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여론 조사는 현재 아래 4건이 알려져 있다. 대통령 예상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이승만이 압도적으로 높다.

북한에서는 소련이 주민들의 지지가 높던 조만식을 연금하고 자신들이 88여단에서 5년간 훈련시켜 데려온 앞잡이 김일성을 지도자로 만들었지만, 남한에서는 이러한 국민들의 여론이 그대로 반영되어 이승만이 지도자로 뽑혔다.

선구회(先驅會)의 1945년 10~11월 여론조사

중도파 단체인 선구회(先驅會)가 1945.10.10 ~ 11.09 기간에 정당·언론사·문화단체·학교 등 105개 단체를 대상으로한 해방정국 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에 실려 있다.[1][2] 대통령 후보를 묻는 설문에 이승만은 431표(44%)의 지지를 받아 1위에 올랐다.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1권 3호, 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 pp.45~51.[3]
제1호 여론조사 : 가장 역량이 뛰어나고 양심적인 정치가에 대한 조사

(여론조사 제1호 양식)
우리는 양심적 정치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인물을 찾고자한다. 과거 36년간 자유를 갖지 못한 우리는 인물의 표현방식이 없어 오늘날의 빈곤을 느끼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관하지 않는다. 우리는 건국이라는 대창업이 앞에 있으니 반드시 우리를 지도하여줄 인물도 있다는 의미에서 출발하고 싶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지도자를 찾고자하는 이 취지를 양해하사 찬조하여 주심을 바라는 바이다.
추선(推選)되는 인물의 자격
1. 국제정세에 정통하고
1. 조선사정에 통달하고
1. 가장 양심적
1. 가장 과학적
1. 가장 조직적
1. 가장 정치적으로 포옹할 아량을 가질 것

조사 결과 : 1,957매의 설문지를 배포하고 626매를 회수하여 집계 (설문지 회수율 32%)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 최현배 7%, 김규식 6%, 서재필 5%, 홍남표 5%. 외 23명;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 허용 때문임)

제2호 여론조사
1,957매의 설문지를 배포하고 9백78매를 회수하여 집계 (설문지 회수율 50%)
<정체> (생략)
<내각의 적임자 조사>
대통령 : 이승만 431, 김구 293, 여운형 78, 무기록 176.
내무부장 : 김구 195, 여운형 118, 안재홍 59, 허헌 58, 기타 4인 61, 무기록 85
외무부장 : 여운형 274, 이승만 137, 김규식 58, 김구 55, 기타 2인 36, 무기록 214
재무부장 : 조만식 176, 김성수 98, 정태식 39, 김규식 37, 기타 7명 133, 무기록 279
군무부장 : 김일성 309, 김원봉 98, 이청천 78, 김규식 27, 기타 2인 36, 무기록 226
사법부장 : 허헌 371, 김병로 58, 최동오 52, 이강국 42, 기타 36, 무기록 215
문교부장 : 안재홍 275, 김성수 68, 김창준 58, 기타 6명 114, 무기록 249
경제부장 : 백남운 215, 이관술 98, 이(박)헌영 36, 김규식 34, 기타 7명 145, 무기록 246
교통부장 : 최용달 196, 하필원 58, 안재홍 36, 기타 10명 215, 무기록 229
노동부장 : 박헌영 371, 여운형 38, 기타 212, 무기록 213

<과거 조선 혁명가>
여운형 195명, 이승만 176명, 박헌영 168명, 김구 156명, 허헌 78명, 김일성 72명,

김규식 52명, 백남훈 48명, 최용달 40명, 박문희 19명, 이관술 15명, 최현배 12명.

군무부장 최다 득표 김일성은 누구인가?

여기서 거론되는 군무부장 후보로 최다득표한 김일성(金日成)을 후대의 연구자들은 당시 사정은 따져보지도 않고 북한 김일성으로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조사 기간 중인 10월 14일 평양의 군중집회에서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서기는 했지만 아직 전면에 나설 계제는 아니었고 이후 한동안 이렇다할 공개적인 행보도 없었다. 서울의 신문들은 여론조사 기간이 끝날 때까지도 그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가 11월 중순 이후부터 비로소 김일성에 대한 보도를 하기 시작한다. (서울에서 간행되던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조차 11월 5일에야 북한 김일성에 대해 처음으로 보도했고, 그 이전 다른 신문에는 김일성 장군이 평양에 왔다는 짤막한 단신기사 2~3건만 보인다.) 따라서 여론조사 기간에는 남한 사람들은 평양에 나타난 그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으므로, 위의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 해방직후 풍문으로 나돌던 동진공화국 육군대신 김일성과 같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여론협회에서 1946년 7월 조사 발표한 초대 대통령 예상 후보 지지율 (1946-07-23 동아일보)[4]

해방 직전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 극동의 하바로프스크 인근 88여단에 꼭꼭 숨어서 편하게 지낸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북한 김일성) 대위와 같은 인물이 있는 줄을 아는 사람은 국내에 아무도 없었다. 당시 그는 위 여론 조사에 나올만한 급의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한국여론협회의 1946년 7월 여론조사

한국여론협회(韓國輿論協會)에서 1946년 7월 17일 서울 종로 4가의 3개 장소 통행인 6671명을 상대로 초대 대통령 예상 후보에 대한 지지도를 조사하여 발표했고, 그 결과가 동아일보 1946년 7월 3일자에 보도되었다.[4]

(문) 제1차 대통령은 누구인가?

이승만 박사 1916인 29%
김구 주석 702인 11%
김규식 박사 694인 10%
려운형 씨 689인 10%
박헌영 씨 84인 1%
기타 110인 2%

몰으겟다 2476인 37%

이 여론조사 결과는 미군정청 발행 "G-2 Periodic Report #285 (23 July, 1946)"에도 인용되어 있는데,[5] 우익 지도자의 합계(이승만, 김구, 김규식)가 50%, 좌익지도자의 합계(여운형, 박헌영)가 13%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군정청 홍보처의 1947년 5월 여론조사

미군정청 홍보처는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를 시행했다. 조사결과를 수록한 미군정청 문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아래 북한 소련군정의 1947년 6월 5일자 정보 보고문서에 그 결과가 나와 있다.

군정청 홍보처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남조선 대통령 후보자 문제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조사자 가운데 43.9%가 이승만을, 18.5%가 김규식을, 17.5%가 여운형을, 15.2%가 김구를, 1.3%가 허헌을, 1.3%가 조소앙을, 0.9%가 김원봉을, 0.7%가 김성수를, 0.4%가 박헌영을 거명하였습니다.

이승만 43.9%, 김규식 18.5%, 여운형 17.5%, 김구 15.2%, 허헌 1.3%, 조소앙 1.3%, 김원봉 0.9%, 김성수 0.7%, 박헌영 0.4%
북한 소련군정 총지휘자 스티코프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 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 / [연구과제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북한 소련군정 총지휘자 스티코프가 1947년 6월 5일자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6] 클릭하여 내용을 보면 맨 마지막 페이지에 미군정청의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다.

조선여론협회의 1948년 6월 여론조사

조선여론협회(輿論協會)에서는 1948년 6월 23일 서울시내 5개소에서 『초대대통렁은 누구를 원하오』 하는 설문으로 통행인 2,500 명의 여론을 조사한바 결과는 아래와 같다.

초대대통령(初代大統領)은? 여론협회(輿論協會)서 가두조사(街頭調查) 1948.06.25 조간 2면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대통령 예비 후보 여론조사를 보도한 1948-06-25일자 조선일보 기사.
조선여론협회(輿論協會)에서는 이십삼(二十三)일 서울시내 오(五)개소에서 『초대대통렁은 누구를 원하오』 하는 설문으로 통행인 二천五백명의 여론을 조사한바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한다.
이승만(李承晩) 1,024표(一,〇二四票)
김구(金九) 568표(五六八票)
△서재필(徐載弼) 118표(一一八票)
김규식(金奎植) 89표(八九票)
박헌영(朴憲永) 62표(六二票)
김일성(金日成) 33표(三三票)
△허헌(許憲) 30표(三〇票)
△이청천(李靑天) 26표(二六票)
조봉암(曺奉岩) 18표(一八票)
신익희(申翼熙) 12표(一二票)
△이외 이십삼명(以外 二十三名) 45표(四五票)
△무효(無効) 475표(四七五票)

1947년의 제한적 여론조사

아래의 두 경우는 1947년에 제한적인 조건하에 실시한 여론조사로 전체적인 여론을 반영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1947년 1월 서울 1개 동(洞)에서의 이승만여운형에 대한 모의투표

1947년 1월 이승만 지지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가 서울의 한개 동(洞)을 대상으로 이승만과 여운형 두사람에 대해 모의투표를 실시했다.이승만에 대한 집중적인 선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1천(이승만) 대(對) 9백(여운형)으로 근소한 차이를 나타냈다.

《『美蘇공동위원회(US-USSR Joint Commission) 문서철』 Roll 4》

서울의 1개 동(洞)에서 실시된 이 모의투표는 우파 대표로 이승만, 좌파 대표로 여운형을 내세운 좌우 표대결 양상이므로 순수한 개인에 대한 지지도로 보기는 어려운 것같다. 1개 동(洞)의 모의투표가 서울시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없다. 사전에 이승만에 대한 집중적인 선전을 했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말인지 모르겠다. 실제 선거도 아닌 모의투표하는데 사전 선거운동도 했다는 말인가?

독립촉성부인단(獨立促成婦人團)과 한국애국부인회(韓國愛國婦人會)가 통합하여 독립촉성애국부인회(獨立促成愛國婦人會) 발족

1947년 6월 용산구 서계동 주민 120명 대상 여론조사

특이하게도 좌파 후보들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이고 있는 아래 여론조사는 1947년 6월 5일에 서울 용산구 서계동(西界洞) 주민 120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참여자가 너무 적고, 지역도 제한적이라 전반적 여론을 반영한 것으로 보기 힘들다. 이 조사는 미소공동위원회가 타결되어 남북 단일의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전제하에 한 것이다.

대통령 예비 후보 여론조사를 보도한 1947-06-07일자 독립신보(獨立新報) 2면 4단 기사.
시청 공보과(市廳 公報課)에서는 가까워오는 임정(臨政) 수립을 앞두고 진정한 인민의 여론을 조사하고저 시내 각 동회에서 무기명 투표를 실시하는 중인데 다음은 재미있는 그 일례 - 5일 7시반부터 11시까지는 용산구(龍山區) 서계동(西界洞)민들의 여론조사가 김두호(金斗浩) 병원에서 시공보과(市公報課) 팽중석(彭仲石)씨 주재아래 『남북(南北)통일정부 수립 후에 대통령(大統領)은 누구로 희망하는가』의 무기명 투표에 있어 즉석 개표한 결과 다음과 같은 수자를 얻었다.
허헌(許憲) 51
박헌영(朴憲永) 25
이승만(李承晩) 9
김규식(金奎植) 8
김일성(金日成) 4
김구(金九) 3
김원봉(金元鳳) 2
여운형(呂運亨) 2
백지(白紙) 2
무효(無效) 4
기권 10

기타

여론조사는 아니지만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던 인물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는 많이 있다.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은 비록 유언비어에 불과하지만,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일성을 들고 있었다. 이들 중 이승만, 김구, 여운형은 남한의 해방정국을 주도하였고, 명성만 있고 실체는 불분명한 김일성의 이름을 소련군이 데려온 꼭두각시 진지첸 대위가 사칭하면서 소련군의 도움으로 북한의 실권을 장악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조각명단

여운형박헌영이 주도해서 작성한 명단에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을 이승만으로 하였다.

1944년 미군이 작성한 유력 조선인 명단

1944년에 미군이 만든 참고자료에는 한국이 해방될 경우 가장 유력한 인물로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3~1950),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양주삼(梁柱三, 1879~?) 박사,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6~1945) 등 5인을 들고 있는데, 모두 당시 국내에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 중 조만식은 북한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으나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어 정치활동을 못하다 나중에 김일성에 의해 처형 당했다. 김성수는 대한민국 건국 후 부통령을 지냈고, 윤치호는 일찍 작고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정치활동은 하지 않았다.

<조선 유력인사 5명 美 인물평가 내용> 연합뉴스 2008-08-08 06:42
광복 1년전 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人' 평가표 조선일보 2008.08.09 / 종합 A2 면

귀국길의 북한 김일성 일행이 거론하던 인물

해방 직후 귀국길에 오른 소련군 88여단김일성 일행은 국내 정국에서 김구이승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북한 김일성을 비롯한 88여단 조선인들은 1945년 9월 중순 육로로 입북을 위해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 도착했으나 일제가 기차 터널을 파괴하여 북한으로 가는 철길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역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이기건(李奇建, 1919~ ?)이 그때의 대화에 대해 증언했다.[7][8]

다음은 蘇聯軍(소련군)의 포로취급을 받다 탈출, 歸還途中(귀환도중) 滿州(만주) 목단江驛(강역) 構內(구내)에서 金日成(김일성) 일당의 入北(입북)을 우연히 목격하게된 李奇建(이기건)씨(五三(오삼)·현內外問題研究所長(내외문제연구소장)·예비역준장)의 얘기.
......「하루빈」가는 기차를 타려고 목단江驛前(강역전)을 서성거릴 때입니다. 그때가 아마八月(팔월) 하순경이 아닐까요. 驛構內(역구내)에 소련군장교 三(삼), 四十(사십)명 가량이 몰려있어요. 가까이갔더니 中國(중국)말로 얘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 어투로 봐서 韓國人(한국인)임이 틀림없었읍니다. 나는 中國語(중국어)에 능했지요. 그래서 그중 인상이 좋아보이는 자에게 다가가 우리말로 "당신 朝鮮(조선) 사람 아니요" 하고 반갑게 말을 붙였더니 그 말엔 대꾸를 않고 "당신은 누구요" 하고 우리말로 되물어요. 그래서 "나도 조선사람이요"했더니" 우리가 급히 조선으로 들어가려는데 왜놈들이 기차터널을 폭파해서 못 가고 있소"라고 대답합디다. 당시 목단江(강)에서 韓國(한국)의 청진 회령으로 들어가는 철도가 있었지만 咸鏡道(함경도)에서 가까운 老松嶺(노송령) 터널을 日軍(일군)이 폭파해서 막히는바람에 교통이 두절됐었지요. 그리고는 이어 "지금 朝鮮內部事情(조선내부사정)이 어떻게 됐느냐"고 캐물어요. 그래서 목단江市(강시)에서 "朝鮮(조선)에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 탄생됐다"【注(주) : 해방직후인 八(팔)월하순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라는 벽보내각이 나붙었으나 그 출처는 모른다】는 放送(방송)을 들은 기억이 떠올라 그 말을 전했더니 그 소련軍上尉(군상위) 복장을 한 韓國人(한국인)은 "金九(김구)요, 李承晩(이승만)이요" 하고 물읍디다. 모른다고 했읍니다. 한참있다 그 소련군 장교는 "우리는「블라디보스독」으로 일단 가서 거기서 배타고 朝鮮(조선)으로 들어가겠소"라고 말한 일이 있읍니다. 그런데 그 일당이 누구인지 모르고 헤어졌다가 내가 四七(사칠)년 북한에가서 소위 人民軍(인민군) 창설에 관여하면서 보니까 그때 목단江驛(강역)에서 보았던 그 蘇聯軍上尉(소련군상위)가 바로 北傀(북괴) 괴뢰軍總參謀長(군총참모장)으로 올라앉은 안길(安吉, 1907 ~ 1947)이었읍니다. 安吉(안길)이와 함께 있던 中尉(중위)에서 소좌에 이르는 三十(삼십)여명의 소련군 장교중엔 나중에 北韓(북한)을 틀어쥔 金日成(김일성) 金策(김책) 金一(김일) 崔賢(최현) 林春秋(임춘추)등도 서있었다고 봅니다. 아마도 金日成(김일성) 일당이 韓國(한국)으로 나오고 있던 한 장면이었다고 여깁니다.

김일성 등 88여단의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한자의 중국발음을 러시아어로 표기하여 썼고, 귀국길에 올라서도 자기들끼리 중국말로 대화할 정도로 중국에 동화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랜 외국생활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세가 이승만, 김구 중심으로 돌아가리라고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전 5년간 소련 극동의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 88여단에서 꼭꼭 숨어 지냈던 자신들은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집단에 불과하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기건이 위와 같은 증언을 한 1972년에는 김일성의 해방 후 입북 과정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은 귀국길의 김일성 일행이 실제로 만주 무단장역까지 갔다가 육로가 막혀 블라디보스트크로 가서 소련군함을 타고 원산으로 입북했다는 것이 확인되어 있다. 이기건은 해방 직후 서울로 와서 여운형의 비서관을 했으나,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자 월북하여 인민군 창설에 참여한다. 그러나 북한은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월남하여 국군에 들어갔다.)

미군정이 박헌영 대통령 가능성을 높게 봤다는 주장에 대해

미군정 문서 1947년 3월 21일자 G-2 Periodic Report No.485.[9] 맨 아래 부분에 박헌영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위키백과의 박헌영 항목에는 미군정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봤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가 대통령으로 유력했다는 글들도 인터넷에 많이 보인다. 미군정의 문제의 기록은 1947년 3월 21일자 "G-2 Periodic Report No. 485"이다.[9] 그러나 거기에는 막연한 가능성에 대해 얘기했을 뿐이고,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47년 5월 미군정청이 1,000 명을 대상으로 실제 여론 조사를 한 결과는 위에서 본대로 박헌영에 대한 지지율이 0.4%에 지나지 않는다.

Several enthusiastic reports state, that if a general election were held at this time, PAK, Heun Yung, the fugitive Communist leader, might be elected president.[9]

미군정은 또한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선택한 것이 명백해진 1946년 이른 봄에는 남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의 영향력이 박헌영을 뛰어넘었다고 기록했다.[10][11] 소련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속성상 소련의 의중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 이승만, 左右합작 결렬되자 반공·반탁 南鮮巡行(남선순행·전국 순회 강연)… 지지기반 다져 프리미엄조선 2015.01.30
  2. (다시쓰는한국현대사 13) 누가 최고지도자인가 중앙일보 1995-04-03
  3. 김남식, 이정식, 한홍구, 한국현대사 자료 총서 7권 pp.696~699.
  4. 4.0 4.1 초대 대통령(初代大統領)은 누구? 한국여론협회 조사 발표 (韓國輿論協會調査發表)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5. G-2 Periodic Reports, June and July 1946 / Adjutant General's Office United State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46 / 국립중앙도서관 : p.248
  6. 공동위원회 사업 재개 이후 남․북조선 상황에 대한 정보 1947.06.05 : 스티코프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
  7.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8.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
  9. 9.0 9.1 9.2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1946.9.17-1947.3.31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1988) p.633
  10.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1. 주한미군사 2 > 2부. 4장. 점령 첫 해의 미소관계(American-Soviet Relations, The First Year) > 모스크바 회담과 조선 > 후폭풍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