는 단체인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공화국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들을 강제 해산시키지는 않고 정당 형태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45년 후반 미국 정부에서 작고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안인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안이 거론되자 미군정청은 한국내의 분위기를 들어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보낸다. 그러나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을 결의하자 국내에서는 좌우파 모두 격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1946년 1월 3일부터 좌파들은 태도를 표변하여 일제히 찬탁으로 돌아서는데, 배후에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은 북한지역에서 일체의 반탁운동을 금하고 관제 찬탁 데모만 허용하였다. 1946년 1월 5일에 반탁을 고집하며 소련에 협조를 거부하던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한다. 실제로는 소련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4개국 신탁통치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으면서 이를 남한 정국에 갈등과 혼란을 일으키는 지렛대로 활용하였다.

이후 반탁과 찬탁을 두고 좌우 대립이 극심하게 일어난다.

존속기간 : 1946년 2월 14일 ~ 1948년 5월 29일
조선인으로 구성된 미군정 자문기구
1946년 2월 1일과 2일 임시정부측 주최로 과도정부수립을 목적으로 소집된 비상국민회의가 그 의결로써 28명의 최고정무위원을 선출하였던바, 미군정의 종용을 받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Hodge,J.R.)의 자문기관으로서 과도정부수립을 촉진시키는 사명을 띠고 2월 14일 설치되었다.그 구성은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을 비롯하여 남한 각 정당지도자 중 28명으로 구성하여, 과도정부수립을 촉진시키는 사명을 띠고 군정청에서 창설되었으나, 창설의 목적과는 달리 결의기관이 아닌 미군정사령관의 자문기관에 그침으로써 그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존속 기간 : 1946년 12월 12일 ~ 1948년 5월
1946년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자 미군정 당국은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 온건한 좌우파의 지도자들에게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알선하는 한편, 이들을 중심으로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였다.

미군정 당시 여론은 사회주의 체제를 선호했나?

미군정 당시 남한의 여론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선호했고, 미군정의 개입이 없었으면 공산화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들이 많다.[1][2] 그러나 이는 미군정이 당시 시행했던 여론조사 결과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일 뿐이고, 실제의 여론은 우익이 훨씬 우세했다. 이는 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나고, 6.25 이전에 북한 공산주의를 반대하여 월남한 사람이 150만여명인데 비해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은 13만여명에 불과하다는 것[3]에서도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정치나 경제 체제에 대한 미군정의 1946년 여론조사 결과에 대한 분석은 아래 논문에 잘 나와 있다.

1946년 08월 13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미군정 여론조사. 이 여론조사의 [문항 3]에서 선호하는 경제체제로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로 나왔는데 강정구 교수는 이 둘을 더하여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여론이 77%였다고 주장했다.[1][2]
초록

본 논문은 1946년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나타난 남한사람들의 사회인식을 연구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미군정의 우익성향 때문에 여론조사가 우편향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미군정은 오히려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중도세력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인 우익적인 성향을 경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여론동향은 우익이 우세했고, 특별히 서울지역에서는 더욱 그랬다. 여론조사에 나타난 남한인들의 정치성향은 약 70% 가량이 우익인사 내지 우익정당을 지지했고, 절대다수가 신탁통치를 반대했으며, 정부형태로는 대의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을 지지했다. 특별히 미소공위에서 이승만김구를 제외시키려는 소련의 태도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런 점에서 해방직후 한국인의 정치지향은 우익, 즉 서구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론조사에 나타난 남한인들의 경제성향은 극단적인 공산주의도 극단적인 자본주의도 다같이 배격하고 있다. 남한인들은 분명하게 북한식의 토지개혁을 지지하지 않았다. 일본 기업에 대해서는 국유화에 찬성하고 있으나 일본의 토지에 대해서는 국유화와 사유화가 비슷하며, 남한 대지주들의 토지에 대해서는 유상매매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이것은 경제정책에 있어서 온건한 유럽식 사회주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군정이 실시한 실제 여론조사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일부)

자료대한민국사 제3권 > 1946년 8월 13일 > 軍政廳輿論局, 朝鮮國民이 어떠한 종류의 政府를 요망하는지 여론을 조사 국사편찬위원회 1970년
이 여론조사의 [문항 3]에서 선호하는 경제체제로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7%로 나왔는데 강정구 교수는 이 둘을 더하여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여론이 77%였다고 주장했다.[1][2]
  • G-2 Periodic Reports, May-June 1946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미 극동군 사령부 연합군 최고사령관 및 유엔사령부)
p.66~ : G-2 Periodic Report #235 May 23, 1946
p.70~ : Incl #2. Effectiveness of Japanese and Soviet propaganda in the provinces and in Seoul - 여론조사 설문과 결과

미군정은 여운형김규식의 좌우합작을 추진

해방 후 미군정은 처음에는 남한에 좌우 합작 정부를 세우는 것을 선호하여 강성 반공 우파인 이승만김구는 배제하고, 여운형을 소련 및 김일성과 분리시켜 김규식과의 좌우 합작을 추진했다.[4][5][6]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에는 버취(Leonard M. Bertsch) 중위가 깊이 관여하였다.[7] 그는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있어 계급에 비해 중요한 일을 맡았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중위였다고 말하고 다녔다 한다.[8][9] 하지 중장의 정치ㆍ경제 고문 번스(Arthur C. Bunce)[10][11]가 1946년 평양을 방문하여 10월 6일 김일성과 회담했는데,[12]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 한다.[13]

번스와 김일성의 회담에는 발라사노프와 그의 부관 샵쉰도 동석했다. 번스는 남조선에서 우익은 좌익을 반대해 투쟁하고 좌익도 좌우합작을 원치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번스는 이승만김구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며 박헌영도 정당들의 통일을 방해한다고 비난한 반면 김규식은 인민에게 영향력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 친일파와 투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번스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기대를 표명했다. 그는 박헌영여운형의 합작은 미군정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번스는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한 일부 세력을 용납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다. 번스는 미소공위 재개조건으로 반탁세력을 용인하되 이승만 김구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좌우 양극단이 아니라 김규식여운형으로 대표되는 중도 좌우파에 기초해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를 보아도 미군정은 박헌영 뿐만 아니라 이승만, 김구도 멀리하고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 정부를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대한민국 건국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고집하였고, 이승만은 이에 반대하여 하지 사령관과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 그는 1947년 7월 3일 하지 중장과의 협조포기를 선언하였고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14]


사실 좌우합작은 공산당의 술수로 좌우합작 해서 공산화 되지 않은 나라가 없다. 이승만이 옳았던 것. 미국 사람은 좌우를 무슨 민주당 공화당 정도로 한나라에서 공존가능한 세력으로 보았지만, 실상은 공산당은 자유우파를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공존불가능하고 좌우합작한 나라는 죄다 공산화 되었다 동구권이 그랬고 중국 대륙도 그랬다. 이승만이 이런 사례를 들어서 반대한 것

이승만은 9월 16일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수단으로 남한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좌우합작의 한 축인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암살 당하고, 미소공동위원회마저 최종 결렬되자 소련의 진의를 파악하게 된 미국 정부는 이승만에 동조하기 시작한다.[14]

이에따라 미소공동위원회는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며,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하게 된다. 소련과 북한이 유엔 결의안의 수용을 거부하여 총선거는 38도선 이북 지역을 제외한 남쪽에서만 실시된다.

한편 김구김규식은 남북 단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고집하여 총선거 직전 1948년 4월말~5월초에 평양을 다녀온 후 총선거에도 불참하여 사실상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였다.

주요 사건

사건 이후 조선공산당이 사실상 불법화되고, 9월에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그는 잠적했다가 10월에 월북함.

업적

자유시장경제체제 복원

중일전쟁 발발 이후부터 일본제국은 민간소비와 투자를 억제하고 대부분의 물자를 군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본토를 비롯하여 식민지인 한국, 대만 등지에서 통제경제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는 당시 독일, 이탈리아 등의 모든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던 공통된 현상이었으나, 일본은 서구 열강에 비해서 경제력이 그다지 높지 않은 상태로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잇따라 수행하다보니 경제체제를 더욱 억압적으로 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제국이 패망하고 미군정이 들어서며 이러한 비정상적인 경제체제를 그나마 시장경제체제로 일부 되돌렸다. 그러나 한번도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이룩하고 운용해본 적이 없었던 한국인들이 미군정의 일시적인 조치만으로는 고도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건국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며 현재의 시장경제 체제가 정착되었다.

미군의 철수

뒤바뀐 「軍部(군부)-國務省(국무성) 입장」
「制限(제한)지원」 撤軍(철군)선택: 트루먼
"상징적인 軍隊(군대)라도 : 이박사(李博士)
"美國(미국)은 韓國(한국)을 40년사이 두번 拋棄(포기)"
軍援(군원)믿고 撤軍(철군)묵인 : 李博士(이박사)
한 푼 아끼려다 千兩(천냥) 잃어선 안 된다 : 무초 대사
美(미)는 「支援(지원)언약」도 거부
李王朝(이왕조) 몰락 상기 : 李博士(이박사)
"撤收(철수)관련 代價(대가) 바라는 환상 깨라 : 國務省(국무성)

미군정에 대한 근거없는 비판들

오늘날 좌파들은 소련 군정과 미군정을 비교하며 소련 군정에 비해 미군정이 훨씬 더 나쁘다고 근거없는 비판을 하는 일이 잦다.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미군정이라고 비판할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제대로된 근거는 제시하며 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그 후 실제로 남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은 전혀 보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문구만 그대로 믿은 유치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 소련 군정은 조선인을 표면에 내세워 간접통치를 했지만 미군정은 직접통치를 했으므로 나쁘다고 한다.
소련 군정이 표면에 내세운 조선인들은 모두 소련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공산주의자들이며, 조만식 등 민족계열 또는 기독교 인사들의 정치활동은 철저히 탄압하여 아무 일도 못하게 막았다. 더구나 전면에 내세운 김일성은 소련군이 해방 전 5년간 88여단에서 훈련시켜 데려온 인물로 소련의 꼭두각시 대리인에 불과했다. 소련은 군정기간에 국내에 아무 기반이 없고 정치적 식견도 없는 자신들의 대리인 김일성을 내세워 지도자 훈련을 시키며 소련이 결정한 사항들을 그대로 실행하도록 하여 마치 조선인들이 통치하는 것처럼 포장했을 뿐이다. 소련군정 기간은 북한 주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소련의 꼭두각시 대리인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주민들은 이후 소련이 만들어놓은 지도자 김일성을 바꾸기는 불가능했고, 김일성 일족의 노예가 되어 있다.
반면에 미군정은 특정 조선인을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우지 않았고, 미군정에 적대적이고 소련에 우호적인 좌파들의 정치활동도 허용했다.
소련군정은 북한 주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공산주의 체제와 지도자 김일성을 강제적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미군정은 자유선거를 통해 구성한 국회가 신생 대한민국의 체체와 헌법, 지도자를 결정하도록 했다.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 남한만의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발언한 때는 2월 8일 북한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실상의 임시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진 한참 후이다.
북한 임시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분단의 단초가 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조선인을 내세워 간접통치를 한 것이니 훌륭한 것이고, 그 후 이승만이 남한도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한 것은 미군정이 반대하여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분단의 원인이 된 것인가?

미군정이 북한에 비하면 월등히 낫다는 당시 여론조사

[pp.55~56 : 1946년 4월 12일 여론조사] : 설문은 사람들에게 북한에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했고, 여기에 대해서 그렇다가 5%, 그렇지 않다가 84%, 모른다가 11%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에서 미군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군정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북한과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월등이 낫다는 것이다.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인가?

"차라리 대북전단 보내 北해방은 소련이라고 알려줘라"
태 의원은 "우선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직시한다면 소련군이나 미군은 다 같이 해방군이자 점령군이였다고 볼 수 있다"며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 상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군에 대한 무장해제가 필요하였고 그 과정에서 점령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단 지금에 와서 역사를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소련군이나 미군의 공식 문서들에 한반도 주둔 성격을 어떻게 표현했든 미군보다는 소련군이 더 점령군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며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김일성 등 소련군 내 조선인들의 군복을 벗기고 사민복을 입혀 당과 군대 국가건설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태 의원은 "이것은 1948년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수립된 사민 정권과는 대조를 이룬다"며 "2차 대전 후 소련군이 많은 나라들에 진주했지만 북한처럼 소련군 내 장교들과 사병들을 제대시켜 정권의 핵심 인사로 임명하는 식으로 정권을 세운 나라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한에 사민 정권이 수립되도록 도와준 미군이 해방군이냐"며 "아니면 북한에 소련군 출신들의 군사정권을 세운 소련군이 해방군이냐"고 반문했다.

태 의원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 우리 정부 내각에 미군 출신 인사들은 한 명도 없었다"며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을 해방군, 남한에 들어온 미군을 점령군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냐"고 했다.

월남자와 월북자의 수

해방 직후 남한과 북한으로의 이주민 수를 비교한 1947-10-21 일자 조선일보 기사. 월남민은 150만명이나 월북한 사람은 그 1 % (1만 5천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해방 당시 사람들이 남북한 중 어디를 선호했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는 월남자와 월북자의 수이다.

해방공간에서 북한의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월남한 사람들은 약 150만명에 달하는데, 거꾸로 남한을 떠나서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불과 13만명 밖에 되지 않는다(김재웅, 2016, 189~232). 이것은 당시의 민심이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보다는 남한의 민주주의 체재를 선호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AP 통신 기자가 한국에서 조사하여 보도한 기사의 인용으로 당시까지 월남민은 150만명이나 월북한 사람은 그 1 % (1만 5천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기사에 언급한 Anna Louise Strong (1885~1970)은 미국인 공산주의자로 1947년 8월 5일부터 19일까지 북한을 방문했으나 남한은 방문한 적이 없으므로 그녀가 남한에 대해 한 말들은 근거가 없다. 북한을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참고 자료

일본이 8월 7일에만 항복했어도 분할 피할 수 있었다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②] 미·소 점령군, 통치권력으로 자리 잡다 신동아 2020년 9월호
해방 직후 약 3개월의 상황 : 이미 드러난 미국과 소련 사이의 이해 충돌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③] 소련은 38도선 이북을 ‘직접’ 통치했다 신동아 2020년 10월호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④] 美대표단, ‘모스크바 3상회의’서 소련 계략에 말려들다 신동아 2020년 11월호
모스크바의정서 주역은 노회한 몰로토프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⑤] ‘권력중앙’ 먼저 형성한 김일성 vs 美견제로 뒤늦게 귀국한 이승만 신동아 2020년 12월호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⑥·끝] 북한은 스탈린의 주도와 후원 아래 건국된 국가 2021년 1월호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강정구교수 “국민 다수가 공산주의 지지” 발언 진위 검증 동아일보 2005-10-03
  2. 2.0 2.1 2.2 [사설] 강 교수의 잇따른 망발 계속 방치할 건가 중앙일보 2005. 10. 3
  3. 김재웅, 《북한의 38선 월경 통제와 월남 월북의 양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7: pp.189~232
  4. 좌우합작은 共委를 촉진, 탁치론보다 임정 수립이 선결, 지금은 왈가왈부를 논쟁할 때 아니다, 아놀드소장 담화 자유신문 1946년 07월 03일 1면 1단
  5. Summary of Political Events in Korea p.26의 Hodge가 김규식에게 보낸 1946년 9월 18일자 편지부터 나오는 문건들
  6. 金·呂 양씨에 서한, 하지중장 좌우합작에 기대 <자유신문> 8월 28일자
    合作努力(합작노력)에큰關心(관심) 하將軍(장군)·金呂両氏(김려양씨)에親書(친서)[肖]" <동아일보> 1946년 08월 28일 석간 01면
  7. American Members of the Political Advisory Group of the US-USSR Joint Commission Attending the Commission Meeting at the Duk Soo Palace[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정치고문단의 미국측 인사들 : 1947.06.15] 사진의 오른 쪽에서 두번째가 Bertsch 중위
  8. 신복룡,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여운형의 공명심 비극적 죽음 자초 허약한 김규식은 스스로 무너져 [주간조선 2359호] 2015.06.01
  9. Bertsch Papers,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 하버드 대학교 하버드-옌칭 도서관 버치 콜렉션에 대하여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10. 황윤희, 번스(Arthur C. Bunce)의 내한활동과 한국문제인식 숭실사학 2009, vol., no.23, 통권 23호 pp. 151-208
  11. 안종철, 해방 전후 아더 번스(Arthur C. Bunce)의 활동과 미국의 대한정책 미국사연구 제31집 2010.05 pp.139 - 167
  12. 번스(Arthur C. Bunce)와 김일성 대화록 : Беседы Банса с Ким Ир-Сеном 국사편찬위원회 :1946년 10월 6일 진행된 김일성과 번스의 회담 내용
  13.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일기 > 쉬띄꼬프 일기(번역) > 쉬띄꼬프 일기 Ⅰ부 > 1946년 10월 7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4. 14.0 14.1 이승만 연보 이승만 학당
  15. 교과서에서 왜 대구폭동을 빼버렸나? 뉴데일리 2014. 3. 10
  16. [Taegu Riots] : RG 332, USAFIK,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64, Police Corruptions, South Korea thru Culture in South Korea (1 of 2)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