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철
兪成哲
유성철.png
기본 정보
국적
출생
1917년 10월
출생지
소련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사망
1995년
형제
유성훈(兪成勳)
배우자
김용옥(金龍玉)

유성철(兪成哲, 1917년 10월 ~ 1995년 1월 10일)은 소련의 고려인 출신으로 제88독립저격여단(88여단)에서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으로 일하다 해방 후 북한으로 와서 인민군 작전국장 등을 지냈다. 김일성의 소련파 숙청 때 쫓겨나 소련으로 돌아 갔다.

생애

유성철(兪成哲, 1917-1995)은 소련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지방)의 포시예트 항구에서 1917년 10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즈베크 공화국 타시켄트시의 니사미 사범대학에서 러시아어 교원 강습을 마치고 얀기율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소련군 정찰학교를 마치고,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88여단에 배속되어 정찰임무를 수행하였다. 여단내 제1대대장 김일성 아래에서 통역관으로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입북하였다.

6.25 때는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있으면서 소련군이 작성한 작전명령서를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1] 친구였던 정상진(鄭尙進, 1918~2013)의 증언에 의하면 6.25 첫 발포 명령을 그가 내렸다고 한다.[2][3] 김일성의 소련파 숙청 당시 1958년 사상검토 때 모든 직책에서 쫓겨나 1959년 소련으로 돌아 갔다.[4][5]

한소 수교 직후인 1990년 10월 방한하여 6.25 남침 등에 대한 여러가지 중요한 증언들을 남겼다.[6][7][8][9][10][11]

6.25 때 미군이 얻은 유성철의 신상 정보

아래는 6.25 때 미군이 인민군 포로를 신문하여 얻은 유성철의 신상 정보이다.[12]

김일성 가짜 증언

1945년 10월 14일 평양집회에서의 가짜 김일성 소동에 대한 증언

유성철은 또한 해방 후 평양에 와서 결혼한 부인 김용옥(金龍玉)으로부터 나이 60 가량의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할 당시의 김일성의 언행과 10월 14일 김일성이 처음 대중앞에 나서던 집회 현장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8]

이 국수집에서 김일성(金日成)은 우리를 모아 놓고 몇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는 먼저 "내일이 조선의 명절인 추석이지만 과음하지 말고 조용히 대기해야 한다"며"혹시 북한 인민들이 김일성(金日成)에 대해 물으면 우리는 선발대라서 金日成을 보지 못했다고 대답하라"고 말했다.

그는 또 金日成의 나이등 신상에 관한 것은 일체 모른다고 대답할 것과 金日成은 나중에 들어 온다고 말할 것도 아울러 당부했다.

이런 지시가 내려지자 일행 가운데서는"잡소리하고 있네"라며 金을 비웃기도 했다.

나는 당시 이 지시 내용의 의미를 잘 몰랐으나 金은 자신을 전설적인 인물 金日成장군으로 꾸며 볼 야심으로 이런 일을 하게 됐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나는 88여단시절 金일성이 사단장의 준말인 사장(師長)을 붙여 「김사장(金師長)」또는 「동지」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은 들어 봤어도 그를 金日成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후에 평양태생의 처(金龍玉)와 결혼한 뒤 알게된 바로는 해방전 북한에서는"金日成장군이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일군(日軍)에 붙잡혔다"는 등의 신문보도가 있었으며 해방 당시 주민들은 「金」장군이 환갑에 가까운 지긋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해 10월 14일 평양시내에서 소련군 사령부가 주최한 金日成환영 군중 집회가 열렸을 때 군중들은 金의 젊은 나이에 실망한 나머지 "저건 가짜 金日成이다", "로스께 앞잡이 물러가라"는 등의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주]: 사장(師長)은 사단장의 준말이 아니고 동북항일연군에서 인원이 300~400명 가량인 대대 규모 부대 단위 사(師)의 지휘관이다.

1990년 유성철의 방한 당시 한국일보에 실린 그의 증언에도 1945년 10월 14일의 김일성이 처음 대중앞에 나선 집회에서의 일에 대해 아래와 같이 나온다.

  •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62~63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6 (연세대 최평길 교수와 공동집필) 한국일보 1990.11.07
당시 평양의 대동강변에는 비밀리에 기생집이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동화는 이 평양기생이나 해방후 잔류한 일본 여성들을 구해 김일성과 소련 장성들간의 술자리에 시중을 들게했다.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에 힘입어 김일성은 북한지도자로 낙점을 받게됐으며 이같은 사실을 공식화한 계기가 45년 10월14일 지금의 모란봉경기장인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개선 환영대회」였다.

○열광적 인기에 놀라

하오 1시 양복차림에 가슴에는 소련군 훈장을 단 김일성이 연단에 나타나자 군중들은 운동장이 떠나갈듯이 「김일성 장군만세」를 외치며 열광했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10분간 대중연설을 했는데 사실 그 연설문은 25군 정치부에서 작성하고 시인 전동혁(소련파로 군정사령부의 조선어신문 발행에 관계)이 번역한 것이었다. 이날 집회에 참석했던 나는 김일성의 인기를 보고 내심 크게 놀랐으며 그를 다시한번 쳐다보게 됐다.

그러나 김일성의 연설이 계속되면서 군중들 사이에 「가짜 김일성」이란 쑤군거림이 들렸고 심지어 「로스께 앞잡이」라고 욕설을 하며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군중들의 동요는 내가 지난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연단의 김일성이 자신들이 생각해 왔던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워낙 오래전부터 「김일성 장군」의 전설적 투쟁을 들어왔기 때문에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정도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은 몸도 지금처럼 건장하지 않았고 짧은머리 탓인지 33세의 실제나이보다도 더욱 어려보이는 새파란 청년모습이었다. 나는 내옆에 있던 한 여인이 『저거 아이아냐. 무슨 김일성 장군이 저래』라고 말하는 것도 직접 들었다.

○“저거 아이아냐” 실망

김일성에 이어 조만식선생이 머리에 흰수건을 동여매고 흰두루마기 한복차림으로 등단,40여분간에 걸쳐 연설을 했다. 김일성에 실망한 탓인지 이 연설에 대한 반응도 냉랭했다.

소련군 25군사령부는 대회를 마친 뒤 자체적으로 여론을 수집해본 결과 가짜 김일성이라는 부정적 반응이 많자 적잖이 당황했다.

이에 따라 그뒤 소련군은 무엇보다 김일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선전활동에 치중했으며 나는 이것이 김일성 우상화의 뿌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번은 소련군이 김일성의 고향이라는 만경대에 북한지도급 인사들을 초청,연회를 베풀고 김일성이 진짜임을 역설한 적도 있었으나 참석자들은 선뜻 수긍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김일성은 소련군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북한의 실권자가 된다.


유성철(兪成哲)은 또 1991년 11월 타시켄트로 자신을 방문한 하기와라 료(萩原遼, 1937~2017)에게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 대중앞에 나서던 날의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한국논단, 1995), pp.40~41.
앞에서 말한 유성철(兪成哲)씨도 이때 회장에 있었다. 그는 평양에 온 뒤 헌병사령부에 배속되었다. 당일에는 회장의 경비를 겸하여 세론(世論)수집이라고 부르는 인심의 파악 일을 명 받았었다.
"나는 회장을 돌아다니면서 민중의 반응을 탐색했습니다만, 김일성의 연설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가짜다' '러스키의 앞잡이다' '저건 애송이가 아니냐. 뭐가 김일성 장군이란 말이냐'라고 저마다 중얼거렸다. 곧바로 회장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너무나 젊고 그의 조선말이 서툴렀기 때문이었죠.”

김일성 장군으로 탈 바꿈한 김성주 청년은 소련군 사령부가 마련한 짧은 연설 원고를 더듬더듬 조선말로 읽어 내려갔다.

그는 일곱살 때 한방의를 하고 있던 부친의 사업 사정으로 고향인 평안남도 대동군 만경대를 떠나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국인 학교에 다녔고 33세에 귀국할 때까지 거의 중국말로 생활해 왔다. 그 때문에 그의 조선말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형편 없었다고 당시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은 적지않다.

북한 김일성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아니라는 증언

1990년 유성철의 방한 당시 한국일보는 그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연재기사를 싣고, 책으로도 간행했다. 여기에는 그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의 주역이 맞다고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13][14].

한가지 김일성의 자질을 엿볼 수 있었던 일은 빨치산 출신들에게 들은 보천보전투에 있어서 김일성의 활약상이다.

김일성은 항일빨치산을 하던 37년 6월4일 최현을 비롯한 2백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국경마을 보천보를 습격,일경 수명을 살해하고 지주들에게 식량과 자금을 거둔 뒤 퇴각했다.

이 단발적 전투는 현재 북한에서 수십 수백배 과장돼 김일성의 가장 화려한 항일투쟁경력으로 선전되고 있다고 한다.

이때 퇴각하던 김일성은 산으로 달아나지 않고 일본 군복차림으로 일본군가를 부르면서 당당히 대로로 행진토록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 역사서적은 당시 김일성이 주민들을 모아 놓고 애국적 연설을 했다고 자랑하는데 6ㆍ25전쟁중 우연히 나와 만나 보천보 얘기를 했던 최현은 『야,도망가기도 바빴는데 무슨 대중연설을 해』라고 내뱉었다.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와 역사왜곡은 내가 북한에 있을때 이미 시작됐지만 지금처럼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한 후 소련으로 돌아간 유성철은 한국의 신문들이 자신의 진의를 잘못 전달했다고 하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1991년 6월 재소(在蘇) 교민신문 고려일보에 연재한 회고록 「피바다의 비화」에서 보천보 습격사건의 주역이었던 김일성(金日成)은 당시 전사하고, 그 이후 별다른 항일 공적이 없던 북한 김성주가 김일성 이름을 쓰며 자신이 한 일로 만들어 공을 가로챘다고 하였다.[1][4][15][16][17]

「피바다의 비화」 :[4]

p.8 : 1937년 여름에는 김일성이 지휘하는 유격대가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의 파출소를 습격한 대담한 전투를 해냈다. 만일의 경우를 우려하여 30명은 보천보의 반대편 강안에 배치하고 자기는 12명의 유격대원들을 인솔하여 떼목을 타고 보천보를 향하였다.

p.9 : 습격하고보니 이곳에는 일군이 없고 다만 경찰 몇명 뿐이었다. 경찰 2명을 죽이고 다섯자루의 아라사끼 보총과 양식을 로획하여 가지고 새벽이 되자 다시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무사히 건넜다. 이제는 산으로 올라야 발견되지 않고 행군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대장은 “산으로 가면 얼마 가지도 못하고 발견될 수 있소. 우리는 신작로를 따라 일본군가를 부르며 피하는 것이 상책이요”하고 그대로 행동했다.

일군은 처음에는 속임에 빠졌으나 산지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기에 행군하는 유격대의 뒤를 따라 추격했다. 유격대는 피할 수 없어서 부대를 산재시켜 조우전을 하게 되었다. 이 조우전에서 김일성은 영웅답게 전사하였고, 10여명의 전사들도 잃었다. 남은 40여명은 다시 산속으로 피하여 생명을 구할 수가 있었다. 반일 운동이 확대되자 일제는 유격운동을 진압하는 한편 내부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일본 군벌의 간첩 단체인 민생단까지 조작해 냈던 것이다. 김성주의 아우 김철주는 일군의 포위망에 들어 포로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하여 성주는 한동안 정신적 타격을 받은 사실도 있다. 김성주에게는 이 사실이 몹시 수치스러운 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성주는 유격활동은 하였으나 큰 공을 세운 일은 없었다.

김일성의 전사후 성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의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일성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되기 이전 88여단에서 그의 동료 빨치산들과 같이 근무하면서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므로 이 증언은 사실로 볼 수 있고,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전사했다는 수많은 당시 기록과도 부합한다. 그는 김일성이 입북하면서 동료 빨치산들에게 자신의 전력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고 했다.[1] 이 사안에 대한 유성철의 진의는 한국일보가 정리한 인터뷰 기사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쓴 회고록 「피바다의 비화」에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성철의 부인 김용옥의 가짜 김일성에 대한 증언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2006년 소련 '고려인들의 입북 후 활동 및 삶의 모습'에 대한 증언을 구술자료로 녹취해왔는데, 당시 유성철의 부인 김용옥도 역시 북한 김일성은 가짜이며,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죽었다고 증언하였다.[18] 찾아간 면담자는 김일성이 진짜가 맞는 것으로 믿고 그렇게 증언하도록 유도하려 했으나 그녀는 자신이 아는 사실대로 말했다. 김용옥은 평양 태생으로 원래 소련의 고려인은 아니나, 남편을 따라 소련으로 가서 살았다.

6.25에 대한 증언

유성철은 소련군 고문단이 러시아어로 작성한 6.25 남침 작전계획 원안을 자신이 한국어로 번역했다고 말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兪成哲)씨는 「진실과 증언(김철범 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소련은 이어 그해 5월 북한에 파견한 군사고문단을 전쟁경험이 풍부한 인물로 전원교체했다. 수석 군사고문은 스미로노프 소장에서 獨蘇전쟁의 영웅 바실리예프 중장으로 바뀌었다. 이 소련 군사고문단이 직접 초안을 작성한 것이다』[19]

참고 자료

유성철의 소련식 이름은 ‘유가이 성철’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에 복무하면서 김일성의 88독립보병여단 시절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성철은 소련 당국에 국적포기 신청서와 함께 제출한 자기소개서에 “대일전쟁 발발(소련의 대일선전포고)과 함께 김일성 그루빠(팀)와 같이 평양에 도착했다”며 “1946년까지 경무사령부에서 번역원으로 근무했다”고 적고 있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소련 지도부는 유성철을 북조선 수령 후보자 중 한 명으로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유성철의 형 유성훈이 김일성대 아닌 인민경제대학 총장을 지낸 걸로 나옴.
1990년 10월 유성철의 방한 당시 한국일보에 연재된 것임.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i.e. 쓰여진]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의회도서관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서울: 경인문화사, 2006.
  •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 1990년 10월 방한 당시 한국일보에 총 19회 연재 (검색해서 전회 볼 수 있음)
6.25 당시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씨 부부 서울에 한국일보 1990.11.01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 1 한국일보 1990.11.01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2 한국일보 1990.11.02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3 한국일보 1990.11.03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 4 한국일보 1990.11.04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5 한국일보 1990.11.06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6 한국일보 1990.11.07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 7 한국일보 1990.11.08
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8 한국일보 1990.11.09
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9 한국일보 1990.11.11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0 한국일보 1990.11.13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1 한국일보 1990.11.14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2 한국일보 1990.11.16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3 한국일보 1990.11.17
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4 한국일보 1990.11.18
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5 한국일보 1990.11.20
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6 한국일보 1990.11.25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7 한국일보 1990.11.27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8 한국일보 1990.11.29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9·끝 한국일보 1990.11.30
베일속 「김일성과거」 파헤쳐/「유성철 나의 증언」연재를 끝내고 한국일보 1990.12.01
◎소 거주 전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 폭로/“진짜 김일성 장군”은 보천보전투서 전사/영웅적 항일전공 가로채려 이름 도용

가족관계

  • 형 : 유성훈(兪成勳) - 전 김일성대 총장.[20] 인민경제대학 총장을 지냈다는 기록도 있음.[21]
  • 배우자 : 김용옥(金龍玉)[18]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金日成(김일성)이 抗日戰功(항일전공) 가로챘다"前(전)북한군 작전국장 蘇(소)서 폭로 경향신문 1991.06.12. 4면 ;
    金日成이 보천보전투 전공 가로채 / 前북한군 작전국장 회고록서 폭로 연합뉴스 1991.06.11 ;
  2. 고려인으로 北문화선정성 차관 지낸 정상진씨 증언 조선일보 2009.06.20
  3. “김일성, 스탈린에 ‘3개월내 통일 가능’ 설득 전쟁 승인” : 정상진씨 증언 dailynk 2008-06-24
  4. 4.0 4.1 4.2 유성철(兪成哲, 1917-1995, Yu, Song-ch'ol)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 미의회도서관 /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i.e. 쓰여진]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의회도서관
  5.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서울: 경인문화사, 2006.
  6. =전 北韓軍작전국장 兪成哲씨 回顧 ①=" 蘇聯이 6.25남침계획 작성했다" 연합뉴스 1990-11-02
  7. =전 北韓軍작전국장 兪成哲씨 回顧②=特輯.中共,스탈린의견듣고 贊反속 참전결정 연합뉴스 1990-11-03
  8. 8.0 8.1 =전北韓軍작전국장 兪成哲씨 回顧 ③= 金日成,북한에 오자 傳說的인물부각 안간힘 연합뉴스 1990-11-05
  9. =전 北韓軍작전국장 兪成哲씨 回顧(完)= 金日成,사상검토라는 이름으로 숙청단행 연합뉴스 1990-11-06
  10.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11. 재소 한인 유성철씨 우리나라 방문, 당시 증언 (김현주) MBC 1990/10/31
  12. RG 319,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Intelligence Document File Publication 1947-62, Entry # 1004H (UD), ID 950054 : ATIS-FEC Interrogation Report, Box No. 334, 950054 KG 1121, etc. (NARA문서,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pp.122~123
  13.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 :4 한국일보 1990.11.04
  14.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44~45
  15. <美의회도서관, 고려인 80여명 수기집 디지털화 보관> 연합뉴스 2007-02-08
  16. "金日成(김일성)이 抗日戰功(항일전공) 가로챘다"前(전)북한군 작전국장 蘇(소)서 폭로 1991.06.12 경향신문 4면
    횡설수설 1991.06.12 동아일보 1면
  17. “김일성,항일전공 가로챘다”/전 북한군중장 유성철씨 회고록서 폭로 중앙일보 1991.06.11
  18. 18.0 18.1 김용옥 (고려인들의 입북 후 활동 및 삶의 모습 / 2006년도 수집 구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19. [분석] 李鍾奭의 이념 성향 : 金日成·金正日을 따뜻하게 포용 ; 인권유린, 대량 餓死에 침묵 월간조선 2005년 7월호
  20. 유성훈(兪成勳) 전 김일성대 총장 행장 : 미의회도서관
  21. ‘8월 종파사건’ 때 사라진 ‘反김일성파’ 신상기록 발굴 주간조선 2021.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