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사건으로 검거되었을 때의 양일천 기자. 불기소로 풀려났다.

양일천(梁一泉, ? ~ 1946.04.14)은 1930년대 동아일보 기자로 혜산진 지국장(惠山鎭支局長)을 지냈다.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당시 보도기사를 작성했다. 호는 하암(河菴)이다.[1] 해방 후 천도교 청우당(天道敎靑友黨)[2] 중앙위원을 지냈다.[3]

약력

그가 쓴 1930년대 동아일보 기사는 많이 볼 수 있으나,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천도교와 관련된 양일천(梁一泉) 기록에는 혜산진 아닌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 나오지만 한자까지 같은 드문 이름의 동시대인이라 동일인으로 보아도 될 것같다.

  • 1930년 10월 17일자 동아일보 사고(社告)에 혜산진 지국(惠山鎭 支局) 기자로 양천(梁泉)이 취임했다고 나오는데 양일천(梁一泉)으로 보임.[4]
  • 1931년 9~10월 :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 기자로 《장백촌 촌방문(長白村村訪問)》 기사를 22회에 걸쳐 연재.[5]
  • 1932년 2월 15일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장(惠山鎭支局長)에 임명됨[6]
  • 1936년 12월 23일 서울 경운정(慶雲町)에서 열린 천도교 청년당(天道敎靑年黨) 전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됨.[7]
  • 1937년 6월 4일 밤 보천보 사건 발생으로 다수의 관련 보도 기사 작성.
  • 보천보 사건에 연루된 지하조직을 적발, 검거하는 혜산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남.
(혜산사건 구속자들 사진 속에 들어 있으나,[8] 판결문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므로 불기소, 석방된 것으로 보임.)
  • 1938년 3월 1일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장 의원해직(依願解職)[9]
(혜산사건으로 구속된 것이 사임 이유인 듯함.)
  • 1946년 4월 14일 : 천도교 청우당(天道敎靑友黨) 중앙위원 양일천(梁一泉)씨가 오전 11시 서울 팔판정(八判町)[10] 128번지 자택에서 작고.[1][3][11]

양일천이 작성한 김일성 관련 주요 기사

양일천의 기사에 나오는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으로 1937년 11월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북한은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김일성 회고록 등의 내용도 이에 맞추어 조작했다.

그가 작성한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실린 아래 2건의 기사도 김일성과 관련하여 자주 거론된다. 만주 장백현에 살았던 지주 김정부(金鼎富)가 1936년 8월 31일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가서 1937년 3월 3일 구출될 때까지 갇혀있던 중 1936년 12월 6일에 김일성과 직접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이다.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양일천 관련 논란

보천보사건 또는 혜산사건에 연루되었나?

그가 보천보 사건에 연루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혜산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의 사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8]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으므로 불기소 처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38년 3월 1일 동아일보 혜산지국장을 사직한 것은[9] 혜산사건으로 구속된 여파로 보이나, 1938년 11월 잡지 《삼천리(三千里)》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석방되었다.

박인진(朴寅鎭)의 제자인가?

김일성 회고록에는 양일천이 천도교 도정 박인진(朴寅鎭)의 제자라고 나오고[12], 한국의 학계에서도 이 주장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13]

그러나 박인진이 1935년 10월 양일천이 지국장으로 있는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을 방문했다는 아래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두 사람이 사제관계에 있다고 보기 힘들다. (이 기사는 지국장인 양일천 본인이 썼을 가능성이 크다.)

◇고산지대에는 기근의 사태 연사연 흉작(連四年 凶作)의 참화(慘禍)
【헤산】조선에서 제일 높은 군읍인 함남 풍산군(豊山郡)하에는 5만여의 궁민이 연四년의 흉작의 참화를 입어 금후 생도가 막연한 중에 잇다고 한다.
풍산군 읍내에 거주하든 천도교도정(天道敎道正) 박인진(朴寅鎭)씨는 교회용무로 삼수(三水), 갑산(甲山), 풍산(豊山), 삼군(三郡)을 약 1개월간 순회하고 인사차로 지난 26일 헤산 본지국을 내방하였는데 씨(氏)의 담(談)에 의하면 삼군 중에 조상조냉(早霜早冷)으로 특히 풍산군이 우심하다는 바 농작물은 거의 전멸상태로 이인면(里仁面)과 같은 면은 낫을 한번도 대어 보지도 않고 보기에도 앙상하게 서리를 맞어 내어버린 입전초곡(立田草穀)이 간 곳마다 만히 보이엇다고 한다.

제자가 스승이 찾아온 것을 인사차 방문했다고 표현할 수 없고, 스승을 씨(氏)라고 지칭할 리도 없다. 박인진과 양일천은 서로 아는 사이일 수는 있겠으나 사제관계로 보기는 힘들다.

보천보 습격을 사전에 알고 미리 기사를 썼나?

한홍구는 양일천이 김일성파 조직원이었고, 보천보 습격을 사전에 알고 동아일보 기사를 미리 써 놓았다고 주장한다.

서: 보천보 전투를 얘기하죠.

한: 안티조선 사람들이나 친일 문제 다루는 쪽에서는 조선과 동아가 항일 빨치산들을 ‘공비’라고 비하했다고 거품 무는데, 동아의 보천보 전투 기사를 누가 썼지? 김일성파 조직원이 쓴 거야.(웃음)

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죠.

한: 양일천이라고 혜산진 주재 기자가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기사를 써놓은 거야. 동아일보가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정간을 받았다가 신문을 발행한 게 1937년 6월1일인데 보천보 사건이 6월4일이에요. 공비가 쳐들어와서 빨갱이들이 난장판을 만들었다고 신나게 떠들었지. 민중들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단 말이야. 바보가 아니잖아. 엄혹한 상황 속에서 일제가 정해놓은 방화, 공비, 양민학살 같은 용어를 쓸 수밖에 없는 구조였지. 더 나아가 천황 얼굴까지 싣게 된 거고. 그래도 그런 신문이 있는 게 훨씬 좋았고, 그것조차 용납 못하니 폐간을 시킨 거지.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양일천이 혐의를 받아 구속된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불기소로 풀려났으므로 이것이 그가 김일성파 조직원이었다는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조사해보니 혐의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사안이 경미해서 풀려났을 것이다. 혜산사건에는 연루된 천도교 신자가 다수 있었고, 도정 박인진도 연루되었는데, 양일천도 천도교 신자라서 혐의를 받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설사 김일성 조직에 연루되었더라도 핵심 조직원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극도로 보안을 요하는 보천보 습격의 사전 정보가 그에게까지 전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사를 미리 써놓았다는 주장도 근거가 박약하다.

그의 기사가 과연 김일성에 우호적인가?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당시 동아일보가 두 치례나 호외를 간행하며 보도한 때문에 김일성 이름과 보천보 사건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다수이다. 또 양일천이 엄혹한 일제의 검열 아래에서도 나름대로 김일성에 호의적인 기사를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호외는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도 간행했고[15], 다른 신문들의 보도보다 동아일보의 기사가 특별히 김일성에 대해 더 호의적이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

양일천이 쓴 것으로 보이는 동아일보 기사도 김일성을 대단한 인물로 평가했다기 보다는 습격의 피해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루었다. 그의 기사도 다른 신문들의 기사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항일투쟁의 일환이라기보다 비적의 약탈행위로 보고 있다.

그가 쓴 잡지 《삼천리(三千里)》의 기사에는 항일연군에 의한 양민의 피해를 더 자세히 다루며, 김일성에 우호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양일천의 기사에 나오는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도 아니다. 다만 양일천은 김일성의 전사 소식을 알지는 못했던 것같다.

양일천이 쓴 1937년 8월 11일자 기사에는 두달 전의 보천보 습격 사건을 보는 그의 시각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혜산진지국(惠山鎭支局) 양일천(梁一泉)
압록강(鴨綠江)을 옆에 끼고 강(江)건너 만주(滿洲)의 식검흔(시커먼) 산야(山野)를 바라보며 구비구비 곡선(曲線)을 따라 보천보(普天堡)로 왓다. 보천보(普天堡)는 지난 六月 四日 밤에 비적(匪賊)의 피습(被襲)으로 참화(慘禍)를 입은 곳! 소실(燒失)된 면사무소(面事務所)와 우편소(郵便所) 등 잔해(殘骸)가 처참(凄慘)히 바람에 날릴때 일시과객(一時過客)의 마음 속에도 우울(憂鬱)을 느끼지 안할 수없다. 일행(一行)은 농사시험장(農事試驗場)의 진열품(陳列品)을 잠간 본 뒤에 다시 밀림(密林) 속으로 차(車)를 몰았다.

그가 백두산 산림시찰단을 수행하여 보천보를 지나면서 보이는 정경에 대해 쓴 글이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될 감상을 이렇게 적어놓았다는 것은 그가 지난 6월의 보천보 습격사건을 김일성의 영웅적 항일투쟁이 아니라 비적(匪賊)에 의한 참화(慘禍)로 보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이런 감상을 적어놓은 것으로 보아 그가 한홍구의 주장대로 김일성파의 조직원이었을 가능성도 없고, 보천보 습격의 정보를 사전에 알았을 가능성도 없다고 하겠다.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하암 양일천(河菴 梁一泉)씨 자유신문 1946년 04월16일 2면 8단
  2. 천도교 청우당 위키백과
  3. 3.0 3.1 人事往來(인사왕래) 1946.04.16 동아일보 1면
  4. 社告(사고) 1930.10.17 동아일보 3면 좌측 최하단
  5. 長白村村訪問(장백촌촌방문) (一) 1931.09.05 동아일보 6면 / 長白村村訪問(장백촌촌방문) (二十二) 1931.10.14 동아일보 6면
  6. 惠山鎭支局을 變更: 梁一泉 任支局長, 支局長 鄭聲鍾 依願解職 동아일보 1932-02-17 3면 10단
  7. 天道敎靑年黨中央幹部改選(천도교청년당중앙간부개선) 1936.12.27 조선일보 2면
  8. 8.0 8.1 《アルバム 謎の金日成 写真で捉えたその正体》 東アジア問題研究会編 / 編著者 代表 李命英, (成甲書房, 1978年) p.56
  9. 9.0 9.1 惠山鎭支局 : 朱東林 任支局長, 支局長 梁一泉 依願解職 동아일보 1938-04-15 조간 4면 10단
  10. [맛있는 월요일] 오래된 도도함, 팔판동 골목 중앙일보 2014.09.2 / 팔판동 八判洞 - 오래된 역사의 도도함이 지키는 동네 - 매일경제 2019. 10. 2
  11. 人事往來(인사왕래) 1946.04.16 조선일보 1면
  1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5권 (항일 혁명 5편, 1994년 출간) 제13장 백두산으로 6. 애국지주 김정부
  13.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일제 순사가 돼지처럼 꿀꿀” 2001년11월07일 제383호
  14. 한겨레신문 2010년 5월 17일자 33면
  15. 共軍大部隊 越境襲來(공군대부대 월경습래) : 1937-06-06 조선일보 석간(5일 토) 2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