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平安南道 建國準備委員會, 약칭 평남건준)는 해방 직후 8월 17일 평양에서 조직되었다. 위원장 조만식을 비롯한 20여명의 위원 대다수가 민족진영 인사였으며 공산 즉은 2명에 그쳤다. 건국을 준비한다는 목적이었으나 주로 무질서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치안업무를 담당했다. 8월 26일 평양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소련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요구에 의해 8월 27일 민족진영과 공산진영 각 16명씩으로 하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었다.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조만식은 평양에서 멀지 않은 평안남도 강서군의 자택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이후 평양으로 올라와 8월 17일 종로에 있는 오윤선(吳胤善)의 집 사랑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平安南道 建國準備委員會, 약칭 평남건준)를 결성한다.[1][2][3][4] 건준의 부서와 인사를 발표하던 즉시로 사무소를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5]으로 옮겼다. 평남건준이 조직되는 과정은 당시 조만식과 부친을 돕던 오윤선의 아들인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의 책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1952)에 자세히 나온다.[6]

평남 건준의 구성원은 문헌에 따라 명단에 차이가 있다. 당시 건준 조직 과정에 직접 참여한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의 기억이 정확할 것으로 보이며, 아래와 같다.[1]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1891~1979) 중장을 숙소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모습. 현장에 조선인 대표로 일제하 독립운동 지도자이며 대중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던 조만식(曺晩植)이 입회하였다. 머리에 터번처럼 붕대를 감은 이유는 당시 종기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1]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위원장 : 조만식(曺晩植)
부위원장 : 오윤선(吳胤善)
총무부장 : 이주연(李周淵)[7]
치안부장 : 최능진(崔能鎭)[8]
선전부장 : 한재덕(韓載德)[9]
교육부장 : 홍기주(洪箕疇)[10]
산업부장 : 홍정모(洪貞模)
재정부장 : 박승환(朴承煥)
생활부장 : 이종현(李宗鉉)[11]
지방부장 : 이윤영(李允榮)[12]
외교부장 : 정기수(鄭基秀)

무임소위원 : 김병연(金炳淵), 법조계 한근조(韓根祖)[13], 김익진(金翼鎭)[14], 종교계 김주교(金主敎), 유림 지창규(池昌奎), 여성계 박현숙(朴賢淑)[15], 의료계(刀圭界) 김병서(金秉瑞)[16], 민족주의운동계 김동원(金東元)[17] 등.

오영진에 의하면 김병연(金炳淵)과 이주연(李周淵)은 조만식의 수제자(首弟子) 격으로 김(金)은 민족주의자로, 이(李)는 사회주의운동으로 오래 감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후에 이(李)는 조만식을 배반하고 북로당원이 되었다고 한다.[1] 또 오영진은 조만식에게 젊은 사람도 기용해 줄 것을 건의하고 한재덕(韓載德, 1911~1970)도 자신이 추천하였다고 했다.

건준 선전부장 한재덕(韓載德)은 나중에 김일성에 협력하다 일본 공작원으로 파견되자 1959년 2월 한국으로 귀순했는데, 당시 건준 위원 20여명 중에서 공산주의자는 이주연과 자신 둘 뿐이었다고 하였다.[18] 해방 당시에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기독교세가 강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별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므로 건준에 이들을 많이 넣어줄 필요성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는 남북 분단이 되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시기이고, 평남건준은 정부를 만든다기 보다는 치안유지가 주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19]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17일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북한 지역의 중심지인 평양에서 결성된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는 저명한 우익 지도자인 조만식(曺晩植) 외 오윤선 장리욱, 김필환, 이윤영, 이주연, 김병연, 한근조, 노진설, 손창윤, 지창규 등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는 산하에 총무, 치안, 재정, 생활, 선전, 교섭 등 6부를 설치하였고 전문부원을 설치하였다. 각 부서의 책임자로는 이주연(총무부장) 최능진(치안부장) 박승환(재정부장) 한재덕(선전부장) 홍기주(교육부장) 이종현(생활부장) 등을 임명하였다.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는 이주연 한재덕 이외에는 모두 우익 인사로 구성되었으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공산주의자 16인과 우익인사 16명으로 구성되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되었다.
여기에 제시된 위원 명단은 오영진의 책에 나오는 명단과 다소 차이가 있다. 아마도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민족진영 인사들 명단과 혼선을 빚은 것이 아닌가 한다.
  • 평남 건준은 여운형이 주도한 서울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는 별 관계가 없다. 여운형도 조만식과 아는 사이였지만, 평양을 들락거리며 김일성이나 소련군정 관계자들과 접촉하면서도 연금된 조만식의 석방을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전혀 없다.

평양의 자유는 건준과 함께 마감

많은 평양 출신 월남민들이 평양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린 기간은 8.15 해방 당일부터 8월 26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할 때까지 단 10일간 뿐이었다고 한다. 평남 건준이 간판을 내리면서 평양의 자유도 함께 끝났다. 해방의 기쁨도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

眞正(진정)한 解放(해방) 단지 10日(일)
不幸(불행)의 씨! 蘇軍 進駐(소군 진주)
…愛國心(애국심) 自治力 誇示(자치력 과시)한 貴重(귀중)한 몇날…
이리하여 「건준」이 발족한 이래 평양 (평남이라 해도 좋다.)에서는 모든 일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어 나가고 있었다.

일제 군경(軍警)의 기능이 마비되었어도 오히려 치안은 그전보다 안정되고 모든 사람들은 마음껏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고 자유를 즐기며 오로지 되찾은 조국의 민주창건에 헌신할 의욕에 불타 있었던것이다. 그것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일종의 「무법낙원(無法樂園)」 시대로서 우리민족의 애국의욕과 자치능력을 과시한 귀중한 몇날이었다.
그러나 이 감격과 행복과 자유의 날은 길지 못하였다. 실로 북한에서 진정한 해방의 날은 겨우 十日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소련군이 들어온것이다。八月 二十四·五日을 전후하여 소련군이 진주해오자 모든 것은 뒤집혔고 뜻하지않은 새로운 사태가 이땅에 벌어지게 되었다.
  • 1966년에 간행된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20]에도 다음과 같이 나온다.
[pp.170~171]
평양 천지에서는 八월 二十五·六일 경까지의 해방 十일간이 자유의 황금시대(黃金時代)였다. 그러나 열흘 동안을 「시대」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짧고, 허무한 기간이었다.
....
그러나 평온한 거리에도 때때로 정체불명의 정치적 벽보가 나붙어서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혼란된 정치정세를 의미하는 오보(誤報)였다.
「김일성 장군이 평양에 입성한다」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 내각 명단」
그런 종류의 오보가 흥분된 민심을 자극했다.
8월 15일에서 소련군이 진주하기까지의 10일간은 건국(建國) 꿈에 젖었던 낙원의 나날로서..... 자치(自治)의 뜻을 서른여섯해의 어둠끝에 매만져 본 감격이 채가시기도 전에 그렇게 해서 사라져 갔던 것이다. 고당(고堂)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의 종로에 있는 오윤선의 사랑방에서 열린 유지 간담회에서 조직되기 시작했던 <평안남도 건국 준비위원회>는 그 구성에 있어서도 우익인사가 좌익의 열배를 넘고 있었다. 서울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중앙정부의 수립을 고대했던 그 나날들......평양 거리에는 포플러 가로수가 햇빛을 받으며, 무심히 잎을 떨고 있었다.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1.3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35∼36쪽 ; 복간본 (국토통일원, 1983) pp.22 ~ 25
  2. 신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 (2)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성립과 개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3. 북한연표 :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4.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 : 평양서 민족계열인 조선민주당 창당 주간조선 [1919호] 2006.08.28
  5. 백선행기념관 (평양직할시 大同門洞)
  6. 오영진(吳泳鎭, 1916 ~ 1974),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복간본 (국토통일원, 1983) pp.18~35 : 제2장 평양의 주인들 - 건국준비위원회와 민심 -
  7. 이주연(李周淵, 1903~196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8. 최능진(崔能鎭, 1899 ~ 1951) - 위키백과
  9. 한재덕(韓載德, 1911~1970)
  10. 홍기주(洪箕疇, 18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홍기주(洪箕疇) - 국가기록원
  11. 이종현(李宗鉉, 1904~195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이윤영(李允榮)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이윤영(李允榮, 1890~1975) 위키백과
  13. 한근조(韓根祖, 1895~197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4. 김익진(金翼鎭, 1896 ~ 1970) - 나무위키
  15. 박현숙(朴賢淑, 1896~198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 김병서(金秉瑞, 1893~197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 김동원(金東元)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 김동원(金東元, 1884 ~ 1951) - 위키백과
  18.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 기자)의 手記(수기)〉 (2) 韩載德(한재덕)) 1962.05.05 동아일보 2면 : 眞正(진정)한 解放(해방) 단지 10日(일) / 不幸(불행)의 씨! 蘇軍進駐(소군진주) /…愛國心(애국심)·自治力誇示(자치력과시)한貴重(귀중)한몇날…
  19. 國史館論叢 第54輯 > 해방직후 북한우익의 노선과 활동(이승현) > Ⅱ. 해방과 우익세력의 조직화 > 2. 해방직후 자치조직의 결성
  20.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고당전·평양지간행회(古堂傳·平壤誌刊行會), 평남민보사(平南民報社),서울, 1966 : pp.170~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