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曺奉岩, 1899년 10월 29일(음력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

생애

김일성이 조봉암에 1956년 대선자금 보냈다는 구 소련 극비문서 발굴

1956년 대선은 야당인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가 선거운동 기간 중에 급서하여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무소속 조봉암 후보의 대결로 치루어졌다. 이후 조봉암은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고 1959년 사형 당했는데, 이를 두고 사법살인이라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북한과 내통하며[3] 지원을 받았다는 증거들이 당시에도 있었고, 새로 발굴되기도 한다.

“1956년 조봉암 대선 자금 지원했다”…봉인 풀린 구소련 극비문서
김일성 발언이 기록된 구소련 외교문서의 해당 기록은 1968년 북한을 찾은 드미트리 폴랸스키(1917~2001)[4][5][6] 소련 내각 부의장이 김일성에게 남한의 정세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에 김일성은 “우리 당(조선노동당)의 남조선에 대한 노선은 혁명세력 준비 겸 사회민주화다. 그러나 우리는 그쪽에 있는 우리 사람들에게 총선에 우리와 관계 있는 정당은 자기 후보자들을 출마시키지만 어떤 높은 직위를 얻도록 노력하지 말라고 했다. 1958년에 우리는 이에 대한 안 좋은 경험이 있었다. 한 정당의 나쁜 영도 탓에 우리는 큰 상실을 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겠다”는 말로 조봉암과 진보당에 관한 비화를 풀어놓는다.

기록의 요지는 북한이 남한에 ‘진보당’이란 소위 ‘합법 정당’의 설립을 지원했고 1956년 남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봉암 후보 측에 자금을 지원하고 조언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1958년 소위 ‘진보당 사건’으로 진보당이 와해되고, 당수였던 조봉암이 이듬해인 1959년 처형되면서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김일성이 폴랸스키 앞에서 털어놓은 회고다. 김일성은 “그(조봉암)는 우리에게 해당 임무를 달라고 했다. 우리는 (조선노동당) 정치국에서 이 편지를 토론했고, 다른 동지들을 통하여 그(조봉암)에게 연결체가 될 수 있는 합법 정당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고 폴랸스키에 밝히고 있다.

이 기록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조봉암이 북측에 대선 출마 여부를 타진했다는 대목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조봉암은 이승만에 맞서 대선에 출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조봉암)는 우리의 조언을 부탁했다. 우리는 그(조봉암)가 이승만 정권의 장관(농림부 장관)이라면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사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소련 측에 털어놓았다. 김일성은 조봉암 측에 선거자금을 건넸다는 사실도 소련 측에 밝히고 있다. 김일성은 “대선 한두 달 지나서 어쩌면 그 이전에 미국은 우리가 조봉암에게 선거운동을 위해 돈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밝힌다. 다만 김일성은 자금의 구체적 액수는 소련 측에 밝히지 않았다.
[주간조선] “1956년 조봉암 대선 자금 지원했다”…봉인 풀린 구소련 극비문서

아래 기사에는 조봉암과 북한 관련하여 발견된 추가적인 자료에 대한 검토가 나온다.

대법원, 52년만에 조봉암에 무죄판결

사건에 대해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뒤인 52년 후에 내려진 이용훈 대법원의 조봉암에 대한 무죄판결이야 말로 정치재판의 전형이다. 과거의 좌익 사건을 뒤늦게 무죄판결로 뒤집는 일이 다반사로 되었다. 좌익 사범들은 모두 선량하며 무죄이고, 과거 정권이 한 일은 모두 죄악이라는 뒤집기 판결은 다시 바로 잡혀야 한다.

무죄? “노무현 따른 정치재판, 北 거액 받은 간첩사건""종북원조 조봉암이 인천의 상징인물이라니"
제 4 회 이승만포럼 - 이경식 자유언론수호포럼 대표 발표

2011년 대법원의 조봉암 무죄 판결에 대한 비판

대법원이 1959년 조봉암에 사형을 선고할 당시 주심을 맡았던 김갑수(金甲洙) 대법관이 판결에 대한 논란이 일자 1965년에 그러한 판결을 내리게 된 근거를 재차 밝히는 글을 신동아에 발표했다.

통혁당 사건의 김질락(金瓆洛, 1934-1972)이 사형 당하기 전 옥중에서 쓴 수기에도 조봉암의 유죄를 뒷받침하는 진술이 나온다.

김질락[1934-1972] 지음, 어느 지식인의 죽음 : 김질락 옥중 수기 (서울 : 행림출판, 1991, 초판)
김질락의 수기 『주암산(酒岩山)』은 1975~76년 『북한』지에 21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酒岩山: 1회 / 金瓆洛 『북한』 1975년 3월호 통권 제39호 (서울 : 북한연구소, 1975.03), p. 304-319
(最終回) 酒岩山: . 21회 / 金瓆洛 『북한』 1976년 10월호 통권 제58호 (서울 : 북한연구소, 1976.10), p. 262-269


이영훈 교수는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간첩교육까지 받고 와서 전향한 김영환(金永煥, 1963년 ~ )과 함께 계간지 『시대정신』 편집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김영환이 북에서 간첩교육을 받을 당시 북한이 조봉암을 지원하면서 돈을 주기도 한 것을 제대로 감추지 못한 것을 대표적 공작 실패 사례로 거론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는 김질락의 진술과 유사하여, 그의 말이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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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