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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철
최근 수정 : 2019년 8월 20일 (화) 07:47

유성철(兪成哲, 1917년 10월 ~ 1995년 1월 10일)은 소련의 고려인 출신으로 제88독립저격여단(88여단)에서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으로 일하다 해방 후 북한으로 와서 인민군 작전국장 등을 지냈다. 김일성의 소련파 숙청 때 쫓겨나 소련으로 돌아 갔다.

생애

유성철(兪成哲, 1917-1995)은 소련 연해주(프리모르스키 지방)의 포시예트 항구에서 1917년 10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즈베크 공화국 타시켄트시의 니사미 사범대학에서 러시아어 교원 강습을 마치고 얀기율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소련군 정찰학교를 마치고,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88여단에 배속되어 정찰임무를 수행하였다. 여단내 제1대대장 김일성 아래에서 통역관으로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입북하였다.

6.25 때는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있으면서 소련군이 작성한 작전명령서를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1] 친구였던 정상진(鄭尙進, 1918~2013)의 증언에 의하면 6.25 첫 발포 명령을 그가 내렸다고 한다.[2][3] 김일성의 소련파 숙청 당시 1958년 사상검토 때 모든 직책에서 쫓겨나 1959년 소련으로 돌아 갔다.[4][5]

한소 수교 직후인 1990년 10월 방한하여 6.25 남침 등에 대한 여러가지 중요한 증언들을 남겼다.[6][7][8][9][10][11]

김일성 가짜 증언

1990년 유성철의 방한 당시 한국일보는 그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연재기사를 싣고, 책으로도 간행했다. 여기에는 그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의 주역이 맞다고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12][13].

한가지 김일성의 자질을 엿볼 수 있었던 일은 빨치산 출신들에게 들은 보천보전투에 있어서 김일성의 활약상이다.

김일성은 항일빨치산을 하던 37년 6월4일 최현을 비롯한 2백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국경마을 보천보를 습격,일경 수명을 살해하고 지주들에게 식량과 자금을 거둔 뒤 퇴각했다.

이 단발적 전투는 현재 북한에서 수십 수백배 과장돼 김일성의 가장 화려한 항일투쟁경력으로 선전되고 있다고 한다.

이때 퇴각하던 김일성은 산으로 달아나지 않고 일본 군복차림으로 일본군가를 부르면서 당당히 대로로 행진토록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 역사서적은 당시 김일성이 주민들을 모아 놓고 애국적 연설을 했다고 자랑하는데 6ㆍ25전쟁중 우연히 나와 만나 보천보 얘기를 했던 최현은 『야,도망가기도 바빴는데 무슨 대중연설을 해』라고 내뱉었다.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와 역사왜곡은 내가 북한에 있을때 이미 시작됐지만 지금처럼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한 후 소련으로 돌아간 유성철은 한국의 신문들이 자신의 진의를 잘못 전달했다고 하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1991년 6월 재소(在蘇) 교민신문 고려일보에 연재한 회고록 「피바다의 비화」에서 보천보 습격사건의 주역이었던 김일성(金日成)은 당시 전사하고, 그 이후 별다른 항일 공적이 없던 북한 김성주가 김일성 이름을 쓰며 자신이 한 일로 만들어 공을 가로챘다고 하였다.[1][4][14][15]

「피바다의 비화」 :[4]

p.8 : 1937년 여름에는 김일성이 지휘하는 유격대가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의 파출소를 습격한 대담한 전투를 해냈다. 만일의 경우를 우려하여 30명은 보천보의 반대편 강안에 배치하고 자기는 12명의 유격대원들을 인솔하여 떼목을 타고 보천보를 향하였다.

p.9 : 습격하고보니 이곳에는 일군이 없고 다만 경찰 몇명 뿐이었다. 경찰 2명을 죽이고 다섯자루의 아라사끼 보총과 양식을 로획하여 가지고 새벽이 되자 다시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무사히 건넜다. 이제는 산으로 올라야 발견되지 않고 행군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대장은 “산으로 가면 얼마 가지도 못하고 발견될 수 있소. 우리는 신작로를 따라 일본군가를 부르며 피하는 것이 상책이요”하고 그대로 행동했다.

일군은 처음에는 속임에 빠졌으나 산지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기에 행군하는 유격대의 뒤를 따라 추격했다. 유격대는 피할 수 없어서 부대를 산재시켜 조우전을 하게 되었다. 이 조우전에서 김일성은 영웅답게 전사하였고, 10여명의 전사들도 잃었다. 남은 40여명은 다시 산속으로 피하여 생명을 구할 수가 있었다. 반일 운동이 확대되자 일제는 유격운동을 진압하는 한편 내부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일본 군벌의 간첩 단체인 민생단까지 조작해 냈던 것이다. 김성주의 아우 김철주는 일군의 포위망에 들어 포로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하여 성주는 한동안 정신적 타격을 받은 사실도 있다. 김성주에게는 이 사실이 몹시 수치스러운 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성주는 유격활동은 하였으나 큰 공을 세운 일은 없었다.

김일성의 전사후 성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의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일성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되기 이전에 그의 동료 빨치산들과 같이 근무하면서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므로 이 증언은 사실로 볼 수 있고,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전사했다는 수많은 당시 기록과도 부합한다. 그는 김일성이 입북하면서 동료 빨치산들에게 자신의 전력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고 했다.[1] 이 사안에 대한 유성철의 진의는 한국일보가 정리한 인터뷰 기사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쓴 회고록 「피바다의 비화」에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성철은 또한 평양에 와서 결혼한 부인 김용옥(金龍玉)으로부터 나이 60 가량의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할 당시의 김일성의 언행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8]

이 국수집에서 김일성(金日成)은 우리를 모아 놓고 몇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는 먼저 "내일이 조선의 명절인 추석이지만 과음하지 말고 조용히 대기해야 한다"며"혹시 북한 인민들이 김일성(金日成)에 대해 물으면 우리는 선발대라서 金日成을 보지 못했다고 대답하라"고 말했다.

그는 또 金日成의 나이등 신상에 관한 것은 일체 모른다고 대답할 것과 金日成은 나중에 들어 온다고 말할 것도 아울러 당부했다.

이런 지시가 내려지자 일행 가운데서는"잡소리하고 있네"라며 金을 비웃기도 했다.

나는 당시 이 지시 내용의 의미를 잘 몰랐으나 金은 자신을 전설적인 인물 金日成장군으로 꾸며 볼 야심으로 이런 일을 하게 됐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나는 88여단시절 金일성이 사단장의 준말인 사장(師長)을 붙여 「김사장(金師長)」또는 「동지」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은 들어 봤어도 그를 金日成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후에 평양태생의 처(金龍玉)와 결혼한 뒤 알게된 바로는 해방전 북한에서는"金日成장군이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일군(日軍)에 붙잡혔다"는 등의 신문보도가 있었으며 해방 당시 주민들은 「金」장군이 환갑에 가까운 지긋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해 10월14일 평양시내에서 소련군 사령부가 주최한 金日成환영 군중 집회가 열렸을 때 군중들은 金의 젊은 나이에 실망한 나머지 "저건 가짜 金日成이다", "로스께 앞잡이 물러가라"는 등의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주]: 사장(師長)은 사단장의 준말이 아니고 동북항일연군에서 중대 규모 부대 단위인 사(師)의 지휘관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2006년 소련 '고려인들의 입북 후 활동 및 삶의 모습'에 대한 증언을 구술자료로 녹취해왔는데, 당시 유성철의 부인 김용옥도 역시 북한 김일성은 가짜이며,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죽었다고 증언하였다.[16] 찾아간 면담자는 김일성이 진짜가 맞는 것으로 믿고 그렇게 증언하도록 유도하려 했으나 그녀는 자신이 아는 사실대로 말했다. 김용옥은 평양 태생으로 원래 고려인은 아니나, 남편을 따라 소련으로 가서 살았다.

가족관계

  • 형 : 유성훈(兪成勳) - 전 김일성대 총장[17]
  • 배우자 : 김용옥(金龍玉)[16]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金日成(김일성)이 抗日戰功(항일전공) 가로챘다"前(전)북한군 작전국장 蘇(소)서 폭로 경향신문 1991.06.12. 4면 ;
    金日成이 보천보전투 전공 가로채 / 前북한군 작전국장 회고록서 폭로 연합뉴스 1991.06.11 ;
  2. 고려인으로 北문화선정성 차관 지낸 정상진씨 증언 조선일보 2009.06.20
  3. “김일성, 스탈린에 ‘3개월내 통일 가능’ 설득 전쟁 승인” : 정상진씨 증언 dailynk 2008-06-24
  4. 4.0 4.1 4.2 유성철(兪成哲, 1917-1995)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 미의회도서관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5.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서울: 경인문화사, 2006.
  6. =전 北韓軍작전국장 兪成哲씨 回顧 ①=" 蘇聯이 6.25남침계획 작성했다" 연합뉴스 1990-11-02
  7. =전 北韓軍작전국장 兪成哲씨 回顧②=特輯.中共,스탈린의견듣고 贊反속 참전결정 연합뉴스 1990-11-03
  8. 8.0 8.1 =전北韓軍작전국장 兪成哲씨 回顧 ③= 金日成,북한에 오자 傳說的인물부각 안간힘 연합뉴스 1990-11-05
  9. =전 北韓軍작전국장 兪成哲씨 回顧(完)= 金日成,사상검토라는 이름으로 숙청단행 연합뉴스 1990-11-06
  10.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11. 재소 한인 유성철씨 우리나라 방문, 당시 증언 (김현주) MBC 1990/10/31
  12.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  :4 한국일보 1990.11.04
  13.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44~45
  14. <美의회도서관, 고려인 80여명 수기집 디지털화 보관> 연합뉴스 2007-02-08
  15. "金日成(김일성)이 抗日戰功(항일전공) 가로챘다"前(전)북한군 작전국장 蘇(소)서 폭로 1991.06.12 경향신문 4면
    횡설수설 1991.06.12 동아일보 1면
  16. 16.0 16.1 고려인들의 입북 후 활동 및 삶의 모습 / 2006년도 수집 구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17. 유성훈(兪成勳) 전 김일성대 총장 행장 : 미의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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