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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匪首 金日成의 生長記)》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 즉 지금의 장춘(長春)에서 간행되던 한국어 신문 만선일보(滿鮮日報)[1]에 1940년 4월 5회에 걸쳐 연재된 북한 김일성의 출생부터 당시까지의 전기이다. 비수(匪首)는 비적(匪賊, bandit)의 두목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김일성은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 중일 때이며,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6개월 뒤인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했다.

1940년 4월 만선일보(滿鮮日報)에 5회에 걸쳐 연재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전문 이미지 pdf 파일.

이 연재기사는 일제시대에 북한 김일성의 전력을 기록한 유일한 문헌으로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국립중앙도서관의 고신문 DB에서 검색해서 열람할 수 있다. 종전에는 신문 이미지 상태가 극히 나빠서 판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으나 최근 선명한 이미지로 교체하여 올려놓아 전문을 완전히 판독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래에 연재 5회 전문을 소개한다.

이 연재기사는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때의 것으로 후대의 김일성 진위논란이나 이념논란으로부터도 자유로우며, 그의 당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그가 전사한 유명한 간도(間島)의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물려받아 썼기 때문에(襲名) 그를 간도의 유명한 비수로 잘못아는 사람이 많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이름을 따라 쓴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어쨌던 그가 죽은 유명한 남의 이름을 물려받아 썼기 때문에 일제시대 당시에도 그를 유명한 죽은 사람과 동일인으로 잘못아는 사람이 많았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또 그는 일제가 귀순공작에 투입한 왕년의 상관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의 권유에 따라 귀순을 결심하고 협상 중에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02.23)에게 보고가 들어가 그의 제지로 귀순에 실패했다고 하였다. 이종락은 1940년 1월 중순 양정우에게 총살당하며, 양정우도 그 한달 뒤인 1940년 2월 23일 전사한다. 이 기사가 실리기 직전의 일들이다.

인명 및 사건 해설

아래 연재 기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인명과 사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김일성 항목의 출생부터 만주의 동북항일연군 시절까지 행적도 참고해서 같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종락은 원래 조선혁명군의 9중대장이었으나, 공산주의자라서 지도부와 잦은 마찰을 일으키다 1930년 8월 추종자들을 데리고 국민부를 탈퇴하여 다른 군사조직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를 창설한다. 역시 국민부 소속이었던 김일성도 상관 이종락을 따라 나와 그의 휘하 조직원이 되어 국민부 및 조선혁명군과 대립한다. 하지만 이종락이 1931년 1월 검거되어 투옥되면서 그의 조직도 점차 쇠퇴하여 소멸하고, 김일성도 한동안 방황하다 중공당 산하 유격대에 투신하게 된다.

1회 : 1940년 4월 16일

  1. 기사에 나오는 김일성의 조부모의 이름 김봉현(金鳳賢)과 리반석(李盤石)은 김보현(金輔鉉, 1871~1955)리보익(李寶益, 1876~1959)의 오기이다. 모친 강반석(康盤石, 1892~1932)의 이름과 혼란을 일으킨 듯하다. 3남 형권(亨權)과 차남 형록(亨祿)의 형제 순서도 잘못 적었다.[9]
  2. 김일성의 출신지를 평남 대동군 고평면 금남리(平南 大同郡 古平面 今南里)라 했는데, 금남리(今南里) 아닌 남리(南里)가 맞다.
  3. 영문중학교(毓文中學校)는 육문중학교(毓文中學校)의 오기이다.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一)

중학시대(中學時代)부터 적화(赤化)
○○운동(運動)의 父를 따라 백두산록(白頭山麓)을 전전(轉々)

만주사변이 발발된 이래로 통화성(通化省) 방면에 근거를 두고 다년간 각지 부락을 습격하야 주민의 금품과 식량을 략탈하야 통화성 오지 방면 주민을 괴롭게 하던 양정우(楊靖宇) 김일성(金日成) 최현(崔賢) 등 비적은 통화성 방면에서 일만군경(日滿軍警)의 철저한 토벌을 피하야 무송현(撫松縣) 방면으로부터 작년 四月 七일 밤에 길림성 화전현 대포시하(吉林省 樺甸縣 大蒲柴河) 조선인 집단 부락을 습격하고 다수한 금품을 략탈한 다음 동八일에 남하하야 간도성내 안도현(間島省內 安圖縣)으로 들어서 이래 금품 식량 의복 등을 약탈하야 오지 방면의 농민들을 괴롭게 하고 잇던 중 지난달에 이 여러 부대를 총지휘하고 잇던 총사령 양정우는 통화성 관하에 잠복중 정신대(挺身隊)인 최주봉부대(崔周奉部隊) ○○○명의 급격한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다함은 기보한 바와 갓거니와 목하 백두산(白頭山) 후록에 근거를 두고 간도성내 각현 오지에 흩어져 있는 비적부대를 총지휘하고 잇는 김일성(金日成)(二九)의 가정과 그의 과거에 대하야 여러가지 풍설도 만헛스나 아직까지 여기에 대하야 자세한 것을 아지 못하야 누구나 궁금하여하는 문제이니만큼 기자도 수년동안 게속하야 각방면으로 조사중이던바 근일에야 비로소 자세한 것을 알게 되엿는데 대략 다음과 갓다.

김일성의 조부(祖父) 김봉현(金鳳賢)(七○)과 조모(祖母) 리반석(李盤石)(六七)의 사이에는 장남 형직(亨稷) 차남 형권(亨權) 三남 형록(亨祿)외 一녀를 두엇는데 김일성의 조부모는 지금도 생존중으로 三남 형록을 다리고 평남 대동군 고평면 금남리(平南 大同郡 古平面 今南里)에서 농업을 하야 근근이 호구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김일성의 부친인 형직은 十三세 때에 평양(平壤)서 ○○소학교를 졸업한 다음 숭실중학(崇實中學)에서 공부하다가 대정 八년 만세사건에 가담하야 중도 퇴학하고 랴(당?)국의 검거망을 피하야 만주로 건너와서 통화성 림강현(通化省 臨江縣)에 거주하며 약종상(藥種商)을 경영하야 생업을 계속하여가며 一방으로는 동지를 규합하야 ○○단을 조직하야 맹렬한 활동을 계속하엿섯다.

그러는 동안은 형직의 아우인 형권(亨權)도 형을 따라 림강현에 들어와서 형과 협력활동하엿고 모친 리반석도 아들을 따라 드러왔다. 그들의 운동이 표면화됨에따라서 중화민국 관헌들은 검거하랴하므로 이곳을 떠나서 장백현 팔도구(長白縣 八道溝)로 옴기여 약종상을 경영하며 또 그와가튼 운동을 계속하엿든 것입니다. 얼마되지 안어 이곳 관헌의 주목이 심하여지며 또다시 무송현 왈랑진(撫松縣 曰朗鎭)에 옴기여 역시 운동을 게속하다가 몸이 극도로 쇠약하야 병그대로 사망하엿다.

김일성의 본명은 성주(誠柱)이엇는데 十三세 때에 무송에서 소학교를 졸업하엿다. 그 학교는 선만인(조선인과 만주인) 공학하는 학교이엇슴으로 만주인 부호 가정의 학생을 친하여 가지고 돈을 어더서는 학용품 가튼 것을 사서 학생들에게 난호어(나누어) 주는 것을 일삼아 왔고 공부에 그리 열심하는 편은 아니엇스나 두뇌가 명석하고 총명하야 한 번 스처본 교과서라거나 책은 그 후에 력력히 기억하얏슴으로 졸업 당시의 성적도 우수하엿다 한다.
그 소학교를 졸업하고는 길림(吉林)으로 와서 여러 중학교에 전교하다가 나중에는 영문중학교(毓文中學校)에 통학하엿는데 四학년 때에 담임교원이 중국공산당의 책임자이엇슴으로 그의 선전으로 말미아마 적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일성이 삼촌 형권은 자기의 어머니인 리반석과 가티 안도현 소사하(安圖縣 小沙河)로 이주하야 동지인 박단석(朴旦石) 최효일(崔孝日) 성근학(成槿學)외 一명과 가티 권총을 휴대하고 함북지방에 나갓다가 검거되어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서 성근학 외一명은 도주하고 김형권은 병사하엿스며 최효일은 사형을 밧고 박단석은 만기 출옥하야 현재 모지에서 공작대에 종사하는 중이다. (間島支社 S記者)

2회 : 1940년 4월 18일

  1.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은 1936년 옥사했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김일성이 중학교 졸업하기 2개월전 옥사했다는 것은 잘못이다.
  2. 김일성은 1931년까지도 이종락 부하로 있었고,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세화군) 등에 속해 있었으므로 18세 때인 1929년에 안도현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연대가 부정확하다. (참고 : 김일성#반국민부 활동기 (1929~1932))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二)

비명(匪名)『김일성(金日成)』을 습명(襲名)
중학(中學)을 중퇴(中退)하고 18세(十八歲)부터 녹림생활(綠林生活)

김일성이가 전기한 바와 갓치 중학교 四학년 재학중에 남방으로부터 파견된 담임교원으로부터 공산주의 선전을 밧아 어려서부터 사상적 훈련을 밧엇고 졸업기를 압흐로 二개월을 남겨두고 그의 三촌 형권이가 서대문 감옥에서 사망하게 됨에 더욱 급격히 사상이 과격해져서 영문학교에서 중도퇴학을하고는 자기의 조모인 리반석(李盤石)이가 거주하고 잇는 안도현을 거처 남만으로 가서 당시 정의부(正義府) 계통인 남만청총(南滿靑總) 간부이었던 리종락(李宗洛), 박근원(朴根源), 신영근(申榮根), 박단석(朴且石) 등과 손을 맞잡고 결의형제가 되여 활동하고 잇엇스니 일성의 나이는 그때 十七세 이엇섯다. 이때부터 김일성의 활동 무대는 남만이엿스나 조모가 간도성 안도(安圖)현에 거주하고 잇엇던 관계로 자조 간도에도 왕래하게 되여 간도성의 사정을 다소 알게 되엿섯다.

이때에는 간도성에 비수(匪首)로 유명한 김일성이 이섯는데 만주사변 직전에 토벌대에게 사살을 당하자 김일성은 김성주(金誠柱)를 곳치여 만주사변이 발발되엇던 그때 즉 十八세 때부터 김일성(金日成)으로 일흠을 곳치엇슴으로 근일에 와서도 간도에 잇던 김일성으로 오해하는 이가 만흔 것이엇섯다.
이때에 정의부의 세력은 점차 쇠미하여젓고 남만과 간도 방면에 종종 출몰하던 대도회(大刀會)의 세력이 점점 팽창하여지자 대도회로부터 정의부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하여감에 따라서 남만청총(南滿靑總)도 자최를 감추지 안을 수 업는 상태에 빠지게 됨에 김일성이는 十八세 되던 해 즉 지금부터 十一년 전 十二월 卄八(28)일에 안도현으로 도라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정의부에서는 대도회에서 다소 신임하는 양세봉(梁瑞鳳)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야 련락을 취하도록 하엿스나 역시 여의치 못하엿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압흐로의 의지 관철을 하기 위하야는 의리에 버서난 행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각오하엿엇다. 그리하야 안도현을 떠나서 그때 정의부 계통으로 심룡준(沈龍俊) 외 二十여명의 무장대가 통화성 류하현 삼원포(通化省 柳河縣 三源浦)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습격하고 무기(武器)를 압수하얏스니 이것이 김일성으로서는 처음 무력행동을 개시한 것이엿다.
그 후로는 계속적으로 기회를 엿보아 류하(柳河), 무송(撫松), 장백(長白), 몽강(濛江) 등 각 현에 출몰하야 만군 부대를 습격하고 금품과 무기를 략탈하는 一방 때때로 북선과 평북 방면의 국경 지대에까지 침입하야 민심을 소란케 하엿고 점점 一파가 증가되여 十一년이 지난 금일에 이르러서는 그 비단의 수효가 상당히 다수에 달하게 된 것인데 그가 十二개년동안이나 이와가튼 록림생활(綠林生活)을 게속하는 동안에 자기의 현재 생활과 장래를 연구하고 또한 취상한바도 업슬수 업고 원래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니만큼 아모리 록림중에서 세상과는 거리가 떠러저잇는 생활을 하고 잇다할 지라도 세계대세의 전환을 전혀 살피지 못하엿슬것은 안이다.

그리하야 작년 녀름에는 자기가 남만청총 당시에 갓치 일하고 잇던 리종락(李宗洛) 신영근(申榮根) 박단석(朴旦石) 三인을 당국에서는 멀리 북경(北京) 으로부터 마지하엿고 평북 대동군 고평면 금남리(平北 大同郡 古平面 今南里)로부터 김의 조모인 리반석(李盤石)을 마지하야 귀순공작을 개시하엿던 것이엿다. 제一회 공작으로 박단석군의 간곡한 서신을 김에게 보내엇던바 이와갓튼 서신을 밧은 김일성은 글시가 틀님업는 듯하기는 하나 필적으로서만은 도저히 인증하기 어려우니 사진을 보내라는 회답이 잇섯다. 그리하야 박군의 사진을 보내엿든바 이 사진을 밧은 김은 곳 맛나자는 회답이 이섯다.

그리하야 박군이 김의 전초진인 七단을 경유하야 十여년만에 반가히 맛나게 되엿섯다. 이에 의하야 김은 박의 권유대로 귀순하기로 결정은 하엿다. 김일성이가 안도에서 그 조모를 조선으로 나가라고 강권하며 평북으로 나가게 한 것도 七년전 일이니 七년만에 조모인 리씨의 반가운 안부도 듯게된 것이엿다. (續)

3회 : 1940년 4월 21일

  1. 김일성이 할머니에게 전달해 달라고 내놓은 『카메라』는 시가 2천원(時價二千圓)으로 상당한 고가이며, 연전(年前)에 경도선(京圖線,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과 도문(圖們)을 연결하는 철로) 열차(列車)를 습격할 때(襲擊時) 약탈(掠奪)한 것이라 했다. 이는 그가 항일투사라기보다 비적(匪賊, bandit)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三)

일단(一旦)은 귀순(歸順)을 결심(決心)
집요(執拗)한 양정우(楊靖宇)의 특무대(特務隊)에 일신(一身)을 도피(逃避)

나이가 七十에 갓가운 조모가 밤낫으로 자기의 신변을 렴려하야 멀니 조선에서 통화(通化)로 왓다는 것과 과거에 잇서서 남만청총(南滿靑總) 당시에 생사를 갓치 하여가며 일하고 의형제(義兄弟)까지 매젓던 옛날의 동지들이 자기를 진심으로 위하야 멀니 북지(北支)에서 통화로 차자와서 간곡히 귀순을 권고함에는 감격하지 안을 수 업섯고 자기자신의 과거와 현재, 현재와 장내, 그리고 세계 대세의 전환을 한번 생각하야보지 안을 수 업섯고 이와 갓흔 것을 생각할 때 심금은 더욱 갑갑하여지지 안을 수 업섯다.

김일성은 여러 가지로 생각한 남아지 十一년 동안의 록림생활(綠林生活)을 청산하려는 결심은 혼자 마음으로 정하여섯다. 그런데 자기 혼자 귀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현재 자기가 통솔하고 잇는 부하 가운데는 귀순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 태반이니 귀순한다면 그들은 무장지졸(無將之卒)이 되여서 갈바를 모를뿐 안이라 압흐로 엇더한 행동을 할난지도 모를 것이다.

그뿐안이라 혼자몸으로 귀순한다는 것은 아모리 생각하여보아도 아모 의의가 업는 것이다. 그리하야 엇더한 방법으로던지 부하 전부를 인솔하고 하산(下山)하는 수 밧게 다른 방법이 업다는 것을 깨달엇다. 그리하야 박단석과 하루밤을 갓치 지내고는 그 잇흔날 박을 향하야「나는 귀순하기로 결심은 하얏으나 내 자신이 혼자만 갈 수 업스니 박군이 도라가서 의형인 리종락(李宗洛)을 들여보내주게. 리형이 들어와야 나와 협력하야 내부 공작을 속히 식히여 실현하게 될 것일세. 자! 이것만이 나의 전재산이니 군이 이것을 갓다가 우리 조모에게 맛겨주게」 이와갓치 말하고는 『카메라』(時價二千圓) (年前 京圖線 列車 襲擊時 掠奪한 것) 한 개와 인삼(人蔘) 록용(鹿茸)등으로 박에게 주엇다. 그리하야 박단석은 통화(通化)로 도라나오고 리종락(李宗洛)은 산으로 들어가게 되어섯다.

리종락은 김일성부대의 제七단이 주둔한 곳에 가서 김에게 편지를 보내엇더니 천만 뜻밧게 그 회답에는 다음과 갓은 문구가 씨여 이섯다. 「내가 갑작이 볼일이 잇서 一주일 동안 다른 지방에 갓다오게 되엇스므로 맛날 수 업스니 그리 아시오」이와갓흔 회답을 받은 리종락은 그 편지가 사실인 줄만 밋엇고 그 리면에 말못할 사정이 잠재하여 잇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엿다. 그런데 김일성이가 사실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어 속히 들어오라고 부탁까지 하엿던 리종락에게 그와갓흔 회답으로 면회를 거절하엿던 것은 안이엇다. 리종락이가 들어온다면 리의 신변은 물론이고 자기의 신변에까지 위해(危害)가 밋칠 기세가 보이므로 그대로 도라나가라는 의미엿스나 리종락은 그것을 깨닷지 못하여섯던 것이다.

전회에서 말한바와 갓치 그때에 동변도(東邊道)나 삼강성(三江省) 방면까지 흣터저잇는 비단(匪團)을 총지휘하고잇던 속칭 양사령(楊司令)인 양정우(楊靖宇) 특무대(特務隊)를 편성하야 각지에 배치하고 각지 비단의 一동一정을 감시 보고하고 잇섯는데 그때 김일성을 귀순식히려는 공작대는 지리적 편의를 따라 김일성 부대의 제七단을 경유하야 자조 왕내하게되고 김일성과 직접 면담하는 것을 알게된 七단에서는 귀순에 대한 협의를 하고 잇는 것으로 취측하고 그때 맛참 순회중인 양정우의 특무대에 이와갓흔 사실을 보고하엿고 그 특무대에서는 곳 양정우에게 보고하엿다.

이와갓흔 급보를 밧은 양정우는 이때까지 제一 신임하여오던 김일성이가 귀순련락을 하는듯하다는 정보를 밧고는 놀라지 안을 수 업섯다. 제一 신임할 수 이섯고 제一 강대한 세력을 가진 김일성이가 만일 귀순한다면 이에서 더 큰 타격은 업슬 것으로 생각하고 멀리 삼강성(三江省)과 길림성(吉林省) 경계선(境界線)에 주둔하고 잇다가 五六백명의 직속 부하를 인솔하고 김일성이가 주둔하고 잇는 통화성 관내로 온다는 정보가 김일성에게 들어온 까닭이엇다. (續)

4회 : 1940년 4월 23일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四)

양정우(楊靖宇)의 포위협위(包圍脅威)로 귀순공작(歸順工作)은 수포화(水泡化)
공작원(工作員)의 하나인 이종락(李宗洛)을 사살(射殺)!

압해 말한 바와 갓흔 리면 사정을 알지 못하는 리종락은 김일성이는 이미 귀순하기로 결정되엿으니 이곳까지 들어왓다 아무 수확도 업시 도라나갈 수도 업스니 우선 그의 부하인 七단(團)부터 귀순식혀보리라는 결심을 하고는 다음과 갓치 세계대세의 전환을 드러서 선전하기 시작하엿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는 나를 혹 아실이도 계실 것입니다만은 나는 과거에는 만주에 잇서서 유명한 공산당이엿습니다. 여러분과 갓치 온갓 곤란을 격거가면서 록림생활을 계속한대야 압흐로 하등 서광이 빗처질 것 업고 리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업는 것이 현하의 대세입니다. 그리하야 이미 귀순한지 수년이 되는데 지금은 여러분과 갓흔 록림객(綠林客)을 귀순식히여 다갓치 협력하야써 만주국의 락토건설에 협력하는 동시에 흥아운동(興亞運動)의 선구자가 되려는 사명을 가진 귀순공작대원(歸順工作隊員)입니다. 이번에 이곳까지 차자들어오게 된 것도 이와갓흔 사명을 다하려는데 잇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귀순만 하신다면 정부에서는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여러분을 환영하기로 되여 잇습니다. 하루라도 속히 나와 갓치 평지에 나가서 귀순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하십시다.」
이와갓흔 권유를 밧은 제七단에서는 리종락에게 대하야는 하등의 찬동여부를 나타내지 안코 이 사실을 곳 양정우에게 보고하엿섯다. 이때에 양정우는 부하를 거나리고 김일성의 전초병이 주둔하고 잇는 七, 八, 九, 十단 본부를 지나 중앙에 잇는 김일성의 직속부대의 밧게 진을치고는 김을 면회하고 사실을 질문하엿는데 김일성은 다음과 갓치 변명하엿다.
「사령도 잘 아는 바이지만은 나의 심리가 갑작이 그와갓치 변하엿슬 리가 잇습니까. 최근에 공작대가 자조 드러오기는해요. 공작대의 말도 참고로 드를 필요도 업지안음으로 만나는 때도 잇섯서요. 전일에도 나와갓치 일하던 박단석(朴旦石)이가 맛나자기에 들어오게하야 하로밤 자고가게한 일이 잇섯는데 또 멧칠전에는 그 당시에 갓치 일하엿고 결의형제이던 리종락(李宗洛)이가 七단에 와서 맛나겟다는 편지가 왓스나 너무 자조 맛날 필요도 업슴으로 내가 다른 지방으로 가게되엿으니 맛날 수 업다고 면회를 거절하엿지요. 그런 오해는 절대 하시지마러요.」 이와갓흔 변명을 들은 양정우는 원래 김일성이를 신임하여오던 처지인지라 그대로 밋지 안을 수 업섯다.

그리하야 七단에 명령하야 리종락을 불러드려 경과를 취조하기 시작되엿다. 이때에 리종락의 혼자 생각에 나는 물론 이것으로 최후를 맛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임의 이 소굴을 버서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지만은 김일성이까지 죽일 필요는 업다는 것을 절실히 늣기고 다음과 가티 말하엿다.

「내가 말하기 전에 당신의 부하들이 보고로써 내가 七단에서 귀순공작에 대한 선전을 한 것은 잘 아실것입니다. 당신도 전혀 세계대세를 모르실 것은 안이지만 이와갓흔 록림생활을 지속하면서 보는 세계대세와 평지에서 보는 세계대세의 전환은 현저한 차이가 잇슨즉 그것만은 충분히 고려하실 필요가 잇다고 나는 단언하고십습니다. 아시는 바와 갓치 나도 과거에는 만주에서 일흠이 업지안흔 공산당이엇고 다년간 여러분과 갓흔 록림생활도 하엿는이만큼 진심으로 귀순을 권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생사를 헤아리진안코 여러분의 장래를 위하야 이곳까지 차자들어온 것입니다.」

이와갓튼 一장의 변명과 선전을 들은 양정우는 한참동안 눈을감고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당신의 이야기도 그럴듯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직은 귀순할 시기는 안이니 어느 시기까지 나와갓치 일하면 엇덧습니까?」
이와 갓치 말한다.

리종락의 생각에도 이와갓치 된 이상은 별다른 방책이 업슴으로 그리하자고 쾌히 승낙하엿다. 그리하야 一개월동안이나 리종락은 양정우와 한방에서 자고 이야기하며 식사까지 갓치하엿다. 一개월을 지낸 후 어느날 양정우는 김일성을 차자가서 기관총(機關銃) 두 자루를 주며 누가 군에게 대한 험담을 한 대야 그것을 신용하지 안을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더욱 일을 만히하라 하고 그날로 떠나서 근거지로 도라가던 도중에서 리종락을 총살하엿스므로 귀순공작은 수포로 도라가고 말엇다. (續)

5회 : 1940년 4월 24일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五)

하로 속(速)히 마음을 돌려 귀순(歸順)하기만 고대(苦待)!
고향(故鄕)에 있는 가족(家族)들의 애타는 심원(心願)

허다한 공작비를 들여가며 여러해 동안 계속하여 오던 김일성 비수의 귀순 공작은 압서 말한바와 갓치 양정우의 위협으로 말미아마 다시 수포로 도라가게 되엇다. 그리하야 김의 조모 리반석도 락심하고 고향으로 도라갓다.
기자는 얼마전에 어느 지방 출장 중에 우연히 모 친우의 안내로 김일성의 조모인 리반석을 맛나서 다음과 갓흔 문답을 하엿섯다.

기자 : 당신도 만주에 와서 게신 일이 잇습니까?
리 : 장자 형직(亨稷)과 차자 형권(亨權)을 따라서 동변도 방면에 와서 갓치 잇다가 형직이가 무송현(撫松縣) 왈량진에서 병사한 후에 형권이를 다리고 안도현(安圖縣)에 이주하엿섯는데 얼마되지 안어서 여러 친구들과 갓치 형권이가 권총을 가지고 함북(咸北) 방면에 나갓다가 검거되어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서 사망되자 손자(孫子)인 성주(誠柱) (現金日成)가 차자와서 이곳에 잇슬곳시 아니니 조선으로 나가라고 강권함에 못이겨서 七년전에 고향으로 도라가서 셋째아들 형록(亨祿)을 다리고 농사하고 잇섯습니다.

기자: 형직 형권 일성 세 사람이 어렷슬 때는 엇더햇습니까?
리: 우리 애들은 모다 재간이 조왓지요 十三세나 十四세에 모다 소학교를 조흔 성적으로 졸업들 햇고 무슨 책이든지 한번만 스쳐보면 기억들 햇스니까요. 그러므로 형직이는 十八세 때에 숭실중학교를 중도 퇴학하고 동변도로 왓스므로 의학(醫學)이라고는 전혀 배우지 안엇스나 약방(藥房)을 시작하고는 의학을 자습하야 의술(醫術)이 용하엿지요.

기자: 「일성의 귀순문제에 대해서는 엇더케 생각하시나요?」

리: 「우리 가정에서는 하루라도 속히 귀순하기만 고대하고 잇습니다. 서로 갈라진지도 이미 七년이 지내엇스니 그 동안 심리가 엇더케 될 것은 모르지요. 작년 여름에 내가 통화에 가서 잇슬 때에 귀순하겟다는 회답을 받고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업는 깃붐에 싸혀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대릿지만 양정우란 놈의 방해로 귀순하지 못하게 되엇지요.」

기자 : 「그러면 한번 차자가서 맛나보실 생각은 업는가요?」

리: 「나로서 차자가서 맛난대야 큰효과가 잇슬 리가 업스니까 갈 필요가 업서요. 다만 맘을 돌리어 속히 귀순하기만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김일성이의 조부 김봉현(金鳳賢)으로부터 최근 모처에 들어온 사신의 一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갓다.

「세계대세나 동아정세의 전환을 아지 못하고 작란을 계속하는 생의 손자 성주(誠柱)로 말미아마 얼마나 염려하심닛가? 미안함을 마지 안습니다. 될수 잇는대로 하루 밧비 귀순하도록 하여주심을 바랄 뿐입니다.」

작년 녀름에 귀순하려다가 양정우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한 김일성은 그 후 一개년을 지낸 이제에 동향은 엇더한 현상에 잇는가?

만주의 비적 가운데 전투를 제一 자조 계속하여 온 적단을 헤이라면 김일성 부대를 누구나 헤일 것이다. 그러나 작년 가을 이래로는 전투를 될수 잇는대로 피하여 왓고, 내지인을 납치하기만 하면 죽이던 부대이엿스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만일 랍치하엿다할지라도 위로하야 돌려보내는 것만 볼지라도 확실히 귀순하려는 맘이 계속되고 잇는 것은 추측할 수 잇는 일이다. (끗) (間島支社 S記者)

주요 내용에 대한 검토 및 평가

  • 이것은 그의 부친과 숙부, 조부모 등 가족의 실명이 나오는 유일한 일제시대 기록이다. 부친 김형직과 숙부 김형권의 이름이 나오는 다른 기록은 더러 있으나 김일성과의 관계는 나오지 않는다.
  • 김일성의 귀순공작이 있던 당시의 기록으로 이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귀순을 결심했다가 양정우의 제지로 실패했다.
  • 2회에 북한 김일성이 만주사변 직전 전사한 유명한 간도의 비수 김일성의 이름을 따라 써서 그를 간도의 유명한 비수로 오인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1931년 만주사변 당시는 북한 김일성은 19세의 소년에 불과하고 유격대에 투신하기도 전이라 당시는 그를 유명한 비수로 오인하는 사람이 있기 어렵다. 또 만주사변 무렵에는 본격적인 항일 유격대가 만들어지기도 전이라 이때 죽은 유명한 김일성도 보이지 않으며, 있기도 어렵다. 이런 말은 아마도 김성주가 지나사변(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11월 13일 사살당한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이름을 따라 쓴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북한 김일성이 그 사건의 주역이 아니기 때문이거나, 보천보 사건 자체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 북한 김일성의 본명을 김성주(金誠柱)로 적고 있다.
  •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이 죽은 때는 위 만선일보(滿鮮日報) 기사에 의하면 1939년 가을이나, 김일성 귀순공작을 주도한 김창영(金昌永, 1890-1967)의 1949년 4월 반민특위 법정 증언에 의하면 1940년 1월이다.[7] 신문기사보다는 김창영의 법정 증언이 더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 2회에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고 하였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마치 심용준과 대단한 친분이 있었고, 그가 은퇴한 후에도 자신을 도와주려한 것처럼 장황하게 써 놓았으나 거짓말로 보인다.[10] 심용준은 김일성이 살해한 고동뢰(高東雷) 소대 10명의 직속 상관 중대장이었으므로 김일성을 원수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11]

김일성 귀순공작 참고 문헌

김일성 주변인물들의 전사와 귀순

김일성의 직속 상관이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는 위 기사가 나오기 직전 1940년 2월 23일 전사한다. 위 기사가 실릴 당시인 4월에는 김일성 부대의 참모장이었던 임수산(林水山, 林守山, 林秀山)이 귀순하고, 그 직후 김일성의 처였던 김혜순(金惠順)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귀순한다. 임수산의 귀순은 1달 뒤 5월에, 김혜순의 체포 및 귀순은 3달 뒤 7월에 보도되었다.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