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하루키(和田春樹, わだはるき, 1938년 1월 13일 ~ )는 일본의 역사학자, 사회과학 연구가이다. 원래의 학문적 전공은 러시아 역사이며, 조선사 관련 저작도있다. 도쿄대(東京大) 사회과학연구소 명예교수이다.

북한이나 한국 현대사와 관련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강한 친북 반한적 성격을 띄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와 함께 한국 학계가 좌경화되는데 상당히 크게 기여한 인물이며, 종북좌파 정권하의 한국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약력[1]

  • 1960년 3월 : 도쿄대학(東京大学) 문학부 서양사학과 졸업
  • 1960년 4월 :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조수
  • 1966년 :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강사
  • 1968년 :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조교수
  • 1985년 :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 1996년 4월 ~ 1998년 3월 :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 1998년 3월 : 도쿄대학 퇴임
  • 1998년 5월 : 도쿄대학 명예 교수
  • 2001년 4월 : 토호쿠 대학 동북 아시아 연구 센터 객원 교수
  • 2010년 : 제4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
  • 2019년 8월 : 제23회 만해대상 평화 부문을 수상[2][3]

친북 반한 활동

【동경합동(東京合同)】 일본(日本) 반한단체(反韓團體)의 중심세력을 이루었던 이른바 일한연대연락회의(日韓連帶連絡會議)(대표 青地晨(청지신))가 핵심(核心) 멤버 3명의 이탈로 26일을 기해 사실상 해산했다. 지난 74년 4월 이른바 「반한시민운동(反韓市民運動)」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이 회의는 평론가(評論家) 「아오치」青地晨(청지신))씨를 비롯, 사무국장 「와타」(和田春樹(화전춘수)·동경대조교수(東京大助教授))와 회의기관지 「일한연대(日韓連帶) 뉴우스」의 편집을 맡은 「시미즈」(青水知久(청수지구)·日本女子大學教授(일본여자대학교수))등 3명이 주동이돼 지난 4년동안 반한활동(反韓活動)을 벌여왔었으며 조총련(朝總聯) 조직이 깊이 간여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親北 입장에서 활동해온 그는 아웅산 테러가 북한 소행임을 부정한 적도 있는데, 한국의 언론은 양심가라고 미화.

김일성 미화

한국 학계가 가짜 김일성을 진짜로 둔갑시키는데는 그의 저서들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는 김일성이 만주서 항일활동을 한 것이 사실임을 객관적 자료로로 입증했다면서 따라서 김일성은 진짜가 맞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거 한국 정부 문헌에도 김일성이 만주서 게릴라 활동을 했다고 한 기록이 없지는 않다. 북한 김일성의 진위문제는 그가 항일투쟁을 했느냐 아니냐나, 김일성이란 이름을 실제로 썼는가 아닌가와는 관계가 없다. 그가 1920년 무렵부터 국내에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맞느냐가 핵심인데, 이 문제는 피하고 엉뚱한 주장으로 진짜가 맞다는 결론을 내린다. 좌경화된 한국학계도 이런 식의 주장으로 김일성 진위문제를 호도하여 그가 진짜가 맞다는 엉터리 결론을 내리고 있다.

김성주(북한 김일성) 본인이 어린 시절 부친 김형직으로부터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4] 해방 후 평양에 와서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를 한 것이므로 그가 가짜인 것은 논란할 여지가 없다.

더 큰 문제는 보천보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당시 기록과 증언이 수두룩함에도 불구하고 와다 하루키는 이런 기록들은 외면하고 있어 그의 연구 자체가 정확하지도 않다.

  • 和田春樹,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平凡社, 1992年)
와다 하루키 저 /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08월 31일)
1988년과 91년 연변을 방문해 연변 역사가들을 두루 만났다.
이때 중국공산당 문헌에 수록된 김일성에 대한 기술을 입수해
그가 항일무장 투쟁의 중요한 사람임을 객관적 자료로 입증했다.
백두산도 올랐는데 천지의 모습은 장엄했다.
⊙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중·고등학교 도서관 책꽂이에
⊙ 著者별 분석해 보니 전교조 소속 국어교사가 주축인 ‘전국국어교사모임’이 가장 많아
⊙ 전교조 소속 교사 많은 학교 도서관에는 나라말 출판사 책 多數

그는 김일성을 미화하면서도 반박정희(反朴正煕) 운동을 열심히 하기도 했다.[5] 여느 좌파가 그러하듯 그의 독재에 대한 기준에도 남한만 문제되고, 북한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이중성을 보인다.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의 김일성 진위 관련 부분

위 책에서 김일성의 진위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나온다.

[p.86] 1931년 초 조선혁명군 길강성 지휘부[7]에 속한 부대에 있었던 김성주는 부대가 괴멸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사는 안도로 돌아왔다. 1912년생인 그는 이 해에 19세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54) '만주사변'의 개시와 함께 무장투쟁을 하기로 한 그가 이를 위해 본명 김성주를 숨기고 간도지방에 떠도는 전설상의 영웅인 김일성을 자신의 이름으로 대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55)

54) 1935년 12월 20일 위증민의 보고에 '1931년 입당'이라고 씌어 있다. 또한 「金日成將軍의 略歷」, 「우리의 태양」, 북조선예술총연맹, 평양, 1946, 1면에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라고 씌어 있다. 1958년에 소련의 역사가도 그와 같이 명기하고 있다. V. M. 마주로프, 「조선인민의 반일무장투쟁 (1931~40년)」, 모스끄바, 1958, 48면.

55) 무장부대에 들어갈 때 가족이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변명(變名)으로 등록하는 것은 이 시대 조선인들의 사려있는 태도였다. 최현(崔賢)은 자신의 회상에서 "1931년 적위대에 입대했을 때 나의 이름을 최현으로 등록하였다"라고 쓰고 있다(최현, 「혁명의 길에서(1)」, 평양, 1963, 61면). 30년까지 '金成柱'라는 본명으로 관헌자료에 나타났던 인물이 '金日成'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면 바뀐 시기는 이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金日成'이라는 이름의 전설성(傳說性)에 대해서는 鎌田澤一郞, 『朝鮮新話」, 創元社 1950,[8] 381~85면의 기술이 유명 하지만 자세한 것은 李命英, 「四人の金日成」, 成甲書房 1976, 제1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전설에 있는 이름을 선택했다는 것에서 게릴라전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인정된다. 북조선에서는 오가자지방에 있었을 때 동지가 장래를 기대하여 일성(一星)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그로부터 일성(日成)으로도 쓰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白峯, 「金日成傳」 第1卷, 96면. 이것도 최형우,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제1집, 서울, 1945, 31면의 기술을 근거로 하고 있다.

와다도 김성주가 전설적 영웅인 김일성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차용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유명한 이름을 빌려쓰며 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게릴라전의 지도자로서의 능력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기 어렵고, 그가 김일성 이름을 처음 쓰기 시작한 1931년 무렵은 아직 게릴라 지도자가 되기도 전이다. 해방 후 김성주가 처음 평양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기대하던 것은 일찍 1920년 경부터 이름이 알려졌던 전설적 영웅인 김일성이고, 소련군 진지첸 대위(북한 김일성)는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으므로 불과 33세의 그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자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이 자명하니 가짜라고 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와다는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투쟁한 사람이 맞으므로 진짜라고 주장 한다.

[pp.166~167 : 혜산사건]

이 사건의 취조와 재판과정에서 김일성의 신원도 분명해졌다. 「사상휘보 (思想彙報)』 제20호 (1939년 9월)에 실린 혜산사건의 보고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본명 김성주(金成柱), 당 29세이며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출신으로 어렸을 때 친부모를 따라 간도 방면으로 이주하여 이 지방에서 성인이 되어 비적에 투신한 조선인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현재 그 어머니는 살아 있다는 소식이다.126)

어머니 생존이라는 것이 틀릴 뿐 김일성의 경력은 거의 완전히 파악되기에 이르렀다.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사망했기 때문에, 현재의 김일성과 는 다르다는 주장이 현재까지 여러가지로 나돌고 있지만 이 39년의 관헌보 고의 기술은 그러한 주장에 대한 명확한 반론이 되고 있다.127)
이 보고에서 또 일본관헌은 함경남도 국경지역 정화공작의 성과를 자랑 하고 있다. 사건 후 경찰관을 증원함과 동시에 각 리마다 18세 이상 31세 이하의 청년 전원을 단원으로 하는 국경지방 방공단을 조직하였다. 단의 활동은 수양과 영농을 결합한 것이었다. 이 활동에 따라 제1단계로서 비민(匪民)분리 공작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특히 박달의 체포에 주민의 협력이 있었던 것을 기뻐하고 있다.

종래였다면 당연히 부민(部民)이 그들을 비호하여 도저히 체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종래 남자가 태어나면 그 부모가 “김일성과 같은 위인이 되라"고 기원했다고 하는 이 지방의 인심을 단기간에 그렇게까지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대단한 성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128)

126) 「思想彙報」 第20號, 8~9면.
127) 그러한 주장의 근거 중의 하나는 6사의 여성대원으로 장백현 공작에 파견된 박녹금(朴祿金)을 비롯한 당시 혜산사건 피고들이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이고 36세로 모스끄바공산대학을 나와 만주사변 후에 만주로 온 인물'이라고 말했 다는 당시 사건을 담당한 함경남도 경찰부 경부 이찌하라 간이찌(市原感一)의 1971년의 이야기다. 李命英, 「四人の金日成」,成甲書房 1976, 185~87면. 만약 이 얘기가 진실이었다 해도 함경남도 경찰부가 작성한 사건의 보고에도 그것은 채택되어 있지 않다.[9] 39년에 본문의 인용문에서와 같은 인식이 확립된 것이 41년의 판결문에 '日成 곧 金成柱'라는 표현으로 되었다고 생각된다. 「惠山事件判決書」, 595면. 따라서 박녹금 등이 정말 그렇게 자백했다면 그것은 유격대 대원에게 사령관의 경력이 신비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경찰 상층에 의해서 배척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10]
제시되는 제2의 근거는 해방 후 출옥한 박금철이 김일성의 사진을 보았다거나 만났다고 하여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 출처의 하나는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 있었다는 이기건(李奇建, 당시 내외문제연구소 소장)의 증언이라고 한다. 이명영, 같은 책, 192면. 또 하나의 출처는 남로당간부라고 일컬어지는 박갑동(變名)이다. 그는 그의 저서 [탄식의 조선혁명](「歎きの朝鮮革命」, 三一書房, 1975), 197면에도 간단히 기술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허동찬(許東粲)에게 80년대 전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출옥한 박금철을 자기들이 서울에서 간호하였다. 그는 김일성의 사진을 보고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확인하기 위해서 평양으로 급행하였다. 그는 평양에 머물 수 없게 되어 강계로 가서 평당원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그를 중앙에 발탁한 것은 박헌영이었다. 그것은 1950년이었다."(許東粲, 「金日成 虛像と實像』, 287~88면.) 이 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제7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박금철은 1948년에 열린 북조선노동당 제2차대회에서부터 이송운과 함께 중앙위원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20년간 그는 북조선정치의 정상권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면이 사실에 더 가깝지 않을까?
128) 「思想彙報』 第20號, 40면.

와다는 「사상휘보 (思想彙報)」 제20호 (1939년 9월)에 실린 혜산사건의 보고에 나오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북한 김일성의 신원과 거의 같다는 것을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거의 유일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잘못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래 참고)

지금은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근거자료들이 워낙 많이 발굴되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와다의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또 와다는 해방 후 박금철이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의 사진을 보고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 했다는 박갑동의 증언을 배척하는 근거로 박금철은 강계로 쫓겨갔다 1950년 박헌영이 그를 발탁해올렸다는 말이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박헌영박금철을 발탁했다는 말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박금철이 김일성의 사진을 보고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는 말까지 틀렸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박갑동의 말대로 박금철이 김일성을 만났다 비판과 질책만 받고 강계(江界)로 쫓겨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이기건의 증언에도 동일하게 나오는 말이다.[11] 다만 이기건은 강계로 쫓겨간 박금철을 발탁한 사람은 박헌영 아닌 김일성의 측근인 김일(金一, 1910~1984)이라고 했다. 박금철이 박헌영이 발탁한 인물이라면 김일성이 그를 중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므로, 이기건의 말대로 김일이 발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p.75] 처음 나와 같이 서울에서 平壤에 가서 金日成을 만나서도 옛날 普天堡에서 九死一生으로 逮捕되어 服役하다가 天命으로 多幸히 解放되어 釋放되었는데, 무슨 큰 罪나 진 것처럼 고양이 앞 쥐새끼 模樣으로 풀이 죽어서 悔改와 批判을 받고 겨우 平安道 山골짜기 江界로 定配 模樣으로 가 있었다.

傀儡軍 創設時 겨우 햇빛을 보아 第一師團에서 金一의 部下로 勤務하게 되면서부터 그는 乘勝長驅 出世의 「코-스」를 달렸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延安派와의 對決속에서 宿命의 꽃이 피기 始作한 것이다.

그리하여 金日成一派의 그늘밑에서 顯官大職을 맞이하다가 6.25 南侵時는 서울 侵攻部隊의 政治總責으로 最前方에서 指揮하였다. 그때 階級은 少將이라고 한다.

해방 후 박금철김일성을 찾아갔다 배척당하고 강계(江界)로 쫓겨갔다는 것은 박갑동이기건의 증언이 일치한다. 처음에 박금철이 배척당한 이유는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당사자가 아닌 것이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금철을 발탁해 올린 사람은 김일성의 최대 정적이었던 박헌영이 아니라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던 김일(金一, 1910~1984)이 맞을 것이다.

좌경화된 한국서 양심적 일본 지식인으로 각광받아

그는 2010년 제4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했고, 2019년 8월 제23회 만해대상 평화 부문을 수상했다. 리비아의 카다피에게 불교인권상을 준 불교계가 그에게 만해 평화상을 준 것도 놀랍지는 않다.

그는 최근의 한일갈등에 대해서도 문제의 본질이 한일 청구권 협정을 무시한 한국대법원의 징용문제 판결 때문에 발생한 것임에도 이는 무시하고 일본 아베 정권의 대한정책이 잘못되었다는 비판만 늘어놓아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이라며 한국좌파들과 언론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한반도·일본 미래 토론회'…"아베, 납치문제를 국교정상화 방해에 활용"
교도통신 전 논설위원 "올 8월 징용소송 문제로 한일관계 급격히 악화 가능성"

저서

그의 저서 중 남북한과 관련된 것들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 『韓国民衆をみつめること』(創樹社, 1981年)
  • 『韓国からの問いかけ――ともに求める』(思想の科学社, 1982年)
  • 和田春樹,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平凡社, 1992年)
와다 하루키 저 /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08월 31일)
와다 하루끼 저, 서동만 역, 《한국전쟁》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9)
  • 『北朝鮮――遊撃隊国家の現在』(岩波書店, 1998年)
와다 하루키 지음, 서동만 외 옮김,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돌베개, 2002년 02월 28일)
  • 『朝鮮戦争全史』(岩波書店, 2002年)
  • 『朝鮮有事を望むのか――不審船・拉致疑惑・有事立法を考える』(彩流社, 2002年)
  • 『日本・韓国・北朝鮮――東北アジアに生きる』(青丘文化社, 2003年
  • 『日本と朝鮮の一〇〇年史 これだけは知っておきたい』 (平凡社新書、2010)
  • 『北朝鮮現代史』 (岩波新書、2012)
와다 하루끼 저 / 남기정 역 《와다 하루끼의 북한현대사》, (창비, 2014년 05월 30일)
  • 『慰安婦問題の解決のために アジア女性基金の経験から』平凡社新書 2015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와다 하루키 | 작가 & 작품 - 교보문고
  2. 제23회 만해대상 시상식…와다 하루키 日 교수 만해평화대상 연합뉴스 2019-08-12
  3. '일본의 양심' 와다 하루키 교수, 만해평화상 받았다 2019.08.13
  4. 김영주#이용상(李容相)의 김영주에 대한 회고
  5. 和田春樹 - 일본어 Wikipedia
  6. 和田春樹,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 (平凡社, 1992年)
  7.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 위키백과
  8. 가마다 사와이치로(鎌田澤一郞, 1894-1979), 『조선신화(朝鮮新話)』 (創元社 1950) : 국회도서관 소장
  9. 中國共産黨の朝鮮內抗日人民戰線結成おすび日支事變後方攪亂事件 조선총독부함경남도경찰부 편(朝鮮總督府咸鏡南道警察部 編) (京城 1940 소화 15년) :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 (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257-306 수록.
  10. 함경남도경찰부의 혜산사건보고서에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나와 있지 않다. 김일성은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재판의 피고인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수사 책임자 이찌하라 간이찌의 증언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 않으므로 이는 경찰 상층부에 의해 배척되었다는 주장은 근거없다. 이찌하라는 자신의 증언 내용이 당시 혜산사건 심문조서에 들어 있다고 했으나 심문조서는 북한이 소유하고 있지만 공개하지 않고 있다.
  11. 이기건의 박금철 관련 증언