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間島特設隊

개요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 또는 간도특설부대는 만주국이 1938년 12월 간도 지역의 조선인 지원병으로 조직하여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800~900여 명 규모의 대대급 부대였다. 1938년 장고봉사건(張鼓峰事件)[1], 1939년 노몬한 사건[2] 등과 같이 소련과의 관계가 긴장되던 시기에 이에 대응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중일전쟁으로 소련 극동지역에 일본의 침입우려가 줄어들어 소련은 유럽쪽에 더 신경을 쏟게되므로 실제로 소련군과 충돌하는 일은 없었다. 주로 동북항일연군, 팔로군중국공산당 산하 부대와 전투를 벌이게 된다.

간도특설대 해설

정안기 박사의 해설중 김일성보천보 사건에 대한 부분은 오류가 많다. 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또한 그는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가짜가 맞다.

간도특설대의 주둔 위치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오늘날 장춘長春)에서 도문(圖們)에 이르는 경도선(京圖線) 철도의 역이 있는 안도현(安圖縣) 명월구(明月溝)에 위치해 있었다.

간도특설대의 조선인 만주군 장교

간도특설부대에서는 김백일(金白一)(중장·51년전사) 金錫範(김석범)(중장예편·해병대사령관) 申鉉俊(신현준)(중장예편·초대해병대사령관) 李龍(이용)(소장예편) 尹春根(윤춘근)(소장예편) 등과 함께 근무했다.
지난 2000년 일본에서 출간된 백선엽 회고록 『若き將軍の朝鮮戦争(젊은 장군의 한국전쟁)』(草思社)에 의하면 그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동부 만주의 파오칭(寶淸)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제28단(단은 연대를 뜻함)에서 견습 사관 생활을 한 후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소위 임관 후 자무스(佳木斯)에 위치한 만주군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간도특설대로 전임된 것은 1943년 2월. 이때부터 8·15 해방 때까지 1년 8개월간 간도특설대에 근무하게 된다. 백선엽과 함께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한국인은 김백일(후에 한국군 중장), 김석범(해병대 사령관),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 이룡(한국군 소장), 윤춘근(한국군 소장) 등이었다.

백선엽 장군이나 김백일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기는 1943년부터인데, 이때는 만주에 어떠한 조선독립군도 없었다. 이분들이 간도특설대에서 조선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북한 김일성이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도주한 것도 1940년 10월이며, 1941년초까지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주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지만 간도특설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국내의 많은 진보성향의 학자들도 박정희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을 입증하기 위하여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조선인 명단을 샅샅이 뒤졌으나 실패한다. 신주백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 조사결과인 「특설부대(特設部隊)」의 내용을 근거로 추가조사를 시도하였으나 박정희의 관련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이다.
설명

3성 치안숙정 공작

일본군과 만주군은 1939년 10월 ~ 1941년 3월 기간에 "길림、간도、통화 3성 치안숙정(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 계획을 수립하고 노조에 마사노리(野副昌德, 1887~1981)[3] 소장의 지휘아래 여러 부대들이 참여하는 노조에 토벌대(野副討伐隊)가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집중 토벌을 벌인다. 이 작전이 끝나는 1941년 3월까지 동북항일연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소수의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주한다.

간도특설대도 이 작전에 참여한 여러 부대 중 하나였다.[4][5]

모택동 휘하 8로군과의 전투

지난 2000년 일본에서 출간된 백선엽 회고록 『若き將軍の朝鮮戦争(젊은 장군의 한국전쟁)』(草思社)에 의하면 그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동부 만주의 파오칭(寶淸)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제28단(단은 연대를 뜻함)에서 견습 사관 생활을 한 후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소위 임관 후 자무스(佳木斯)에 위치한 만주군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간도특설대로 전임된 것은 1943년 2월. 이때부터 8·15 해방 때까지 1년 8개월간 간도특설대에 근무하게 된다. 백선엽과 함께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한국인은 김백일(후에 한국군 중장), 김석범(해병대 사령관),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 이룡(한국군 소장), 윤춘근(한국군 소장)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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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군의 빨치산 토벌대는 만주 벌판을 이 잡듯 뒤져 빨치산을 소탕한 끝에 1941년 3월 19일 토벌 승리 축하연을 개최했다(서대숙 지음·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25~26쪽). 그때까지 생존한 빨치산 500여 명은 소련 영내로 퇴각했기 때문에 이후 만주에 빨치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만주 일대에는 주민을 등쳐먹는 마적이나 비적단만 가끔 출몰했다.

할 일이 없어진 간도특설대는 1943년 12월 러허성(熱河省, 현재의 허베이성, 랴오닝성 및 내몽골 자치구 교차 지역)으로 이동 명령을 받았다. 이 무렵 러허성에서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이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간도특설대는 1944년 1월 15일 러허성 링위안(凌源) 역에 도착, 이때부터 그해 가을까지 주로 핑취안(平泉)현 위슈린쯔(楡樹林子) 일대에서 팔로군을 대상으로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 후에는 미윈(密雲)현 스샤(石匣)진, 허베이성 롼난(灤南)현 쓰지좡(可集庄)진으로 주둔지를 옮겨가며 팔로군과 곳곳에서 접전을 벌였다. 그들은 롼핑(灤平) 이서(以西)의 만군 담당 토벌지구를 전전하며 팔로군을 중심으로 한 항일부대와 전투를 벌였다고 김효순의 『간도특설대』는 기록하고 있다(김효순, 앞의 책, 277~278쪽).

그렇다면 여기서 러허성으로 이동한 간도특설대가 맞서 싸운 대상이 누구였나가 쟁점으로 등장한다. 간도특설대의 적은 팔로군이었다. 팔로군은 신4군과 함께 마오쩌둥(毛澤東) 산하의 주력을 형성한 부대다.

중국공산당은 일본의 중국침략 최대 수혜자

간도특설대가 싸운 부대는 주로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팔로군이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은 일본의 중국침략의 최대 수혜자로, 일본의 침략이 아니었으면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일찌감치 토벌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집단이다. 모택동은 국민당군에 스파이를 심어 군사정보를 빼내어 일본에 비싼 돈을 받고 팔아넘기는 등 뒷통수를 치고 다니며, 항일은 시늉만 내고 공산당의 세력보존에 최대한 힘썼다. 그 덕택에 일본 패망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중국 대륙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1950년대에 모택동은 일본의 침략에 감사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 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과 싸운다는 핑계로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방화, 살인 등을 일삼아 실제로는 마적단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자들과 맞써 싸운 간도특설대 경력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동북항일연군은 1941년 3월경이면 완전히 궤멸되고 소수의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주한다.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로 전속된 1943년에는 만주에는 항일투쟁하는 독립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일성 등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 빨치산이 북한을 차지한 후 6.25 남침전쟁 등으로 동족에게 입힌 피해나,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이 중국민족에게 입힌 피해는 일제 침략에 의한 피해보다 몇 십배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 아무 연고도 없고 지지세력도 없던 김일성 등 조선인 만주빨치산 패잔병들이 북한의 핵심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은 자유시 참변연해주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등으로 조선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하던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후 이들을 데려와 자신들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련의 힘을 빌어 북한 주민들의 주권까지 강탈해서 오늘날과 같은 김일성 일족 세습전제왕조를 만들고, 주민을 자신들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남의 나라 군대의 힘을 빌어 국민의 주권을 강탈해간 이런 자들이야말로 민족반역자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다.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고 먼저 공산화시킨 다음에는 만주에서 벌어진 국공내전의 결전장에서 밀리던 중공군(팔로군)이 북한으로 피난와서 휴식도 취하며 부상자도 치료하고, 물자도 보급받아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중공군은 1948년 5월 부터 10월까지 장춘을 포위 봉쇄하여 아사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최소 12만에서 많게는 약 30만명이 굶어죽는 참상이 벌어졌다. 일제도 이런 짓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같은 중국인이 동족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중공군이 중국을 석권한 후로는 더욱 더 끔찍한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간도특설대가 독립군을 토벌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집권후 중국인 7천만을 죽인 중국공산당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진 자들일 것이다.

일제 패망후 벌어진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승리했더라면 동북항일연군은 만주에 흔했던 마적단 중 하나로 평가받았을 것이고, 팔로군도 별로 다를 바 없다. 팔로군6.25에 참전하여 패망 직전의 김일성 집단을 구출해내어 북한 주민들의 김일성 일족 노예화를 영속시킨 주범으로 민족의 원수일 뿐이다.

논란

오늘날 한국에서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만주군 장교 출신자들에 대한 친일파 마녀 사냥이 극성이다. 그 중에서도 간도특설대에 참여했던 김백일, 백선엽 등에 대해 민족반역자라는 극언까지 서슴치 않는다. 이런 식이면 일제시대에 조선인에게 강도질하다 일본인 경찰과 싸운 자는 항일영웅이고, 그 강도를 조선인 경찰이 잡았다면 민족반역자가 된다.

이러한 주장이 나온데는 연변의 조선족 학자들도 기여했다. 그러나 간도특설대 설치는 당시 간도 53만 조선인들의 숙원사업이었고, 그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요구의 배경에는 만주국내에서 조선인들의 발언권을 높인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간도 조선인들의 후손이 오늘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들이다.

조선족들은 만주가 중국공산당 치하에 들어가니 태도를 돌변하여 동북항일연군 가담자들을 항일영웅 취급하고, 그들을 토벌하는데 일조했던 간도특설대에 참여한 자신들 선조들에게는 민족 반역자라며 침을 뱉고 있다. 당시 간도특설대에는 조선인 지원자가 넘쳐나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발해야할 정도였다는 것이 신문 기사에 다 나와 있다. 지원병으로 선발되면 큰 영예로 여겼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는가? 중국공산당이 끼친 피해는 일제의 피해보다 몇십배나 더 크다는 사실을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일제 패망 후 벌어진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승리했더라면 만주 조선족들은 동북항일연군을 비적 취급하며 이들을 토벌한 간도특설대에 참여했던 자신들 선조들을 영웅이라했을 것이다.

관련 기사

당시 신문 기사에는 "간도특설대"보다는 간도의 "조선인 특설부대"란 명칭이 주로 쓰였다. 당시 간도 조선인들의 특설부대 지원자가 넘쳐나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시 기사 보기

今月十日(금월십일)부터末(말)까지二百八十八名募集(이백팔십팔명모집) 間島省(간도성)의劃期的擧事(획기적거사)

참고 자료

연변 조선족들은 중국공산당의 사관(史觀)을 따라 비적행위를 일삼은 동북항일연군을 대단한 항일투쟁을 한 집단으로 영웅시하고, 자신들 선조들의 요청으로 만주국이 간도의 조선인 지원병을 모집하여 만든 간도특설대를 민족반역자 집단으로 본다. 이런 식이면 일제시대에 조선인에게 강도질하다 일본인 경찰과 싸운 자는 항일영웅이고, 그 강도를 조선인 경찰이 잡았다면 민족반역자가 된다.

각주

  1. 하산 호 전투 - 위키백과
  2. 할힌골 전투 - 위키백과
  3. 노조에 마사노리(野副昌德, 1887~1981) ja.wikipedia
    노조에 마사노리(野副昌德, 1887~1981) World War 2 备忘录(비망록)
  4. 標題:第3 討伐部署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18100、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防衛省防衛研究所)」
  5. 標題:野討冬作命第4号 野副討伐隊命令 1月13日/野討冬作命第4号別冊 100部の内第69号 軍隊区分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50336700、野副討伐隊冬作命綴4/5 昭和16年1月6日~16年3月1日(防衛省防衛研究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