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
기본 정보
본명
성별
남성
출생
1893년 9월 29일
조선 한성부
사망
1978년 8월 6일(84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병역
복무 기간

1915년~1945년(일본제국 육군)
1948년~1949년(대한민국 육군)
1950년~1956년(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 일본제국 육군 대좌
대한민국 육군 소장 지휘 일본제국 제20사단 제78연대 기관총대
일본제국 제20사단 제78연대 대대
대한민국 제1사단
대한민국 수도사단
대한민국 제3사단 주요 참전

만주 사변
중일 전쟁
한국 전쟁

김석원(金錫源, 1893.09.29 ~ 1978.08.06)은 일본육사 제27기 출신으로 일제시대 일본군 대좌(대령)까지 지냈고, 해방 후 국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일제시기에 성남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그후 이사장을 지냈다. 1960년 7월 제5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생애


주요 이력

  • 1936년 원윤수(元胤洙)와 이태원보통학교(梨泰院普通學校) 설립.[1][2][3]
  • 1937년 원윤수(元胤洙)와 용산고보(龍山高普) 설립.[4][5][6] 1938년 성남고보(城南高普)로 개칭.[7][8][9]
(이후 보통학교는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고보)는 중학교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 서울 성남중학교 교장
  • 제5대 민의원(국회의원)
  • 원석학원 이사장
  • 동국대학교 행정학과 초빙교수
  • 인하대학교 행정학과 초빙교수
  • 민주당 국제외교행정특보위원

일본육사 조선인 동창들은 독립지사들 가족 도우기도

전의회(全宜會)는 일본육사 조선인 동창들의 모임이다. 기관지인 전의회보(全宜會報)의 발행인은 1917년까지는 홍사익, 18년이 이응준, 20년에 다시 홍사익으로 돌아가 22년까지 계속되고, 다음이 김석원으로 되어있다.[10] 현존하는 전의회보를 보면 동창들이 성금을 모아서 동창으로 일본군을 이탈하여 조선독립운동에 투신한 김광서(金光瑞, 김현충, 김경천), 지청천(池靑天, 지대형) 등의 가족들을 도운 내역이 나온다.

해방 후와 6.25 전쟁 시기의 활동

▼金錫源氏(김석원씨)(陸海空軍出身(육해공군출신) 同志會長兼訓練部長(동지회장겸훈련부장)) 人事次來社(인사차 래사) ▼安秉範氏(안병범씨)(同副會長兼財務部長(동부회장겸재무부장)) 同上(동상) ▼申泰英氏(신태영씨) (同總務部長(동총무부장)) 同上(동상)
▲金錫源氏(김석원씨)(陸海空軍同志會會長(육해공군동지회회장))▲安秉範氏(안병범씨)(同副會長(동부회장)) 全國大會 終了 人事次 來社(전국대회 종료 인사차 래사)
金錫源(김석원) 대령을 살해목적으로 가든 도중임을 자백하고 공범一(일)명도 체포하였고...
金錫源氏等 襲擊(김석원씨등 습격) 陰謀 連累犯 逮捕(음모 연루범 체포) 1949.01.15 동아일보 2면
【長湍(장단)】김석원대령은 三八(삼팔)선의경비를 시찰하는동시에三八(삼팔)선을사수하는 국방군경을 위문격려하고자 청단까지 출장하였다가 돌아가는도중에...
【第一旅團 司令部 公報隊 十四日 發表(제일여단 사령부 공보대 십사일 발표)】제일여단 김석원(金錫源) 여단장을 살해하고자 북한인민군부대장의 특별지령을 받고 현상금 50만원까지 주기로 약속하고 월남한 인민군 특무장 권인금외 남로당원 수명이 제1여단 정보병에게 체포되었는데...
金錫源(김석원) 任准將(임준장) 補陸軍本部首都師團長(보육군본부수도사단장)
채병덕 소장, 김석원 준장은 예비역에

채병덕 당시 육군 참모총장과 제 1사단장에 취임한 김석원 대령은 소위 명태사건으로 대립하다 둘 다 예편하게 된다.[11][12][13]

명태사건

1949년 1월, 제 1사단장에 취임한 김석원 대령이 남북 교역장에서 이루어지던 교역을 중단시켰던 일로 인해 육군본부와 알력을 빚었던 사건을 가리킨다. 당시 남북 교역장에서는 물물교환 방식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남한측에서는 군수물자들이 매물로 나오는 반면, 북한측의 매물은 명태나 염장 고등어 등이었다는 데 분노한 김석원 사단장이 남북 교역장에서의 교역을 중단시켰다. 이로 인해 육군본부와 김석원 대령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여 대통령에게 출두하게 되었는데, 김석원 대령이 면전에서 항의한 일로 인하여 이승만 전 대통령이 격노하여 그를 제 1사단장직에서 해임하였으며, 채병덕 당시 육군 참모총장도 사임하였다.(주21)

채병덕 소장은 남북교역사건으로 제1사단장 김석원 준장과 충돌한결과 49년 10월 김장군과 함께 예비역에 편입되었었다. 그러나 자신만은 2개월 후 12월 14일자로 현역에 복귀하면서 병기행정본부장에취임하였다.(주22)


(주21) 인터넷 자료. 전쟁기념관 홈페이지(www.warmemo.co.kr)에서 전재.

(주22) 김행복,『한국전쟁의 전쟁지도』, 국방군사연구소, 1999, 110쪽.
교육자대표로서 김석원(金錫源)씨로부터 남북통일은 즉 세계평화를 이룰것이라는 환영사가 있었다

그는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초 수도사단장으로 국군에 복귀하여 참전했지만[14] 국군의 최고 지휘관들이 그 보다 나이도 어리고, 군경력이 후배인데다, 그가 익숙한 일본군의 전술 교리가 미군의 전술과 맞지 않아 별로 중용되지는 못했다. 6.25 전쟁 시기의 활동에 대해서는 아래 기사와 블로그를 참고하라.

壇上壇下(단상단하) 1955.06.20 동아일보 1면
壇上壇下(단상단하) 1955.05.28 동아일보 1면

친일반민족행위 논란

그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고급 장교를 지냈으며, 일본을 위해 전투를 한 것은 사실이므로 친일파라고 부를만하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조선독립군과 전투를 벌인 일은 없으며, 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인들을 교육하는데에도 크게 공헌했으므로 반민족행위자로까지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해방 직후의 반민특위는 그를 반민족행위자로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사 대상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그후로 그는 국군에 참여하여 6.25 전공도 있으므로, 그의 평가에 참작해야 할 공훈이 늘었다고 볼 수 있다.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간행한 친일인명사전[15]에 그를 포함시킨 것은 그럴 수도 있겠으나, 노무현 정권 때 구성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것은[16] 정부가 공식적으로 벌인 일로 상당한 문제가 있다. 정부가 국가 유공자를 표창할 수는 있겠으나, 이미 사망한 개인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일종의 단죄를 하는 행위는 권한 밖의 일이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사법적인 조사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본인의 항변이나 관련자들의 증언도 들을 수 없게 된 사안에 대해서는 정부가 나설 것이 아니라 학계의 연구와 평가에 맡겨야 하며,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도 있는데 정부가 이를 맘대로 규정한 것은 월권이고 사자(死者)에 대한 폭력행사이다.

실재하지 않은 김석원과 김일성의 대결로 한국전쟁사를 왜곡

1937년 6월 30일 간삼봉 전투에서 실제로 대결한 사람은 일본군 김인욱(金仁旭) 소좌와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인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에 전사했다. 북한은 이를 일본군 김석원 소좌와 북한 김일성의 대결로 바꿔치기하여 조작하고, 서대숙도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서대숙의 역사 왜곡은 브루스 커밍스가 이를 인용하여 6.25 전쟁을 국군 김석원 장군과 북한 권력자 김일성의 재대결로 왜곡하여 확대 재생산하는 구실이 되었다.

북한의 역사조작과 남한의 바로잡기 노력

해방 후 최초 주장자는 김일성 본인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해방 직후 평양에 있을 때 조만식의 비서관도 했고, 김일성과 더러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1945년 12월경에 만났을 때 김일성이 자신과 맞서 싸웠던 일본군 지휘관이 김석원이라 했다고 한다.[17] 오영진은 처남 김주익(金周翼)이 간삼봉 전투의 실제 당사자였던 김인욱(金仁旭)의 사위였던 관계로 1940년경 처남으로부터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가 있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자신과 맞서 싸운 상대로 김인욱이 아니라 엉뚱한 김석원을 거론하자 그의 정체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김인욱(金仁旭)은 해방 직전 예편하고, 고향인 평안남도 용강군에 거주하다가 일본군 경력 때문에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소련으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어졌다.

북한도 해방 직후에는 간삼봉 전투 일본측 지휘관이 김인욱이라 밝혀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이 북한에 있을 때인 1947년에 쓴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의 부록에는 혜산사건 판결서를 번역하여 싣고 있는데, 간삼봉 전투와 관련된 부분에는[18] 후일 일본군 지휘관이 김석원이라고 엉터리 주장을 하는 것과 달리 김인욱(金仁旭)으로 바로 되어 있다.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18] p.240 (부록 p.40) - 혜산사건 판결서 번역문 중 간삼봉 전투 관련 부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부대원(部隊員)인 피고인(被告人) 김주현(金周顯)은 소화 12년(昭和 十二年, 1937년) 6월 하순경(六月 下旬頃) 장백현 13도구 오지(長白縣 十三道溝 奧地)에서 김일성 사장(金日成 師長) 이하 약 300명(以下 約三百名)의 대원(隊員)과 가치 이동중(移動中) 함흥 제 74연대( 咸興第七十四聯隊) 육군소좌(陸軍少佐) 김인욱 부대(金仁旭 部隊) 110명(百十名)과 조우(遭遇)하자 이를 전멸(全滅)시킬 목적(目的)으로서 일제사격(一齊射擊)을 하여 상등병 중택 등(上等兵 中澤 等) 5명(五名)을 사살(射殺)하고 하사 이하 7명(下士 以下 七名)에게 총창(銃創)을 입히었다.

북한의 김석원 주장을 이명영이 김인욱으로 바로잡아

북한의 공식 간행물로는 1968년 백봉(白峯)이 쓴 김일성 전기인 『民族의 太陽 金日成將軍』(平壤, 1968)에서 처음으로 김인욱(金仁旭)을 김석원(金錫源)으로 바꾸어 놓았다.

北韓에서는 이 제六師 및 제四師의 연합부대와 金仁旭 少佐부대와의 교전을 金聖柱와 金錫源少佐부대와의 교전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즉 咸興聯隊(七四연대) 소속 金錫源이 金日成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咸興을 떠날 때 그는 壯行會까지 받으며 金日成의 목을 베어오겠다고 했으나 거꾸로 전멸을 당하고 金錫源도 부상을 당했다는 것이 北韓측의 선전이다[42]. 그리고 그 金日成이 金聖柱라는 주장이다. 이 金日成은 제六師長인 것이며 金聖柱가 아닐 뿐 아니라 金錫源은 당시 같은 少佐로서 龍山연대에 속해 있었다. 咸興聯隊에 있은 것은 金仁旭 少佐였다.

北韓에서는 저들의 항일 투쟁사를 날조하기 위해 日帝측 자료를 세심히 참고했는데 그렇다면 왜 金仁旭을 金錫源으로 바꾸어 놓았는가. 당시 제六師 金日成 부대를 공격하러 간 것은 咸興聯隊에 있던 金少佐라고만 알려졌었다. 신문에도 金少佐라고만 보도되었다. 그만큼 金錫源은 알려졌었고 金仁旭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年老한 함경도지방 사람들에게 물으면 普天堡 사건이 나서 金日成 부대를 토벌하러 간 것은 金錫源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北韓에서는 日帝자료로 金仁旭이 토벌에 나갔던 것을 알면서도 민중들이 金錫源인 줄 알고 있으니 저들 주장의 신빙성을 민중의 그릇된 인식에 맞추어 높이기 위해 金仁旭을 金錫源으로 바꾸어 놓음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42] 白峯著 前揭書 [民族의 太陽 金日成將軍(平壤, 1968)] pp.300~351

이후 북한에서 1979년 5월부터 1983년까지 총 33권으로 간행한 『조선전사(朝鮮全史)』[19][20]에도 김인욱을 김석원으로 왜곡해 놓았다.

북한의 최고지도부를 형성한 빨치산 출신의 임춘추, 최현, 김일성등은 모두 김석원이 1937년 6월 (함흥) 간삼봉 전투에서 자신들을 토벌하러 온 김소좌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간삼봉 전투에 출전했던 것은 김석원이 아니라 김석원과 일본육사 27기 동기생인 김인욱이었다.
김소좌를 김석원으로 지목한 것은 1960년대 임춘추였으며, 그 후부터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조선전사』(19권 340쪽) 역시 19사단 함흥 제74연대장 김석원이 간삼봉전투에서 토벌군으로 참가했다가 심한 다리부상을 입었다고 썼다.

김일성 회고록의 왜곡

1995년에 출간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의 간삼봉 전투 관련 내용에는[21]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 김인욱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김석원이 맞다면서 엉뚱한 주장들을 늘어놓고 있다.

김일성 회고록에 나오는 김석원에 대해 언급한 한 구절은 이렇다.[22] 완전한 소설이다.

운명의 조화라고 할가. 우리의 숙적이였던 김석원은 해방후 또다시 38선을 사이에 두고 최현과 대결하였다. 최현은 거기서 경비려단을 지휘하였다. 리승만이 김석원을 38선가까이에 밀어보낸것을 보면 간삼봉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할 기회를 마련해주느라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북으로 의거해온 《국군》사병들의 말에 의하면 김석원은 38선을 지킬 때 공산주의자들을 두고 입에 담지 못할 험담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최현도 그와 맞다들면 혼을 내주려고 별렀다.

전쟁전야에 김석원이 불의에 38선을 넘어 대규모의 기습을 감행한 일이 있었다. 그바람에 송악산에서 싸움이 붙었다. 아마 그는 최현을 혼내우거나 없애치울 작정이였던것 같다. 격노한 최현은 38선을 넘어온 《국군》을 모조리 소멸하고 얼마 안되는 패잔병들을 추격하여 개성까지 따라갔다. 그는 내친 걸음에 서울까지 쫓아가서 김석원을 잡겠다고 하였다.

나는 최현에게 당장 철수하라고 엄하게 명령하였다. 그 사람이 옛날에는 일제놈들의 충견이 되여 싸우러 왔었지만 지금은 미국상전에게 매워있다, 자칫하면 동족끼리 죽일내기를 하게 되고 전면전쟁으로 번져질수도 있다, 김석원도 조선사람이니 언제인가는 자기를 뉘우치게 될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지금은 최현도 김석원도 이 세상에 없다. 그들을 대신하여 오늘은 망국의 설음을 겪어보지 못한 새 세대들이 북과 남에서 총부리를 마주대고 군사분계선을 지키고있다. 나는 북과 남의 모든 새 세대들이 민족의 피줄을 두토막으로 동강낸 인위적인 그 장벽을 하루속히 제거해버리고 자주적인 통일조국에서 화목하게 살기를 바란다. 김석원도 말년에는 이런 념원을 품고있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활동한 저명한 학자들에 의한 한국전쟁사 왜곡

서대숙

서대숙은 1967년에 김일성과 맞섰던 일본군 지휘관이 김인욱 아닌 김석원이라고 잘못된 주장을 내놓았다.

  • Suh, Dae-Sook,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7)
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화다출판사 1985) p.261
[번역본 p.261] 이밖에 김일성이 지도하였던 전투에서도 이와같은 승리가 있었다. 일경 (日警)은 김일성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본육군의 한국인 대좌 (大佐)인 김석원(金錫源, 김석원은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국군을 지휘하였었다)이 인솔했던 일본 육군소속 한국인 특수부대를 파견하였다. 이때, 김일성이 전사하였으리라는 소문이 퍼졌었지만, 오히려 김일성은 동북항일연합군의 대부분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한국 국내로 과감하게 진격하였다고 한다.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국내 깊숙히 진격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몇가지 전투는 중요하며, 이것들에 대한 그의 주장도 실제 확인되고 있다.66) 김일성이 동북항일연합군에 참여하고 있었던 때의 가장 눈부신 전투는 보천보(普天堡)의 전투일 것이다. 김일성이 재만한인 조국광복회의 조직과 그의 갑산·삼수지부를 활용하였던 것은 바로 이 전투에서였다.
66) 김일성 사망의 소문에 대해서는, 外務省, 〈支那及び滿州における共産運動>, 앞의 책, pp. 102~103을 참조.
滿州國軍事顧問部, 《滿州共產匪の硏究, 國內, 治安對策の硏究》 2권 (1937년) pp.271~72.
金錫源과 金日成의 대결에 대해서는 『大阪朝日新聞』 1937년 7월 2일자 신문을 참조.

위 내용에는 오류가 많다. 간삼봉 전투가 벌어진 1937년 6월 30일 당시 김석원의 계급은 대좌(大佐) 아닌 소좌(少佐)였으며, 서울의 용산연대(78연대)에 근무했다. 서대숙이 김일성과 대결한 일본군 지휘관을 김석원으로 본 근거는 『오사카판 아사히 신문(大阪朝日新聞)』 1937년 7월 2일자라고 했다. 그러나 이명영은 당시 지휘관이 김인욱(金仁旭) 소좌라고 하면서 참고문헌으로 같은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1937년 7월 2일자를 들고 있다.[23] 아사히 신문 기사 원문을 구하기 힘들어 내용 확인은 어려우나 김소좌(金少佐) 정도로 나온 것을 서대숙이 김석원(金錫源)으로 오판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그의 계급은 대좌 아닌 소좌라 했어야 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더 큰 문제는 이명영은 보천보 사건간삼봉 전투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반면에 서대숙은 북한 김일성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어왔지만, 과거 문헌들에 대한 DB 구축과 검색을 통해 새로 발굴된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보면 이명영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명확히 밝혀진다. 서대숙의 연구는 오류가 많지만, 미국대학에서 활동한 그의 주장에 대한 맹신이 이명영의 주장을 압도하여 김일성 연구가 길을 잃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만들었다.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는 위의 서대숙의 주장을 인용하며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한국전쟁사를 허위사실로 왜곡하고, 많은 학자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김인욱을 김석원으로 착각한 것은 사소한 실수로도 치부할 수 있겠으나,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존재하지도 않았던 일제시대 김석원 - 김일성의 대립관계를 한국전쟁의 원인으로까지 몰고 간 것은 중대한 역사조작이다. 커밍스의 눈에는 해방 당시 국내에 아무 지지 세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발탁과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집권한 북한 김일성 등 만주 빨치산과 소련군 88여단 출신들이 조선독립을 위한 대단한 투쟁을 한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들은 만주에서 조선독립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을 위해 싸우다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하여 5년간 아무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놀면서 소련이 필요로하는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이다.

커밍스는 해방 직후 북한 주민들의 지지가 압도적이던 조만식을 소련군이 강압적으로 연금하고, 자신들의 말을 잘 들을 수 밖에 없는 앞잡이 지도자로 내세운 김일성이 마치 항일투쟁 공적으로 인민들의 대단한 지지를 받아 지도자가 된 것으로 믿고싶은 듯하다. 그러나 6.25 전쟁은 커밍스의 주장처럼 항일투사 김일성과 일본군 출신 김석원 장군의 재대결이 아니라 소련 앞잡이 김일성과 중공군 등 공산전체주의 세력의 침략에 맞선 자유민주주의 수호 세력간의 전쟁이었다.

더욱 한심한 일은 브루스 커밍스의 역사 조작을 한국 학자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진실인양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오히려 이런 조작을 반기고 있을 지도 모른다.

  • Bruce Cum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vol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
브루스 커밍스 저, 김주환 역, 《한국전쟁의 기원: 해방과 단정의 수립 1945-1947. 上, 下》 (서울 : 靑史, 1986) pp.88~89
[Vol.1 번역판 pp.88~89] 만주의 항일투쟁에 관한 내용 중 특별히 언급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김일성과 여타의 게릴라들은 단지 일본인들만의 표적은 아니었다. 일본인들 이외에도 그들을 추적해서 살해코자 한 한국인들이 있었다. 수 백 명의 한국인들이 보병이나 하급장교, 혹은 적은 숫자였지만 높은 계급을 달고 게릴라 소탕작전에 참가했다. 높은 계급을 단 사람 중 김석원 같은 사람은 일본육군 대좌(大佐)였는데 빌헤름 황제 (Kaiser Wilhelm)처럼 카이제르 콧수염을 기르고 허세를 부리면서 다녔다. 중국전장에서 그는 많은 전과를 올렸기 때문에 1940년대에는 한국청년들을 일본군대에 입대하도록 권유할 때 본받이야 할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했다.132) 김석원은 1937년 김일성과 그의 게릴라 부대를 소탕하기 위하여 배치된 일본군소속 한국인특수부대를 지휘했다. 두 한국 지도자의 대결은 1937년 일본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133) 1950년 한국전쟁이 다가오자 두 사람의 대결은 재연되었다. 당시 한국육군의 사단장이었던 김석원은 “만일 한국군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아침은 원산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한 사람으로 유명했다.134) 그러나 막상 1950년 전쟁이 터졌을 때는 김석원이 예상한 것과 정반대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6.25를 전후한 사소한 내용에만 집착하면 한국전쟁의 기원이 한국내부에 있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놓치게 된다. 전쟁의 기원은 식민지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비유하자면 일본인은 바람을 뿌리고 한국인은 폭풍을 거둬들였다.
132) Se-jin Kim, The Politics of Military Revolution in Korea (Chapel Hill, N.C.: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71), pp.49-50.
133) Suh, Korean Communist Movement, p.287n에는 1937년 7월 2일자 大阪 『朝日新聞』에 나온 두 명의 金日成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다.
I34) Kim, Politics of Military Revolution, p. 50.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는 발언은 김석원이 아니라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가 1949년 7월 17일 대한청년단 훈련장에서 했다.[24][25] 김세진(Se-jin Kim, 金世珍, 1933~1984)[26][27]이 김석원의 말인 것처럼 잘못 인용한 것을 커밍스가 확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다시 인용했다.

커밍스는 김석원이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김일성의 빨치산부대를 추격하며 전투를 했고, 김일성이 그 때문에 김석원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집요하게 주장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1937년 6월 30일의 간삼봉 전투에서 6사장 김일성부대와 전투를 벌인 일본군 지휘관은 김석원이 아니라 그의 일본육사 동기생인 함흥연대(74연대)의 김인욱(金仁旭)이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김석원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김석원은 1937년 6월 당시에는 서울의 용산연대(78연대)에 근무했고,[28] 7월초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지휘관으로 중국 본토에서 국민당 군대와 전투를 벌였을 뿐[29]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이나 김일성부대와 전투를 벌인 일은 전혀 없다. 더구나 간삼봉 전투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는데도, 북한 김일성은 마치 자신인 것처럼 허위 주장을 한다. 그럼에도 커밍스는 한국군에 김석원처럼 김일성 빨치산부대를 쫓던 사람들이 많이 있어 이들을 잡아서 처형하려 하려한 것이 김일성이 남침한 주요 이유 중의 하나인 것처럼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In his radio address shortly after noon on June 25, Kim Il Sung said that forces of the Republic of Korea Army (ROKA) 17th Regiment had attacked on Ongjin to the west of Haeju; according to Koreans who heard the broadcast, he added this aside: "Kim Sok-won, I'm coming to get you, you won't escape me now!"[3]
[3]. Appleman, Naktong/Yalu, p. 21.[30] Prof. Dae-sook Suh told me the story, which may be apocryphal, about Kim threatening Kim Sok-won.

커밍스는 6.25 발발 직후 김일성이 라디오 연설에서 국군이 옹진반도를 공격했다며 "김석원아, 내가 너를 잡으러 간다. 너는 이제 도망가지 못한다."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석에서 이런 말을 서대숙(徐大肅, 1931~2022) 교수로 부터 들었다고 했는데 사실로 볼 수 없다. 김석원은 1948년 12월말 국군 장교로 편입되었으나 9개월 후인 1949년 10월 초 예편하여 6.25 개전 당시에는 민간인 신분이었고, 전선에 있지도 않았는데, 북한이 이를 몰랐을 리도 없다. 그는 1950년 남침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7월초에 다시 국군에 복귀하게 되었을 뿐이다. 결국 김일성의 남침이 김석원을 국군으로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서대숙은 별 근거도 없고, 사실로 보기도 힘든 말을 커밍스에게 전하여 그의 역사왜곡에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동노 외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1) p.299
[번역본 p.299] 대한민국 군에는 처음 6개 사단이 있었으며, 모두 일본에 복무했던 장교들이 지휘했다. 그들 중 가장 화려한 인물은 김석원(金錫源)이었다. 김석원 은 1930년대 말 일본군 내에 '김일성 전담대' 대장으로서 만주벌판에서 김일성을 추적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 카네야마 샤꾸겐으로 알려져 있었 다. 히로히또 천황은 그에게 중일전쟁에서의 '용맹'을 인정하여 공로훈장을 수여했다. 1948년 6월 2일 김석원은 2,500명의 일본군 퇴역군인을 이끌고 서울에서 시가행진을 했는데, 그들의 전시 제복은 닳아 해졌지만 무릎을 꼿꼿이 편 절도 있는 행진은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여기서도 커밍스는 허위사실까지 동원하여 어떻게든 김석원을 깎아내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 Bruce Cumings, 《North Korea, Another Country》, (The New Press, New York, 2004) p.115
브루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김정일 코드 : 브루스 커밍스의 북한》, (따뜻한손, 2005) pp.38~39
김일성의 명성은 일본인들에 의해 높아진 측면도 있다. 그들은 신문을 통해 김일성을 추격해 살해하기 위해 일본이 고용한 한국인 배반자(Quisling. 나치스에 매국행위를 했다는 노르웨이 정치가의 이름)들과 김일성 사이의 갈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 1949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38선에서 한국군을 지휘한 - 김석원(金錫源) 대좌다.

김석원은 제국군대의 "김일성 특별체포대" 책임자인 노조에 쇼토쿠 장군에게 상황을 보고했는데, 가네야마 샤쿠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가 거둔 가장 큰 업적은 1940년 유명한 중국 게릴라 두목이자 김일성의 절친한 동지인 양진규[31]를 살해한 것이다. 같은 해 4월 노조에 군대는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으로 여겨지던 김혜순을 체포하여 숨어 있던 김일성을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다 실패하자, 김혜순을 살해했다.20

20. Kim Se-jin, The Politic of Military Revolution in Korea (Chapel Hill :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73) 48-57쪽. 이승만은 1948년에 권력을 잡은 후 진압 경험이 있는 만주출신 장교를 신임하게 되었다. 1950년대 말까지 이러한 정책을 계속하였다. 그 이유는 여전히 횡행하는 남한의 강도와 아직 남아있는 게릴라를 진압하는데 이들의 활용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커밍스는 김인욱을 김석원으로 바꿔치기하여 그를 비난하는 것도 모자라서 추가적인 조작까지 하고 있다. 1937년 간삼봉 전투에서 일본군 지휘관 김인욱과 맞섰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하고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지만, 1939년~1941년간에 노조에(野副) 토벌대가 추적하던 제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하지만 김석원은 노조에 토벌대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그 부대 산하에 배속된 적도 없다.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는 김석원이 아니라 1938년 6월말 일본군에 투항한 후 이들에 협력한 자신의 부하 1사장 정빈(程斌) 등에게 쫓기다 1940년 2월 사살되었다. 커밍스가 자주 인용한 서대숙도 양정우는 변절한 부하 정빈(程斌)의 안내를 받은 일본 경찰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했지[32] 김석원이 죽였다고 하지는 않았다.

김석원은 또한 노조에 토벌대에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과도 당연히 아무 관계도 없다. 이런 말은 커밍스가 제멋대로 지어낸 허위사실이니 당연히 아무 근거문헌도 제시하지 못했다. 제시된 유일한 근거문헌인 김세진의 책에는[33] 노조에 토벌대나 양정우, 김혜순에 관한 말 어느 것도 나오지 않으며, 커밍스 외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김혜순은 당시 살해된 것이 아니라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었을 때도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 토벌대 사령관의 이름 野副昌德은 "노조에 쇼토쿠"가 아니라 "노조에 마사노리(のぞえ まさのり)"로 읽어야 한다.[34]

커밍스는 또한 위와 유사한 허위 주장을 여러 곳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 Bruce Cumings, 《The Korean War : A History》, The Modern Library, New York. 2010
브루스 커밍스 지음 ; 조행복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서울 : 현실문화, 2017) p.93.
[번역본 p.93] 그러나 김일성은 혼자가 아니었다. 최용건(한국전쟁 발발 당시 민족보위성상)과 김책, 최현 같이 자신의 부대를 가진 조선인 유격대 지도자들 과 함께 일했다. 김일성의 평판은 일본인에 의해서도 부풀려졌다. 일본이 김일성을 추적하여 죽이려고 이용했던 김석원 대좌(당시에는 가네야마 샤쿠겐으로 알려졌다) 같은 조선인 매국노들과 김일성 사이의 싸움이 일본 신문에서 크게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김석원은 일본군의 "김일성 특별 토벌대" 사령관인 노조에 쇼토쿠 장군 밑에서 일했다. 김석원 대좌 는 1940년 2월 저명한 중국인 유격대원이자 김일성의 친한 동지였던 양징위(楊靖宇)를 죽이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4월 노조에의 부대는 김일성의 첫 번째 아내로 추정되는 김혜순을 체포했다. 일본은 그녀를 이용하여 숨어 있는 김일성을 끌어내려 했으나 소용이 없자 살해했다.19

19. Kim Se-jin, The Politics of Military Revolution in Korea (Chapel Hill :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73) pp.48-57.

[원본 pp.149~150] He was not alone, though, working with other Korean guerrilla leaders with their own detachments, such as Choe Yong-gon (minister of defense when the Korean War began), Kim Chaek, and Choe Hyon. Kim’s reputation was also plumped up by the Japanese, whose newspapers featured the conflict between him and the Korean quislings whom the Japanese employed to track him down and kill him, such as Col. Kim Sok-won (then known as Kaneyama Shakugen); he reported to Gen. Nozoe Shotoku, commander of the “Special Kim Detachment” of the Imperial Army. Colonel Kim’s greatest success came in February 1940, when he killed Yang

Jingyu, a famous Chinese guerrilla and close comrade of Kim Il Sung. In April, Nozoe’s forces captured Kim Hye-sun, thought to be Kim’s first wife; the Japanese tried in vain to use her to lure Kim out of hiding, and then murdered her.19

1937년 간삼봉 전투 당시 김석원의 계급은 대좌 아닌 소좌이고, 가네야마 샤쿠겐으로 창씨개명 하기도 전일 뿐더러 김일성 부대와 전투를 벌인 사람은 김석원의 일본육사 동기인 김인욱이다. 당시 신문에는 김인욱과 6사장 김일성의 대결이 보도되었을 뿐 김석원의 이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런(소련) 문서들이 공개되는대로 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침공한 첫번째 주동자는 스탈린이 아닌, 김일성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스탈린에게 지원을 간청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에게 제한된 지원을 허락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면적 침략을 감행했다. 나의 가장 심한 비평가들, 캐서린 위더스비[35]와 같은 사람도 지금은 (나의 견해를) 인정한다. 캐서린은 늘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건 스탈린의 전쟁이다. 스탈린이 단추를 눌렀다’라고. 나는 그런 주장에 내 귀를 닫았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일 리가 없기에. 그리고 지금 판명됐다. 게릴라 전쟁이 아닌, 국지전이 아닌, 전면적 전쟁을 치르기로 한 결정은 김일성이 내린 것이다. 김일성의 목표 중 하나는 남한을 점령해서 김석원과 같은 사람을 붙잡아 그들의 목을 비틀고 그들이 30년대에 저지른 것을 추궁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석원이 김일성의 첫번째 아내 김혜순을 살해했다는 루머가 있다. 나는 김혜순이 그의 첫번째 아내인지, 그리고 이게 사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석원 사이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한국전쟁에 대한) 주장이 옳았다고 본다. 김대중은 ‘김일성이 50년대에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먼저 한국, 그 다음 일본 식의 세계 공산화 전략을 추구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김석원은 그 일과 아무 관련도 없을 뿐더러, 김혜순은 김석원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고,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도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 커밍스의 주장과 달리 일제시대에 김석원은 김일성이나 김혜순과 아무 관계도 없었고, 김석원 같은 사람을 응징하기 위해 김일성이 남침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없는 억지이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될 때부터 남침적화를 공언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실현 불가능했다.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고, 모택동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 공산화에 성공하자 스탈린이 남침을 허용해준 것이다. 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인 것이나, UN 안보리의 UN군 참전 결의안에 소련이 기권한 것이나, 휴전협상을 계속 지연시킨 것 등도 스탈린의 결정이니 6.25 전쟁은 큰 틀에서 스탈린의 세계전략일 뿐 김일성의 전쟁이라는 것도 무리한 주장이다. 스탈린이 일개 소련군 대위에 불과했던 김일성 같은 자를 믿고 그의 주장대로 끌려 다녔을 가능성도 없다. 김일성이 남침을 주장한 목적도 남한적화를 자신의 공로로 만들어 여러 파의 연립으로 취약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지 고작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김석원 같은 사람을 응징하기 위해서일 리가 없다.

북한이나 커밍스가 주장하는 일제시대 김석원과 김일성의 대립관계는 실재하지 않는 꾸며낸 것에 불과한데도, 커밍스가 이러한 것이 남북대립의 주요한 원인이 된 것처럼 여러 곳에서 반복 주장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며, 중대한 역사왜곡이다.

실제로 6사장 김일성과 전투를 벌인 적이 있는 김인욱은 일제말에 예편한 뒤 고향인 평안남도 용강에 거주하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끌려간 후 소식이 끊어졌다.

아래 우남위키 문서들도 참조하라.

김석원에 대한 이야기들

북한측이 간삼봉 전투에서 김일성과 맞선 일본군 지휘관 김소좌를 김인욱 아닌 김석원으로 지목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명확치 않으나, 아래 글에는 1960년대에 김일성의 측근 임춘추가 처음 지목하고, 『조선전사』(19권340쪽)에도 그렇게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6.25 때까지도 북한은 김석원으로 알고 있지 않았다는 말인데, 6.25 이전에도 김일성이 과연 ‘지난날 백두밀림에서 그 놈과 싸우던 우리 동무들이 오늘은 38분계선에서 또 그 놈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말을 했을지 의심스럽다.

간삼봉 전투 당시 일본군 지휘관은 김석원 아닌 김인욱일 뿐더러 맞섰던 동북항일연군 지휘관 2군 6사장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6.25는 엉뚱한 인물들의 실재할 수도 없는 가공의 원한 때문에 발생했다는 주장인가?

      2009 양양의 6·25 비화 : 김석원 장군

    김석원 장군

    김석원 장군(주23)
    김일성 역시 김석원이 간삼봉 전투 시 자신들을 토벌하러 출동했던 함흥연대장이라고 믿고서, 일제의 앞잡이가 이제는 미국의 앞잡이가되어 38분계선 이남에서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격앙되어 있었다. ‘지난날 백두밀림에서 그 놈과 싸우던 우리 동무들이 오늘은 38분계선에서 또 그 놈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김일성의 발언은 당시 남한군 지휘부를 바라보는 북한측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최고지도부를 형성한 빨치산 출신의 임춘추, 최현, 김일성등은 모두 김석원이 1937년 6월 (함흥) 간삼봉 전투에서 자신들을 토벌하러 온 김소좌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간삼봉 전투에 출전했던 것은 김석원이 아니라 김석원과 일본육사 27기 동기생인 김인욱이었다.

    김소좌를 김석원으로 지목한 것은 1960년대 임춘추였으며, 그 후부터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을 반영하는『조선전사』(19권340쪽) 역시 19사단 함흥 제74연대장 김석원이 간삼봉전투에서 토벌군으로 참가했다가 심한 다리부상을 입었다고 썼다. 이미 1974년 이명영이 이를 바로잡았으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북한군 지도부는 친일파 김석원이 이제는 친미파로 변신해 일제시대의 항일유격대 토벌에 이어 대북공격을 시도한다고 생각했다.

    일제시기의 원한과 잔인한 기억, 증오는 해방 후 남북한에 만연한 소문의 진원이 되었다. 심지어 일부 인사들은 김일성이 한국전쟁 당일인 6월 25일 ‘김석원, 내가 너를 잡으러 간다. 이제 너는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라디오방송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할 정도였다.

    일본육사27기 출신인 김석원은 중일전쟁의 산서성 동원전투에서 일본군 2개중대로 중국군 1개 사단을 격파해 유명해진 인물이다. 중일전 출전 당시 소좌였으며, 화북에 출전한 20사단 예하 40여단의 첨병대대장으로 출전해 북경 남하촌 전투에서 분전하였고 2차대전 말기에는 대좌로 진급하여 평양병사구 사령부 제1과장을 담당했다.

    1939년 김석원이 귀국했을 당시 김석원 부대장을 찬양하는 노래가 제작되었고, 이후 그는 1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무용담을 선전했다.

    그에게는 훈3등․공3급․욱3등의 금사훈장이 주어졌다. 김석원은 1940년 대초 일제의 학병 동원에도 적극 관여했을 뿐 아니라 삼부자가 모두 일본군에 복무한 황군가족이었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은 개성지구 1여단(곧 1사단으로 승격)장이 된 김석원의 자질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주한미군군사고문단이 비꼬듯이, 그의 유일한 전술은 반자이(萬歲)전술, 즉 ‘돌격 앞으로!’ 였다. 주한미대사 무초는 이렇게 썼다.

    국방부장관, 한국의 참모들, 미고문관 등 모두 김석원을 반대했다. 그 들은 그를 훌륭한 군인이 아니라 허풍쟁이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구역에 있는 전선에서 북한군을 자극하고 일본식 반자이 공격을 좋아하고 적절한 예비병력을 남겨놓지 않고 아주 위험한 방식으로 전선에 그의 병력을 배치시키는 등의 성향을 지녔다는 점에서 나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들은 특히 그가 사령부를 무시하고 곧장 이대통령에게 달려가는 것에 반대하였다.

    제임스 하우스만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채병덕을 참모총장에서 해임하고 김석원을 임명하려는 것을 자신이 직접 나서 로버츠군사고문단장, 무초 대사를 통해 무산시켰다고 증언했다. 무초 역시 김석원을 총장에 임명하면 한국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것이다. 김석원이 1사단을 임진강 서쪽으로 너무 많이 팽창시킨 탓에 북한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대를 위험한 위치에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49년 5월 월북한 강태무․표무원 부대원들은 김석원을 일제에 충실한 가네야마 대좌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심지어 1949년 10월 그가 현역에서 면직되었을 때 주한미군사고문단은 그의 해임이 한국군에게 이로운 조치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한국군 장성들의 김석원 평가도 엇갈리는데, 채명신은 김석원을 구식이지만 자상한 지휘관으로 평가한 반면, 유원식은 직접 제거를 생각했을 정도로 부하들에게 잔인했던 지휘관으로 기억했다.
    ― (주23) 정병준,『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2006, 249-255쪽 요약.

자서전

참고 자료

각주

  1. 多難(다난)튼 朝陽學院(조양학원) 普通學校(보통학교)로 昇格(승격) 1936.06.05 조선일보 3면
  2. 梨泰院普校에 十一萬圓을 寄附 同校長 元胤洙氏 特志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여운형)) 1936년06월11일 2면 8단
  3. 梨泰院普校 新築工事 開始 元金 兩氏 努力으로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여운형)] 1936년 07월 29일 2면 4단
  4. 中等敎育界 新光芒(중등교육계 신광망) 私財 八十萬圓(사재 팔십만원) 던저 龍山高普(용산고보)를 設立(설립) 1937.08.01 조선일보 2면
  5. 無產夜學(무산야학)을 母胎(모태)로 十年赤誠(십년적성)의 今日(금일) 1937.08.01 동아일보 2면
  6. 사설 : 元胤洙氏(원윤수씨)의 特志(특지) 1937.08.03 동아일보 3면
  7. 龍山高普(용산고보)를 城南高普(성남고보)로 1938.02.05 조선일보 2면
  8. 新春(신춘)맞이 城南高普(성남고보) 今日(금일), 드디어 認可(인가) 1938.03.03 동아일보 2면
  9. 城南中學校(성남중학교) 新築(신축)을 準備(준비) 1938.04.06 조선일보 2면
  10. 일본 육사 동창회 전의회보(全宜會報) 발행인 김석원 금성천의 한국전쟁사 2017/08/30
  11. 2009 양양의 6·25 비화 : 명태사건
  12. 남북교역사건(일명 북어사건)의 이면 금성천의 한국전쟁사(이글루스 블로그)
  13. 40년만에 다시 풀어보는 6ㆍ25의 수수께끼:1 한국일보 1990.06.09
  14. [6·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43) 후퇴 중의 희망, 그러나 떠나는 이들 중앙일보 2010.02.25
  15. 『친일인명사전』1(민족문제연구소,2009)
  16.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현대문화사,2009)
  17. 오영진(1916-1974), 《蘇軍政下의 北韓: 하나의 證言》 1983 (복간본, 초간은 1952년) pp.99~100 :
  18. 18.0 18.1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 民主朝鮮出版社, 1947. 11. 20) p.240
  19. 조선전사(朝鮮全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 [북한의 책] '조선전사' : 총 34권중 19권이 김일성 관련 내용 NK조선 2001-07-06
  2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제17장 "5. 간삼봉전투"
  2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1995년 출간) 제17장 "5. 간삼봉전투"
  23.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 (신문화사, 1974) pp.261~262. : 주석 [41]
  24. 해방 10년의 인물들 (30) 신성모(申性模) 1955.09.05 경향신문 1면
  25. 정치가들의 말은 옳고 곧아야 한다 : 6.25는 쌍방 과실이 아니다 스카이데일리 2019-06-23
  26. 뉴욕한인 이야기/ 역대 뉴욕총영사 중 최고의 인기… 김세진 대사 The Korea Times 2011-11-03
  27. 前商工次官(전상공차관) 金世珍(김세진)씨 별세 1984.09.11 매일경제 11면
  28. 金小佐 時局講演(김소좌 시국강연) 盛况裏(성황리)에 閉會(폐회) 1937.07.15 동아일보 2면
  29. 金少佐(김소좌)의 奮戰(분전) 敵陣突入(적진돌입)·負傷(부상) 1937.08.11 조선일보 2면
  30.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June-November 1950) : pp.21~22 (Washingt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61) : After the North Korean attack was well under way, the P'yongyang radio broadcast at 11:00 an announcement that the North Korean Government had declared war against South Korea as a result of an invasion by South Korean puppet forces ordered by "the bandit traitor Syngman Rhee." The broadcast said the North Korea People's Army had struck back in self-defense and had begun a "righteous invasion." Syngman Rhee, it stated, would be arrested and executed. Shortly after noon, at 13:35, Premier Kim Il Sung, of North Korea, claimed in a radio broadcast that South Korea had rejected every North Korean proposal for peaceful unification, had attacked North Korea that morning in the area of Haeju above the Ongjin Peninsula, and would have to take the consequences of the North Korean counterattacks.
  31. 원문의 Yang Jingyu는 양진규가 아니라 Yang Jingyu(양징위)이며,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의 중국어 발음이다.
  32. 서대숙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25
  33. Kim Se-jin, CNTS-00085606550 The Politic of Military Revolution in Korea (Chapel Hill :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73) 48-57쪽
  34. 野副昌德 (1887~1981) ja.wikipedia
  35. Kathryn Weathersby ICAS (Institute for Corean-American Stud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