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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최근 수정 : 2020년 12월 19일 (토) 14:11

조만식(曺晩植, 1883.02.01 ~ 1950.10.18)은 호가 고당(古堂)이며, 일제하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 주민들의 가장 큰 지지를 받는 지도자로 평양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소련이 미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만드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소련군은 그를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하였다. 이후 계속 연금상태에 있었으며, 6.25 당시 1950년 10월 북진한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직전에 김일성 일당이 그와 함께 반공 인사들 수백명을 총살한 후 암매장하고 도주했다.

생애

간략 연보

  • 1882년 출생. 호 고당(古堂)
  • 일본명치대법학부졸(日本明治大法學部卒)
  • 1919년 오산 학교장(五山學校長)
  • 1927년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
  • 1932년 조선일보사장(朝鮮日報社長)
  • 1945년 조선민주당 당수(朝鮮民主黨 黨首)
  • 1950년 10월 국군과 UN군의 평양 입성 직전 탈출하는 김일성 일당에게 총살 당함.

평남 건국준비위원회평남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1891~1979) 중장을 숙소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모습. 현장에 조선인 대표로 일제하 독립운동 지도자이며 대중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던 조만식(曺晩植)이 입회하였다. 머리에 터번처럼 붕대를 감은 이유는 당시 종기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1]

해방 직후 평양에서는 조만식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당시 평양은 기독교 세력이 워낙 강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북한에 진주했던 소련 25군의 정치담당관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1909~2006) 중좌는 자신이 북한에 왔을 당시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2][3][4]

소련군도 처음에는 그를 소홀히 대하지 못하고 협조를 구하다가 그가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자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대한 견제는 점점 심화되어 간다.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조만식은 평안남도 강서군의 자택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이후 평양으로 올라와 8월 17일 종로에 있는 오윤선(吳胤善)[5]의 집 사랑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결성한다.[1][6][7][8]

구성원은 위원장 조만식(曺晩植), 부위원장 오윤선(吳胤善)[5] 등 20여명이며, 대다수가 기독교 또는 민족계열의 사람이었고, 공산주의자는 2명이 포함되었다.

당시는 남북 분단이 되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시기이고, 평남건준은 정부를 만든다기 보다는 치안유지가 주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9]

(평남 건준은 여운형이 주도한 서울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는 별 관계가 없다. 여운형도 조만식과 아는 사이였지만, 평양을 들락거리며 김일성이나 소련군정 관계자들과 접촉하면서도 연금된 조만식의 석방을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전혀 없다.)

평양의 자유는 건준과 함께 10일만에 마감

8월 24~25일간에 소련군이 진주해 오면서 평양의 자유는 평남건준과 함께 10일만에 마감되었다. 북한 주민들이 해방의 자유를 마음껏 누린 것은 불과 열흘이 못되고, 소련군과 김일성 집단의 일제보다 더 잔인한 탄압이 시작된다.

眞正(진정)한 解放(해방) 단지 10日(일)
不幸(불행)의 씨! 蘇軍 進駐(소군 진주)
…愛國心(애국심) 自治力 誇示(자치력 과시)한 貴重(귀중)한 몇날…
이리하여 「건준」이 발족한 이래 평양 (평남이라 해도 좋다.)에서는 모든 일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어 나가고 있었다.

일제 군경(軍警)의 기능이 마비되었어도 오히려 치안은 그전보다 안정되고 모든 사람들은 마음껏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고 자유를 즐기며 오로지 되찾은 조국의 민주창건에 헌신할 의욕에 불타 있었던것이다. 그것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일종의 「무법낙원(無法樂園)」 시대로서 우리민족의 애국의욕과 자치능력을 과시한 귀중한 몇날이었다.
그러나 이 감격과 행복과 자유의 날은 길지 못하였다. 실로 북한에서 진정한 해방의 날은 겨우 十日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소련군이 들어온것이다。八月 二十四·五日을 전후하여 소련군이 진주해오자 모든 것은 뒤집혔고 뜻하지않은 새로운 사태가 이땅에 벌어지게 되었다.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과 부친 오윤선(吳胤善)의 일을 돕던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은 당시 평양의 공산주의자들의 사정에 대해 "국수집 2층에서 조직된 공산당을 돕기위해 서울에서 현준혁을 파견했는데, 국수집파는 서울서 온 현준혁이 헤게모니를 잡을까봐 경계했다. 이들은 사무소를 대화숙(大和塾)으로 옮겼으나 아무런 계획도 실천도 없었고 시민들도 냉담했다. 8월 26일 소련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는 그들에게는 머리도, 돈도, 힘도 없었다."고 하였다.[10] 즉 평양 현지의 공산주의자들이 세력도 보잘것 없는데다 서울서 온 인텔리 현준혁이 헤게모니를 잡는 것을 경계했다고 하므로 자기들 간에도 불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조만식과 만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대신 공산주의자들도 동수로 참석하는 조직을 만들도록 요구한다. 이에따라 평남건준은 8월 27일 민족계열 16명, 공산주의자 16명으로 구성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人民政治委員會)로 개편된다. 위원장은 조만식이 맡고, 부위원장은 우파의 오윤선, 공산주의자 현준혁 두 사람이 맡는다.

인민정치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은 후일 한국으로 귀순 후에 당시 현준혁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조만식에 협력했다고 하였다.[11]

북조선5도행정국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소련군은 1945년 11월 19일 북한 지역 5도 행정의 통일적 지도관리를 위해 북조선5도행정국 설치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에게 위원장을 맡길 것을 요구하나, 소련군은 조만식에게 위원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이 거절하여 10개 국(局)의 국장만 임명한 채 위원장은 공석으로 남게 된다.

이후 1945년 말 ~ 1946년 초 신탁통치 정국을 거치면서 소련군은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는 조만식을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하고, 2월 8일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킨다. 이로서 조만식은 북한의 정치무대에서 강제 퇴출되고, 김일성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북조선5도행정국의 요원들은 거의 모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요직을 맡는다.

조만식을 친일파로 몰아 고려호텔에 연금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 권력자의 자의로 진행되고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단적인 예가 일제하 독립운동 지도자 조만식(曺晩植, 1883~1950)을 친일파로 몰아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한 것이다.

해방 직후 평양에 진주했던 소련군 25군의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1909~2006) 중좌는 당시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라고 증언했다.[12][13][14] 이러한 조만식을 무시할 수 없어 소련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해서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1891~1979) 중장을 불러 항복을 받는 자리에 조선인 대표로 조만식도 입회하도록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소련에 협력을 거부하는 조만식을 결국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당시 소련군 소좌로 제25군 특별정치선전공작대인 '제7부'의 부책임자로 있었던 레오니드 바신(Leonid Vasin, 1915~2006)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북한주재 내무인민위원회(NKVD) 총책 아노힌 (Nikolai Anokhin, 1898~1974) 소장이 협력을 거부하는 조만식에게 '일제가 항복 직전 그를 석방한 것은 일본 첩자였기 때문'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신문과 방송이 이를 보도하게 한 후에 연금했다고 하였다.[15][16][17] 미군이 기록한 1948년 5월 남북협상차 방북후 귀환한 "김구, 김규식이 발표한 공동성명(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1948-05-06)"[18]에도 "두 사람 모두 조만식을 만나지 못했는데, 그를 친일 반역자로 낙인찍어 재판에 회부할 서류들을 마련중으로 보였다 (Both reported that they did not see Cho Man Sick, against whom dossier is apparently being compiled, for possible trial, as died in wool pro-Japanese traitor.)"고 하였다.

이때 연금된 조만식은 다시는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하고, 6.25 때 국군과 UN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갈 시기에 도망 직전의 김일성 일당에게 다른 민족진영 지도자들 다수와 함께 총살 당했다.

북한의 역사서 「조선전사」의 현대편(23권) 「민주건설사 1」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조만식(曺晩植)과 그 일당을 비롯하여 지방정권기관의 일부 책임적 지위에 기어들었던 불순분자들은 사업을 고의적으로 태공(사보타주)하면서 인민정권 기관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파괴하기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날뛰었다』고 기록했다.[19]

북조선 소련민정국장 대리 이그나티예프 대좌가 1947년 7월 스티코프 상장에게 올린 "정당 및 사회단체 중앙위원회들의 합동총회 결과에 관한 조회보고"에도 아래와 같은 말이 나온다.

민주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부당수 홍기주는 민주당의 전(前)지도자인 반동분자 조만식의 정체를 폭로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조만식이 미국 사절단장 브라운과 대화한 내용 및 조만식이 남녘, 특히 여운형과 연락관계를 갖고 있음을 지적한 다음 홍기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만식 – 이 자는 친일파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9시 일본이 항복한 후에 일본 [도]지사는 평양에서 조만식을 자신에게 불러서 그에게 평양에 남아 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일본의 노선을 실행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조만식은 기꺼이 동의했으며 자신의 지지자들을 선발하여 배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 때 서울에서는 아베 일본총독이 자신의 인장을 여운형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여운형과 조만식은 비밀리에 자기들끼리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지금 여운형은 어중간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입장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이것 역시 반동적 정책입니다. 우리 당원들 중에서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입장을 갖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자들과는 단호하게 투쟁해야 하며 경각심을 높여야 합니다.”

민주당은 조만식이 1945년 11월 창당한 조선민주당을 말한다. 소련과 김일성은 조만식에 제동을 걸기 위해 소련군 88여단 빨치산 출신 최용건(崔庸健, 1900~1976)을 조만식의 제자라는 핑계로 민주당에 들여보내 부당수로 만든 후, 1946년 1월 5일 조만식을 연금하고, 최용건이 당수가 되어 당을 완전히 접수하게 했다. 조만식을 친일파라 공격한 부당수 홍기주(洪箕疇)는 기독교 목사로 해방 직후 조만식이 위원장이던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의 교육부장이었으나[20],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 공식 출범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21]

공산당에 대한 지지율은 20% 미만

아래 미군정 문서에는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할 당시 공산당에 대한 지지율은 20% 미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G-2 Periodic Reports, 2 January 1946 - 7 March 1946 pp.215~216 같은 내용  : G-2 Periodic Reports, 18 February 1946
임시인민위원회 구성 소식; 조만식의 구금;
1월 3일 학생, 근로자 4,000여명 동원한 평양의 관제 찬탁 데모.
공산당 지지율 20% 미만.

그러나 3월 5일 소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실시되면서 땅을 받은 농민들 사이에 김일성에 대한 지지율이 상당히 올라갔다고 알려졌다.

부인과 자녀들의 월남

다음은 曺晩植(조만식)선생의 부인 田善愛(전선애)여사(66세. 서울 영등포區(구) 화곡洞(동) 362의 77)의 회고담.

贊託(찬탁)에 협조 안한다고 해서 46년 1월 고려호텔에 연금되신 후 1년에 한두 차례 밖에 面會(면회)를 못했어요. 47년 7월에 미소공위 美國(미국)측 대표「브라운」이 평양에 와서 古堂(고당)과 會見(회견)한 후 핍박이 심해져서 그해 10월달 면회를 하고는 그후 월남할 때까지 한번도 못 뵈었습니다.
마지막 면회에서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반동의 자식들은 中學校(중학교) 이상 진학을 못하니 눈뜬 장님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자식들을 데리고 남하 해야되겠다"면서 두발의 일부와 손톱을 잘라주었습니다.
南北協商(남북협상)이 열렸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두어달 후에야 들었습니다. 그때 저희들은 平壤(평양)서 약 70리 떨어진 강서郡(군) 반석面(면) 반일里(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 소식에 어두웠지요.
그해 11월부터는 공민증인가가 변동이돼 20리 밖에만 여행하더라도 면인민위원회 위원장(面人民委員會委員長)의 허가가 있어야 되고 또 공민증 뒷면엔 가족상황이 기재된다고 해요. 여기 있으면 꼼짝없이 죽을 것같아 아들(현 朝鮮日報 社會部 (조선일보 사회부) 曺然興(조연흥) 기자)과 딸을 데리고 11월 26일 안내자를 따라 三八선을 넘었습니다.

여기와서 미리 넘어와 있던 아들한테 들으니 金九(김구)선생이 평양으로 떠나기 4, 5 일전 아들을 불러 "이번에 평양에 가면 만나서 모시고 함께 내려오겠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고해요.

6.25 당시 유엔군의 평양 진입 직전 피살

◎“조만식 선생 총살 공공연한 비밀”/“놀라운 용기로 신탁통치 반대/처형소식 듣고 고려호텔서의 「첫 인상」떠올라”
◎총살전 김일성·허가이·방학세 3인대책위 구성/방이 집행지시 김이 사후결재
나(박길용)는 전쟁전 조만식과 박헌영계열로 남한에서 지하공작책임자로 활동하다 검거된 남로당 중앙위원 김삼룡과 이주하(이들 2명은 50년 서울에서 처형당함)를 교환하는 문제가 남북한간에 제기됐으나 타결되지 못한채 전쟁이 터진 것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평북 강계로 후퇴한후 지도부에서 들어보니 인민군이 평양을 후퇴하던 10월18일밤 평양형무소에서 조만식등 5백여명을 총살,이중 조만식등 일부 시체는 대동강변에 웅덩이를 파 가매장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방치해둔채 후퇴했다는 것이다.

강계로 후퇴한 지도부에는 10월19일 평양에 입성한 국군과 유엔군이 이들의 시체를 발견,『북한 공산당들이 반공주의자들을 처참히 살해했다』고 선전한뒤 웅덩이에 다시 파묻었다는 현지 정보가 날아 들어왔다.

그후 북한지도부는 같은해 12월 중공군지원 등으로 평양을 탈환,웅덩이를 다시 파 조만식 등의 시체를 꺼내 『유엔군과 이승만 괴뢰군이 수많은 민족지도급 인사들을 죽이고 달아났다』고 선전,남한측이 저지른 것처럼 꾸몄다.

참고 자료

일제에 비폭력 저항한 ‘한국의 간디’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35∼36쪽 ; 복간본 (국토통일원, 1983) pp.22 ~ 25
  2. 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49
  3.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 위클리 조선
  4.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0
    레오니드 바신,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5. 5.0 5.1 기독교 장로이며 일제하에 조만식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월남하여 남한에서 활동한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의 부친이다.
  6. 신편 한국사 근대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2)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성립과 개편 우리역사넷
  7. 북한연표 :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8.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 : 평양서 민족계열인 조선민주당 창당 주간조선 [1919호] 2006.08.28
  9. 國史館論叢 第54輯 > 해방직후 북한우익의 노선과 활동(이승현) > Ⅱ. 해방과 우익세력의 조직화 > 2. 해방직후 자치조직의 결성
  10.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복간본 (국토통일원, 1983) p.33
  11.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 기자)의 手記(수기)〉 (2) 韩載德(한재덕)) 1962.05.05 동아일보 2면 : 眞正(진정)한 解放(해방) 단지 10日(일) / 不幸(불행)의 씨! 蘇軍進駐(소군진주) /…愛國心(애국심)·自治力誇示(자치력과시)한貴重(귀중)한몇날…
  12. 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49
  13.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 위클리 조선 2011년 11월 21일
  14. 레오니드 바신,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15.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0
  16. 「날조된 英雄(영웅)」金日成(김일성) / 바신, 레오니드 新東亞(신동아) 398호 (1992.11) pp.486-501
  17. 曺晩植(조만식) 제거 - 金日成(김일성) 등장 증언요지 (1) 연합뉴스 1992-10-01
    曺晩植(조만식) 제거 - 金日成(김일성) 등장 증언요지 (2) 연합뉴스 1992-10-01
    曺晩植(조만식) 제거 - 金日成(김일성) 등장 증언요지 (3) <完(완)> 연합뉴스 1992-10-01
  18. 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김구와 김규식의 공동성명) 문서번호 501.BB-Korea/5-648, 발신 JACOBS, 수신 국무장관, 날짜 1948-05-06.
  19. 청소년을 위한 현대사 강좌 (3) 북한의 親日派 청산 : 金日成, 공산당 협력자는 과거 묻지 않고 수용…親日派 인텔리의 국가건설 기여 높이 평가 월간조선 2006년 2월호
  20. 신편 한국사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 (2)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성립과 개편 우리역사넷
  2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홍기주 평정서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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