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약력

1940년(1938년) 경기 양주 출생
1963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졸업
1966~69년 육군사관학교 교관. 육군 대위
1969~72년 문화공보부 문화재전문위원
1972년 일본 유학
1985년 츠쿠바대학 문학박사
경남대학교 계명대학교에서 일본학 교수
1991년부터 일본 중부대학 교수
1995년부터 히로시마 대학 교수. 현재 명예교수
2005년부터 일본 동아대학교 교수 겸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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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가공된 거짓말!

일본에 대해 결코 변하지 않는 한국인의 이율배반적 감정, 객관과 주관적 해석 사이에 갇힌 식민지기의 진실과 왜곡을 재조명함으로써 반일 민족주의의 유사종교적 속성과 그 야만성을 파헤친 문화인류학 보고서!

2020년 현재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태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한국인은 그 이유를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 일본, 일본인들의 문제 때문이라고 습관처럼 말한다. 물론 습관성 거짓말이다. 일본은 1965년 수교협상 과정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천황과 역대 총리, 각료들이 한 공식 사과만 해도 39회*에 이른다. 가장 최근인 2015년 8월 14일 아베 신조 총리는 ‘전후 70년 담화(아베 담화)’를 통해서 과거사를 공식 사죄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한국의 집권 세력을 비롯한 정치권과 언론, 시민단체들이 한목소리로 사과의 진정성을 따지고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식으로 일본의 사과를 폄하하고 조롱, 모독하는 식의 언어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이 또한 습관성이다.

(*다음은 대한민국 외교부가 정리한 일본의 과거사 반성 언급 사례이다.

01. 시나 에쓰사부로 외무: 1965.2.20. 이동원-시나 공동성명
02.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1983.1.11. 공식방한 만찬사
03.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1984.8.4. 한국언론인 방일 회견
04. 히로히토 천황: 1984.9.6. 전두환 대통령 국빈방일 만찬사
05.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1984.9.7. 전 대통령 국빈방일 오찬사
06.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1989.3.30. 중의원 답변
07. 우노 소스케 총리: 1989.6. 중의원 답변
08. 가이후 도시키 총리: 1989.10. 중의원 답변
09. 나카야마 다로 외무: 1990.4.26. 중의원 답변
10. 나카야마 다로 외무: 1990.4.30. 한·일 외무장관회담
11. 아키히토 천황: 1990.5.24. 노태우 대통령 국빈방일 만찬사
12. 가이후 도시키 총리: 1990.5.24. 노 대통령 국빈방일 정상회담
13.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 1992.1.16. 공식방한 만찬사
14.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 1992.1.17. 공식방한 국회 연설
15.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1993.8.10. 기자회견
16.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1993.8.15. 전몰자추도식
17.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1993.8.23. 국회 시정연설
18.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1993.11.6. 경주 실무방문 정상회담
19. 아키히토 천황: 1994.3.24. 김영삼 대통령 국빈방일 만찬사
20. 하타 쓰토무 총리: 1994.5.10. 소신표명 연설
21.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1994.7.18. 소신표명 연설
22.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1994.8.31. 총리 담화
23. 중의원: 1995.6.9. 중의원 부전(不戰) 결의
24.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1995.8.15. 전후 50주년 특별담화
25.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1996.1.22. 국회 개원시 시정연설
26.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1996.6.23. 제주 방문시 정상회담
27. 아키히토 천황: 1998.10.7. 김대중 대통령 국빈방일 만찬사
28. 오부치 게이조 총리: 1998.10.8. 김 대통령 국빈방일 공동선언 등
29.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2001.10.15. 서대문독립공원 방문 연설
30. 마치무라 노부타카 외무: 2004.4.13. 독도특위위원단 방일 접견시
31.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2004.4.22.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연설
32. 아베 신조 총리: 2007.3.11. NHK ‘일요토론’ 위안부 관련 사죄 발언
33. 아베 신조 총리: 2007.3.26. 참의원 예산위, 위안부 관련 사죄 발언
34. 아베 신조 총리: 2007.4.23. 관저출입기자단 인터뷰, 위안부에 사과
35. 아베 신조 총리: 2007.4.27. 미·일정상 공동기자회견, 위안부에 사과
36.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 2009.10.9. 방한 한·일 정상 공동기자회견
37. 오카다 가쓰야 외무: 2010.2.10. 방한 한·일 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
38. 간 나오토 총리: 2010.8.10. 강제병합 100년 내각총리대신 담화
39. 아베 신조 총리: 2015.8.14. 전후 70년 담화(아베 담화), 과거사 사죄)
▒ 출처: 대한민국 외교부

그러나 시계바늘을 20년 전으로 돌려 보자. 1998년 국민의정부 등장과 함께 일본 문화가 전면 개방되고, ‘2002 한일월드컵’에 힘입어 한일 관계는 유례類例없을 정도로 개선됐다.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졌고, 양국민은 상호 방문과 관광을 즐기며 자유주의 국가들 간의 친선과 우호의 이상적인 모델을 만들어 갔다.

문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한국의 집권 세력과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이었다. 한국의 대일 관계는 정권에 따라서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한국의 집권 세력에게 일본은 언제나 정략의 유용한 소재거리다. 또한 일제 식민지 시대는 정치권과 언론, 지식인 집단에 의해 시간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민족적 원한과 피해의식으로 증폭되어 왔다. 언론은 일제 식민지기에 친일 부역의 혐의가 짙을수록 반일감정을 부추겼다. 단적인 예로 언론이 독도 영유권 문제와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비난하면 정치권은 그에 즉각 응답하며 대중의 반일감정을 선동하는 식이다.

조선총독부 정책은 국리민복을 지향했다

이 책은 한국인의 반일감정의 기원과 그 위선과 허구, 모순과 기만적 속성을 문화인류학의 관점에서 분석,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인의 반일감정과 식민지기 일제의 역할에 대한 사실 관계가 얼마나 왜곡되었고, 반일감정은 어떻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오도誤導, 왜곡하고 지배해 왔는가를 이야기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일관되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탈과 학정의 일제시대가 아니란 사실이다.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총독부를 내세워 식민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한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해서 한국의 법, 제도, 관습, 종교, 문화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고고학, 인류학, 민속학 등 많은 연구자들과 행정가들이 식민지 한국의 토지나 재산 등에 대한 법률과 풍속, 관습 등을 조사 연구했다. 식민지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의 식민지학은 서구 열강의 그것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 정책들은 철저하게 일반 대중, 민중을 대상으로 한다. 토지 측량과 정비 사업이 그랬고, 도로와 하천 정비를 통한 생활환경의 개선, 개인과 부락의 위생환경을 개선해서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홍보와 지원 정책을 적극 펼쳤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 저자가 2020년 증보 개정판에 수록한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부터의 볍씨 품종 개량과 보급 사업이다. 경술합병으로 한국을 실질 통치하게 된 조선총독부는 본국 정부로부터 막대한 예산과 인력, 기술을 끌어들여 다방면에 걸쳐 개혁과 혁신을 서두른다. 그 중에서도 중점 부문이 볍씨 품종 개량 사업이었다. 기존 조선의 벼 품종은 대가 가늘고 키가 커서 풍수해에 취약한데가 이삭당 달린 알곡 숫자마저 이후 개량, 도입 품종들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병충해와 한발, 냉해에도 약했다. 그렇게 생산된 쌀의 절대 몫마저도 양반 지주들의 소작료로 주고 나면, 농민들 몫은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했다.

근대(近代, modern)를 향해 열린 창으로서의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는 토지 측량과 경지 정리를 통해서 농지 소유관계를 명확히 했다. 그와 아울러 일본에서 한국의 기후 조건과 토양에 맞는 우량 벼 품종을 선별해서 들여와 시험재배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품종 개량에도 적극적이었다. 지주들뿐 아니라 소작인들까지 처음에는 우려하며 거부했으나 소작료 감면 등의 인센티브 등에 힘입어 재배한 결과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렇게 되자 전국 각지의 지주와 농민들이 우량 품종 보급에 앞장서며 1910년대 중반을 넘어설 때쯤에는 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쌀 증산의 결과는 조선에서의 수요를 넘어 산지보다 비싼 값에 식민 본국인 일본에 수출길이 열리게 했다. 농업생산물로 자본을 획득, 축적하게 되고 투자를 통한 산업 기반을 조성하게 되는, 한반도 사람들로서는 역사상 유례없는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일제시대는 그렇게 한국인들에게 근대를 향해 열린 창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과 일본인의 귀환으로 근대를 향해 열린 창이 한순간 닫히게 되는 상황을 저자는 거문도의 사례를 통해서 보여 준다.

일제가 물러갔지만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식민지의 잔재였고,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의 사회 시스템과 인프라는 조선총독부의 유산이었다. 그 잔재와 유산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가난, 정치적 혼란의 시기를 지나 군사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에 의해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 국민교육헌장과 가정의례준칙 등으로 계승됐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고도성장과 산업화의 토대는 일제시대, 즉 조선총독부 통치기에 태어나 성장하고 근대 교육과 문명의 세례를 받은 세대의 경험과 근대인으로서의 자질이 그 바탕이었음을 조명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이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시민의식으로 현재의 일본과 마주해야!

그렇다면 한국인의 반일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식민지 시기가 마무리 부정적이라고 해도 그런 중에도 사람은 살아가기 마련이다. 통치하러 온 조선총독부 관헌이나 식민으로 온 보통 일본인들이나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한국인들과 부대끼며 살았고, 조선의 구습을 타파해야 하는 이면에서는 한국인들의 관습에 자신들을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생활인들이기도 했다. 이 말은 곧 일제시대라는 시공간 안에서의 한국인들에게 반일감정이 자리 잡을 특별한 이유가 없었고, 있더라도 어디까지나 한국인들끼리의 문제였을 가능성이 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반일감정이란 것이 있었다면 그 시기에 일본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익을 취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갈등, 경쟁에서 밀려난 자들의 미움과 원한의 감정이 그 단초라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식민지 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해방 후 시간이 흐르고 식민지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져 갈수록 극심해지는 한국인의 반일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종교적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다른 일제 식민지였던 대만과 구 만주국,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영국의 식민지였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 같은 나라들을 비교문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반일감정이 여타의 식민지 경험 국가 또는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갖고 있음을 밝힌다.

그것은 반일 민족주의로 규정되며, 반일 민족주의는 하나의 신앙체계로써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라는 뜻이다. 일제가 조선의 맥을 끊기 위해 풍수상 주요 암봉岩峰과 혈맥마다 철주(쇠말뚝)를 박았다는 주장이 단적이다. 이성적 논리 체계가 아니라 무속(샤머니즘)이자 우상 숭배와 금기의 토테미즘이다. 무속과 우상 숭배는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해 냈고, 금기와 터부는 끝내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폭파, 해체라는 폭력적 결과로 이어졌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반세기를 훨씬 넘어 일제 식민지기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 의해 더욱 극렬해지고 있는 반일감정의 파고이다. 저자는 일본에 대한 우리 안의 콤플렉스를 넘어 개방된 태도로써 현재와 미래의 일본과 마주할 것을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권하고 있다.

이 책의 구성과 내용 소개

이 책은 ‘들어가는 말’을 포함해서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들어가는 말을 통해서는 식민과 식민지 일반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그 경험이 삶과 의식을 지배하는 후기 식민주의, 즉 포스트 콜로니얼 현상에 대해 한국 사회의 ‘친일’과 ‘반일’의 대립, 그 중에서도 자기 존재감의 부각을 위한 기재로써의 반일감정과 반일 민족주의에 대해 다룬다.

1장 ‘항일과 반일’에서는 한국 사회에서의 일제 잔재 청산이 갖는 함의의 이중성과 기만적 속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제 식민지기에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모두가 민족 배신자라는 프레임으로 ‘친일파’를 가공하며, 그 친일파들이 왜 나쁜 존재들인지를 식민지기의 어두운 면과 잔학상을 전시하는 한편으로 그 시대의 상징물을 파괴, 청산하는 이미지 조작을 통해 부각시키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4장 ‘전후 처리’의 폭력성, 야만성과 아울러 소위 적산가옥을 차지하기 위한 부도덕하고 비열한 처신의 인간 군상들이다. 일본인들이 조성하고 가꾼 좋은 것, 남기고 갈 수밖에 없는 귀한 것들을 차지하기 위한 아귀다툼 속에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의 강도가 생대적 평가 기준으로 작용했다. 일본인과 친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친일파 낙인을 감수하며 입을 닫고 살아야 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대통령 박정희의 친일 정책’에 대해 다루고 있는 5장에서는 박정희의 구미 생가 방문을 통해서 그가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의 자연지리적, 풍수적 속설의 상관관계부터 살펴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식민지기 박정희의 아이덴티티는 한일합병 후 태어난 세대의 독립적 가치관과 미래지향적 세계관의 내면화라는 점에 저자는 초점을 맞춘다. 즉, 박정희를 비롯한 한일합병 후 태어난 세대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일본이 자기 나라였고,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치고 그것을 실현해 줄 나라 또한 일본이었다는 것이다.

일제 청산 과정의 폭력에 대해 다루고 있는 6장은 식민지기 경험이 바탕이 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언어폭력의 속성,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인의 의식과 정서를 지배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특히 풍수로 날조된 반일감정은 구 조선총독부(해방 후 중앙청에 이어 국립박물관으로 사용) 건물의 폭파, 해체를 통해서 그 폭력의 반달리즘 속성마저 여과 없이 드러냈음을 신랄하게 짚고 있다.

제7장 ‘기독교의 반일’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수용과 일제 식민지기 기독교의 위상과 역할을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통한 해방을 주창함으로써 한국인에게 ‘민족주의’ 관념이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제8장 ‘민족주의와 반일’에서는 한국의 민속을 일제가 단절시켰다는 주장과 해방 전의 민속학을 식민지주의로 비판하는 한국학계의 무지와 반지성적 행태를 비판한다. 전통과 관습조차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갈라 좋은 것은 민족적 우월함으로 포장하고, 나쁜 것은 일제 식민지 탓으로 떠넘기는 유아적 태도까지도 반일 민족주의자들의 존재 방식이다. ‘학문 연구에서 민족주의가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민족주의가 객관적 방법론이 아니라 한韓민족 문화를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게 보거나 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한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주의를 명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준거로 삼고 반일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p. 237) 그 연장선상에서 반일은 내 편, 친일은 일본 편이라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는 한국 사회의 미성숙 정도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식민지를 겪은 국가와 사회를 비교 분석하고 있는 9장에서는 대만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구 만주국 같은 국가나 사회의 식민지기를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한국인의 나이브naive한 역사의식을 비판한다.

반일감정, 반일 민족주의야말로 매국 행위

‘죽 끓듯 하는 반일 여론을 선동해서 등에 업고 대일 외교를 펼치는 것만큼 어리석고 국제 관계에서 위험천만한 것도 없다. 반일감정을 앞세운 문재인 정부의 대일 외교는 그 자체로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유세계와의 지속적 협력 관계마저 난관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pp.309~310)는 충고는 저자의 진심 어린 조국애의 메시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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