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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이북 정당 사회단체 명의의 1946년 1월 2일자 성명서를 보도한 1월 14일자 민성일보(民聲日報) 1면 기사. 이 성명서는 1월 2일 특별 라디오방송으로 내보냈으며 조만식은 이 공동선언문에 서명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직도 사임하고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1]

煽動的 謀略家 排除하고

三相會議를 支持한다
北部 全革命團體 態度表明

(서울發) 한동안 우리 全同胞로 하여금 絶望과 忿怒의 絶頂에 達하게 아엿든 모스크바 三相會議의 朝鮮에 關한 決定도 次次 그 內容이 알리우게 되고 그 進步的 眞意가 깨달리우게되야 이제와서는 「反對」旗빨은 「支持」의 슬-간으로 變하고 「排擊」의 忿呼는 「擁護」의 絶叫속에 사라지게되야 三千萬人民에게는 다시 安堵와 希望이 도라왓다. 그러나 아즉도 所謂政界의 一隅에는 아즉도 影子없는 幽靈인 「託治」를 惡用하야 自家勢力扶植에 汲汲한 政客이 잇고 또 이에 호응하는 無思慮한 一部分子가 잇서 純眞한 民衆을 混乱케 하는 것은 全民族的 統一戰線의 完成이 緊急히 要求되는 이차판에잇서서 참으로 痛憤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全行政權이 우리의 손으로 움즉이고 잇는 西北朝鮮의 모든 革命勢力은 南部에 잇서서의 이러한 惡煽動과 그에 依한 一部 民衆의 混乱을 到底히 默視할 수 없다하야 最近 全革命團體의 ()連名으로 三相會議 決定을 絶對로 支持할 것과 民主主義朝鮮을 建設하기 爲하야 民族的 全力量을 急速히 統一集結하여야 한다는 것을 三千萬 同胞의 앞에 公表하엿다.

[聲明書] 朝鮮에 關한 三相會議 決定에 對하야

우리는 조선(朝鮮)에 관(關)한 소미영(蘇美英) 삼국외상(三國外相) 모스크바 會議決定에 全的으로 同意支持함을 儼然히 聲明한다. 우리는 조선(朝鮮)에 관(關)한 모스크바 會議의 決定이 朝鮮의 獨立으로서 迅速히 復興됨과 民主主義原則에서 朝鮮의 自由로운 發展 따라서 過去三十六年間 日本帝國主義 統治의 殺人的 封鎖로 惹起된 惡毒한 結果를 急速히 淸算하는에 必要한 諸提携條件과 可能性을 保障한다고 認定하는 바이다.
이 모스크바 회의의 決定에 記載된 朝鮮의 民主主義的 臨時政府의 創設은 朝鮮의 完全하고 自由로운 國家的 獨立을 達城함에 잇서 가장 重要한 出發點인 것이다. 民主主義的인 臨時政府의 創設은 現在의 南北朝鮮의 分離狀態를 撤廢할 것이며 全朝鮮地域을 統一할 것이며 따라서 産業 運輸 農業 通信事業 等을 急速히 復興發展시키며 人民生活의 幸福과 向上 또 朝鮮人民의 數千年間의 빛나는 民族文化의 復興과 發展을 爲한 諸必要條件을 創造하는 것이다.
朝鮮에 五年 以內의 期間으로 後援制를 實施한다는데 關한 蘇美英中 四國의 決定을 우리는 獨逸파시즘과 日本 軍國主義를 反對하고 世界人類의 自由와 幸福을 爲한 戰爭에 잇서서 偉大한 勝利를 戰取한 民主主義的인 政治의 發展과 朝鮮의 自由롭고 統一的인 完全한 獨立國家의 確立에 全的으로 援助協力하여주겟다고 世界人民의 앞에 約束한 神聖한 義務의 誠意잇는 具體的인 表現으로 理解한다. 우리는 朝鮮에 대한 決定에 指摘한 바와 같이 四國이 朝鮮에 援助協力할 具體的 方策作成이 將次 建設될 朝鮮民主主義的인 臨時政府와 其他 民主主義的 政黨과 團體의 參加로서 實施될 것이라고 認定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朝鮮에 關한 모스크바 三相會議의 決定은 正義와 誠意의 表現임으로 全朝鮮人民은 맛당히 이 決定을 歡迎하라고 呼訴하는 바이다. 우리는 諸民主主義政黨과 團體 또는 全朝鮮의 모든 眞正한 愛國主義者들과 民主主義者 들을 網羅한 民主主義的 民族統一戰線의 基礎 우에서 朝鮮의 民主主義的 臨時政府가 樹立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朝鮮이 同等權을 갖인 獨立國으로서 全世界民主主義的 自由聯合諸國에 參加될 期限을 可及的 速히 短縮하기 爲하야 참된 民主主義的 自由朝鮮國家建設事業에 自己의 모든 力量과 知能을 集中하고 發揮하도록 努力하여야 한다고 全朝鮮人民에게 呼訴한다.
一九四六年 一月 二日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김일성(金日成)
조선독립동맹 대표 김두봉(金枓奉)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북부조선총국 위원장 문창형(文昌형)
평남 농민위원회 위원장 이관엽(李寬엽)[2]
여성총동맹 위원장 박정애(朴正愛)
민주청년동맹 위원장 방수영(方壽永)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발표된 직후인 1945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벽두까지 서울에서는 좌우익이 모두 신탁통치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3일을 기점으로 좌익들은 돌연 찬탁으로 돌아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좌우 대립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좌익들이 일제히 갑자기 태도를 돌변한 데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다는 주장이 많으나 명백한 근거를 제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1월 2일에 북한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등 정당과 사회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었는데, 구체적인 성명서의 내용은 위와 같다. 아마도 이남 좌익들은 이 성명서를 소련의 의사로 파악하여 1월 3일을 기점으로 태도를 돌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시없이 정당, 사회단체들이 임의로 이런 성명서를 발표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때이다.

북한에서는 이 성명서 발표직후인 1월 5일 소련군이 신탁통치 반대를 굽히지 않는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감금하고, 우파들의 정치활동을 전면금지시켰으며, 2월초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키고 3월에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사실상 분단체제를 만들었다.

p.7의 민성일보(民聲日報) 1946년 1월 14일자 1면

1월 2일에 발표한 위 성명서의 간략한 요지는 것은 1949년 북한 내무성 보안 간부학교가 간행한 『해방 후 조선』이라는 책에도 나온다. 북한서 간행한 『해방후 3년간의 국내외 중요일지(解放後 三年間의 國內外 重要日誌) - 1945.8-1948.9』등에도 성명서 발표 사실이 나오지만, 전문을 수록한 북한 문헌은 알려진 것이 없다.

각주

  1.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7과의 1945년 12월 활동 보고서 발신자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7과 부과장 추코프 / 발신일: 1946.01.12
  2. 이관엽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공산당측 위원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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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21년 9월 5일 (일) 12:204,116 × 5,625 (1.32 MB)JohnDoe (토론 | 기여)북한의_찬탁성명을 보도한 1946-01-14일자 민성일보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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